주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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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읽을 책에 대한 리뷰를 9월에 쓰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책을 다시 뒤적거리면서 리뷰를 쓰게 됐다. 책의 제목인 <주말>처럼 주말 동안 벌어진 일을 어느 4월의 주말에 다 읽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안되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리는 독서였다는 기억이 난다.

 

최근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를 통해 슐링크의 소설집 이야기를 들었고, 올해 4월에 읽은 슐링크의 장편 소설 <주말>을 읽었지만 리뷰를 쓰지 않았다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의 의식을 치르지 않았구나 싶었다. 소설 <주말>은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기술한 어두운 독일 현대사의 후일담이다.

 

어느 주말, 전설적인 독일 적군파 테러리스트 외르크의 석방에 즈음해서 그의 석방을 기념하기 위해 11명의 친구들이 모인다. 그 중에는 외르크와 함께 적군파 활동을 했던 동지들도 있으며, 외르크의 친누나로 이 모임을 주최한 크리스티아네가 중심에 있다. 친구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글 쓰는 교사, 전직 조직원이었다가 전향해서 덴탈랩을 운영하며 성공한 사업가가 된 치과기공사, 저널리스트, 외르크의 구명을 위해 노력한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펼치는 흥미로운 서사를 위한 모든 직업이 동원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외르크는 저널리스트이자 동료였던 헤너가 자신을 밀고했다는 생각을 감방에서 지낸 20년간 품고 있다. 이 설정만으로도 초반에는 서로 회피하지만, 가공할만한 폭발력일 가진 이야기라는 사실을 독자는 짐작하게 된다. 사업가 울리히의 딸인 도를레가 외르크를 유혹하는 해프닝은 서사의 전개에 긴장감을 고조한다. 이젠 혁명 따위가 다 뭐냐, 먹고사니즘이 최고다라는 자본주의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전향자 울리히는 스스로 옹립한 정당성을 웅변한다. 동시대의 동지들은 모두 변신해서 사회의 한 축을 구성하는 일원으로 살고 있지만, 여전히 20년 전 외르크의 이데올로기에 취해 다시 한 번 혁명의 깃발을 치켜 올리기를 기대하는 청년 마르코 한의 등장은 조금 낯설게 다가온다.

 

물론 슐링크가 이 정도로 3일간의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이끌어 가지는 않는다. 배신의 진짜 주인공을 밝히고, 또 외르크의 과거사를 촉발시키는 새로운 등장인물을 투입하면서 이야기는 긴장으로 치닫는다. 외르크를 석방시키는데 공헌을 한 변호사 안드레아스와 열혈청년으로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마르코 한의 대립은 소설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한편, 주변에서는 자신의 진로를 두고 옥신각신하지만 정작 외르크 자신이 꿈꾸는 삶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담장 밖의 평범한 삶을 원하지 않았을까? 긴 투옥 끝에 그가 기대한 건, 소설에 나오는 그런 갈등이 아니었으리라. 우리는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슐링크가 이 소설을 통해 던지는 질문의 파문은 은근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다양한 군상이 등장하는 <주말>을 통해 슐링크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독일 전전세대와 전후세대의 갈등에서 시작된 대립과 단절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W.G. 제발트가 <공중전과 문학>에서도 말했듯이, 비참했던 과거를 집단의 기억에서 배제하고, 조국재건이라는 테제 아래 매진했던 기성세대의 허위와 위선을 공격했던 적군파 집단은 극한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점차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그들의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그들의 투쟁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던 다수 대중에게 외면 받은 운동은 결국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문제는 자신들이 옳았다고 생각했던 전후세대도 시간이 지나 아버지 세대가 되면서 반복되는 대립과 단절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슐링크의 지적이다. 전전세대를 나치 노인네라고 부르며 살인자라고 비난했지만, 전후세대의 대표 주자인 외르크 역시 4명의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고 24년형을 살지 않았느냐는 페르디난트의 비난이야말로 소설 <주말>의 핵심이다.

 

물론 슐링크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제시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에게 당면한 과제인 지하실에 고인 물을 파내는 협업으로 일촉즉발에 대한 갈등을 미봉하고 마무리하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방식이야말로 그들에게 최고의 해결책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고 그 시절의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점이 되면 옳고 그름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해결책이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머지 판단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주관에 따른 것일 테니까.

 

슐링크가 이 시대 마지막 테러리스트의 삶을 통해 던지는 여러 질문은 깊은 잔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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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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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20년 지기 대학 동창들을 만났다. 오늘 아침에도 회사 동료와 말했지만 오랜 친구들과의 어떤 일들은 그렇게 시간이 오래 됐는데도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가 하면, 불과 며칠 전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제임스 설터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참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전혀 모르는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름 책 좀 읽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문학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게 아는 것 이상이구나 싶다. 지지난달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에서 다시 한 번 제임스 설터의 이름을 듣고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그의 작품 <어젯밤>을 구입해서 천천히 아주 느린 속도로 읽기 시작했다. 모두 10편의 단편이 실린 그의 소설집 <어젯밤>은 확실히 특이한 소설이다.

 

이 책의 역자 박상미 씨는 배신을 이 책의 코드로 뽑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수긍이 갔다. 하지만 내가 고른 이 책의 코드는 배신보다는 기억이라고 말하고 싶다. 왕년에 군인이었던 작가 제임스 설터는 자신이 경험한 동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군인이라면 누구나 죽어서 묻히고 싶어하는 알링턴 국립묘지(아마 우리나라도 치면 현충원이겠다)에 갈 수 없는 어느 군인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들려준다. 그는 어떤 일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되었지만, 그에게 더 소중한 것은 야나와 함께 보낸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라면, 그 군인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한 때 군인이었던 작가는 가치와 추억을 동일선상에 두고 독자는 어떤가라고 조용하게 묻는다.

 

제임스 설터의 단편은 묘하게 과거의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현재에 대입하며, 끊임없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플라자 호텔>이 그 대표 중의 하나다. 월 스트리트에서 성공한 중년의 아서는 어느 날 예전에 사랑하던 여인 노린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그 시절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여인의 추억은 스멀거리는 욕망을 주술처럼 불러낸다. 전화 받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일이라는 아서와 노린과의 대화는 묘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게다가 노린은 남편과 헤어져 돌아왔단다. 아주 평범한 그들의 대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많은 것들을 함축한다. 한 때, 여자 때문에 유대교 계율을 어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남자. 결혼하기 전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남자는 물러선다. 그리고 다시 재회하게 된 남자는 그녀에게서 세월의 흔적을 보고 다시 한 번 뒤로 물러선다. ,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쩔 텐가 하고, 또다시 묻는다. 제임스 설터의 단편은 그의 글을 소비하는 독자의 자아에 대한 끝없는 질문의 연속이다.

 

기억만큼이나 배신도 <어젯밤>을 지배하는 알고리즘의 하나다. <포기>에서는 겉보기에 아내와 지극히 평범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남자의 이율배반적인 배신을 적확하게 지적한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게다가 이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하니 더욱 기가 찰 노릇이다. 예술가들의 행위는 보통의 도덕률마저도 뛰어넘는다는 말인가. 여기서 포기는 어떤 포기를 말하는가? 남편에 대한 아내의 포기인가? 아니면 내 인생의 절반을 포기하는 남자의 심정인가? 이 포기에 대한 시간적 배경 또한 공교롭게도 어젯밤이다.

 

<귀고리> 역시 마찬가지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금기는 모두 깨지기 마련이고, 해서는 안되는 행위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치르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것이 비극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두 가지를 모두 다 가지고 싶어 하는 남자에게 선택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유복한 가정생활 그리고 정부(너무 평범한 어휘일까)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 브라이언은 자신의 애인 패밀라가 자신의 장인과 어떤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만 질투심에 사로 잡힌다. 여기서도 보통 사람이 가지게 될 흔한 도덕은 실종된다. 자신도 그 순간, 매력적인 패밀라에게 차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관계는 중첩된다. 그 중첩되는 관계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결과에 대해 만족감을 누릴 수도 반대로 비탄에 빠질 수도 있다. 자신의 선택에 당신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다시 제임스 설터는 묻는다.

 

왜 작가가 표제작이자 마지막 이야기 <어젯밤>을 말미에 배치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어젯밤>은 배신의 코드에 적합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궁에서 시작되어 전신으로 퍼져 가는 병을 매조지하기 위해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는 아내와 남편.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낸 다음을 대비하기 위해 부부가 알고 지내는 친구 수잔나를 초대한다. 죽음에의 초대. 이 초대는 두 여자 모두에게 끔찍하기 짝이 없는 초대다. 그 죽음을 실행해야 하는 남편 월터는 더하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남편은 생전 마셔 보지 못한 575달러 슈발 블랑을 주문한다. 그는 35달러가 넘는 와인을 시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죽음 앞에서는 비용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비싼 마지막 와인을 수잔나에게 따라줬다는 사실이다. 이쯤되면 독자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죽음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독자의 이성은 무장해제당했다. 그 다음 전개는 죽음의 실행, 배신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다. 도대체 당신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대 독서의 강렬한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가? 그렇다면 제임스 설터를 읽을지어다. 수잔 손택의 비평을 빌리지 않더라도, 제임스 설터의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첫 경험이 이럴진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가벼운 나날>(1975)은 또 어떨까. 단언컨대 2013년 최고의 독서 체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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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허풍담 2 - 북극의 사파리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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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 외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북극의 오지에서 16년을 산다고 가정해 보자. 게다가 그곳은 하루종일 해가지지 않거나 반대로 하루종일 해가 안 뜨는 적도 많지 않은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곳을 동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건 아닐 것이다. 속세의 번뇌를 피하고자, 악다구니 써야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어쩌면 그곳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천국이 아닐까.

 

덴마크 출신의 작가 요른 릴은 이런 오지 그린란드에서 자그마치 16년이나 살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분명 남들이 보지 못한, 하지 못한 일들을 숱하게 체험했을 것이다. 여기에 글을 쓰겠다는 욕망만 더해지면, 정말 대단한 작품이 나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요른 릴은 극 중에서 명백하게 자신의 페르소나인 안톤 페데르센으로 분해서 자신의 동료 사냥꾼들과 그린란드 북동부의 오지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제 막 시험을 치른 안톤은 꿈꿔오던 북극의 영웅이 되고자 조국 덴마크를 떠나 바다표범 사냥선인 베슬 마리호를 타고 그린란드에 도착한다. 물론 처음에는 이것 저것 배울 것이 많아 고달픈 시절을 보내기도 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과 별 볼 일 없는 북극 생활에 염증을 내기 시작한다. 그러던 차에 중대한 결심(?)을 한 안톤에게 한 마리의 눈멧새가 찾아 오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마치 의상대사가 해골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듯이, 우리의 안톤도 그런 유심론에 도달하게 된다.

 

북극 사나이들의 허풍은 그야말로 끝이 없다. 얼치기 사냥꾼 시워츠는 자기를 밥으로 생각하고 공격해오는 흰곰의 습격을 받고 스트립쇼를 해대며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다. 하지만 엉겁결에 그만 은신처로 사냥총을 가져 오지 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그렇다고 마냥 절벽 빌라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어 부지깽이와 손도끼를 무장하고 사냥총을 회수하러 나섰다가 흰곰과 마주치는 봉변을 당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흰곰 못지 않은 짐승같은 포효로 위기를 모면하는 시워츠. 얼치기 사냥꾼보다 한수 위인 흰곰은 자기 고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빌라의 지붕에 올라가 사냥감을 엿본다. 시워츠는 이 위기를 실수 한 방으로 멋지게 해결한다. 그야말로 잊지 못할 신의 한수 같은 허풍이다.

 

배는 부서지고 엉뚱하게 빙산에 올라 바다표범을 잡아먹으며 며칠을 여행한 끝에 구조되는 이야기,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여인인 엠마를 거래하며 기나긴 겨울을 보내는 사냥꾼들의 터무니없는 허풍까지 북극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하나 같이 금시초문이다. 문제는 요른 릴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그 허풍이 재밌다는 점이다. 게다가 어느 정도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진실성도 담보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북극에 가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북극 허풍담> 두 번째 인스톨에서 압권은 역시 부제인 <북극의 사파리>였다. 영국에서 오신 저명한 숙녀의 요구대로 북극 사향소를 잡기 위해 동원된 안톤과 그의 동료 원주민. 그들은 행여라도 숙녀의 심기에 불편함을 끼쳐 드릴까봐 고약한 냄새로 얼룩진 자신의 오두막을 청소하고 난리법석을 떨지만, 고명하신 레이디는 북극 사냥을 원한다. 그들처럼 오로지 방한을 위해 되는 대로 걸치고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욕조까지 동원한 사파리 팀이 구성된다. 한편 돈 밖에 모르는 올슨 선장은 북극의 원주민들에게 협잡을 부리려다가 걸려 옴팡지게 댓가를 치른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도 생각지 못한 모자와 고기 요리도 맛보게 되는 장면을 상상하면 정말 유쾌해진다. 그런 그들을 끝까지 북극에 사는 원주민이라고 생각하는 숙녀의 착각은 정말 일품이었다.

 

요른 릴은 허풍이라는 유머를 밑밥으로 해서, 우리가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세계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북극의 사냥꾼들의 모습에서 어떤 감흥이 드는가? 단순하게 우리와 다른 이들의 삶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 즐겁고 재밌는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글은 인류사적 측면에서 내가 체험해 보지 못한 다른 공간에 삶에 대한 진실한 르포르타주의 방식으로 삶의 본질을 관통한다. 작가의 그런 정신과 공명하게 된다면, <북극 허풍담>은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일 것이다.

 

<북극 허풍 시리즈>는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일단 1권에서 3권까지 세 권이 나왔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치 않은가 보다. 이 책의 편집을 맡은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나머지 7권을 출간시키기 위해 사장님에게 출간 압박용 메일을 보내란다. 친절하게도 그 주소는 책의 맨 마지막 장에 뚜렷하게 인쇄되어 있다. 먼저 두 번째 인스톨을 읽고, 지금은 첫 번째 인스톨을 읽고 있는데 목하 사장님에게 이메일을 써야 하나 고민 중이다. 이 시리즈를 계속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여전히 읽어야할 다른 책들이 많으니 어찌 하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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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2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2
박정호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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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이미 인문학의 위기가 이미 상시화된지 오래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문 및 어문학계열 학과들이 퇴출 위기에 몰렸다는 뉴스 기사는 이제 식상할 정도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사회 전반에 인문학 열풍이다. 최근 출간되는 책의 제목들에도 힐링과 인문이 대세다. KDI 전문연구원이자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의 저자 박정호 씨도 이 추세에 착안해서 인문학을 통한 기초 경제 원리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겉으로 보기에 경제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도 알고 보면 경제 원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더라는 결론이 무척이나 명쾌하다. 그리고 재밌기까지 하니 일석이조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꽃을 피웠다는 대중문학의 전개에 가장 먼저 관심이 갔다. 우선 문학을 소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결조건이 필요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책을 읽기에 필요한 여가 시간. 고된 산업화 현장에서 후자는 불가능한 조건이지 않았을까? 가사노동자라는 직업군이 성장하면서, 문학의 수요층이 그야말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상류층이나 중산층이 즐겨 보던 고가의 장정본이 아닌 염가서적과 유명작가에게 많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자극적인 내용이 담긴 대중문학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과거에는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던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은 서로 크로스오버되면서 그 경계가 희미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수요를 바탕으로 한 시장원리가 가치관과 문화적 행태의 차이마저 뛰어넘을 수 있었다는 분석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요즘은 탄산음료의 위해성이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탄산음료의 제왕 코카콜라를 마시는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코카콜라 소비자들은 한 때 코카콜라가 모르핀을 대체하는 최음제 성격의 음료수이자 약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마시는 코카콜라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 채(7X으로 알려진 코카콜라 제조의 비밀 성) 마셔왔다면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까. 세계 최고의 브랜드인 코카콜라가 모든 음식과 상황에 맞는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마케팅 전략으로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수요를 창출해왔다. 패스트푸드 햄버거집에서 코카콜라 없이 무언가를 먹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박리다매 전략으로 무지막지한 물량공세를 펼치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코카콜라가 몸에 안 좋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익숙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별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깨달아야 할 시간이다.

 

얼마 전 대형 극장 체인이 영화관 입장료를 올린다는 소식에 분개했다. 아니 입장료를 올린지 얼마나 됐다고 또? 게다가 극장 입장료 수익보다 극장에서 파는 팝콘 장사로 돈을 더 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그래서 저자는 극장 수입의 디테일을 분석한다. 사실 극장에 올리는 영화 제작사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 세금과 극장 유지를 위해 극장 측이 지불하는 고정비용을 감안할 때, 영화 상영으로는 수중에 들어오는 수입이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팝콘 판매 수입은 온전하게 극장이 가져간다. 게다가 팝콘 제작비의 원가는 10%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익을 증대하기 위해서는 극장입장료를 올릴 것이 아니라, 팝콘 값을 올리는 게 수익증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나야 뭐 이제 더 이상 극장에서 팝콘을 사먹지 않으니 절대 찬성이다.

 

미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커피 역시 원래는 그들의 주요 식음료가 아니었다고 한다. 본국인 영국 사람들처럼 차를 즐겨 마시던 미국 사람들은 영국이 미국 식민지 지배를 위해 차에 대한 관세를 올리자 이에 대항해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고, 본국에 저항하기 위해 대체 식음료로 커피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미국 특유의 패스트푸드 문화에 커피를 접목시키면서 거실에 우아하게 앉아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고 마실 수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야말로 바쁜 일상의 속도전을 소화해내야 하는 미국 문화에 안성맞춤이었다는 지적이다. 세금이 정치적 격변을 불러일으키고, 한 나라의 식문화까지 바꿀 수 있다는 기초 경제 원리의 적용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식량은 세계 공략에 있어 단순한 자원으로 인식한 나라 영국과 다양한 식재료를 바탕으로 현재까지도 풍부한 요리 레시피를 가진 요리 강국으로 발전한 프랑스 간의 차이 분석도 예사롭지 않다. 그저 맛없는 영국 요리,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프랑스 요리의 차이가 역사와 경제 원리에 입각한 사례라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으로 기억되는 미국의 남북전쟁 역시 단순히 외국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독립 이래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고 있던 북부와 남부의 경제차이로 인한 무력충돌이었고, 링컨에게 최우선 순위는 노예해방이 아니라 연방제 결속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에게 위대한 음악적 문화유산을 남겨준 모차르트도 유효수요 판단을 잘못해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는 사실도 눈여겨 볼만하다. 문학이나 미술과 달리,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페라하우스 같은 공간은 귀족 같은 특권계층에게만 허용이 되어 있던 시기에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모차르트가 작곡한 귀족을 풍자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표현한 오페라의 수요계층은 없었다. 1회성의 불투명한 클래식 공연이 지나치게 과다한 비용으로 책정되는 것에 대해서는 저자는 경제학자다운 진단을 내린다. 지속되지 않는 그리고 그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 연주를 그렇듯하게 포장해서 비싼 가격에 시장에 내놓은 종합 서비스 상품의 본질을 예리하게 분석해내는 저자의 능력이 역시 탁월하다.

 

그저 놀랍다. 어려운 기초 경제원리들이 우리 삶의 곳곳에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포진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 인문, 사회, 역사 그리고 문화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는 경제원리의 엑기스를 저자 박정호 씨는 인상적으로 다뤄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야 그저 이런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보며 숨차게 따라갈 수밖에. 그리고 이렇게나마 시대의 화두가 된 소통과 통섭의 장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으로 위로를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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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Story - 역사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이야기
닉 테일러 지음, 엄연수 옮김 / 글과생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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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으로 <히즈스토리>의 저자 닉 테일러에 대해 검색해 봤다. 먼저 오래전 인기를 끌던 영국 출신의 팝그룹 듀란 듀란의 멤버가 저자로 변신했나 싶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물론 아니다. 유사 이래 남성들과 남성성에 의해 제거된 여성성의 부활과 균형을 주장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히즈스토리>를 읽고 저자가 여자가 아닐까 하는 나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외모로만 볼 적에 그는 상남자처럼 생겼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신으로 주류 언론에 기고를 해온 저널리스트이자 교사 그리고 에너지 힐러라는 그의 경력이 눈길을 끌었다. 맨 마지막의 에너지 힐러는 무슨 일을 하는 직업군일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닉 테일러는 남성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과정을 검토하는 것으로 그들의 이야기인 <히즈스토리>를 시작한다. 농업생산과 그에 따른 필수적인 잉여생산을 지배 관리하게 된 남성은 인류사에서 꼭 필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인 문자 체계마저 주도적으로 행사하면서 비로소 여성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훗날 개발된 독신 남성 유일신 시스템(종교)은 남성이 왜 여성을 비롯한 세계를 지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념 체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유일신 종교가 표방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가치 체계는 그리스 고전철학의 거두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와 사유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득권층의 비전의 무기가 되었노라고 저자 닉 테일러는 증언한다. 남성이 오른쪽의 정의라면, 유일신 종교가 나타나기 전에 자유롭게 왼쪽을 맡았던 여성은 자연스레 부정적이며 악당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말이다. 종교가 그랬다는 건 그나마 이해가 된다.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도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게 되면서, 그 역할은 바뀌지 않았다.

 

결속과 화합을 강조하는 종교는 앞장서서 권력 추구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분열과 분리를 조장해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 결과, 지구별과 함께 해서 살아온 인류 5,000년 역사는 그 어느 때보다 피폐해져 있다. 근면을 바탕으로 한 노동 윤리에 방점을 찍은 종교는 무위의 즐거움을 인간으로부터 박탈해 버렸다.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처럼 그렇게 인간은 별 가치 없는 것들의 무한소비를 위해 노동하는 존재가 되었다. 요한 하위징아의 대표작 <호모 루덴스>가 연상되는 놀이하고 유희를 즐기는 인간에 대한 고찰 역시 인상적이다. 인류의 존재 이유가 그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톱니바퀴 같은 부속품이 아니라는 저자의 저술이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며칠 전에 본 다큐멘터리에서도 인류의 진화가 현대의 식습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비만과 당뇨 같은 질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것이 그 진단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구석시 식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핵심이었다.

 

한편 닉 테일러는 무엇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균형에 중요성을 강조한다. 01이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에서 여전히 1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지만,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0의 역할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이라는 것이 <히즈스토리>가 다루는 핵심이다. 문득 어떻게 해서 남성인 저자가 우리가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여성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런 이론적 귀결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닉 테일러가 쓴 대안 역사 에세이의 깨알 같은 또 다른 재미는 디테일에 있다. 저명한 영국의 정치지도자 윈스턴 처칠이 아돌프 히틀러 못지않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지적이 눈에 들어온다. 그가 역사상 최악의 제국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히틀러 같은 인종차별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뿐이지 사고방식은 희대의 독재자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레미 벤담이 주장한 원형감옥 팬옵티콘의 모습이 우리가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인 아파트 거주습관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도 특이할만하다. 스스로 감옥살이를 하지 못해 안달하는 우리의 모습을 공리주의 철학자가 보았다면 뭐라고 말할지 참 궁금하다.

 

닉 테일러는 <히즈스토리>를 통해 암울하기 짝이 없는 지구별의 현재 상태를 진단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비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상태에서도 여전히 희망이 그 바닥에 남아 있던 것처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자유의지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무기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지구별의 모든 존재가 조화롭고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노력할 것을 주문한다. 물론 모든 선한 의지가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이야기하고 노력한다면 그 결과는 거대해질 수 있다는 것이 닉 테일러가 <히즈스토리>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일 것이다. 과연 에너지 힐러다운 멋진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거대할 수 있는 담론을 보통 사람도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들려준 <히즈스토리>가 참 반가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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