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라 문서
파울로 코엘료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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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들어가는 말을 읽으며 바로 떠오르는 책이 하나 있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그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 중세에 어느 수도사가 남겼다는 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스토리텔링이 파울로 코엘료의 <아크라 문서>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적당한 사실(나그함마디 문서)에 배합되어 양조된 작가만의 이야기가 노도와 같이 들이닥친 프랑크 십자군의 공격 앞에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운명에 처한 성도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현자로 추앙하는 콥트인과의 질의응답으로 현현된다.

 

개인적으로 나와 파울로 코엘료의 서술 양태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고, 이번 <아크라 문서>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됐다. 사실 이번 <아크라 문서>를 읽기 전에 나의 기대는 십자군 원정과 관련된 어떤 역사적 사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당시 함락을 목전에 둔 예루살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코엘료는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현세를 사는 이들이 원하는 대답이 아닌, 아포리즘으로 가득한 은둔자의 현답이 중심을 이룬다. 그것은 마치 동양의 고승들의 선문답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대개의 독자가 이미 아는 답이 아니었던가.

 

각각의 다른 의미를 가진 성도 예루살렘 거주민을 대표하는 랍비, 이맘 그리고 사제가 모여 아테네 출신 콥트인에게 묻는다. 바로 내일이면 성도에 들이닥쳐 마구잡이 학살을 일삼을 대적을 앞에 두고 어찌 패배, 고독 그리고 고독과 짝을 이룬다는 사랑, 아름다움 그리고 섹스에 대해 이렇게 무사태평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철학관이 시대를 앞서 투영된 느낌이랄까.

 

고대 기독교의 그노시즘(영지주의)을 떠올리게 하는 코엘료의 신비주의는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실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회피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책의 초반부터 콥트인이 굳게 믿는다는 모이라(미지의 신, 신성한 힘)에 대한 언급은 정확하게 그노시즘의 정수를 관통한다. 불가지론과 영지주의를 오가며 현란한 수사를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코엘료는 콥트인의 입을 빌려 사랑에 대해서도 논한다. 사랑을 신의 영역으로 그리고 고독은 인간의 영역으로 나누면서, 존재하지 않는 내면의 공허가 고독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무관심이 부유하는 세상에서 노인들은 비로소 자신이 호되게 배운 삶의 지식 혹은 진실을 젊은이들과 공유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누굴 원망할 것인가? 세상은 변화시키겠다고 종교에 귀의해서 신자, 전도사 그리고 광신자의 길을 걷는 이들에 대해서도 조심할 것을 권유한다. 세상만물은 제각각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virtue)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그렇다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악(evil)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 코엘료의 서술대로라면 히틀러와 홀로코스트도 역시 그 존재의 이유가 설명된단 말인가.

 

상인의 아내가 던진 섹스에 대한 질문도 흥미롭다. 난 질문 자체보다 누가 그 질문을 했는가가 더 궁금하다. 왜 하필이면 상인의 아내일까? 나그네의 아내도 있을 것이고, 내일이면 전장에서 피를 흩뿌릴 전사의 아내도 있을 것인데 말이다. 성에 대한 일반론은 차치하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신성한 힘이 내게는 허무맹랑하게만 들린다. 그는 이 신성한 힘을 독자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모이라라는 게 있다. 세상 만물의 운행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이라의 질서와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한다면 동의할 수 있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코엘료가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공동체와 단순함 그리고 매일매일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수긍할만하다. 공동체 구성원의 한계, 두려움과 편견의 고리를 공격해서 표준화된 행동과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그는 지적한다. 올바른 지적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 바로 이런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다. 멀리갈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사건사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세태를 꼬집어 말하는 것 같은 느낌에 통쾌함마저 들었다. 소수의 의견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미숙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노동에 대해서도 코엘료는 일침을 가한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의 말대로 도전의식을 가지고 모험에 나설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엉뚱하게도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라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나니 그 말처럼 와 닿는 것도 없더라. 젊어서는 돈이 없어 놀지 못했고,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시간이 부족해졌고, 그 두 가지가 다 충족되니 이젠 체력 때문에 놀 수가 없더라는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외면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걸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다양한 불안의 장막은 인간 최대의 적인 강박과 상통한다고 말했던가. 제어가 불가능한 시간의 포로가 되어 아등바등하는 삶의 진실 앞에 다시 한 번 숙연해질 따름이다.

 

 

<아크라 문서> 곳곳에 보이는 성경 구절을 보며 이런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만약 성경에 대한 저작권이 있었다면, 바로 코엘료 작가는 피소당했겠지? 그 정도로 <아크라 문서>에는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구절들의 패러프레이징(paraphrasing)이 차고 넘친다. 난 그에게 이야기를 원했다. 이런 아포리즘의 지리한 행렬은 내가 코엘료에게 기대한 게 아니었다. 여전히 나와는 가까워질 수 없는 작가의 책 속에서 길을 잃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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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훈 작가 작품의 팬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데뷔작은 천명관 작가의 <고래>라고 만나는 이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그 뒤에 한 자락 더 붙여야 할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최제훈 작가의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고 말이다.

 

모두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을 읽으며 참으로 기발한 발상에 신기해 하던 기억이다. 사실 오래되서 구체적인 기억은 나지 않는다. , 앞으로 이 작가의 책은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 정도.

 

후속타 역시 빠질 수가 없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으로 1년간 연재된 네 편의 중편이 모여 장편소설을 구성하는 픽스업 방식의 책이라는 설명이다. 이 책도 물론 읽었는데 읽는 동안 몰입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2년 전의 독서인데도 이렇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니. 이 책 때문에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아마 찾아 들었었지.

 

그리고 2년만에 소설 <나비잠>으로 다시 돌아왔다. 웹진문지에서 <몰락-전래되지 않은 동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해당 사이트가 폭파되었는지 어쨌는지 당최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20127월 중순께부터 월수금 연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지전능한 구글이 이 정도 정보밖에 꺼내주지 않을 줄이야. 작가는 불완전한 인간의 이야기이니 불완전한 인간이 쓸 수밖에라는 말로 연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책과 만나기 전에 맛보기라도 보려는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암튼 퇴고를 거쳐 더 멋지게 재탄생했다고 하니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 이번 와우북페스티벌에 선을 보였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난 시간이 없어서 갈 수가 없어서 작가와의 만남 시간도 그리고 책도 만나지 못했다.

 

최대한의 공력으로 빨리 만나 보고 싶은 책이다.

 

[뱀다리] 왜 퇴고 과정에서 원래 제목과 전혀 다른 제목으로 바뀌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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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 2013-10-09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새책이 나왔어요? 저도 이 작가 팬인데, 일곱개의 고양이눈이랑 퀴르발 남작의성
읽고, 눈 빠지게 기다렸는데, 이 작품도 얼른 읽어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13-10-10 14:23   좋아요 0 | URL
지난 주말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아마 첫 선을
보인 것 같습니다.
온라인 서점에는 이번 주부터 아마 판매에 들
어간 것 같네요.
 
타이니 스토리 Tiny Stories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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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나 사랑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꿈꿀 것이며, 울고불고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사랑도 있을 것이며, 철저하게 계산된 사랑이라는 미명을 동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우리의 영미 씨처럼 쾌락을 동반한 육체적 사랑이야말로 사랑 중에 으뜸으로 치는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사랑은 누구나에게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랑에 옳고 그름이 있을 리도 없겠다. 모두가 그저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

 

개인적으로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권 이상의 책은 읽어봐야 그 작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이번 경우에는 독서모임 때문에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루이스 세풀베다나 혹은 로베르트 볼라뇨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암튼 내가 처음으로 읽은 영미 씨의 <솔뮤직 러버스 온리>에 이어 바로 비교적 근간인 <타이니 스토리>를 읽었다. 작가가 독자에게 선사하는 달달하다가도 여지없이 뒷통수를 때리는 그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한 다발의 사랑에 관한 단편소설 종합세트다.

 

<솔뮤직 러버스 온리>만으로는 영미 씨가 남자밝힘증의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타이니 스토리>에서는 딱히 또 그런 것만도 아니라고 토로한다. 그렇지, 아무리 연애소설로 먹고 사는 작가라지만 그럴 리가 있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주무기를 내려놓은 건 아니다. 저자 후기에서 밝혔다시피 어떤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쓴 게 아니라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쓴 이야기들의 집대성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그 글을 꾸준하게 소비할 수 있는 두터운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는 게 영미 씨의 자랑이 아닐까.

 

언제나 그렇듯, 단편소설은 다른 것에 우선해서 특별한 캐릭터가 필요하다. 긴 호흡의 장편처럼 시간과 공간 같이 부수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한 겨를이 없다. 그러니 독자의 시선을 집중할 만한 보통을 능가하는 캐릭터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래서 전신주 씨가 등장하고, 유명 소설가와 친해지지만 그 소설가가 자신이 들려준 비운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설의 소재로 써먹는 그런 비열한 캐릭터도 무시로 등장한다. 우리의 경우도 비슷하겠지만, 일본 열도에서도 역시 주둔 중인 미군 GI와 화끈한 사랑을 꿈꾼 묘령의 아가씨들도 많이 있는가 보다. 어쭙잖은 도를 내세우는 이율배반적인 나라에서라면 손가락질 받을만한 그녀들의 무용담이 이웃 나라에서는 흥미진진한 문학의 소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어째 우리나라에는 영미 씨 같은 작가가 없단 말인가, 오호 통재라.

 

어린 시절의 자신에 대한 왕따를 주동하던 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접근했지만, 그 친구 역시 전학가서는 왕따 당했다는 말에 치솟아 오르던 분노가 수그러드는 상황에 당황해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네 일상의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면서도, 막상 상대성은 철저하게 부인하는 내 모습을 그녀의 소설에서 보게 될 줄이야.영미 씨의 모든 소설의 내용과 부합할 수는 없겠지만 이야기의 모퉁이에서 순간마다 마주치는 삶의 진실은 왜 그녀가 이런 작은 이야기에 정성을 들였는지 알게 해준다.

 

영미 씨가 의도대로 쓴 것이 분명한 두 개의 연작 단편도 인상적이다. 미국 유학 출신의 페미니스트 강사는 역시 교수로 재직 중인 미국인 남편과 떨어져 살면서 자유연애를 만끽한다. 평소의 페미니스트답지 않은 행동을 일삼으며 복종의 쾌락을 추구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남학생 제자와의 일탈을 즐긴다. 두 개의 이야기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들어맞는 장면에서는 감탄할 수밖에. 영미 씨에게 포 트웬티(four-twenty)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수 배웠다.

 

군인이었던 남편을 배려하는 마음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 일본인 배우자의 이야기도 새겨 들을만하다. 너무 올바른 삶은 나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까지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에 도달한다. 배려가 누군가에게는 성가시고 짜증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는 걸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여러 면에서 영미 씨의 <타이니 스토리>는 읽을 만한 책이다.

 

나중에 오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누군가 영미 씨의 <타이니 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는 말을 듣게 되면 나의 뇌리에서는 어떤 기억이 남아 있을까. 첫 경험이었던 <소우루>만큼의 강렬함은 없겠지만, 그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그야말로 작은 이야기들이 기억나지 않을까? 영미 씨는 무책임하다고 말하지만, 작은 이야기에도 나름의 소리와 울림이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그래서 반가워, <타이니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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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3-10-07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섯 권까지는 아니더라도 특히 작가에게 나쁜 평가를 내릴 때에는 더더욱 몇 권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저 책은 표지가 원서인 줄 알겠어요^^;;

레삭매냐 2013-10-08 10:41   좋아요 0 | URL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읽어야할 책은 너무 많고
불완전한 존재가 읽는 속도는 너무 더디기만 한 것 같습니다.

저도 책 처음에 보고 원서라고 착각했답니다 :)
 
솔뮤직 러버스 온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18
야마다 에이미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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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주 독서 모임에서 야마다 에미이(山田詠美)<솔뮤직 러버스 온리>가 다음 독서 토론 책이 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야마다 에이미라는 작가의 존재조차 몰랐다. 의식처럼 자주 들르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야마다 에이미의 책을 검색했다. 물론 이 책이 있다면 더 좋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책이라도 살 요량으로. 아쉽게도 <솔뮤직 러버스 온리>는 없었고, 다른 두 권의 책을 샀다. 그럼에도 <솔뮤직 러버스 온리>부터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요설(요사스러운 수작)이라는 말과 빼어난 은유 그리고 탁월한 묘사를 그 누구보다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일본 출신 작가가 과연 이 모든 이야기를 마냥 상상으로만 만들어냈을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자신의 사적 체험이 개입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점이다. 하지만 곧 그게 무슨 대수랴, 책만 재밌으면 됐지 하는 마음으로 책에 몰입했다.

 

모두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솔뮤직 러버스 온리>에는 타이틀 제목의 단편은 없다. 제목부터 왠지 어느 특정 대상(솔뮤직을 사랑하는 흑인들)을 지칭하는 은유가 한껏 배어 있는 그런 느낌이다. 야마다 에이미에게 공간과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 속에 갑자기 등장해서 독자를 적잖이 당혹스럽게 만드는 캐릭터가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여느 단편에서 그렇듯, 그들에게 삶의 진실은 너무 다가오고 그 진실의 순간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런데 그 놓쳐 버린 삶의 진실을 대면하는 과정과 순간이 요설적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이다. 단순하게 야하다는 느낌에서 한 층위 더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책의 곳곳에서 빛나는 순간에 대한 흩뿌리는 듯한 묘사는 상상을 초월한다.

 

야마다 에이미의 발칙한 상상력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터부를 넘나든다. 아니 그런 게 언제 존재했냐는 듯이. 젊고 경험은 없지만 사랑에 주린 흑인 청년들은 일반적 도덕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칠게 진격한다. 플로리다의 노을지는 바에서 화자를 만난 바람둥이 윌리 로이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겠다는 핑계를 대고 뉴욕까지 찾아와 남자 뮤즈를 자처한다. 어느새 그의 포로가 된 주인공은 자신의 본업을 그림을 그리다 말고 무시로 그에게 안기고 싶어한다. 결국 애인에게 꼬리가 밟히지만 사랑해서 같이 잤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라고 되묻는 로이 윌리의 당당함에 애인이 뒷걸음친다. 그 시절은 로비 네빌의 <C'est La Vie>가 한창 히트치던 시절이란다.

 

중년여인과 메이크러브를 통해 십대소년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 그린 단편도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난 미세스 존스의 그 남자가 된 주인공 윌리, 자기라면 미스터 존스처럼 일년씩 와이프를 혼자 두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사랑하는 애인에게 어렵게 번 돈과 용돈으로 각종 디저트를 제공하며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미세스 존스는 그에게 몸은 과자, 마음은 빵이라는 알듯말듯한 말로 절교를 선언한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평소보다 맛있다는 말로 관계의 소멸을 암시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미세스 존스는 과자를 너무 많이 먹어본 어른이었노라고 고백한다.

 

아버지 YOBO의 새엄마를 사랑한 남자 브루스에 대한 이야기 <Mama Used To Say>는 또 어떤가. 이 제목을 보며 엉뚱하게도 80년대를 주름 잡았던 흑인 랩스타 L.L. Cool J가 떠오른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바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창부들 사이에서 자란 브루스는 그야말로 Ladies man이 아니었던가. 절친이자 포주 TJ와는 달리 풋볼 장학금을 받고 동부의 대학으로 떠났다가 4년 만에 귀향한 브루스의 옛 이야기가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요조숙녀처럼 능숙하게 아버지를 도와 YOBO의 안주인이 된 새엄마 도로시는 이미 세상물정 모르는 것이 없는 브루스에게 금지된 유혹이다. 세상의 모든 터부가 깨지게 되어 있듯, 그들 역시 선을 넘는다. 타인의 행복이 자신의 것과 등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브루스는 자신 같은 여자를 조심하라는 새엄마의 경고를 들으며 동부로 떠난다.

 

클럽 DJ로 동경하던 여자를 얻게 되었지만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풋내기 사랑의 주인공, 소위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몰라 외부와 차단한 것이 신화가 되어 버린 소년,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어쩔 수 없이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게 되어 버린 배신의 아이콘 등 야마다 에이미의 단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독자의 불온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혹은 보여주고 싶은 삶의 진실이 무엇일까? 우리가 모르는 어떤 세계에서는 이런 삶도 있다는 계도일까? 그녀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는 내게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온다. 동시에 인간사 희로애락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이십대 중후반의 작가가 그린 흑인 청년들은 하나 같이 경험이 부족하고, 사랑에 고픈 인생들이다. 반면, 그들의 짝으로 등장하는 여성들은 노련하고 삶의 다양성을 체험한 산전수전 공중전의 명수들이다. 그들은 파트너와의 일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풋내기 사랑을 체험하던 파트너들은 절체절명의 사랑이라는 명제 앞에 선 베르테르처럼 고뇌하고 지속 불가능한 사랑의 부재에 슬퍼한다.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한 건 과자가 아니라 빵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8개의 단편을 다 읽고 후기를 읽으면서 비로소 나는 야마다 에이미의 흑인에게 바치는 이 소설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금도 그런 진 모르겠지만, 한창 시절 잘 놀던 작가의 남자 밝힘증<솔뮤직 러버스 온리> 창작의 원동력이었다는 비밀을 알게 됐다. 그녀는 음악을 몸으로 사랑할 줄 알지만, 일본어를 모를 그녀의 남자들을 거리낌 없이 희롱하며 이 작품을 헌정한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만 쓴다는 그녀의 선배격에 해당하는 아니 에르노만큼은 아니겠지만, 스스로 고백하듯이 수많은 남자에 중독된 아니 그들을 사랑할 줄 알았던 영미 씨의 고백을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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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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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매력적인 제목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작가의 번역된 영어 제목이 멀리 한국에서는 좀 다르게 번역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이란식 사랑 이야기 검열하기>가 좀 더 영어 제목에 가깝지 않을까? 뭐 상관없다. 이슬람 혁명 이래 이란에서 진행되는 문학 작품과 사상과 사유 자체에 대한 검열 그리고 이란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이니까.

 

사실 소설의 초반은 무척이나 재밌어서 읽는 속도가 빨랐다. 하지만, 무슨 일로 잠시 독서를 멈추게 되면서 진도가 더디 나가기 시작했다. 독자는 온전하게 소설 속의 소설 주인공인 남자주인공 다라와 여자주인공 사라의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가 없다. 또다른 소설 속의 주인공인 페트로비치 혹은 작가가 무시로 등장해서 그어대는 검열된 취소선은 기본 내러티브 구조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게다가 정체가 의심스러운 부적 행상인까지 등장해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남녀 주인공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작가 만다니푸르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마술적 리얼리즘마저 우습게 만드는 현대 이란의 가공할 만한 검열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문학과 영화를 전공한 주인공들보다 더 위력적이고 가공할 만한 능력을 가진 검열관 페트로비치는 상상가능한 모든 성적 코드를 짚어내는데 탁월하다. 우리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매는 넥타이의 방향성에 그런 코드가 숨어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게다가 눈이 보이지 않는 영상담당 검열관이 세 명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는 설정 또한 희극에 가깝다. 가만, 작가는 너무 지나치게 이란의 상황을 소설적으로 과장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진짜 이란의 검열관들이 걱정하는 대로 서방 세계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닐까?

 

1953년 석유국유화를 주장하던 모사데크 정권이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이래, 이란을 지배하던 팔레비 샤의 경찰국가가 이슬람 혁명으로 전복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혁명에 동조했던 자유주의자들은 향후 이란 사회가 이렇게 억압적인 종교국가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지 몰랐을까 궁금하다. 신의 은총을 받아 석유를 그야말로 깔고 앉은 이란이 서방으로부터 악의 축으로 지목되고, 계속되는 경제 제재 때문에 비롯된 경제불황으로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주인공 다라가 소설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란 보통사람들의 서방 특히 미국에 대한 공포감, 반미의식과 역설적인 기대감은 소설의 곳곳에서 엿보인다.

 

소설은 후반으로 갈수록 다라와 사라의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조금은 과도하다 싶은 작가의 직접적 개입과 검열관까지 나서는 장면에서는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만다니푸르가 미국에서 쓴 이 소설이 이란의 오늘을 모두 대변하는 건 아니겠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저간의 사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또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뿌리 깊은 서방세계의 오리엔탈리즘이 작가의 냉소주의와 결합해서 강화되는 건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동시에 고래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자랑하는 페르시아 고전문학에 대해 작가가 가지고 있는 뚜렷한 자부심 역시 볼거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검열의 이중성 역시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점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검열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검열관 페트로비치 역시 동의한다. 문제는 눈에 보이는 그런 취소선 같은 검열이 아니라,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된다는 그야말로 육체적 체험에 따른 내적 검열 혹은 셀프 검열이다. 이란에서 팔레비 독재가 판을 치던 시절은 우리나라의 유신시절과 정확하게 겹친다. 국민의 합의로 이루어진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던 시절, 우리는 입고 싶은 옷을 마음대로 입지 못했고 듣고 싶은 노래를 마음대로 듣지 못했으며, 머리조차 마음대로 기르지 못했다. 하긴 읽고 싶은 책도 마음대로 읽을 수가 없었구나.

 

만다니푸르 작가가 시전하는 블랙 유머 또한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란의 검열관들에게 <늑대와 춤을>을 미국의 위선을 폭로하는 반미영화의 대표주자다. 서양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필요한 것들만 발명한단다. 그렇다면 바이아그라는?(299) 한편, 정부 관리들의 지도로 이란 국민들은 추가 식료품 쿠폰을 지급받기 위해 밤마다 지칠 줄 모르는 재생산 활동에 전념했다. 불법적인 일에 기민하고 천재적으로 대응하며, 출판물이나 영상물 저작권 따위는 개에게나 줘 버리고 일갈하는 자국민에 대한 이 뜨거운 사랑을 어떻게 달리 표현한단 말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란에서는 왜?”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서사와 작가의 개입 그리고 검열관 훈수라는 삼각관계를 통해 어느 정도나마 대답이 된 것 같다. 물론 이 책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만으로 한 사회를 가늠해 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여전히 나에게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아랍 혹은 페르시아 문학에 대한 첫걸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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