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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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왜 사람들이 그렇게 하루키 타령을 해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난 그들만큼 하루키를 읽어 보지 않아서일까. 아마 그의 팬들처럼 하루키를 많이 읽다 보면 그들처럼 하루키 매니아가 되어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책쟁이인지라 지난여름 하루키의 신작 소설이 엄청난 인세 경쟁 끝에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샀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름 흡인력이 있어, 250쪽까지 빛의 속도로 그렇게 읽었다. 하지만, 곧 급하게 읽어야할 다른 책들이 강력하게 등장했고 독서모임을 이틀 앞둔 오늘에서야 비로소 <다자키 쓰쿠루>를 다 읽었다.

 

그렇게 두 번에 나누어 읽다 보니 서로 다른 두 책을 읽은 기분이다. 무더운 여름에 좀 달뜬 기분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신작을 대했다면, 만추의 계절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 만난 하루키는 또 달랐다. 석 달 동안 책에 담긴 서사가 성숙한 느낌이랄까.

 

<다자키 쓰쿠루>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다자키 쓰쿠루(). 도쿄의 지하철역을 설계하는 엔지니어이자, 건실한 36세의 중년 남자다. 고만고만한 연애와 이별을 경험하며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는 16년 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상처를 통해 자신이 어쩌면 우연이었지만 가장 소중했던 우리 시절과 강제적으로 격리됐음을 곱씹는다. 마치 현재 우경화로 치닫는 오늘날의 일본이 버블 경제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절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남자는 하나하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독자는 당연히 도대체 16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다자키 쓰쿠루는 현재 자신의 애인인 사라를 통해 과거 청산으로 내몰린다. 예의 과정을 통과해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자신이 좋아하는 수영처럼 세상에 역류하지 않고 살아온 남자 쓰쿠루는 이번에도 애인의 요청을 거스르지 않고, 자신의 과거사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주체는 벼랑 끝에 내몰려야 비로소 주체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강신주 박사의 말이 언뜻 뇌리를 스쳐간다.

 

사실 석 달 전에 읽은 부분에 대해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격리로부터 간신히 치유된 쓰쿠루가 어떤 청년과 관계를 시작하지만 그 역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던가. 그조차도 이제 단련된 무색채의 쓰쿠루에게는 별 다른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이미 큰 상처를 겪었기에. 이제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떻게 해서 나고야 시절 죽마고우들이 자신을 외면하게 되었는가의 연유를 찾는 것이다.

 

고향 나고야에 들러 지역사회에서 나름 성공한 세일즈맨과 기업 강사를 일하는 친구들을 만난 쓰쿠루는 나머지 친구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시로()는 죽었고, 구로()는 핀란드 남자와 만나 일본을 떠났노라고. 죽은 이에게 들을 말이 없는 쓰쿠루는 산 자를 찾아 핀란드로 떠난다. 개인적으로 핀란드로 과거를 찾는 순례를 떠난 그의 여로가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왜 하필이면 북구의 나라 핀란드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가 소설에서 서술한 여러 단서들로 추론해 보지만 쉽지 않다.

 

하루키의 전작 <1Q84>를 읽어보지 않아 상대적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전작이 사회문제에 좀 더 천착했다면 신간 <다자키 쓰쿠루>는 개인사의 영역에 비중을 맞춘 게 아닌가라는 평이다. 문학이 어느 사회의 거울로 작용한다는 가정을 한다면, 그동안 세계에서 무언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 동분서주하던 국가 일본이 이제는 내실을 다지고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신주쿠 역에서 어디로 갈지 모르고, 아니 갈 곳이 없는 상태로 서 있는 다자키 쓰쿠루의 모습에서 오늘날 일본을 읽는다고 한다면 무리일까? 다자키 쓰쿠루가 선친에게 물려받은 집과 유산으로 오늘날 자신을 이룬 것처럼 전후세대에 빚진 일본의 신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무한할 것처럼 보였던 국가 일본의 경제번영은 더 이상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다. 신주쿠 역에서 무표정으로 고개 숙인 채 직장으로 향하는 그들을 애써 변명하는 하루키의 모습이 그저 애처롭게 다가올 뿐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읊조리는 우리는 우리였다라는 표현이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는 우리대로 행복하니 너희들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지 말란다. 잘난 작가가 보여주는 자신감의 발로일까.

 

역시 소설 <다자키 쓰쿠루>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마지막 남은 올드 멤버 구로/에리를 찾아 나선 핀란드 여행이다. 그것은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하는 피아곡의 선율에 따라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진실을 찾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순례에 나선 쓰쿠루에게 여행 자체가 주는 치유의 시간이다. 그리고 독자는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어떻게 해서 쓰쿠루가 모임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묵묵하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핀란드 여행에 앞서 자신이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라가 중년남자와 함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지만, 그것조차 이미 막바지에 달한 소설에서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동안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오면서 그전보다 더 단련되었기 때문에? 아니면 정신적으로 더 잃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일까? 그렇게 소설은 열린 결말로 내달린다.

 

싸구려 힐링과 멘토링이 범람하는 시기에 하루키의 소설에서 어떤 종류의 치유를 기대했다면 그건 어쩌면 난망한 기대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재밌게 잘 읽히는 글쓰기 실력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곳곳에서 보이는 하루키 특유의 섬세한 도회적 스타일 구사는 여전하다. 하지만 여전히 나와 하루키가 통했느냐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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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가공선 창비세계문학 8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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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나라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문학 부분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는 느낌이다. 문학상 수상이 그 나라 문학의 척도가 될 순 없겠지만, 우리와 달리 이미 두 명의 노벨문학상까지 배출했단 점을 고려해 볼 때 마냥 백안시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창비 팟캐스트에서 황정은 작가의 소개로 언제고 읽어야지 벼르고 있던 코바야시 타끼지의 <게 가공선>을 오늘에서야 작심하고 다 읽을 수가 있었다.

 

<게 가공선>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걸작이라는 말 그대로,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 게를 잡는 게 가공선 어부와 선원들이 선장과 감독의 비인간적 처우에 저항해서 연대하고 조직해서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29년은 일본 제국주의/군국주의가 그야말로 기승을 부리던 시기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국제사회에 제국주의 열강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우리나라와 타이완을 병탄하면서 그야말로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일본 산업화의 이면에는 소설에 묘사된 대로, 노동자 농민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착취가 자리잡고 있었다. 북양어업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내는 자본가들은 정치권과 결탁해서 일본의 영역을 사할린을 넘어 러시아 영토 캄차카 반도까지 확장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재벌, 군국주의 정부 그리고 군부 연합체는 다양한 방법으로 노동자 빈민을 착취하면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도모했다. 소설에 나오는 내지나 일본 도호쿠 지방의 빈민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나 홋카이도로 이주해서 부농이 되는 꿈을 꾸지만, 밑천 하나 없이 맨몸뚱이로 황무지를 개간해서 옥토로 만든 그들을 기다리는 건 가혹한 토지수탈 뿐이었다. 그렇게 막장으로 내몰린 농민, 탄광 출신의 광부, 가난한 학생들은 계절노동자로 변신해서 홋카이도 남단의 하코다테에서 출항하는 핫꼬오마루에 승선한다.

 

 

 

 

 

코바야시 타끼지가 묘사하는 게 가공선 핫꼬오마루의 모습은 지옥도 그 자체다. 반항적인 어부를 윈치에 매다는 가혹행위는 다반사고, 게가 한창 잡히는 혹한의 계절에 무리하게 어부들을 폭풍(토끼)이 몰아치는 바다로 내몰고, 그들이 설사 귀환하지 못한다고 해도 선주인 자본가는 배를 보험에 들어놔서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식의 인명경시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대나무 채찍과 몽둥이 찜질로 몸이 아프거나 다친 어부들도 예외 없이 게 으깨는 작업과 게 가공 작업에 내모는 비인간적 감독의 모습은 끔찍하다. 마치 한 편의 르포르타주를 보는 것처럼 작가는 그렇게 생생한 비극을 연출한다.

 

얼마 전 들은 다산북스 팟캐스트에서 강신주가 박사가 지적한 대로, 비참한 죽음이라는 벼랑 끝에 내몰린 어부들은 비로소 자각한 주체가 되어 그들을 억압하는 세력에 맞서 저항과 연대를 시작한다. 작가의 서술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 일본 군부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두려워했는지 잘 알 수가 있었다. 배가 난파되어 러시아 령에 상륙한 일본 어부들은 얼치기 중국 통역을 통해 적화선전을 접한다. 그것을 비롯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말더듬이-학생 그리고 까불지마 어부는 본격적인 태업과 파업을 조직한다. 노동자들은 비로소 조직화된 힘이야말로 그들을 자본가의 탄압에서 구해줄 저항 무기라는 점을 깨닫는다. 물론, 자신들에 낸 세금으로 유지되는 군대가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승리를 위한 일보후퇴였다.

 

 

 

적은 팜플렛 분량의 소설이지만, 그 울림과 반향은 예상했던 것 이상이다. 어부와 선원의 갈등은 지금도 재현되고 있는 노노갈등의 전형처럼 다가와서 한편 씁쓸하기도 했다. 일종의 이이제이 전술이라고나 할까? 그저 살아남기 위해 치르는 치열한 내전의 모습은 비극의 원형을 담보한다. 장르문학이 판치는 현대 일본문학에 이런 작품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현상은 동서고금은 막론하고 상이하지 않다는 점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작가가 특정한 인물이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가 각성해서 저항을 이끌게 하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다. 과연 우리 편은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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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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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산문학상을 세 여성작가들이 휩쓸었다는 뉴스를 읽었다. 세 주인공 중의 한 명인 김숨 작가의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을 어제 부곡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어떤 책은 300쪽 남짓해도 읽기가 버겁지만 또 어떤 책은 금세 다 읽을 수가 있다. 물론 작가의 내공과 노력이 한땀한땀 쌓인 책을 이렇게 빨리 읽어도 되나 하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소설은 단수로 시작된다. 그녀(김미선-며느리)와 여자(정순자-시어머니)가 소설 제목에 나오는 여인들이다. 어떻게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트렌드를 장악한 막장 시월드의 재탕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든다. 물론 독자의 기대와는 상반된 서사가 펼쳐진다. 지난 5년간 삶을 공유했지만 전혀 살갑지 않은 시어머니와의 이야기를 하는 그녀가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아토피에 걸려 고생하는 자기 아들에 들이는 돈은 아깝지 않지만, 자신이 홈쇼핑 콜센터 직원으로 일하는 동안 육아와 살림을 도맡은 시어머니가 침이 마르는 구강건조증으로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하게 되자 소용되는 비용이 그녀는 아깝게 느껴진다. 전문대졸의 내세울 게 없는 그녀는 중산층의 평범한 삶을 꿈꾸지만 그녀를 옥죄어 오는 상황은 그녀의 바람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토목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부동간 경기 침체로 언제 잘릴지 파리목숨이고, 자신 역시 임신-출산을 억척스럽게 치르며 지켜낸 직장에서 해고된다.

 

그동안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 주던 시어머니의 존재가 이제는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그녀는 진화와 멸종 운운해대며 한바탕 여자에게 설교를 늘어놓지만, 자신 역시 시장에서 도태된 마당에 그녀의 말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항상 주눅 들어 자기주장 대신 말수를 아끼는 여자가 못마땅할 따름이다. 게다가 구강건조증으로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 가는 시어머니를 내쫓을 궁리에 여념이 없다. 아들 민수가 어느 자라자 더 이상 여자가 필요없어졌다는 냉혹한 현실분석이 그 뒤에 자리한다.

 

사실 소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은 단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에 방점을 찍는다. 단수라는 결핍 상황에서 며느리는 무능력한 남편, 아토피에 걸려 피부가 짓무른 아들 등의 원인을 여자(시어머니)에게 돌린다. 물론 그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러기에 더 답답할 뿐이다.

 

여인들의 갈등을 주축이 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진화하는 적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라는 질문에 자연스레 도달하게 된다. 김숨 작가는 그 점에 대해 친절하지 않다. 서사의 개연성을 통해 독자는 적들의 정체를 조심스레 규정해 본다. 혹자는 여자의 가장 큰 적은 여자 자신이라고 했는데, 그녀와 여자의 관계를 보면 이중생물 관계처럼 서로 공생하면서 상호적대적인 관계로 진화하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여자의 무반응, 무대응은 주목할 만하다. 그녀가 여자에게 손자의 종기에 침을 발랐다는 이유로 모멸과 멸시를 퍼붓지만 그녀의 반응은 역시나 뚱하다. 다만, 여자의 구강건조증과 민수의 아토피 증세 심화가 어떤 연관을 가지지 않나 추측만 가능할 따름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부엌 주도권을 두고 그녀와 여자가 갈등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부엌일 중에 설거지를 가장 싫어하는 그녀보다 월등한 실력을 자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부엌을 변경한 장면에 대한 묘사는 확실히 남자 작가라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밀하게 그려냈다. 여자의 장끼인 아귀찜 준비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어지간한 관찰력이 없다면 쉽지 않을 듯 싶다.

 

지난주에 읽은 김이설 작가의 <환영>에 나오는 아이에 대한 집착/미련은 김숨 작가의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등장한다. 아이를 위해서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벌이에 전념하지만, 실상 아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통과 대면의 시간은 부족한 엄마의 빈자리를 할머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 묘사가 특히 그렇다. 언제부터 아이의 육아가 부모가 아니라 조부모의 몫이 된 걸까.

 

여자의 마르는 침 이야기는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다. 명백하게 그녀가 제공한 모멸과 멸시 때문에 발생한 스트레스가 결핍을 상징하는 구강건조증으로 연결된다.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분비물 침이 부족해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 가뜩이나 결핍 투성이 가계에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짜증스럽기만 하다. 자신이 원인제공자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장면에서는 이중생물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그녀와 여자는 같은 종이기에, 공생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일반의 환상에 균열을 제공한다.

 

결말 부분이 조금 황망스럽긴 하지만, 상상력을 가득 담은 개연성 넘치는 서사 구조와 여성작가 특유의 디테일이 참 마음에 들었다. 또 이렇게 멋진 우리 문학 한편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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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시티 민음사 모던 클래식 17
레나 안데르손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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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창조 이래 유토피아를 꿈꿔 왔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위한 노동이 없는 곳이야말로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산업화와 그에 따른 기계문명의 발달이 우리에게 그런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 거라고 믿어왔지만, 그건 한낱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으로 보다 많은 생산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재화의 불균등한 분배 때문에 잉여 생산물의 집중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그리고 영양분의 과다 섭취와 운동부족으로 우리 몸은 날로 비대해져 가고 있다. 이렇게 언 듯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자본주의와 생산 그리고 비만이라는 상이한 소재를 가지고 스웨덴 출신의 작가 레나 안데르손은 <덕 시티>란 발칙한 창조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예전에 대학에서 나에게 상징에 대해 설명해주신 교수님의 강의에 따르면, 영화 포스터 하나만으로도 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논리를 그대로 <덕 시티>의 책표지에 적용시켜 보면 좀 더 이해가 쉽지 않을까. 현실을 픽션화한 소설 <덕 시티>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도널드 D(명백히 월트 디즈니 만화 주인공의 의인화다), 도널드가 사랑해마지 않는 대학교수 데이지 그리고 이 둘과 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는가 하면 실제적으로 덕 시티를 지배하는 자본가 존 폰 앤더슨이 나란히 표지에 등장한다.

 

부차적인 설명을 할 것도 없이 <덕 시티>는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 미국을 상징한다. 아들 조지 W. 부시 시대에 쓰인 이 소설에는 전쟁도 등장한다. 덕 시티의 에이햅군은 지방을 내부의 적으로 규정해서 그야말로 치열한 살과의 전쟁을 벌인다. 고도비만이 일상인 삶 가운데, 도널드는 삼촌 존 폰 앤더슨이 운영하는 도넛 공장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도넛 생산에 여념이 없다. 가끔 나오는 불량 제품은 그의 입으로 쓱싹 사라져 버린다. 우리의 주인공 도널드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발현이라고 해야 할까.

 

한편, 이미 영양의 과잉 섭취로 뚱뚱이들이 넘쳐 나는 가운데, 새로운 먹거리 상품을 개발해서 시장에 내놓으려는 탐욕스러운 자본가 존 폰 앤더슨이 있다. 자기 나름의 성공 신화에 빠진 그는 자신의 제품에는 절대 입조차 대지 않는다. 자기가 만든 다양한 제품 때문에 자유와 평화가 넘쳐 나는 덕 시티 시민들은 당뇨를 필두로 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지만 그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 체지방 관리에 엄격하며, 혹독한 다이어트를 일상처럼 수행한다. 각성한 자본가답게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처럼 문화 후원은 물론 대학 강의에 참석하며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속물처럼 보이지만, 성공신화에 내몰리는 현대인의 표상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현대문명 비판 소설 <덕 시티>는 숱한 상징들로 넘실거린다. 인슐린과 설탕 자원으로 덕 시티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본가 존 폰 앤더슨은 투자가 아닌 투기로 세계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도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회생한 월 가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소설에 나오는 흰 고래들은 그저 다달이 손에 쥐여지는 급여로 근근이 버티는 보통 사람을 의미한다. 어느 순간 공공의 적으로 내몰려, 에이햅군에게 이끌려 강제수용소로 향하는 흰 고래들의 모습에서는 지난 세기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도 한다. 영양 과잉 섭취로 비만에 시달리면서도 운동으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다수의 흰 고래들은 문자 그대로 잉여취급을 받는다. 우리의 주인공 도널드 D도 예의 부류에 속할 테지만, 든든한 뒷배(존 폰 앤더슨) 덕분에 강제수용소행도 면하고 좋은 의료진의 도움으로 생을 이어간다.

 

모든 것이 계량화된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인간의 몸 역시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아름다움의 다양성은 무시되고, 획일화되고 성형된 아름다움이 미의 기준으로 제시된다. 건강한 몸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엔 뚱뚱한 몸이 부의 상징이었다면, 바뀐 시대에는 비만은 나태와 의지박약의 상징일 뿐이다. 돈과 시간이 충분한 사람들은 권력화된 자신의 이상적 몸만들기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리고 채소와 과일 같은 제대로 영양 섭취를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비만에 시달리게 되는 역설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덕 시티>에서 진짜 무서운 요소는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전체주의적 통제다. 예전에는 불온한 사상을 통제했다면, 덕 시티에서는 암묵적인 동의 아래 공공의 적인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뚱뚱하다 하더라도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게 하는 통제가 초래할지도 모르는 문제야말로 이 책에서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다. 책에 등장하는 지식인 해럴드 벨은 권력자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맛대가리 없는 건강식 대신 불법 레스토랑에서나 취급하는 프렌치 프라이, 고기 파이 같은 진짜 먹거리야말로 인류가 추구해야할 음식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주장하는 음식에 대한 자유의지는 이제 어쩌면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덕 시티>를 읽는 동안에 참 많은 생각들이 들었었는데, 막상 리뷰를 쓰다 보니 대부분 휘발되어 버렸다. 전장에 투입된 도널드의 세 명의 조카들, 도널드-데이지 그리고 존 폰 앤더슨으로 이어지는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 인류가 단 것을 먹기 위해 진화해 왔노라는 이야기 등등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종잡을 수 없어지는 서사 구조 탓으로 돌려야할까. 현대문명을 신랄하게 비판한 현대판 우화를 본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감독은 다음의 사람을 추천한다. 마이클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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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새
케빈 파워스 지음, 원은주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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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다가 말했던가? 인생은 고()의 연속이라고. 우리 삶은 순간은 어쩌면 고통스러운 찰나의 연속과 비연속으로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비관적이라고? 미국 출신 작가 케빈 파워스의 <노란 새>를 읽어 보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후대가 평가해준다는 말이 있다. 여전히 역주행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런 말조차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지 W. 부시 시대에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이제 과거인가, 아니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가? 신예 작가 케빈 파워스의 <노란 새>는 과거와 현재진행형 중간지대에 걸친 작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보면 평범해 보이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편집이라는 패턴으로 구성하기 시작한다.

 

사실 그것조차 독자에겐 별 관심거리가 아니다. 우리는 21살에 자원입대해서 이라크 전쟁터에 나간 청년/소년병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궁금하다. 자신이 실제로 이라크에 파병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쓴 케빈 파워스는 어쩌면 평생 자신의 기억 창고에 담아 두었어야 했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고통을 한가득 담은 픽션으로 재현한다.

 

 

읽다 보면 이게 소설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노란 새>는 이라크 티그리스 강을 볼 수 있는 가공의 공간 알 타파르를 배경으로 한다. 어려서부터 시와 문학을 사랑했던 청년 존 바틀 이병은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자원입대를 선택한다. 그의 선조들이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조상들처럼 바틀은 전쟁이라는 가공할 만한 폭력 앞에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인격체로서의 존엄 대신, 기계 부품처럼 취급되며 하지(이라크 사람들을 비하해서 부르는 표현)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무감각하게 묘사된다. 여느 전쟁처럼 누가 적군이고 누가 민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공황 상태에서 철부지 소년병들은 명령에 의해 사방에 총질을 하고, 격렬한 전투 후에 자신이 살아 있음에 신에게 감사한다. 내가 아닌 전우가 죽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이 얼마나 비참한 진실인가.

 

살아남아 조국으로 귀환한 뒤에도 여전히 전쟁의 섬망에 시달리는 바틀에게는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와 그에 얽힌 비밀이 있다. 전우이자 동료였던 머피 이병의 죽음에 대한 강박이다. 광산 출신의 머프는 십대 소년으로 역시 자원입대한 동료다. 그의 어머니는 바틀에게 머프를 무사하게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고대의 금기에 대한 터부처럼 어떤 언약도 지켜질 수 없다. 서사는 열사의 땅 이라크에서 죽음을 맞은 소년병의 비밀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케빈 파워스는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존 바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전쟁이라는 이름의 극한 폭력이 얼마나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지 건조한 목소리로 진술한다. 전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은 전쟁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전쟁의 폐해를 잘 알기 때문이다. 1945년 드레스덴 대폭격을 직접 체험한 커트 보네거트가 세계적인 반전 작가가 된 것을 보라. 얼치기 전쟁광들만 3일만 버티면 된다는 망상을 주문처럼 외울 뿐이다.

 

물론 바틀이 전쟁에 나가지 않았더라도 그의 삶이 또 다른 고통으로 점철되었을 거라는 추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누구나 일상에서 체험할 수 없는 극한의 비극을 전장에서 체험한 베테랑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라크 전쟁의 기원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미정보부의 잘못된 정보에 따라 후세인을 거세한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따위의 설명은 그해 봄에 전쟁은 우리를 죽이려 했다(The war tried to kill us in the spring)”는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부정된다.

 

도대체 이라크에서 상실된 젊은이들의 생명은 도대체 무얼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 누구도 잘못 시작된 전쟁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현실이 두렵기만 하다. 월남전에 투입된 수많은 미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명분이나 이유 없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고 그렇게 죽어갔다. 그들의 사후에 추증되는 훈장 따위는 바틀이 그랬듯이 하나의 장식의 의미 밖에 가지지 않는다.

 

미숙한 소년병 머프와 바틀이 있다면 그 대척점에는 전쟁기계 스털링 하사가 있다. 그래봐야 그들보다 서너살 위의 고참으로 실전에서 단련된 마초 이미지를 사방에 흩뿌린다. 정도의 차이겠지만 그 역시 전장에서 분열되어 가는 자아의 한 단면을 그대로 노출한다. 요나 선지자의 최종 목적지가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니네베였다는 주지시키면서, 십자군 행세를 하는 그의 모습이 영 못마땅하다. 전쟁 영화 <블랙 혹 다운>에서 내내 반복되던 구호인 “No one left behind"는 진짜 군인 스털링에게는 아마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파괴되어 가는 인간 정신을 죽음의 시각화라는 표현으로 정교하게 추출해낸 케빈 파워스의 역작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전쟁의 비극과 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헤밍웨이 이후 최고의 전쟁문학이라는 상찬이 헛된 말이 아니었다. 미국 문단에 새롭게 등장한 분더킨트의 지금까지 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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