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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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열혈 팬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출간되는 그의 책들을 꾸준하게 사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정작 그의 책을 다 완독한 게 몇 권이나 되지? <휴먼 스테인>은 다 읽었고, <유령 퇴장>도 각별한 인연으로 만났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와 <포트노이의 불평>은 읽다가 도중에 그만 뒀다. 그리고 다음 주에 있을 독서모임을 위해 그가 다 쓰고 나서 절필 선언을 했다는 <네메시스>를 집어 들었다. 지난 여름, 메르스 광풍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적당한 분량의 흡입력 있는 대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이었을까 이번에는 무사히 완독에 성공했다.

 

소설 <네메시스>의 주인공 유진 “버키” 캔터는 올해 23살 먹은 뉴저지 뉴어크에 사는 청년이다. 버키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고, 아버지는 절도죄로 복역한 전과자 출신이다. 그래서 버키의 조부모가 부모를 대신해서 버키를 키웠다. 시대적 배경은 1944년 6월이다. 저지대 뉴어크를 강타한 폴리오의 발병으로 뒤숭숭하기 그지없는 시절이다. 자신이 직접 폴리오의 희생자였던 FDR(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의 영도 아래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2차세계대전을 통해 탈출할 수가 있었다. 피끓는 청년들이라면 조국과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의 아래, 일본과 독일을 상대하는 전쟁터로 향했겠지만 우리의 주인공 버키는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병역 면제를 받았다. 그것은 그에게 혜택이었을까 아니면 수치였을까. 필립 로스는 소설의 시작부터 독자에게 예민한 이슈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대신 뉴어크 위퀘이크 거리에서 여름 놀이터를 감독하는 체육교사가 된 버키 캔터 선생님은 전쟁에 버금갈 만한 공포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폴리오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다른 말로는 소아마비라고도 불리는 폴리오가 뉴어크 전역에 창궐했는데, 소설의 주무대가 되는 위퀘이크 지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불량한 이탈리아 건달들을 혼자 힘으로 제압한 버키 캔터 선생님(분명 이 소설은 내레이터가 진행하고 있는데 왜 자꾸만 캔터 선생님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재회> 편에서 설명이 된다)은 유대인 소년소녀 그리고 그들 부모의 우상이 되기에 이른다. 자신 역시 유대인이었던 필립 로스는 미국사회의 여전히 뜨거운 감자 같은 이슈라고 할 수 있는 인종문제도 살짝 터치해 주는 멋진 센스를 발휘해주신다. 소설의 모든 장치를 작가가 고안한다고 가정했을 때, 무엇 하나 허투루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비록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전과자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할아버지에게 강인한 용기와 투쟁정신을 물려받고 어머니를 대신한 할머니로부터 따스한 사랑을 받고 자란 버키 캔터에게 또하나의 축복이 주어졌다. 그것은 동료교소 마샤 스타인버그와의 만남 그리고 사랑이었다. 폴리오의 공포로부터 멀리 떨어진 포코노 산맥에 있는 인디언 힐 캠프에 가 있던 마샤는 버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사망자가 발생하는 위퀘이크로부터 안전하고 평화로운 그리고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인디언 힐로 오라고 간청한다. 버키의 선택지는 하루가 갈수록 좁아진다. 위퀘이크의 놀이터에서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폴리오의 희생자가 되어 치르는 장례식의 비통함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아이들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는 야훼 신의 소위 “정당한”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미 신은 버키로부터 어머니를 빼앗아 가지 않았던가. 프랑스에서 전투 중에 전사한 친구 제이크의 경우는 또 어떤가. 생의 대부분을 함께 하고, 미래도 같이 하리라고 생각한 소중한 이를 아무리 우연의 작용이라고 하지만 잃은 후의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버키가 느낀 종교적 분노의 연장선에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되었던 1940년대 유럽대륙에서 히틀러의 나치일당에 의해 진행된 홀로코스트 비극이 맞닿아 있다.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어떤 잘못을 했기에 신으로부터 그런 부당한 대우와 가혹한 죽음을 당해야 했단 말인가. 프래그머티즘과 합리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신대륙에서도 유대인들의 처지는 다르지 않다고 작가는 소설을 통해 증언한다. 폴리오가 공동체에 확산되어 가면서 서로를 불신하고 희생양을 찾느라 혈안이 된 가운데, 유대인들이 발병의 원인이라는 근거 없는 낭설이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필립 로스는 이성에 우선하는 죽음, 다시 말해 존재의 소멸이라는 극한의 공포가 주는 야만의 시대를 문학이라는 방식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우리도 이미 지난 여름의 메르스 사태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함께 살기보다 각자도생을 권하는 사회가 숨기고 싶어했던 추한 민낯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한다면 주인공 버키 캔터 선생님의 영혼은 순수하다 못해, 옛 제자에게 왜에 미친 순교자라고 불릴 정도다.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포코노 산맥의 인디언 힐로 도망친 죄에 대한 “네메시스”를 평생지고 가야할 업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행복할 수 있었던 기회를 저버린 이야기로 이어지는 남자의 고백은 너무 슬프다. 폴리오를 겪고 나서 불구의 몸이 된 버키가 내린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은 그야말로 마스터클래스급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폭풍우가 가신 뒤의 인디언 힐에 내리쪼이는 눈부신 햇살은 그만큼 불안의 전주곡처럼 찬란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필립 로스는 다시 독자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우리 사회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년(개인)이 그런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느냐고 말이다. 소설 <네메시스>의 진짜 내레이터 아널드 메스니코프(오래전 놀이터 시절의 캔터 선생님의 제자)가 아무리 버키에게 논리정연한 죄사함을 들려준다고 해도, 지난 27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신 외에 누가 버키에게 보상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필립 로스 작가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독자의 감정개입과 분리의 순간을 절묘하게 만들어주는 내레이션 기법과 인생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인물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은 <네메시스>에서도 빛을 발한다. 버키 캔터 선생님이 시시각각 확산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필립 로스도 그가 할 줄 아는 전부가 삶에 천착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직조해내는 것이라면, 계속해서 그 일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리딩데이트] 2015년 11월 11일 ~ 20일 11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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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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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 빌 스토너의 삶을 통해 현재를 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숨겨진 책의 발견이라는 점은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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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뜨기 부처
하니프 쿠레이시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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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침 출근길에 록웰의 <Knife>를 들었다. 예전에 어려서 팝송을 신나게 듣던 시절에 좋아하던 노래라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옛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는 매개로 음악만한 게 또 있나 싶어졌다. 지난 며칠 동안 읽은 하니프 쿠레이시의 <시골뜨기 부처>는 아마 1990년대 독자들에게 1970년대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는 그런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사실 1970년대, 그것도 영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서 작가의 인도를 따라 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소화해낸 느낌이다.

 

원래 영화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쿠레이시의 소설 데뷔작이기도 한 <시골뜨기 부처>의 주인공은 사우스런던에 사는 17살난 카림 아미르다. 소설에서 사우스런던이라는 교외, 혹은 제목에서 지칭하는 대로 시골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시간적 배경은 1970년대로 비트 제네레이션의 세례가 아직 지나가지 않은 듯, 잭 케루악의 소설 제목 <다르마 행려>가 눈에 띄어 반가웠다. 게다가 카림은 인도 검둥이라 불리는 혼혈이기도 하다. 아버지 하룬/해리는 모국 인도 봄베이 출신의 잘 나가는 집안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식민모국 영국에서는 하급 공무원으로 봉직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처 행세를 하며 영적으로 갈급한 이들에게 요상한 계시를 하며 일약 스타가 되기에 이른다. 하룬은 영국에 정착해서 산지 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길치고, 아들 카림을 내세워 모임장소인 에바 케이의 집으로 향한다. 카림이 그곳에 목격한 것은 앞으로 펼쳐질 가정파괴의 전주곡이었다.

 

늘씬한 외모의 소유자 에바와 결국 바람이 난 아버지 하룬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살림을 차린다. 두 아들 중, 앨리는 어머니가 그리고 카림을 아버지를 따라 나선다. 소설은 교외에서의 삶과 성공을 위해 달리는 에바의 노력으로 욕망의 도시 런던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 검둥이라는 둥, 카레 칠을 한 얼굴이라는 인종차별적 비하와 심지어 길가다 두들겨 맞지나 않으면 다행인 교외에서의 삶은 영국으로 이주한 인도 사람들의 갈등을 정확하게 타격한다. 게다가 아버지와 함께 봄베이를 떠나온 안와르 아저씨는 자신의 딸 자밀라(급진적 진보주의자)의 사위로 자신과 같은 봄베이 출신의 샹제를 점지해서 데릴사위로 들이는 구식 결혼을 추진한다. 이미 자밀라와 숱한 섹스를 해온 카림에게 이런 상황은 불편할 수밖에. 게다가 샹제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결국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한 자밀라는 샹제와 부부가 된다. 그들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그런 어정쩡한 관계의 법적 부부일 뿐이다. 한편, 아버지 하룬은 물질적 성공만을 추구하던 이모부 테드에게 모든 것을 털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예시를 던져 멀쩡한 남자를 신경쇠약에 걸리게 만든다. 어쩌면 소설 <시골뜨기 부처>는 영국의 1970년대 막장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중요한 인물을 하나 빼먹었는데 카림의 새어머니 에바의 아들인 찰리 케이/히어로가 그 주인공이다. 초반부터 모든 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찰리는 결국 팝스타의 길을 걸으며 성공가도를 달린다. 카림은 여자를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찰리에게 동성애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살짝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사우스런던의 교외에 사는 모든 이들은 구질구질한 삶에서 탈출해서 신세계처럼 보이는 도시 런던행을 꿈꾼다. 그것은 마치 영국 제국주의의 침탈당한 식민지 인도 사람들이 꿈꾸는 영국행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영국에 도착한다고 해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신사의 나라 영국 사람들이 보여주는 노골적이지 않지만 파렴치한 차별이 아니었던가. 쿠레이시 작가는 그런 민감한 이슈에 더해,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유머를 섞어 넣는다. 회교도 출신 하룬이 부처 행세를 하자 배교자라는 표현을 쓰질 않나, 회교도 안와르 아저씨가 돼지고기 파이를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해치우고, 샹제와 결혼한 자밀라와의 질탕한 사랑놀음 장면을 친구가 목격하는 장면을 보라. 마냥 웃을 수만 없는 그런 스타일의 은근한 유머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안와르 아저씨가 운영하는 파라다이스 가게에서 벌어지는 소동과 해프닝은 정말 대책 없다.

 

소설의 1부 <교외에서>가 워밍업이었다면, 아미르 일가가 도시 런던으로 뛰어든 2부 <도시에서>는 한층 더 가열된 그들의 욕망이 분출한다. 에바는 아파트 인테리어를 해서 되파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해 나가는 부동산 개발업자로 변신하고, 주인공 카림은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매튜 파이크를 통해 연극배우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 와중에 같은 극단 소속의 엘리너와 유사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1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하룬은 2부에서는 영성을 잃고 추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카림이 처음 맡은 배역을 뼛속까지 제국주의자였던 루디어드 키플링의 <정글북>에 나오는 정글소년 모글리였다. 어때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도시에서의 세련된 삶을 동경해온 카림에게 주어진 역할은 인도 토속 억양에 히피족과 펑크족이 물결이 이루던 당대에 반하는 옷 같지도 않은 팬티 하나 달랑 걸친 그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2세대 이주문학의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는 쿠레이시는 바로 그런 역설에 주목하고 있다. 아무리 영국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경고일까. 소설에는 수많은 경고와 교훈들이 등장하지만 이주민 자신이 느끼는 정체성 이슈에 대한 울림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잘 나가는 찰리의 뉴욕행에 동승하기도 하고, 한 순간의 성공에 탐닉하기도 하지만 십대 소년에서 이제 이십대에 접어든 카림은 주위의 모든 것들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특히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엘리너의 관계가 사실은 자신의 성공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연출가 파이크의 농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런던으로 돌아오게 된다. 3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에 보통 사람이라면 체험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체험한 소년은 성장해서 삶이 행복만으로 가득하지 않고, 비통함도 느껴야 하며 무엇보다 익숙해진 것들이나 길들여진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주변의 산재한 가치들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카림의 이야기에서 얻은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자 이제 아쉽게도 나의 하니프 쿠레이시 작가의 독서 여정은 이제 단 한 권(<바디>)만을 남겨 두고 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작품이 달랑 세 편 뿐이니 어쩔 수가 없다. 열음사에서 시나리오 <마더>가 출간될 예정이라고 소설의 뒷날개에 적혀 있었는데 현실화되지 않은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한 작가의 글 세 편 정도는 읽어야 그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다행인지 그 기준은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꽤 두툼한 책이었는데 예상 외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올해 만난 베스트 10에 넣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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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세계문학의 숲 40
카슨 매컬러스 지음, 서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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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카슨 매컬러스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을 다 읽었다.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사실 집중해서 읽었다면 2-3일이면 다 읽었겠지만, 그 사이에 내 관심을 파고든 하니프 쿠레이시의 책들을 만지다 보니 좀 더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해서 마무리 짓지 못한 책들이 몇 권이던가.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는 아직도 다 못 읽었다.

 

이 책 역시 역시 올해부터 관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한 모던 라이브러리 100선 중의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미국 출신의 카슨 매컬러스가 23세에 쓴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소설에는 모두 6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벙어리 유대인 존 싱어와 그의 절친한 친구 스피로스 안토나풀로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남부의 어느 소도시에 자리한 뉴욕 카페의 주인장 비프 브레넌, 고작 14살 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외국에 나가 자신만의 공간에서 살며 하고 싶은 일을 하겠노라고 일기장에 꼬박꼬박 적어대는 믹 켈리, 알콜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떠돌이 제이크 블런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흑인 계몽을 위해 자신을 바친 코플랜드 박사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외로운 영혼들이다. 친구 안토나풀로스말고는 달리 친구가 없는 존 싱어는 은둔자 같은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 태양 주변을 맴도는 위성들처럼 존 싱어의 주변에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하나둘씩 모여 들기 시작한다. 당찬 소녀 믹 켈리는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돌보며 하루를 보낸다.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지만, 시계수리를 하며 사는 켈리 집안에서는 불가능한 꿈일 따름이다. 직업학교에 진학해서도 작곡 공부를 하며 돈을 모아 피아노 살 궁리만 하는 켈리. 동생 버버가 장난삼아 쏜 총에 진짜 탄환이 이웃집 베이비의 머리에 맞으면서 단란해 보이던 가정에 곤궁함의 폭풍이 몰아닥친다. 그녀에게 위층에 세들어 사는 존 싱어는 경외의 대상이다.

 

뜨내기 제이크 블런트 역시 마찬가지다. 오갈데 없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뉴욕 카페의 주인장 비프 브레넌처럼 존 싱어는 제이크에게 당장에 급한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해준다. 말을 하지 못해 한이 맺힌 사람처럼 제이크는 1930년대 말 미국 사회가 당면한 온갖 문제점들에 대해 토로하며 주변 사람들이 각성하지 않음을 광야의 선지자처럼 외치지만, 돌아오는 메아리는 공허하기만 하다. 그런 제이크에게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는 존 싱어와 그가 머무는 거처는 하나의 안식처로 작동한다. 존을 유일한 친구로 인정한 제이크는 숱한 방문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 초반에 무엇보다 음식을 좋아하는 스피로스 안토나풀로스는 일탈과 기행을 일삼다 결국 주립 정신병원에 보내지게 된다. 존 싱어가 누리는 행복 중의 하나는 친구들의 방문과 멀리 병원에 갇힌 신세가 된 안토나풀로스를 찾아가는 일이다. 여러 가지 선물을 준비해 가지만, 존의 뚱보 친구는 색다른 먹거리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평소 차분한 성정의 존은 오랜 친구를 대면하는 순간 수다쟁이가 되어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며 안토나풀로스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풀어 놓는다. 물론 안토나풀로스는 싱어의 말 아니 수화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대개 우리의 관계란 그런 일방통행이 아닐까. 삶에서 상호간의 교감을 이루는 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카페 뉴욕의 주인장 비프 브레넌도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제이크 블런트 같은 이에게 동정을 아끼지 않는다. 사실 장사에도 별로 뜻이 없어 보인다. 사랑하는 아내 앨리스를 잃고 나서도, 그는 영업을 계속한다. 마치 카페 문을 닫는다면 자신의 생이 다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이다. 매일 치의 신문을 모으는 기벽도 가지고 있다. 도대체 그 많은 신문을 모아서 다 어쩔 것이냐는 죽은 아내의 지청구도 모른 척하고 심지 굳은 사내는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카페를 24시간 돌리는 데 전력을 다한다. 카페를 찾아 담배를 사서 피우는 14살 짜리 꼬마 믹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다 지나 가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철저하게 주변인을 자처하면서도 소설의 한 풍경을 담아내는 인물이라고나 할까.

 

마지막 인물은 바로 코플랜드 박사다.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에서 막 벗어나는 순간의 미국 남부 시골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보인다.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세례가 도착하지 않는 미국판 벨 에포크 시대라고 해야 할까. 카슨 매컬러스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시대적 공간에서 동족에 대한 계몽을 평생의 임무로 삼은 박애주의자의 초상을 담대하게 그려낸다. 적어도 자신이 낳은 네 명의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내겠노라고 다짐했지만, 아내 데이지와의 결혼생활도 지켜내지 못했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들과의 끊임없는 불화로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근처 켈리네 집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는 막내딸 포셔만이 왕래하면서 이런저런 소식들을 전해주고, 음식도 해주는 일상의 풍경을 볼 수 있다. 한편 무신론자인 아버지 코플랜드 박사와 달리, 독실한 신자인 포셔는 혈육인 윌리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 생활을 하던 중에 백인 간수들의 가혹 행위 때문에 두발을 잃게 되자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 코플랜드 박사 역시 판사에게 항의를 하러 법원을 방문하지만 보안관 일행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얻어터지고 구치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소설은 그렇게 후반부로 가면서 모두가 행복했노라는 해피엔딩 대신 피할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1938년과 1939년은 유럽 대륙에서 파시즘이 대두하고 있던 시기였다. 파시즘의 본질을 알지 못했던 꼬마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국가의 본질을 일찌감치 깨닫고, 그들을 증오한다고 이웃의 믹에게 선언한다. 제이크가 일하는 서니 딕시 쇼단의 놀이공원에서는 흑인과 백인들이 충돌해서 결국 살인사건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그 중의 한 희생자는 코플랜드가 5달러 상을 준 랜시 데이비스였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꼬마 소년은 백인에 대한 흑인들의 증오를 숨기는 대신, 백인들을 내쫓고 흑인들이 지배하는 국가를 만들겠다는 황당한 생각을 당당하게 발표한다. 흑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폐병까지 숨겨 가며 전력투구하던 코플랜드 박사는 아들의 억울한 사정을 백인들의 방식으로 처리해 보겠다고 나섰다가 그들에게 말도 되지 않는 린치를 당하고, 가족들과 함께 낙향을 선택한다. “소도시”는 순수함과 동시에 끊이지 않고 유전되는 인종간의 폭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묘한 공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냉장고가 없어 아이스박스가 그 역할을 대신 하던 시절, 그리고 자동차 엔진의 시동을 걸기 위해서 크랭크를 돌려야 하는데 지나가는 흑인에게 명령하던 시절의 생경함이 소설의 곳곳에 묻어난다. 소설 <스톤 다이어리>에도 등장했던 1934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다섯 쌍둥이 이야기가 나와서 반가웠다.

 

카슨 매컬러스가 그냥 소도시라고 부르는 뉴욕 카페가 있는 마을에도 대공황 탈출기에 있던 미국의 날모습이 그대로 노출된다. 일상화된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심판의 날이 곧 올 것이라는 광신도의 모습을 비롯해서 제이크로 형상화된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고, 장애를 가진 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꼬마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소녀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미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인 총기사고까지 빠지지 않고 소설은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미국 사회는 그 시절보다 더 나아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카슨 매컬러스의 소설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정치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들을 빼놓지 않는 절묘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물론 그 중심에는 제목에서 말하는 ‘외로운 사냥꾼’들의 이야기가 서 있다. 모두가 외롭다고, 비록 물리적 대화를 나눌 순 없지만 예의 공간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준다고 생각하는 벙어리 존 싱어에게 달려가 하소연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을 고작 23살 짜리 아가씨(이 소설이 발표됐을 때 이미 유부녀였던가)가 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아무리 현대판 고전이라고 하지만, “고전이 다 그렇지 뭐”라는 나의 편견은 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 부분 교정되어야 할 것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 소설이 매력적이라는 말이다. 카슨 매컬러스는 생전에 모두 4편의 장편소설과 한 편 단편소설집(슬픈 카페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마침 절판된 열림원에서 출간된 <슬픈 카페의 노래>가 집에 있기에 시간 나는 대로 도전해봐야겠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표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좀 더 고색창연한 카페 테이블 사진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리딩데이트] 2015년 11월 8일 ~ 14일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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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감
하니프 쿠레이시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2009년 <한겨레21>에 실린 이주 2세대 문학을 권한다는 글을 보고서, 하니프 쿠레이시란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됐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는 작가였다. 그런데 쿠레이시가 작가로 데뷔하기 전에 이미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제목만 들었지 아직 본 적이 없는 영화다)의 각본을 쓰기도 한 글쟁이였다고 한다. 그전에 주목할 만한 커리어로는 1970년대 안토니아 프렌치와 카림이라는 이름으로 포르노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단다. 어쩌면 그의 작품 곳곳에 배어 있는 색정광의 이야기가 그냥 나온 것만은 아닌 것도 같다. 그외에도 18세 때부터 햄스테드 극장과 소호 폴리 등에서 연극 대본을 집필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0년 지금 한창 재밌게 읽고 있는 <시골뜨기 부처>로 비로소 작가로 데뷔했는데 그후에도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는 한참 전인 2007년 5월, 6월 그리고 8월에 집중적으로 쿠레이시가 쓴 세 개의 작품이 출간되고 모두 절판이 되었다. 지난 주에 그의 절판된 책 세 권을 모두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가장 품질이 좋고, 얇아 보이는 책이 바로 <친밀감>이었다. 너무 재밌어서 바로 데뷔작인 <시골뜨기 부처>도 열독 중이다.

 

원제가 정사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Intimacy>/친밀감은 아내 수전과 두 명의 아이를 떠나려고 준비 중에 있는 남자 제이가 겪는 단 하룻밤의 체험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제이와 수전은 결혼이라는 공식적인 절차를 밟지 않은 부부지만, 아무리 더 이상 아내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파괴해 버리려는 주인공에게 도덕적 비난을 퍼붓고 싶은 마음이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 글을 발표하던 시기가 때마침 하니프 쿠레이시가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친밀감>은 그런 작가의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아내와 자식들을 내버리고 가정에서 탈출해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는 친구 빅터에게 잠시 동안 얹혀살 궁리를 하면서 짐을 싸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 그렇게 처량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다고 굳게 믿는 애인 니나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꿈꾸는 동안만 행복한 남자 제이. 떠남이야말로 새로운 내일을 약속하는 새로운 변화의 약속이라는 미사여구로 아무리 치장을 한다 하더라도, 홀로 남아 자신의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담당하고 육아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수전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예단하는 제이의 모습에 저절로 냉소가 지어졌다.

 

한 때 자신을 매혹시켰던 수전의 장점이 어느 순간, 삶에서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는 제이의 고백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했다. 이별을 위한 자기합리화의 방법으로 백가지 이유들을 등장시킨다. 소설을 읽는 내내, 정말 제이는 수전을 떠날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왜냐하면, 소설에서 이 파렴치한 고백을 계속하는 제이는 순간마다 수전이 이랬다면 난 떠나지 않고 주저앉았을 것이라는 설정을 너무 자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순수한 에피쿠로스 신도인 제이가 과연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쳤다는 속세의 도덕적 비난마저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멘탈의 소유자인지도 궁금했다. 어쩌면 하니프 쿠레이시는 소설에서 그런 묘한 긴장감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고백하는 대로 순수한 욕망을 추구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복잡하면서도 다면적인 주인공이 가진 사고의 전개와 상황의 설정이 독자의 발목을 잡는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주인공 제이는 독자에게 묻는다. 더 이상 삶을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 현대사회에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신성한 신화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희생해야 하느냐고. 언젠가 대학동기에게 비슷한 질문을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가히 충격이었다. 오랜 시간, 종교와 사회에서 배운 도덕이 그런 불경한 설정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생래적으로 거부했다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오랜 고뇌 끝에 자신의 욕망을 실천에 옮긴 제이가 계획한 대로 행복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졌다.

 

[뱀다리] <친밀감> 주인공 제이는 하니프 쿠레이시의 데뷔작 <시골뜨기 부처>의 주인공 카림 아미르의 나이든 모습이 아닐까 하는 그런 엉뚱한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 그리고 이 소설은 이미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하는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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