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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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3년째 코로나 팬데믹이 계속되면서 일상이 무너져 버렸다. 이제 슬슬 일상으로의 복귀가 점쳐지고 있지만, 아직도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예상대로 코로나 시절을 다룬 소설이 나왔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율리 체 작가의 책이라 더더욱 반가웠다. 다 읽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동안에 다른 책들을 집적거리느라 그랬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소설 <인간에 대하여>의 주인공 도라 코르프마허는 금년 36세의 성공한 시니어 광고 카피라이터다. 그녀는 봉쇄령이 떨어져 모든 것이 마비된 베를린에서 지금 막 브란덴부르크의 시골 마을 브라켄으로 망명한 서울쥐다. , 그리고 기후전문가에서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해서 전염병 생태전문가로 변신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애인 로베르트로부터 도주한 신세기도 하다.

 

뮌스터 출신으로 함부르크와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서 생활한 그녀가 농장 관리인의 저택을 사서 씨감자를 심으려고 한다. 비슷한 처지의 내가 그녀라면 농삿일을 배워서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독일에서도 서울쥐를 시골쥐들은 그렇게 탐탁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 대표주자 중의 한 명이 바로 이웃집 나치 고테 프로크슈였다.

 

AfD에게 투표하고, 공식적으로 금지된 나치 당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대는 고테를 좌파 자유주의자인 도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율리 체 작가는 좀 진부한 설정이긴 하지만, 도라와 고테라는 두 이질적인 인간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서사를 조금씩 전개해 나가기 시작한다.

 

확실히 브라켄 마을의 삶은 대도시 베를린의 그것과는 다르다. 작은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지기 위해서는 개인의 지난한 노력과 무언가 획기적인 계기 그리고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율리 체 작가는 도시 깍쟁이에서 우직한 시골 농부로 그리고 이웃의 나치마저도 포용할 수 있는 그런 캐릭터로 조금씩 진화해하는 도라라는 멋진 캐릭터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나도 도라처럼 모든 것과 그리고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원한다. 그리고 소설 <인간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누구나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며,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타인에게 그런 우월감을 투영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됐다. 사실 나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이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동안 유지해온 삶의 방식이나 원칙을 바꾸어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악취를 풍기며, 외국인에 대한 격렬한 혐오를 스스럼없이 내보이고, 동성애 커플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브라켄 마을의 또라이 고테에게 접근하는 일은 좌파 자유주의자 도라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싶을 정도다. 어쩌면 이런 복잡다단한 세상 풍파에 대한 단상과 성찰은 저자 율리 체가 브란덴부르크주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복무하면서 얻게 된 성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시 한 번 평화로운 공존이 얼마나 쉽지 않은 미션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율리 체 저자는 고테와 도라라는 상극의 인물들을 전면에 배치한 다음, 소설의 다양성을 위해 조연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에 투입한다. 교아종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고테를 돕는 역할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죽음 이래 소원했던 아버지 요요 박사를 브라켄으로 소환하기도 한다. 자신과는 달리 엄격한 규칙 아래, 독일 중산층 시민의 전형의 모습을 보여 주는 인물로 바로 요요 박사다. 결국 직장에서 해고 통지를 받은 도라에게 경제적 도움과 의료적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적격의 캐스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보니 코로나 시국의 실업이라는 심각한 문제도 등장했구나. 코로나는 개인의 삶 뿐 아니라 기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능력을 인정받은 중견 광고 카피라이터인 도라도 먹고사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고테를 돌보기 위해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은 비싼 약들을 사고, 식료품과 담배를 사다가 결제 실패 위기에 봉착한 도라의 모습은 소비를 위한 수입의 원천인 직장으로부터 배제된 해고가 전달하는 위기의 단면을 그대로 전달한다. 하르츠IV로 당장 직장이 없어져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복지국가 독일의 모습도 이러할진대, 다른 나라들의 상황은 또 어떨까 싶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국 단위 봉쇄령을 내린 베를린 중앙정부와 브란덴부르크 시골의 브라켄 마을에 사는 이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점도 율리 체 작가는 미세하게 지적한다. 시골쥐들의 기본 마인드는 이렇다. 너희 서울쥐들이 뭘 안다고 우리네 삶을 이렇게 옥죄고 강제하는 거야? 물론 이 소설 한 편으로 그네들의 삶의 간극들을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상충하는 갈등의 면면들이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연쇄 그릴러 고테의 마지막을 위해 우리로 치면 마을잔치격인 파티를 열어 사람들이 모여 그간의 오해를 털고, 부어스트를 굽고 맥주를 들이켜는 장면에서는 도저히 서울쥐에게서는 엿볼 수 있는 없는 연대감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서로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해소한다는 판타지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사실 한 존재가 자신의 불안을 덜어내기 위해, 타인을 핍박하고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연쇄 그릴러 고테처럼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일종의 피해의식의 발로라고 한다면 또 그것도 이해할 만하지 않을까.

 

나와 다른 모든 것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시절이 도래했다. 그래도 작은 희망에 갖게 해주는 율리 체의 <인간에 대하여>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적당한 타협, 내려놓기, 그것도 아니라면 외면이라도. 율리 체는 하이데거를 인용해서 존재란 불안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요즘처럼 해소되지 않는 불안의 시대에 맞는 말이지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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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4-14 17: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리뷰 너무 좋습니다. 레삭매냐님! 저도 찜해놔야겠어요. 제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들이 담겨 있어서 공감하며 읽었어요. ^^*

레삭매냐 2022-04-14 17:50   좋아요 2 | URL
이 책은 읽는 재미와 사유
할 거리를 동시에 던져주
었다는 점에서 아주 만족
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율리 체 작가의 팬이
라는 건 덤입니다.

라로 2022-04-14 17: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벌써 3년째인가요? 하아~ 정말 일상이 되어 간 것인지,,,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렇잖아도 지난 번에 매냐님이 율리 체에 대한 글을 올리셔서
저는 모르는 작가라 검색하고 책 하나 장바구니에 넣었는데
오늘 결제를 할까 말까 고민중.^^;;
읽는 책도 많고, 산 책은 더 많고,,
아 참! 책 제목은 <새해>에요,,, 어때요? 별로면 다른 것으로 고를게요.
추천해 주세요.^^;;(막 조름)

레삭매냐 2022-04-14 17:54   좋아요 2 | URL
만은 아니구 아마 햇수로
3년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

제가 국내에 번역된 율리 체
작가의 책들은 모두 섭렵했
는데, 갠적으로는 <잠수 한계
시간>과 <형사 실프>가 좋았
습니다.

개취이니 부디 개의치 마시길.

라로 2022-04-14 19:40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먼저 추천하신 <잠수 한계 시간>으로 넣었어요.
근데 언제 읽을지,,, 더구나 리뷰가 대부분 어렵다는 얘기가 있는 것 같아서..
이 작가 어렵게 글을 써서 번역은 더 어렵게 되었을까요???
그런 책을 읽고 추천하시는 매냐님은 대단하십니다!!^^

mini74 2022-04-14 17: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라라는 캐릭터 궁금해집니다ㅎㅎ 저도 이 책 찜입니다 *^^* 매냐님이 작가분 팬이라시니 ㅎㅎ 저번 글에서부터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레삭매냐 2022-04-14 19:23   좋아요 2 | URL
네 수년 전부터 율리 체
판사님의 책들을 모조리
섭렵했습죠.

신간까지 다 읽고 나니
속이 다 세원~합니다.

책은 재미지고, 감동의
도가니탕이고 뭐 그랬
다고 합니다.

coolcat329 2022-04-14 21: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저 코로나 넘 지긋지긋해서 이 책 읽기싫었거든요. 근데 제목도 좋고 내용이 너무 좋네요.
율리 체는 <새해>를 읽어봤는데 이것도 정말 너무너무 좋았거든요.

레삭매냐 2022-04-14 21:43   좋아요 3 | URL
저는 오히려 코로나 팬데믹
을 기대하고 만났는데, 그
부분은 상대적으로 크게
다뤄지지 않았더라구요.

나와는 생각이 다른 이들과
‘공유 혹은 연결‘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coolcat329 2022-04-14 21:53   좋아요 3 | URL
오! 그렇군요. 감 잡았습니다. 찜하겠습니다~

페넬로페 2022-04-14 22: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겪은 코로나라는 사건이 소설의 소재가 되는군요. 역사의 한 장면 속에서의 경험에서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것 같아요.
율리 체 작가의 작품에 관심 가져보겠습니다^^
읽을 책이 많네요.
쌓이네요~~

레삭매냐 2022-04-15 09:01   좋아요 3 | URL
부디 코로나가 이제 역사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
네요.

세상은 참 넓고, 읽을 책들
은 부지기수입니다 참말로.

그레이스 2022-04-15 2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가 소개받았네요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2-04-16 09:12   좋아요 1 | URL
제가 몇 안되는 전작하는
작가라 그런지, 신간이 반
가웠고 또 시의적절한 소
재가 마음에 들었던 책이
었습니다.

새파랑 2022-05-07 07: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메냐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전 모르는 작가이지만 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

서니데이 2022-05-07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러블리땡 2022-05-0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ㅎㅎ 이 책 빨리 읽어봐야겠네요 ㅎㅎ

강나루 2022-05-0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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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를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작가의 기술을 칭송한다. 평양냉면 같이 슴슴한 맛의 카렐 차페크 작가의 다른 책들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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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4-11 1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평양냉면 ㅋ 왠지 딱 맞는 비유인거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2-04-13 17:47   좋아요 1 | URL
어제는 날이 더워서 냉면 생각이
났는데, 오늘은 다시 추워져서
뜨듯한 국밥 생각이 절로 나네요 ㅋㅋ
 
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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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 체 작가의 팬이다. 작가의 책이 나오면 무조건 읽는다.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을 다룬 소설이라고 하니 거부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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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미미님의 포스팅에 힘입어 지난 세기 최고의 전기 작가 아니 더 나아가 역사상 최고의 전기 작가일 지도 모르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를 책탑에서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내친 김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찾아냈다. 지난주에 그렇게 찾았는데 못 찾았었는데.

 

이마고 출판사에서 200812월에 출간된 <메리 스튜어트>3년 전에 중고서점에서 살 때부터 이미 절판된 책이었다. 멀리 서울까지 원정 가서 사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138쪽까지만 읽고 말았다.

 

그래서 어제부터 그전에 읽은 건 싹 다 무시하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던 책들이 많은데... 뭐 그런 건 모르겠고 삘이 꽂힌 책부터 만나야 한다는 나의 책욕심에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포스트잇은 많이 붙어 있지 않은데, 책안에 밑줄과 메모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서론에서부터 다른 역사적 인물들과 메리 스튜어트가 변별점을 가지게 되는 이유부터 아주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한다. 다시 한 번, 글쓰기에 있어 근거와 설명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깨닫게 되는 시간이다.

 

생전에 이미 메리 스튜어트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메리 스튜어트에 대한 자료들은 그야말로 차고 넘쳤다고 한다. 다른 인물들의 경우, 자료가 부족한 게 문제인데 메리 여왕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진영의 적대적 시선을 포함한 문헌과 증인들이 무수히 존재했다. 역설적으로 이런 점이 그녀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을까.

 

생후 6일만에 아버지 제임스 5세가 병사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어 왕국과 왕관을 탐내는 이웃의 숙적 잉글랜드로부터 시작해서 유럽 각국의 목표가 기구한 운명. 6세에는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 왕국의 세자빈이 그리고 16세에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척지게 되는 긴 악연 또한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 중의 하나였다. 요즘에도 드문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

 


아직 평전의 초반이라 중간과 엔딩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1587년 메리 스튜어트는 유럽 군주 중에서는 최초로 단두대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유럽 군주 흑역사의 스타트를 끊은 비운의 인물이었다.

 

당장 읽지 않아도 좋은 책이라면 일단 사두어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래야 도서관에 가는 수고를 덜고 아무 때나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혹은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이렇게 사서 쟁여두고 수년을 묵힌 책에 대한 변명과 자기 위로를 주말 아침에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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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 만에 예전에 읽었던 지점을 돌파해 버렸다. 역시나 읽은 부분은 진도가 잘 나간다.

 

그리고 그전에 나무위키에 실린 메리 스튜어트 부분도 찾아서 읽어봤다. 한참을 읽었다. 아무래도 튜더 왕조 출신의 문제아 헨리 8세 시대에 대한 이해가 없다 보니, <메리 스튜어트> 평전을 만나면서 헷갈리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 이전에 메리 여왕도 있지 않았던가.

 

메리 스튜어트가 태어난 스코틀랜드는 유럽의 변방으로 가난하고 내전에 시달렸다. 그 덕분에 대항해시대를 맞아 두 세계에서 강대국으로 신장하고 있던 스페인 같은 나라나 백년전쟁을 끝내고 유럽 중심의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프랑스와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웃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호전적인 귀족들을 부추겨서 반란을 획책했다.

 

6세에 세자빈이 되어 프랑스 궁정으로 떠났다가 13년 만에 소녀과부가 되어 돌아온 메리 스튜어트에게 스코틀랜드는 그야말로 후진 나라가 아니었을까. 이복오빠였지만 서자 출신으로 왕위계승권이 없었던 모레이 경 제임스 스튜어트가 그나마 섭정으로 메리 여왕의 부재 중에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게 다행이었다.

 

가톨릭 여왕에 맞선 빌런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츠바이크가 직접 늙은 광신자로 명명한 존 녹스였다. 그는 하급 성직자 출신으로 가톨릭을 사탄의 종교라고 비판하며 여왕까지도 창녀라는 비유를 마다하지 않는 극렬분자였다. 츠바이크는 가톨릭 교도였던 메리 스튜어트와 존 녹스의 그것을 신념의 대립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후자가 츠바이크가 극도로 혐오하는 광신자였다면, 전자는 에라스무스, 카스틸리오네 같은 인문주의자로 귀결된다.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에서 13년을 보내고 스코틀랜드에 상륙했을 때, 이미 나라는 칼뱅 교도들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국가적 종교 갈등을 피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메리 스튜어트의 개종이었지만, 신념의 군주였던 메리 스튜어트는 죽는 날까지 가톨릭을 버리지 않았다. 스코틀랜드는 국내의 종교 문제, 외세의 개입, 수시로 발생하는 반란과 폭동으로 바람 잘 날이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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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4-09 08: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사러 원정˝ 이보다 더 레삭매냐님, 여기 북플계의 정서를 잘 드러내주는 행위가 있을까 싶네요. 저는 복불복, 겟을 기대하고 순례한 적은 있어도 특정 애정템때문에 원정 가본 적은 없어서 더욱 인상 깊게 레삭매냐님 경험이 마음에 박혔습니다. 책탑 어제 쓰러뜨리시지는 않으셨는지요?^^ 내침김에 한나 아렌트 책까지 찾으셨다니 소득이 크십니다^^

레삭매냐 2022-04-09 09:13   좋아요 4 | URL
아마 달랑 한 권 때문만은 아니고
<메리 스튜어트> 사러 가는 길에
세 권을 샀답니다. 이웃 K문고에서
는 예전 구매 기록을 제공해 주지
않아서 불편한데 램프의 요정은
주욱 보여주니 애정하지 않을 수
가 없네요.

사실 타겟 원정보다는 복불복 원
정이 책쟁이들의 로망이지효.

책방 중앙의 웅장한 책탑에는
도전하지 않고 찾아 다행이었답
니다 ㅋㅋ

얄라알라 2022-04-09 08: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변명이 아닌, 자랑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진심, 아무나 보여줄 수 없는 사랑이십니다^^

레삭매냐 2022-04-09 09:13   좋아요 4 | URL
아, 걸렸나요?

은근 자랑질도 초큼은
배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mini74 2022-04-09 08: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책탑에서 마치 공주님 구출한 느낌 입니다. 아. 공주님 맞군요. 좀 포악해 보이시지만 ㅋㅋ저도 이 책 읽고싶어요. 전 공주님을 자본의 힘으로 구출해보겠습니다 매냐님 ㅎㅎㅎ

mini74 2022-04-09 08:53   좋아요 5 | URL
헉. 중고도 없네요 ㅠㅠ 죄절 ㅎㅎ

레삭매냐 2022-04-09 09:15   좋아요 5 | URL
에헴, 이 책이 나름 귀한 책이라
저도 시간 좀 걸려서 구했답니다.

이런 책은 왠지 도쇼깡에서 빌려
다 읽기는 거시키해서요.

다스 카피탈 파워가 미니님을 책
으로 인도해 주시리라 굳게 믿슙
니다. 건승.

새파랑 2022-04-09 10: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서재는 왠지 중고서점의 느낌 이 들거 같아요 ㅋ 보물창고 느낌? ^^ 삼년전에 득템하셨군요~!!

레삭매냐 2022-04-09 11:29   좋아요 2 | URL
3년 전에 초큼 읽었던 기
시감으로 술술 읽고 있답
니다.

정리한다고 하면서도 계속
해서 책을 사들이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레이스 2022-04-09 10: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신간!
재출간되면 그때 새책으로 들여놔야겠네요
얼마전에 광기와 우연의 역사도 다시 들여놨어요^^
읽은 책 신간으로 들여놓기에 아깝지 않은 작가죠. 츠바이크는

레삭매냐 2022-04-09 11:30   좋아요 3 | URL
저로 새 버전이 좋으나
언제가 될 지 몰라서 일단
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나오게 되면
잘 안 사게 되더라구요.
심지어 역자도 같더라는.

버뜨, 츠바이크는 그러합니다.
1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coolcat329 2022-04-09 11: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부럽습니다. 상태도 좋네요.
제발 새 책으로 나오길 바랄뿐입니다.

레삭매냐 2022-04-09 20:47   좋아요 2 | URL
이화북스에선가 슈바이크
의 책들을 꾸준하게 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가가 돌아 가신지 오래
되서, 판권이 소멸된 게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저도 새 책 기대하고 있습니다.

청아 2022-04-09 14: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새책 같은 중고를 득템하셨었네요!!! 표지도 생각보다 더 근사합니다. 그럼요~ 좋은 책이면 사두어야한다는 진리를 저는 레삭매냐님 덕분에 실천하고 있습니다.ㅎㅎ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것도 안타까운데 많은 자료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일지 알수없다는 점도 슬프네요. 그래도 이 책을 읽는다면 어느정도의 맥락은 파악할 수 있을듯해요! ^^*

레삭매냐 2022-04-09 22:17   좋아요 2 | URL
아주 오랜 사냥 끝에
얻은 책이라 그런지
더더욱 귀하게 여겨지네요.

아무럼요, 당장 읽지 않을
책이라도 사두어야 합니다
넵!

비극의 주인공이어서 더더
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참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뭐랄까 밀린 숙제를 하는 그
런 느낌이랄까요.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나는 아주 오랫동안 <중경삼림>의 첫 번째 에피소드보다 두 번째 에피소드가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두 번째보다 첫 번째가 더 낫지 않나 싶은 쪽으로 생각의 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두 개의 이야기 모두 매력적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고.

 


경찰 663(양조위 분)과 페이(왕정문 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중경삼림>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마마스 앤 파파스>의 노래 <캘리포니아 드리밍>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아마 이야기가 반쯤 덜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럴 정도로 페이는 이 노래에 미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콩의 중국 반환을 3년 앞둔 1994,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이 홍콩의 밤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아마 그 때만 하더라도 공산주의 정권과의 기묘한 방식의 동거가 결국에 가서는 강력한 억압과 족쇄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항상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말이다.

 


페이는 사촌오빠의 가게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새로운 점원이다. 그녀는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하지무와 잠시 대면하고 곧바로 주변을 순찰하는 경찰 663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경찰 223663의 공통점은 바로 둘 다 경찰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최근에 실연했다는 점도.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사장은 영업 신장을 위해 맨날 스튜어디스 애인에게 샐러드만 사다 주는 663에게 생선튀김도 한 번 사다 주라고 권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피자도 권했던가. 이게 사단이 되어, 무더울 여름날 하이네켄 맥주를 즐겨 마시던 스튜어디스 애인을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가 버렸다. 이런 경우엔 사장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 음식에도 이렇게 많은 종류가 있다는데 사랑은 아마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 663의 여자친구는 바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다. 편지 한 통과 집열쇠를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남겨둔 채.

 

가게 점원들은 사장을 필두로 해서 모두 편지를 뜯어서 본다. 그리고 페이에게 그 내용을 전달할 임무를 맡긴다. 663은 편지를 잠시 맡아 달라고 말한다. 그 다음부터 우리가 잘 아는 페이의 663 집의 유쾌한 침투작전이 시작된다. 그 시절에는 재밌게 보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지금은 모두 범죄였다! 놀랍지 않은가. 우선 타인의 편지를 훔쳐보면서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페이가 663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했다는 거다. 이건 주거침입죄에 해당한다.

 

<중경삼림>에는 왕정문(혹은 왕비)이 부른 <몽중인>(Dream Lover)이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663의 집에 페이가 무단침입하던 중에 한 번 그리고 엔딩 컷에서 한 번. 음악을 들으면서 약간 전율했다고나 할까. 이제는 지나가 버린 오래전 청춘의 기억이 떠올라서가 아닐까 싶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663과 사랑에 빠진 페이는 열쇠로 그의 집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재밌는 행각을 벌인다. 그러니까 전 애인인 스튜어디스 주가령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아를 만들었지만, 페이는 스스로 갈라테아가 되고자 한 걸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고 결국 663의 집에 맘대로 드나들던 페이는 결국 그에게 꼬리가 밟히고 만다.

 

삼십대 초반의 그윽한 눈빛의 양조위가 맡은 경관 663은 정말 사람 좋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들이대는 페이의 무거운 짐을 들어 주기도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전 애인이 다시 돌아왔을 거라는 직감에 느닷없이 자신의 집으로 들이닥친 663은 집에 숨어 있던 페이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건 좀 억지스러웠는데. 어쨌든 재밌긴 하더라.

 

자신만 바라보던 페이의 감정을 드디어 알게 된 이 남자는 페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어느날 밤 8시에 캘리포니아에서 만나자고. 그리고 페이는 캘리포니아 바가 아니라 스튜어디스가 되어 진짜 캘리포니아로 날아간다. 사촌오빠인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사장에게 663에게 편지를 한 장 건네주라고 했던가.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다음, 이전의 촌스런 단발에서 세련된 모습으로 변신해서 등장한 페이. 아마 경찰을 때려치우고, 페이의 사촌오빠에게 가게를 인수 받아 새로운 개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만나고, 다시 한 번 왕정문이 부른 <몽중인>이 흐르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처음 이 영화를 볼 적에는 그저 캘리포니아가 이상향으로 제시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캘리포니아는 고독하고 불안한 청춘들에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얼른 홍콩에서 탈출해서 사시사철 태양이 내리쪼이는 곳으로 튀라고. 나중에 가서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 시간과 기회가 있을 때 어서 자유롭게 살 길을 모색하라고 WKW가 영화 속에 숨겨둔 지령이었던 것이다.

 

페이가 663의 집에 가져다 들이 붓는 금붕어 역시, 홍콩이라는 시공간에 갇힌 그네들의 다른 상징으로 읽힌다. 페이가 663의 전 애인인 주가령의 흔적을 지우려는 부단한 노력도 애절하기만 하다. 돋보기를 듣고 침대 위에서 긴 머리카락을 찾아낸 페이는 633이 즐겨 찾는 식당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의 머리를 들춰 보기도 한다. 이 정도면 편집증 아닌가? 한편으로는 우스워 보이는 장면들도 심리학적 분석의 틀에 넣어 보면, 좀 그렇다.

 


세월이 그렇게 오래 흘러도 663 역을 맡은 양조위의 눈빛 연기는 참 인상적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왕정문이 부른 <몽중인>의 전율을 일으키는 기타 사운드는 최고였다. 동경의 대상이던 공간이 홍콩이 예전 같은 모습을 잃어버린 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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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4-08 1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인생영화라 레삭매냐님 리뷰 읽으니 다시 또 보고싶어지네요!

아~~주거침입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죠ㅋ 그것도 감히 경찰의 집을ㅋㅋㅋ지문을 남기지 않으려고 고무장갑을 끼었던가요? 😆

왕정문의 크랜베리스와 닮은 듯 다른 가창력과 노래 때문에 더 좋았고 양조위 이 영화에서 젤루 눈빛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레삭매냐 2022-04-08 19:37   좋아요 2 | URL
이건 뭐 봐도봐도 질리지도
않고 또 새로운 것들이 보이니
과연 걸작이라 부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니깐요. 그 시절에는 걍
일할라고 고무장갑을 꼈나
싶었는데 이제 다시 보니,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는 치
밀한 플랜!이었네요 그래.

크랜베리즈의 원곡인 <드림
즈>와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스타일의 <몽중인> 참
으로 좋아했던 기억입니다.
오리지날 CD를 심지어 홍콩
HMV에 직접 가서 공수해 왔
던 것으로... 그러합니다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