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사이
케이티 기타무라 지음, 백지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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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처음 듣는 작가인 케이티 기타무라의 <친밀한 사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서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원래 리뷰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따끈따끈할 때 써야 한다는 나만의 원칙을 지키지 못했나 보다. 그래도 기록을 위해 기억을 더듬어 가며 리뷰를 써본다.

 

주인공 여성은 여러 가지 언어에 능한 통역사다. 최근까지 뉴욕에 살던 주인공(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머지 가족은 싱가폴로 가고 자신은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통역사로 취직되어 헤이그로 이사했다. 문득 이 소설에서 이름 없는 주인공의 익명성은 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나 싶다. 모름지기 이름이 누군가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마련이니까. 어느 의미에서 주인공은 미국 작가들이 선호하는 국외자(expatriate)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헤이그에서 통역사로 일하면서 이런저런 '친밀감'을 동반한 관계들을 맺어간다. 아마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여전히 국외자 신분이기 때문에 예의 적정 수준의 친밀감을 넘지는 않는다.

 

독자는 주인공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하는 통역사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예상했던 대로 모종의 임무가 주어진다. 그것은 서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의 독재자로 반인도적 범죄를 필두로, 다양한 죄목으로 기소된 전직 대통령을 위해 통역하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빛과 어둠은 있는 법이지. 민간인 학살과 불법 체포와 구금 등 예상되는 독재자들의 일반 형태를 그는 그대로 따른다. 재판에 앞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무고한 독재자를 풀어 달라는 시위에 나선다. 어라,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그래.

 

주인공은 헤이그 출신의 부유한 남성 아드리안과 썸을 타는 중이다. 그는 아내와 이혼 과정에 있다. 무언가 깨끗하게 주변 정리를 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으면 좋을 텐데. 리스본으로 간 아름다운 아내 개비와 아이들을 쫓아 아드리안은 헤이그를 잠시 비우고 주인공에게 자신의 아파트에 와서 지내라는 제안을 건넨다. 주인공이 새로운 애인 아드리안에게 느끼는 친밀감은, 상대방인 아드리안이 느끼는 자신의 가족과 전(?) 아내에 대한 친밀감을 넘어서지 못하는 느낌이다. 결국 주인공은 다시 한 번 자신이 결국 국외자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와 마주하게 된다.

 

한편, 독재자는 자신의 모국어인 아랍어 통역 대신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통역을 의뢰한다. 게다가 독재자는 자신의 변호사로 개비의 지인이자 아주 유능한 것으로 알려진 케이스를 선임한다. 이런 불편한 관계의 설정은 뭐랄까, 불편한 사이에서 피어나는 친밀함을 목표로 한 그런 빌드업이 아닐까 싶다.

 

도대체 기타무라 작가가 모델로 삼은 독재자가 누군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코트디부아르 출신 로랑 그바그보라고 한다. 모국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에에서 무려 박사 학위를 받은 인텔리 출신 정치인이었다. 소설에서 독재자가 아랍어 통역 대신 프랑스어 통역을 고수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한 때, 민주화투사였던 인사가 독재자로 변신해서 선거에 불복하고 나라를 내전의 수렁에 빠뜨리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그바그보는 전직 국가수반으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사법재판소 법정에 서기도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유딧 레이스터르의 <젊은 여자에게 돈을 건네는 남자>라는 그림을 찾아 보기도 했다. 현대에 사진이 이미지와 상징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면, 근대에서는 회화가 그런 역할을 했다. 작가의 설명으로 보는 그림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는 명확하게 다가왔다. 케이티 기타무라는 그림의 심부에 "존재하는 불일관성"이 직조하는 긴장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소설에서는 과연 어떨까?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독재자를 반인도적 범죄로 기소하고 재판을 진행했지만, 다수 증거와 증인들의 실체적 증언에도 불구하고 소추관들은 인용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했다. 도덕적으로 독재자는 분명 유죄였지만, 법리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바로 이런 불일관성이야말로 작가가 <친밀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그바그보 역시 현실세계에서 무죄 판정을 받고 풀려나는데 성공했다. 정의의 불일관성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모양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에서의 친밀감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느끼는 어떤 친밀감이 더 나은 관계로 이끌어 간다는 보장이 없다. 주인공 역시, 재판소 통역관 일을 마치고 또 다시 부유하는 이방인이 된다면 지난 일 년 동안 쌓아올린 친밀감 역시 모래성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 친밀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일까.

 

<친밀한 사이>는 케이티 기타무라의 네 번째 소설이라고 한다. 프린스턴 출신으로 무려 문학 박사이기도 하다. 어려서는 발레를 배우기도 했다고. 다음달에 신간 <오디션>이라는 새로운 소설이 출간 예정이라고 하는데, 플롯을 보니 상당히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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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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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부터 읽기 시작한 폴 린치의 <예언자의 노래>를 어제 다 읽었다. 이 책 역시 달궁 모임의 버프라고나 할까. 다 읽지도 않은 책이었지만 왠지 느낌이 좋아 6월의 독서 모임 책으로 추천했다. <예언자의 노래> 대신 유디트 헤르만의 <레티파크>가 선정됐고, 일단 <레티파크>부터 다 읽고 나서 <예언자의 노래>를 읽었다. 다음은 <카이로스> 차례다. , 이 리뷰에는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조해 주시길.

 

어제 책의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근래 내가 읽은 책 중의 최고라는 점이었다. 2023년 부커상 수상이 허명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사실 책의 초반에는 아일랜드에서 내전이 벌어진다는 설정이 좀 이해가 되지 않아 몰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비상대권법 시행 후 전체주의적 국가가 시민들의 삶을 옥죄고 각종 시위들을 강압적으로 진압하는 와중에 교원 노조 소속의 래리 스택이 불법체포되는 장면을 거치면서 서사의 수레바퀴가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네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워킹맘 아일리시 스택이다. 갑자기 닥친 남편 래리의 부재는 아일리시를 실질적 가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르다라는 비밀조직을 통해 시민들을 감시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장면에서는 숨통이 턱턱 막혀왔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희대의 사건을 겪어서 그런지 소설이지만, 아주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멀쩡하게 유지되던 민주주의가 파괴되어 가는 과정은 비극이었다. 친정부 극우세력은 반대세력에게 조소와 경멸을 보낸다. 그들은 무력을 바탕으로 해서 각종 제약을 가한다. 아일리시는 마크, 몰리, 베일리 그리고 간난쟁이 벤을 비롯해서 치매에 시달리는 아버지 사이먼까지 돌봐야 한다. 물론, 위태로운 직장에서 일자리를 고수하며 식구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건 선택이 아닌 의무처럼 다가온다. 일찍 캐나다로 떠난 여동생 아냐가 부러워지는 그런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문득 1930년대, 독일의 대대적인 유대인 핍박이 시작되기 전 나고 자란 조국 독일을 떠난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회가 있을 때, 왜 나머지 유대인들은 떠나지 않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까라는 장면과 매우 유사하게 겹치기 시작한다.

 

스택 가족의 위기는 불법체포되어 구금된 아버지 래리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이제 막 17세가 된 마크에게 징집영장이 떨어지고, 아일리시는 캐럴 섹스턴의 도움을 받아 아들 마크를 그녀의 집에 숨기기로 결정한다. 물론 마크는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전히 래리의 행방을 알 수 없는 가운데, 해외 이주를 위한 여권 발급이 거절되고 결국 마크는 캐럴의 집에서 나와 반군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그 다음부터는 아일랜드가 아닌 시리아의 현실을 대입해도 무방할 것 같다. 결국 반군과 정부군의 내전이 격화되고 아일리시가 사는 삶의 터전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다. 처음에는 전기가 그리고 나중에는 물까지 끊기는 사태가 발생한다. 우리 어머니가 일찍이 말씀하셨지, 전기와 물만 끊어져도 문명세계는 암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박격포탄과 로켓탄이 곳곳에서 터지고 나중에는 공습까지 발생한다. 결국 반군이 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반군이라고 해서 그전의 파시스트 정부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캐나다에 사는 동생 아냐는 손을 써서 아일리시의 가족과 아버지 사이먼을 탈출시키려고 하지만, 아일리시는 주저한다. 끌려간 래리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장남 마크마저 어디에 가서 무얼 하는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베일리가 머리에 파편을 맞아 부상당하고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위기가 닥친다. 이제 스택 가족의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조짐을 보인다.

 

<예언자의 노래>에는 유럽을 강타한 시리아 난민 문제를 전면에 배치한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행동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 그리고 종교를 지닌 이들이 기존 사회에 적응하기란 난망하다. 유럽에서 부흥하는 극우 전체주의세력들은 자국 내에서 소수인 난민들을 적으로 삼아 자신들의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 그리고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정치적 목소리를 얻는데 일부 성공하는 현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 독일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AfD2당의 위치에 오른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가상현실이긴 하지만, 내전 중인 아일랜드는 비극적 디스토피아의 재현이다.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고한 아이들을 징집해서 부족한 병력을 채워 공안부대로 사용한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변수가 아닌 상수다. 직장에서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은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해고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직은 곧 절대빈곤으로의 추락을 의미한다. 아일리시 역시 20년 동안 정규직으로 일한 박사 학위 보유자였지만, 마트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빌런들에게 이런 위기 상황은 돈벌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된다. 검문을 통과하는 비용을 사람들에게 매기고, 또 국경을 넘을 수 있다고 꼬드겨서 막대한 돈을 갈취한다.

 

더 이상 고향에 살 수 없게 된 아일리시는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결국 월경을 선택한다. 그 과정은 순탄할까? 물론 절대 아니다. 악랄한 포식자들은 곳곳에서 아일리시 가족들을 위협한다. 어쩌면 이런 보통의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우리들도 난민이라는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 닥칠 수도 있는 그런 위험이다. 자기 혼자라면 어떻게라도 해보겠지만, 자신이 돌봐야 하는 어린 식솔들이 있다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런 위기 속에서 가장의 부재는 환상인지 모를 래리의 등장으로 독자를 착각에 빠뜨리게 만든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아일리시의 처지에 나를 대입해 보게 된다.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일상을 다 버리고, 과감하게 식솔들을 데리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타국에서의 삶에 자신의 운명을 내던질 수 있었을까? 긴박한 결정이 필요한 순간마다, 나의 결정이 어떤 후과를 초래하게 될지에 대해 신속한 판단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러기에는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위기의 순간들이 너무 급박하게 전개된다. 아일리시에 판단에 대해 누가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아일리시의 어린 자녀들인 베일리와 몰리 들은 처음에는 어린 아이였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위기의 파고들을 넘으면서 원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어른으로 변신해 간다. 진짜 아기인 벤은 이런 위기들의 트라우마가 각인될 거라고 저자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한다. 매우 공감이 가는 서사의 빌드업이라고 생각한다.

 

20253월에 만난 폴 린치의 <예언자의 노래>는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수작이었다. 나는 왜 이 책을 무려 4개월이나 묵혀서 읽었는지 모르겠다. 모름지기 책과의 만남은 이런 타이밍이 있나 보다.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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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3-16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이밍! 맞네요.
얼마전 이러다 내전 ? 얘기가 나올때도 이 책이 떠올랐어요.
너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레삭매냐 2025-03-16 14:37   좋아요 1 | URL
그렇죠 현 시국와 맞물려서
아주 긴박하게 읽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쉬르리얼리스틱하다
는 느낌에 얼얼하네요.
 
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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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숨동지의 추천으로 다음 달궁 책으로 정해진 책이 바로 유디트 헤르만의 <레티파크>였다. 모두 17개의 소설집이 담겨 있지. 작년 가을에 읽기를 시도하다가 실패한 책. 물론 읽다만 부분들은 기억이 휘발해 버렸다. 유디트 헤르만의 짧은 소설들은 뭐랄까 밍밍한 맛의 평냉을 먹는 그런 느낌이랄까. 강렬한 한 방이 없다. 그냥, 그렇게 모든 이야기들이 지속하다가 그대로 흘러가 버리는 느낌이다.

 

문득 작가는 누굴 위해서 글을 쓰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참 그전에 나는 유디트 헤르만의 팬이던가? 작가의 책들을 계속해서 읽어 오지 않았던가. 예전에 읽었던 내용들과 유추를 시도해 보지만 휘발해 기억 속에서 난망할 따름이다. 1998년에 시작된 작가 경력이 사반세기가 넘는다는 50대 작가는 이제 더 이상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쓰고 싶은 그런 글을 쓰는가 싶다.

 

어차피 달궁 모임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사실 고도의 집중력(?)을 동원해서 <레티파크>를 만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무언가 이야기할 만한 꺼리들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그건 아니지 싶다. 리뷰에 무언가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억지로 이야기를 픽업할 필요가 있냐면 역시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흘러가 버리면 그런 대로 나는 책을 읽는다.

 

어느 이야기에 나오는 낸터켓에는 미처 가보지 못했다. 대신 그 부근의 마사스 비니어드에는 가봤지. 그 해 여름은 정말 인생 최고의 여름으로 기억될 것 같다. 한무리의 지인들과 배를 타고 들어가서 조금은 낯선 환경에서 보고 느끼는 것들, 배를 놓칠까봐 부리나케 선착장으로 향하던 일들이 기억난다. 그곳에서 보낸 여름의 시간들은 무더웠지만, 기억은 찬란하게 남았다.

 

그 다음에는 같이 살던 친구의 귀국 즈음해서 갔던 케이프코드의 끝자락 게이들의 천국이라는 프로빈스타운의 추억도. 추운 겨울날이라, 게이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지. 그리고 보니 남자 둘이 겨울바다를 찾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우릴 게이로 봤을 수도 있겠구나. 알록달록한 사탕이 가득했던 캔디샵에서 사탕을 샀던가. 곳곳에 그려진 인어 그림이 기억에 남는다. 유디트 헤르만이 구사하는 종잡을 수 없는 서사에서 그런 다양한 기억들이 소환되었다.

 

JFK 생가에 들렀다가 만난 하이애니스에서 오신 노래 클럽 소속의 아줌마들이 찍어준 사진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사진을 인화해서 편지에 담아 보내주시기까지 했지. 그게 벌써 지난 천년의 기억이로구나.

 

내 생각에 아마 유디트 헤르만 작가 역시 나처럼 그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엮어내지 않았나 싶다.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어느 독일 부부는 러시아로 가서 알렉세이라는 이름의 입양 후보 어린이를 만난다. 당연히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부부를 알렉세이는 피한다. 하지만 운명은 독일 부부와 알렉세이를 연결해 주었고 결국 부부는 알렉세이를 독일로 데리고 올 결심을 한다. 그리고 알렉세이는 독일식으로 이름을 바꾸었던가. 독일에 온 러시아 어린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독일인으로 바꾸고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물론 후속 이야기는 없다. 나머지는 오롯하게 독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오데사에 가서 숙소 호객을 당한 두 여성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특히 어둑어둑한 저녁 시간이라면 더더욱. 길도 모르지, 온통 낯선 곳 투성이인데 어찌 하룻밤을 지낼 숙소를 정한단 말인가. 그리고 베를린에 갔을 때 숙소를 정하지 못해 중앙역 서비스 센터에서 2유로인가를 내고, 도움을 받은 기억이 난다. 지리를 몰라서 숙소를 찾아가는데 좀 버거웠다. 숙소는 도미토리였는데 독일 친구들을 다들 일찍 자는지, 불을 끄고 다들 드러누워 있어서 씻고 등을 누이기까지 바짝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자못 무서워 보이는 아주머니들과 가격 흥정을 하고, 그녀를 따라 나서지만 결국 숙소에 머무르지 않고 나오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돈을 내지 않은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둘이서 하는 여행의 장점도 있지만 그냥 하룻밤 잠만 되면 되는 게 아닌 친구의 의견도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오래전에는 나홀로 여행을 선호했었다. 아무런 제약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런 여행길의 매력이란. 지금도 가끔 그런 나홀로 여행을 꿈꾼다.

 

유리 가가린 카페에서 굽타 박사와의 정신분석 상담 이야기도 있구나. 외로운 현대인들은 그냥 박사가 아니더라도, 그냥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냥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소소한 수다를 할 수 있는 친구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사실 중요한 이야기들을 상담한다고 해도, 결국 최종 판단의 주체는 자신이 아니던가. 이렇게 다양한 층위의 부유하는 이야기들이 담긴 <레티파크>란 소설을 읽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도무지 작가의 의도를 읽지 못해 헤매는 것도 오롯하게 내 선택이라는 거지.

 

어쨌든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쓰고, 독자는 그 중에서 자신에게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골라 읽는다. 물론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고. 마치 오늘 아침에 자욱한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그런 경험을 할 때도 있고 말이지. 내가 읽은 <레티파크>는 그랬다고.

 

<뱀다리> 예전부터 궁금해 하던 이반 곤차로프라는 작가의 이름을 보니 반가웠다. 그의 작품인 <오믈로모프>가 출간되어 있더군. 미리 사둔 이반 부닌도 마찬가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를 희망도서로 신청해 두었는데, 이달에는 만나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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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흐메트 알탄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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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에는 진입장벽이 있다. 터키 출신 작가 아흐메트 알탄의 <나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16715일에 발생한 쿠데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책은 실패한 쿠데타 이후 두 달 뒤에 체포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아흐메트 알탄이 교도소에서 쓴 옥중수기다.

 

2016715, 일단의 터키 장성들은 이슬람주의로 회귀를 도모하는 미래의 독재자 에르도안의 통치에 반발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6시간 만에 에르도안의 신속한 대응으로 쿠데타가 제압되면서, 피의 숙청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우리의 주인공 아흐메트 알탄에게까지 몰아 닥쳤다.

 

경찰이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올 것을 대비해서 모종의 준비(?)를 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소설 <시대의 소음>에 등장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고 사십오 년 전 작가와 형제 메흐메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알탄 형제 역시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히는 영어의 몸이 되었다.

 

그 뒤에 벌어지는 투옥과 심문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사법당국이 내세운 죄목과 그에 대한 증거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흐메트 알탄이 쓴 몇 개의 칼럼과 방송 출연을 증거로 68세의 노작가에게 국가노반역죄라는 무시무시한 죄목과 함께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했으니 말이다. 시간적으로 나중에 언급되는 사건들을 미리 말해 버렸네.

 

솔직히 인신구속이 되어 보지 않아서, 전적으로 작가의 심리 상태에 공감할 수 없을 것 같다. 현대판 술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에르도안은 실패한 쿠데타를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현대판 술탄은 자신에게 불리한 일체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독재자들의 특징이 바로 그런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라는 걸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동시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출신 지식인의 비판이 그만큼 무섭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이 불안할 때 담배를 피운다고 말한다. 투옥되고 나서도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동안 자신이 접하고 익힌 문학의 힘으로 그는 어쩌면 정신줄을 놓고 미쳐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상태를 이겨낸다. 아니, 지난 주말 독서모임에서 토론했던 문학이 결국 육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그런 결론과 이렇게 맞닿게 된다는 설정인가. 좁은 공간에 갇혀, 생전 처음부터 보는 이들과 강제로 지내야 하는 공포와 두려움을 작가는 문학적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이겨낸다. 대단한 정신력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문득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아흐메트 알탄의 경우처럼 그렇게 문학적 상상력과 사유의 힘으로 현실에 닥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분주한 일상 가운데 시간에 쫓겨 살지만, 막상 작가처럼 막대한 시간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할 일이 없다는 게 심각한 문제로 다가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를 때 작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시간을 발견해내지 않았던가.

 

한 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을 했던 친구가 법정에서 판사는 가히 신에 버금가는 존재라는 말을 한 기억이 이 책을 읽는 도중에 떠올랐다. 아흐메트 알탄의 종신형 선고와 가석방 그리고 재투옥의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희망과 절망의 교차로를 수없이 넘나든다. 그 와중에서도 그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건, 유년 시절 이래 그와 함께 한 문학의 힘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예상대로 책의 후반에 가서는 19세기의 위대한 작가들에 대한 작가의 옥중 분석과 조우하게 된다. 그가 어렵게 교도소 도서관에서 소원 수리의 방식으로 처음 얻게 된 책이 바로 레프 톨스토이의 <카자크 사람들>이었다. 이 위대한 작가는 사람들의 삶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재구성해서 인간 본성의 비밀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그 다음 세기 작가들은 더 쉬운 방식의 관념에 집중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인간 본성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보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도대체 교도소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의 사유와 고뇌가 이런 분석을 가능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많은 양식 있는 터키의 지식인들이 금세기 첫 제노사이드로 알려진 터키의 1915년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침묵하지만, 아흐메트 알탄은 조국 터키에서 금기시되는 이 주제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국가적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아흐메트 알탄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불과 얼마 전 우리도 비슷한 사태를 경험할 뻔한 위기를 겪어서 그런지, 아흐메트 알탄의 체포와 투옥 그리고 수감생활에 대한 기록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더 몰입해서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꽤나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국내에 소개된 책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터키의 밀란 쿤데라라는 별명으로, 연애 소설 전문가라고 하는데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는 <위험한 동화>를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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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세계
찬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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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드디어 3개월 만에 만나는 달궁 독서모임의 날이다. 불과 하루를 앞두고 내일 독서모임 책인 <격정세계>를 마침내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우리 두목님도 말했지만, 읽히지 않아도 너무 읽히지 않는 책을 마침내 다 읽었다. 내 자신이 뿌듯할 지경이다. 시간이 되면 찬쉐 작가의 다른 책인 <마지막 연인>도 읽어 보려고 했으나 기진해서 불가능하게 되었다.

 

680쪽의 <격정세계>는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는 그런 느낌이었달까. 가상의 도시 중국 남부의 '멍청'이라는 도시에 둥지를 튼 <비둘기 북클럽> 멤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이별의 격정적 드라마 그리고 그들을 하나로 묶는 문학이라는 힘을 중독성 있는 서사로 풀어내는 찬쉐 작가의 도전에 경의를 표하게 됐다.

 

일단 비둘기 북클럽의 창립멤버는 헤이스, 페이 그리고 리하이다. 이들은 멍청에서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문학에 대한 격정으로 가득차 있다. 아니 좀 더 원초적으로 표현을 하자면, 문학에 죽고 사는 이들이다. 어떻게 보면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유지해 왔지만, 그들처럼 온전하게 자신을 투영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격정세계>는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장마다 격정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커플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우선 일번타자로 대학동창이었다는 샤오쌍과 헤이스가 나온다. 샤오쌍은 이 아저씨라는 그야말로 멍청 문학계의 태두 같은 지긋한 어르신과 교류를 하며 내적 성장과 발전을 이뤄간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게 된 헤이스에 이끌려 비둘기 북클럽에 안착하게 되면서 문학의 넓디넓은 세계에 투신한다. 그들에 북클럽에서 하는 토론을 보면서 이들은 밥은 먹지 않고 살 수 있겠지만, 문학을 빼앗는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구체적으로 그들이 토론을 하게 되는 책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나오지 않아 답답하다는 점을 <격정세계>에 대한 약점으로 꼽고 싶다. 충분히 찬쉐 작가의 의도는 알 수 있지만, 너무 추상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책에 대한 지나친 찬사는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동시에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이렇듯 멍청의 모든 독서인들이 빠지게 되는가 에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맹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비둘기 북클럽은 계속해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모두 빨아들이는 흡입력 강력한 블랙홀 같은 그 무엇으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일단 거의 모든 이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비둘기 북클럽을 추종한다. 심지어 코어 멤버들에 대한 존경심에, 자신도 속히 도전과 연구를 통해 성장과 발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가지게 된다. 비둘기 북클럽은 절대 손쉽게 모임에 나가 읽을 책들을 논하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거의 신계에 도달한 독서의 달인들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만약 현실 세계의 북클럽에서 이런 식의 진행을 했다가는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나가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20명에 육박하는 이들이 모여서 의견 개진을 하다가는 독서 모임이 시간이 무한정으로 늘어지지 않을까라는 현실적 궁금증도 생겼다.

 

비둘기 북클럽 회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연애관계는 너무 복잡하게 전개된다. 1부에서 헤이스와 샤오쌍의 밀당이 너무 지루하게,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신중하게 진행되면서 흥미를 감소키신다. 하지만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그들이 격정적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 거칠 것 없는 사랑의 단계로 넘어간다.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하는 불륜도 그들은 문학의 힘(?)으로 가볍게 돌파해낸다. 세상의 어떤 기준도 문학 앞에 세운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걸까. 독학으로 천재 소설가 반열에 오른 한마와 그의 남편 페이의 케이스가 그렇다. 페이는 결국 웨를 임신시키고, 동반자 한마의 곁을 떠나지 않는가. 홀로 남은 한마는 같은 비둘기 북클럽의 열성 회원 샤오웨와 새로운 사랑을 추구한다.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닌데 싶지만, 문학으로 똘똘 뭉친 그들에게 헤이스가 언급한 "삶의 결계" 앞에 과연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모름지기 독서인이라면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부단하게 연구와 도전을 통해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찬쉐 작가의 꾸짖음 같은 서사도 조금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즐거움이나 오락을 위해 책을 읽는 행위는 그들에게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일까. 결국 책으로 대변되는 이상세계에서 안주할 것이 아니라, 현실 생활에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적용시키야 한다는 주장에 도달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니 자각한 지성은 결국 그럴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선언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는 내내, 버겁다는 생각이 든 건 어쩌면 바로 이런 깨달음의 발로는 아니었는지. 더 놀라운 사실은 모두 12권의 찬쉐 작가 소설 중에서 <격정세계>가 그나마 접근성이 가장 좋다는 점이다.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 작가의 다른 책들은 어떻다는 말이지.

 

찬쉐 작가가 구축한 멍청이라는 이상향에서 펼쳐지는 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 배치된 인물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희로애락의 드라마는 확실히 우리 같은 독서인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무언가 결정적 사건사고가 배제되어 많은 분량을 읽어내는데는 역시나 쉽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 사서 열심히 읽다가 지쳐서 잠시 보류해 두었다가, 결국 시험을 앞두고 초치기를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읽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완독하는데 성공했고 나머지 부족한 부분들은 내일 달궁 동지들을 만나서 채우는 것으로 갈음하겠다.

 

[뱀다리] 참 소설의 초반에 표범과 검은 고양이 그리고 후반에는 호랑이까지 등장하는데 과연 그 녀석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고수들에게 의견을 물어봐야겠다. 리뷰마저도 시간에 쫓겨 쓰다 보니 어쩌면 더 추가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모임에 가기 전에 토론할 내용에 대해서도 좀 정리해야 하나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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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3-08 16: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 동물 모두 야행성이죠?
그럼에도 그들은 동물을 찾죠(제 기억으론) 독서과정에서 좀처럼 드러내지않고 만나기 어려운 에피파니의 순간이 아닐까요?

레삭매냐 2025-03-11 07:18   좋아요 1 | URL
우와~ 정말 멋진 말씀이십니다.
격렬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야행성 동물 삼총사가 무언가
소설에서 주술적 리얼리즘의
상징으로 작동해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또 선을 넘지는 않더
라구요.

삽하나 2025-03-10 2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늘어질 대로 늘어진 데다 애매한 내용의 서사를 이렇게나 잘 정리해 주시다니! 부족한 저는 또 이렇게 덥썩 얻어 먹습니다(?). 동물들은... 깜깜한 곳에서 등장하던 녀석들로 기억을 하는데 (기억이 맞으려나요ㅠ) 개인적으로는 독서의 짜릿한 격정을 더해주는 감각적인 요소 내지는 장치로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이 고양이과 삼총사가 제게는 물릴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손을 내어 주고 싶은 그런 동물들이거든요 ㅋㅋㅋ

레삭매냐 2025-03-11 07:21   좋아요 1 | URL
모임 전날 아슬아슬하게 다 읽고 리뷰까지
일사천리로 그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고양이과 삼총사에 한 방을 기대했는데
찬쉐 작가가 그렇게는 또 하지 않았더라는.

읽다만 <마지막 연인>도 마저 읽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