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2
페터 플람 지음, 이창남 옮김 / 민음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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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제 <타임 쉘터>를 빌리러 도서관에 들렀는데, 사서분이 내일까지 반납해야 하는 책이 있다고 하신다. 누군가 예약 도서를 걸어서 연장이 안된다고. 그렇지 오늘까지 반드시 읽어야 한다. 페터 플람의 <?> 이야기다. 이렇게 읽지 않고 반납한 책은 다시 빌리지 않게 되더라. 그러니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 다 읽어야지.

 

결국 책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마저 남은 부분들을 모두 읽었다. 비가 줄줄 내리는데 정말 집에서 나가기 싫었지만.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다 읽고 나서는 뭐랄까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점에서 뿌듯했다고나 할까.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1926년 그러니까 99년 전에 발표된 페터 플람의 데뷔 소설이라고 한다. 항스 슈테른이라는 군의관 출신 의사가 전장에서 베를린으로 복귀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참 초반에 재판장에게 운운하는 걸로 봐서는 그 사이에 재판정에 설 만한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걸을 암시한다.

 

4년간의 치열한 전쟁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복귀한 한스 슈테른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가 전장에서 전사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스 슈테른의 진짜 정체는 누구란 말인가. 그는 바로 제빵사 빌헬름 베투흐(침대보). 그 둘이 바뀐 경위는 중요하지 않다. 프랑스 베르됭의 두오몽 요새에서 벌어진 미친 전쟁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고지 하나를 빼앗기 위해 수십만 명의 청년들의 목숨이 전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쨌든 그런 미친 전쟁이 끝난 뒤, 베를린은 혁명의 도시였다. 기나긴 절망을 끝내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희망의 상징이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한스 슈테른의 아내 그레테를 비롯한 이들이 의사의 귀환을 반긴다. 하나 궁금한 점은 겉모습은 한스일지 모르지만, 당장 의사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베투흐가 과연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돌파할 것인가였다. 사실 그 부분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대신 멀쩡해 보이는 한스 슈테른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하나둘씩 튀어 나온다. 부쉬 산도르 여사와의 스캔들부터 시작해서 친구이자 검찰인 스벤 보르게스가 자신의 아내에게 추파를 보낸 점 등 숱한 이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가장 큰 문제는 살인 사건과 관련된 증거에 대한 감식이었는데, 알고 보니 피의자 에마 베투흐가 자신의 여동생이 아니었던가.

 

전장터에 나갔다가 실종된 오빠를 대신해서 가정을 이끌게 된 에마는 농장주의 하녀로 취업했다가 농장주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 그리고 모종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농장주 살해자로 몰리게 됐다. 한스 슈테른 아니 빌헬름 베투흐는 명백한 증거를 무시하고 에마에게 유리한 증언을 법정에서 전개한다. 그의 결정적 증언으로 에마는 무죄로 방면된다. 어쩌면 이런 일련의 서사적 배치는 엔딩에 예비된 비극을 위한 준비였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에서 가장 희극적인 장면은 부쉬 산도르 여사와 약속된 만남에 자신의 개(세인트버나드) 네로를 끌고 갔다가 네로가 벌이는 한바탕 소동극이었다. 어쩌면 파국은 이 때부터 이미 예고되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곳곳에서 베이커리 전문가로 빌헬름 베투흐가 보여주는 놀라운 식견도 주인공이 부르주아 계급의 한스 슈테른보다 프롤레타리아 제빵사에 더 가깝다는 진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도플갱어 논란에서 전자보다 후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베를린에서는 한스 슈테른이었을지 모르지만, 불현 듯 기차를 잡아타고 도착한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다시 빌헬름 베투흐로 변신한다. 자신이 일하던 베이커리에 찾아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전문 지식을 뽐내는 베투흐. 그 다음에는 죽어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본다. 그 때 잠시 의사로 변신했던가. 에마에게도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지금 모습으로는 아마 동생을 이해시킬 수 없었으리라.

 

아마 그 다음의 전개가 작가가 진짜 하고 싶었던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자신이 싸우던 프랑스 전선, 구체적으로 베르됭 플뢰리의 두오몽 요새를 찾는 베투흐/슈테른. 아무런 의미 없던 포탄과 총알이 난무하던 고지전에서 자신이 느꼈던 전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처참함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들이 그대로 투영된다. 그렇게 전쟁에서 가까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잉태된 비극에서 탈출하지 못한 도플갱어 주인공은 결국 스스로 그렇게 무너져 버린다.

 

책을 읽다가 문득 전쟁터에서 영혼이 부서진 사람이 과연 어둠에서 벗어나 빛 속으로, 그러니까 다시금 일상으로 복귀가 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영화나 많은 문학 작품들에서 전쟁과 관련된 PTSD들을 봐왔지만, 정작 당사자가 아니다 보니 그들의 깊은 내면세계에까지 도달하지 못한 그런 느낌이다. 페터 플람은 전쟁이 끝난 뒤 가까운 시절에 이 작품을 쓰면서 백년 후보다 더 많은 그런 경험들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독자와 당대의 독자가 느끼는 간극이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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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5-28 0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한 번 독특하네요. 나?

그래, 너! 하고 싶네요 ㅎㅎ 제목의 이유를 확인하고파서 저도 읽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5-05-28 07:15   좋아요 0 | URL
책의 분량이 그닥 많지
않아서 금세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귄터 그라스
의 <고양이와 쥐>를
분량만 보고 금방 읽을
것 같아서 도전했다가
낭패를 당하고 있긴 하
지만요 ㅠㅠ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우샤오러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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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전에 읽은 <상류 아이>와 너무 다른 결의 작품이라 좀 충격을 받았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라고 해야 할까.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 즐거움을 추구하는 편인데, 우샤오러의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에서는 즐거움 대신 고통과 구원이라는 주제를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아내가 실종된 사건으로 소설은 출발한다. 타이베이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 판옌중의 아내 우신핑이 사라져 버렸다. 문제는 결혼 전에 부모가 돌아가시고, 오빠와는 소원하다는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판옌중이 사라진 아내의 뒤를 추격하다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성추문의 휩싸인 대학동창 국회의원 보좌간 친구인 추궈성의 아들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어느 변호사가 그랬던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가장 쉽다고. 문제는 그 돈이 없다는 거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신핑의 과거에 판옌중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면서,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한다. 원래 판옌중은 부잣집 출신 아내 옌아이써와 결혼해서 외동딸 쑹뤼를 낳았다. 하지만 옌아이써는 판옌중이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아내가 아니었다. 결국 그 둘의 결혼은 파국으로 끝났고, 가정폭력 이슈까지 겹치면서 판옌중의 명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런 판옌중이 다시 우신핑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학원강사 우신핑이 판옌중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했다. 하지만 우신핑은 판옌중에게 돈과 아이 그 무엇도 바라는 게 없었다. 아이도 낳지 않겠다고 했으며, 재산에도 관심이 딱히 없었다. 판옌중으로서는 더 바랄 게 없는 그런 배필이었다.

 

그랬던 아내 우신핑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연히 판옌중은 사라져 버린 아내를 찾으러 나섰다. 그리고 그 와중에 죽었다고 알려진 아내의 어머니 황칭롄이 고향에 멀쩡히 살아 계시고 오빠 우치위안과도 소원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한다. 아니 오히려 장모 황칭롄이 뻔뻔하게 사위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우신핑의 친구라고 자칭하는 오드리가 등장해서, 판옌중의 과거를 들먹거리면서 우신핑의 소재를 묻는다. 우샤오러 작가는 전지적 시점에서 개입해서 주인공들의 마음을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문득 낯선 목소리가 등장할 때가 있는데, 나는 그 목소리가 우신핑의 것이라고 착각했다.

 

우신핑 과거의 추적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기다리고 있는 큰 비밀까지 도달하게 된다. 우리 인간은 모두 비밀을 가지고 사는 법이다. 그 비밀들은 절대 누구에게도 나누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비밀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비밀을 품은 이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비밀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본원적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소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의 비극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신핑의 전 룸메이트들이었던 오드리와 즈싱 역시 불행한 과거의 희생자들이다.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우정은 공고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고나 할까. 문제는 완벽해 보이는 이 삼각편대의 균열이 생겼을 때다. 우신핑이 약혼자를 데려왔을 때,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날 거라고 판단한 즈싱이 자해극을 벌인다. 위로가 되는 울타리인 줄 알았던 관계가 알고 보니 굴레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관계의 붕괴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싶다. 희망은 절망의 친구라고, 희망이 없어진다면 절망 역시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이라고 작가는 책에서 말한다.

 

이 비극의 연대기에서 작가가 준비한 결말은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개된다. 분노가 춤추는 서사를 추동하는 힘은 언제나 그렇듯 복수심이었다. 그 복수의 방식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동의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냥 더 이상의 추기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도.

 

그런데 끝까지 방심하지 마라. 세상에 맨 마지막 장까지 우샤오러 작가가 비장의 무기를 준비해 두었을 줄이야.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이 비밀을 품고 있고, 그 비밀이 노출되었을 때 감당할 수 없다는 간단한 진실이 참 서글프게 다가왔다.

 

결국 구원은 타인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일까. 나의 선의가 온전하게 상대방에게 전달하기가 난망하고 또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관계가 얼마나 허약한지 우신핑과 오드리 그리고 즈싱의 삼각편대가 보여주는 결말이 안타깝기도 했다. 우신핑이 판옌중에게 물었던 질문의 진실이 밝혀지는 장면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쩌면 비밀은 내 입에서 떠나는 순간, 더 이상 비밀일 수 없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쉽지 않은 독서였다. 그래도 우샤오러의 팬이 될 것 같은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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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 아이 묘보설림 15
우샤오러 지음, 심지연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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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책소개는 잘 뽑아야 한다. 타이완의 <스카이 캐슬>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타이완 작가 우샤오러는 소녀시대 주축 멤버와 나이가 같은 1989년생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에 해당하는 국립타이완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는 대신, 작가의 길을 선택한 것 같다. 오랜 세월 과외교사로 일한 자신의 체험을 살려 <상류 아이>를 발표했다고 한다.

 

<상류 아이>는 연대기적 배치가 아닌 과거와 현재 또 다시 과거를 오가는 다소 복잡한 시간 구성을 취하고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간의 배열과 재구성이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다만, 현재의 사건을 다루는데 있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설정이다. 하긴 과거가 모아져서 현재가 되는 거니까.

 

모든 것은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천위셴과 양딩궈의 아들 양페이천(제임스)이 사장 테드네 아들 차이하오첸(크리스)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면서 시작된다. 참고도 양딩궈는 사장 테드네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이다. 5년 째 이런저런 낙하산에 밀려 승진을 못하고 있다. 한 때 잘사는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 양이잔이 투자사기에 걸려 신이취라는 부자동네에 있던 아파트를 날려 먹으면서 시골 출신 천위셴이 꿈꾸던 강남 아파트, 아니 타이베이 부촌 지역 아파트에 입주하겠다는 소박한 꿈(?)은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아니 왜 이렇게 우리나라의 그것과 상황이 비슷한 거지. 결국 25평 정도의 작은 아파트에 살게 된 천위셴네 가족. 너무 서둘러서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던 친구 양이자의 오빠 딩궈와 결혼해서 아들 페이천을 낳은 국숫집 딸 천위셴은 가계대출을 갚고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회사에서는 까칠한 상사 예더이에게 호되게 갈굼을 당하고, 자신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줄 것처럼 보였던 신이취 아파트는 임신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그것만 바라보고 혈액암에 걸린 시모의 병간호까지 마다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그리고 이제 곧 페이천이 초등학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공립초등학교는 맞벌이 부부에게 바람직한 선택지로 보이지 않는다. 이미 유치원에서부터 아이 픽업 문제로 골치가 아프다. 이런 와중에 테드 사장과 량자치 부부의 아들 하오첸의 생일파티에 갔다가 페이천이 하오첸과 잘 어울리게 되면서 천위셴 부부에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타이베이의 유명한 사립초등학교에 하오첸과 같이 진학하면 어떨까라는 그야말로 너무나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물론 천위셴 부부에게는 막대한 학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언감생심이었지만, 량자치 부부는 페이천의 학비까지 자신들이 지원하고 입학 문제도 해결해 주겠다고 말한다. 세상에나, 이럴 수가! 이제 천위셴 부부에게 드디어 대운이 틔우기 시작하는 것인가. 그전에 좀 찜찜한 점들이 있긴 했지만 이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그런 제안이었다.

 

마냥 천위셴 부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되었을까? 그렇다면 세상이 너무 만만하게 보이지 않을까. 독자들이 예상하는 대로 이야기는 흘러가기 마련이다. 소설의 초반부 어디선가 그 뉴스가 터지고 천위셴의 친정엄마가 전화로 왜 방송에 자신의 딸과 손주가 나오는지 묻는 장면이 나오지 않던가 말이다. 흥미로운 전개로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는 순간에, 작가는 이렇게 단서를 심어 두었다.

 

쑹런사립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연필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벌써부터 그런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는 장면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참 천위셴은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던데, 혹시 그 중에 <스카이 캐슬>도 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한국 드라마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살짝 가미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 드라마가 세상에서 인기를 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천위셴은 하나 뿐인 아들 양페이천의 학업 뒷바라지를 위해 어렵게 들어간 직장까지 때려 치우고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제임스가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또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주자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이룬 것 같은 순간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잠시 뿐, '성적바꿔 치기' 사건과 금융업계를 주름잡는 대단한 집안의 딸 린판샹과 엮인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마치 줄타기를 하듯 위태롭게 버텨 가던 관계가 순식간에 붕괴되어 버린다.

 

결국 천위셴은 자신의 절제되지 않은 탐욕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끼고 싶어했던 상류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신기루에서 벗어나고, 자신과 아들에게 허용된 곳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이런 결말은 상투적이면서도 또 동시에 너무 현실적인 거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국립타이완대 출신의 작가로 다년간의 과외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라 그런지 교육에 모든 것을 불사르는 타이완식 리얼리즘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한국의 교육열도 타이완 못지않게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지 않은가.

 

우샤오러가 창조한 서사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페이천이 아니었을까? 자식의 학업적 성취와 성공을 위해 무리수를 둔 엄마 때문에 공정한 경쟁은 출발점부터 무너져 버렸다. 나중에 모든 사건이 끝난 뒤에도 아들은 엄마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엄마는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지만 과연 계획대로 진행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초등학교 1학년은 미래를 예단하기에 너무 어리니까 말이다. 그리고 페이천의 미국 유학이라는 미래의 거대한 도전에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볼 때, 천위셴의 욕망이 여전히 살아 꿈틀거린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우샤오러 작가는 부모라면 누구나 기대할 수밖에 없는 자식의 성공, 교육에 대한 투자라는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주제를 가지고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천위셴이라는 문제적 인물의 심리 상태를 통해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추체험을 관찰할 수 있었다. 과연 내가 천위셴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지 가늠해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동안 느낀 재미 중에 하나였다. 과연 타이완판 <스카이 캐슬>이라는 광고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고도의 심리전과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각축을 벌이는 치열한 교육 현장에 대한 묘사들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제 더 강력한 주제를 담은 같은 작가의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를 읽을 차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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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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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책이 다 있나 그래. 정말 오래 전에, <광기와 우연의 역사>라는 책으로 슈테판 츠바이크와 처음 만났다. 그리고 나서 오랜 시절 그의 책들을 읽어 왔다. 하지만, 다른 전작주의 작가들처럼 그렇게 강렬하게 매달려서 죽어라고 츠바이크의 책들을 읽은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기회가 닿는 대로 그의 책들을 꾸준하게 읽어왔다. 그리고 어제 중고서점에서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사서 읽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모두 9편의 짧은 에세이들로 구성된 이 책을 그만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가히 츠바이크를 지난 세기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롭고 조용했던 19세기 말에 태어나,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세기를 살다가 간 오스트리아 출신 양심가의 저술들은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히틀러라는 제목 때문에 맨 마지막 에세이부터 읽었다. 과학과 철학의 나라 독일을 그야말로 야만국가로 만들어버린 희대의 독재자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은 그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작품에 등장했던 모양이다. 책을 불살라 버리고,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인종주의로 무장한 파시스트의 등장은 어쩌면 대공황의 위기가 휩쓸던 지난 세기 불가피한 그런 현상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더 암울한 장면은, 불행하게도 지난 세기의 그런 불행한 과거가 다시 한 번 되풀이될 것만 같은 세계사적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인류는 도대체 과거에서 배우는 게 없다는 말일까. 현자 츠바이크의 지적들이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진행형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상상이려나.

 

개인적으로 내가 이 책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글은 바로 첫머리에 배치된 <걱정 없이 사는 기술>이다. 그리고 보니 이 편은 나중에 수록된 <나에게 돈이란>과 어쩌면 묘하게 공명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노동을 팔아 하루를 먹고 사는 그런 존재들이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의 한 시간의 노동을 금전으로 환산해서 일용한 양식과 주거 그리고 필요한 잡다한 것들 마련하고, 삶을 영위해 간다.

 

모두가 그런 걸까? 아마 이 편에 등장하는 안톤이란 사나이는 그런 것 같지 않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잠자리와 먹거리 그리고 기타 필요한 것들을 얻어 살아간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정말 일말의 걱정이나 스트레스 없이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참 부러웠다. 그도 물론 다양한 노동을 제공하고 금전적 보상을 받지만, 당장 필요한 이상은 절대 받지 않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고, 현재를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 반해 버렸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아마 하늘이 무너지지 않나싶을 정도의 걱정과 불안은 아니겠지만 아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안톤은 자신의 필요 뿐 아니라 타인의 필요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안톤에게 도움을 츠바이크 박사가 그가 필요 없는 따뜻한 외투 하나를 요구하자, 그야말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물품들을 모두 내준다. 그러자 안톤은 자신에게 필요한 외투를 하나 챙기고, 나머지는 나머지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한다. 아니 이런 이타적인 삶을 사는 다 있다고? 아무리 20세기 이야기라지만, 아마 안톤은 철저한 반자본주의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나만의 필요를 추구한다고 해서 이기주의자로 몰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과연 안톤처럼 사적 이익 대신 이타적인 사고를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1793121일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시는가. 바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군주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위해 구름 같은 군중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런 역사적 대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센강에서 한가롭게 낚시질을 즐겼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4년차에 민중들은 하도 많은 사건들을 겪다 보니 어느새 국왕의 처형이라는 경천동지할 사건조차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된 게 아닐까.

 

당장 우리만 하더라도 지난겨울의 계엄사태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격변 속에 살아오지 않았던가. 츠바이크 작가에 의하면 우리의 가냘픈 심장은 일정한 분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할 수 없다고 분석한다. 아니 그러한 불행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싶은 마음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라는 존재는 그런 불행의 도래를 사전에 감지하고 감당할 수 없다면 피하고 싶은 그런 감정 상태를 미리 준비하고 있는지도.

 

청년 츠바이크가 노년의 위대한 작가 로댕을 만난 일화에서 배운 교훈에 대한 이야기도 마음에 든다. 대가는 우연히 만나게 된 청년을 무시하지 않고 환대해 주었다. 아니 나라도 너무 황송해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의 작업장에 방문한 츠바이크는 손님을 앞에 두고, 예술 창조의 무아지경에 빠져 버린 로댕의 진면모를 마주하게 된다.

 

근 한 시간도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의 손님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자신이 만들고 있던 예술 작품의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모습을 목격한 츠바이크는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지고 만다. 나중에 정신을 차린 로댕은 청년 츠바이크에게 정중하게 사과한다. 하지만 츠바이크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노라고 고백한다. 인간이 자신의 목표하는 바와 목적을 상실하고, 오로지 도달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완벽을 추구하는 지고의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독서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탈출하기 위해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이나 루이스 세풀베다 작가의 <핫라인>을 읽곤 했었다. 이제 한 권 더 예의 목록에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말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금방 다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지만, 상대적으로 긴 여운과 생각할 거리들을 남기는 그런 책이기도 했다. 곁에 두고 오래도록 다시 읽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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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5-05-10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를 모르는 사람도 읽으면 좋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그를 아는 사람 - 그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더 좋아할 책인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5-05-10 11:54   좋아요 1 | URL
너무 적절한 말씀이시라...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바람돌이 2025-05-10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는 사랑입니다. ^^ 저 아직 이 책 안 읽었는데 빨리 읽어야겠네요.

레삭매냐 2025-05-10 21:03   좋아요 1 | URL
곁에 두고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은
책이 버렸습니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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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미국이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책의 출발점인 202116일 미국 의회에 일단의 폭도들이 난입한 사건은 전 세계에 묵직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게 백주에 미국 민의의 전당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긴 그보다 더 충격적인 최근의 계엄사태를 목격한 입장에서 우리가 그동안 믿어온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시스템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지 않았던가.

 

공화당이 미국 남부 제주의 대안이 되기 전, 민주당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정당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재건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당이 흑인들의 표가 필요해서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인 적도 있지만 결국 백인들의 표를 의식해서 흑인들을 투표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는 역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the Evil)>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붕괴를 유도하는 일군의 정치인들은 무슨 대단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전선에 나선 게 아니라, 오히려 극단의 정치를 발판으로 삼아 정치적 이익을 꾀하는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적극적인 무관심 때문에 민주주의의 쇠락이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남부에서 공화당은 저주의 말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엘리트주의 공화당은 남부로 눈길을 돌렸다. FDR이 이끄는 민주당이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의 위기를 탈출하면서 전국적 지지를 얻게 되었고, 공화당은 영원한 소수당으로 떨어질 위기였다. 하지만 시민권 투쟁이 가속화되어 가던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위기감에 휩싸인 남부 백인들에게서 공화당은 정치적 금광을 발견했다. 인종적 보수주의를 채택한 공화당은 백인 정당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기독교 집단까지 가세하면서 미국 남부는 공화당의 표밭으로 변신했다. 이어지는 선거에서 남부, 이른바 서던 벨트는 공화당의 막강한 지원군이 되었다.

 

2025년을 사는 미국인들에게 미국 건국 당시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만들어진 헌법은 신성한 경전으로 취급된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을 수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미국 시민들에게 의심 받는다. 헌법도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히 시대에 맞지 않는 오류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가령 예를 들어 이제는 너무나 당연시되는 인종 평등과 여성참정권도 미국의 건국 초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저자들이 언급하고 있다시피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거저 얻어진 것들은 하나도 없다. 인종 평등 문제는 남북전쟁을 초래했고, 여성참정권은 한 세기에 걸친 치열한 투쟁과 수정의 과정을 거쳐 얻어낸 결과물이다. 새로운 진전을 위한 아이디어의 제안과 의제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저자들은 자신들의 책에서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러니 미국 시민들이 보다 자유롭고 편한 방식으로 투표를 할 수 있도록, 기존의 유권자 등록 방식과 최다득표자 승자 원칙 같은 문제들을 수정할 수 있도록 헌법 개정을 시도해야 한다는 아이디어에 도달한다. 우리의 주민등록증 같은 전국적 차원의 내셔널 ID 발급에 대한 아이디어는 또 어떤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한 번도 그런 국가 차원의 신분증이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에서 가능할까라는 우려가 먼저 들었다. 50개 주마다 2명씩 배정된 상원 의원 선출 역시 지난한 투쟁의 결과로 얻어낸 민주주의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 수가 있었다.

 

미국의 최고 정치지도자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인단 문제도 당연히 손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 들어(작년 이전까지) 공화당이 상원에서 미국 인구의 다수를 대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미국 대법원의 당파적 편향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타협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법원에 끌고 가는 건 미국에서 선도적으로 실행된 모양이다. 유권자 다수의 상식과 대법원 구성 간에 간극이 벌어지면서 여론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심지어 배심원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의 저자들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이에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봉쇄(containment)와 배제(exclusion) 전략을 주문한다. 저자들은 이런 전략들이 매우 효과적이긴 방법이긴 하지만, 단기처방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보다 적극적이고, 민주주의를 공고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제시된다. 하지만 여기서 아주 중대한 시간의 갭이 발생한다. 2024년 트럼프가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문제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헌법 개정을 위한 조건을 낮출 것을 저자들이 주문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작년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노골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는 수정헌법 22조마저 고쳐서 트럼프의 3선을 추진하겠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고 있다. 작금의 트럼프가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관세 전쟁이나 대통령의 생일을 연방공휴일로 지정하겠다는 희극 같은 사태들을 그들은 아마 예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조 바이든의 신승과 미국 시민들의 양식에 힘입어 미국식 민주주의의 복원력을 맹신한 게 아닌가라는 비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과연 미국 민주주의가 지닌 자율 교정 시스템이 대안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든다.

 

미국을 필두로 해서 전 세계의 민주주의는 현재 지금까지 만나 보지 못한 위기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극단으로 치우친 정치적 소수는 평범한 독재의 가면을 쓰고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체면이나 상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이들의 행태에 다수의 상처받은 마음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SNS 담벼락에 자신들의 주장과 생각들을 새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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