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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일천한 나의 독서 추체험에 의하면, 결국 독서라는 행위는 자기구원으로 귀결된다. 책에 파묻혀 사는 우리 고독한 책쟁이들은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전 지구적인 행사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제도 읽고, 오늘도 읽으며 내일도 책을 읽을 것이다. 그러다 만나게 된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는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는지 깊은 후회를 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책이었다.
참, <바람의 그림자>를 읽다 말고 자심 짬을 내서 사폰 작가의 데뷔작 <안개의 왕자>를 읽었다. 물론 사폰의 대표작이자 종결에 가까운 <바람의 그림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작가의 시원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효했던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시절은 1945년, 그들이 전쟁이라고 부르는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공화국을 뒤집어엎은 프랑코 총통이 통치하던 스페인 바르셀로나가 공간적 배경이다. 주인공은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함께 셈페레 서점을 운영하는 소년 다니엘 셈페레 마르틴.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잊힌 책들의 묘지”로 데려 가서 한 권의 책을 고르라고 주문한다. 그렇게 만나게 된 책이 바로 작고한 것으로 알려진 훌리안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였다.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한 것으로 보이는 소년은 책을 사랑해 마지않았고, 그렇게 <바람의 그림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훌리안 카락스를 아는 구스타보 바르셀로 아저씨는 그에게 책을 팔라고 하지만, 책과 단단하게 연결된 다니엘이 그 책을 팔 이유는 1도 없다. 소년은 그리고 바르셀로의 조카딸이자 눈이 먼 연상의 여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 <바람의 그림자> 책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다니엘. 그리고 소년은 미지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가 바르셀로나에 남긴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이런 다니엘의 카락스 추적이 과연 그의 삶에 어떤 후과를 가져오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다.
시간은 그로부터 5년이 흘러 1950년이 되었다. 운명은 가혹하기도 하지, 소년은 자신의 생일날 자신의 여신이 피아노 교사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게 소년은 성장통을 겪는다. 그리고 피아노 교사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소년은 노숙자 페르민 로메로 데 토레스를 만나 잠깐 동안의 구원을 얻는다.
소설에서 개그를 담당한 활달한 성격의 페르민은 전쟁 당시의 과거를 가진 오십대 초반의 남자로, 소년과 아버지 셈페레의 호의로 취업한 셈페레 서점에서 책사냥꾼으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사폰 작가는 정말 우리 책쟁이들이 좋아할 만한 모든 요소들을 자신의 작품에 완벽하게 투영했다.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이한 작가의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책들을 찾아 모두 불살라 버리는 미치광이의 출현부터 시작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는 십대 소년의 애달픈 그런 감정들에 대한 절묘한 서사 그리고 곳곳에서 번뜩이는 아름다운 문장들은 정말 황홀하기 짝이 없을 정도다. 계속해서 밑줄을 죽죽 긋고, 다섯 가지 색의 포스트잇을 붙이고 메모를 해대면서 책을 읽는다.
<바람의 그림자>의 본질은 결국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해 가는 소년 다니엘 셈페레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에게 <바람의 그림자>를 넘기라는 얼굴 없는 남자에게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 훌리안 카락스가 남긴 그림자를 추적할수록 소설의 빌런으로 등장하는 싸이코패스 푸메로 경감으로부터 치욕을 당하는 등 숱한 위기를 겪는다. 자신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집안 출신의 베아트리스 아귈라르와의 사랑은 또 어떤가. 어떤 면에서 <바람의 그림자>는 사폰의 데뷔작 <안개의 왕자>에서 보여준 십대 소년들의 완성된 이미지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고로 무언가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사전에 어설픈 그 무엇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안개의 왕자>를 먼저 읽은 게 아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의 모든 작품들은 어떤 면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니까.
페르민과 협력해서 다니엘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작가 훌리안 카락스의 희미한 흔적을 쫓는다. <바람의 그림자>는 다니엘에게 축복이었을까? 아니면 저주였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람의 그림자>가 그를 그전과 다른 차원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점 하나는 확실하다. 전쟁이 끝난 뒤, 콜레라로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잃은 소년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린다. 카락스의 과거를 파헤치며 사람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어쩌면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두려움부터 자기구원을 얻지 않았나 싶다.
클라라 바르셀로에 대한 풋사랑이 소년에게 트라우마로 작동했다면, 절친 토마스 아귈라르의 누나 베아와의 불같은 사랑은 과연 라틴 청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도 다니엘은 본업은 훌리안 카락스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지 않는다. “잊힌 묘지의 책들”에서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를 집는 순간, 소년이 감당해야 하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도저히 멈출 수 없는 무엇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실낱같은 단서들을 빌미로 훌리안 카락스를 추적하는 다니엘의 모습에서는 사폰 작가의 유년 시절을, 그리고 어쩌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훌리안 카락스는 성인이 되어서도 용가리와 판타지를 좋아했다는 작가의 페르소나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독자가 소설의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한다면, 작가 역시 다른 접근 방식으로 캐릭터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고 움직이게 만들었으리라.
사폰 작가가 구사하는 삶과 세상 그리고 인간들의 관계에 대해 깊은 통찰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력적이면서도 수려한 문장(번역의 힘이었을까 과연?)에 나는 그만 반해 버리고 말았다. 놀랍지 않은가 말이다. 책의 곳곳에서 그야말로 빛나는 사폰 작가의 문장에 공감해서 연필로 그어댄 밑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다.
지금까지가 가벼운 몸풀기였다면, 다음 권에서는 본격적인 서사의 막이 오를 차례다. 예상을 초월하는 내러티브들이 그야말로 폭풍처럼 휘몰아 닥친다.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문장의 향연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