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사진관
김정현 지음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가슴이 먹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책을 읽기 전에 간략한 소개를 보고 나서, 여느 책처럼 아버지의 부정(父情)을 다룬 신파겠거려니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작가가 10년 전, 단군 이래 미증유의 경제위기였다는 IMF 때에도 <아버지>란 책으로 그렇게 재미를 본거 같던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아니 게다가 책 제목은 또 왜 이렇게 촌스러워, <고향사진관>이라니.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모두 맞아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오십대에 뇌졸중으로 의식을 잃고, 자리에 누운 아버지 병수발과 나머지 식솔들을 보듬기 위해 자신의 날갯죽지를 접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주인공 서용준의 삶이 친구인 지은이의 글을 통해 전해진다. 하지만 용준은 병상에 누워, 가장 기본적인 거동조차 못하시는 아버지를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세상을 향해 펄펄 끓는 자신의 열정과 자신의 꿈을 펼칠 시기에 졸지에 가장이 되어 버린 용준은 묵묵하게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앞으로 펼쳐질 형극의 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어려서부터 속이 깊고, 다른 이들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용준이 어찌 자신에게 생명을 준 아버지를 보살피는 일에 소홀하겠는가. 손위 누이들을 시집보내고, 자신도 인근에 사는 착한 처자인 희순과 살림을 차린다.

용준은 희순을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결혼하고 나서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다. 본말이 전도된 듯한 상황 때문에 용준은 괴로워한다. 하지만 희순은 용준의 진실한 ‘사랑’의 약속을 믿는다. 어머니에게 떠밀리듯 그렇게 떠난 신혼여행지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은 용준과 희순은 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용준 부부의 아버지에 대한 병수발은 계속된다.

그렇게 병상에서 15년을 보내시며 고희를 맞으신 용준의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그렇게 꿋꿋한 모습을 보이셨던 어머니는 남편에 대한 서러움, 꽃다운 청춘을 저버린 자식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목매게 통곡을 한다. 이 책의 신파적인 전개를 따라 가던 독자들은 이 순간, 예정된 카타르시스의 폭발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작가의 실존했던 친구를 모델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설상가상으로 치닫는다.

이 책을 통해 김정현 작가는 독자들에게 아버지를, 어머니를 그리고 남편, 아내, 형제들 그리고 자식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물어 보는 것 같다. 아니 그 어느 누구고 사랑할 줄은 아느냐고 되묻는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서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사랑은 내려가는 것이라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아가페적인 사랑 말이다. 그런 사랑에 무슨 대가가 필요하리오.

주인공 용준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누운 채, 무의미해 보이는 하루의 삶을 타인의 도움에 의해 영위해 가는 아버지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어머니, 형제, 아내 그리고 자식들을 사랑하는 법을 차근차근 배워 나간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이 배운 사랑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남김없이 표현한다.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지극히 주관적이고, 신파조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타오르는 잉걸불 같은 사랑들은 쉬이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용준의 고향인 영주에 그의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카메라 셔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은근한 사랑의 이야기에는 여느 특별한 사랑들을 아우르는 힘이 있다. 난 이 사랑의 이야기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처럼 - 우리시대의 지성 5-016 (구) 문지 스펙트럼 16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랑스 출신의 교육자이자 작가인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을 그야말로 단숨에 읽어 버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했던 다양한 형태의 고민들이 증식되면서, 왜 우리는 책을 읽는가라는 책읽기의 근본적인 질문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우리가 책을 읽는데는 수많은 이유들이 읽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취미이기 때문에, 혹은 심심해서라는 단순한 이유에서부터 읽어서 내 것이 되기 전엔 한낱 종이뭉치일 수밖에 없는 책이, 책읽기의 과정이라는 지난한 의식을 통해 그 책을 쓴 작가와 개인적 친밀함이 더해지면서 교제와 소통을 이루어지고 간접지식을 쌓아 개인의 영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는 원대한 포부에 이르기까지 몇 만 가지 이유들을 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보태서, 순수(?)하게 자신의 지적 허영과 과시욕의 발로에서 책을 읽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죽어라 읽는 사람이든 일 년에 책이라고는 단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동의하는 바가 있으니 그건 바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니엘 페나크는 ‘읽다’라는 동사만큼 전적인 자율성을 담보하고 있는 동사가 없다고 이 책을 통해 역설한다. 물론,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책을 ‘읽어라’라는 강압적 변형의 명령을 듣기도 하지만, 타의에 의한 책읽기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다. 가장 극단적인 폐해는 그로 인해, 책읽기에 신물을 내면서 책을 아주 안 읽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책읽기, 다시 말해서 독서가 교육의 한 방편이나 혹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처럼 입시의 한 과정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해 저자는 명백하게 경고장을 발부하고 있다. 오로지 책읽기는 책을 읽는다라는 자주적인 노력에 근거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무상성을 바탕으로 한 즐거움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 페나크는 책의 시작을 아직 글을 몰라 책을 읽을 수 없는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에게 책을 읽어 달라거나 혹은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모습으로, 책을 읽음으로써 발생하는 즐거움의 무상성에 대해 중요한 방점을 찍는다.

행복한 책읽기의 즐거움을 아는 이라면 모름지기 그 즐거움을 혼자서 누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누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인지상정이 아닌가.

간단하게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최근 나의 무지막지한 독서열에 신기해하시던 어머니가 책읽기의 즐거움에 동참하시기 시작하셨다. 대학시절 조교 형으로부터 생일선물로 받았던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근 10년 이상 걸려가며, 포기와 도전의 반복을 통해 결국 다 읽어낸 그 뿌듯했던 나의 자부심은 어머니 역시 고전하셨지만, 몇 달 만에 다 읽어내셨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한낱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고리끼의 <어머니>를 통해 자신감을 얻으신 어머니는 본격적인 책읽기의 즐거움에 오늘도 책을 읽고 계신다.

다니엘 페나크가 묘사한 대로, 과제로 책을 읽어야 하는 학생들이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의 페이지 수 전쟁을 벌이는 장면은 내가 책읽기를 하면서 느낀 것과 너무나 일치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지 않으면 다 읽은 책으로 간주하지 않는 개인적인 결벽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단 손에 잡은 책을 다 읽기 위해 끙끙대며 마치 생쌀을 씹어 가는 듯한 느낌으로 억지로 그렇게 책을 읽곤 하던 시간들이 페나크의 글들과 자연스럽게 공명하고 있었다.

역시 20년간 현장에서 교육자로 일한 베테랑 교사답게, 다니엘 페나크는 도무지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학생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책을 읽게 하는 방법들을 실제 경험에 의거해서 그야말로 ‘소설처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물론 이 책을 통해 소개된 그의 방법론이 모든 상황에 적용될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지만, 책읽기의 본질 다시 말해서 그 즐거움을 알게 된다면(반드시 이 과정이 필요하다) 그 독자들을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으리라는 전망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현대 대량소비 사회에서 책만큼 소유한 사람이 절대권을 행사하는 물질도 없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책을 독서를 통해 독자와 소통을 하게 되면서 그 생명력을 얻게 되지만, 그 전에 종이뭉치였을 때는 정형화된 직각의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라면 끓여 먹을 때 안성맞춤으로 펄펄 끓는 라면 냄비를 받치거나, 혹은 나른한 오후 수마(睡魔)의 강렬한 유혹에 시달릴 때 몇 권의 책을 집어다가 가차 없이 베개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종이뭉치 책을 읽어서 일단 “내 것”이 된다면 그렇게 형성된 끈끈한 유대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나만의 무형의 재산이 된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얻게 된, 그 무수한 상상과 감정들의 파노라마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페나크는 책의 주인이자 소비자인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제 권리들에 대한 글로 <소설처럼>을 맺음한다. 모든 것에 대한 부인에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출발한다고 했던가. 책을 읽지 않을 권리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나의 개인적인 의사와는 반하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은 권리 또 군데군데 골라 띄엄띄엄 읽을 권리 등이 차례로 소개가 된다. 그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권리 중의 하나는 바로 ‘책을 다시 읽을 권리’였다. 그것은 바로 페나크가 이 책을 통해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무상의 행위에 기초한 즐거움인 것이다.

책을 읽는데 있어서 시간활용에 대한 이야기로 부족한 글을 맺고자 한다. 너무나 바쁜 우리 현대인들은 시간에 대해 너무나 인색하다. 그리고 책을 읽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를 대곤 한다. 사랑을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가? 아니다. 사랑을 하면 없는 시간도 나기 마련이다. 책을 사랑하면, 책 읽을 시간은 자연히 따라 오는 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항상 읽을 책을 손에 들고 다녀 보라. 그러면 언제 어디에서고 펴보게 될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을 길라잡는 유대인 - 유대인의 삶과 돈, 그리고 神
최재호 지음 / 한마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적절한 시기에 유대인을 주제로 다룬 책을 만나게 돼서 기쁜 마음이 들었다. 지난 해 말, 가자 지구의 무장조직인 하마스를 축출시키겠다는 의도로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공습과 함께 올해 들어서는 결국 지상군까지 투입시키는 초강수를 두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 이래 네 번의 중동전쟁 다음으로 가장 큰 위기라는 뉴스 보도가 피부에 와 닿는다.

정치외교를 전공하고, 이스라엘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는 최재호 씨는 이스라엘 유대인과 중동 아랍인들의 뿌리 깊은 원한의 관계를 4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성서시대에서 그 근원을 찾는다. 같은 셈족 조상으로 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모두 유대인의 시조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가계에서(이삭/이스마엘) 출발을 한다. 아브라함의 팔레스타인 정착으로 시작된 유대인의 역사는 이집트 노예기, 다윗과 솔로몬의 강력한 왕조, 분열기 그리고 다시 바빌론 유수 등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경험한다.

이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현 이스라엘의 고대로부터의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근거하기도 한다. 동서양이 만나는 접점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필연적으로 동서양을 아우르려는 제국들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던 유대 국가는 결국 로마시대에 이르러 반로마 저항 끝에 디아스포라(diaspora)로 나라를 잃고, 전 세계 각처로 나라 없는 민족으로 떠돌이 신세를 겪게 된다.

농경민족이 아닌 태생에서부터 유목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은 바빌론 유수를 경험하면서 구약성경이라는 자신들만의 역사를 다룬 고유의 경전의 모태를 가다듬고, 자신들의 생활과 사상을 집대성한 탈무드(The Talmud)를 완성시키기에 이른다. 하지만 기원 전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서 비롯된 기독교 신앙은 아직도 예수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일대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기독교 전파 초기에 대립하던 기독교와 유대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고, 중세 이래 전 유럽의 종교로 인정받게 되면서 반유대주의와 박해 그리고 차별로 점철된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 2000년 가까이 자신의 근원지인 팔레스타인이 국가 없이 세계 각처를 떠돌던 유대인들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917년 벨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고,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3년 후인 1948년 드디어 대망의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디아스포라 이래, 팔레스타인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면서 오늘날 불안정한 중동문제의 시발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1부를 통해 4천년에 가까운 유대인들의 역사를 다룬 후, 2부에서는 신앙과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찾아 나선 유대인들의 여로를 그리고 있다. 언제나 기존 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거주지였던 게토에서 지내야 했던 유대인들에게 1492년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그야말로 천상의 복음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이에, 유럽 각지에서 이교도로 박해를 박고 있던 유대인들은 기꺼이 정든 땅을 떠나 미래를 알 수 없는 신대륙으로 이주를 감행한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으로 이주했던 남미 대륙을 구교도가 득세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양분하게 되면서, 그들은 다시 눈을 청교도들이 상륙해서 개척하고 있던 북미 오늘날의 미국으로 옮겨가게 된다. 게다가 청빈과 윤리를 극도로 강조하던 청교도 정신은 유대인들의 사상과 부합되는 점이 있었기에, 신대륙 이주 초기 유대인 노동력은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다 건너 뉴 암스테르담 그러니까 오늘날의 뉴욕 맨해튼으로 향했다.

기존의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언제나 후손들의 교육을 가장 우선시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미국의 학계 그리고 금융업은 물론이고 노벨상 수상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은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을 정도다. 특히 미국의 건국 이후, 사유재산과 시장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게 된 미국 땅은 유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특히, 모건과 록펠러로 대변되는 유대계 자본가들은 거의 전 미국의 산업을 장악하면서 부를 앞세워 정치권력까지 좌지우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자신들의 거대한 기업을 세우기 위해, 독점과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돈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동족들을 학살한 히틀러와도 거래를 하는 등 그야말로 부의 축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자본가들은 부의 사회 환원이라는 대명제를 지키는 모습도 한편으로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유대인과 세계>라는 제목으로 오늘날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유대인들의 세계화 모습을 설명한다. 디아스포라 이래, 오로지 실질적인 능력과 지식을 중요시해온 유대인들은 그 무엇보다 자식들의 교육을 가장 우선시했으며, 국가보다는 민족개념을 중시하고, 기독교에서는 중요시하지 않았던 부의 축적이 자신의 생명과 안정을 보장하는 유일한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명제들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이스라엘에 건국에 이르는 성공사례와 자원이라는 전무한 가운데, 이웃의 위협적인 아랍 국가들과의 적대적 관계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은이는 우리나라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미래에의 비전을 이야기하며 글을 맺고 있다.

책의 1부와 2부에서는 유대인들의 역사와 민족의 태동 과정, 신대륙 발전의 참여 그리고 미처 모르고 있던 모건 가와 록펠러 가와 같은 유대계 자본가들의 명암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어서 참으로 좋은 경험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3부에 들어가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상황들을 비교하면서부터는 전형적인 뉴라이트적인 시선에서 역사를 보는 저술방향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은 해방과 정부수립을 거치면서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하면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실패를 했다. 나치로부터 해방된 이후, 프랑스의 예를 굳이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쿠데타와 개발독재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도 도를 지나친 것 같다. 물론 개발과 수출입국을 통한 부국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박정희는 어디까지나 쿠데타로 정당한 정부를 전복시킨 인물이다. 나라가 혼란스럽다고 해서 군인들이 벌인 쿠데타가 용인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는 전두환을 통해 불필요한 동어반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또한 경제발전 후에 민주화가 이루어진다고 언급했는데 이 또한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1930년 최악의 인플레이션 끝에 독일에 경제부흥을 가져다 준 것은 군국주의 파시즘 독재자인 히틀러였다.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오로지 경제만을 외쳐대는 오늘날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꼬집자면, 정치외교학자가 자신의 전공에서 벗어난 역사에 대한 글을 쓸 적에는 좀 더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80페이지에서 보면 “오스만 터키의 살라딘”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살라딘과 오스만 터키는 전혀 상관이 없다. 살라딘은 1193년에 죽었는데, 오스만 터키는 1299년에 성립되었다. 왠지 뉴라이트에서 작금에 벌이고 있는 의도적인 역사 왜곡의 단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무지의 소산 그것도 아니면 역사적 고증의 부족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유대인들의 역사와 생존의 밑그림은 좋았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동력이 떨어지면서 용두사미가 되는 바람에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던 책읽기였다.

*** 내가 찾은 오탈자
1. 도킨슨 -> 도킨스 (78페이지)
2. 오스만 터키의 살라딘 -> 셀주크 투르크의 살라딘 (80페이지)
3. 프랑크플루트 -> 프랑크푸르트 (93페이지)
4. 비로 -> 바로 (138페이지)
5. 골드핑그 -> 골드핑거 (212페이지)
6. 위너 브러더즈 -> 워너 브러더즈 (217페이지)
7. 조지 소르스 -> 조지 소로스 (356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한 기회에 지난 노무현 정부시절의 국가인권위원회와 창비사의 합작으로 모두 해서 10명의 만화가들이 모여 집단창작으로 차별과 인권에 대한 만화책을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새해 들어 처음으로 도서관에서 그 책과 만날 수가 있었다, <십시일反>이 바로 그 제목이었다. 제목에서부터 차별과 인권침해에 대해 반대한다는 뚜렷한 주제의식을 표출하고 있었다.

먼저 인권(人權)에 대한 정의를 알아보기 위해 위키피디아에게 물었다. 인권이라 하면 인간으로서 태어나면서 부여된 그 어느 누구로부터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와 지위에 긍정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건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 관계없이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현실세계에선 적용되지 않는 일이지만 말이다.

물신(物神) 혹은 맘모니즘(Mammonism)에 입각한 최고를 위한 경쟁과 성공제일주의가 우리 사회의 모든 가치를 아우르고 있는 상황 속에서 차별을 없애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1%만을 위한 정부에서는 ‘욕망의 정치’만을 강조하면서 모든 국민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21세기 신경제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대량해고와 대규모 실업위기로 내몰고 있다.

하지만 박통이 경제건설을 지휘하던 시대의 ‘삽질정신’은 성장 위주의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의 몰락과 더불어 더 이상 그 유효하지 않은 사회적 패러다임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인 장애우, 외국인 노동자, 여성, 빈민층을 아우르는 모든 이들이 함께 나가는 다양화된 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십시일반>에서는 이런 바람과는 달리 전개되고 있는 현실 세계를 냉혹하게 그리고 있다. 세계화 논리로 제3세계 국가들에서 대한민국으로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원하지 않는 일자리들을 채운 그들은, 비인간적인 근무조건과 형편없이 낮은 임금, 체불 등의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황 속에서 고국에 두고 온 형제자매 부모들을 위해 오늘도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경제가 좋지 않으니, 외국인 노동자들 혹은 산업연수생들을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라는 식의 보수 언론에서 쏟아내는 구호들은 오늘 “오마이뉴스”에 나온 한홍구 교수의 국가 파시즘을 연상시킨다.

우리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그만큼 차별적이다. 여성과 장애우들을 보는 시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기초생활 수급자들의 현실은 보지 않고 오로지 행정편의주의 위주의 시각으로 다가서는 국가공무원들의 모습에서는 그들이 과연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이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끔찍했던 경험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 평수에 의해 어울리는 친구들의 ‘격’이 달라진다는 조남준 씨의 만화 <누렁이 1>이었다. 제도교육에서 그렇게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치지는 않고, 나만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식의 자기중심주의적 사고를 어린이들에게 심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러웠다. 노암 촘스키는 미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5개의 철자로 된 단어로 “class"를 꼽았다. 누구나 부인하지만,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사회계급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부와 재산의 정도에 따른 사회계층화는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어린 나이에 학생들에게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걸 새삼 깨닫게 됐다.

손문상 씨가 그린 <사회적 유전>을 보면 더 이상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의 ‘공정한 경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진실을 접하게 된다. 부유층에서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다양한 방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교육비로 무장한 차세대 일꾼들을 양성해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살인적인 물가상승과 해고의 위협에 노출된 그림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 같은 상황이다. 사회적 성공을 유일한 통로처럼 보였던 교육에서조차, 평등한 기회들은 박탈당하고 있었다.

책을 덮으면서 정말 암담해졌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제 더 이상 MB정부 아래에서는 이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성찰과 배려를 기대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 고난의 세월을 통해 이루어낸 풀뿌리 민주주의가 ‘경제살리기’라는 지상과제에 밀려 그 빛을 잃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사회적 진보는 한 발자국을 떼기가 힘들지만, 반동에 의한 퇴보의 폐해에 의한 사회적 손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 연말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라는 말들 가운데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소액기부금의 행렬이 많았다는 흐뭇한 뉴스 기사를 들었다. 정말 그 어느 때보다도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신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머스크
퍼시 캉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끌레마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처럼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전에 필름 카메라와 더불어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있었는데,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아예 폴라로이드 필름을 더 이상은 생산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사용하고 싶어도 더 이상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는 거다. 이렇게 일상에서 사용하다가 더 이상 그 제품이 생산이 되지 않는다면 어쩌지? 바로 이 시점에서 퍼시 캉프의 <머스크>는 시작된다.

올해 69세의 아르망 엠므 씨는 25년간 철도공사 직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프랑스의 비밀정보부에서 암약해온 인물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삶의 규율을 적용시키고, 옷매무새가 흐트러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가 없을 정도의 멋쟁이다. 하지만 그건 이미 40년 전의 이야기이고, 이제 그는 평범하게 늙어가는 노인네다.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엠므 씨에게는 자신만의 비장의 무기처럼 느껴지는 존재가 있으니 그건 바로 <머스크> 향수다. 발정기의 사향노루 수컷에서 추출한 천연재료로 만든 향수는 ‘호색한’ 엠므 씨의 평생의 동반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엠므 씨는 자신의 정부 이브로부터 자신의 냄새가 바뀌었다는 지적을 듣는다. 거의 평생을 함께 해온 향수의 변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늙어 버렸단 말인가? 크로노스의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우선 엠므 씨는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해낸다. 머스크의 제조회사에 정중하게 편지를 써서 답장을 받는 엠므 씨. 회사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천연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머스콘이라는 인공재료를 사용해서 <머스크>를 계속 생산할거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하지만, 엠므 씨에게 필요한 것은 ‘인공’ 머스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전 프랑스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망라해서 <머스크> 향수를 획득하기 위한 가열찬 투쟁에 나선다.

하지만 그의 남은 생애 동안 필요한 절대량의 머스크 향수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작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는 향수의 양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존재감을 상실하면서 급속한 노화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의 자신의 추락을 볼 수 없었던 정보요원의 출신의 영리한 엠므 씨는 극적이면서도 결정적인 다른 방법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사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은 <머스크> 책의 표지에 다 나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주인공 아르망 엠므 씨가 붉은 색의 머스크 향수를 뿌리는 장면. 그 향기는 이미지화 되어서 왼편으로는 제목인 <MUSK>를 그리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머스크의 원료를 추출하는 사향노루의 그림이 보인다. 남성인 엠므 씨와 그의 여성에 대한 선호, 그리고 그를 남자답게 만들어주는 그의 심리적 안정제라고 할 수 있는 수컷 사향노루는 모두 본질적으로 동일선상에 놓여져 있다.

물질자본주의 세계에서 직업에서의 소외, 다시 말해서 은퇴는 어떤 의미에서 남성성의 상실과 동가로 비추어진다. 한 때, 여성들에게 작업을 걸어 많은 성공의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 아르망 엠므 씨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노화) 대신 마스크 향수로 만들어진 인공적 이미지 속에서 여전히 과거의 영광들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머스크 향수 생산중단은 그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엠므 씨에게 그것은 단지 물질적 공급의 중단이 아닌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진다.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엠므 씨는 부단한 노력을 계속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노화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결국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으로 몰린다.

2000년에 나온 탓인지, 현재 프랑스를 비롯한 EU 국가들에서 사용되는 화폐 단위인 유로가 아닌 프랑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도 등장하는 향수의 도시 그라스에까지 머스크 향수를 찾아 나서는 아르망 엠므 씨의 집요한 여정도 또한 유쾌한 경험이었다. 예전에 <엠므 씨의 마지막 향수>라는 제목으로 2001년에 출간되었다가 작년에 다시 빛을 보게 된 책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그늘에 가려져 있던 재밌고 유쾌한 책을 다시 세상에 등장시켜준 끌레망 출판사에게 갈채를 보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