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hug! 아프리카
김영희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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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유명한 PD인 김영희 작가의 <헉hug! 아프리카>와 만났다. 개인적으로 텔레비전을 잘 안보기 때문에 김영희 PD가 얼마나 대단한 연출가라는 건 사실 모른다. 하지만 책날개에 실린 그의 약력을 보니 그가 그동안 연출한 프로그램들이 얼마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 왔는지 알만 했다. 아무리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센스는 있으니 말이다.

책을 집는 순간, 야 제목 한 번 기똥차게 뽑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제목에 들어가 있는 “헉”은 두 가지의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친절하게 달린 영어 설명처럼 껴안기를 뜻한다. 수년간의 직장생활을 하던 작가가 어느 날, 배낭과 스케치북을 껴안고 아프리카로 “헉”을 혹은 껴안으러 떠난다. 그리고 두 번째 “헉”은 놀라움이다. 아프리카의 대자연이 빚어내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그리고 그 안에서 부대껴 사는 이들의 다양한 삶의 군상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역시 아프리카하면 떠오르는 동물의 낙원 혹은 사파리의 천국으로 알려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김영희 PD는 장장 70여일에 걸친 아프리카 여행길을 시작한다. 여행하는 모든 이들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는 적도 밑의 산 킬리만자로를 찾아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빅 폴 빅토리아 호수로 작가는 독자들을 인도한다. 게다가 김영희 PD는 이제는 누구나 흔히 찍을 수 있게 된 디카가 빚어내는 빛의 애니메이션이 아닌 직접 손으로 그린 일러스트들을 당당하게 보여준다. 전문적인 작가의 그림은 아니지만, 그네들의 삶의 면모가 드러나는 그림 이야기가 마음 푸근하게 다가온다.

그가 들렸던 나라 중의 하나인 짐바브웨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얽힌 이야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우선 가게에는 살만한 상품다운 물건이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물건을 사기 위해도 물건 값이 오른다는 이야기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변변찮은 물건을 사기 위해 돈뭉치를 들고 다녀야 한다는 그네들의 현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한편, 냉장시설이 시원치 않은 현지에서 찬 맥주를 마시기 위해 스와힐리어를 배우고, 어느 맥주병에 붙은 라벨을(그 문구가 정말 멋지다) 떼기 위해 몇 병을 마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작가의 노고를 치하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어려서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통해 알게 된 오카방고 델타 여행담을 최고로 꼽고 싶다. 역시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해 더 호감을 가지게 되는 모양이다. 오카방고 델타의 미로 같은 수로를 가이드들과 함께 하는 원시세계로 호기 좋게 탐험을 떠나는 작가의 모습에서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홀로 하는 여행길에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미비아에서는 미처 비자를 받지 못해 입국을 하지 못해 입국거부를 당하기도 하고, 말리의 사하라 투어에서는 얼치기 가이드에게 협박을 당하기고 했으며, 심지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번에서는 노상강도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위기를 작가는 하쿠나 마타타(no problem) 정신으로 헤쳐 나간다. 어쩌면 김영희 PD의 그런 잊고 싶은 추억조차 아프리카의 한 단면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아프리카에 대해 모르고 있던 재밌는 사실들을 알게 됐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 모든 강의 어머니로 불리는 나일 강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고 한다. 물론 그건 어디에서 보느냐의 기준이겠지만 말이다. 두 번째로, 아프리카에서도 겨울 파카가 필요하다. 열사의 땅으로 각인되어 있는 아프리카에서 겨울 파카가 웬 말이겠냐고 하겠지만 작가는 오카방고 델타 부근의 타운에서 겨울 파카를 구입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에도 펭귄이 살고 있다. 펭귄 녀석들은 모두 남극에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프리카 최남단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의 볼더스 비치라는 곳에 살이 투실투실하게 오른 펭귄들이 군락지가 엄연히 있다는 사실.

책을 읽으면서 김영희 PD의 막무가내 정신이 마냥 부러웠다. 우선 일상을 접고 아프리카로 떠났던 그의 패기 넘치는 도전정신과 많은 난관을 모든 게 잘될 거야라는 긍정의 힘으로 돌파해 나가는 과정이 또 한 명의 나그네의 역마살을 한껏 자극하고 있었다. 물론 며칠 동안 고락을 같이 간 사파리 가이드들에게 얼마나 팁을 주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는 초식남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지만, 그래서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비록 버스 출발시간이 잘 안 지켜지고, 공항에서 연착은 다반사인데다가 공무원들의 불친절, 밍밍한 맥주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어떻게든 바가지를 씌우려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에 의하면 만능치료약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조차도 추억이 되기 마련이란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살아 있기만 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원초적 생명력과 가능성이야말로 아프리카의 참맛이 아닐까. This is Afri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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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리뷰해주세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와 나눈 3일간 심층 대화
오연호 지음 / 오마이뉴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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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의 어느 주말, 외출을 하려는데 텔레비전에서 긴급속보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오보겠지 하는 마음으로 외출을 했다. 그런데 시내에 나가 들리는 말들을 들어 보니 정말 노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게 맞다고 했다. 그리고 아주 우연하게 마주친 어르신이 다짜고짜 노 전 대통령이 죽은 게 맞냐며(당신은 이미 알면서 나에게 물었었다), 한바탕 고인의 욕을 해댔다. 이성적으로 대화가 되지 않겠다 싶어서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그게 나의 지난 5월 23일의 모습이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는 인터넷 언론인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기자가 임기 말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을 2007년 가을 세 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정리해서 내놓은 책이다. 이 책에서 인터뷰어 오연호 기자는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 정치가, 사상가 그리고 마치 그의 별명처럼 되어 버린 바보 노무현을 조명한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노무현 대통령은 상고출신으로 사법고시를 치르고 법조인 생활을 시작한다. 부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그는 인권변호사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고, 자신의 정치적 대부인 YS의 공천을 받아 부산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에 발을 내딛는다. 전두환에 대한 청문회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노무현 대통령은, 1990년 YS의 민자당 야합을 분연히 거부하고, 마이너리거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는 부산에서 잇달아 국회의원 선거와 부산시장선거에서 낙선하면서 지역차별의 벽에 좌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반칙을 허용하지 않는 원칙주의자라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2002년 당시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이인제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도 대선후보 레이스에 뛰어 들면서 초반 열세를 딛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맞붙어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것은 마치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가능케 하고, 건전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의 도래를 알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이 맞부딪힌 정치현실은 우리가 기대했던 이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오연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과의 치열한 전투는 임기 내내 노무현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 노 대통령 자신도 국정운영을 하는데 가장 큰 장애였다고 이 책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언론은 근대초기 자신의 순기능인 정부비판을 바탕으로 시민사회에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언론은 그 어느 것의 통제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자의적인 권력을 행사하면서, 시민들의 편이 아닌 시장권력과 결탁하거나 혹은 아예 그 권력 자체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끊이지 않는 언론과의 불화에 더해,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타결과 같은 자신의 지지자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현안들이 잇달아 현실화되면서 노 대통령의 지지자들마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대통령은 야당인 한나라당을 설득해서 대연정 구상도 해보지만, 단발선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결국 지난 2007년 대선에서 747공약을 내세운 한나라당의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우리는 작금에 민주주의 역주행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이 책에 기술된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가슴을 때리는 구절은 바로 “권력을 위임은 하되, 지배는 거부한다”는 말이었다.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국민의 위임을 받은 국가 혹은 권력의 대리인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주권자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신을 구속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이런 역설적인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작금의 이런 현실을 예상이라도 했듯이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서 퇴임 후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기자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라고도 불리는 유시민 교수의 저서 <후불제 민주주의>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아무런 대가 없이 미리 땡겨쓴 민주주의의 가치를 우리는 지금에서야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통제 불능에 빠져 리바이어던처럼 변해 버린 권력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이 각성하고 새로운 시민조직을 결성해야 한다고 고인은 주장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보호나 공동체적 삶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거부하는 시장자본주의의 본질을 깨닫고, 새로운 희망의 연대야말로 우리의 나아갈 길일 것이다.

1992년 가을 떠났던 강원도 답사길에 우연히 당시 전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과 만났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정치에는 무관심해서, 실패한 정치인이었던 그에게 사인을 받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후,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서울시청 광장을 가득 메운 그 무수한 바보들의 행렬에서 다시 한 번 그가 우리에게 정말 소중했던 사람이었구나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말 소중한 것은 그 존재가 사라진 후에야 알게 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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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돌의 도시 - 생각이 금지된 구역
마누엘 F. 라모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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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금지된 도시? 굳이 데카르트의 사유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인간이 사유, 다시 말해서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한편으론 생존을 위해 부단 없이 생각을 해야 하는 고된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잠겨 보기도 한다.

스페인 출신의 작가 마누엘 F. 라모스는 그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앞으로 엄청난 세월이 흐른 기원후 49세기로 독자들을 조심스럽게 인도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카르멜로 프리사스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나이 서른 안팎의 복지부 공무원이다. 그는 내리막길을 보면 주체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 잡혀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 났나 보다.

어느 날, 그렇게 내리막길을 보고서 무지막지한 스피드로 뛰는 도중에 세계 대통령의 핸드백을 가지고 도주하던 범인과 충돌하면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병원에 입원한 카르멜로에게 반한 여간호사의 육탄공세와 심지어 여성인 세계 대통령조차 그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세계 대통령의 각료로 ‘나쁜 환경부 장관’인 조르드는 이를 이용해서 영웅 카르멜로에게 가공할만한 범죄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전임 세계 대통령인 아나를 하야시킬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어떤 점 때문에 스페인 독자들이 열광을 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마누엘 F. 라모스의 은유와 블랙유머가 가득한 스토리텔링들은 어쩌면 번역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두 휘발이 되었는지 좀처럼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게다가 분명 추리소설의 장르적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계속해서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로 인해 집중력이 분산이 된다. 얼마 전에 읽었던 일본 작가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에서처럼 소설 처음에 아예 등장할 인물들의 이름을 죽 늘어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관계와 개연성에 대한 설명이 사족처럼 따라 붙었다.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듯한 미스터리한 연쇄살인과 주인공이 검증받지 않은 시술을 통해 거의 불사신과 같이 재탄생된다는 설정은 마음에 들었다. 사실 200쪽 남짓한 짧은 분량에 그 많은 이야기를 담는다는 게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까. 현재로부터 근 30세기가 지난 다음에도 빌 게이츠의 가문이 거의 전설처럼 유지된다는 가설 또한 흥미로웠다.

그렇게 먼 훗날에도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연금제도의 존재와 모든 각료들이 정무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개인의 취향 때문인지 모처의 비밀클럽을 출입한다. 물론 사회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책읽기도 금지되고, 음악의 존재마저 없는 가운데 예의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은 무슨 낙으로 살지 궁금했다.

아쉽게도 스페인식 블랙유머와 나랑은 그 궁합이 잘 맞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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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의 작업실>을 리뷰해주세요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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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책을 읽게 됐다. 물론 저자인 김갑수 씨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리고 이 책이 김갑수 작가의 작업실인 “줄라이홀”에 관계된 에세이라는 걸 알게 됐다.

마포의 모처 지하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꾸몄다는 작가의 말에 선뜻 부러움이 피어올랐다. 자신의 서식지보다 두 번째 거처라고 할 수 있는 아지트가 작가의 주요 활동무대가 된 본말전도의 상황. 게다가 작업실에서 무슨 작업을 하느냐고 묻지 말란다. 그 내용은 책을 읽으면 낱낱이 밝혀질 테니까 말이다.

일단 그는 방송 진행, 강의 그리고 원고 집필로 밥벌이를 한다고 한다. 대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서 성공적이면서도 충분한 밥벌이를 하기가 어려워지는 세태에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를 마음껏 사발째 들이키고, 3만 장이나 되는 레코드들을 원 없이 들으면서 자신만의 아지트에 틀어 박혀 자신이 자처한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지기들과의 떠들썩한 파티 타임을 오가는 그의 삶에 어찌 부럽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어려서 LP를 모으던 시절이 있었다. 작가는 돈이 생기는 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 생두와 LP를 모은다고 하는데, 나에게도 어린 시절에 라이선스도 아닌 빽판을 죽어라 모았다. 정말 나중에 가치도 없는 그런 빽판을 말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CD가 LP를 대신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그 CD마저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춰 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LP만세를 외치면서 이제는 이름마저도 생소한 턴테이블에, 상당한 가격임에 틀림없을 스피커 유닛과 앰프 타령을 해대는 지은이의 글은 독자를 소외시키는 느낌마저 들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음반-커피 그리고 오디오파일 이야기 중에서 맨 끝의 오디오파일 부분이 가장 지루했다. 왜냐구? 개인적으로 이제는 더 이상 관심도 없고, 앞으로도 플라스틱 음반을 들을 기회가 손으로 꼽을 정도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가가 말하는 그런 장비들을 갖출 경제력이 없으니깐. 이건 그냥 돈 몇 푼 더 주고 커피 필터 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뭐 그래도 커피 이야기와 음반 이야기는 읽는데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아쉽게도 개인적으로 커피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커피 생두를 가는 그라인더와 일본 모회사에서 만들어내는 커피 용품 일체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생소하기만 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오디오파일의 삶보다는 비용이 좀 적게 들지 않을까?

역시 가장 공감이 가는 이야기는 바로 음반 이야기다. 물론 작가처럼 그런 어마어마한 컬렉션을 꿈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군대 시절에 처음으로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연주한 리스트의 <사랑의 꿈 3번>을 듣고 나서 클래식의 세계에 입문하게 됐다. 물론 그전에는 팝송, 그 중에서도 헤비메틀을 즐겨 들었었다. 이제 나이가 드니, 스트레스해소용으로 듣던 헤비메틀이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곤 한다. <디아파송>이니 <부루의 뜨락> 같은 클래식 전문점들을 찾던 시절이 생각난다.

물론 문명의 이기에 완전하게 투항해 버린 나는 LP 대신 CD를 대체 미디엄으로 잡았고, 한동안 지난 세기의 명연주자들과 명지휘자들이 직접 연주하고 지휘한 복각CD들을 한참 찾아 듣곤 했다. 물론 지글거리는 잡음은 기본이었지만, 사라사테가 직접 연주한 <찌고이네르바이젠>이나 베를린 필의 초대 상임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 그리고 마지막 카스트라토의 소름끼치는 육성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오늘 서점에 갔다가 내가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던 시절에 책으로 지표가 되어 주었던 안동림 씨가 새로 펴낸 <안동림의 불멸의 지휘자>란 책을 슬쩍 펴보았다. 즐겨 듣던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그리고 카를로스 클라이버 같은 이름이 아주 반가웠다. 아, 작가가 말한 스비야토슬라브 리히터의 <리흐테르>를 찾아 보았는데 그 책이 국내에 출간돼 있었다! 카라얀과 리히터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의 웅대하면서도 장엄한 오프니은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김갑수 작가의 아날로그 음반과 커피 그리고 오디오 예찬에 태클을 걸 눈곱만큼도 없다. 하지만 그 취미생활들이 누구나 다 손쉽게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에게는 줄라이홀이 자신이 꿈꾸는 도피안의 세계로의 초대장일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차안의 세계처럼 그렇게 멀게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말이 필요없다, 어쨌든 부럽다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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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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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야,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가 대단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 일본에서 출간된 지 20년 만에 출간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오래 걸렸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출간이 되었다가 절판의 운명에 처했다가 이번 기회에 다시 독자들의 품에 들어오게 된 사연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죽인 소녀>는 불혹의 나이에 추리소설 작가로 등단하게 된 하라 료의 두 번째 작품으로 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한다. 역시 하드보일드 작가답게 군더더기들은 죄다 빼 버리고 바로 사건의 핵심으로 주인공 사와자키와 독자들을 몰아넣는다. 우리나라에는 조금은 생소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탐정이 이웃 일본과 미국에서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다.

탐정 사와자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로부터 전화를 받고 마카베 씨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는 졸지에 마카베 씨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딸인 사야카의 유괴범으로 몰린다. 하지만 곧 사와자키는 유괴범의 지시대로 6천만 엔이라는 거금을 유괴범에게 전달하는 역을 맡게 된다. 도쿄의 거리를 누비며, 유괴범의 지시대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던 중 오토바이 폭주족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사와자키는 의식을 잃는다. 물론 그가 배달하고 있던 현금이 든 돈 가방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자, 이제 사와자키는 자신이 어린이 유괴의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경찰의 의심을 안은 채,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유괴범의 추적에 나서게 된다.

<내가 죽인 소녀>에서 하라 료는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심리묘사나 배경보다는 오로지 실제적인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가공했다는 지명들은 마치 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도쿄 도심을 질주하는 사와자키의 블루버드 안에서, 그가 미행하는 골목길들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캐릭터 간의 대사 역시 일품이다. 불필요하게 장황한 대사 대신에 간결하면서도 갈등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 간의 의사전달과 감정묘사를 위한 짧은 대사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역시 유괴 사건의 단서 제공에 있어서도, 독자들이 너무 좌절하지 않게 하면서 계속해서 작가의 사건전개를 따라 오게끔 하는 작법 역시 오랜 시간을 들여서 숙성시키는 하라 료 스타일다웠다.

하지만 역시 20년이라는 세월의 벽이 주는 괴리감이 곳곳에서 느껴지기도 했다. 가령 예를 들면 핸드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20년 전의 상황에서 누군가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 사와자키는 공중전화를 이용해야만 했다. 다른 것도 아닌 그 공중전화가 일본 발전의 상징이라고까지 치켜세우다니.

아쉬웠던 점 중의 하나는 도쿄의 지명에 대해 조금 더 알았더라면 소설의 재미가 좀 더 와닿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신주쿠니 가쿠슈인이니 하는 지명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도리가 있나. 그리고 무언가 한 건 터뜨려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부도수표가 된 조직폭력단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와 사와자키의 과거로 인도해줄 와타나베 겐고의 그림자가 얼비치는 정도로 마무리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대개 하드보일드 소설들이 그렇듯이 <내가 죽인 소녀> 역시 초반부 전개가 좀 어려웠다. 하지만 고 부분만 넘기면 재미가 배가되면서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본격적으로 사와자키의 추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마지막 장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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