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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중고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게 됐다. 뮤리얼 스파크,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그레이트 워라고 불린 1차세계대전이 끝나던 해에 영국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새로운 천년에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생전에 모두 22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세 번이나 부커상 숏리스트에 올랐으나 아쉽게도 수상의 영예는 갖지 못했다.
이번에 만난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1961년에 발표된 작가의 6번째 소설이다. 소설의 제목에 나오다시피 진 브로디 선생이 주인공이고, 브로디의 전성기에 그녀가 개스라이팅한 6명의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브로디 무리(Brodie set)라고 불렸다. 마샤 블레인 여학교에서 1930년부터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질기게 연장되었다. 진보적 사고를 가지고 과학보다 인문적 소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진 브로디 선생은 매카이 교장에게는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해직시키기 위해 매카이 교장은 브로디 무리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하지만, 진 브로디가 어디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었던가.
훗날 성적 매력으로 유명한 로즈 스탠리, 수학적 능력이 뛰어났던 모니카 더글라스, 배우가 꿈이었던 제니 그레이, 요정 같은 체조 실력과 수영을 잘했던 유니스 가드너, 진 브로디 선생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샌디 스트레인저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이 없고 우둔했던 메리 맥그레거가 그들이었다. 진 브로디 선생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학생들을 밀가루 반죽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로 끌어 들였다.
서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여섯 소녀들의 공상을 휘저으며 그렇게 전개된다.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자면, 진 브로디 선생은 결국 브로디 무리 중의 누군가의 배신으로 결국 해직되게 된다. 과학으로 대변되는 이성보다 감성적인 부분을 강조하던 진 브로디 선생은 브로디 무리에게 은연 중에 아니 노골적으로 엘리트 의식을 불어 넣는다. 십대 소녀들에게 학교와 친구들이 전부이던 시절, 자신들을 그렇게 인정해 주고 돌봐 주는 선생님에게 의지하게 되는 건 너무나 당연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자신의 전성기를 늘 강조하던 브로디 선생이 알고 보니, 유럽 대륙에서 한창 기승을 부리던 파시즘의 지지자였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는 이미 집권하고 있던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경도되었고, 나중에 독일의 실력자가 된 히틀러의 나치 돌격대를 찬양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7번째 브로디 무리가 되고 싶어하던 조이스 에밀리라는 학생을 부추겨서 스페인 내전에서 죽게 만들지 않았던가.
브로디 무리에서 독재자로 군림하던 진 브로디의 모습은 파시스트 지도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진 브로디 선생이 매카이 교장으로 대변되는 외부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내부의 철통같은 단합을 도모하고, 브로디 무리의 소녀들에게 일체의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라. 도덕적으로도 진 브로디 선생은 이율배반적이었다. 고든 로더 선생과는 연인 사이였으며, 유부남이었던 테디 로이드와 키스하는 장면도 목격되었다.
진 브로디 선생은 아무런 경험도 없는 철부지 소녀들을 개스라이팅해서 그야말로 밀가루 반죽을 치대듯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빚어냈다. 그런 브로디 선생에게 브로디 무리가 반기를 들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그녀가 그렇게 주장하던 자신의 전성기가 이제 지나간 과거가 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배신자가 등장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호텔방에서 화재로 죽은 메리를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이제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헬레나 수녀가 된 진 브로디 선생의 엘리트 제자 샌디 스트레인저를 찾은 친구들은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노라고 고백한다. 샌디도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바로 전성기의 진 브로디 선생이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진리와 아름다움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과도한 자기 확신에 빠져 자신이 구사하는 삶의 방식을 따르라고 주문하는 독선적인 모습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교육 공장이라고 부르는 마샤 블레인 여학교를 떠날 것을 요구하는 매카이 교장의 요구를 전면 거부하고 투쟁하고 자신의 아이들을 동원하는 장면 앞에서는 과연 그녀가 진정한 교육자였는 지에 대해 묻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처음에 조이스 에밀리가 스페인에 갔다고 했을 때, 불의에 맞서 싸우는 공화파를 위해 국제여단의 일원이 되어 싸우러 간 줄 알았다. 하지만, 파시스트 동조자였던 진 브로디 선생의 선동에 넘어가 내셔널리스트 반군인 프랑코 편에서 싸우러 갔다는 사실에 놀랐다. 진 브로디 선생이 과연 자신의 제자의 애꿎은 죽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아니지 않았을까.
사실 누가 진 브로디 선생을 배신했는가는 어느 순간 밝혀지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브로디 무리의 소녀들이 선생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순간, 배신은 예정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했고, 누구라도 배신의 방아쇠를 당길 준비는 되어 있었으니까.
소녀들의 성장과 진 브로디 선생의 몰락의 대비로 구성된 뮤리엘 스파크의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은밀한 보이저리즘의 흥미를 제공해 주지 않았나 싶다. 브로디 선생의 몰락은 그녀의 업보이기 때문에 딱히 아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자의 다른 작품도 한 번 만나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