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쇄를 찍자 6
마츠다 나오코 지음, 주원일 옮김 / 애니북스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십년된 자동차가 또 말썽이 생겼다. 얼마 전에도 문제가 생겨서 돈을 잡아 먹었는데 또 이런다. 어제 아침에 트레이더스에 장을 보러 다녀왔는데 소음이 나서, 정비소에 가야지 싶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예약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는 수 없이 와서 기다리라고 하는 곳으로 출동했는데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퍼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가서 보니 앞바퀴의 쇼바와 스프링이 나갔다. 더 늦었으면 큰 일 날뻔 했다는 말과 함께, 수리비로 29만원이 날라갔다. 타이어 한짝 12만원은 덤으로.
수리시간이 두시간 반 정도 걸린다 해서 난감해 하던 차에 마침 가지고 출동한 마츠다 나오코 작가의 <중쇄를 찍자>가 아주 도움이 됐다. 책을 사러 수원에 가야 하나 어쩌나 싶던 차에 에코백에 싸가지고 간 <중쇄> 4권 읽다 보니 어느새 수리가 끝나 있더라. 고마워 <중쇄>.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1권과 2권은 없어서 3권부터 빌렸다. 책을 읽은 경험에 의하면 연재만화의 특징이라고나 할까. 만화에도 편집자들의 능력이 탁월하게 발휘된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됐다. 특히 연재의 경우에는 그전 편을 읽지 않은 이들도 몰입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코토칸 바이브스 편집자들의 예리한 지적에 감탄했다.
그리고 보니 일본에는 여전히 주간 만화지나 단행본이 시장이 활발한 모양이다. 그리고 남녀노소할 것 없이 누구나 만화를 그리겠다는 아니 더 나아가 만화가로 성공하겠다는 이들이 넘쳐나는 모양이다. 한국에서 이미 주간지 시장은 고사한 지 오래고, 단행본도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 모두가 포털에 매달린 웹툰으로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주호민이나 이말년 혹은 기안84 같이 이름 있는 작가들도 있으나, 일본의 그것 같은 저변 확대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리고 보니 오래 전에 만화를 그린다는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요즘 뭘 하나 싶다. 나이가 드니 옛 친구들을 관리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새로운 관계는 더더욱 그렇고.
또 서설이 길어졌다. 암튼 만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는 전직 유도선수 쿠로사와 코코로다. 코토칸 바이브스의 신출내기 편집자로 다른 건 몰라도 패기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운동을 해서 그럴까? 물론 명랑만화의 리듬을 타고, 망가뜨리는 야스이 같이 신인 작가들을 소모품으로 보는 편집자와는 달리(아, 이런 빌런 캐릭도 구성 상 반드시 필요하지 않나 싶다) 우리의 “새끼곰” 쿠로사와 씨는 아주 깨발랄한 그런 이미지로 쇠락해 가고 있는 만화 출판계의 요모조모를 아주 피부 깊숙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일본 만화계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을 만한 만화 출판계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곳에서 데뷔를 거쳐 신예 작가의 꿈을 꾸고 있는 신예 작가들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파워하라(power harrassment)가 넘쳐 대긴 마찬가지다. 수많은 만화가 지망생들이 오늘도 기성 작가들의 어시로 혹은 데뷔를 꿈꾸며 콘티 짜기와 모사 그리고 작업에 열심이다. <중쇄>를 통해 그들만의 세계를 엿보는 듯하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쿠로사와와 데뷔를 준비하던 만화가 지망생 아가리에(東江) 씨의 경우를 한 번 살펴보자. 누구나 그렇듯 만화가는 영화판의 입봉 같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 모양이다. 작가들도 신춘문예 따위의 관문을 거쳐야 하듯, 만화가 지망생 역시 데뷔전을 치르고 작가가 되는 코스가 있는가 보다. 이웃 일본의 이야기라 국내의 경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1도 없다.
자신도 신입이긴 하지만, 신예 작가는 기초부터 탄탄하게 다져야 한다는 신념을 지닌 쿠로사와는 아가리에 씨와 협업을 느린 속도로 진행한다. 하지만, 쿠로사와의 동료 야스이는 다른 생각을 지닌 캐릭이다. 그는 아가리에의 가능성을 엿보고 자신이 쿠로사와에게서 낚아채서 데뷔를 미끼로 그녀의 재능을 집어 삼킨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파워하라’라고나 할까. 당연히 아가리에 씨는 데뷔를 시켜 준다는 제안에 야스이에게 붙지만, 그와의 작업은 자신에게 행복감을 주지 못한다.
결국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정석이라는 고리타분한 말을 마츠다 나오코는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과연 그런 방식이 정말 놀라운 속도로 세태가 변하고 스타일과 인기가 피고 지는 만화 시장에서도 유효한 지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싶다. 결국 아가리에는 야스이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잠시 쉬어가리를 선택한다. 멋지다, 쨕쨕쨕!
한편 만화의 상업적 성공의 추구와 더불어 무언가 새로운 만들어낸다는 창작자의 창작 욕구가 서로 상충하는 장면들도 다수 등장한다. 이른바 자본주의 3.0 시대라고 하는 소비만능주의 사회다. 우리는 소비하는 수많은 것들이 과연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지 물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쇄>의 주인공들이 매진하는 만화 그리고 문학 같은 부분들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물론 쿠로사와나 서점 주인장 같은 업자들이야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겠지만, 그 분야에 1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네들의 소비 행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 팬덤을 바탕으로 해서 나리타 메론느 같은 연쇄싸인마들과 인기 작가들의 싸인들을 사냥하는 선수가 심지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 모두 돈으로 귀결된다. 저자의 싸인이 들어간 싸인본을 재판매(resale)한다는 것이다. 물론 프리미엄을 얹어서 비싼 값을 받는 건 기본이다.
미의 거장 편도 인상적이었다. 이본느라는 캐릭터로 프랑스의 레종 도뇌르 문화훈장을 받을 정도라면 대가로 세계적 인정받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그를 기념하는 화보를 코토칸 편집부는 추진한다. 평생 아름다움만을 추구한 노구의 미학자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겠지. 그는 최고의 기획자와 인쇄 장인이 자신의 화보집을 다뤄주지 않는다면 안된다는 조건을 내건다. 자 이제부터 코토칸의 편집부 선수들은 이 어려운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야 한다. 종이를 맛보는 기인부터 시작해서, 왠지 <중쇄>는 특별한 영역의 기인열전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탁월한 선수들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서사를 흥미진진하게 이어간다. 아, 바로 이런 게 일본 만화의 힘이란 말인가.
확실히 만덕(만화 덕후)들의 세계는 나같이 보통 사람들의 상상과 상식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나 싶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래야 시장에서 팔리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변별성이야말로 우리의 지갑에서 카드나 현금을 꺼내게 만드는 원동력일 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도 숱하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일단 어제 내가 만난 4권의 <중쇄>에는 대략 이런 서사들이 담겨 있었다. 반가운 사실 중의 하나는 이 시리즈가 올해 9월까지 해서 13권까지 나와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은 9권이 더 있다는 말이겠다. 신나는 새해 맞이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