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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민족 상.하 세트 - 전2권
강태진 글.그림 / 비아북 / 2016년 9월
평점 :
나의 소장책 다이어트는 지지부진하고, 비가 온 뒤 날도 흐릿하고 해서 도서관에 들렀다. 책도 반납하고 다른 책도 좀 빌릴까 해서. 관개 도서관들이 내일부터 휴무에 돌입할 지도 모른다고 해서 부랴부랴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 사람들은 없는데 주차장에는 웬 차들이 그리 많은지. 다카노 히데유키의 <수수께끼의 독립 국가 소말릴란드>가 타깃이었는데 우연히 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도 빌려 왔고, 단박에 읽었다.
역시 독재 시절이었던 1973년에 시작된 보안사 고문 기술자 박도훈의 서사는 14년의 세월이 흐른 1987년에 만개한다. 종로구청에서 주최한 반공 표어 응모에 당선된 중3학생 박도훈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다. 당선 상금은 3만원이었다. 라면에 20원이던 시절이니, 대충 짐작이 될 것이다.
빛나는 서울대 출신의 박도훈은 중3 시절에 만난 보안사 수사관 장세훈 실장의 엄호로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도훈의 배다른 형님 박종훈 역시 공부를 잘한 수재였던지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동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산다. 도훈이 꾀한 모종의 공작으로 어머니의 원수였던 아버지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강대진 작가의 그래픽 노블 <조국과 민족>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박도훈의 직장 동료 김대한의 아버지 김판수가 그 중에서도 제법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서청 출신으로 서북건설의 회장인 김판수는 이른바 빨갱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색출하는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서청 니뽄도’를 앞세워 제주도에서 무고한 이들의 인명을 앗아간 빌런이기도 하다. 기업가로 변신해서는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그런 캐릭터로 등장한다. 보안사 직원인 아들 김대한과 불화한다.
어떻게 보면 우울할 수 있는 1980년대를 그린 <조국과 민족>에서 다방 레지 출신의 지희지는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천방지축으로 보이는 사연을 품은 희지는 주인공 도훈과 ‘필연적인’ 로맨스를 연출하면서 티키타카를 맞춘다. 아마 이 둘의 이런 관계가 빠졌다면 <조국과 민족>은 정말 우울하지 않았을까 싶다.
장세훈 실장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멀쩡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드는 이른바 용공 조작을 일삼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일단의 고문 기술자들이 동원되는데, 서울대 출신의 도훈이 팀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테제와 일그러진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지금이라면 도저히 묵과될 수 없는 그런 야만적 방식으로 간첩 사건에 대한 조작이 이루어졌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을 지경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협박과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 앞에 인간의 육신은 부서지기 쉬운 그런 연약할 존재일 뿐이다.
비밀요원인 박도훈은 일본에서 금괴를 밀수하면서 치부를 하다가 자신의 조직이 일망타진해야 할 북한의 공작원에게 급기야 포섭되어 버린다. 어느 조직이든 어딘가에서 정보가 새기 마련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도훈이 그들의 그물에 걸려 거물 간첩 광명성(정태길 교수)에게 조종당하게 될 줄 알았을까. 하긴 장세훈 실장 역시 남파한 북한 간첩 량강 1호 스님과 치밀한 스파이 게임을 벌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노회한 스파이 정태길 교수는 박도훈을 더욱 치밀하게 조종하기 위해, 미녀 간첩 정현숙을 붙이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포섭된 도훈은 계속해서 조직이 광명성 일당을 잡기 위한 정보들을 흘리고, 소수만 정보가 계속해서 노출되자 내부에 프락치가 있다며 색출에 나서기도 한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면, 북한의 스파이 조직은 이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공작을 수행하다가 결국 도훈이 광명성에게 연락하지 못한 사이 조직 요원들이 광명성-정현숙을 급습해 정현숙, 리연실을 체포한다. 리연실이 혹독한 전기고문 끝에 박도훈의 정체를 밝힐 위기에 처하자 도훈은 가차 없이 그녀를 죽여 입을 막는다.
이 즈음에서 독자들은 과연 도훈이 어떻게 몰락할 것인지 궁금하게 된다. 그의 정체는 언제고 발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갑자기 광명성이 체포되면서 도훈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자신의 딸 같았던 리연실이 도훈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물 간첩 광명성은 도훈의 정체를 밝히고, 이를 사전에 알아챈 도훈을 마련해둔 비자금을 가지고 잠적을 감춘다.
그리고 도훈은 자신의 은인인 장세훈 실장을 협박해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오래전, 장실장의 아들 현우가 마약사건으로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자를 블로터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게 만든 사건에 대한 녹음테이프를 보험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복마전 같은 전개 아닐 수 없다.
한편, 김판구 회장의 아들 김대한은 계속되는 장실장의 무리수에 질려 언론의 오병수 기자에게 양심 고백할 것을 결심한다. 이를 사전에 파악한 장실장은 자신의 오랜 동료이자 어둠 속에서 활약 중이던 황 소령을 등판시켜 김대한과 박도훈 모두를 처리할 것을 결심한다. 우선 도훈과 만나는 장소에 황 소령과 김대한을 같이 보내고, 황 소령에게 김대한을 처리하고 그의 죽음을 도훈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플랜을 가동한다. 그리고 도훈은 대한의 아버지 김판구 회장이 처리하게 만들겠다는 아주 신박한 복안이었다. 자,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도훈의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도 그렇지만 “조국과 민족”을 위하겠다는 인사들치고 진심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이들은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오히려 우리 같이 보통의 평범한 이들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오늘도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거창한 슬로건을 앞세우지만, 거의 모든 빌런들의 개인의 영달과 안전을 추구할 따름이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이고 위법적인 요소들은 모두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는 핑계로 포장된다. 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사과는 물론이고, 심지어 사유하지도 않는다. 자신만 수긍할 수 있는 기묘한 방식으로 비논리를 만들어낼 따름이다.
희지가 잠시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던 도훈이 알고 보니, 자기 가족의 원수 같은 인물이었다는 게 들어나는 순간 희지(본명 지화자)는 복수를 꿈꾼다. 자신이 잘 나가던 시절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자 희지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할 궁리를 하는 도훈에게서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보기도 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전직 국정원장을 모델로 삼았다는 장세훈 실장이야말로 최후의 승리자였다. 도훈이나 대한 같이 유능한 선수들을 계속해서 발굴해서 자신의 휘하에 두고, 조직과 자신을 보호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빌런의 모습이 그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드러나게 되는 온갖 위기 상황들에도 당황하지 않고 기지를 발휘해서 꼬리를 자르고, 또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그야말로 천재적인 기획가가 아닐 수 없다. 정보와 어둠의 그림자까지 동원해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장면은 대단했다.
문득 도훈이 처음에 광명성에게 포섭되었을 때, 조직의 실세 장세훈 실장에게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예고된 비극의 서사에서 탈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장실장과 처음부터 같이 일을 시작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랄까. 한 번 잘못 발을 들인 악의 구렁텅이 속에서 올바른 길로 급격한 방향전환 자체가 무리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책이 나온 2016년에 이미 <조국과 민족>의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해서 검색해 보았는데 결과물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4년 전에 OTT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 뒤로도 정보가 보이지 않는다. 영화 산업을 OTT가 대체하는 추세인데, 과연 9년 전의 영화화 결정이 다시 한 번 빛을 보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