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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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미국이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책의 출발점인 202116일 미국 의회에 일단의 폭도들이 난입한 사건은 전 세계에 묵직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게 백주에 미국 민의의 전당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긴 그보다 더 충격적인 최근의 계엄사태를 목격한 입장에서 우리가 그동안 믿어온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시스템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지 않았던가.

 

공화당이 미국 남부 제주의 대안이 되기 전, 민주당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정당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재건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당이 흑인들의 표가 필요해서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인 적도 있지만 결국 백인들의 표를 의식해서 흑인들을 투표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는 역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the Evil)>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붕괴를 유도하는 일군의 정치인들은 무슨 대단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전선에 나선 게 아니라, 오히려 극단의 정치를 발판으로 삼아 정치적 이익을 꾀하는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적극적인 무관심 때문에 민주주의의 쇠락이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남부에서 공화당은 저주의 말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엘리트주의 공화당은 남부로 눈길을 돌렸다. FDR이 이끄는 민주당이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의 위기를 탈출하면서 전국적 지지를 얻게 되었고, 공화당은 영원한 소수당으로 떨어질 위기였다. 하지만 시민권 투쟁이 가속화되어 가던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위기감에 휩싸인 남부 백인들에게서 공화당은 정치적 금광을 발견했다. 인종적 보수주의를 채택한 공화당은 백인 정당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기독교 집단까지 가세하면서 미국 남부는 공화당의 표밭으로 변신했다. 이어지는 선거에서 남부, 이른바 서던 벨트는 공화당의 막강한 지원군이 되었다.

 

2025년을 사는 미국인들에게 미국 건국 당시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만들어진 헌법은 신성한 경전으로 취급된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을 수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미국 시민들에게 의심 받는다. 헌법도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히 시대에 맞지 않는 오류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가령 예를 들어 이제는 너무나 당연시되는 인종 평등과 여성참정권도 미국의 건국 초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저자들이 언급하고 있다시피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거저 얻어진 것들은 하나도 없다. 인종 평등 문제는 남북전쟁을 초래했고, 여성참정권은 한 세기에 걸친 치열한 투쟁과 수정의 과정을 거쳐 얻어낸 결과물이다. 새로운 진전을 위한 아이디어의 제안과 의제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저자들은 자신들의 책에서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러니 미국 시민들이 보다 자유롭고 편한 방식으로 투표를 할 수 있도록, 기존의 유권자 등록 방식과 최다득표자 승자 원칙 같은 문제들을 수정할 수 있도록 헌법 개정을 시도해야 한다는 아이디어에 도달한다. 우리의 주민등록증 같은 전국적 차원의 내셔널 ID 발급에 대한 아이디어는 또 어떤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한 번도 그런 국가 차원의 신분증이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에서 가능할까라는 우려가 먼저 들었다. 50개 주마다 2명씩 배정된 상원 의원 선출 역시 지난한 투쟁의 결과로 얻어낸 민주주의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 수가 있었다.

 

미국의 최고 정치지도자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인단 문제도 당연히 손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 들어(작년 이전까지) 공화당이 상원에서 미국 인구의 다수를 대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미국 대법원의 당파적 편향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타협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법원에 끌고 가는 건 미국에서 선도적으로 실행된 모양이다. 유권자 다수의 상식과 대법원 구성 간에 간극이 벌어지면서 여론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심지어 배심원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의 저자들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이에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봉쇄(containment)와 배제(exclusion) 전략을 주문한다. 저자들은 이런 전략들이 매우 효과적이긴 방법이긴 하지만, 단기처방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보다 적극적이고, 민주주의를 공고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제시된다. 하지만 여기서 아주 중대한 시간의 갭이 발생한다. 2024년 트럼프가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문제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헌법 개정을 위한 조건을 낮출 것을 저자들이 주문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작년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노골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는 수정헌법 22조마저 고쳐서 트럼프의 3선을 추진하겠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고 있다. 작금의 트럼프가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관세 전쟁이나 대통령의 생일을 연방공휴일로 지정하겠다는 희극 같은 사태들을 그들은 아마 예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조 바이든의 신승과 미국 시민들의 양식에 힘입어 미국식 민주주의의 복원력을 맹신한 게 아닌가라는 비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과연 미국 민주주의가 지닌 자율 교정 시스템이 대안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든다.

 

미국을 필두로 해서 전 세계의 민주주의는 현재 지금까지 만나 보지 못한 위기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극단으로 치우친 정치적 소수는 평범한 독재의 가면을 쓰고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체면이나 상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이들의 행태에 다수의 상처받은 마음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SNS 담벼락에 자신들의 주장과 생각들을 새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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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쇼핑몰 -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킬러들의 쇼핑몰> 원작 소설 새소설 5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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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영화나 드라마가 원작보다 못하지 않나? 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킬러들이 쇼핑몰>의 원작인 <살인자의 쇼핑몰>을 책으로 만났다. 나의 판정은 청출어람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시리즈의 영상미가 강렬했던 탓일까? <살인자의 쇼핑몰>을 읽으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드라마와 원작 간의 상이한 점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일단 드라마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래시백을 엄청나게 사용하면 원작은 심심한 평양냉면 같은 맛으로 과거를 조금씩만 보여준다.

 

무엇보다 캐릭터에서 주인공 21세의 정지안의 삼촌으로 등장하는 정진만이 도깨비의 남자 이동욱과는 너무 다른 그런 캐릭터다. 중년은 맞지만, 이동욱 같은 꽃중년이 아닌 대머리 아재 중년이라고. 그리고 드라마에서 정진만은 과거에 한자락하는 킬러 용병집단의 리더였지만 현재에서는 무기밀매를 하는 섯다 하우스 출신의 경력뿐이다. 아직 2권을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2권에서 악당 베일과 엮인 과거가 나올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드라마는 원작의 커다란 줄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원작보다 훨씬 재밌게 만들어진 건 사실이다. 드라마에서는 지안을 지키기 위해 맹활약을 보여주는 여성 킬러 소민혜의 활약이 원작에서는 대거 삭제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동창생 빌런이자 바빌론 집행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 배정민의 악행은 그대로 유지된 느낌이다. 드라마에서도 지안이 정민을 직접 처리했던가? 서로 속고 속이는 복마전 같은 진행 양상이 역시나 일품이었다.

 

지안과 자신의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자살한 것으로 위장했던 쇼핑몰의 진짜 주인 정진만이 등장해서 그간의 경과에 대해 설명해 주는 건 마치 우리 독자들을 위한 친절한 서비스라고나 할까. 역시 드라마에서는 마지막에 진만이 등장하는 것으로 시즌 2의 출발을 예고하며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지 아마.

 

<살인자의 쇼핑몰>의 주인공 지안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을 베일에게 잃고 천애 고아가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위기를 초래한 진만의 도움으로 세상의 험난한 풍파를 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게다가 위험천만한 무기 밀패 쇼핑몰인 머더헬프의 자의반타의반으로 2대 주인장의 자리에 오른다. 위기의 첫 번째 관문을 어렵사리 통과한 지안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부모의 복수에 나서는 주인공의 처연한 모습이야말로 무협의 세계의 기본이 아니었던가. 과거에 무협 영웅들이 가공할 신공을 배워 강호에 나서게 되었다면, 현대에는 베레타나 글록 같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킬러들이 아마 강호의 협객들의 뒤를 이은 그 무엇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파의 지존에 해당하는 베일이라는 놈은 업계에서 호각세를 보이며 자신의 발목을 잡는 정진만을 제거해야만 했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정진만이가 호락호락 자신과 조카 지안 그리고 자신들을 돕는 동료들의 목숨을 내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 참 진만의 사이드킥들이 한국인들이 아닌 민혜와 잉잉 같은 외국인이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오히려 토종 한국인 킬러들이 머더헬프 창고 대개방을 노리며, 자발적으로 용병이 되어 지안들의 공격에 나서지 않았던가. 그리고 보니 드라마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지안들을 위협하던 원거리 저격조 이성조가 원작에서는 두루뭉술하게 죽었다는 말로 퉁치는 장면이 좀 아쉽기도 했다. 이렇게 캐릭터의 사용과 소모가 원작과 드라마가 현저하게 다를 수 있다는 말이겠지.

 

이번에는 <살인자의 쇼핑몰2>까지 읽고 나서 정갈한 마음으로 오리지널 시리즈 시즌 2를 기다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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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민족 상.하 세트 - 전2권
강태진 글.그림 / 비아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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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장책 다이어트는 지지부진하고, 비가 온 뒤 날도 흐릿하고 해서 도서관에 들렀다. 책도 반납하고 다른 책도 좀 빌릴까 해서. 관개 도서관들이 내일부터 휴무에 돌입할 지도 모른다고 해서 부랴부랴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 사람들은 없는데 주차장에는 웬 차들이 그리 많은지. 다카노 히데유키의 <수수께끼의 독립 국가 소말릴란드>가 타깃이었는데 우연히 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도 빌려 왔고, 단박에 읽었다.

 

역시 독재 시절이었던 1973년에 시작된 보안사 고문 기술자 박도훈의 서사는 14년의 세월이 흐른 1987년에 만개한다. 종로구청에서 주최한 반공 표어 응모에 당선된 중3학생 박도훈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다. 당선 상금은 3만원이었다. 라면에 20원이던 시절이니, 대충 짐작이 될 것이다.

 

빛나는 서울대 출신의 박도훈은 중3 시절에 만난 보안사 수사관 장세훈 실장의 엄호로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도훈의 배다른 형님 박종훈 역시 공부를 잘한 수재였던지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동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산다. 도훈이 꾀한 모종의 공작으로 어머니의 원수였던 아버지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강대진 작가의 그래픽 노블 <조국과 민족>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박도훈의 직장 동료 김대한의 아버지 김판수가 그 중에서도 제법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서청 출신으로 서북건설의 회장인 김판수는 이른바 빨갱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색출하는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서청 니뽄도를 앞세워 제주도에서 무고한 이들의 인명을 앗아간 빌런이기도 하다. 기업가로 변신해서는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그런 캐릭터로 등장한다. 보안사 직원인 아들 김대한과 불화한다.

 

어떻게 보면 우울할 수 있는 1980년대를 그린 <조국과 민족>에서 다방 레지 출신의 지희지는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천방지축으로 보이는 사연을 품은 희지는 주인공 도훈과 필연적인로맨스를 연출하면서 티키타카를 맞춘다. 아마 이 둘의 이런 관계가 빠졌다면 <조국과 민족>은 정말 우울하지 않았을까 싶다.

 

장세훈 실장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멀쩡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드는 이른바 용공 조작을 일삼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일단의 고문 기술자들이 동원되는데, 서울대 출신의 도훈이 팀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테제와 일그러진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지금이라면 도저히 묵과될 수 없는 그런 야만적 방식으로 간첩 사건에 대한 조작이 이루어졌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을 지경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협박과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 앞에 인간의 육신은 부서지기 쉬운 그런 연약할 존재일 뿐이다.

 

비밀요원인 박도훈은 일본에서 금괴를 밀수하면서 치부를 하다가 자신의 조직이 일망타진해야 할 북한의 공작원에게 급기야 포섭되어 버린다. 어느 조직이든 어딘가에서 정보가 새기 마련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도훈이 그들의 그물에 걸려 거물 간첩 광명성(정태길 교수)에게 조종당하게 될 줄 알았을까. 하긴 장세훈 실장 역시 남파한 북한 간첩 량강 1호 스님과 치밀한 스파이 게임을 벌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노회한 스파이 정태길 교수는 박도훈을 더욱 치밀하게 조종하기 위해, 미녀 간첩 정현숙을 붙이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포섭된 도훈은 계속해서 조직이 광명성 일당을 잡기 위한 정보들을 흘리고, 소수만 정보가 계속해서 노출되자 내부에 프락치가 있다며 색출에 나서기도 한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면, 북한의 스파이 조직은 이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공작을 수행하다가 결국 도훈이 광명성에게 연락하지 못한 사이 조직 요원들이 광명성-정현숙을 급습해 정현숙, 리연실을 체포한다. 리연실이 혹독한 전기고문 끝에 박도훈의 정체를 밝힐 위기에 처하자 도훈은 가차 없이 그녀를 죽여 입을 막는다.

 

이 즈음에서 독자들은 과연 도훈이 어떻게 몰락할 것인지 궁금하게 된다. 그의 정체는 언제고 발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갑자기 광명성이 체포되면서 도훈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자신의 딸 같았던 리연실이 도훈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물 간첩 광명성은 도훈의 정체를 밝히고, 이를 사전에 알아챈 도훈을 마련해둔 비자금을 가지고 잠적을 감춘다.

 

그리고 도훈은 자신의 은인인 장세훈 실장을 협박해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오래전, 장실장의 아들 현우가 마약사건으로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자를 블로터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게 만든 사건에 대한 녹음테이프를 보험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복마전 같은 전개 아닐 수 없다.

 

한편, 김판구 회장의 아들 김대한은 계속되는 장실장의 무리수에 질려 언론의 오병수 기자에게 양심 고백할 것을 결심한다. 이를 사전에 파악한 장실장은 자신의 오랜 동료이자 어둠 속에서 활약 중이던 황 소령을 등판시켜 김대한과 박도훈 모두를 처리할 것을 결심한다. 우선 도훈과 만나는 장소에 황 소령과 김대한을 같이 보내고, 황 소령에게 김대한을 처리하고 그의 죽음을 도훈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플랜을 가동한다. 그리고 도훈은 대한의 아버지 김판구 회장이 처리하게 만들겠다는 아주 신박한 복안이었다. ,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도훈의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도 그렇지만 조국과 민족을 위하겠다는 인사들치고 진심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이들은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오히려 우리 같이 보통의 평범한 이들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오늘도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거창한 슬로건을 앞세우지만, 거의 모든 빌런들의 개인의 영달과 안전을 추구할 따름이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이고 위법적인 요소들은 모두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는 핑계로 포장된다. 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사과는 물론이고, 심지어 사유하지도 않는다. 자신만 수긍할 수 있는 기묘한 방식으로 비논리를 만들어낼 따름이다.

 

희지가 잠시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던 도훈이 알고 보니, 자기 가족의 원수 같은 인물이었다는 게 들어나는 순간 희지(본명 지화자)는 복수를 꿈꾼다. 자신이 잘 나가던 시절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자 희지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할 궁리를 하는 도훈에게서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보기도 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전직 국정원장을 모델로 삼았다는 장세훈 실장이야말로 최후의 승리자였다. 도훈이나 대한 같이 유능한 선수들을 계속해서 발굴해서 자신의 휘하에 두고, 조직과 자신을 보호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빌런의 모습이 그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드러나게 되는 온갖 위기 상황들에도 당황하지 않고 기지를 발휘해서 꼬리를 자르고, 또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그야말로 천재적인 기획가가 아닐 수 없다. 정보와 어둠의 그림자까지 동원해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장면은 대단했다.

 

문득 도훈이 처음에 광명성에게 포섭되었을 때, 조직의 실세 장세훈 실장에게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예고된 비극의 서사에서 탈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장실장과 처음부터 같이 일을 시작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랄까. 한 번 잘못 발을 들인 악의 구렁텅이 속에서 올바른 길로 급격한 방향전환 자체가 무리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책이 나온 2016년에 이미 <조국과 민족>의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해서 검색해 보았는데 결과물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4년 전에 OTT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 뒤로도 정보가 보이지 않는다. 영화 산업을 OTT가 대체하는 추세인데, 과연 9년 전의 영화화 결정이 다시 한 번 빛을 보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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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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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책 다이어트가 한창이다. 그래서 예전이라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샀을 그런 책들도 신중(?)하게 구입하는 중이다. 클레어 키건의 국내 세 번째 소개 작품인 <푸른 들판을 걷다>도 중고서점에 나와서 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빡세게 다이어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구매 대신 대출을 선택했다. 그동안 인기 책이어서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는데 출간된 지 한 6개월 정도 지나니 드디어 대출의 기회가 주어졌다. 당장 읽지는 않고, 열흘 정도 묵혀 두었다가 어젯밤부터 읽기 시작했다.

 

<푸른 들판을 걷다>에는 모두 7개의 단편 소설들이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의 키워드는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있다가 아닐까 싶다. 첫 작품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에게 끔찍한 성적 착취를 당하던 소녀가 아일랜드 집을 떠나 뉴욕으로 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부터 마음을 어지럽히는군 그래. 오래 전 대학 동창이 가족이 원수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문득 그 시절이 생각났다. 뭐라고 할 말이 없네 그래.

 

표제작인 <푸른 들판을 걷다>의 주인공은 오늘 결혼식을 주관하는 사제다. 개신교의 목사와 달리 사제는 술을 마실 수 있었지. 사제님은 핫위스키를 주문해서 결혼식 분위기에 슬며시 녹아든다. 뭐랄까 아일랜드 사회에서 사제가 차지하는 일부분을 볼 수 있다고나 할까. 결혼식이 끝나고 푸른 들판을 거니는 꿈을 꾸는 사제님의 사적 비밀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건 사제님이 오늘 결혼식을 올리는 주인공 케이트 롤러의 옛 애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성직을 수행할 수 있는지 신에 물었던 것일까.

 

서사가 진행될수록 독자는 그런 사제의 고민에 수긍하게 된다. 심지어 케이트는 사제에게 성직을 그만두라고 종용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외딴 곳에서 마사지업을 하는 중국인을 찾아간다. 옛 연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자신만의 비밀을 묻어 두고 다시 본업으로 복귀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도 등장하는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에 대한 클레어 기건식 비판일까. 마침 에드나 오브라이언 작가의 책들도 만나고 있는 중이어서 그런지 비슷한 기류가 느껴지기도 했다.

 

클레어 키건의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삼림 감독원의 딸>도 흥미롭다. 서사의 시작은 아하울 농장주 빅터 디건과 그의 부인 마사 던의 기묘한 결혼에서 출발하던가. 세 아이의 아버지 디건에게 아하울 농장은 전부였다. 하지만 그와 결혼한 마사는 달랐다.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녀는 돈을 모으고 있다.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아하울은 디건의 발목을 잡는 족쇄로 작용한다. 지난 수년 동안 돈을 갚아 왔지만, 앞으로 5년 더 돈을 갚아야 비로서 융자의 덫에서 탈출할 수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사랑하는 딸 빅토리아의 생일날에도 누가 주인인 지도 모르는 리트리버를 데려다 선물로 안겨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리트리버 '저지'는 주인이 따로 있는 개였다. 디건이 하는 짓마다 아내 마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관계가 이 정도로 악화가 되었다면 서로의 행복을 위해 갈라서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소문난 이야기꾼이 마사는 어느 날,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가만 듣자 보니, 이건 빅터와 마사 부부의 이야기가 아닌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었던 빅터는 농장일을 핑계로 밖으로 나와 버린다. 자 이렇게 파탄난 디건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숙명은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리는 속죄 그리고 그라운드 제로의 화재가 아니었을까. 막내딸 빅토리아의 출생의 비밀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물가 가까이>에서는 케임브리지(처음에는 영국의 케임브리지인 줄 알았다)에서 텍사스에서 21번째 생일 파티를 치르기 위해 텍사스로 온 청년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이혼하고 리조트 재벌 백만장자와 결혼한 어머니는 주인공을 위해 그럴싸한 파티를 준비한다. 하지만 주인공에는 이런 것들이 모두 번잡스럽고 귀찮을 따름이다. 백만장자 계부의 언행은 또 어떠한가. 아마 클린턴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전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정치 이야기로 아슬아슬한 자리를 더 위태롭게 만드는 신공을 계부는 보여준다.

 

나라도 편향된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라도 그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어머니의 체면을 봐서 청년은 꾹 참고 곤혹스러운 순간들을 집어 삼킨다. 나중에 먼 바다에 수영을 하러 나갔다가 익사할 뻔한 위기도 겪게 된다. 이래서 어른들이 술 마시고 절대 바다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던가. 결국 주인공은 케임브리지로 가는 항공편을 예약하기 위해 전화를 들지만, 예약 담당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

 

맨 마지막에 배치된 <퀴큰 나무 숲의 밤>도 만만치 않다. 죽은 사제를 사랑한 여인 마거릿 플라스크와 이웃에 사는 49세 노총각 스택은 결국 정분이 나고야 만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일들은 그렇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클레어 키건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가톨릭 사제들이나 수녀들은 하나 같이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걸까. 아일랜드라는 특수성을 빼놓을 수가 없지 않나 싶다.

 

정령과 신화의 나라 그것도 '클레어' 출신의 마거릿은 마담 놀란을 만나고 나서 더나고어의 이른바 '마녀'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거릿을 찾아와 상담하고 아픈 곳을 고치기 시작한다. 심지어 신부님까지도. 첫 아이를 영아돌연사로 잃고 상심해 있던 마거릿을 스택과 동침하고 그의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어느날 아들 마이클과 함께 스택의 곁을 떠나게 된다. 그것도 마치 이미 정해져 있던 일처럼 물 흐르듯 전개되고, 스택도 이 모든 상황들을 잠자코 받아들인다. 이건 마치 한 여름밤의 꿈 같은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생각 같아서는 마지막 에피소드를 남겨 두고 어제 다 읽을 줄 알았는데 라스트 스퍼트를 올리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푸른 들판을 걷다>를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어쩌면 4월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독서였는데, 이번에도 이전에 읽은 클레어 키건 작가의 책들처럼 긴 여운을 남기는 그런 독서가 아니었나 싶다.

 

클레어 키건의 시선을 통해 왠지 모르게 타인의 은근한 비밀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비밀들은 아예 알고 싶지 않은 그런 수준의 그런 비밀들도 있고, 또 나와는 전혀 다른 사고를 지니고 사는 타인의 삶의 양식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기회를 주었다고나 할까. 난 여전히 이런 문학적 낯섬에 끌리는 모양이다. 내가 계속해서 책에 매달리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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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미
비페이위 지음, 백지운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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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스레드에서 누군가 비페이위의 <위미>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다는 피드를 읽었다. 그러니까 재밌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포스팅을 잘했다는 뜻이겠지. 리스펙트! 중고서점에 마침 없어서 일단 비페이위 작가의 소설집 <청의>부터 사다가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니 나중에 읽기 시작한 <위미>가 추월해 버렸다. <청의>는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다. 아마 다음 달에 읽어야지 싶다. 다행히 5월초에 쉬는 날들이 많으니 그 때 한 번 달려 보자.

 

중국어로 옥수수를 의미한다는 <위미>는 확실히 재밌다. 시골 마을 지부 서기(지서) 왕롄팡과 스구이팡은 무려 8명의 자식들을 줄줄이 낳았다. 문제는 1호부터 7호까지 모두 여자였다는 점이다. 아니 중국이 한 때 산아제한을 하지 않았던가.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71년에는 아마 엄격한 산아제한이 시행되기 전이었나 보다.

 

어쨌든 십수년에 걸쳐 아이를 낳던 스구이팡 아줌마는 8번째로 아들 바즈 홍빙을 낳으면서 오랜 숙원을 끝낼 수가 있었다. 왜 우리나라 드라마에 나오던 귀남이 생각이 나는 거지.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로 새로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지긋지긋한 남존여비 사상을 혁명적으로 축출하지 못한 모양이다.

 

지서 왕롄팡은 아내가 아들을 낳기 위해 죽기살기로 고생하는 동안, 넘쳐나는 자신의 바람기를 주체하고 못하고 마을의 거의 모든 아낙네들과 정분을 통했다. 이 지점에서 소설의 첫 번째 주인공이자 왕씨 집안의 장녀 위미가 등장할 차례다. 역시나 무려 7명의 동생들을 거느린 장녀답게 뛰어난 지도력과 명민한 지혜가 빛나는 선수다. 막내 홍빙을 마치 자신의 자식 거두듯이 업고 다니면서, 엄마 스구이팡의 연적들에게 매서운 눈초리 공격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 간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도전하는 셋째이자 미녀 위슈를 찍어 누른다. 이들의 치명적인 라이벌 관계는 두 번째 챕터에서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혼기가 찬 위미는 해방군 조종사 펑궈량과 약혼을 하고 앞으로 인생에서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아버지 왕롄팡의 바람기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해방군 전사의 아내와의 불륜이 공개되면서 지서 자리를 박탈당하고, 보통의 농민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동시에 위미는 펑궈량과 파혼하게 되고 동생들(위슈와 위예)이 어느 날 인근 주민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게 되면서 집안은 그야말로 풍지박산이 나버렸다.

 

이에 위미는 권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아 다시 한 번 왕씨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위미는 자원해서 나이도 많고, 아내가 병환으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당간부 궈자싱의 후처로 들어간다. 배를 타고 자신의 고향 마을을 떠나 진으로 향하는 위미의 모습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 이제 문제적 인물은 위슈가 등장할 차례다. 위미가 결혼해서 떠나고 난 뒤, 다른 자매들과 티격태격하다가 상대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게 되자 도저히 고향 마을에 남아 있을 수 없었던 위슈는 결국 진으로 떠난 언니 위미에게 의탁하고자 고향을 떠난다.

 

위미와 위슈 자매의 대결은 공간을 옮겨 새로운 무대에서 펼쳐진다. 언니 위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도전장을 들이대는 위슈가 얄미우면서도 또 동시에 혈연이라는 이유로 내칠 수가 없는 그런 지경이다. 남편 궈자싱에게 베갯머리송사로 위슈를 저울원 자리에 꽂아 넣는데 성공한다. 그전에 궈자싱 전처의 딸인 차오차오를 두고 왕씨 자매 간에 한판 대결이 있었던가. 이 둘의 대결과 갈등은 소설 <위미>를 정말 재밌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남도 아닌 자매가 펼치는 치열한 복마전을 보는 재미가 정말 쏠쏠했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위슈가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니 위미에게 도전해도,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위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언니에게 굴복하고 복종의 단맛을 보기 시작하는 위슈. 문제는 차오차오의 오빠 궈자오가 등장하면서 다시 한 번 사랑과 전쟁이 시작된다.

 

궈주어에게 위슈는 이모뻘이지만, 나이는 위슈가 궈주어보다 어렸다. 보는 순간부터 불꽃이 튄 두 남녀의 격정적 사랑이 이제 막 시작될 판이다. 위기를 직감한 위미는 자신의 의붓아들 궈주어에게 위슈가 예전에 당한 끔찍한 사건을 알려준다. 이것으로 궈주어와 위슈 간의 격정이 사그라들면 좋았겠지만 사건을 위미가 의도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문제를 더 크게 만들어 버렸다. 위슈는 궈주어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역시 궈자싱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위미의 엄중한 감시망을 피해가면서 그야말로 위슈는 생지옥 같은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팜므 파탈 같은 위슈의 도화살을 위미가 비난하는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위슈의 갑작스러운 출산으로 2부가 마무리된다.

 

자 이제 3부의 주인공이자 왕씨 집안의 막냇딸 위양이 등장할 차례다. 위양은 다른 언니들과 달리 정말 특별할 게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뛰어난 암기력을 바탕으로 해서 사범대학에 진학하는 놀라운 학업적 위업을 달성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위양의 이야기들은 위미나 위슈의 그것에 비해 심심한 소고기뭇국을 먹는 맛이랄까. 물론 왕씨 집안 자매 서사의 연장선에 서 있긴 하지만 굳이 추가될 이유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11년이 지난 1982년 그러니까 개혁개방의 시절, 사범대 내부에서 펼쳐지는 공작과 비방 그리고 시기의 이야기들은 1부나 2부의 사회주의 에로티시즘을 다룬 이야기에 비해 내공이 떨어진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위양이 사범대의 시인 추톈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가 그가 시원하게 내지른 오줌발을 보고 나서 천하의 양아치였다고 판단하고 정을 거두는 장면이 얼마나 웃기던지.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이 결국은 착시나 주관적 착각이 아닐까 싶어졌다. 이른바 눈에 씌웠던 콩깍지가 벗어지는 순간, 현실을 아주 냉정하게 다가오는 법이니까. 세상에 호남자였던 추톈이 순식간에 광인으로 몰려 위병대 청년들에게 제압당하고 구급차에 실려 가는 서술은 압권이었다.

 

3부가 별로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려고 했는데, 가만 되짚어 보니 정말 웃긴 장면들은 3부에서 죄다 등장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에서 혁명적 사고를 강조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운운해도, 그곳 역시 남녀상열지사나 이기주의가 넘실대는 욕망의 바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체제가 인민들이 살아가는 형식을 강제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의식구조와 행동방식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소설 <위미>를 읽으면서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가뿐하게 <위미>를 만났으니, 다음 타자로 읽다만 <청의> 더불어 오래 전에 수배해 두었지만 여적 읽을 생각조차 안하고 있던 <마사지사>도 읽어야겠다. 그리고 시간 여유가 더 있다면 <들판>까지 읽으면 비페이위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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