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론리하트
너새네이얼 웨스트 지음, 이종인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2주 전부터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를 사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에 필적할 만한 미국 산문계의 대가라는 평이 있더라. 37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한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작품이라고 하니 더욱 관심이 갔다. 아울러 절판되기까지. 어제 저녁, 산책을 빌미로 사냥에 나섰다.

 

중고서점에 가서 <미스 론리하트>와 라오서의 <이혼> 그리고 클로드 모르강의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세 권을 샀다. 그리고 바로 <미스 론리하트>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이 발표된 해는 1933년 그러니까 1919년부터 시행되던 금주법이 폐지된 해다. 그런데 책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에 가서 술을 한 잔 걸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 점이 좀 궁금했다. 이미 그 당시에 금주법은 유명무실한 그런 법이었었나 하고.

 

미스 론리하트는 신문사에서 신문구독자들의 고민들을 상담해주는 칼럼니스트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독실한 크리스천처럼 보인다. 물론 실제는 그런 삶과는 많이 다르지만. 참고로 미스라는 말이 빚어내는 오해와 달리 그는 남자다. 그리고 본명은 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 베티라는 여성에게 청혼했지만 또 딱히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하여튼 간에 미스 론리하트란 인간은 정의하기 힘든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발표되던 1933년은 미국에서 대공황이 한참이던 시절이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들의 삶에는 고통과 가난 그리고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신문사에서는 미스 론리하트의 칼럼이 돈벌이가 될 거라는 점을 정확하게 알았던 모양이다. 아니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통해, 나는 이 정도라면 행복하지 뭐 그런 심산이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그 정도는 아니잖아라는 자기만족적 글쓰기랄까.

 

베티는 그런 미스 론리하트의 칼럼 쓰기가 못마땅해 그만 두라고 종용하지만, 이미 자신의 일에 중독된 미스 론리하트는 사실 그럴 생각이 없으면서도 애인을 설득하기 위해 광고대행 일을 찾아 보겠다고 공언한다.

 

침례교 목사님의 자녀답게 항상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고민하지만, 또 현실에서는 그만큼 타락한 인간이 없다. 술집에 가서 한 잔 걸치다가, 싸움이 붙어서 이가 다 흔들릴 정도로 얻어 터지고 또 의자에 맞는 봉변도 당한다. 그리고 자신의 팬을 자처하는 도일 여사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잘 나가는 것 같았던 미스 론리하트 삶의 작은 균열이 결국 그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하나의 결정적 탄환이 되었다.

 

사실 난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메뚜기의 날>이 더 읽고 싶었다. 하지만 그 책을 언제라도 살 수 있는 책이고 <미스 론리하트>는 도서관에도 없는 책이라 빌려서 읽을 수가 없기에 먼 걸음을 마다하지 않고 사다가 단박에 읽어 버렸다.

 

미스 론리하트가 구축한 질서는 완벽해 보인다. 애인 베티와의 관계가 조금 삐걱거리긴 하지만, 곧 결혼을 앞두고 있고 신문사에서 구독자들이 보내는 편지에 대한 고민 해결사이자 그리스도의 사제로서의 임무도 나쁘지 않다. 다만 삶이 태생적으로 지닌 가역적 유동성은 미스 론리하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완벽해 보이는 질서 역시 결국 무질서로 향하게 된다는 단순하지만 불변의 메시지를 너새네이얼 웨스트는 던지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의 분량은 짧았고, 파국적 엔딩으로 치닫는 진행 속도를 따라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시간을 두고 다시 한 번 읽어야봐야겠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미스 론리하트>가 나에게 <싱글맨> 같은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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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9-30 1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 책 모두 탐납니다.
더군다나 절판이라니 더욱!
데려다놓고 읽지도 못하고 홀대할까봐 머뭇거려지네요
하지만 저도 사냥할 곳을 찾아봐야겠네요 ㅎ으

레삭매냐 2024-09-30 14:00   좋아요 2 | URL
아웅, 저한테 하시는 소리인 줄
알았네요. 이런 저런 책들 만날
데리고 와서 홀대!

그래도 어제 산 책 중에 하나는
완독했으니 다행입니다.

책사냥, 성공 기원합니다.
 
피아노 튜너
대니얼 메이슨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이것은 그저 빛 같은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어떻게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나. 모르겠다. 수많은 책들의 바다에서 우연히 만난 그런 보석처럼 빛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2002년에 당시 의대생이던 대니얼 메이슨이 발표한 첫 번째 소설 <피아노 튜너>는 국내에 소개됐고 오래지 않아 절판됐다. 도서관에서도 빌려볼 수가 없어 결국 중고책으로 주문해서 어제 받았다. 19세기 영국의 식민지로 이제 막 편입된 버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는 작가가 빚어낸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가득했다. 무슨 할 말이 더 필요할까. 이 책을 다 읽지 않고는 이번 주말을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독서의 가속 페달을 밟았다.

 

사실 어려서 일본군의 임팔 침공을 다룬 전쟁사로 버마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 됐다. 당시 무다꾸찌 렌야가 이끄는 일본 18군은 아라칸 산맥과 살윈 강 그리고 친드윈 강을 너머 인도의 임팔 공략에 나섰지. 보급과 수송을 무시한 결과, 작전은 일본 육군 최대의 참담한 패배로 기록됐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이와라디 강과 만달레이, 프로메 같은 버마의 지명을 만나게 됐다. 그것은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나는 그런 느낌이었달까.

 

대니얼 메이슨의 <피아노 튜너>는 사실 진입 장벽이 빡센 편이다. 영국이 식민제국으로 맹위를 떨치던 19세기 후반, 제국의 핵심 이익의 기반이 되는 인도를 지키기 위해 영국은 버마와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르면서 결국 버마를 영국령 인도의 일부분으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한다. 188511, 버마 꼰바웅 왕조의 마지막 저항 거점이었던 만달레이를 영국군이 3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2주 만에 함락시킨 이후가 소설 <피아노 튜너>의 시대적 배경을 이룬다. 실제했던 림빈 동맹에 대한 언급도 소설 후반에 등장한다. 작가는 이런 방대한 역사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 조사를 했을지 궁금해졌다.

 

1886년 가을, 영국 런던에서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던 중년의 에드거 드레이크는 버마 오지로 피아노 조율을 해달라는 영국 육군성의 요청을 받게 된다. 거의 세계의 절반을 가로 지르는 지금처럼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철도와 증기선을 타고 장장 8,000km에 달하는 엄청난 여정을 에라르 피아노 전문가가 나설 이유가 있을까. 물론 에드거 드레이크는 이 요청을 수락했고, 사랑하는 아내 캐서린을 모국에 두고 버마로 떠난다.

 

런던을 떠나 칼레에 도착해서 파리로, 그 다음에는 지중해를 지나기 위해 마르세유로 향한다.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수에즈 운하 너머 인도양까지 빡빡한 일정이 계속된다. 봄베이로 가는 배 안에서 에드거는 오직 한 이야기만 한다는 노인으로부터 난파되었다가 생존하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귀머거리 노인에게서 왠지 아라비안 나이트의 향기가 났다.

 

대니얼 메이슨은 에드거 드레이크라는 인물을 앞세워, 빅토리아 시대 만연하고 있던 동양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는 자신의 반오리엔탈리즘적인 색채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아울러 식민제국 건설과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군인들에 대한 드레이크의 생래적 거부감에 대해서도 밑밥을 깔아 놓았다.

 

, 드레이크의 일정만 이야기하다 보니 도대체 왜 그가 버마 오지의 메이르윈 요새까지 가야 했나에 대한 설명을 빼먹었다. 그곳에는 대체 불가한 영국의 버마 식민지 경영에 꼭 필요한 인재 앤서니 캐럴이라는 군의관이 있었다. 그는 육군성을 협박해서 1840년형 에라르 피아노를 자신이 근무하는 메이르윈으로 보내 달라고 협박성 요청을 했다. 사람을 파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랜드 피아노를 그런 오지로 보내 달라고? 바로 이 장면에서는 정글에 오페라하우스를 건설하겠다고 나선 브라이언 피츠카랄도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피츠카랄도>가 떠올랐다.

 

새로운 피아노를 보내 달라는 요청은 말이 되지 않으니, 그 피아노를 조율할 수 있는 조율사를 보내 달라는 것이 바로 앤서니 캐럴의 요청이었다. 그리고 그 후보로 에드거 드레이크가 픽업되어 선발된 것이다. 군의관이라고만 하기에는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앤서니 캐럴이라는 인물의 광기가 언뜻 엿보이기 시작한다.

 

봄베이에 무사히 도착한 에드거는 알라하바드, 베나레스 그리고 캘커타를 거쳐 마침내 버마의 랑군에 도달했다. 드레이크는 그 험난한 여정 중에, 군의관이라기보다 거의 정보 요원에 가까워 보이는 미스터리한 인물 앤서니 캐럴이 쓴 버마 현지 정황에 대한 보고서로 샨스테이츠의 이모저모를 파악한다. 힌두스탄 어로 강도를 의미하는 산적에 가까운 무장집단인 다코이트가 준동하는 샨 고원의 불안정한 정세를 알려준다.

 

버마 식민지의 수도였던 랑군에서 드레이크는 마중나온 댈튼 대위의 환영을 받는다. 슈웨다곤을 구경하고, 랑군에 대한 대니얼 메이슨의 상세한 묘사는 마치 당시로 돌아가 카메라로 도시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이것 역시 소설 후반에 버마 복식 문화를 사전에 인지한 드레이크가 사우브와들의 회합에서 함께 한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들인지를 알게 만드는 사전 장치의 하나였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댈튼 대위의 초대로 내키지 않는 호랑이 사냥에 참가했다가 오인사격으로 비극을 목격하기도 하는 드레이크. 식민지 영국 군인들의 무모함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나중에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를 하게 되는 킨 므요와 함께 적의 습격을 받은 위험한 메이르윈으로 당국의 지시 없이 무단으로 향하는 에드거 드레이크. 그리고 마침내 도착해서 피아노를 고치러 왔다고 말한다. 일단 여기까지가 1부의 엔딩이다.

 

2부에서는 마침내 정체를 드러낸 앤서니 캐럴과 메이르윈 요새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총탄에 맞아 건반이 파괴된 에라르 피아노를 수리하는 에드거 드레이크에 대한 모습이 그려진다. 이국적인 버마의 모습과 더불어, 피아노 조율과 수리라는 전문 분야를 묘사하는 대니얼 메이슨의 탁월한 능력에 그저 감탄했다. 어려서 바이엘이나 조금 치다가 피아노 건반의 세계를 떠난 내가 이렇게 다시 시밍이나 공명판 같은 피아노의 내부세계에 대해 읽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에드거 드레이크는 거듭해서 자신이 피아니스트 같은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피아노 튜너로서 거의 마이스터 같은 아티스트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복잡한 세계에서 벗어나 음악과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누구도 드레이크를 방해할 수 없는 그런 순간들이었다. 그것이 서구인들이 지향하는 영국 같은 문명세계가 아닌, 버마의 오지에서도 충분히 노래하는 코끼리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저자는 확신을 가지고 전달한다.

 

그리고 앤서니 캐럴의 반협박에 의해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드레이크가 평화의 메신저라는 상징이 아닐까 하는 싶었다.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사건이었지만, 환상적인 음악의 힘으로 서로 상충하는 이익집단들로부터 평화를 도모하겠다면 너무 앞서 나간 설정이었을까. 동시에 메이르윈 요새에서 독단적 판단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앤서니 캐럴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월터 커츠 대령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캐럴에게 가스라이팅당한 드레이크의 운명은 결국 비극적 결말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말라리아 연구를 위해 태국 어딘가에 머물렀다고 한다. 소설에서 에드거 드레이크가 메이르윈 요새에서 피아노 조율을 마치고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내 생각에 드레이크의 말라리아 발병은 그의 버마 현지화를 상징하는 일종의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신세계의 로터스 맛을 본 자는 아내 캐서린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게 되어 버렸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임무를 마치지 못하고 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해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자기 인생의 실패라고 썼던가.

 

<피아노 튜너>를 읽으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결말에 도달해서는 그저 이 책은 그저 빛처럼 아름다운 소설이었다는 말 밖에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이런 소설을 26세의 의대생이 썼단 말이지. 놀라울 따름이다. 나딤 아슬람의 <헛된 기다림>과 더불어 단연 올해 만난 최고의 책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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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9-22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단 말이지요.
일단 배경이 독특해서 읽고싶어지는 책이네요.

레삭매냐 2024-09-23 10:47   좋아요 0 | URL
저도 미리보기로 조금 봤는데...
시작부터 정말 특이한 설정이
더라구요.

19세기 이제 막 영국의 식민지
가 된 버마를 배경으로 한 참
아름다운 소설이었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24-09-24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특한 배경의 소설이네요. 버마가 어딨는지도 잘 모르겠네요ㅎㅎ

레삭매냐님이 빛같은 소설이라 하니 읽어보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4-09-24 18:52   좋아요 1 | URL
아마존 정글에 오페라하우스를 세우
겠다는 말 만큼이나 놀라운 설정이
아닐 수 없더라구요.

너무 매력적인 소설이었습니다.
버마가 지금은 미얀마로 이름이 바
뀌었다고 하네요.

독서괭 2024-09-26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렇게 극찬할 소설인데 절판됐나요? 아깝네요 ㅜㅜ

레삭매냐 2024-09-27 22:13   좋아요 1 | URL
좋은 책들은 왜 항상 절판되어
있는지... 아쉽습니다.
 
사라진 반쪽
브릿 베넷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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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내가 모르는 작가와 책은 상상 이상으로 많다. 그래서 모름지기 책 읽는 이들은 겸손해져야 한다는 진리를 책을 읽을수록 깨닫게 된다. 역시 NYT 시리즈 96위의 오른 브릿 베넷의 책 <사라진 반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뉴욕타임즈가 아니었다면, 영영 이 책을 만날 일이 없었겠지. 병렬독서 덕분에 진도가 늦긴 했지만 일단 가속이 붙으니 몰입도가 엄청났다.

 

브릿 베넷 작가는 소설 장르의 특징 중의 하나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나드는 서사를 능숙하게 직조한다. 루이지애나 맬러드라는 작은 타운을 떠난 두 쌍둥이 데지레와 스텔라 빈스라는 매력적인 캐릭터 생성도 일품이다. 인종차별이 일상이던 시절, 쌍둥이 자매는 아버지를 백인들의 폭력에 잃는다. 그들에게 가난과 차별은 변수가 아닌 상수다. 무언가 새로운 삶을 위해 데지레와 스텔라는 맬러드 탈출을 꿈꾸고 결국 실행에 옮긴다.

 

데지레와 스텔라의 캐릭터성을 더 부각시키는 요소는, 맬러드에서 그들은 유색인종이지만 그들의 정체성을 모르는 곳에서 그들은 백인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넬라 라슨의 <패싱>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둘 중의 누군가가 패싱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소설이 데지레의 귀환으로 시작했던가. 그렇다면 패싱해서 사라진 반쪽은 바로 스텔라일 것이다.

 

데지레는 자신과 닮은 점이 없는 정말 검은 딸 주드 윈스턴을 데리고 요란한 귀환을 감행한다. 고향 맬러드를 떠날 때는 소리 소문 없이 도망쳤지만, 귀환을 그럴 수가 없었다. 남편과 자식을 잃었던 미스 아델은 데지레와 손녀 주드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 얼리 존스라는 훗날 데지레의 조력자이자 연인이 되는 캐릭터를 하나 추가한다. 그의 정체는 인간 사냥꾼이다.

 

워싱턴 DC에 살던 데지레의 남편 샘 윈스턴은 학대와 가정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인생에서 두 번째 도주를 감행한 아내의 추적을 의뢰한다. 인간은 누구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얼리에게 데지레 찾기란 누워서 떡먹기 같은 사건이었다. 얼리가 샘에게 그가 찾는 정보를 건네 주었다면, 소설은 거기에서 멈추었겠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얼리는 자신의 평판에 금이 가는 대신 데지레 모녀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 다음 파트에서는 캘리포니아로 간 데지레의 딸 주드가 배턴을 이어 받는다. 맬러드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게 되는 주드. 고향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어머니와 이모의 뒤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드의 경우는 좀 다르다. 1978년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주드는 남장 여자 리스 카터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아 기묘하다 참), 미래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자력으로 생활비를 벌고, 리스를 위한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주경야독하던 주드는 케이터링 서비스 요원으로 어느 파티에 참석했다가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 충격에 빠지게 된다. 주드는 드디어 어머니의 사라진 반쪽을 만난 것이다.

 

드디어 독자가 기대하던 에스텔, 스텔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유색인종이 당해야 했던 차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스텔라는 뉴올리언스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워싱해서 백인으로 변신했다. 그 배경에는 자신의 상사이자 명문가 출신으로 무려 예일대를 졸업한 블레이크 샌더스가 있었다. 별처럼 빛나던 19살의 스텔라와 사랑에 빠진 블레이크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텔라에게 보스턴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가난과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텔라는 쌍둥이 언니 데지레를 배신하고, 온통 거짓으로 도배된 자신을 창조했다.

 

때는 1968, 그야말로 흑인 민권운동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다. 하지만, 여전히 차별은 사리지지 않았다. 패싱해서 백인 행세를 하던 스텔라는 자신의 이웃에 유색인종 워커 가족이 이사 온다는 말을 듣고, 누구보다 격렬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항상 변절자가 가장 험악한 행동을 마련이지 않은가. 로레타 워커와의 교제를 통해, 브릿 베넷 작가는 당대 LA 백인들의 위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정치적으로는 흑인과의 평등한 삶에 찬성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삶에 흑인들이 들어오는 것은 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런 이중성 말이다.

 

로레타와의 관계 속으로 기울어져 가던 스텔라의 일상은, 어느 날 딸 케네디의 실수로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텔라의 이웃들이 실제 행동(벽돌 던지기, 오물 투척 등)에 나서게 되면서 결국 백인들과의 공존이라는 높은 벽을 실감한 워커 부부는 철수를 결정한다. 그 어느 때보다 지킬 게 많아진 스텔라는 철저하게 두꺼운 마스크를 쓴 채, 철저하게 자신의 과거를 숨기는데 전력한다. 사실 결심이 어렵지, 실행 절차는 요식절차에 불과하니까.

 

바로 스텔라의 완벽해 보이는 삶에 미세한 균열을 내기 시작한 인물이 바로 그녀의 조카인 주드였다. 주드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공작을 시작한다. 우선 스텔라의 딸 케네디에게 접근해서 스텔라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다. 한편 케네디는 요즘 말로 하면, 관종 정도가 아닐까.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유복한 집안 덕분에 일단 대학에 진학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연극이나 연기에 관심을 갖고 그러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할리우드의 주변부를 배회한다. 그리고 케네디가 궁금해 하던 엄마 스텔라에 대한 비밀 해독의 단서를 바로 주드가 제공하기 시작한다. 미스 아델과 쌍둥이 자매가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면 충분했다.

 

고향 맬러드의 식당에서 일하게 된 언니 데지레와 달리, 수학에 재능을 지니고 있던 스텔라는 어느 순간 자각해서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대학에 진학해서 결국 통계학 교수가 되었다. 거짓으로 구성된 스텔라 인생의 태피스트리에 그야말로 정점을 찍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완성된 거짓말을 위해서는 스텔라는 계속해서 양심을 속이고 사랑하는 남편 블레이크와 딸 케네디에게도 항상 위선의 태양 같은 존재가 되어야말 했다.

 

스스로 창조한 거짓의 지지대가 붕괴한다면, 그녀의 삶 역시 신기루처럼 날아가 버릴 판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외로웠을까. 그녀에게 가장 가까웠던 사람 데지레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자신의 결심으로 배신하지 않았던가. 비참하게 백인들에게 린치당하고 죽은 아버지의 이미지 때문에 한시도 불안해서 곁에 야구방망이를 두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결심으로 행복하기 위해, 워싱을 결행하고 사라진 반쪽이 되었지만 결국 행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텔라는 비극의 여주인공 같은 그런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후과를 예상하지 못한 자신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자신이 짊어져야할 업이겠지만.

 

브릿 베넷 작가는 마치 영화에서 에피소드마다 등장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진화하는 캐릭터들의 이모저모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 같은 효과를 소설적 스타일로 연출한다.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에, 타인이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결정들을 내리기 마련이다. 삶의 모든 면들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게 된다면 너무 재미가 없지 않을까. 잘못된 판단을 했다가, 일이 어그러지고 또 그 일을 바로 잡으려고 하다가 엉망이 되어 버리게 된다는 고전적 서사가 <사라진 반쪽>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스텔라였다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자신의 과거와 정체성을 철저하게 위장하고 과연 그것이 탄로 났을 때, 감당할 수 없을 후폭풍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을 선택했을까? 작은 실수 하나에도 후회와 번민으로 고민할 게 뻔 한데 스텔라 같은 결정을 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소설에서 느껴지는 스릴이 현실이 된다면 또 그만한 공포도 없을 것 같지만 말이지.

 

과연 브릿 베넷의 <사라진 반쪽>은 책장을 넘길수록 몰입도가 배가되는 작품이 분명하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치밀한 서사 빌드업으로 캐릭터들에게 맡겨진 미션들을 부여해서 수행하게 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소설의 주인공들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동반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용서와 화해를 도모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우리의 삶을 살아내게 될 것이다. 대단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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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9-19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세상은 넓고.. 재미난 책은 많군요 ㅜㅜ

레삭매냐 2024-09-19 13:02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정말루요.

코트디부아르 출신 작가
아마두 쿠루마의 <들짐승들의
투표를 기다리며>를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또 다른 신세계네요.
 
상실
조앤 디디온 지음, 홍한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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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이제야 다 읽었다. NYT 독자 선정 이번 세기 베스트 100에 당당하게 36위로 랭크되어 있는 책이다. 목록을 보고 한동안 중고책방에서 없는 책들을 사 모았는데 정작 사서 다 읽은 책은 조앤 디디온의 <상실>이 처음이다. 그리고 보니 조앤 디디온의 다른 책은 나중에 사서 먼저 읽었네.

 

<상실>로 조앤 디디온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이 양반, 대단한 작가였더군. 암튼 사둔 책은 순차적으로 언젠가는 읽게 될 테니 무슨 걱정이랴.

 

이 책의 원제는 <마술적 사고의 해> 정도로 번역될 것 같다. 하지만, <상실>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조앤 디디온은 20031230일 오랜 반려자였던 작가 존 그레고리 던을 심장마비로 잃고 난 뒤의 애도와 비애 그리고 자기 연민의 감정들을 평생 작가답게 기록으로 남겼다. 나의 독서 속도가 평소에 비해 현저하게 느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저자의 현학적인 글쓰기와 더불어 그런 상실의 감정들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 또 리뷰를 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의 심연을 되돌아 봐야 한다는 게 곤욕스럽다. 게다가 조앤 디디온은 사랑하는 평생의 반려자인 남편 뿐, 아니라 나중에는 사랑하는 딸 퀸타나 마저 병으로 잃어야 했다. 그리고 책의 후반에도 등장하지만, 이미 식탁에서 쓰러진 남편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전에 받은 심장 수술을 과부제조기라고 표현했던가.

 

좀 안타까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되돌릴 수 없다는 그런 약간은 진부한 결론을 도출하기도 한다. 사는 곳을 바꾼다고 해서, 삶의 조건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조작한다고 해서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순간에 다가올 죽음을 회피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상실>을 읽다 말고, 입수한 <푸른 밤>을 읽으면서 조앤 디디온의 삶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가 있게 됐다. 평생 글밥을 먹고 산 사람의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의학 지식의 세계와 정보조차 책을 통해 접근하는 방식에 지식인의 삶이란 과연 이런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질 수가 있었다. 나처럼 단순한 사람에게는, 참 세상 어렵게 산다는 생각도 아주 조금 들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조앤 디디온이 반려자와 자식을 잃은 뒤에 절실하게 느낌 감정에 대해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것 같다. 그리고 조앤 디디온의 노모의 경우에서 보듯, 모든 부모의 내리사랑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흔이 넘은 조앤 디디온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셨다는 말이 왜 이렇게 가슴에 맺히는지 모르겠다. 그게 바로 부모의 마음이라는 걸까. 그러니 병상에 누운 퀸타나를 돌보는 저자의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역시 냉정한 작가답게, 남편과 자식을 잃고 난 뒤 계속해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애도와 비애 그리고 자기 연민에 대해 경계하려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만약 저자에게 평생의 업인 글쓰기가 없었다면 과연 조앤 디디온은 상실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을까.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게 글쓰기라면 더더욱 탈출의 돌파구가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저자에게 글쓰기란, 지나간 삶의 복기이자 그 삶에서 미처 모르고 놓친 무언가에 대한 회고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프로 의식을 발휘해서, 그렇게 바로 글쓰기에 돌입할 수는 없었으리라.

 

조앤 디디온에게 20031230일은 그저 평범한 날일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개인에게 벌어진 거대한 사건(존 그레고리 던의 죽음)이 주변인의 삶을 온통 뒤흔드는 그런 격변의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삶에서 어떤 종류의 기적을 희망하지만,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경험하게 될 소멸의 순간은 공평하고 가차 없다고 저자는 예리한 시선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피할 수 없는 숙명에 대한 주제를 과감하고 선택하고, 자신이 경험한 고통의 연대기를 이런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저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다 읽는 데 무려 석 달이나 걸린 쉽지 않은 그런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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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9-17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저는 읽을 수 있을랑가 모르겠습니다. 읽는데 3개월이 걸리셨다니 저는 한 5개월 잡아야 할 것 같네요. ㅠ

레삭매냐 2024-09-17 18:58   좋아요 1 | URL
저자가 표현하는 상실에 감정에
휘말려서 읽다 접었다를 반복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적에는 금방 다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신이 없는 달 - 환색에도력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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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의 명절이라는 추석이 코앞이다. 오늘 달을 보니 아주 둥그렇더라. 골치 아픈 일 대신, 명절에는 그저 재밌는 책이 최고라는 생각이다. 연휴 기간 내내 그렇게 책만 읽으면서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또 우리네 인생의 묘미가 아닌가.

 

나의 이번 명절 픽은 바로 미미 여사의 <미야베월드 제 2> 시리즈다. 신간 <청과 부동명왕>을 필두로 해서 착착 읽는 중이다. 오늘은 <신이 없는 달>을 읽었다. 이게 워낙 재밌다 보니 작심하고 읽는다면 하루에 한 권 정도는 너끈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읽을수록 가속이 붙는다고 해야 할까.

 

오치카/도미지로가 청자로 등장하는 미시마야 흑백의 방과는 다른 결의 작품이 바로 <신이 없는 달>이다. 19세기 근대화가 시작되기 전, 에도 마치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들은 에도 마치에 사는 장삼이사들이다. 그 중에서도 조닌(소상인과 직인)들이 주를 이룬다. 최고위 계급인 사무라이들은 아마 미미 여사가 의도적으로 배제하지 않았나 싶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저자는 방점을 찍는다.

 

<신이 없는 달>에는 모두 12개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이야기는 초반에 배치된 <붉은 구슬>이다.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집권한 1841, 에도 막부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문제에 직면했다. 막부의 실권자 로주 미즈노 다다쿠니가 나서서 폐정개혁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 바로 <붉은 구슬>의 단초가 되는 사치금지령이었다. 물가 앙등을 잡기 위해,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금지하고 강력한 처벌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세공전문가 사키치는 자신이 가진 기술을 발휘해서, 몸이 아픈 아내 오미요를 봉양해야 하는데 그만 밥줄이 끊겨 버린 것이다. 이런 가운데, 어느 무사가 나타나서 비밀리에 이번에 시집가는 딸에게 줄 은비녀 제작을 의뢰한다. 순간, 사키치는 나이든 무사가 막부의 공작원이 아닐까 의심해 보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명작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명품 비녀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호기를 과시한다. 물론 이런 호기가 결국 자신을 옥죄는 만들어 버렸지만 말이다.

 

순간의 판단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는 인간사의 아주 기본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그렇다면 이런 탄압의 시대에 항상 신중해야 한다는 걸 미미 여사는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서, 미미 여사가 쓰는 미야베월드가 어느 시절을 배경으로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대략 19세기 중반, 전근대 시절 정도가 되겠다.

 

조실부모하고 친족에게마저 내침을 당했지만, 어려서부터 소방수의 꿈을 꾸던 청년 분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비록 지금 가게의 사환으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에도 마치를 언제라도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화마로부터 구해내는 멋진 사다리 소방수가 되겠다는 원대한 미래의 꿈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기회를 얻어 소방대에 발탁되지만, 정작 화재 현장에 투입되자 겁이 나서 그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얼어 버렸다.

 

그렇게 번민의 나날이 계속되자 주인장 가쿠조가 자신 역시 분지와 같은 번민의 시절을 보낸 소방대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길상물인 다루마 고양이 두건의 비밀을 슬쩍 알려준다. 진짜 고양이 껍질로 만들었다는 두건을 착용하면, 화재 현장에서 마치 <마스크>의 짐 캐리처럼 변신해서 진짜 소방대원처럼 모든 걸 한 눈에 척 알아보는 그런 히어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다루마 고양이 두건을 차고 현장 출동한 분지의 활약을 대단했다. 문제는 다루마 고양이가 항상 유익한 것만은 아니고, 그것을 착용하는 자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뭐 이 정도는 괴담에서 기본 탑재가 아니던가. 결국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가쿠조가 분지에게 말한 것처럼 나 자신으로부터 도주하지 말라는 경고는 새겨들을 법하다.

 

<얼굴 바라기>는 외모도 자산이라는 현대 사회에 주는 일침이 아닌가 싶다. 박색의 주인공 오노부에게 동네 최고의 미남자 시게타로가 중매쟁이를 통해 청혼하면서 이야기의 수레바퀴가 마구 굴러가기 시작한다. 도대체 시게타로가 뭐가 아쉬워서? 하지만 당사자는 마냥 오노부가 사랑스러운 모양이다. 이 모든 게 장난이라고 생각한 오노부는 시게타로를 한 방에 때려 뉘여 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그의 진심을 알고 결국 청혼을 받아들인다.

 

문제는 천하절색인 시게타로의 누이들인 오스즈와 오린이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언니처럼 자신들도 예뻤으면 하는 말에, 오노부는 다시 한 번 분기탱천한다. 아니 이것들이 단체로 나를 놀리나 하고 말이지. 뭐에 쓰이지 않고서야 도저히... 아 그리고 보니 이 시리즈가 원래 요괴가 등장하는 괴담 시리즈였지. 그렇다, 아버지 대에서부터 강력한 원한이 실린 저주에 걸려 시게타로-오스즈-오린 모두 스스로의 외모를 비하하고, 반대의 이미지를 사랑해 버리게 된 것이다. 이게 무슨 우스운 비극이란 말인가.

 

이 모든 사단의 주범 오쿠메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오노부는 고민에 빠져 버린다. 오쿠메의 원한을 풀어 준다면, 시게타로들이 자신을 내쫓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인생 최대의 고민 말이다. 하지만 헌헌장부 스타일의 오노부가 양심을 팔아먹지 않고 결국 오쿠메의 소원대로 그녀의 원한을 풀어준다. 하지만, 오노부가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고, 오노부는 잘 먹고 잘 살았다고. 그러니까 무언가 일이 꼬였을 때는 억지로 일을 풀려고 하지 말고, 순리대로 처리하라는 미미 여사의 말씀이다.

 

<붉은 구슬>에도 슬픈 복수극이 등장하지만, 맨 마지막에 배치된 <종이 눈보라>의 복수극도 만만치 않다.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여의고, 고리대업자의 빚 독촉에 시달리던 주인공 긴의 어머니는 오빠와 긴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은 긴은 이즈쓰야에 위장취업해서 3년간의 고생을 뒤로 하고 악덕 고리대 사채업자를 처단한다.

 

사실 긴이 이즈쓰야의 주인 내외가 그래도 지난 3년 동안,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그녀는 복수를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방법으로 궁지에 몰린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모습에 복수를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비명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서방정토 행을 기리며, 이즈쓰야 지붕에 올라 주인 내외가 그동안 모아온 차용증서를 가위질로 눈발처럼 날리게 만드는 장면은 통쾌했다. 문득 비질란테가 떠오르기도 했다.

 

神無月, 그러니까 신이 없는 달을 의미하는 표제작 역시 일품이다. 신이 자리를 비운다는 10월만 되면 강도질에 나선다는 성실한 어느 강도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는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그 강도를 너무 잡고 싶어 하는 오캇피키와 주점 주인장의 이야기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강도질에 나설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 거의 완전범죄에 가까운 강도질을 하는 범인은 지난 8년 동안, 아주 양심적(?)으로 범죄를 저질러왔다. 많지도 않은 돈이고 딱 필요한 만큼만 터는 것이다.

 

오캇피키는 마지막 범죄에서 범인이 강도상해로 사람을 다치게 했다면, 더 큰 재앙이 벌어지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주인장은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크게 한탕을 벌일 거라고 예언한다. 노련한 범인이 현장에 유일하게 남긴 단서는 팥이다. 오캇피키와 주인장은 놀라운 추리력으로 범인의 직업을 추리해낸다. 병든 딸을 재우고 목표물을 향해 출발하는 범인과 그 범인을 잡기 위해 출동하는 오캇피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미시마야 시리즈와 다른 풍미가 담긴 이야기들이 <신이 없는 달>에는 넘실거린다. 미시마야에는 뭐랄까 좀 더 진중하고 무거운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이번에는 보다 하위 버전의 간단한 이야기들의 행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전자는 전자대로 그리고 후자는 후자대로의 맛이 있다. 이런 재밌는 이야기들을 생산해내는 미미 여사를 역시 응원한다. 앞으로 건강하셔서, 계획한 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무사히 미야베월드 제2막을 완성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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