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신 DIEU DIEU - 어느 날, 이름도 성도 神이라는 그가 나타났다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도서관에서 만난 마르크-앙투안 마티외의 <신신>을 읽었다. 빌리기는 오래 전에 빌렸으나 읽지 못하고 뭉개고 있다가, 어제 반납 마감일에 도서관에 들고 가서 못다 읽은 절반 정도를 다 읽고 나서 개운하게 반납했다. 문제는 워낙에 읽다만 시점과 간격이 크다 보니 그전에 읽은 부분들이 기억이 흐릿해졌다는.

 

흥미로운 이 그래픽노블의 공간적 배경은 프랑스다. 아마 시작이 인구조사를 하면서, 아무런 삶에 흔적을 지니지 않은 신이 등장하지 않던가. 세상에 신의 이미지는 정말 많지만, 아무래도 기독교권의 나라인 프랑스다 보니 여기서 말하는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차용하게 되지 싶다. 그는 절대 제대로된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대부분 그의 뒷모습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로 그가 신인가 아닌가라는 근원적 질문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래픽노블의 어디선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을 보게 됐다. 좀 더 심오하게 파고 든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어느 시점에선가 모두가 소멸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 이런 시작부터 불완전하고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점이 흥미롭지 않은가.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피조물의 한계라고나 할까.

 

사실 그런 고차원적 문제보다는 신의 등장과 더불어 그의 존재를 증명하러 나선 일단의 과학자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법적 소송 등이 흥미로웠다. 언제부터인가 사법이 우리의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되었다. 굶주린 늑대들처럼 법조인들과 결탁한 일단의 무리들이 신을 재판정으로 소환한다. 이런 부분은 좀 일종의 클리셰이라고나 할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의 존재라고 볼 수 있는 신을,인간이 고안해낸 법정에서 그의 실존을 판단하겠다는 것 자체부터가 무리가 아닐까.

 

더 흥미로운 건, 신을 소재로 한 책들이 날개 돋힌 듯이 팔려 나갔다는 점이다. 그동안 쓸거리가 없던 문학계에 신의 등장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물 들어올 적에 노를 저으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거의 모두가 나서서 신을 팔아 마케팅하는데 여념이 없다. 상품화가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 신은 소위 말해서 팔리는 상품이었다.

 

보험이 대표적인 불안을 자극하는 장사라고 한다면, 어떤 이들에게는 종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신의 이미지를 팔아야 하는 장사치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호재가 또 있을까.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설교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강사까지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 마르크-앙투안 마티외는 종교 비즈니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신의 부상에 한몫한 미디어가 마지막에 나서서, 신에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라고 사주한다. 대중에게 그렇게 이미지가 소모된 신은 미디어의 입장에서 볼 때, 더 이상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그렇게 소비된 상품은 퇴출되기 마련이다. 다만 그 시기와 방법이 문제일 뿐. 신의 부상이 극적이었던 것처럼, 퇴장 역시 극적으로 해결된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저자가 구상하던 서사의 결을 제대로 따라갔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복잡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대충 건너 뛰면서 그래픽노블을 읽었다. 당장의 살이에서 제시되는 문제들과 씨름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한데 책마저 그래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말이지.

 

그냥 나는 쉽게 소비하고 싶은 그런 그래픽노블은 원했지만, 나에게 <신신>은 좀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 하지만 언젠가는 대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과 대면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당장에 뭘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고. 또 그렇게 다음으로 미루면서 다른 책을 집어들었다. 언제나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과 운명 1 창비세계문학 98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실리 그로스만의 이 대작이 드디어 출간된다니 믿을 수가 없다. 떨리는 손구락으로 일단 1권 주문. 과연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조영웅전 2 - 비무초친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사조영웅전>에 푹 빠져 산다. 마침 60부작 드라마 <사조영웅전 2024>가 상영 중이라, 드라마도 보면서 기존의 2017 사조영웅전과 비교도 하고 또 원작도 보는 삼박자 합이 기가 막히다. 이번 드라마 시리즈에서는 곽정의 몽골 행적이 몇 컷으로 처리되고 드러내 버렸는데, 원작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몽골 부분에 할애하고 있었다. 7년 전, 드라마도 현재 드라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원작에 충실하게 담아냈다.

 

물론 허구의 이야기겠지만, 곽정이 테무친 대칸의 몽골 통일에 한몫한다는 설정이 눈길을 끈다. 테무친 대칸이 어릴 적 맹우이자 라이벌이었던 자무카와 왕칸을 격멸하고 결국 몽골의 지배자가 됐다. 이렇게 실제 역사에 가공의 인물을 슬쩍 끼워 넣으면서 무협소설의 재미를 배가하는 기술을 김용 선생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근 천년 전의 일에 대해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훗날 대칸 섭정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테무친의 4남 툴루이를 곽정의 의형제로 삼고, 대칸의 막내딸 화쟁의 부마가 되는 과정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결국 그에 대한 보상으로 대칸이 곽정에게 많은 금품을 하사하는데, 곽정이 중원 장가구에 등장해서 마구 돈을 쓰는 장면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소설을 보고 나니 바로 이해가 됐다. 도대체 꼬마 소년이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지? 그리고 영웅하면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탈것 아닌가. 한혈보마의 내력을 지닌 소홍마를 등장시켜 곽정의 파트너로 만들어준다. 아마 요즘으로 치면 벤틀리나 람보르기니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장가구에서 곽정은 운명의 연인 황용(이하 용아)을 만나게 된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용아는 동해 도화도에 칩거 중인 동사 황약사의 딸로 무공 실력은 고수들에 비해 모자라지만, 어려서부터 익힌 여러 지식과 잡기 그리고 임기응변에 능한 그런 캐릭터로 그려진다. 연인 곽정을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불속에라도 뛰어들 그런 기세를 지닌 주인공이다. 용아는 왠지 <의천도룡기>에 나오는 장취산의 짝 은소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이런 방식으로 슬쩍 베끼면서 소모하는 걸까.

 

몽골 파트를 제외하면, 새로운 드라마는 원작과 거의 유사한 궤적을 그린다. 장가구에서 비무초친에 나선 목역(양철심)과 목염자 부녀를 만나고 또 이 작품에서 악역을 자처하는 완안강(양강/소왕야)과의 악연도 시작된다. 자신을 돕다가 라마승 영지상인의 독사장에 당한 왕처일 선배를 구하기 위해 조왕부에 용아와 뛰어든 곽정은 한바탕 소동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 가운데 완안강의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고, 양철심-포석약 부부는 18년만의 꿈같은 해후도 맞이하게 된다. 그들의 행복한 만남은 해피 엔딩이 아닌 비극으로 마무리되지만 말이다.

 

강남칠괴 사부들은 곽정을 중원에 내보내면서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고수들이 넘실거리는 강호에 철부지 어린아이를 내보내는 심정이 아니지 않았을까. 하지만 또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로소 강호에 나가봐야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절에 강호에 출진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치러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싸워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라는 말을 제자에게 남긴다.

 

어떻게 보면 비겁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병법에도 삼십육계가 나와 있는 것처럼 실전에서 내가 상대하는 상대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점만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자신의 실력이 상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대결에서 물러나면 살 수 있겠지만 만약 살수로 공격하는 고수를 상대하다가 애꿎은 죽음을 당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의 눈은 정확했다. 10년을 곽정에게 무공을 전수했지만, 아둔한 이 청년이 깨친 무공 실력은 강호에서 데뷔전을 치르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강호에 나오자마자 바로 완안홍열 휘하에 포진한 다수의 고수들과 목숨을 건 혈투에 휘말리게 되었다. 몽골 사막에서 체력 단련을 하고 강남칠괴 선배들에게 수련을 쌓은 게 1단계 수업이었다면, 이제부터 실전 2단계 수업이 시작된 셈이다. 뭐랄까 이건 마치 게임에서 미션 클리어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조왕부에 잠입한 곽정이 양자옹이 애지중지하던 각종 보양식을 먹이면서 12년간 기른 뱀의 피를 빨아 먹으면서 단박에 내공치가 올라가 버렸다. 이건 또 일종의 치트키라고 해야 할까. 작가가 준비한 치밀한 빌드업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노고가 수포로 돌아간 양자옹이 곽정의 피를 빨겠다고 덤비는 장면은 그야말로 코미디처럼 다가왔다. 아니 지가 무슨 뱀파이어도 아니고 말이지. 문득 여기서 착안한 뱀파이어 무협 드라마는 어떨까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조왕부 산하 네 고수와 백타산 바람둥이 구양극까지 가세해서 곽정과 용아를 위기로 몰아가던 순간, 조왕부 마른 우물 지하에 숨어 있던 완안강의 비밀 스승 매초풍(매약화)이 등장하면서 밀리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된다. 주화입마에 빠진 매초풍을 돕던 곽정은 우연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바람에 매초풍의 손에 죽을 위기에 처한다. 숨막히는 무공 대결에 이은 이런 극적인 상황전환까지,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막 드라마에 등장한 귀운장 육승풍에 대한 이야기를 매초풍이 들려준다. 황약사의 제자들은 모두 풍자 돌림이고 죽은 자신의 남편 진형풍과 매초풍이 황약사의 2-3번째 제자이고, 육승풍이 4번째 제자였다고 알려준다. 죽은 남편 진형풍과 사랑에 빠져 스승의 구음진경 하권을 들고 오지 몽골로 튀어서 비전을 수련하다가 강남칠괴들과 곽정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나라 장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라는 조왕 완안홍열의 존재 역시 허구의 설정이다. 몽골 사신으로 파견되어, 부족간의 이간책으로 몽골인들의 분열을 획책했고 일찍이 테무친의 몽골사단이 훗날 금나라의 위협이 될 거라는 점도 파악했다. 자무카와 왕칸을 부추겨서 테무친의 배후를 치게 한 것도 알고 보면 결국 조왕의 계략이었다. 송나라의 충신 악비가 남긴 병서인 무목유서를 찾으라고 완안강과 수하들에게 닦달해대고, 또 자국에 대항하는 송나라와 몽골의 동맹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분쇄하려는 야욕을 숨기지 않는 인물이 바로 완안홍열이었다. 그리고 보면 양부 홍열과 양자 강의 콤비가 빌런 2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드라마가 재미라면, 원작은 드라마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들을 보완하는 교보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연 곽정의 무공이 어디까지 도달하게 될지 그리고 곽정-용아 커플의 모험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게 만든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4-06-27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별점은 세 개네요.
아직도 중국에서는 60부작도 있군요. 예전 80년대만 해도
드라마 100회한다면 막 서로 축하하고 난리였는데
지금 미니시리즈 16회도 너무 길다하여 12회로 끝나는 드라마도 많이 있더군요.
주말 드라마도 30부가 최장이구요.
김용 번역연구회가 있다니 대단한가 봐요. 읽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ㅠ

레삭매냐 2024-07-17 10:48   좋아요 1 | URL
드라마 팔로우업하다가 책의 진도가
늦어져서 결국 못 다 읽고 반납해
버렸네요.

드라마는 갈수록 재밌어지네요.

철혈단심 30부작 가운데 22회까지
따라갔답니다.

stella.K 2024-07-17 11:02   좋아요 1 | URL
ㅎㅎ 이제야 답글을 다시다닛! 그래도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4-06-30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드라마 한다는 홍보는 봤는데,,, 너무 길어서 시도 못했습니다 ㅋㅋ

레삭매냐 2024-07-17 10:49   좋아요 1 | URL
일주일에 다섯 편씩 방영 중인데
너무 재밌어서 어제도 새벽까지
봤답니다 :>

못본 편들은 만화로라도 봐야 하나
어쩌나 싶습니다.
 
사조영웅전 1 - 몽고의 영웅들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주말에 우연히 신필이라 알려진 김용 선생 탄생 100주기를 맞아 다시 제작되었다는 <사조영웅전> 시리즈를 보게 됐다. 세상에나, 그 옛날에도 읽지 않고 버티던 무협지 <영웅문>을 이제 다시 읽게 될 줄 누가 알았나 그래. 고려원에서 그 시절에 나온 영웅문 1탄의 부제가 아마 <몽고의 별>이었지. 왜 그렇게 제목을 붙였는지 원작을 보면서 알게 됐다.

 

일단 드라마를 5편까지 다 보고 나서 도서관에 가서 원작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드라마와 원작의 시작점은 상당히 달랐다. 원작에서는 주인공 곽정의 탄생 비화와 몽골에서의 활약에 대한 비중이 상당했지만, 드라마는 몇 컷 정도로 죄다 걸러 버리고 중원에 데뷔한 시점에서부터 다룬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부분들은 모두 플래시백으로 처리해 버린 점이 원작과 상이했다.

 

이래서 원작을 봐야 한다고 하는 걸까? 원작은 연대기순으로 남송 임안부 우가촌에 살던 곽소천/이평 부부와 양철심/포석약 부부의 비극적 삶에서부터 시작한다. 전진칠자 중의 한 명인 구처기 도사가 송 조정의 세작들과 내통하려던 금나라 밀사들을 처치했지만, 그 때 구처기에게 습격당한 금나라 장종의 6번째 아들 완안홍열이 포석약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데 성공해한다. 그리고 그는 송의 관리 단천덕을 조종해서 곽소천/양철심 의형제의 집안을 박살내고 포석약을 납치해서 금의 수도 연경으로 향한다.

 

이 때, 이평과 포석약은 각각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구처기는 각각의 아이들에게 송나라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혀간 정강지치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곽정과 양강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곽정은 몽골 초원으로 흘러가 그곳에서 자라게 된다.

 

그 전에 구처기 도사와 강남칠괴로 알려진 강남의협들의 대결도 벌어지는데, 드라마에서는 이 부분이 상당히 적은 분량으로 다뤄졌다. 이평을 인질로 잡은 단천덕은 구처기의 추격을 피해 법화사 초목대사의 슬하에 숨어 있었는데 오해가 빚어지는 바람에 구처기 도사와 강남칠자들의 대결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쨌든 서로간의 오해를 풀고, 강남칠괴는 곽정을 맡고 구처기는 양강을 맡아 18년 뒤에 가흥의 취선루에서 무예 대결을 하자는 내기를 한다.

 

한편 몽골에서 자라게 된 곽정은 당시 몽골 초원을 휩쓸던 테무친(훗날 징기즈칸) 대칸과 묘한 인연을 맺게 된다. 이것 또한 송--원나라로 이어지는 격변의 정세를 겨냥한 김용 선생의 소설적 장치가 아닌가 싶다. 한족 출신 소년이 몽골에서 발흥 중이던 테무친 부족의 일원처럼 행동하면서 남다른 의협심을 기르며 언젠가 아버지의 원수 단천덕을 죽여 복수하겠다는 아주 클리셰이의 전범적 진행이 아닌가 말이다.

 

역시 주인공답게 곽정이 다른 건 몰라도 불우한 이웃을 돕고, 강호의 의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무공을 익혀 천하오절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그런 입지전적 인물이 바로 곽정 아니겠는가. 드디어 몽골 초원에 등장한 강남칠괴로부터 무공 수련이 시작되고, 테무친의 4남 툴루이와는 의형제로 맺어질 정도로 끈끈한 관계가 잇달아 등장한다.

 

테무친의 몽골 부족 통일전쟁이 계속되던 긴박하면서 흥미로운 전개도 역사성과 더불어 통속무협 소설의 감칠맛처럼 작동한다. 사조 3부작 가운데 마지막이었던 <의천도룡기>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주원장 같이 실제 역사에 등장하던 인물들을 적절하게 섞으면서 가독성을 높이는 신필 선생의 작법이 다른 건 몰라도 역시나 재미 하나만큼은 최고조로 뽑아내는구나 싶었다.

 

훗날 테무친의 4영걸로 알려진 철별(제베)를 곽정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전쟁터에서 테무친의 목에 화살을 먹인 원수 철별을 모두가 잡아 죽이겠다고 나선 살벌한 상황 속에서 어리버리한 곽정이 돕겠다고 나서 대칸의 주목을 끄는 장면으로 이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이 정도 관계 설정을 해놔야 나중에 중원에 대한 몽골 침략이 본격화되었을 때, 대칸과 곽정이 맞짱을 뜬다는 극적인 판이 짜여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풍쌍살/동시철시로 알려진 매초풍-진현풍과의 무시무시한 대결도 흥미로웠다. 이 부분은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고, 강남칠괴와 곽정이 동시 진현풍을 죽여서 매초풍과는 원수 사이라고만 들었는데 원작을 보니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오래 전에 이 부분을 만화로도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 사투에서 강남칠괴와 곽정의 분전으로 진현풍을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5형제 장아생이 한소영과 곽정을 구하려다가 장렬하게 산화한다.

 

곽정의 무공 수련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느닷없이 전진교의 장문인인 마옥 도사가 등장해서 곽정에게 호흡하는 법, 잠자는 법 등을 가르쳐 주면서 곽정의 수련이 배가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새로운 드라마 시리즈에도 등장해서 비교적 수월하게 이해가 되었다.

 

일찍이 김용 선생의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지나친 중화중심주의에 대한 지적이 있었는데, 아직 초반이라 그런 진 몰라도 그런 부분은 등장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경계하고 책을 읽는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저러나 다른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역시나 통속 무협소설답게 재미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구나. 읽는 속도가 무시무시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본격 한중일 세계사 18 - 입헌운동과 의화단 사건 본격 한중일 세계사 18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굽시니스트 선생의 이번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는 순전히 의화단의 난에 대한 궁금증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역시나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사를 다루다 보니 메인 테마인 의화단의 난은 맨 마지막으로 밀렸다. 그리고 그 전에 무술변법운동, 구한말 만민공도회, 독립협회 활동과 헌의 6조 그리고 일본 내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메인 디시를 먹기 위해서는 이런 전채도 먹어야 한단 말이지.

 

한중일 세계사 18편의 시작은 무술변법이다.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는 서태후였지만, 어쨌든 명목상의 황제는 광서제였다. 아편전쟁 이후, 서양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은 청나라는 서구의 기술을 도입해서 부국강병을 이뤄 보자는 양무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중체서용의 입장에서 서양의 앞선 선진기술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청일전쟁을 통해 깨닫게 됐다. 강유위와 담사동을 필두로 한 개혁주의자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광서제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무술변법, 근대화운동을 개시했다.

 

과거제 폐지와 신식 학교 시스템의 도입, 입헌군주제 시도, 군제 개혁 그리고 농공상업 등의 진흥을 도모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이런 개혁에 반항하는 보수 수구세력들이 존재했고, 이들이 실권자 서태후를 중심으로 해서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한 혁명적 개조 없이 양무운동 이래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시늉에 불과한 근대화운동의 한계는 너무나 뚜렷했다. 결국 보수파의 쿠데타에 의해 변법 실시 103일 만에 만사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하고, 담사동을 필두로 한 이른바 무술 6군자들은 모두 검거되어 처형되었다.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해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음 무대는 조선이다. 1898년 그러니까 새로운 세기를 2년 앞둔 조선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작가에 따르면 우유부단한 통수의 왕 고종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황현필 선생은 조선의 3대 암군으로 선조, 인조 그리고 고종을 꼽았는데 결국 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한 고종이 최고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 에피소드에서는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근대적 의회 시스템은 중추원 구성을 위해 진력한 점이 나의 주목을 끌었다. 50명의 원구성을 위해 비록 현대적 차원의 선거에 의한 방식은 아니지만, 민의를 대변할 인사들을 선정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반대파는 어떤 근거로 독립협회가 추천한 이들이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비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 제도라는 시스템이 발명된 게 아닌가. 물론 당시의 전제군주 통치국가였던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이 때 중추원 고문으로 훗날 검머가 된 필립 제이슨, 서재필도 등장했던가.

 

통수 전문가 고종이 쿠데타로 일거에 중추원에 입각할 인사들을 투옥시키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에 격분한 한성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굽시니스트 작가는 ''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투옥된 독립협회 소속 중추원 의원들을 석방하라는 시위를 이어나간다. 결국 민의를 이기지 못한 고종은 그들을 석방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에도 조직적 시위를 이어 나가려면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협회 인사들이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의 신원 회복에 나섰다가 고종을 비롯한 수구파의 역공을 받아 결국 중추원이 무산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도 메이지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일단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하는데, 결국 당파간의 분열로 무산이 되었다. 그리고 내각에 현직 육해군대신이 참가하게 되었는데 훗날 군국주의 정부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시리즈의 무대는 다시 중국으로 이동한다. 무술정변으로 다시 한 번 실력을 과시한 서태후와 수구파들은 황제의 교체를 도모한다. 이 사건이 기해건저다. 단왕 재의의 아들인 부준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지만, 서양 세력들의 반대로 황제 교체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즈음 중국 내정에 깊숙이 개입한 서양 세력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는 소위 의화단으로 알려진 비밀종교결사단체가 포진했다.

 

의화단 운동은 백련교에서 출발한 사이비 종교집단이 시발점이었다. 중국의 유구한 사이비 종교집단의 역사는 아마 후한 말 장각의 태평도에서 출발했던가. 세상이 먹고 살기 힘들어지고 흉흉해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바로 이런 사이비 종교집단이었다. 아픈 사람을 낫게하고, 갑갑한 현실을 탈출할 수 있다는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서양 양귀들이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를 들여와 중국 전통을 마구 파괴하고 있는 마당에, 권법을 수련해서 이들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솔깃한 프로파간다에 청나라의 이삼십 대 청년들은 열광했다.

 

초기 의화단원들은 주로 산동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양 사람들과 교류했던 남방과 달리 수도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중원에 사는 이들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게다가 자연재해까지 겹쳐서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힘든 판이었다. 이렇게 잘 짜여진 판에 청나라 조정은 대중의 분노가 서양 세력에게 집중되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대환영이다, 안티 서양 운동이여.

 

이런 사회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 조정에게 의화단 무리를 일소할 것을 주문했고, 청나라에서는 조선 총독 행세를 하던 원세개를 파견해서 의화단 진압을 명한다. 내부 반란 진압에는 능했던 원세개가 작전을 시작하자, 의화단 무리들은 박살이 났지만 풍선 효과로 의화단 활동이 산동성 인근 하남과 직례까지 퍼졌다고 했던가.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던 청나라 수구파들은 의화단 활동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의화단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이에 한껏 버프를 받은 의화단 무리들은 삼삼오오 집결해서 수도 베이징으로 몰려들었다. 19006월경에는 베이징에 집결한 의화단원들의 수가 자그마치 10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서태후와 청나라 조정은 열강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훗날 팔련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8개국 연합군들이 의화단의 공격에 맞서 자금성 인근의 공사관 수비에 나섰다. 1963년에 제작된 앤드루 마튼 감독의 <북경의 55>은 바로 이 시절을 다룬 영화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한 의화단원들이 수백 명에 불과한 공사관 수비대에게 압도적 제파공격을 가했지만, 수비대가 무너지면 잔혹한 의화단원들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결국 톈진 포대를 제압한 연합군 구원부대가 도착하면서 포위는 풀리고, 서태후를 비롯한 청나라 황실은 장안으로 도주하면서 결국 수도 베이징이 팔련군에게 함락당했다. 여기까지가 18권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의화단이 베이징에 입경할 당시 내세운 구호가 부청멸양이었다. 청나라를 도와 서양세력을 타도하자는 슬로건이었는데, 의화단의 뿌리였던 백련교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멸만흥한이었다. 시작부터 청나라 조정과 의화단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서로 간에 이질적이었나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의화단은 10만이라는 군세를 과시했지만, 이들은 실제 전투에서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전투력을 보여준 허접한 집단에 불과했다. 칼이나 창 같이 전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의화단원들이 선진 무기와 전술로 무장한 소수의 팔련군 수비대에게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의화단 사건 이후, 청나라는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역사발전의 과정에서 진보는 더딘 반면, 보수 반동에 의한 정체 혹은 역진은 상대적으로 빨랐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과정이 얼마나 소모적인가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서태후와 단왕 재의를 필두로 한 주전파들의 오판은 궁극적으로 중국의 마지막 제국 청나라의 몰락을 초래했다. 한수 아래로 봤던 일본에게마저 완패한 청나라가 무슨 수로 팔련군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수도를 외국 세력에게 점령당하는 국가적 수치는 물론이고, 막대한 금액의 배상금은 온전히 백성들의 몫이었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고 존속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