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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문 - 세계가 주목하는 중국 최고의 젊은 작가 한한 대표작
한한 지음, 박명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새로운 스타일의 그리고 사회의 치부를 드러낸 글들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구세대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중국의 80후 세대라 불리는 젊은 작가군 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으로 스타작가의 반열에 들어선 한한의 <삼중문>은 사회주의 구세대에 대한 선전포고라 할 수가 있겠다.
먼저 중국의 고문에서 따온 제목 <삼중문>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름대로 다음의 세 가지로 추론을 해보았다. 학업(공부), 사랑 그리고 관계(關係:꽌시). 인구폭발로 그 경쟁이 상상을 초월하는 입시문제, 오랫동안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생활하다가 급속한 개방으로 인해 범람하고 있는 자유연애풍조, 마지막으로 실사구시 정신이 아니라 오로지 연줄로 좌우되는 중국내의 풍조가 오늘날 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삼중고(三重苦)’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중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린위샹은 기존 교육제도를 우습게 알고, 얇은 지식을 바탕으로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신세대의 표상으로 다가온다. 창조력이 가장 우선시되는 문학가를 동경하면서도, 자신이 무언가를 창조해낼 생각을 하는 대신 항상 어디선가 베낄 궁리부터 하는 자신이 속한 젊은 세대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고지식한 아버지와 마작에 빠진 어머니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는 주인공 린위샹은 어쭙잖게 어려서 신동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이것은 이후의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그의 허풍은 성장과 더불어 걷잡을 수 없이 그렇게 커져만 간다. 또래의 여느 아이들처럼 풋사랑에 빠져 고민의 시기도 겪게 되지만, 당장에 더 좋은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등용문이 되는 고등학교 입시가 압도적으로 중국 청소년들을 구속한다.
청말 이래 중국사상의 본류를 자처해온 대로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은 이 작품 <삼중문>에도 유구히 그 역사성을 자랑하고 있다. 서구의 합리적인 제도와 문물을 받아 들여, 모범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시민들을 양성해고자 하는 교육제도와 입시제도는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현대판 과거제도와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이 시점에서 작가 한한은 직격탄을 날린다. 이과과목을 우습게 알고 낙제점을 받으면서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린위샹은, 한한을 대신해서 소설 속에서 치열한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성장소설과 학원소설류에 넣을 수 있는 <삼중문>은 모순으로 가득 찬 중국내 중등교육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있다. 실력 있는 교사들은 모두 돈 많이 주는 기업들로 진출해서, 교육현장의 질은 나날이 떨어져만 간다. 학부모들의 등골을 휘게 하는 엄청난 사교육비와 실력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기부금입학과 특기자선발이라는 편법으로 일류학교 진학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하긴 학업을 통한 개인적 성취와 사회적 성공을 동일시하는 건 동아시아 3국에서 유사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틴에이저 소설들에서 빠질 수 없는 절세미녀가 등장하는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가 있나. 어김없이 수잔이라는 재색을 겸비한 여주인공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를 끌어간다. 한한은 곳곳에서, 소설의 전형적인 구성을 타파해야 한다고 린위샹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지만 완벽하게 전형에서 탈피할 수는 없는 법. 그 역시 기존의 시스템에 의존하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작가는 또 적당한 비유들을 통해, 냉소적인 유머들을 생산해내는 기발한 재주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표현 중의 하나는 바로, 린위샹이 과외를 받으면서 말소리가 작은 늙은 과외선생을 무시하는 떠드는 장면이었는데, 마작판을 벌여도 될 판이라고 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다만, 결말로 치달으면서 조금은 성급한 진행이 아쉬웠다. 초반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수잔이 중반부를 지나면서 그 존재가 희미해지다가, 다시 막판에 가서 결정타를 날리는 장면에서는 역시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물론, 만사가 다 좋을 수는 없는 법. 어느 정도 오늘날의 중국의 현실과 그 중국의 미래의 동량이 될 젊은이들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