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조앤 디디온 지음, 홍한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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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이제야 다 읽었다. NYT 독자 선정 이번 세기 베스트 100에 당당하게 36위로 랭크되어 있는 책이다. 목록을 보고 한동안 중고책방에서 없는 책들을 사 모았는데 정작 사서 다 읽은 책은 조앤 디디온의 <상실>이 처음이다. 그리고 보니 조앤 디디온의 다른 책은 나중에 사서 먼저 읽었네.

 

<상실>로 조앤 디디온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이 양반, 대단한 작가였더군. 암튼 사둔 책은 순차적으로 언젠가는 읽게 될 테니 무슨 걱정이랴.

 

이 책의 원제는 <마술적 사고의 해> 정도로 번역될 것 같다. 하지만, <상실>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조앤 디디온은 20031230일 오랜 반려자였던 작가 존 그레고리 던을 심장마비로 잃고 난 뒤의 애도와 비애 그리고 자기 연민의 감정들을 평생 작가답게 기록으로 남겼다. 나의 독서 속도가 평소에 비해 현저하게 느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저자의 현학적인 글쓰기와 더불어 그런 상실의 감정들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 또 리뷰를 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의 심연을 되돌아 봐야 한다는 게 곤욕스럽다. 게다가 조앤 디디온은 사랑하는 평생의 반려자인 남편 뿐, 아니라 나중에는 사랑하는 딸 퀸타나 마저 병으로 잃어야 했다. 그리고 책의 후반에도 등장하지만, 이미 식탁에서 쓰러진 남편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전에 받은 심장 수술을 과부제조기라고 표현했던가.

 

좀 안타까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되돌릴 수 없다는 그런 약간은 진부한 결론을 도출하기도 한다. 사는 곳을 바꾼다고 해서, 삶의 조건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조작한다고 해서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순간에 다가올 죽음을 회피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상실>을 읽다 말고, 입수한 <푸른 밤>을 읽으면서 조앤 디디온의 삶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가 있게 됐다. 평생 글밥을 먹고 산 사람의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의학 지식의 세계와 정보조차 책을 통해 접근하는 방식에 지식인의 삶이란 과연 이런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질 수가 있었다. 나처럼 단순한 사람에게는, 참 세상 어렵게 산다는 생각도 아주 조금 들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조앤 디디온이 반려자와 자식을 잃은 뒤에 절실하게 느낌 감정에 대해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것 같다. 그리고 조앤 디디온의 노모의 경우에서 보듯, 모든 부모의 내리사랑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흔이 넘은 조앤 디디온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셨다는 말이 왜 이렇게 가슴에 맺히는지 모르겠다. 그게 바로 부모의 마음이라는 걸까. 그러니 병상에 누운 퀸타나를 돌보는 저자의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역시 냉정한 작가답게, 남편과 자식을 잃고 난 뒤 계속해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애도와 비애 그리고 자기 연민에 대해 경계하려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만약 저자에게 평생의 업인 글쓰기가 없었다면 과연 조앤 디디온은 상실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을까.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게 글쓰기라면 더더욱 탈출의 돌파구가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저자에게 글쓰기란, 지나간 삶의 복기이자 그 삶에서 미처 모르고 놓친 무언가에 대한 회고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프로 의식을 발휘해서, 그렇게 바로 글쓰기에 돌입할 수는 없었으리라.

 

조앤 디디온에게 20031230일은 그저 평범한 날일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개인에게 벌어진 거대한 사건(존 그레고리 던의 죽음)이 주변인의 삶을 온통 뒤흔드는 그런 격변의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삶에서 어떤 종류의 기적을 희망하지만,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경험하게 될 소멸의 순간은 공평하고 가차 없다고 저자는 예리한 시선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피할 수 없는 숙명에 대한 주제를 과감하고 선택하고, 자신이 경험한 고통의 연대기를 이런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저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다 읽는 데 무려 석 달이나 걸린 쉽지 않은 그런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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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9-17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저는 읽을 수 있을랑가 모르겠습니다. 읽는데 3개월이 걸리셨다니 저는 한 5개월 잡아야 할 것 같네요. ㅠ

레삭매냐 2024-09-17 18:58   좋아요 1 | URL
저자가 표현하는 상실에 감정에
휘말려서 읽다 접었다를 반복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적에는 금방 다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신이 없는 달 - 환색에도력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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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의 명절이라는 추석이 코앞이다. 오늘 달을 보니 아주 둥그렇더라. 골치 아픈 일 대신, 명절에는 그저 재밌는 책이 최고라는 생각이다. 연휴 기간 내내 그렇게 책만 읽으면서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또 우리네 인생의 묘미가 아닌가.

 

나의 이번 명절 픽은 바로 미미 여사의 <미야베월드 제 2> 시리즈다. 신간 <청과 부동명왕>을 필두로 해서 착착 읽는 중이다. 오늘은 <신이 없는 달>을 읽었다. 이게 워낙 재밌다 보니 작심하고 읽는다면 하루에 한 권 정도는 너끈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읽을수록 가속이 붙는다고 해야 할까.

 

오치카/도미지로가 청자로 등장하는 미시마야 흑백의 방과는 다른 결의 작품이 바로 <신이 없는 달>이다. 19세기 근대화가 시작되기 전, 에도 마치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들은 에도 마치에 사는 장삼이사들이다. 그 중에서도 조닌(소상인과 직인)들이 주를 이룬다. 최고위 계급인 사무라이들은 아마 미미 여사가 의도적으로 배제하지 않았나 싶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저자는 방점을 찍는다.

 

<신이 없는 달>에는 모두 12개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이야기는 초반에 배치된 <붉은 구슬>이다.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집권한 1841, 에도 막부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문제에 직면했다. 막부의 실권자 로주 미즈노 다다쿠니가 나서서 폐정개혁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 바로 <붉은 구슬>의 단초가 되는 사치금지령이었다. 물가 앙등을 잡기 위해,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금지하고 강력한 처벌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세공전문가 사키치는 자신이 가진 기술을 발휘해서, 몸이 아픈 아내 오미요를 봉양해야 하는데 그만 밥줄이 끊겨 버린 것이다. 이런 가운데, 어느 무사가 나타나서 비밀리에 이번에 시집가는 딸에게 줄 은비녀 제작을 의뢰한다. 순간, 사키치는 나이든 무사가 막부의 공작원이 아닐까 의심해 보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명작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명품 비녀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호기를 과시한다. 물론 이런 호기가 결국 자신을 옥죄는 만들어 버렸지만 말이다.

 

순간의 판단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는 인간사의 아주 기본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그렇다면 이런 탄압의 시대에 항상 신중해야 한다는 걸 미미 여사는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서, 미미 여사가 쓰는 미야베월드가 어느 시절을 배경으로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대략 19세기 중반, 전근대 시절 정도가 되겠다.

 

조실부모하고 친족에게마저 내침을 당했지만, 어려서부터 소방수의 꿈을 꾸던 청년 분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비록 지금 가게의 사환으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에도 마치를 언제라도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화마로부터 구해내는 멋진 사다리 소방수가 되겠다는 원대한 미래의 꿈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기회를 얻어 소방대에 발탁되지만, 정작 화재 현장에 투입되자 겁이 나서 그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얼어 버렸다.

 

그렇게 번민의 나날이 계속되자 주인장 가쿠조가 자신 역시 분지와 같은 번민의 시절을 보낸 소방대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길상물인 다루마 고양이 두건의 비밀을 슬쩍 알려준다. 진짜 고양이 껍질로 만들었다는 두건을 착용하면, 화재 현장에서 마치 <마스크>의 짐 캐리처럼 변신해서 진짜 소방대원처럼 모든 걸 한 눈에 척 알아보는 그런 히어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다루마 고양이 두건을 차고 현장 출동한 분지의 활약을 대단했다. 문제는 다루마 고양이가 항상 유익한 것만은 아니고, 그것을 착용하는 자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뭐 이 정도는 괴담에서 기본 탑재가 아니던가. 결국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가쿠조가 분지에게 말한 것처럼 나 자신으로부터 도주하지 말라는 경고는 새겨들을 법하다.

 

<얼굴 바라기>는 외모도 자산이라는 현대 사회에 주는 일침이 아닌가 싶다. 박색의 주인공 오노부에게 동네 최고의 미남자 시게타로가 중매쟁이를 통해 청혼하면서 이야기의 수레바퀴가 마구 굴러가기 시작한다. 도대체 시게타로가 뭐가 아쉬워서? 하지만 당사자는 마냥 오노부가 사랑스러운 모양이다. 이 모든 게 장난이라고 생각한 오노부는 시게타로를 한 방에 때려 뉘여 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그의 진심을 알고 결국 청혼을 받아들인다.

 

문제는 천하절색인 시게타로의 누이들인 오스즈와 오린이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언니처럼 자신들도 예뻤으면 하는 말에, 오노부는 다시 한 번 분기탱천한다. 아니 이것들이 단체로 나를 놀리나 하고 말이지. 뭐에 쓰이지 않고서야 도저히... 아 그리고 보니 이 시리즈가 원래 요괴가 등장하는 괴담 시리즈였지. 그렇다, 아버지 대에서부터 강력한 원한이 실린 저주에 걸려 시게타로-오스즈-오린 모두 스스로의 외모를 비하하고, 반대의 이미지를 사랑해 버리게 된 것이다. 이게 무슨 우스운 비극이란 말인가.

 

이 모든 사단의 주범 오쿠메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오노부는 고민에 빠져 버린다. 오쿠메의 원한을 풀어 준다면, 시게타로들이 자신을 내쫓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인생 최대의 고민 말이다. 하지만 헌헌장부 스타일의 오노부가 양심을 팔아먹지 않고 결국 오쿠메의 소원대로 그녀의 원한을 풀어준다. 하지만, 오노부가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고, 오노부는 잘 먹고 잘 살았다고. 그러니까 무언가 일이 꼬였을 때는 억지로 일을 풀려고 하지 말고, 순리대로 처리하라는 미미 여사의 말씀이다.

 

<붉은 구슬>에도 슬픈 복수극이 등장하지만, 맨 마지막에 배치된 <종이 눈보라>의 복수극도 만만치 않다.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여의고, 고리대업자의 빚 독촉에 시달리던 주인공 긴의 어머니는 오빠와 긴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은 긴은 이즈쓰야에 위장취업해서 3년간의 고생을 뒤로 하고 악덕 고리대 사채업자를 처단한다.

 

사실 긴이 이즈쓰야의 주인 내외가 그래도 지난 3년 동안,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그녀는 복수를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방법으로 궁지에 몰린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모습에 복수를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비명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서방정토 행을 기리며, 이즈쓰야 지붕에 올라 주인 내외가 그동안 모아온 차용증서를 가위질로 눈발처럼 날리게 만드는 장면은 통쾌했다. 문득 비질란테가 떠오르기도 했다.

 

神無月, 그러니까 신이 없는 달을 의미하는 표제작 역시 일품이다. 신이 자리를 비운다는 10월만 되면 강도질에 나선다는 성실한 어느 강도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는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그 강도를 너무 잡고 싶어 하는 오캇피키와 주점 주인장의 이야기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강도질에 나설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 거의 완전범죄에 가까운 강도질을 하는 범인은 지난 8년 동안, 아주 양심적(?)으로 범죄를 저질러왔다. 많지도 않은 돈이고 딱 필요한 만큼만 터는 것이다.

 

오캇피키는 마지막 범죄에서 범인이 강도상해로 사람을 다치게 했다면, 더 큰 재앙이 벌어지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주인장은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크게 한탕을 벌일 거라고 예언한다. 노련한 범인이 현장에 유일하게 남긴 단서는 팥이다. 오캇피키와 주인장은 놀라운 추리력으로 범인의 직업을 추리해낸다. 병든 딸을 재우고 목표물을 향해 출발하는 범인과 그 범인을 잡기 위해 출동하는 오캇피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미시마야 시리즈와 다른 풍미가 담긴 이야기들이 <신이 없는 달>에는 넘실거린다. 미시마야에는 뭐랄까 좀 더 진중하고 무거운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이번에는 보다 하위 버전의 간단한 이야기들의 행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전자는 전자대로 그리고 후자는 후자대로의 맛이 있다. 이런 재밌는 이야기들을 생산해내는 미미 여사를 역시 응원한다. 앞으로 건강하셔서, 계획한 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무사히 미야베월드 제2막을 완성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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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아침의 책들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한뼘책방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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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서관에 가서 빌릴 적에는 미처 몰랐었는데, 지금 검색해 보니 5년 전에 나온 책인데 절판되었다. 그러니까 살 수도 없는 그런 책이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는 말인가.

 

우연히 알게 된 스가 아쓰코 여사가 구사하는 잔잔바리 이야기들에 빠져 생전에 5권을 발표했다는 스가 여사의 책들을 섭렵 중이다. 아마 최근에 나온 <트리에스테>까지 끝낸다면 내 마음대로 선정한 이달의 작가로 불러도 될 듯 싶다. 갑자기 의기충천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스가 여사는 평생 책과 더불어 산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상인 출신 아버지는 이미 1930년대 유럽 여행을 할 정도의 댄디한 그런 메이지 남자였다. 그리고 훗날 유럽의 파리와 로마로 유학길에 오르는 딸에게 자신이 갔었던 곳을 가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바람난 아버지의 전적 때문인지, 딸은 아버지와 계속해서 불화를 거듭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리 오가이의 사전을 읽어 보라는 아버지가 알고 보니 독서 고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작가는 가감 없이 작고하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족이란 애증의 관계가 아닌가 싶다. 독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점에서 이 책 역시 참 무서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리 오가이의 <아베 일족>을 내가 샀었던가. 아니면 산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가. 그리스의 걸출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의 일화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자니, 기억은 자의적으로 왜곡되고 수정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택쥐페리와 <어린 왕자> 편에서는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에 나선 작가에 대한 단상들 그리고 공중에서 바라보는 작가의 놀라운 시선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왜 나는 스가 여사가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렇게 마음이 불편해지는지 모르겠다. 근로봉사로 학교 공장에서 혹시 연합군을 상대할 총탄을 만들었던 건 아닐까라는 그런 마음들 말이다. 좀 화끈하게 반성하면 안될까.

 

그런 면에서는 뒷부분에서 일본 군부에 의해 철저하게 개스라이팅당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등장하기도 해서 조금은 마음이 풀어지기도 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도 백장미단 같은 저항운동이 존재했지만, 나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전쟁 중에 어떤 저항운동을 전개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자신이 한참 공부하던 시인의 저작을 보고 전율했다는 말이 있었던가. 그리고 보니 나는 아버지의 책장에서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는 책들이 죄다 종서에다가 왠 놈의 한자가 그리 많은지 난 옥편을 찾아가면서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이 김찬삼 씨의 세계일주기를 더듬더듬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을 아무나 할 수 없었던 시절이라 그런지 오토바이를 끌고 나선 저자의 세계여행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막상 내가 해외여행을 하다 보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 다만 파리에 처음 갔을 적에, 버스 안에서 에펠탑이 보이기 시작할 때의 그 두근거림이란.

 

대학 시절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주인공 카타리나 베닌카사에 대한 전기를 읽고 나중에 시에나에 갔을 적에, 카타리나의 연고지를 찾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인물과 공간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연결시키는 글쓰기야말로, 모든 에세이 작가들이 추구하는 로망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스가 여사의 글쓰기는 고수다운 풍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정말 그동안 있는 지도 몰랐던 클로드 모르강 작가의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라는 책은 스가 여사의 소개로 알게 됐다. 다행히 국내에도 소개된 책이다. 일본에서는 유명한 이와나미문고 시리즈로 소개된 모양이다. 그리고 일본 군부가 시키는 대로 맹종한 자신들의 빈곤한 정신에 대해 반성하는 장면을 읽고 조금은 스가 여사와 화해했다고나 할까. 인간답게 살기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일까라는 고민에 도달하는 장면도 마음에 들었다. 아 당장 중고책방에 달려가서 사다가 도대체 어떤 책인지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다.

 

집 근처 창업센터인가에 미미 여사의 <신이 없는 달>과 이 책 두 권을 들고 가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선선하니 책읽기에 더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낮인데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여름이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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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통행증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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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미미 여사 책읽기에 불이 붙은 모양이다. 9년 전에 내리 5권을 읽고 나서, 쉬다가 이달 들어 3권을 잇달아 읽었다. 그동안 책들이 많이 나와서, 이번 추석에는 도서관에서 미미 여사의 책들을 왕창 빌려다 읽어야지 싶다.

 

에도 시대는 물론이고 현대 일본의 지명에 대해 좀 더 안다면, 미미 여사가 구사하는 에도 마치 이야기에 좀 더 몰입을 하지 않을까 싶은데 역시나 구글맵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조 후카가와나 간다니 하는 지명이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어쨌든 미시마야 시리즈 7번째 책인 <영혼 통행증>에는 세 개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미시마야 흑백의 방에는 괴담을 들고, 그집 도련님인 청자 도미지로에게 들려 주고자 찾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마치 도미지로가 듣는 괴담을 바로 옆에서 듣는 격이라고나 할까. 미미 여사는 지상중계하듯이 이야기의 결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아이고 재밌어라.

 

흑백의 방 규칙은 모두 알고 있다시피, 철저하게 화자의 실명이나 이야기가 벌어지는 장소에 대한 익명성을 보장한다. 화자는 말하고, 청자는 잊는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도미지로는 반지에 한 컷 정도 그림을 그리고 오동나무 상자에 봉해둔다. 스타일도 참 멋지지 않은가.

 

첫 번째 이야기인 <화염 큰북>의 화자는 오카지 번 출신의 헌헌장부 사무라이 나카루마 신노스케, 고신자다. 전근대 시대, 화재는 다이묘가 다스리는 번에 사는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재앙 중의 하나였다. 일본 건물들의 대다수가 목재로 만들어졌으니, 불이 나면 삶의 거처인 집과 재산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다. 번주의 가장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는 바로 이 화재 진압에 있지 않았을까.

 

오카지 번의 자랑하는 보물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화염/화마를 제압할 수 있는 혹은 경고를 해주는 큰북님이었다. 어느날, 이 큰북님이 절도당하고 훼손당하는 오카지 번으로서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고산지의 큰형님인 미남자 류노스케가 큰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번주 오카지 가지에몬은 자신이 신뢰하는 무사들을 데리고 오보라케 연못의 터주님을 알현하러 출동한다. 나카무라 가문의 나이 어린 신노스케와 그의 형수 요시를 대동하고서.

 

어렵게 도착한 오보라케 연못에서 털북숭이 터주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신물은 터주님의 손톱 조각을 하나 받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예의 손톱으로 새로운 큰북님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어지는 놀라운 비밀은 오보라케 연못의 터주님에 대한 것이다. 번에 사는 이들의 번영과 안정을 위한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카무라 신노스케도 그런 임무가 주어진다면 과연 마다하지 않을 것인가? 누군가를 책임질 필요가 없는 총각 고산지로서는 당장에라도 두렵지 않지만, 나중에 일가를 이룬 다음에는 또 다른 상황이 되지 않을까?

 

주군의 가문과 영지민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라면 언제 어느 때고 자신을 바치라는 명이 떨어진다면 망설이지 않겠다는 신노스케의 비장한 결심이 지나가 버린 사무라이 시대에 대한 하나의 그리움 혹은 아쉬움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두 번째 이야기 <한곁같은 마음>에서는 에도 마치에서 꼬치경단을 만들어 팔던 소녀 오미요 집안을 소재로 삼는다. 모두가 알다시피 도미지로 도련님은 다른 건 몰라도, 맛난 음식에는 사족을 쓰지 못한다. 한 마디로 미식가라고나 할까. 자기만 맛있는 걸 먹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인심을 후하게 쓴다. 자신의 용돈을 들여, 미시마야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맛난 음식을 먹게 되면 사다가 제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머니 오타미는 자비를 들여 둘째 아들의 선행을 지원하기도 한다나.

 

오미요의 작고하신 아버지 이사지는 요릿집 '마쓰후지'의 촉망 받는 미래의 요리사 후보였다. 그리고 어머니 오나쓰는 고아이긴 했지만, 뛰어난 미모로 접대 하녀로 활약했다.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던 이 커플은 이사지가 폐병으로 더 이상 주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서 불행의 테크트리를 타게 된다. 그리고 마쓰후지의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고급 요릿집이라는 성격마저 변질되게 되었다. 그전에 요릿상에 정갈한 음식을 내놓았다면, 유곽화되면서 여인을 상에 올리게 되었단다.

 

출중한 미모를 지녔던 오나쓰는 이름마저 나쓰에로 바꾸고, 병든 지아비를 부양하기 위해 색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리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세 명의 사내아이들을 낳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들은 모두 이사지를 닮았다. 하지만 나쓰에의 인기가 떨어지게 되자, 새로운 요릿집 안주인 오토미는 이사지 일가를 내쫓을 궁리를 하게 된다. 오갈 곳 없게 된 오나쓰들은 예전에 마쓰후지에서 일하던 오산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여장부 같이 당찬 기세의 오산이 수레를 끌고 와서 오나쓰 가족을 구조했다.

 

그리고 노점상으로 그나마 먹고 살기 시작했는데, 예전에 오나쓰의 손님이었던 남자가 등장해서 행패를 부리고 쌍둥이 같다고 생각했던 삼형제들의 얼굴이 하나도 닮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오나쓰 가족들은 드디어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좀 사는 집의 자식이지만 고급 음식 대신, 노점상에 파는 꼬치경단 같은 음식도 아무런 거리낌 없는 도미지로의 인격을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요건 좀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싱거운 느낌의 인스톨이지만, 미미 여사가 구사하는 모든 이야기들이 알싸한 맛을 지닐 수는 없으니까라고 생각하고 접어두자.

 

마지막 이야기인 <영혼 통행증>이야말로 이번 시리즈에서 미미 여사가 준비한 회심의 일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갑을 연상시키는 고희 나이의 세련된 복장을 한 깃토미 씨가 등장해서 반세기 전, 자신의 부친이 운영하던 싸구려 여관에 투숙했던 영혼 마을의 뱃사공과 봉인이 풀려 이승으로 나온 미나모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준다. , 그전에 처서 맞이 수박 타령도 했던가. 그리고 깃토미 씨는 준비해온 유카타를 흑백의 방 청자 도미지로에게 입어달라는 정중한 부탁도 했지 아마.

 

주인공 깃토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 오카메의 손에 양육됐다. 보통의 경우 조부모 손에 자란 아이들이 버릇이 없다고 알려졌는데, 깃토미의 경우는 달랐다. 오카메 할머니는 깃토미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인정사정 할 것 없이 곱자로 응징했으니까. 하지만 훗날 깃토미의 새어머니가 되는 입이 거친 오타케가 등장하면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번에도 역시나 발도술처럼 곱자를 뽑아낸 오카메가 깃토미를 후드려 패려고 하는 순간, 오타케가 나서서 폭력을 무마시켰다. 여기서 발도술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웃기는지 잊어버릴 것 같지가 않다. 오카메에게는 곱자가 쌍절곤 같은 거였나.

 

어쨌든 오카메 할머니는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시고, 카메야 여관이 그럭저럭 운영되던 가운데 영혼 마을의 뱃사공이라는 시치노스케가 등장하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모든 망자들이 화혼이 되어 성불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고 한다. 저승에 가지 못하고 어떤 문제로 이승에 미련이 남은 노혼, 원혼들이 문제다. 시치노스케도 그런 원혼을 달래지 못해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은 망자의 혼들이 괴물이 되어 난동을 부리게 되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니까. 그렇게 되면 화혼이나 성불은커녕 영원한 저주의 고통에 시달릴 판이다.

 

깃토미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미나모 역시 그러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사람 좋은 깃토미 씨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주어 억울하게 죽은 미나모, 아니 아오이 씨의 죽음을 신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시치노스케에 따르면, 결국 미나모는 성불했다고 한다. 스스로는 위험에 내어 주는 희생정신으로, 아오이 씨는 원한을 풀 수가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좋겠지만, 느닷없이 등장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나이가 이제 막 임신한 오치카에 대해 그리고 세상의 업에 대해 말하자, 분노한 도미지로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이 오치카의 행복을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도대체 이 미스터리한 작자의 정체는 뭐지. 훗날의 무언가를 대비한 미미 여사의 거대한 떡밥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편에서 내가 뽑은 키워드는 희생과 헌신이다. 주군과 영지인 그리고 가족을 위해 개인의 안위는 언제라도 내던질 수 있다는 나카무라 신노스케, 폐병으로 병석에 누운 남편 이사지를 위해 색을 팔았던 오나쓰, 할머니 오카메의 손주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던 오타케 그리고 아오이 씨의 원한을 풀기 위해 스스로 요괴가 되는 걸 마다하지 않았던 깃토미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 된 어떤 가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다시 생각해 봐도 멋진 서사의 힘이 아니던가.

 

미시마야 흑백의 방 청자는 이헤에와 오치카를 거쳐 도미지로로 바뀌었다. 너무 오래 전에 오치카 시절의 이야기들을 읽어서 그런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조금은 부족한 듯한, 노련하지 못하고 세련되지 못한 도미지로 스타일의 청자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이번 연휴에 예전에 사기만 하고 읽지 못한 미시마야 시리즈를 찾기 위해 책방 정리를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그 책들이 어디에 가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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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저편 이판사판
기리노 나쓰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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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책을 만나는 경로도 다양하다. 미미 여사의 미시마야 시리즈를 읽다가 책 뒤편 후기에 마포 김 사장님이 추천한 <일몰의 저편>을 알게 됐고,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미리보기 서비스로 좀 읽다가 아 이거다 싶어서 바로 도서관에 들러서 빌려다 읽었다. 재미 하나는 정말 끝내주지 싶다. 그리고 물론 창작과 검열 그리고 요즘 뜨거운 이슈인 '정론'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었다.

 

중년의 작가 마쓰 유메이는 어느날 소환장을 하나 받게 된다. 그리고 총무성 문화국 문예윤리위원회라는 거창한 단체에서 발송한 몇월 몇일(629일 월요일이었나?)까지 어디로 출두하라는 명령조의 소환장이다. '약간의 강습'이 있을 거라는 고지에 사소하지만 주변 정리를 한다. 문제는 고양이 곤부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키지 않지만 예전에 동거하던 가네가사키 유라는 친구에게 부탁하려고 전화했는데,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빡센데 이거.

 

도대체 자신이 왜 이바라기 현 근처의 외딴 바닷가 시치후쿠진하마 요양소에 가야 하는지 따지다가 자신을 데리러 온 니시모리와 한바탕하고 벌점 1점을 부과 받는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자신이 받는 벌점 처분은 치명적인 후과를 초래한다. 엄격한 규칙에 적용되는 요양소에 입소한 마쓰 유메이는 B98이라는 수인 번호와 유사한 번호를 부여 받고, 구류 생활을 시작한다.

 

당연히 휴대폰의 와이파이나 연락은 되지 않고, 방에는 전기 콘센트도 하나 없다. 요양소의 다다 소장과 면담하게 되면서 자신이 어떤 일로 해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성애 소설 작가인 마쓰 유메이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강도 높은 창작물을 생산해냈다. 하지만, 사회에서 그의 그런 작풍을 혐오하던 이가 일년 반 전에 통과된 헤이트스피치 법에 따라 고발을 했고 그 여파로 마쓰 유메이가 이곳에 "교정"을 위해 온 것이다.

 

여기서 순순히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받아 들였다면 소설 <일몰의 저편>은 진행되지 않았으리라. 철저하게 통제되는 요양소 운영이 극도의 반발심이 생긴 마쓰 유메이는 격렬하게 저항했고 그 결과 벌점이 추가로 4점이나 발생하면서 구류 기간이 7주로 연장됐다. 물론 그에 수반된 물리적 폭력은 기본이었다.

 

요양소에서는 마쓰 유메이의 왜곡된 창작욕을 고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사육을 전개한다. 우선 물과 음식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그렇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특히 마쓰는 단것의 유혹에 너무 약하다. 나중에 다다 소장이 원하는 대로 작문을 하면서, 그가 제공하는 달달한 제로콜라의 유혹에 넘어가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19금 수준의 성애 소설을 주로 쓰던 마쓰 유메이에게 다다 소장은 무언가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그리고 노벨문학상에 필적할 만한 그런 작품을 생산할 것을 주문한다. 작가는 아니지만 소설 소비자로서 나도 이 장면에서는 분노가 치밀었다. 아니 왜 다다 소장으로 대변되는 일개 국가 기관이 창작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지? 나는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거대한 통제의 단면을 읽을 수가 있었다. 사회에 반한다는 이유로 낯 뜨거운 성애 소설부터 시작해서 검열을 시작한다면 다음 차례는 뻔하지 않은가. 반사회적 성향의 글이나 반역을 도모하는 그런 부류의 글에 대해서도 문예윤리위원회는 칼날을 휘두를 것이다.

 

실제로 요양소에 수용된 작가들 중에는 그런 이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A45라는 이름의 익명의 누군가가 철저하게 감시되는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접근해서 요양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알려준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거다. 그렇다면 과연 A45는 믿을 수 있는 걸까? 게다가 좌절한 작가들이 잇달아 투신하면서 수용된 이들은 연대책임으로 중식을 거르는 벌까지 받게 된다.

 

수용소의 인질이 된 마쓰 유메이는 생존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고 <엄마의 카레라이스>라는 그동안 자신이 구사해온 작풍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탕을 연상시키는 연재물로 다다 소장의 환심을 산다. 그랬더니만, 바로 자신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는 게 아닌가 말이다. 시원한 얼음이 단긴 제로 코카콜라의 유혹은 작가로서 비굴함을 초월하는, 육신의 평안을 달래주는 그 무엇이었다.

 

기리노 나쓰오 작가의 <일몰의 저편> 대부분은 디스토피아적 상상에 기반한다. 당연히 우울한 색조를 띨 수밖에 없다. 요양소에서는 수용자들의 교정이 아닌, 그들의 투신을 종용한다. 멀쩡한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라면 미치지 않는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다. 사회와 철저하게 격리된 상태에서, 외부의 도움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고 끊임없이 자신은 갱생한 순수한 작가라는 사실을 타인에게 증명해야 생존이 가능하다.

 

비록 사회에서 성애 소설 작가이긴 하지만, 나름 창작자로서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싶은 마음이 마쓰 유메이를 통해 불쑥불쑥 폭발시킨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을 노벨문학상 작가 정도의 수준이 아닌 포르노 소설 작가로 설정한 건 작가의 신의 한수였다. 아마 누구라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요양소에 갇혀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분개하지 않을까? 하지만 마쓰 유메이는 그런 작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런 속세에 어울리는 작품을 쓰는 작가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은 자유이며 표현의 자유라는 대전제 가운데 무슨 글을 쓰든지 간에 그건 자유라는 메시지를 작가는 던진다. 그리고 다다 소장으로 대변되는 국가나 단체에 의한 일체의 (자기)검열을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만약 이런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면 실제적 검열보다도, 억압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기검열이 이루어진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제임스 설터가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해 존경과 사랑, 칭찬 그리고 유명해지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작가들이 마쓰 유메이처럼 핍박받는 시절이 온다면 과연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인가?

 

그런 점에서 마지막에 배치된 <전향>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인간형의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사람의 마음은 자유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존의 자아를 유지하려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세상의 맛있는 음식들, 안락한 일상과 삶의 편리함 등등.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이 원하는 글을 썼을 때, 과연 자신은 즐거울 수 있을까? 문득 그것조차도 하나의 게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은 생각도 아주 조금 들었다. 잠시 마쓰 유메이에게 내 자신을 투영했다가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일몰의 저편>은 마포 김 사장님의 추천대로 소설이 품고 있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제공해 주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재밌어서 더 즐거운 독서의 시간이었다. 미미 여사의 책을 읽다 말고 시작했는데, 먼저 다 읽어 버렸다. 그것 참. 조금 남은 미미 여사의 <영혼 통행증>도 마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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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9-11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의 제 마음에 와닿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오늘만 넘기면 이 무서운 더위도 꺾일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4-09-11 13:45   좋아요 1 | URL
쓰고 싶은 걸, 마음 대로 쓰는 자유!
무언가가 두려워서 마음껏 쓰지
못하니 답답하기도 하구요.

내일하고 모레 비가 온다고 하니
말씀해 주신 대로 더위가 가시길
기대해 봅니다. 너무 덥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