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다 반사
키크니 지음 / 샘터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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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어딘가에 있는 쿠르초 말라파르테의 <망가진 세계>를 결국 찾지 못하고 도서관에 빌리러 갔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키크니 작가의 에세이집 <일상, 다 반사>와 마스다 미리 작가의 책이 반납 카트에 놓여 있는 걸 봤다. 명절에 에드워드 P. 존스의 <알려진 세계>를 사서 읽으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희망도서로 신청했더라. 뭐 그런 거지.

 

나에게 이제 인스타는 정보를 취득하는 하나의 창구가 되었다. 좀 더 스피디하게. 그리고 좀 더 깊은 정보가 알고 싶다면 너튜브를 뒤진다. 사실 키크니 작가도 인스타 피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양반, 갬성 넘치는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인가에서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내신 바 있다. 초반의 서너컷은 유머로 빌드업을 한 다음, 마지막에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다. 그러니까 인스타 팔로우들의 갬성을 한껏 자극하는.

 

그냥 그런 작가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에세이집을 통해 작가의 내면에 좀 더 도달하게 되었달까. 그러니까 5.3KG돼한의 건아의 태어나 농구를 좋아하고, 만창과에 진학한 살벌한 인상의 청년이 그림으로 세상고 맞짱을 뜨는 이야기가 <다 반사>의 주를 이룬다. 비즈니스 미팅의 긴장감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절로 났다. 어라, 그리고 보니 연달아 읽고 있는 마스다 미리 작가의 <작가생활>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것 같다.

 

어쨌든 프리한 고독랜서로서 고정적이지 않은 수입과 불안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장면 그리고 자신이 항상 부족한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항상 부족과 결핍 그리고 불안 속에서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보니 얼마 전, 인스타 피드에서 본 거창한 행복이라는 목표 대신 조금만 행복의 기준을 낮춘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어느 현자의 말이 기억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떤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고. 행복조차 경쟁이 된 것 같아 보이는 SNS 월드에서 그런 소소한 행복은 피드로 올리기에 어쩌면 좀 쪽팔리는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암튼 그렇게 소소한 일상으로 빌드업을 마친 작가는 자신의 백그라운드를 조용하게 들려준다. IMF로 집이 망하고 언제나 건강하실 것 같았던 어머니가 뇌경색 당뇨합병증으로 고생하시게 된 스토리는 참 그랬다. 아마 어쩌면 그 시절을 경험한 탓에 우리는 더 불안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정년이 보장된 평범한 직장에 들어가 하루하루 일하다가 때가 되면 은퇴하는 게 꿈이었던 소시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이 문을 닫고 아무런 보호장치 하나 없이 그야말로 약육강식 자본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내던져지게 되었을 때의 그 막막함이란.

 

키크니 작가 역시 막노동으로 돈을 벌어서 선배 네 명과 작은 월세집에서 살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큰형님은 호주로 도망치다시피 2년간 워홀을 가셨다고. , 듣기만해도 절로 한숨이 나오는 사정이지 싶다. 그래서 홀로 가정을 보살펴야 했던 무게감에 대해서도 키크니 작가는 그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그려낸다. 되짚어 보니 그가 구사하는 모두의 마음이 훈훈해지는 빌드업 서사가 어쩌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에세이의 어디선가 발견한 덤벼라 세상아라는 구절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인스타 피드로 만나는 짤과 이렇게 나름 긴 호흡으로 가는 에세이집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느낌이다. 다음에 도서관에 다시 가게 되면, 그의 다른 책들도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다. 오늘 도서관에 가는 날인데 명절이라 휴관이다.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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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빵빠라빵 여행
야마모토 아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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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빵을 좋아한다. 언제부터인가 아침에 빵을 먹게 됐다. 오늘도 내일 아침에 먹을 소보루 빵을 한 개 샀다. 나의 일용할 양식이지. 즉석 수프로 같이 먹으면 좋다. 며칠 전에 새로 뚫은 모찌모찌 빵집은 맛과 가격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전에도 한 번 방문하러 간다고 들렀다가 못 찾았었는데 말이지. 식빵은 쫄깃쫄깃했고, 다른 빵들도 먹고 싶은 게 많더라. 그렇다고 해서 야마모토 아리들처럼 빵을 먹겠다고 핀란드와 덴마크까지 갈 여력은 없고.

 

책을 쓰기 위한 소재 발굴이라는 점에서 야마모토 일행의 북유럽 빵 순례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빵을 매개로 해서 이런 책을 쓸 수 있단 말이지. 그렇다고 해서 아주 치말하게 준비를 한 것 같지도 않다. 대충 핀란드에서는 호밀빵이 대세지라는 모토를 가지고 갈 수 있는 곳들에 위치한 동네 빵집들을 타격한다. 내가 이런 방식의 즉석 여행을 좋아하잖냐. 청년 시절에는 주로 그런 식의 여행을 했지만, 지금은 체력이 달려서 아무래도 힘들지 싶다. 또 모르지, 그렇게 낯선 곳에 가서 또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오냐며 마구 달리게 될지 말이다.

 

데니시 브레드의 본고장이라는 덴마크 코펜하겐을 거쳐,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도착한 야마모토 일행들은 바로 빵 흡입에 들어간다. 아니 그전에 기내식부터 빵을 뜯었던가. 아무리 빵이 좋다고 하더라도, 배가 부른 상태에서 계속해서 그렇게 빵을 먹을 순 없지 않나 그래. 어쨌든 그런 나의 노파심을 뒤로 하고 이들은 백야의 나라 핀란드에서 수도 없이 빵을 뜯는다. 바로 이거지!

 

사실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힘든 그런 여러 종류의 호밀빵 베리에이션을 뒤로 하고, 이들은 관광에도 열심이다. 수도 헬싱키에서 기차로 12시간이나 걸리는 산타클로스 마을도 방문한다. 패기가 놀랍지 않은가 말이다. 북극권에 위치한 산타클로스 마을을 야간열차를 타고 달려간다. 다시 한 번 멋지다. 대신 산타 할아버지와 같이 기념사진을 찍는 게 3천 엔이라고 해서 패스하고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썼다고. 나의 옆지기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무리 돈이 많이 들어도 그건 해야 했다고. 나 역시 격렬하게 동의하는 바이다. 언제 또 그럴 기회가 있을까.

 

핀란드 제2의 도시라는 탐페레 기행도 흥미롭다. 유명한 무슨 돔을 찾느라 고생을 하기도 하고, 타워에 위치한 저명한 빵집에 가겠다고 거의 절벽을 오르는 장면도 재밌었다. 고생 끝의 낙이라고 그렇게 올라간 곳에 위치한 빵집에서 먹는 빵에 대한 추억은 나중에 생각해도 정말 황홀하지 않았을까.

 

다음 코스는 덴마크다. 불과 어제 읽은 책인데, 왜 핀란드에 대한 이야기들은 생생하게 다가오는데 덴마크는 그렇지 않은지 모르겠다. 일본에서는 버터를 대략 50% 정도 사용한다고 하는데, 덴마크에서는 60%를 써서 더 부드럽다고 했나. 아니 그게 핀란드였나 어쨌나. 덴마크로 가기 위해 이른 체크아웃을 해야 해서 푸짐한 빵이 제공되는 조식 뷔페를 포기하지 못해서 발을 동동거리는 이들의 조바심도 재미에 한 스푼을 더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빵을 안주 삼아 호텔에서 먹겠다고 사온 맥주가 알고 보니 사과술이었다는 에피소드도 재밌었다. 이름도 잘 모르고 또 맛도 모르지만, 그래도 타국의 식문화를 이해하려는 그네들의 노고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어찌 이름도 모르고 무엇으로 만든 지도 모르는 빵들이 다 맛있었을까. 입맛에 맞지 않는 빵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자세가 참 인상적이었다.

 

내친 김에 무슨 일본 각지 먹부림을 다룬 만화도 잠시 봤었는데... 지금 검색해 보니 타카기 나오코의 <일본 식탐여행 한 그릇 더!>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먹방 이전에 이미 일본에서는 이런 만화 먹부림이 유행이었던가. 그렇게 유행은 돌고 도는가 보다. 한 시절을 풍미하던 가성비 최고라던 먹방도 이젠 트렌드가 지나지 않았나 말이다.

 


(지난 주에 예전부터 한 번 가보려고 하던 모찌모찌브레드, 가격도 착하고 빵도 맛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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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07 2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빵순인데 ㅋ
새로 생긴 빵집 꼭 들어가봐요
맛있다고 소문난 곳은 찾아가보구요
여러모로 몸이 고생중입니다
책 에피소드들 재밌네요 ^^

레삭매냐 2024-02-08 09:52   좋아요 1 | URL
오오 대단하십니다 ~

저도 아침마다 빵을 먹는답니다.
오늘 아침에도 빵 묵었어요.

오후에 일찍 끝나면 다시 모찌
모찌 브레드에 가볼라구요 :>
빵여행 재밌더라구요.
 
그럼에도 여기에서
실키 지음 / 현암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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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문자가 왔다. 2주 전에 빌린 책들을 내일까지 반납하라고. 거의 어지간해서는 연체하는 법이 없다. 읽지 못한 책이라면 당연히 반납을 해야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연장해둔다. 2주 전에 만난 실키 작가의 <그럼에도 여기에서>라는 그래픽노블이다. 읽던 책인데, 리뷰를 쓰기 위해서라도 그전에 읽은 걸 싹 무시하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기시감에 더 빨리 읽을 수가 있었다. 이제 리뷰까지 쓰고 나면 반납하는데 마음이 가벼울 것 같다.

 

어려서 인도유학을 떠난 작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림체부터가 뭐랄까 무언가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의 습작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개인 기록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완성품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좀, 그렇다. 소외와 괴리라는 단어들이 떠올랐고, 반바지와 고기가 금지된 인도 현지기숙사의 억압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일천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나와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만나 보지 못한 작은 도시 그리고 더 작은 마을 출신들이 혐오와 차별을 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 근간에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원천적인 두려움이 혐오와 차별을 생성한다고 추론해 본다. 나와 같은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지는 않으니까 말이지. 프랑스 현지에서 일상화된 그런 차별을 경험한 작가는 바로 맞받아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처음에는 언어적 장벽 때문에 그 다음에는 나의 안전이 최고라는 생각에 그들과 말다툼을 벌이지 않는다. 사실 피곤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여기에서>에 나오는 가족 관계 개선 프로그램도 흥미롭다. 사실 작가가 제한적으로 보여준 무언가 삐걱거리는 가족 관계의 전모를 그리기란 쉽지 않다. 그런 장애물들을 뛰어 넘어, 가족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그런 감정의 소모와 갈등들을 유추해 볼 따름이다. 나는 가족에게 어떤 사람일까? 나는 나의 가족이 원하는 바를 다 수행하는 유형일까? 나와 그닥 원만하지 않은 관계 유형인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나의 아버지는 역시나 아버지로서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러셨던 게 아니었을까? 물론 누구나 인생에서 아버지는 처음이겠지만 말이지. 전부는 다 알 수 없겠지만, 이렇게 어렴풋이나마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2020316일은 프랑스에서 그 유명한 록다운, 그러니까 봉쇄령이 실시된 날인가 보다.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의료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서구 선진국들이 그렇게 우악스러운 록다운을 실시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 되돌아보면, 그 시절에도 우리는 전국적인 봉쇄령 없이 모두 일터에 악착까지 나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정부의 통제에 따라 모두 마스크를 쓰고 생업전선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지 않았던가.

 

마스크 품절과 손소독제 사재기 그리고 두루마리 휴지로 내 소중한 엉덩이를 보호하겠다는 발상이 참으로 눈물겨웠던 시절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메르스와 코로나 같은 역병의 시기도 이겨냈으니 그 무엇인들 이겨내지 못할 게 없겠다라는 자신감이 차오르기도 한다. 물론 실키 씨는 멀리 타향에서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고독 내지는 소외와 싸워야 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 때문에 억울하게 중국 사람들로 몰려 다시 차별과 혐오를 당해야 했던 사실은 좀 안타까웠다. 그게 내 탓이냐? 역병의 시기에 그런 합리적 사고와 행동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미션 임파서블이었는지도.

 

실키 씨의 요리 특강도 재밌다. 한국식 식재료를 구할 수 없었던 프랑스 앙굴렘(?) 같은 곳에서 직접 연어장이나 김밥 그리고 만두를 해먹는 패기에 박수를 보낸다. 오래 전에 자취하던 시절, 나의 끼니는 유통기한이 지난 신라면과 버거킹 와퍼가 책임졌었는데 말이지. 김밥을 한사코 스시로, 그리고 만두를 라비올리라고 부르는 프랑스 친구들의 언행이 결국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보고 들어 습득하게 된 익숙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유한한 존재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국이라면 어디에서나 파는 냉동만두를 구할 수가 없어, 모든 재료를 구해서 직접 만드는 장면이 짠했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밀대로 만두피를 직접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만두소가 터지는 슬픔과 좌절을 알랑가 몰라 그래. 얇게 편 밀가루 반죽 위에 스텐 공기로 찍어 둥그렇게 만두피를 만들곤 했었지. 나중에 공장에서 만든 기성품 만두피의 등장에 사실 좀 놀랐긴 했었다.

 

어쨌든 책 반납하기 전에 책도 다 읽고 이렇게 리뷰까지 다 써서 만족한다. 실키 씨는 요리를 창작의 고통에 비유하기도 하던데, 맞는 말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재료들을 가지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즐거움이야말로 작가들에게 주어진 사명일지도.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들을 아주 열심히 소비하면 된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거지. 하나 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잘 살자라는 문구도 좋더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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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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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어느날, 라디오에서 신간 소설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장류진 작가의 <연수>에 대한 소개였다. 마침 도서관에 가는 길이어서 빌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과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지려나 싶었지만,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대출 중이었다. 쉬이 나까지 차례가 오지 않더라. 그러다가 시간이 많이 흘러 해가 바뀌고 나서야 <연수>와 만날 수가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연수>가 소설집인지도 몰랐다. 연수는 심지어 사람 이름인가 싶기도 했고. <연수>에는 모두 6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었고, 표제작 <연수>는 자동차 연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제 제법 운전을 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지만, 나도 도로 위의 올챙이였던 시절이 있었지. 앞만 보고 달린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 때 실감했다. 일산의 코스트코 가는 길에 마구잡이로 끼어 들었다가 뒤차 운전자에게 욕을 들어 먹기도 했다. 뭐 그 땐 그랬지. 초보의 설움이라고나 할까. 개구리가 된 지금, 올챙이들을 봐주어야 하는데 그런 여유는 아직 생기지 않고 있나 보다.

 

초보 운전자를 위한 베테랑 연수 전문가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차를 몰 수 있는 자격증인 운전면허와 실전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운전면허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능숙하게 도로 위에서 차를 모는 건 아니니까. 장류진 작가는 주인공의 시선에서 올챙이 드라이버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해준다. 그래 맞아, 그 땐 그랬지. 그리고 보니 운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익숙함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지금도 밤에 낯선 길을 갈 때면 바짝 긴장하게 된다. 그래 어떤 건 시간이 해결해 주는 법이지.

 

두 번째 에피소드인 <펀펀 페스티벌>은 시대의 과제가 되어 버린 취뽀에 대한 서사다. 좋은 급여와 복리후생이 보장되는 일자리는 AI 시대에 점점 줄어 들고 있다. 우리는 워라밸을 절실하게 원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개인의 자유시간 보장 보다는 회사의 이익추구를 우선하지 않던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좋은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런 일자리를 원하는 이들은 차고 넘친다. 이런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젊은 청춘들을 무한 일자리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저격한다. 서양의 잘난 유투바 양반이 일찍이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로 묘사하면서, 유교와 자본주의의 단점들만 부각시키고 있다고 냉철하게 지적했다. 그의 정확한 분석에 할 말이 없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대동세상의 도래는 과연 한낱 꿈이란 말인가.

 

<공모>의 밑바닥에는 다같이 모여 삼겹살을 굽고 쏘주를 들이키는 방식으로 으쌰으쌰 해야 무언가 조직의 단합이 이루어진다는 고루하고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기존 회식 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사실 회사에서의 관계는 철저하게 금전적 관계로 이루어진 그 무엇이다. 회사를 다니기 때문에 같이 어울리고 우르르 몰려 나가 점심 메뉴를 고르고 또 커피도 마시고 그러는 거다. 지긋지긋한 밥벌이하는 회사라는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사라지는 순간, 그 안에서 형성된 인간관계 역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법이다. 아무리 회사라는 조직에 충성하라고 외쳐대지만, 회사는 조직원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역으로 왜 우리가 회사에 충성해야 하냐고 물어 보고 싶어졌다. 그러는 순간, 철없는 불순분자로 몰리게 되지 않을까. 지난주 월요일 밤에 내쳐 세 개의 에피소드를 읽다가, 잠깐 여러 생각이 들어서 보류해 두었다가 다시 독서의 수레바퀴를 돌리게 되었다. 다시 펴드는데 일주일이 걸릴 정도로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이야기였다.

 

여섯 개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바로 네 번째에 버티고 있는 <라이딩 크루>였다. 취미 활동과 연애 두 가지 토끼를 다 잡기 위해 자전거 동호회를 직접 만든 어느 사나이의 야심찬 도전기를 소설은 추적한다. 저자는 굳이 화자가 노련한 사냥꾼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을 포함한 다섯 명의 코어 동호회원을 바탕으로 해서, 네 명을 더 추가하려는 야심찬 계획 끝에 포섭한 새로운 동호회원이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마구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그렇지, 바로 이거지.

 

화자는 새롭게 등장한 신입 회원에 대한 경계심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다. 자신보다 더 어리고 잘생긴 청년 목수 아니 CEO의 등장으로 자신이 공고하게 쌓아 올린 크루장으로서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질 판이다. 자신이 쌓아 올린 무언가를 뿌리채 뒤흔드는 존재의 출현이 화자에게는 위협으로 간주된다. 로드바이크가 아닌 전동 모터를 사용하는 게 무슨 문제냐고 당당하게 따지는 최도헌에게 크루장은 할 말이 없다. 화자인 크루장은 페어플레이 타령을 하지만, 모터 달고 달리는 최도헌의 자전거 뒷바퀴살에 돌멩이를 집어 던진 게 자신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런 그가 과연 페어플레이 타령을 할 자격이 있던가.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들은 코미디의 연속이었다. 자기 고유의 영역에 침범한 젊은 수컷에게 무리의 리더가 짖어대는 그런 모습이랄까. 기득권을 지닌 자에게, 젊은 도전자는 조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맹렬하게 도전한다. 간만에 이런 날것들의 대결을 지면 중계로 해서 보는 그런 느낌이랄까. 과연 장류진 작가가 구사하는 서사의 가독성은 탁월했고, 소재들이 가지고 있는 현재성에 대한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말미에 펼쳐지는 두 수컷들의 어처구니없는 쌈박질에 웃은이 빵빵 터졌다.

 

<라이딩 크루>의 미친 폭발력 때문에 다음의 두 이야기들은 뭐랄까 조금 쉬어 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달까. 글쓰기에 대한 재능은 없지만, 풍부한 재력과 인생의 노련함으로 무장하고 작가 라라가 되고 싶어하던 미라 언니에 대한 단상이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과연 글쟁이들에게 글쓰기란 무엇일까? 조지 오웰이나 제임스 설터 선생이 말했듯이 우리 모두는 세상으로부터 영광과 찬사를 얻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닌가. 그에 더해 덤으로 돈까지 벌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하지만 미라 언니는 이미 스타트업의 대성공으로 돈이 아쉬운 그런 문청이 아니었다. 글을 쓰기 위해 그리스 여행도 갈 수 있는 그런 재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결핍의 부존재가 역설적으로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아니었을까. 문학에서 필요한 건, 풍요함이 아닌 어떤 종류의 결핍과 부족함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이 돈이 하나도 아쉽지 않은 이들이 구사하는 문장과 서사가 누구를 설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자기 계발이나 돈 버는 방법으로는 그들의 언행이 유효할지 몰라도, 문학 아니 누군가를 감동의 도가니탕에 몰아넣을 수 있는 글쓰기는 또 다른 이야기다.

 

결국 미라 언니의 삐뚤어진 글쓰기에 대한 처절한 욕망은 기묘한 방식의 표절을 낳게 된다. 내가 창작한 것이 아닌 것을 내가 썼다고 믿게 되는 자신 확신의 과정이 너무 안쓰러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얼마나 절박했으면 내가 쓴 게 아닌 타인의 작품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라는 동정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보니 오래전, 어느 나라에서는 타인의 작품을 필사하다 보니 몸(팔이?)이 문장을 기억해서 그대로 베꼈다는 희대의 괴설이 등장하기도 했더랬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장류진 작가의 소설들은 철저하게 현재성에 기반한 서사를 구사한다. 아니 어쩌면 이 시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소구력을 갖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동시대의 어느 곳에서나 벌어질 법한 그런 소재를 가지고 만든 맛깔스러운 여섯 접시의 요리들에 반해 폭식한 느낌이다. 그전 작품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거북알" 만큼이나 로드바이크 크루장의 무쌍한 활약상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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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2-03 08: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자목련님 리뷰읽고 살짝 찜해 둔 책인데 매냐님도 🌟 다섯을 주셨네요. 이름만 들어본 작가인데 저도 기회되면 읽어보고 싶네요.
연수 재밌을 거 같아요.
저는 초보때 물도 못 마셨다는...ㅎ

레삭매냐 2024-02-03 12:04   좋아요 2 | URL
아~ 그러셨군요.
저는 오직 직진만 했답니다 :>

간만에 만난 아주 즐거운 책이
었네요. 시간 되시면 읽어 보셔
도 좋을 듯 합니다.

새파랑 2024-02-04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연수가 그 연수 였군요 ㅋ 저는 김연수 작가님 생각을 했는데... 레삭매냐님의 독서 범위는 대단한거 같습니다. 이번에는 한국문학 이군요~!!!

레삭매냐 2024-02-05 13:31   좋아요 0 | URL
저는 연수를 사람으로 처음에
생각했었답니다 :> 작가 분도
있으셨네요 ~~~

한국 문학도 닐거야 하는데...
그동안 사서 쟁여둔 책들이
원체 많다 보니 ㅠ

자목련 2024-02-05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만큼이나 술술 잘 읽히는 리뷰입니다. 장류진 작가가 좋아할 것 같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4-02-05 13: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목련님,
살짜쿵, 자랑을 해보자면...

제 인스타에도 연수 타령을
했는데 작가 분이 오셔서
살포시 좋아요 누르시고 가
셨더라구요.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작가
이래 두 번째라는 ㅋㅋㅋ

그레이스 2024-02-05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레삭매냐 2024-02-05 13:33   좋아요 1 | URL
아주 재미지답니다 -
감히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즐거웠습니다 막 웃기구요.
얼마 만에 책을 읽다가 이렇게
빵~하고 터졌느지요.
 
커피 한 잔 더 1 커피 한 잔 더
야마카와 나오토 지음, 오지은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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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매일 같이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점심 먹고 나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재미가 일상이 되었다. 이건 마치 하나의 신성한 의식 같다고나 할까. 주식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세상만사를 다 섭렵하다.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삼총사 중의 한 명은 커피 마시며 수다떠는 재미에 회사 다닌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커피는 이런 즐거움을 전달해 주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는 관외 대출불가 만화 섹션이 있다. 몰랐었는데 4층에 아주 많은 만화들이 있었다. 시간 여유만 된다면 여기 가서 아주 하루 종일 만화를 보고 싶기도 하다. 어제도 무려 16년 전에 나온 야마카와 나오토 작가의 <커피 한 잔>이라는 만화를 찾았다. 순전히 분량이 적어서 금방 읽을 수 있겠다는 나의 얄팍한 노림수였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짧은 연작들이 몇 개 담긴 소설들이다. 불과 24시간 전에 본 만화인데 이미 기억이 많이 휘발되어 버렸다. 그 중에서 기억나는 이야기들 몇 개를 되짚어 본다. 우선 거리의 악사 양반이 들려주는 이야기. 거리에서 요즘 말로 하면 버스킹하는 청년이 있었다. 그런데 고급 세단을 타고 온 아가씨의 집사가 음악을 듣고 나서 만엔씩 청년에게 주었다. 어찌 보면 큰 돈이 아니었지만, 거리에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버스킹 청년에는 가뭄에 단비 같은 그런 비용이었다. 그 돈으로 저녁을 사 먹고, 따뜻한 커피도 한 잔 사 마신다. 그리고 더 돈을 모아서는 좋아하는 밥 딜런의 CD도 샀지 아마. 나중에는 아가씨 집에까지 가서 공연을 하고 10만엔을 받는다. 그러다가 아가씨의 발길이 끊어졌다. 집사에 말에 의하면 병약했던 아가씨가 돌아 가셨단다. 그리고 죽은 아가씨는 아예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그랬던 거다.

 

이웃에 사는 이혼녀를 사랑한 평소에 그냥 저냥 살던 청년의 이야기도 가슴을 타격한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이웃집 여자를 눈여겨 보게 된 청년. 혼자 마시는 커피를 계단에 앉은 그녀에게 나누어 주면서 사랑을 키워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도 충실하는 청년. 하지만 재결합을 요구하는 남편의 등장으로 둘의 관계는 무너진다. 그렇게 이웃 여자는 떠나가고, 그런 후에도 청년은 계단에 앉아서 자신이 직접 내린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또다른 이웃이 등장한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는 법인가 보다.

 

엄마와 별거 중인 아버지를 따라 나선 소년의 이야기도 마음에 든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이들 가고 싶은 데려 가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아들은 평소에 아버지가 가던 곳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간다진보초의 세계에서 가장 큰 헌책방 거리라는 곳을 방문한다. , 그리고 보니 나도 오래 전에 아버지와 함께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한국일보에서 나온 <타임 라이프> 2차세계대전 시리즈를 10권 사서 전철을 타고 집까지 낑낑대면서 온 적이 있었지. 누구나 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어느 이야기에서 나이가 드니 점점 시간 때우기가 힘들어진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냐 그래. 책읽기에 너튜브 감상에 그리고 화초 재배에 이르기까지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지. 역시 시간 때우기는 자기하기 나름이다. 시간을 보내는데(혹은 때우면서) 있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뱀다리] 서문부터 오류가 있었구나. 문득 생각이 나서 밥 딜런의 <커피 한 잔 더(One More Cup of Coffee (Valley Below))>가 수록된 앨범 <Desire>를 검색해 봤다. 그 앨범은 1967년이 아니라 1976년에 발매됐다. 아주 간단한 사실인데, 역자가 확인을 하지 않았나?

 

너튜브에서 노래를 찾아 들어 보니 왜 이리 애절한지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아예 듣지도 않았을 텐데 그냥 BGM으로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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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2-01 0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밥 딜런 노래 가사가...정말 아름다운 ‘시‘네요

레삭매냐 2024-02-01 13:05   좋아요 1 | URL
어쩌면 밥 딜런에게 노벨문학상
을 준 이유가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