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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평점 :
작년 어느날, 라디오에서 신간 소설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장류진 작가의 <연수>에 대한 소개였다. 마침 도서관에 가는 길이어서 빌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과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지려나 싶었지만,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대출 중이었다. 쉬이 나까지 차례가 오지 않더라. 그러다가 시간이 많이 흘러 해가 바뀌고 나서야 <연수>와 만날 수가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연수>가 소설집인지도 몰랐다. 연수는 심지어 사람 이름인가 싶기도 했고. <연수>에는 모두 6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었고, 표제작 <연수>는 자동차 연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제 제법 운전을 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지만, 나도 도로 위의 올챙이였던 시절이 있었지. 앞만 보고 달린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 때 실감했다. 일산의 코스트코 가는 길에 마구잡이로 끼어 들었다가 뒤차 운전자에게 욕을 들어 먹기도 했다. 뭐 그 땐 그랬지. 초보의 설움이라고나 할까. 개구리가 된 지금, 올챙이들을 봐주어야 하는데 그런 여유는 아직 생기지 않고 있나 보다.
초보 운전자를 위한 베테랑 연수 전문가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차를 몰 수 있는 자격증인 운전면허와 실전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운전면허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능숙하게 도로 위에서 차를 모는 건 아니니까. 장류진 작가는 주인공의 시선에서 올챙이 드라이버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해준다. 그래 맞아, 그 땐 그랬지. 그리고 보니 운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익숙함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지금도 밤에 낯선 길을 갈 때면 바짝 긴장하게 된다. 그래 어떤 건 시간이 해결해 주는 법이지.
두 번째 에피소드인 <펀펀 페스티벌>은 시대의 과제가 되어 버린 취뽀에 대한 서사다. 좋은 급여와 복리후생이 보장되는 일자리는 AI 시대에 점점 줄어 들고 있다. 우리는 워라밸을 절실하게 원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개인의 자유시간 보장 보다는 회사의 이익추구를 우선하지 않던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좋은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런 일자리를 원하는 이들은 차고 넘친다. 이런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젊은 청춘들을 무한 일자리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저격한다. 서양의 잘난 유투바 양반이 일찍이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로 묘사하면서, 유교와 자본주의의 단점들만 부각시키고 있다고 냉철하게 지적했다. 그의 정확한 분석에 할 말이 없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대동세상의 도래는 과연 한낱 꿈이란 말인가.
<공모>의 밑바닥에는 다같이 모여 삼겹살을 굽고 쏘주를 들이키는 방식으로 으쌰으쌰 해야 무언가 조직의 단합이 이루어진다는 고루하고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기존 회식 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사실 회사에서의 관계는 철저하게 금전적 관계로 이루어진 그 무엇이다. 회사를 다니기 때문에 같이 어울리고 우르르 몰려 나가 점심 메뉴를 고르고 또 커피도 마시고 그러는 거다. 지긋지긋한 밥벌이하는 회사라는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사라지는 순간, 그 안에서 형성된 인간관계 역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법이다. 아무리 회사라는 조직에 충성하라고 외쳐대지만, 회사는 조직원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역으로 왜 우리가 회사에 충성해야 하냐고 물어 보고 싶어졌다. 그러는 순간, 철없는 불순분자로 몰리게 되지 않을까. 지난주 월요일 밤에 내쳐 세 개의 에피소드를 읽다가, 잠깐 여러 생각이 들어서 보류해 두었다가 다시 독서의 수레바퀴를 돌리게 되었다. 다시 펴드는데 일주일이 걸릴 정도로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이야기였다.
여섯 개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바로 네 번째에 버티고 있는 <라이딩 크루>였다. 취미 활동과 연애 두 가지 토끼를 다 잡기 위해 자전거 동호회를 직접 만든 어느 사나이의 야심찬 도전기를 소설은 추적한다. 저자는 굳이 화자가 노련한 사냥꾼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을 포함한 다섯 명의 코어 동호회원을 바탕으로 해서, 네 명을 더 추가하려는 야심찬 계획 끝에 포섭한 새로운 동호회원이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마구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그렇지, 바로 이거지.
화자는 새롭게 등장한 신입 회원에 대한 경계심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다. 자신보다 더 어리고 잘생긴 청년 목수 아니 CEO의 등장으로 자신이 공고하게 쌓아 올린 크루장으로서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질 판이다. 자신이 쌓아 올린 무언가를 뿌리채 뒤흔드는 존재의 출현이 화자에게는 위협으로 간주된다. 로드바이크가 아닌 전동 모터를 사용하는 게 무슨 문제냐고 당당하게 따지는 최도헌에게 크루장은 할 말이 없다. 화자인 크루장은 페어플레이 타령을 하지만, 모터 달고 달리는 최도헌의 자전거 뒷바퀴살에 돌멩이를 집어 던진 게 자신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런 그가 과연 페어플레이 타령을 할 자격이 있던가.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들은 코미디의 연속이었다. 자기 고유의 영역에 침범한 젊은 수컷에게 무리의 리더가 짖어대는 그런 모습이랄까. 기득권을 지닌 자에게, 젊은 도전자는 조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맹렬하게 도전한다. 간만에 이런 날것들의 대결을 지면 중계로 해서 보는 그런 느낌이랄까. 과연 장류진 작가가 구사하는 서사의 가독성은 탁월했고, 소재들이 가지고 있는 현재성에 대한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말미에 펼쳐지는 두 수컷들의 어처구니없는 쌈박질에 웃은이 빵빵 터졌다.
<라이딩 크루>의 미친 폭발력 때문에 다음의 두 이야기들은 뭐랄까 조금 쉬어 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달까. 글쓰기에 대한 재능은 없지만, 풍부한 재력과 인생의 노련함으로 무장하고 작가 라라가 되고 싶어하던 미라 언니에 대한 단상이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과연 글쟁이들에게 글쓰기란 무엇일까? 조지 오웰이나 제임스 설터 선생이 말했듯이 우리 모두는 세상으로부터 영광과 찬사를 얻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닌가. 그에 더해 덤으로 돈까지 벌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하지만 미라 언니는 이미 스타트업의 대성공으로 돈이 아쉬운 그런 문청이 아니었다. 글을 쓰기 위해 그리스 여행도 갈 수 있는 그런 재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결핍의 부존재가 역설적으로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아니었을까. 문학에서 필요한 건, 풍요함이 아닌 어떤 종류의 결핍과 부족함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이 돈이 하나도 아쉽지 않은 이들이 구사하는 문장과 서사가 누구를 설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자기 계발이나 돈 버는 방법으로는 그들의 언행이 유효할지 몰라도, 문학 아니 누군가를 감동의 도가니탕에 몰아넣을 수 있는 글쓰기는 또 다른 이야기다.
결국 미라 언니의 삐뚤어진 글쓰기에 대한 처절한 욕망은 기묘한 방식의 표절을 낳게 된다. 내가 창작한 것이 아닌 것을 내가 썼다고 믿게 되는 자신 확신의 과정이 너무 안쓰러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얼마나 절박했으면 내가 쓴 게 아닌 타인의 작품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라는 동정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보니 오래전, 어느 나라에서는 타인의 작품을 필사하다 보니 몸(팔이?)이 문장을 기억해서 그대로 베꼈다는 희대의 괴설이 등장하기도 했더랬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장류진 작가의 소설들은 철저하게 현재성에 기반한 서사를 구사한다. 아니 어쩌면 이 시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소구력을 갖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동시대의 어느 곳에서나 벌어질 법한 그런 소재를 가지고 만든 맛깔스러운 여섯 접시의 요리들에 반해 폭식한 느낌이다. 그전 작품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거북알" 만큼이나 로드바이크 크루장의 무쌍한 활약상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