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트] 만화 병자호란 상.하 세트 - 전2권 ㅣ 만화 병자호란
정재홍 지음, 한명기 원작 / 창비 / 2018년 7월
평점 :
딱 10년 전에 한명기 작가의 역사평설 <병자호란>을 읽었다. 그리고 십년이 지난 뒤에 만화로 다시 만나게 됐다. 파란만장한 17세기 중원의 왕조교체기의 기로에서 줄타기 외교를 해야했던 과거는 21세기 한반도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다. 과거에는 비극이었고, 지금은 어떤지 아직 판정이 나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더더욱 주목이 된다고 해야 할까.
6년 전에 나온 만화의 존재는 아예 모르고 있다가, 오늘 도서관에 들렀다가 알게 됐다. 어제 우연히 너튜브 역사채널 그리고 진주박물관 채널을 통해 병자호란에 대해 다시 한 번 복습(?)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아주 좋은 예습이 아니었나 싶다.
개인적으로 조선 왕조 3대 찌질한 군주로 선조-인조-고종을 꼽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는 인조가 아닌가 싶다. 임진왜란으로 파천-몽진을 클리어한 선조의 손자 능양군은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는 반정을 성공시켜 임금이 되었다. 철저하게 서인으로 구성된 인조 정권은 재조지은의 나라 명나라에게도 정권 초기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고, 이괄의 난으로 대표되는 것처럼 반정 공신 사이의 알력도 다스리지 못했다. 인조는 세 번이나 파천하는 무능의 화신 같은 군주라고 판단된다.
건주여진 출신의 누르하치가 칠대한을 슬로건으로 걸고, 1615년 팔기군을 창설해서 1618년부터 상국 명나라를 상대로 요동 공략에 나선다.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명나라의 압도적인 국력 앞에 만주족의 후금은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막대한 군자금과 인력들을 소모시킨 명나라에게 후금의 침공은 결정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 만력제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멸망할 뻔한 국난을 극복하는데 성공한 조선은 당연히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여기고 달자의 나라 후금을 오랑캐로 철저하게 멸시했다. 그러지 않아도 성리학적 질서에 입각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에게 후금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금수 같은 그런 존재였다.
후금도 이런 사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주적은 조선이 아닌 명나라였기에 우선 요동을 집어삼키고 산해관을 돌파하는데 집중했다. 명나라 조정의 요청과 강압으로 광해군의 조선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619년 사르후 전투에 조선 정예 조총수들을 투입했다. 사실 아무리 명나라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지만, 실리주의자 광해군은 자국의 정예병들이 멀리 만주 땅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죽어나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결국 요동의 정예군들이 투입된 사르후 전투를 필두로 한 전투에서 명의 사로군들이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전쟁의 주도권은 후금에 넘어가게 된다.
반세기에 가까운 만력제 연간에 곪을 대로 곪은 명나라는 이미 승승장구하는 후금의 철기병들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그나마 명나라의 마지막 영웅 원숭환이 영원성 전투에서 홍이포로 누르하치에게 중상을 입히고, 결국 죽게 만들면서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4대 버일러 출신의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후계자가 되어 보다 적극적으로 중원 공략에 나서게 된다.
이런 중원의 사정을 외면한 채,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던 인조 정권의 운명은 훗날 대청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는 홍타이지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이미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9년 전인 1627년 정묘호란 당시 홍타이지는 다른 버일러 출신의 아민을 파견해서 조선에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다. 후금의 요청은 간단했다. 명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들과 무역 거래를 하고, 형제 관계를 맺자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거국적 관점에서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위해 후방을 안전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조는 두 번째 파천을 하면서, 강화도로 피신해서 장기전을 두려워하던 후금으로부터 화친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런 안일한 정책을 훗날 병자호란 당시에도 써먹으려고 하다가 아주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백성에게 인심을 잃은 인조정권은 임진왜란 당시처럼, 사방에서 근왕군이 일어나 조정 보위에 나서지 않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지 않았을까. 해마다 계속되는 기근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휼하고,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정권이 무슨 민심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더 큰 화근은 숭명배청 사상에 젖은 다수 척화파들이 조정을 주무르게 되면서, 결국 홍타이지 군대의 두 번째 침공인 병자호란은 피할 수 없는 상수가 되어 버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아무런 대책이나 실력도 없이, 무조건 후금/청나라를 달자(오랑캐)의 나라로 규정하고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사신의 목을 베자는 주장이 가당키나 했단 말인가. 정작 청나라의 침공이 시작되고 나서, 주전과 화전 주장를 거듭하다가 파천과 몽진 타이밍을 놓치고 남한산성으로 꼴사납게 도주했다가 삼전도의 치욕을 겪게 되지 않았던가.
어제 너튜브에서 본 1636년 청나라의 특수 기동작전에 대한 분석은 그동안 병자호란에 대한 생각의 틀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명나라를 상대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는 조선을 상대로 장기전을 펼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조건 최단기간 내에 조선을 굴복시켜야만 했다. 그들은 이미 조선 조정의 대전략을 알고 있었다. 외적의 침입이 시작되면, 특히 수군에 약한 청나라를 상대로, 인조 정권은 강화도로 몽진해서 장기전 모드에 돌입할 거라는 것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삼남의 근왕군이 집결해서 청군을 상대하게 될 거라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조산의 사정을 잘 아는 호부승정 마푸타를 지휘관으로 삼아 300명의 특수 기동대를 조직해서 선발대로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청군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 수비대가 산성 위주의 방어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많은 시간과 병력이 소모되는 공성전을 피하고 무조건 한성으로 내달렸다. 강건하고, 잘 먹지 않아도 장거리 기마 운용이 가능한 만주마를 동원해서 하루에 90KM를 주파하는 신속 기동전으로 단 6일 만에 마푸타의 선발대는 한성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이른바 충격과 공포 전술이 아니던가. 홍타이지가 이끄는 3만의 청군 본대도 남하하면서 조선군은 총체적 난국에 빠져 버렸다. 300기의 바야라라고 불리는 만주 철기 최정예부대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미 그들은 누르하치 시절, 요동 공략전에서 단 20기로 수십배에 달하는 명군을 격파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신속한 청군의 기동전 앞에,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도주하자는 계획을 실기하고 결국 남한산성에서 농성전을 기획했다가 파국에 자처하게 됐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오로지 요행수만 바라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던 인조 정권은 46일 간의 농성 끝에 결국 홍타이지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한 겨울 산성 수비에 나선 병사들을 입힐 피복이 없어 거적을 뒤집어쓰고 병사들은 보초를 서야 했다. 군량미 비축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임금 이하 모든 장병들이 굶으면서 적을 상대해야 했다.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얻은 교훈에서 배운 청군은 성능 좋은 홍이포로 남한산성에 정확한 포격을 개시했다.
전장의 상황이 이럴진대, 주전을 주장하는 대신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던 강화도마저 청군의 수중에 들어간 것도 모르고 결사항전을 앵무새처럼 주장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나라를 망국으로 인도한 무리가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진 화이관이라는 맹목적 세계관에서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선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주화파 최명길은 최명길 대로 국가와 조정 그리고 군주를 위해 최선의 방책을 도모했고 또 반대편에 서 있던 예조판서 김상헌 역시 자신의 입장에서 국난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척화파들은 청군이 화친에 반대한 인사들을 선발해서 자신의 진영에 보내라고 했을 때, 자신들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자청해서 적진으로 향했다. 이른바 척화 삼학사인 홍익한, 윤집 그리고 오달제들은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도, 조선 사대부들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이들이야말로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한 인조 같은 무능한 군주에 비하면 조선 선비의 귀감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결국 대전쟁을 초래한 위정자들은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구차하게 정권과 목숨을 유지하는데 성공했지만, 청군에게 약탈당하고 심지어 인신이 구속되어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의 신세는 너무 비참했다. 군주인 인조를 대신해서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인질이 되어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강빈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찌질이 군주 인조는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소설 <남한산성>은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 역사평설 <병자호란>도 10년 전에 읽었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로 만들어진 <남한산성>을 볼 차례인가. 역사는 희비극으로 반복된다고 들었는데, 다시 한 번 격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우리의 현 위치는 어디인가 그리고 우리의 방향성은 어떤 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388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주국가로서 생존은 쉽지 않은 미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