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감독
에비사와 야스히사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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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가 한창이다. 특히나 극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포스트시즌에서는 단 한 번의 실책이 승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그야말로 미친 활약을 보여 주었던 뉴욕 메츠의 대니얼 머피가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승리르 캔자스시티 로열즈에게 헌납하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렇다, 야구는 그렇게 만만한 경기가 아니다.

 

에비사와 야스히사 작가의 <야구 감독>의 원제는 간토쿠 그러니까 ‘감독’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뉴욕 양키즈가 있다면, 일본 야구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거성이 있다. 바로 이 팀에서 감독과의 불화로 쫓겨난 엔젤스라는 가상팀의 코치가 시즌 도중에 감독으로 승격해서, 패배주의에 물든 팀을 개선해서 V9에 빛나는 만년 우승예상팀인 센트럴리그의 자이언츠, 앞으로 교진이라고 호칭하겠다,에 도전하는 일종의 복수극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야구는 그렇게 만만한 경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미묘한 차이가 승리와 패배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곤 한다. 주심의 콜 하나가, 그리고 선수들의 실책 또는 정말 멋진 플레이 하나가 연패로 작동할 수도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 하나에 인생이 달렸다고 생각할 정도라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소설로 성공하기가 더 힘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보니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야구 소설이 있었나 싶다.

 

교진 출신의 과거 명유격수 히로오카 타쓰로는 올림픽건설이 모회사로 있는 센트럴리그 엔젤스의 코치다. 엔젤스는 만년 하위팀으로 같은 리그의 교진과 경기할 때나 간신히 원정팬들의 힘으로 구장을 채울 수 있는 그런 팀이다. 만연한 패배주의로 승리의 기쁨조차 모르고, 선수들은 경기에 집중하는 대신 술과 담배 그리고 마작할 궁리만 하고 있다. 심지어 히로오카의 전임 감독은 선발 라인업조차 점쟁이에 의존할 정도라고 하니 말 다했다. 그러니 엔젤스의 구단주 오카다 시로가 감독을 자르는 건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 히로오카가 감독이 되긴 했지만, 감독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시즌도 다 지나간 마당에 누가 신출내기 감독의 말을 따른단 말인가. 게다가 명색이 프로선수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선수들이 밥값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한 술 더 떠서 차기 감독자리를 노리고 있는 엔젤스 출신 선수이자 선임 코치인 다카야나기는 선수들을 조장해서 팀의 기강을 잡으려는 히로오카의 리더십에 번번이 반기를 든다. 그야말로 안되는 팀의 전형이다.

 

우리 SK 와이번스의 전 감독이었던 야신이라 불리는 김성근 감독의 경우가 보여주듯, 흔히 일본 야구는 관리야구라고 불린다. 특히 그 정점에 선수들의 개성보다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지휘하는 스타 감독이 즐비한 교진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선수들은 팀이라는 배를 지휘하는 감독이 조종하는 로봇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감독이 지휘하는 작전에 아무리 스타 선수라고 하더라도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 기본 룰이다. 물론 감독마다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모든 스포츠 경기는 이기는 것이야말로 지고한 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또 한편으로 야구는 공 한 개 한 개가 기록되는 경기이기도 하다. 시즌이 끝나고 성적에 따라 연봉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인 타이틀이 중요하다. 시즌 막판에 도루왕에 도전하던 다카하라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휘자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 타이틀보다 팀의 승리에 공헌하는 선수가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기지 못하면 매일 매일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 감독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히로오카의 본격적인 시즌은 다음 시즌이었다. 구단주와 회사 중역들을 통해 감독의 자리르 흔들려는 음모는 구단주 오카다 시로의 단호한 히로오카에 대한 지지선언으로 분쇄되고, 냉정한 고과산정에 따른 연봉재협상으로 선수들은 가히 충격과 공포 상태로 돌입한다. 아무리 주전선수라고 하더라도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트레이드 시켜 버리겠다는, 그리고 그동안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용병 허드슨 마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 시켜 버린 현실 앞에서 선수들은 감독의 지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출신 좌완 강속구투수 찰스 헤밍웨이를 영입하고, 2군에서 뛰던 하고를 유격수로 승격시키면서 히로오카는 다음 시즌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용병 선수들은 통역을 통해 대화를 시도했는데,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헤밍웨이의 에이스 선언에 다들 놀랄 따름이다. 사실 일본 야구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야구 감독>의 주석에 달린 나가시마와 왕정치 그리고 장훈 같은 대타자를 비롯해서 에가와 같은 투수에 이르기까지 일본 프로야구사를 주름 잡은 대선수들이 실명이 등장하는 재미는 기대이상이었다.

 

선수시절 동료였던 캐스터 출신의 와타카이까지 영입해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교진과의 개막 3연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엔젤스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리라고 했던가 팀의 중심이었던 다카하라가 부상을 당하고, 선수들이 히로오카의 지나칠 정도로 꼼꼼한 작전 지시와 사인에 질리기 시작하면서 팀은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한다. 연승 가도를 달리며 리그 수위 경쟁을 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막상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하니 아무런 대책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다카야나기가 히로오카를 침몰시키기 위해 승부조작 스캔들까지 일으키면서 엔젤스 호는 침몰 직전까지 내몰리게 된다. 과연 히로오카는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에비사와 작가는 거의 야구의 모든 것을 이 짧은 소설 한 편에 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이기는 팀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론과 실재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히로오카가 시즌 레이스 중에 경험했듯이, 어떤 순간에는 불가항력적인 요소들이 튀어 나오기 마련이다. 교진/자이언츠 같은 강팀은 어떤 방식으로든 꾸역꾸역 승리를 챙겨 가지만, 엔젤스 같은 약팀은 그런 위기상황에서 속절 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또 한편으론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의 성적만으로 감독을 경질하는 방법만은 능사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카다 구단주는 그렇기 때문에, 히로오카를 위해 방패막이를 자처하고 나서지 않았던가. 지속적인 투자와 꾸준한 인내는 어쩌면 바로 성적으로 직결되는 프로 세계와 상이한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광대처럼 저글링해야 하는 감독 자리야말로 바늘방석 같은 자리가 아닐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야구 감독 자리를 꿈꾸는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자리가 매력적이라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보통 야구 경기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부른다. 아무리 형편없는 스코어 차이로 지고 있더라도 결과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패배가 역력해 보이는 상황에서 극적인 역전에 성공했을 때의 기분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 때 야구에 미쳐 야구장 가는 낙에 살았던 사람의 증언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에비사와 야스히사의 정교한 야구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옛시절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응원하던 팀이 86년 짜리 저주를 깨고 난 다음에는 그전만큼 야구에 흥미를 가지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한 번 야구팬은 영원한 야구팬이다. 이제 곧 핫스토브 시즌이 시작되는데, 이번 비시즌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이 올드팬의 감상을 자극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리딩데이트] 2015년 10월 31일~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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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 처음 만나는 스페인의 역사와 전설
서희석.호세 안토니오 팔마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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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유럽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이제는 그렇게 열광하지 않게된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이탈리아에 너무 가보고 싶었다. 이제 이탈리아 다음으로 가보고 싶은 나라는 스페인이다. 전문 역사가가 아닌,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좋아서 스페인에 머물면서 스페인 역사와 신화에 대해 서희석 씨가 쓴 <유럽의 첫 번재 태양, 스페인>은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스페인 역사의 입문서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서유럽사에서 고대 로마 제국이 빠지면 안되는 것처럼 스페인 역시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가 세웠다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는 고대 스페인의 중심지였던 모양이다. 바로 그 세비야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가 파노라마처럼 휘몰아치니 말이다. 레반트 지역에 기반을 두었던 페니키아 인들은 그리스 인들과 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며 당시 세상의 끝이라고 알려졌던 스페인까지 진출한 모양이다. 페니키아 인들에 뒤를 이어 지중해 해상 무역을 독점한 카르타고 인들이 후속타자였다. 스페인의 물산과 은광은 북아프리카에 자리 잡은 본국 카르타고의 화수분이었던 모양이다.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 해상국가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까지 막아낸 로마 제국의 부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고대사의 흐름으로 보인다.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등장한 공화정 로마는 제국으로 이행되어 가면서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입과 그에 대비하기 위한 재정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 중에서도 갈리아와 더불어 히스파니아는 로마 속주 중의 우등생이었다. 심지어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같은 로마 제국 전성기의 황제들도 배출해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좋은 시절이 가고, 고대 말기로 가면서 서고트족과 동고트족 그리고 게르만족의 연이은 침입 앞에 결국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은 서고트족이 쥐게 되었다. 그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제국에 공인된 기독교 역시 이베리아 반도에 유입되었다. 역설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들은 정통 가톨릭이었던 것에 반해, 지배계급인 서고트족의 귀족들은 정통 가톨릭 교리의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이단시된 아리우스 파였다는 사실이다. 이 시대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스페인 출신의 산 이시도로는 형 레안드로의 뒤를 이어 세비야의 대주교가 되었는데, 고대 스페인 역사에 대해 걸출한 저작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가 없었다면 스페인 역사는 공백으로 남겨 두어야 할 부분들이 많았을 지도 모르겠다.

 

세습제 왕조국가라기 보다는 귀족들의 추대에 의해 왕조가 유지되던 서고트왕국의 마지막 왕은 로드리고로, 그가 자신의 딸을 범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세우타 총독 돈 훌리안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 세력을 끌어 들여 결국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세력은 전멸하기에 이른다. 고대 이래 각종 물산이 풍부했던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는데 성공한 이슬람 세력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까지 세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했지만, 732년 투르-프와티에 전투에서 칼 마르텔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1492년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교두보였던 그라나다가 함락되기 전까지 780년간 이베리아 반도는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다고 책은 자세하게 서술해 준다.

 

산 이시도로에 이어 우리에게는 <엘 시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에 대한 신화에 대해서도 저자는 냉정하게 분석해 준다. 평민에서 가톨릭 세계를 수호한 기독교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지만, 사실과 상당 부분 다르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로드리고 디아스는 11세기 카스티야 귀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페르난도 1세의 휘하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왕의 뒤를 이은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의 왕위 다툼 과정에서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되는 알폰소 6세에게 찍히는 바람에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자신의 능력을 높이 산 사라고사 타이파의 이슬람 군주 알무타만에게 충성을 다하기도 했다. 뛰어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엘 시드는 발렌시아 지역을 정복하고, 아예 자신의 영지로 만들어 버렸다. 11세기 후반, 스페인 정복에 나선 보수 이슬람 세력인 알모라비데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비로소 엘 시드의 신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기독교 영웅이라기보다, 시류에 편승한 세일즈맨에 가까운 인물이었노라고 이 책에서 그를 평하고 있다.

 

8세기 초반, 이슬람 세력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을 용이하게 했던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톨릭 통치 아래 박해받던 유대인의 협력과 세력이 미흡하던 초기 이슬람의 관용적 태도에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12세기 알모아데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해서 타이파 소왕국으로 나뉜 이슬람 세력을 다시 통일하면서 기세를 올리기도 하지만, 카스티야 왕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알안달루스의 영광을 재현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또 스페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유대인 박해도 고대 이래 계속되어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재정복을 완성한 1492년에 대대적인 강제 개종과 추방 전에도 서고트 족 시대에도 그리고 세비야 유대인 대학살 같은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왕조 중심의 역사 이외에도 서희석 작가는 항간에 떠도는 민간 전승과 전설에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준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도 사실은 스페인이 원조였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됐다.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다툼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 세력을 축출하는데 1세기나 늦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스페인 알안달루스 시절의 긍정적인 면으로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헌의 번역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이슬람 지배층의 노력으로, 훗날 르네상스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 문화의 전성으로 이교 문화로 단정되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재정복으로 마무리되는 스페인 역사가 상대적으로 아쉬웠다. 좀 더 나가서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다뤘으면 어떨까 싶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소개된 스페인 역사가 정사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정통 역사를 줄기로 해서 그에 얽힌 재밌는 야사와 다양한 전설을 소개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동안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 같은 스페인의 대도시를 가보고 싶었는데, 그보다 진짜 스페인을 만날 수 있는 세비야나 코르도바(쿠루투바)에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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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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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출근하는데 시청 앞에 조성해둔 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꽃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 중에서 유난히 흰색 소국만 다 시들어 죽어 있었다. 죽은 소국 때문인가,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꽃도 그렇듯이 우리네 인생도 유통기한이 다 되면 흙으로 돌아가겠지 하는 생각에 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말에 읽은 정용준 작가의 소설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는 유난히 그런 죽음과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 같다.

 

모두 8개의 단편 소설이 들어 있는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는 군 의문사와 관련된 소설이 두 개나 들어있다. 건군 이래 해마다 1개 대대급 병사들이 군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갔다는 뉴스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용준 작가는 <이국의 소년><안부>에서 바로 이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전자에서는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로 국가유공자인 아버지의 숨기고 싶은 과거를 의식 있고 정의로운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의 현재에 대입시키고 있다. 이 정의로운 청년은 병영에서 총기자살을 시도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병상에 누워 있다. 독자는 아버지의 독백을 통해, 남조선 용병으로 베트남에 파견된 아버지가 타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신념 아래 무슨 일을 했는지 담담한 어조로 고발하고 있다. 그 업보는 정의로운 아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일까. 그 무게가 감당하기 힘들어 보인다.

 

<안부>에서는 6년 전에 의문사당한 아들 이준 소위를 잊지 못하는 어머니의 초상이 담겨 있다. 자식으로서 가장 큰 불효가 부모보다 먼저 가는 것이라고 했거늘, 금지옥엽 같은 아들을 그렇게 잃은 아버지마저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겠다며 쫓아다니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추락하는 이중의 비극이 찾아온다. 죽은 아들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시스템의 조직적 은폐와 대중의 무관심 그리고 쏟아지는 경멸의 시선에 버거울 따름이다. 종교에서 의지가지를 찾아보려고도 하지만 그 역시 난망하기만 하다. 용서하라며 그리고 잊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에, 그럼 죽은 사람은 죽어야 하냐며 어머니는 울부짖는다. 그들에게 과연 진정한 위로와 격려는 어떤 형식이어야 하는지, 종교의 힘으로도 그리고 신의 대리인도 기피하는 죽음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개들>은 기묘한 이야기다. 역시 군대 시절 목격한 남한산성에서 진지구축 공사를 하다 개도축장에서 본 죽은 개들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주 어려서 고기가 귀하던 시절, 무슨 고기인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그렇게 먹던 고기가 개고기였다는 사실을 아주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지금은 개고기를 먹지 않지만, 아는 동생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된 개지옥 시리즈를 보고서는 그렇게 좋아하던 보신탕을 일절 끊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연상됐다. 참고로 그 동생은 애견가이기도 하다. 개사랑과 먹거리로서의 사랑은 소용되는 지갑 속의 현찰의 두께 정도이려나. 사철탕과 건강원에서 소비되는 개들은 어디서 온 걸까. 그리고 식육으로서 저울에 올라가는 그네들의 살점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작가는 마치 한 편의 리포트를 보여주듯 그렇게 상세하게 기술해준다. 주인공 나는 유사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곰사장에게 고아원에서 픽업되어 온 기술자이자 동업자다. 멀리 서양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세대와 아버지 세대의 불화와 반목은 해결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던가. 불화는 폭력을 낳고, 폭력은 그 이상의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엘리베이팅된 불화의 연쇄폭력의 종착점은 고통을 모르고 자라 기계처럼 작동하는 나의 유일한 친구 병구의 죽음으로 촉발된 곰사장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고 개들의 간식거리다. 그래서인지 곰사장의 죽음은 이미 식육으로 변해 버린 개들처럼 무덤덤하게 그렇게 다가올 뿐이다.

 

표제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도 오래전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는 어머니를 살해한 아버지의 자식이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으며, 이모의 아들이 되어 무심하게 생을 살아왔다. 그의 삶에서 적당한 선과 거리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암묵적 약속이다. 그는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환자들의 신장 투석을 담당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감옥에서 있어야 할 아버지가 도저히 감옥에서는 치유할 수 없는 신장 투석 건으로 일시 형집행으로 가석방되어 화자가 일하는 병원에 와서 투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화대상자의 병을 고쳐 다시 형집행을 시키겠다는 당국의 설정도 우습지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불쑥 우리는 그래도 혈육이 아니냐며 말을 건네는 장면은 희비극에 가깝다. 몸의 유독 물질을 제거하는 기능을 맡은 신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투석 과정을 통해 피를 필터에 걸려 맑게 하지만 우리가 살기 위해 섭생하는 과정 자체가 다시 피를 오염시킨다는 사실이 영원히 반복되는 무한 루프의 그것이 떠오른다. 삶에 대한 공복으로 주인공은아버지가 탐하는 계란을 두 쪽으로 내어 먹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마지막에 실린 <새들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네>는 어느 날 갑자기 9달된 딸아이를 남겨두고 훌쩍 세상을 떠나 버린 누이에 대한 제망매가다.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에게 얹혀 무위도식하며 언젠가 소설가가 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나는 아버지도 모르는 조카딸이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아이를 돌보다 어두운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그런 존재로 그려진다. 사고사로 처리된 누이는 가해자인 트럭운전사 말에 의하면, 고의로 길에 뛰어 들었다고 하는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걸까. 이른 치매기와 유방암 수술로 한쪽 가슴을 잃은 어머니가 과연 누이가 남긴 재인이를 돌볼 수 있을까? 소설 속의 화자는 내내 재인이에게는 가슴이 온전한 엄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대한 마땅한 대안은 없어 보인다. 대학에서 러시아를 전공해서일까, 그는 이웃에 사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마디나에게 기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녀 남편의 황당한 제안은 혀를 내두르게 만들지만 말이다.

 

소설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가족이라는 사회의 최소 단위에서 벌어지는 어쩌면 외면하고 싶은 서사들의 모듬회라고 해야 할까. 정용준 작가가 선보인 8가지 이야기들은 무지개 플러스 원 같은 빛깔을 뿜어내며 독자를 유혹한다. 그렇게 작가의 신작 소설집에는 온통 죽음과 트라우마의 페이소스 냄새가 묻어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가족 특히 아버지와의 고질적 불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주가드(Jugaad;즉흥적 창의력) 같은 혁신적인 방법으로도 탈출할 수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런데 묘하게 공감대가 만들어지니 그것도 신기하다. 전작 <바벨>에 비해 구름에서 내려와 지상에 안착했다고 해야 할까. <바벨>이 무언가 뜬구름 잡는 그런 작품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은 삶의 다양한 방식에 여러 가지 단상을 담은 무척이나 구체적인 그런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텔레비전 스크린에 등장하는 오감을 자극하는 그런 막장드라마보다 훨씬 더 현실감 넘치면서도 주변의 누군가에게 당장이라도 일어날 법한 그런 이야기들이 책장을 넘기는 손길을 분주하게 만든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이번 주말 독서모임에서 더 들어봐야겠다. 언제나 그렇듯, 다른 이들과 독서체험을 공유하는 것은 책읽기의 또다른 즐거움이다.

 

[리딩데이트] 20151017~18일 오후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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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5-11-15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잘생긴 리뷰! 알라딘 정기 메일에 님 리뷰가 뜨기에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ㅋ
나도 곧 올려야징! >ㅅ < (그나저나 좋아요`가 안 눌러져서 슬픔 ㅠ ㅜ 에러 뜨네요)

레삭매냐 2015-11-16 11:54   좋아요 0 | URL
북플에 가입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램프의 요정에서 보니 더 반갑습니다.
 
연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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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아주 재밌다. 어떤 책은 읽기 전에 감이 오는 책이 있다. 내게는 오늘 새벽에 다 읽은 김호연 작가의 <연적>이 그랬다. 연적? 서예할 때 쓰는 도구인 연적을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소설의 제목은 그 연적이 아니라 한 여자를 사랑한 연적(戀敵)이었다. 시나리오 작가, 만화 기획자 그리고 출판 편집자라는 다양한 직업군을 거쳐 마침내 2013년 데뷔작 <망원동 브라더스>를 발표하면서 본격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는 김호연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영화화 될 전망이라는 전작에 이어 <연적>도 비슷한 궤적을 그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했던 여자의 유골함을 들고, 그녀를 평안하게 보내 주기 위한 길에 나선 두 남자의 이야기. 듣기만 해도 존쿨하지 않은가 말이다.

 

네크로필리아도 아니고, 죽은 여자를 잊지 못해 낯선 여행길에 나서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로드무비 스타일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던가. 게다가 장소가 다 그림 같은 곳들이다. 어쩔 수 없는 작년 세월호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안산의 장례식장에서 출발해서, 남쪽바다의 대표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 남해와 여수를 거쳐 죽은 한재연이 그렇게 사랑하던 제주도의 이름 모를 ‘오름’을 찾는 여정은 상상만 해봐도 멋진 그림이 나온다. 어쩔 수 없이 영화화와 관련돼서, 이야기의 화자 고민중 역은 신하균에 제격이라는 느낌이다. 소설에서 고민중이 근육돼지라 부르며 짐승남에 가까운 앤디 강 혹은 강병균 역은 누가 맡으면 제격일지 아직 상상이 가지 않는다.

 

30평생을 모태솔로 살다가 자신이 다니는 출판사에 소설을 투고하러 온 한재연을 만나 짧은 연애를 즐기던 고민중은, 재연의 소설 출간이 엎어지면서 그녀와의 관계도 끝이 나게 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재연의 부고를 문자로 받게 된다. 아무리 간략화된 시절이라고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조차 문자로 처리된다는 처연한 사실이 문득 서글퍼졌다. 5년간 부지런히 다닌 출판사 팀장으로 회사일도 봐야 하는 그는 출근길에 부고 문자를 받고 잠시 결정장애에 시달린다. 문상 가고, 부의금을 내지 않으면 내내 새로운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겠지. 위의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내가 소설을 읽고, 재구성한 것이지 이야기의 진행은 순서가 다르니 이해하시도록. 어찌어찌하여 1년이 지나, 그녀의 기일에 다시 만난 앤디 강과 의기투합해서 그녀의 유골을 훔쳐내는데 성공하고 두 남자는 그녀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적과의 동침같은 여행길에 나서게 된다.

 

주인공은 이제 가고 없지만, 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내의 갈등은 뻔히 예고된 사실이다. 게다가 김호연 작가는 앤디 강은 근육질의 짐승남으로 주먹 쓰는 일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건달바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고민중은 먹물이라는 클리셰이로 설정해 두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언제라도 물리적 대결을 벌이지 않으리라는 최소한의 안전판이라고 해야 할까.

 

남해와 여수 그리고 제주를 돌며 고민중과 앤디 강은 줄기차게 술판을 벌인다.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된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과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공통적인 추억을 안주 삼아 조금씩 동질감을 느끼고, 공감대를 형성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연이 발표하려고 노력했던 <비 마이 고스트>의 시나리오가 문 감독이라는 악당에게 가로 채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선 복수에 나서게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사실 개인적으로 남해와 여수 그리고 제주로 이어지는 여정은 안정적이면서 소설의 핍진성을 제대로 짚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마지막에 해당하는 서울편은 좀 사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독자는 <연적>을 읽으면서 작가가 재연의 죽음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전해 주리라고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 부분은 블러링한 이미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대신 권선징악이라는 클래식한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그리고 그녀의 영전에 출간되지 못한 <비 마이 고스트>를 바친다는 클리셰이는 좀 아쉬울 따름이다. 결말에서 화끈한 한 방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된 소설의 원심력은 화자 고민중의 심리 변화를 따른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려낸다. 한 때 운동권으로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독립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유의 결정장애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그런 엉거주춤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던 고민중이, 회사를 땡땡이치고 옛 애인의 유골을 들고 튀면서부터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하는 모습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우리 모두가 내면에 그런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한 욕망 덩어리를 한 개씩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초면에 그렇게 경계해 마지않던 연적 앤디 강과의 관계도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참말로 마음이 편해지더라는 해탈의 경지도 선보여 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시종일관 그렇게 진지한 것만은 아니다. 문 감독에게 앤디 강이 보여준 인분테러 앞에서는 정말 빵 터져 버렸다. 중세 궁정에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던 저글러처럼 김호연 작가는 참 다양한 스타일로 독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연적>을 다 읽고 나서, 김호현 작가의 전작 <망원동 브라더스>가 읽고 싶어졌다. 시장의 반응이 좋았는지 연극으로도 제작되어 상연되었다고 하는데, 대강의 시놉시스를 보고 나니 왠지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이 떠올랐다. 소설-연극 그리고 영화화의 비슷한 경로를 거치지 않았나. 지난달에 이십 몇년만에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소설을 읽다 보니 보말해장국이니 갈치구이 같은 음식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 그리고 보니 재연이 사랑하던 오름 찾기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공천포 카페 숑은 실제로 존재하는 카페였다. 이런 장소를 통한 공감대야말로 외국 소설에서는 접할 수 있는 우리 소설의 힘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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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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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으면서 한 가지 독서의 목표가 생겼다.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영미문학 100선의 책들을 한 번 섭렵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시작부터 과연 가능할까하는 의문이 들지만, 일단 지난주에 <1984>도 성공적으로 읽었고, 내친 김에 1928년 퓰리처상에 빛나는 손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도 구해서 읽었다. 사실 200쪽 남짓한 짧은 소설이라 그런지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다만 후반부로 가면서 가독성과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손턴 와일더의 이름은 사실 처음 들어 봤다. 이번에 모던 라이브러리 소설 100선을 접하면서 내가 참 모르는 작가 이름이 많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손턴 와일더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영어 원서로 읽는 것이 아니라 번역서로 걸작 소설을 읽는 것이라 그런지 영어의 글맛은 잘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손턴 와일더가 쓰고 있듯이, 문학이란 마음의 기록이라고 하는데 내가 접한 그의 마음의 기록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렇게 숱하게 책을 읽어대면서도 내가 정의하는 문학에 대한 고유한 생각을 만들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소설의 주 공간적 배경이 되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쿠스코로 가는 길에 있는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라고 손턴 와일더는 쓰고 있다. 1714년 7월 20일, 그 다리가 갑자기 무너지면서 다리를 건너던 다섯 명의 사람들이 추락사했다. 어떻게 보면 별 거 아닌 것 같은 사건에 주목한 사람은 프란체스코 회 소속으로 남아메리카 인디언 개종에 여념이 없던 바로 현장을 십여분 전에 건넌 주니퍼 수사였다. 그는 이 사건이야말로 신의 인간에 대한 계시라고 생각하고, 6년여 동안 공들여 죽은 다섯 명의 사람들에 대한 방대한 조사를 진행시켜 마침내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냈지만, 종교 재판 결과 자신이 저술한 책과 함께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살라졌다. 문득 손턴 와일더는 왜 소설의 배경을 다른 곳도 아닌 페루라는 공간으로 잡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8세기 근대의 여명기에 구대륙 유럽보다, 근대사상의 세례가 직접적으로 미치지 못하고 주술과 부적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던 신대륙이야말로 베일에 쌓인 인간들의 욕망을 저술해 내기에 적합한 공간이라고 저자가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처럼 소설 속의 ‘가짜책’에 첫머리에 등장하는 주자는 바로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마리아 부인이다. 리마의 부유한 포목상집의 딸로 태어나 후작 부인이 된 마리아 부인은 결혼해서 자신이 낳은 아름다운 딸 클라라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바친다. 어머니의 맹목적 사랑을 이기지 못한 딸은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백작 부인이 되어, 어머니가 제공하는 신대륙의 부와 재화를 마음껏 탕진한다. 통신과 교통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 어머니가 딸과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편지였다. 마리아 부인은 딸에게 보낸 숱한 서간문을 통해 남은 기록은 현재 당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을 정도였다고 저자는 증언한다. 돌아오지 메아리처럼 리마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모성의 발현이었지만, 백작 부인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딸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답을 얻지 못하자, 마리아 부인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신마저 부인하고, 치차 술에 점점 의존하게 된다. 마침내 딸이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딸의 순산을 바라는 미신적 주술을 행하고 리마로 돌아가던 길에 우리가 아는 예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마드레 마리아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후계자로 점찍은 마리아 부인의 하녀이자 비서로 활동하던 페피타 역시 그녀와 같은 운명이었다.

 

두 번째 주인공은 고아로 버려진 쌍둥이 형제 마누엘과 에스테반이다. 역시 마드레 마리아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보살핌으로 자란 그들은 총명함으로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또 태생적 일체감 때문에 한편으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자신들을 대하는 세상은 낯설고, 이상하며 적대적이어서 그들만의 비밀언어를 개발하기도 했다. 평생을 함께 할 것 같았던 이 둘의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은 바로 전 마리아 부인의 에피소드에도 등장하는 리마를 주름잡던 명배우 카밀라 페리콜에 대한 사랑이었다. 문맹이었던 페리콜은 마누엘을 자신의 필경사로 삼아, 편지심부름을 맡기기에 이른다. 자신의 반쪽이 사모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스테반의 핵심적인 욕망은 그야말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차라리 사랑이라는 감정을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에스테반의 고민과 갈등은 진폭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누엘이 쇠붙이 무릎을 다치고 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에스테반에게 삶은 무상하고 더 이상 가치 없는 그것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던 에스테반은 델 필라르 수녀원장과 그들이 잘 따르던 알바라도 선장의 곡진한 설득으로 여행길에 나서게 되지만, 에스테반 역시 산 루이스 레이 다리 사건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카밀라 페리콜이 연극배우로 대성하게 할 수 있게 온갖 사랑과 노력을 다한 피오 아저씨다. 18세기 문제적 인간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피오 아저씨는 스페인 카스티야 출신으로 산전수전 그리고 요즘으로 치면 공중전까지 모두 체험해서 사업이면 사업, 모험이면 모험 그리고 종교 재판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다양한 재능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어린 소녀 페리콜은 요즘 말로 하면, 연예기획사 사장에 눈에 띈 빼어난 재능 넘치는 아이돌 후보생이었다. 그녀의 재능과 장래성을 알아본 피오 아저씨는 냉혹한 조련과 교육을 통해, 카밀라 페리콜이 리마에서 아니 스페인 문화권에서 최고 배우로 성장하게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 둘의 기묘한 사랑은 훗날 배우로 성공한 페리콜이 연극판을 떠나 페루 총독 돈 안드레스의 애인이 되어 상류 계급으로 도약한 뒤에도 끈질기게 이어진다. 페리콜의 아들인 돈 하이메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주겠다는 제안과 협박전략을 구사해 마침내 허락을 받고 그 역시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던 중에 비극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이 모든 이야기를 책으로 담아낸 주니퍼 수사의 운명 또한 산 루이스 레이 다리의 비극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을 밝히는 것 자체가 이단으로 몰렸던 것일까? 종교 재판관의 주문에 따라, 주니퍼 수사와 그가 저술한 책은 불길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 개입한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사랑론으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끝을 맺는다.

 

걸작으로 지칭되는 소설의 무게는 역시 남다르게 다가왔다. 산 루이스 레이 다리에서 추락한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보편적 숙명을 맞이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에 충실하다. 딸에 대한 맹목적 사랑으로 삶에 매진하는 마리아 부인, 일체감으로 하나가 되었던 혈육의 죽음으로 삶의 목적을 잃었지만 새출발에 나서려는 에스테반, 그리고 대배우를 키워 보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 피오 아저씨의 욕망이 차례로 주니퍼 수사의 기록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처한 상황에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사건의 알고리듬의 상층부에 자리 잡은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존재는 상징적이다. 그리고 사건을 기록한 주니퍼 수사는 처음부터 비극에 신의 섭리가 개입했다는 가정을 가지고 과학적 접근을 시도해 보지만, 사실 무의미한 시도였다는 것으로 판명이 된다. 그런데 왜 페루 당국은 주니퍼 수사의 기록을 이단으로 판단하고 말살하려고 했던 걸까? 일반에게 공개되지 말아야 할 그런 비밀이라도 있었던 걸까? 독자가 읽은 이야기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주니퍼 수사가 도전한 미스터리는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는 모양이다.

 

소설을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떠올랐다. <침묵>처럼 종교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은 아니지만, 신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델 필라르 수녀원장을 통해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공통의 무언가가 느껴진 탓일까. 일독으로는 도저히 손턴 와일더가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본질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고전답게 재독의 필요성을 강렬하게 느낀 그런 독서였다.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다시 읽으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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