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고 싶다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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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터의 팬이다그의 모든 책들을 읽을 것이다무엇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작고해서 하늘의 별이 된 설터의 <소설을 쓰고 싶다면>은 2년 전에 나왔을 때부터 소장각인 그런 책이었다하지만근간을 사서 구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매한 독자는 일단 구매를 유보했다그리고 중고서점에서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기다렸다불행하게도내가 접근할 수 있는 부근의 중고서점에서는 도대체 설터의 <소설>을 만날 수 없었다그래서 하는 수 없이 2년 만에 도서관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것도 책을 빌린 뒤 반납할 때가 다 되어 읽기 시작했다설터의 책들이 모두 좋은 건 아니다어떻게 항상 작가가 균일한 퀄리티의 책을 발표할 수 있단 말인가그런다면 그건 소설 쓰는 기계지작가로서 사람일 수 없겠지그런 노파심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정도로 <소설>은 나에게 대만족이었다.

 

일단 설터의 팬이 아니고소설읽기 선수들이 아니라면 <소설>이 재미없는 그런 책일 수도 있으리라하지만 책중독자나 선수들에게 <소설>은 상당히 위험한 책이다일단 시작부터 내가 모르는 미지의 작품들과 작가들이 연달이 튀어 나온다아는 이들은 알 것이다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아마 대학교 강연 내용을 책으로 만든 것 같은데아직 만나 보지 못한 윌라 캐더를 필두로 해서 이제는 좀 익숙한 이름의 소설쓰는 기계 발자크작가의 고등학교 선배 잭 케루악(이 작가의 책들도 구해 놓고 읽지 못했다), 플로베르모파상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한 미지의 작품들과 작가들이 우수수 쏟아진다어떻게 보면 노다지일 수도 있겠지만나같은 책증독자들에게는 정말 위험한다벌써 윌라 캐더와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등을 검색창에 타이핑해 본다이거 정말 큰일이다!

 

나에게 읽을 책이 항상 없는 것은 아니지만이러한 대가의 유혹을 정말 이겨낼 자신이 없다이런 걸 책쟁이들의 숙명이라고 하나대가 역시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는단다그렇다책읽기의 본질은 바로 즐거움이다영화는 도저히 책에 비할 바가 없다소설가 지망생들에게 피와 살이 되는 팁들도 부지기수다어디선가소설에 등장하는 사건이나 인물들이 사실과 유사하다면 우연이라는 말은 모두 헛소리라고 점잖게 타인의 글을 인용해서 저격한다고수다운 발상이 아닌가.

 

결국 소설쟁이들은 어디선가 듣고 주운 이야기들에 살을 붙여 있음직한 이야기라고 한다는 거다그런 점에서 전 세대 소설쟁이들이 글을 쓰기 위해 재미진 이야기거리들을 수집하기 위해 그렇게 술판을 들락거렸는 지도 모르겠다마르케스가 그랬다고 했던가소설의 첫 단락 쓰기가 그렇게 힘들다고아니 다시 쓰기는 또 어떤가대가는 다시쓰기가 소설가의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형벌이라고 했다지그런 점에서 데이빗 설로이도 만만치 않은 다시쓰기의 고수가 아니었던가그이는 책이 이미 나온 뒤에도 계속해서 다시 고쳐 쓴다지작가와의 만남에서 내가 물었을 때는 심지어 자신이 무얼 고쳐 썼는지도 몰랐지 아마.

 

독자제현들이여그렇다고 해서 전혀 주눅들 필요는 없다한국 번역서 시장의 좁고 작음(한 마디로 장사가 안된다는 말이렷다!)으로 저자가 높이 평가한 이사크 바벨 같은 작가들의 책들은 아예 구할 수도 없으니아니 번역서가 없는데 어찌 러시아말로 된 원서를 읽는단 말인가라는 표현이 그대를 구원할지어다최근 관심을 갖게 된 토머스 울프의 책도 마찬가지 이유로 국내에서 구할 길이 없다는 점을 짚어 드리고 싶다.


*** *** ***

 

그렇게 절반 정도를 읽고 나서 도서관에 책을 반납했다그리고 다시 빌려서 나머지 절반을 뚝딱 읽었다설터의 위력은 대단했다이 위험한 책을 읽다가 산 책이 몇 권인가우선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를 사서 읽기 시작했다그리고 설터가 솔 벨로 최고작으로 꼽은 <비의 왕 헨더슨>와 <허조그그리고 <오기 마치시리즈도 사들였다일단 어떤 작가가 꽂히면 읽는 것보다 사들이는 걸 우선하는 웃기는 독자가 아닌가아마 중고서점에 이 책에 설터가 언급하는 책들이 더 있었다면 다 사들였을 지도 모르겠다그만큼 설터의 <소설을 쓰고 싶다면>은 대단히 위험한 책이다.

 

설터의 소설론을 접하면서 많은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다른 작가는 몰라도 자신은 일상에 대한 자세한 관찰과 기록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했던가뭐 조목조목 밝히며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오독 또한 독서가 주는 한 가지 즐거움이 아니었던가그가 노트에 기록한 관찰 일지들은 자기 소설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그렇지쓰지 않은 것들은 모두 사라지는 법이니 말이다글이든 건축이든 요리든재료라는 물질이 필요하기 마련이다소설가들 역시 마찬가지다어떻게 100% 자신만의 창작이 가능하단 말인가그렇다면 좀 더 풍부한 소설을 쓰기 위해서 작가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다할 지도 모르겠다.

 

한 시대를 주름 잡은 작가 솔 벨로와의 교류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의 저녁 인터뷰 등일개 아무개라면 할 수 없는 경험을 했던 저자의 에피소들이 현란하게 스쳐 지나간다참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전쟁에도 참가한 베테랑이라고 했지그런 점에 포인트 추가! 13년인가 하는 군인으로서의 경험을 뒤로 하고전업작가로 새출발했다는 점 또한 특이한 경력이 아닐 수 없다웨스트포인트 출신 소설가라니당연히 설터는 자신의 그런 체험들을 소설에 써먹은 바 있다부끄러움이 아니라 이런 건 오히려 자랑할 만한 그런 게 아닐지.

 

<아트 오브 픽션>의 인터뷰이는 집요하게 설터 작품 세계를 파고든다아니 그의 모든 작품을 읽은 이만이 가능한 그런 인터뷰가 아니었을까나도 못지않게 설터의 책을 읽어서 그런지 팔로우업이 생각보다 쉬었다아니 어쩌면 설터의 책들을 많이 만나지 않은 사람이 만난다면 또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열혈 설터팬을 자처하지만그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스포츠와 여가>를 세 번씩이나 읽어 보지는 못했다인터뷰이는 그 책을 세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었다고 했던가노골적인 성애에 대한 묘사로 자신의 단편이 저명한 <뉴요커>에서 거절당했다는 이야기와 묘한 공명을 이루기도 했다. <스포츠와 여가>와 더불어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 <가벼운 나날>이 출간 당시 혹평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과연 어떤 책들은 시간이 지나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국내에 설터의 책은 모두 9권이 소개되었다그 중에 두 권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과 <그때 그곳에서>를 읽지 못했다전작읽기에 도전하기 위해 나머지 책들도 마저 읽어야지아직도 출간사 목록에 근간으로 <버닝 데이즈>와 <솔로 페이스>가 있는 걸 보면서 조금 행복했다설터 샘은 이제 고인이 되셨지만여전히 읽을 책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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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08 1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도 설터에 지뢰밭을 밞으셨어요.
저는 고전류 이외에는 현대소설 잘 안ㄺ었던 1人인데 설터 소설 읽고 그이후로 독서관이 바뀌었어요.
이분 세상에 나온책들 기고글 까지 싹다 읽었는데 개인적인 인생은 슬픔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첫번째 부인사이에서 낳은 딸이 샤워중 전기 감전사해서 가슴에 뭍었고 연이어 책과 영화가 상업적으로 실패해서 인생에 반은 생활고에 시달렸어도 글쓰기를 포기 하지 않았어요.

레삭매냐 2020-12-08 10:55   좋아요 1 | URL
오오~! 여기서 설터 팬 분을 만나게 되는군요.

전 지난 7년 동안 모두 7권의 설터 책을
읽었네요. 지뢰가 제대로 터졌습니다...
<all that is> 너무 보고 싶어서 읽지도
못하면서 원서로도 샀었더라는 -

이혼했었다는 썰은 들었는데 고런 슬픈
가정사가 있는 지는 미처 몰랐네요.

아, 영화감독 한다고 나섰다가 망했다는
이야기도 리뷰에 담으려고 했는데 이자
묵었네요.

이뿐호빵 2020-12-08 1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토마스 울프 저도 최근에 ..
‘지니어스라‘는 영화를 통해 접하고 책을 찾았는데 ...구할 수 없었습니다
중고가 가격이 제법 높은?게 보였지만 선뜻 주문하기는 또 그렇고 ㅎㅎ아쉬움만
그리고
설터의 팬은 아니지만 저도 호기심이 생깁니다ㅋ
덕분에요 ~

레삭매냐 2020-12-08 15:45   좋아요 2 | URL
저는 토마스 울프는 찰스 부카우스키
아저씨가 하도 까서 알게 되었네요
세상에나 :>

그런데 책은 구할 도리가 없더라구요.

미국 사람들도 어렵다고 하는 것 같던
데... 궁금해서 한 번 만나 보고 싶긴
한데 책이 없으니.

설터,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보심이.
 
슈톨츠 대산세계문학총서 124
파울 니종 지음, 황승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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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울 니종, 처음 들어 보는 작가다. 그런데 왜 내가 이 책을 샀을까? 산 이유도 대단한데 읽은 건 더 대단하다. 아마 이유는 순전히 연말에 책 권수를 채우려는 꼼수에서 발현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지난여름에 사서 겨울에 읽었다. 해 넘기지 않고 읽은 게 어딘가 위로해 본다. 다행히 어디 구석탱이에 쳐 박히지 않고 눈에 띄는 곳에 있어서 나의 간택을 받았다. 작가는 스위스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 동네에서는 널리 알려진 작가일 진 모르겠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무명의 작가다. 언어의 장벽을 뛰어 넘지 못한 한계로 보아야 하나. 독일어권 책들이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한다는 이유는 니종의 명성이 이방에 널리 알리지 못하는데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제목에 떡하니 등장하는 슈톨츠는, 그렇다 바로 주인공의 이름이다. 슈톨츠는 25세의 가장, 노동자 그리고 대학생이다. 저자의 젊은 시절을 고대로 판박이처럼 빼다 받은 캐릭터라고 하는데 귀차니즘이 마구 발동해서 위키피디아고 뭐고 우리에게는 무명의 작가를 검색해 보는 수고도 패스해 버렸다. 아무래도 연말 즈음에 발생하는 의욕상실 덕분이려나 어쩌려나.

 

룸펜 같이 노동으로 성실하게 벌어먹고 살던 슈톨츠는 돈을 벌어 이탈리아 여행에 나서기도 하고, 어쩌구 하면서 살다가 대학에 진학한다. 살인적인 대한민국 공교육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서구 사회에서도 대학이라는 코스를 거치고 나면 더 많은 기회를 부여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내몰려서 대학에 진학하는 게 아니라, 슈톨츠처럼 고흐의 그림을 보고 뻑이 가서 정말로 진지하게 그의 예술 세계와 고독 기타 등등을 연구해 보고 싶다는 발로라면 대환영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서도 대학문을 넘는 그네들의 모습이 어찌나 부럽던지. 우리는 80살 할아버지가 의대에 간다고 하면, 젊은이들의 기회를 빼앗는다고 난리부터 치지 않은가.

 

역시나 슈톨츠가 진학한 대학은 그에게 여러 가지 기회를 제공해 준다. 독일 출신 목사님네 딸내미를 만나 결혼에도 골인하고, 좋아하는 미술사학도 공부하지 않은가. 무언가 삶의 탄탄대로가 전개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슈톨츠는 고독과 침잠의 세계에 메혹되기 시작한다. 출산한 아내를 친정으로 보내고, 저 혼자 뭔 놈의 연구를 하겠다고 시골 농가를 찾아 고흐가 남긴 편지들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만의 사색에 빠져 용기를 내라”(sursum corda:주르줌 코르다)는 라틴어 문장을 주술처럼 외우며 학문에 용맹정진한다.

 

아내와 어린 아들 그리고 장모의 희생을 바탕으로 우골탑을 쌓던 슈톨츠는 비트마이어 씨네 하숙집을 떠나 잠시 현실세계로 복귀한다. 고흐가 남긴 편지들과 연보와의 씨름을 뒤로 하고,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의 경험은 몽상적이라고나 해야 할까. 슈톨츠는 아내와의 재회를 두려워한다. 못 본 사이에 아들은 몰라보게 성장했다. 장인의 사투리까지 이어 받은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목사인 장인은 논문 저술을 위해 용맹정진하는 사위에게 압박감에 시달리며 행복한 고기잡이에 나선 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 그리고 보니 슈톨츠의 연구대상인 고흐도 한 때 영국에서 활동한 실패한 선교사가 아니었던가.

 

알고 보니 두 번의 대전에 참전했던 슈톨츠 장인의 이력도 화려했다. 그는 군목이 아닌 포병장교로 참전해서 베어마흐트의 일원으로 발칸반도를 지나 크레타에까지 갔었다고 한다. 목사관에 거주하는 목사의 특이한 경력이 아닌가. 슈톨츠는 칼크벨레주인 하인리히처럼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은 모두 그들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추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어쩌면 그게 1960년대 독일 소도시에 사는 독일 사람들의 실상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도망치듯 글라스휘텐호프에 돌아온 슈톨츠는 여전히 논문 저술에 집중하지 못하고 비트마이어 씨네 하숙집에서 돼지 도축하는 걸 구경하며 허송세월한다. 예술가 고흐의 삶을 동경한 나머지, 자신도 본업을 내팽개치고 노동자 농민들의 삶에 천착해 버린 것일까. 연구 활동에 흥미를 잃은 슈톨츠는 고흐의 원본 그림을 다시 보고, 재도약 혹은 새출발을 위해 슈페사르트를 떠나 암스테르담행을 결정한다. 그리고 오만한 산림감독관의 제안에 따라 겨울사냥에 나선다.

 

소설 <슈톨츠>는 개인적으로 볼 때, 업앤다운이 심한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분명 작가의 자전적 모습들을 여실하게 드러내기도 하면서 또 동시에 고흐의 서간집이나 자료들을 첨부해서 서사의 줄기를 흩뜨려 트리기도 한다. 훈련된 독자라면 전부는 아닐지라도 곳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부분들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변명 같지만 내가 그렇게 했으니 말이다. 뒷부분에 달린 긴 후기를 읽을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 지역 농부 비트마이어 씨와 어울리는 장면에서는 카를로 레비의 자서전 생각이 나기도 했다.

 

예전에 사둔 책들을 하나씩 읽는 건 밀린 숙제를 하는 그런 기분이다. 어떤 이유에서 사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 읽고 나니 속은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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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7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12-07 21:33   좋아요 1 | URL
올해 시작하고 못 다 읽은
책들만 해도 상당하지 싶습니다.

역시 연말은 그렇게 읽던 책들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이뿐호빵 2020-12-07 2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시간을 보는 것 같습니다ㅋ
읽다 만 책들 읽어 내느라 저도...
읽으면서 또 생각합니다
책 읽기가 숙제가 되면 안되잖어 ...그러면서 ㅋ

레삭매냐 2020-12-08 10:18   좋아요 1 | URL
그렇긴 한데...

왠지 읽다만 책들을 보면
숙제처럼 읽어야 하나 싶기도
하구요.

저에게는 <그리스인 조르바>
가 그러네요. 누군가는 인생책
이라고 하던데 다양한 판본의
책이 있지만 정작 완독은 못했
다는. 새해에 읽어 볼까나 어쩌나...
 
기차의 꿈
데니스 존슨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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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난달에 윌라 캐더 여사의 책들을 주문하다가 순전히 무료배송을 맞추려고 덤으로 주문한 그런 책이었다. 어젯밤에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다 읽고 나서 원래는 옌렌커의 제목도 멋들어진 <레닌의 키스>를 시작하려다가 우연히 집어 들었다. 분량이 적어서 그 길로 다 읽어 버렸다. 요즘은 거의 11독을 하고 있다.

 

데니스 존슨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데, 미국에서 제법 알려진 작가인 모양이다. 전미도서상도 받을 걸 보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미국의 오지라고 할 수 있는 아이다호. 주인공은 모이 계곡에 사는 벌목꾼이다 날품팔이 노동자 밥 그레이니어다. 1917, 그의 오두막집에는 사랑하는 아내 글래디스와 이제 갓 태어난 딸 케이트가 살고 있었다.

 

북미대륙 동부의 뉴잉글랜드에서 출발한 신생국가 미국은 서부로 전쟁과 계약을 통해 계속해서 영토를 넓혔다. 아직 개발이 끝나지 않은 시절, 그레이니어는 철도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철마는 미국 개척시대를 상징하는 아이템이었다. 산업발전의 원동력이자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철도 부설은 당시 산업개발 시대 국가 경영의 기본이 아니었던가. 소설 초반에 그레이니어는 동료들과 함께 물건을 훔치다 걸린 중국인 노동자를 사적으로 처벌하려는 시도한다. 다른 이는 그에게 총질도 했다지 아마. 결국 불쌍한 중국인 노동자는 자신을 핍박하는 백인들 사이에서 무사히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조실부모한 밥 그레이니어는 고모 내외와 사촌 사이에서 자랐다. 학교에서 글을 쓰고 읽는 법을 배운 그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먹고 사는 그런 성실한 사나이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비극은 순식간에 찾아오는 법이다. 그레이니어 가족의 안식처였던 모이 계곡에 대형 화재가 나고, 그 화재로 밥은 사랑하는 아내와 딸 케이트를 잃었다. 가족을 송두리째 잃은 밥은 자신이 산 땅 1에이커에서 그야말로 부랑자 같은 삶을 살기 시작한다.

 

산사나이 밥 그레이니어의 이야기를 만나는 순간부터 내가 좋아하는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제탈러의 <한평생>이 떠올랐다. 산은 그레이니어에게 안식이자 피난처였다. 동시에 자신의 가족을 앗아간 원수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주는 것도 산이요, 거두어 가는 것도 산이었던가. 그리고 보니 강도당한 부랑자 아저씨를 돕지 않은 탓일 수도, 사소한 범죄에 대한 처벌로 목숨을 요구했던 중국인 노동자의 저주가 아닐까 하는 망상에 젖기도 한다. 자신에게 벌어진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이없는 사건에 대해 밥은 자책 모드에 들어간 것이다.

 

소설은 어느 시점에서 신화의 영역으로 점프한다. 늑대소녀가 등장하고, 죽은 글래디스의 유령이 밥에게 나타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현시를 보여 주었던가. 알고 보니 늑대소녀가 대화재에서 살아남은 케이트였던가 어쨌던가.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더 이상 산사람으로 살 수 없게 된 밥 그레이니어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유통업자로 변신한다. 유럽에서 터진 전쟁으로 가문비나무를 비롯한 목재의 수요가 폭발하면서 벌목꾼은 호황을 누렸다지. 사실 미국 본토는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한 번도 적의 대규모 공격을 받지 않은 상태로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를 생산해내는 공장으로 변신하지 않았던가. 벌목 과정에서 파편처럼 튀는 나뭇가지는 과부제조기로 불릴 정도로 위험했다고 한다. HBO 드라마<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벌지 전투에 참가한 101공수사단 부대원들이 독일군이 쏜 대포에 맞아 부서진 나뭇가지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신화의 영역과 현실을 오가며 여러 시대를 압축적으로 기술한 데니스 존슨 작가의 서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다른 작품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노동에 근거한 성실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하지만 그 욕망을 현명하게 다스릴 줄 알았던 밥 그레이니어라는 캐릭터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아 그런데 <기차의 꿈>의 결말이 어떻게 되더라. 불과 얼마 전에 읽은 책인데 소설이 어떻게 끝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도 이 책 저 책 읽다 보니, 기억력과 연관 능력에 무리가 온 모양이다. 책을 펼쳐 보니 시간이 영원히 사라졌다로 끝난다. 그렇지 시간은 사라지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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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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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나의 서가에 이 책이 꽂혀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계속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작가의 기념비적인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의 재개정판을 사서 조금 보았다. 사실 감흥이 잘 오지 않더라. 너무 오래 전에 나온 작품이라 그럴까? 아무래도 동시대를 살지 않은 독자로서 무언가 변화를 바라던 시대상에 올라타지 못한 탓으로 해두자.

 

지난여름, 책을 집어 들었다. 흥미로운 전개였다. 39세의 폴과 그녀의 애인 로제 그리고 다시 25세 미남자 시몽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앞의 부분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단박에 내쳐 달려 읽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여튼 어제부터 올해 읽다만 책들을 마무리 지어야지 하는 마음에 얇은 책들부터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일빠였다. 그만큼 만만하다는 그런 말이겠지.

 

로제란 놈은 그야말로 구제불능이다. 헌신적인 폴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운다. 폴과 저녁 약속을 하고서는 펑크 내기가 일쑤다. 진작에 손절했어야 하는 그런 관계였는데 폴은 관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 그리고 보니 폴은 마르크와 이혼한 돌싱이었던가. 그런 게 무어가 중요하단 말인가.

 

소설은 젊고 장래가 유망한 변호사 시몽이 자신보다 무려 15살이 많은 폴에게 반하기 시작하면서도 전개가 급속도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아마도 주위의 시선 때문에 폴은 시몽의 격정적인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고전적인 방식인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는 식으로 젊은이는 사랑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든다.

 

세상에 사랑은 어떠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던가. 모르겠다. 시몽의 일견 무모해 보이는 사랑이 좀 그렇다. 우선 시몽은 폴을 소중하게 다룬다고 하면서도 폴의 내면세게에 무지하다. 그녀가 여전히 로제를 우리속에 가둔 반면, 자신은 폴이 규정하는 우리의 범주 속에 들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아니 알고 있더라도 이 청년은 그것을 받아 들일 수가 없으리라.

 

게다가 시몽은 폴이 공공연하게 파리를 떠나 지방으로 돌면서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지 않은가. 도무지 폴과 로제의 관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명 폴은 로제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그런 부지불식간에 튀어 나오는 바람기를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자신은 그동안 로제가 만난 다른 여자들과 다를 거라는 자신감에 도취한 나머지 오판을 거듭한다. 삼각관계의 파국을 예고하는 소설의 엔딩은 씁쓸하기만 하다.

 

폴과 시몽의 나이 차이가 반대였다면 그것도 로맨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시몽의 요구로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클럽에서 춤출 때 폴에게 쏟아지는 경멸과 시샘의 시선들이야말로 작가가 의도한 설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나라면 아마 끝이 빤히 보이는 결말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러기엔 시몽은 너무 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모해 보이는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뛰어넘는 집착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긴 세상에 어떻게 완벽한 관계가 그리고 완전한 사랑이 존재한단 말인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고한 작가의 파란만장했다는 삶도 그냥 시큰둥해 보이고, 1950년대 프랑스식 사랑도 나에게는 그저 그랬다. 게다가 제목의 브람스는 무의미했다. 아무래도 너무 늦게 사강을 만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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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04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 매냐님 브람스보다 야구 ㅋㅋㅋ

레삭매냐 2020-12-05 08:14   좋아요 0 | URL
소인은 아무래도 브람스보다는 야구
로 가는 것이.

뭐 그래도 모짜르트는 좋아합니다만.

cyrus 2020-12-05 0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올해 4월 독서모임 선정도서였는데 하필 그 달에 코로나 확진자가 많았던 시기라 모임이 연기됐어요. 레삭매냐님이 별점 두 개 준 책을 오랜만에 봅니다.

레삭매냐 2020-12-05 09:32   좋아요 0 | URL
달궁도 독서 모임을 비대면으로
진행하고 있답니다.

코로나가 삶의 양태를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으로 바꾼 모양
입니다.

책은 그냥 그렇더라구요.

유부만두 2020-12-05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지 알겠는 마음이에요. 브람스 ... 프람스 ... 블란스 육십년대 흑백영화 감승이요.

레삭매냐 2020-12-05 12:03   좋아요 0 | URL
오래 전, 한참 영화 보러 다니던
시절에 프랑스 영화 <비브르 사 비>
뭐 그 딴 영화들을 보러 다니곤 했었
는데... 당최 무슨 내용인지...

불란서 갬성, 절절하게 와 닿습니다.
 
나는 감독이다
에비사와 야스히사 지음, 오경화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는 보통 특정한 책을 빌리러 간다. 그런데 가끔 예상하지 못했던 책을 만나게 된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이틀 사이에 죽어라 읽은 에비사와 야스히사 작가의 <나는 감독이다>가 그런 책이었다. 소설의 원제는 감독(일본말로는 간토쿠라고 하더라)’. 제목부터 간결하다. 그리고 책은 드럽게 재밌었다. 내가 아마 야구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나에게 스포츠는 오로지 야구뿐이다. 나는 축구도 농구도 보지 않는다. 오로지 나에게는 야구뿐이다.

 

그런 야구도 이번 시즌에는 코로나 때문에 시들해져 버렸다. 아니 예전에 가지고 있던 열정은 내가 열렬하게 응원하던 보스턴 레드삭스가 십 수 년 전에 그 놈의 지긋지긋한 소위 밤비노의 저주를 깨면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춘수 씨의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 만년 꼴찌팀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열심히도 응원하던 춘수 씨의 기억이 났다. 그랬지. 그런데 <나는 감독이다>는 바로 그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실제 모델로 한 소설이라고 한다. 지지리도 야구를 못하는 팀, 엔젤스의 신임감독으로 부임한 사람은 바로 교진(요미우리 자이언츠) 유격수 출신의 히로오카 타츠로다. 전임 감독은 라인업을 짜기 위해 점쟁이를 찾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뭘 해도 안 되는 팀인 것이다. 구단주인 올림픽건설의 사장 오사카 사부로 씨는 아무리 팀이 꼴찌를 해도 인화를 중시하는 호걸이었다. 매년 팀에 투입되는 2억 엔이라는 거금은 어차피 세금으로 나갈 돈이라며 퉁친다고 했던가.

 

팀의 독소로는 수비 코치이자 왕년의 엔젤스 스타 타카야나기가 있는데, 다음 감독 자리는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굴러온 돌인 히로오카가 감독에 선임되자 에이스 오타키를 비롯한 선수들을 선동해서 쿠데타에 나선다. 시즌 도중에 감독 자리를 물려받은 내부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한다. 철저한 관리야구를 신봉하는 히로오카에 대항해서, 기존의 느슨한 팀플레이를 선호하는 선수들은 자기들 멋대로 야구를 계속하겠다는 거다. 팀의 기강은 바닥에 떨어지고, 아예 술에 취한 채 투수들이 마운드에 올랐다고 했던가.

 

이건 뭐 프로야구 선수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오합지졸 팀이 따로 없다. 이렇게 각자도생하는 팀이 어떻게 천하의 교진을 상대로 센트럴리그 우승에 도전할 수 있단 말인가. 타카야나기 일당의 쿠데타가 보기 좋게 실패하고, 도박에 나선 히로오카는 대망의 대권을 접수한다. 그리고 바로 팀의 체질 개선에 나선다. 안 되는 팀일수록 문제가 많은 법이다. 중견수 타카하라를 팀의 리더로 세우고, 포수 이치카와를 더해서 팀에 새로운 면모를 갖출 채비를 마친다.

 

야구를 잘 모르는 이들은 시즌만 관심 있게 보지만, 고수들은 오히려 핫스토브라 불리는 오프시즌과 스프링 트레이닝에 주목한다. 교진 같은 강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당대 최고의 선수이자 감독으로 추앙받은 나가시마 시게오 같은 명감독을 필두로 해서, 오 사다하루(왕정치), 하리모토 이사오(장훈) 그리고 니우라 히사오(김일융) 같은 훌륭한 자원들을 아낌없이 투입할 수 있는 프런트 오피스의 든든한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 마디로 말해 교진 시절 동료였던 나가시마 감독이 하지 않아도 될 그런 걱정을 히로오카는 해야 한다는것이었다. 현역 시절 3루수였던 나가시마는 유격수에게 날아가는 공조차 자신이 잡는 허슬 플레이로 히로오카를 맥 빠지게 만들곤 했다지 않은가. 현역 시절이나 감독 시절 모두, 나가시마는 히로오카의 장애물인 셈이다. 게다가 그는 교진 현역 시절, 야신이라 불리던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과의 불화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했으니 타도 교진은 비슷한 처지에서 코치로 영입한 절친 와타라이 요이치도 공유하는 공통의 모토가 되었다.

 

구단주 오사카 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히로오카는 빼어난 성적을 올렸지만 자신의 관리야구와는 거리가 먼 외국인 용병 1루수 허드슨을 트레이드시켜 버린다. 그의 면모에서 당장 나는 SK 와이번스 왕조를 건설했던 야신 김성근 감독이 떠올랐다. 하긴 그도 일본 출신 야구인이었지. 메이저리그에서는 절대 번트를 대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일본 야구에서는 짜내는 야구가 기본이지 않았던가. 그러니 메이저리그 야구 맛을 본 팬들에게 일본 야구나 일본 야구를 계승한 한국 김성근 감독 스타일의 야구가 재밌을 리가 있나 그래.

 

어떻게 보면 필드에 나가서 뛰는 선수들은 모두 히로오카 감독이 조종하는 로봇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결론은 하나다, 이기는 야구를 하라는 명령이다. 야구의 기본은 간단하다. 27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고 상대보다 점수를 더 내라는 것. 그런데 히로오카 감독은 공격보다 수비를 더 중시한다. 교진 야구가 그러하듯이. 공격으로 점수 내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잘 단련된 수비로 이기는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히로오카 감독의 지론이었다. 하긴 10개의 공 중에서 3개의 공을 안타로 만들어도 강타자로 인정받는 것이 야구의 세계가 아니었던가. 농구 선수의 야투율이 30%라고 한다면, 당장 방출될 게 분명하다. 그만큼 타격의 기술은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닐까.

 

히로오카 감독은 엉망진창인 엔젤스의 규율부터 세우는 일에 매진한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이기는 야구의 재미를 알게 만든다. 패배주의에 물든 선수들이 이기는 맛을 알게 되자, 개막전에서 교진을 상대로 연승을 내달리면서 그야말로 꿈같은 봄을 보낸다. 하지만, 130경기나 치르는 야구는 단기전이 아니다. 단기전은 포스트시즌이란 이름으로 각 리그의 승리자들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경기다. 장장 6개월이나 되는 장기전을 치르다 보면 별의별 일들이 다 벌어진다. 그것은 마치 우리네 삶과도 비슷하다.

 

또 야구 승부의 세계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가. 다 이긴 경기도 어이없는 실책으로 경기가 뒤집히기도 하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경기도 선수들이 투지를 다잡아 엄청난 역전에 성공하기도 한다. 우리 야구팬들이 야구를 끊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닌가.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명언도 다 있지 않은가.

 

주전 유격수 카노를 2루수로 이동하고, 2군에서 강철 어깨를 가진 우고를 끌어 올려 내야에서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유격수에 히로오카 감독은 배치한다. 연봉협상에서 치욕을 당한 오타키는 새로 영입된 메이저리그 출신 찰리 헤밍웨이와 더불어 원투펀치로 마운드를 책임지게 된다. 물론 타카야나기라는 놈은 코치 자리를 유지하면서 호시탐탐 쿠데타를 도모한다. 아무 것도 입증되지 않은 신생 팀 같은 상황에서 히로오카 호는 우승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시즌이 긴 만큼, 슬럼프며 주전 선수의 부상 같은 일들은 다반사다. 주전 중견수 타카하라가 수비 도중에 중상을 당하면서 엔젤스 호는 침몰하기 시작한다.

 

이런 극도의 슬럼프 시기에는 감독도, 구단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슬럼프가 지나가길 바랄 뿐. 우리가 코로나 시절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저 속수무책처럼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저절로 사라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에 손 놓고 있다는 건 아니겠지만.

 

결국 엔젤스는 그야말로 드라마처럼 반등을 일구어내는데 성공했다. 경기는 어디까지나 선수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의 슬럼프도 선수들이 알아서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타카하라가 복구하고, 선수들이 경기에 대한 감각을 스스로 깨우쳐 나가면서 엔젤스는 다시 한 번 우승 레이스를 달린다. 하지만 정규 시즌 레이스는 길고 험난했다. 막판에 팀의 에이스 오타키와 타카야나기의 승부 조작 혐의가 부상하면서 다시 한 번 팀은 위기에 처한다. , 엔젤스와 히로오카는 이 마지막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야알못 분들에게 <나는 감독이다>는 엄청 지루하고 재미없는 그런 소설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같이 야구에 미친 사람들에게 <나는 감독이다>는 그야말로 독서 슬럼프를 탈출하기 위한 한줄기 빛자락 같은 존재였다. 어찌나 재밌던지, 여차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읽을 판이었다. 게다가 한 때 일본 야구를 주름 잡았던 왕년의 대스타들인 왕정치와 장훈 그리고 김일융 아저씨들이 나오니 이 어찌 반갑지 않을쏘냐 말이다.

 

게다가 에비사와 야스히사 작가는 야구 경기가 진행되는 현장 중계를 하는 듯한, 생생한 라이브 중계로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다. 아니 이거 라디오 중계를 글로 풀어놓은 것 아냐 싶을 정도다. 나도 오래 전에 야구 중계를 들으며, 실제로 그 짓을 해보아서 잘 아는 바다.

 

간만에 야구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기분이 째지는구나. 그럼 다음번엔 <유니버설 야구협회>에 다시 도전해야 하나 어쩌나.


[뱀다리] 그리고 보니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와 야구 감독은 누구나 꿈꾸는 그런 직업이라 했던가. 마에스트로는 몰라도, 야구 감독은 바로 눈에 보이는 성적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라, 팀 전체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았다. 그런 스트레스를 감당하면서도 타카나야기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야구 감독이 되고자 하는 걸 보면 그만한 매력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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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03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인물은 꼭 허구연씨 닮은듯 하네요!ㅎ 엘지 때문에 거의 20년 가까이 가슴앓이하는 1인입니다!ㅠ

레삭매냐 2020-12-03 16:35   좋아요 1 | URL
아~ 그리고 보니 한국에는 엘지
가 있었네요.

90년대 신바람 트리오가 활동
하던 시절의 엘지가 생각나네요.

stella.K 2020-12-03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자도 원작을 밤새워 읽었다던데 정말 재밌나 봅니다.
저는 야구에 대해선 1도 모르는데 올초던가? 스토브리근가 하는
야구 드라마 재밌게 본 기억이 납니다.
이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설명에 의하면 처세와 자기계발에도 도움이 된다던네요? ㅋ

근데 표지가 만화로 오해하겠어요.

레삭매냐 2020-12-03 16:40   좋아요 1 | URL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야구에 대해
잘 모르신다면... 홀딱 반해 버리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번트 앤 런, 히트 앤 런 같은 야구
작전 용어들하며 6-4-3 병살타 같은
표현들이 어쩌면 진입장벽이 될 수도...

전 아주 재미지게 읽었답니다 :>

처세/자기계발은 쌩구라입니다 무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도 그런
스타일의 광고를 본 것 같은데, 일본
책들을 일반화시키는 광고문안 같네요.

coolcat329 2020-12-04 07: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중학생이 읽어도 될까요? 야구 지식은 어른 수준입니다.

레삭매냐 2020-12-04 09:08   좋아요 1 | URL
야구 지식만 볼 때는 갠춘해 보입니다.

다만 왕정치-나가시마, 장훈 그리고
김일융 아저씨에 대해 좀 더 알고
있다면 더더욱 좋은 독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무위키 검색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coolcat329 2020-12-04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감사합니다^^

scott 2020-12-04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그리샴도 야구 감독이 꿈이였었데요.
지금은 글로 돈 왕창 벌어서 고향 야구팀 사버렸으 ㅎㅎ 구단주 됨 ^.^

레삭매냐 2020-12-05 08:15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

그야말로 드림 컴 트루네요.
책 써서 돈을 벌어 구단주가
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