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 떠나보내며 -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
알베르토 망겔 지음, 이종인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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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나 책을 많이 읽으면 눈이 멀게 될까? 실명한 도서관장(같은 경우로 실명한 네 번째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이라고 한다) 보르헤스에게 수년간 책을 읽어준 알베르토 망겔의 이야기다. 그는 긴 유목민 생활을 마치고 캐나다에서 살다가 도서관장직 제안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같은 저주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지만, 망겔은 위대한 독서가이고 그의 책 <서재를 떠나보내며>는 우리 같은 독서인들에게 참으로 위험한 책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단테의 <신곡>을 읽지 않았느냐는 준엄한 꾸지람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같은 대지의 숨을 쉬는 이런 동지가 있구나 하는 마음에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나의 독서 스타일은 일단 꽂히는 작가가 생기면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그의 책들을 모은다. 그리고 읽는 건 나중의 일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사서 바로 읽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달만 하더라도 홋타 요시에 작가에 꽂혀서 일단 책부터 사들이지 않았던가. 기세 좋게 시작한 <고야>는 아직도 1권을 못 읽었다. 그동안 다른 책들을 읽느라.

 

누가 뭐래도 내가 읽는 이유는 즐거움 때문이다. 책읽기의 즐거움을 다른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망겔 선생 역시 도서관장으로 부임한 이래, 새로운 독자들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책읽기가 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열혈독서광인 선생은 단발성 캠페인으로 새로운 독자들을 양성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모바일 게임에 흥미진진한 넷플릭스 드라마 그리고 너뷰트를 상대로 수천년 동안 종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책이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건덕지가 1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애서가 혹은 열혈독서광들은 쿨하게 패배를 선언해야 하는 걸까?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망겔 선생은 솔직하게 자신이 탐욕스러운 책의 약탈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도 예전에는 책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책에 메모는커녕, 접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비닐로 싸서 보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런 게 다 무어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4B연필로 간단한 메모와 밑줄을 죽죽 그어 가며 망겔 선생에 버금가는 탐욕스러운 약탈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오독일 지도 모르겠으나, 망겔 선생에 따르면 글쓰기라는 문학의 스타일은 모방과 반복의 연속이다. 조금은 신학적 귀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완벽한 창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세상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불완전하다는 말일까. 저자도 언급한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이 세상의 모든 동식물들에게 명명하는 장면은 지난 수세기 동안 논의되어온 고전적인 주제라고 한다. 원래 그들의 이름이 존재했던 걸까? 아담은 무슨 수로 세상에 존재하는 그 많은 동식물들의 이름을 명명할 수가 있었을까. 무지한 일개 독자로서는 저자가 제기한 질문들에 골이 깨질 지경이다.

 

또한 망겔 선생은 문학은 영원불멸의 골렘이라고도 선언한다. 요 골렘이라는 녀석은 내가 즐겨하는 모바일 게임에 나오는 몸빵 돌멩이 몬스터가 아니라, 유대인의 무슨 설화에 나오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창조물이라나. 우습게도 어리석은 독자는 대가가 만든 명제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대로 저자가 만들어낸 보편(이데아)의 질서를 따라가야 하는 걸까?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억지로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부질없어 보인다. 창작 자체가 불완전한 것일진대, 불완전한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고? 오만가지 질문들이 책을 읽는 내내 쏟아져 내린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알베르토 망겔 선생이 의도한 것은 아니고? 자신의 책을 읽고 누군가 회의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새로운 책에 대한 도전정신을 불태우게 만드는 것 말이다. 무언가 알려고 사유의 단계로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될 테니까.

 

망겔 선생은 사전 예찬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보니 나도 어려서 국어선생님이신 아버지가 집에 비치해 두신 엄청 두꺼운 두 권짜리 국어사전으로 모르는 낱말들을 찾아보곤 했었다. 자전은 또 어떤가? 그나마 사전은 쉽기라도 하지, 부수를 모르면(사실 획수도 아직까지도 헷갈린다) 김찬삼 선생이 세계일주를 구술한 여행기를 읽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횡서가 아닌 종서라 읽다 보면, 줄을 틀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정자도 아닌 약자를 왜 그리 쓰셨는지. 세상의 온갖 정의를 담은 사전의 세계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책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무지의 벽을 부수기 위해 꼬마 독서전사는 사전에 자신의 계몽을 의탁했었다.

 

문득 어제 오랜 친구와 전화를 하다가 너튜브 콘텐츠의 깊이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 기억이 났다. 하긴 짧은 시간 동안에 영상을 통한 정보 전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콘텐츠 크리에이터에게 무엇이 다룰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전권이 주어지지 않았던가. 아니 어쩌면 밀레니엄 시절에 콘텐츠 제작은 새로운 스타일의 글쓰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기존의 작가들이 글쓰기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책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었다면, 새로운 시대에는 동영상 제작이라는 방식으로 책을 대체할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 독자들은 예전에 책을 소비하던 방식대로, 그렇게 생산된 동영상 콘텐츠들을 비판 없이 꾸역꾸역 소화해 내고 있는 중이다. 전통의 책이 지배하던 시절과 달리 댓글이라는 유용하면서도 치명적인 소통의 방식이 더해지면서 콘텐츠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거나, 창작자의 창작 의욕을 깨부수기도 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책을 대체할 새로운 미디엄으로 너튜브 세계의 확장에 그렇게 비판적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너튜브 콘텐츠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독자들은 자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책을 찾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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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7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튜브에서 눈과 손가락을 못떼고 있는 1人 매냐님말에 동감 ㅋㅋㅋ

레삭매냐 2021-01-27 14:36   좋아요 1 | URL
저도 비판적으로 보지만,
어쩔 수 없이 너튜브에 이미
영혼을 털렸네요...

syo 2021-01-27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이라는 곳에 무슨 문제 있는 게 아닐까요? 석면이라든가..... 헛소리입니다.

레삭매냐 2021-01-27 14:40   좋아요 1 | URL
아 씨오님!
씨게 쳐주시네요... 점심 묵다 보고
는 빵 터져부렀습니다.

석면 때문이었고나.

2021-01-27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1-01-27 14:46   좋아요 1 | URL
아, 참말로 부끄럽습니다.

대가 망겔 선생이 의도한 바를
과연 제가 얼마나 이해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나
세상에 허명은 없는가 봅니다.

얼마나 열심으로 책을 읽으시면
그런 지경에까지 도달할까요.
전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 적당
하게 읽어야지 싶습니다. 아 무셔라.
 
표범 - 어떻게 두꺼비를 삼킬 것인가 동안 더 빅 북 The Big Book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최명희 옮김 / 동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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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자 가디언에서 선정한 세계 10대 역사소설이라는 광고가 허명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책에서 이탈리아 출신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 혹은 <레오파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원작 소설이 궁금했다. 그리고 마침 수년 전에 수배해둔 <표범>이 가까이에 있었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책을 펴들었다. 그렇게 잘 읽다가 잠시 휴지기를 거쳐 마침내 다 읽었다.

 

람페두사가 고른 시기는 18605월 그리고 공간은 부르봉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던 두 개의 시칠리아 왕국 중에 하나였던 시칠리아였다. 우리의 주인공은 50세의 멋쟁이, 살리나 공작 돈 파브리치오다. 북부 피에몬테의 사르디니아 왕국을 중심으로 한 리조르지멘토(Risorgimento:이탈리아 통일운동)가 한창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귀족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은 끝장이 났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지배계급이었던 귀족들을 대신해서 새로운 질서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수백년 동안, 민중 위에 군림해온 귀족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지 못하고 몰락해 가고 있었다. 수대에 걸쳐 교양과 예의범절 그리고 특유의 신중함으로 무장한 돈 파브리치오를 필두로 한 귀족들은 새로운 혁명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불온한 혁명의 움직임에 귀족들의 반응은 엉성했다.

 


돈 파브리치오의 젊은 조카 탄크레디 팔코네리 공작 같은 경우, 혁명군의 대열에 서서 부르옹 왕조의 대항에 나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루키노 비스콘티가 1963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도 보게 됐다. 영화는 상당히 소설에 충실한 편이다. 종교와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난봉꾼 역할을 무난하게 해내는 돈 파브리치오 역의 버트 랭카스터는 안성맞춤의 캐스팅이었다. 시대의 미남자 알랭 들롱이 맡은 탄크레디는 또 어떤가팜므 파탈 같은 매력을 발산하는 앙겔리 역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도 대단했다.

 

소설에서는 밋밋하게 전개된 팔레르모 시가전이 영화에서는 기대 이상의 규모로 스펙터클하게 재연되었다. 리조르지멘토의 국민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천인대(붉은 셔츠부대)가 목숨을 내걸고 부르봉 왕군과 싸우는 장면은 대단했다. 총탄과 포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부르봉 왕군은 포로로 잡은 천인대원들을 현장에서 즉결처분한다. 총살당한 병사들의 가족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비극에 울부짖는다. 부르주아로 보이는 왕당파 스파이를 매달라는 시민들의 함성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 때, 눈에 들어온 인물이 하나 있으니 내게는 <돌아온 튜니티>로 얼굴이 익은 이탈리아 출신 테렌스 힐이었다. 놀랍군 그래. 마카로니 웨스턴 배우로만 알았던 튜니티가 이런 역사물에도 출연을 했었군.

 

소설 <표범>에 리조르지멘토라는 커다란 역사의 축이 있다면, 또다른 한편에는 젊은 청춘들의 로맨스가 자리 잡고 있다. 무언가 이루어질 것 같았던 사촌지간인 탄크레디와 돈 파브리치오의 영양 콘쳇타의 사이에, 촌장 카로제로의 아름다운 딸 앙겔리가 등장하면서 파문이 인다. 돈 카로제로는 혁명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신흥 부르주아 계급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었던 영주들에게서 토지를 사들이고, 자산을 늘리는 방식으로 사회경제적 부를 축적한다. 매력적인 앙겔리의 외모에 반한 탄크레디에게 몰락해가는 살리나 공작의 영양인 콘쳇타 보다 앙겔리와의 결합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냉정한 돈 파브리치오는 판단한다.

 

기존의 귀족계급을 대신할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라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 돈 파브리치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로서는 전란의 혼란기에 가족들의 생명을 지키고, 얼마 남지 않은 영지를 수호하는 게 고작이었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혁명의 물결 앞에 무기력한 돈 파브리치오였지만, 마지막 남은 표범 혹은 사자답게 세파에 대처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 새로운 통일국가 이탈리아에서 상원의원을 맡아 달라는 부탁에 대해서도 정중하게 거절하고, 아내와 후계자인 장남을 먼저 보내고 임종을 맞는 순간까지 존엄과 자부심을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예수회 출신 피로네 신부도 주목할 만한 캐릭터다. 살리나 공작 가문에 봉사하면서, 그네들의 특성을 꿰뚫은 혜안을 기른 파드레는 너무 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이 마땅치 않은 농민들에게 의전 같은 스타일에 집착하는 귀족들의 속성에 대해 설파하기도 한다. 법적으로 해결하기 까다로운 문제에 있어서는 파드레라는 신분을 빌어 양측의 화해를 도모하기도 한다. 혼전임신을 한 조카 운칠리나를 위해 해결사로 나선 피로네 신부는 자신의 백부 투리가 신부의 여동생 사리나 몫인 아몬드 밭을 탐하는 장면을 통해 귀족이나 농민이나 다를 게 없다는 점을 확인하기도 한다. 혁명군이 가톨릭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들을 몰수하자, 그동안 교회가 해오던 빈민구제 같은 사업을 누가 대신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을 나누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폰테레오네 집안에서 벌어진 사교모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도회 시퀀스는 압권이었다. 영화에서는 자그마치 45분에 달한다고 하던데, 종언을 앞둔 귀족사회의 마지막 불꽃놀이였다고나 할까. 시칠리아의 한다하는 선남선녀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즐기는 그들만의 세상을 연출했다. 좌중의 시선을 한데 모은 인물은 바로 돈 카로제로의 딸이자 미래의 공작부인인 앙겔리였다. 그동안 갈고 닦은 사교계의 기술을 선보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고, 돈나 앙겔리를 위한 완벽한 사교무대 데뷔전이었다. 앙겔리는 탄크레디의 외삼촌 돈 파브리치오에게 마주르카를 추자는 제안을 던지고, 노쇠한 자신의 스텝을 고려한 살리나 공작은 왈츠를 추는게 어떠냐고 응대한다. 진짜 고수들의 대결이 아닌가. 저녁을 같이 하자는 앙겔리의 제안에 대해서도, 자신의 경험을 유추해서 정중하게 사양하는 절제의 미덕을 선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런 게 귀족 스타일이라는 점을 람페두사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고수답지 않은가.

 

가리발디의 마르살라 상륙 후, 반세기가 지난 시점의 엔딩에서는 미혼으로 인생의 황혼을 맞은 콘쳇타가 다시 한 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신이 아닌 앙겔리를 선택한 탄크레디에 대한 비밀이 드러나고, 공작가의 영양들이 애지중지하던 초상화와 성물들이 교구 사제의 부적격 판정을 받는 것으로 소설 <표범>은 마무리된다.

 

속세의 인간들이 가장 탐할 만한 주제인 정치, 종교 그리고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람페두사 작가의 전략은 탁월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바라는 욕망을 추구했다. 그리고 필멸의 존재들은 시간 속에서 사위어 갔다.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주체는 우리 인간이라는 점을 그는 <표범>을 통해 보여준다.

 

[뱀다리] 소설은 정말 훌륭하나, 번역은 너무 심했다. 감수를 하지 않은 걸까. 같은 페이지에서도 한 인물의 이름을 오기하다니...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출간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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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1-26 1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책도 영화도 너무 궁금하네요!

레삭매냐 2021-01-26 13:08   좋아요 2 | URL
책을 보고 나서 영화를 보니
무언가 합이 짝짝 들어 맞는
그런 느낌이었답니다.

다만 러닝타임이 186분이라
ㅎㄷㄷ입니다. 야금야금 보고
있습니다.

수이 2021-01-26 1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탈리아 소설 목록 짜고 있었는데 레삭매냐님이 이렇게 짠 올려주시니 얼른 올려놓아야겠어요.

레삭매냐 2021-01-26 13:19   좋아요 2 | URL
출간될 거라고 했지만 결국
나가리가 난 이탈리아 작가
디노 부차티의 <시칠리아에
곰들이 쳐들어왔어요>와
죽기 전에 꼭 읽어 봐야 한다는
<타타르 황야>도 출간되었으면
합니다.
 
런던, NW
제이디 스미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작년부터 읽던 제이디 스미스의 <런던 NW>를 한달도 넘어서 다 읽었다. 사실 이 책을 읽다 말고 이 책 저 책 집적거리다가 더 이상 묵혀 두었다가는 아예 완독하지 못할 것 같아 서둘러서 읽었다. 그전에는 비슷한 케이스로 람페두사의 <표범>을 읽었다. 지금 영화도 보고 있는데 아주 마음에 든다. 역시 비스콘티다.

 

이번에도 역시나 삼천포로구나. 리뷰를 차례대로 써야 하는데 가장 최근에 읽은 책부터 하려다 보니 쓸데없는 말들이 길어졌다. NW는 런던 북서부를 지칭하는 우편번호라고 한다. 런던에는 가본 적이 없으니, 순전히 런던 토박이라고 볼 수 있는 저자의 인도를 따라가는 수밖에. 해외문학을 접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지명이나 사회적 배경을 안다면 쏙쏙 들어올 법한 이야기들이 예의 지식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소설 <런던 NW>에는 콜드웰 출신, 네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진짜 주인공은 첫 주자인 리아 한월과 변호사로 출세한 내털리 블레이크다. 다른 제이디 스미스 작가의 소설들처럼 <런던 NW>에서도 계급 문제와 인종 이슈가 빠지지 않는다. 전형적이 중산계급 출신의 리아는 사회적으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경우다. 하지만, 그녀의 절친 내털리 아니 원래 이름인 키샤는 어쩌다 보니 구질구질한 동네 콜드웰을 벗어나 변호사로 성공했다. 게다가 남편인 프랭크 드 어쩌구는 잘 나가는 금융업자다.

 

한 마디로 말해, 키샤 블레이크는 비록 중산계급 출신의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모조리 부수고 성공의 사다리에 오른 그런 입지전적 인물이다. 문제는 거의 완벽해 보이는 그녀의 사회경제적 레쥬메가 그녀의 행복을 담보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설정 자체가 하나의 클리셰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가정마다 소소한 문제들이 있는 것처럼 모두가 추구하는 부촌에서 완벽한 가정을 건설하는데 성공한 내털리 블레이크에게도 채워지지 않는 그런 갈급증이 있다는 것이다. 성공의 정점에서 삐딱하는 순간, 완벽해 보이는 가정의 붕괴는 시간 문제일 뿐이다.

 

샤라는 얼치기 사기꾼에게 피같은 생돈을 뜯기는 리아는 순수하다. 남편 미셸은 내털리네처럼 성공하고 싶다. 아니 한 마디로 말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많은 돈을 벌고 싶다. 하지만, 자본이 부족한 이민자 출신 중산계급이 그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없다는 게 현실이다. 우리네처럼 한 주에 7명씩 뽑히는 로또나 기대하는 수밖에. 그래도 성공의 사다리에 대한 욕심을 저버릴 수 없어, 주식투자에 나서지만 어디 개미들이 소액투자로 그런 막대한 성공을 거둘 수는 없는 법이다. 주식시장이라는 도박판은 결국 돈많은 투자자가 항상 이기는 법이다.

 

리아와 미셸 부부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하나의 강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아이를 낳는 것이다. 미셸은 무척이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지만, 리아는 그런 남편 미셸의 바람을 저버리고 몰래 피임약을 복용한다. 물론 이에 동조자는 내털리다. 후반에 가서 그 사실이 밝혀졌을 때, 미셸은 내털리에게 전화해서 화를 낸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이 둘에 비해 부수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필릭스 쿠퍼와 네이선 보글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아니 보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내털리(키샤)와 나머지들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필릭스나 네이선 모두 약쟁이라는 어두운 과거를 털고 새출발을 원한다. 필릭스는 새로운 애인을 만나 과거를 일거에 청산하려다가 그만 어이없는 사고로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제이디 스미스는 앞으로 선행을 하겠다고 마음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점을 꼬집고 싶었던 걸까.

 

자신의 일탈이 남편 프랭크에게 드러난 내털리가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만난 이가 바로 학창 시절 친구였던 네이선이었다. 내가 보기에 필릭스보다 더 문제가 많은 인간이 바로 네이선이었다. 자신이 노숙자라는 사실을 성공한 변호사 내털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네이선. 그에게 과연 새출발할 의지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성공이 오롯하게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런던 NW>는 어쩌면 하나의 복음처럼 받아들여질 지도 모르겠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문구처럼 말이다. 순간의 즐거움 대신, 미래의 성공을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한 내털리 블레이크 같은 변호사야말로 각박한 각자도생의 시대를 상징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 리아와 필릭스(역설적이게도 그 이름의 뜻이 행운아라고 하던가) 그리고 네이선은 모두 그런 경쟁에서 낙오한 인물들이다. 그러니 작금에 그들이 보여 주는 삶의 모습들은 마땅한 것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제이디 스미스는 그런 엄청난 성공을 거둔 내털리/키샤 같은 인물도 실제 삶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오히려 내털리의 남편 프랭크는 리아와 미셸 부부가 자신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행복이란 물질의 유무와 상관없이 상대적이란 말일까? 에이 설마 그럴 리가.

 

키샤 블레이크에게 성공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는 개명(改名)이었다. 흑인이나 여성이라는 문제는 그녀에게 장애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콜드웰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내털리를 키샤로 기억한다. 노력에 의한 신분이나 계급적 상승도 사람들의 기억마저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일까.

 

<런던 NW>를 다 읽고 나니, 미루던 숙제를 마친 듯한 그런 느낌이 들더라. 제이디 스미스 작가의 에세이 모음이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그 책은 나오지 않나. 그리고 아울러 5년 전에 발표된 마지막 소설 <스윙 타임>도 빨리 번역되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게 원서로 453쪽이라고 하니 분량이 상당한 모양이다. 일단 그 때까지 아디오스, 제이디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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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이방인의 산책
다니엘 튜더 지음, 김재성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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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은 자고로 외로운 법이다. 오래전 이방인 생활을 하던 시절에 느꼈던 바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홀로 지내다 보면 참 벼라별 생각이 다 들곤 했다. 그 땐 진짜 시간이 넘쳐흐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되돌아보면 그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했던 것 같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영국 출신 이방인 다니엘 튜더와의 만남은 오래 전 그의 첫 번째 책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책은 다 읽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다 읽지 못했을까? 궁금했다. 이번에는 다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우선 들었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에 대한 단상 그리고 이런저런 삶의 양태와 사유들이 어디서나 사는 건 다 그렇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유명대학 옥스퍼드 출신의 이방인은 저널리스트로 한국을 찾은 모양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아주 다양한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에 다니던 시절, 주말 7시에 등산가니 나오라는 말에 식겁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는 분명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다른 거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근대화에 성공한 한국에서 그런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직장상사는 무소불위한 권력의 화신이다. 까라면 깐다의 은근한 비판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그는 이방인이니 봐주지, 같은 얼굴을 한 이들에게 자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처리즘의 세례를 받은 글쓴이의 아버지 역시 신자유주의 치하에서 역시 각자도생이 최고라는 프로파간다를 받아 들였지만, 정작 당신이 실직되고 자존감이 떨어지면서 국가 공동체의 혜택을 많이 받은 대표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저자는 증언한다. 이제는 희미해져 가는 공동체 의식의 부활이야말로 삶에 있어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라는 전도에 그만 항복하게 된다. 초코파이 선전에나 나올 법한 정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조금은 지저분하고 불편하지만, 이 있었던 공간들은 죄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삭제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정감 어린 공간들이 철거된 후에 그 곳을 채우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맛과 스타일의 프랜차이즈 카페와 식당들이다. 우리의 이방인은 우리에게 그런 게 좋냐고 묻는다. 이방인에게 에 대한 레슨을 받게 될 줄이야. 그가 말한 아현동으로 대표되는 공간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다음 기회를 엿보자.

 

이방인의 차별과 모욕에 대해서도 저자는 솔직한 고백을 보여준다. 자신의 고향이 아닌 타지에 가서 정착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술은 바로 그 동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구사다. 이방인은 솔직하게 고백한다, 자신이 아무리 한국말을 하더라도 자신보다 태생적으로 잘하는 닝겡들이 최소한 5천만 명은 된다고. 문득 그를 포함한 이방인들에게 조금은 따뜻한 시선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강대국 출신의 백인들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잘 알고 있다. 너무 솔직해서 더 정감이 간다고나 할까. 바로 이거지.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우리 인류에게 자연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점점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부담스러워 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충실한 분석을 보여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빛처럼 빠른 속도로 반응하는 전자 기기의 메시지를 더 선호하게 됐다. 낯선 이들과의 대화는 기피하게 됐다. 카톡도 좋아하지만, 역시 진정한 관계는 대면에서 비롯된다는 나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물론 요즘 같은 코시절에는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사실 다니엘 튜더가 지적하는 대로 관계에는 수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만나지 않는다는 건, 불행하게도 그 사람의 우선순위에서 친구나 지인에게 낼 시간이 없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정말 원한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만날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예전에 유럽 여행에서 만난 동생의 결혼식 초대를 받았는데, 신랑 말고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예식장에 가려니 그렇게 꺼릴 수가 없더라. 그런데 그 마음을 접고 갔다 오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아 초반에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했었는데, 현대인들이 점점 더 관계에서 오는 친근함을 원하지만 또 동시에 그런 관계 설정을 위한 투자에는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내가 감정의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하는 안아주기 같은 서비스들이 창궐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얼마 전, 작고한 김광석의 목소리를 샘플링해서 인공지능이 김범수의 <보고 싶다>를 부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광고를 보았는데 그야말로 소름이 끼치더라. 한편으로는 너무 똑같은 고인의 음색에 신기하면서도 아니 어느새 이렇게 기술이 발전했을까? 앞으로는 또 어떤 방식으로 우리네 삶을 바꿀까하는 노파심이 불쑥 들었다. 지금도 버거킹에 등장한 키오스트 주문대 때문에 연세드신 분들이 주문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린다고 하지 않은가 말이다. 누군가의 편리함이 또 누군가의 실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우리가 사는 지구별에 언젠가 고별하고 소멸해야 할 존재인 나의 죽음에 대한 자세도 마음에 들었다. 죽음이라는 소멸을 거부하고 영생불사가 과학의 힘으로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현실이 저만치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아니 영사불사는 아니더라도 수명연장의 꿈은 어느 정도 현실화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글쓴이의 할머니처럼 치매에 걸려 사랑하는 이들을 알아 보지 못하며 빈껍질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무용을 전공한 다니엘 어머니의 말처럼도 싫고. 그저 적당하게 살다가 가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렇다면 과연 나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뭐 그것도 어떻게 되겠지,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글쓴이의 말처럼 삶의 어느 부분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닌가.

 

길게 돌아왔다. 글쓴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외로움 공장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외로움을 어떻게 달랠까 생각해 본다. 우리 인간이라는 종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21세기 문명은 인류 협동의 소산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 종래의 공동체 정신을 부인하고, 혼자 사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다. 노년의 삶을 위해서도 인간관계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장에서 은퇴 또는 해고되었을 때, 그 빈자리를 어떻게 채운단 말인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나에게 묻는다. 외로움을 어떻게 달래느냐고. 외롭거나 심심할 때면 나는 책을 읽는다. 그거면 됐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뱀다리] 홋타 요시에 작가의 <라 로슈푸코> 전기를 읽는 중이라 그런지,

책의 도중에 만난 프랑수아 라 로슈푸코의 <막심>에서 인용한 문장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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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2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1-01-26 01:00   좋아요 0 | URL
왠지 모르게 공감하게 되네요...

그 ‘정‘은 정말 깨끗하고 훤한
곳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유니콩
같은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동안 팔린 초코파이로 지구를
몇 바퀴는 돌릴 수 있다고 하던데
이제는 정말 사양길인가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1-01-25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국 출신의 이방인이라고 하시니 sting의 <Englishman in New York>이 생각나네요^^:)

레삭매냐 2021-01-26 01:18   좋아요 1 | URL
말씀 듣고 나니 정말 그렇네요.

스팅의 그 노래는 처음 들었을
때부터 반한 곡이었답니다.

같은 앨범에 들어 있는 <Sister
Moon>도 참 좋습니다.

han22598 2021-01-26 0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방생활로 그나마 사람다운 생각을 하고 살 수 있는 일인 여기 있습니다. 그 전의 나를 생각하면 끔직합니다.

레삭매냐 2021-01-26 19:21   좋아요 0 | URL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이란...
정말 -

지나간 뒤에 생각해 보면 그런
적이 있었나 싶지만, 그 시절에
는 참 그랬습니다.
 
고야 1 - 에스파냐 - 빛과 그림자 한길그레이트북스 109
홋타 요시에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나중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 책들이 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책은 더 이상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럴 경우,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중고책으로 데려와야 한다. 나의 경우에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홋타 요시에의 <고야> 시리즈가 그랬다. 물론 중고로도 구할 수가 있겠으나, 시간이 없어서 그냥 도서관을 이용했다. 무려 4권이니 대충 300쪽만 잡아도 1,200쪽 되시겠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우리의 저자 홋타 요시에 선생의 글은 이런 대작 쯤은 금세 읽을 수 있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니 말이다.

 

3년 전에 사둔 고야를 그린 독일계 유대인 리온 포이히트방거의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도 있었구나. 사서 첫 몇 페이지를 읽긴 했었는데 홋타 요시에 작가의 책만큼 흡입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요시에 상의 책을 읽고 나서 포이히트방거의 책도 만나봐야지 싶다.

 

일본에서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장장 4년간 신문 연재로 발표된 <고야> 시리즈는 이방인으로 에스파냐 현지답사까지 마다하지 않은 저자의 노고가 담뿍 담긴 그런 책이다.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장정으로 우리에게는 그저 열정과 플라멩코의 나라로 알려진 에스파냐의 실체를 알려 준다. 카스티야 고원에 자리 잡은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가 북위 40도 정도(우리나라로 치면 신의주 정도에 해당한다)로 굉장히 추운 날씨의 나라라는 사실부터 찍고 들어가자. 에스파냐를 대표하는 춤이라는 플라멩코 역시 주류가 아닌 집시의 춤이라는 사실도 격파하자.

 

로마의 식민지로 출발해서 이슬람 세력에게 장장 800년간의 통치를 받은 뒤, 레콩키스타라는 국토회복운동으로 북부로 쫓겨난 기독교 왕국들이 무슬림 세력을 쫓아내고 카스티야 아라곤 연합으로 마침내 이베리아 반도의 통일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정치는 에스파냐 귀족들이 담당하고 기술은 이슬람 세력이 그리고 상업과 유통은 유대인들이 맡는 분업으로 에스파냐 국가는 굴러갔다.

 

홋타 요시에 작가는 에스파냐를 에스파냐답가 만드는 요소로 에스파냐어와 가톨릭을 꼽는다. 전자에는 800년 무슬림 통치의 영향으로 10%에 달하는 말들이 아랍어에서 온 말이라고 했던가. 가톨릭 왕국 에스파냐에서 종교는 국가적 단일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보수적 종교재판으로서의 부정적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일단의 에스파냐 출신 모험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해서 식민지를 개척하고 신대륙의 부가 모국 에스파냐로 흘러 들면서 제국은 그야말로 황금시대를 구가하기에 이른다.

 

좋았던 시절은 짧게 끝나고, 종교재판소가 사회 모든 차원에서 발목을 잡는 보수반동의 시대가 도래한다. 신대륙에서 흘러들어온 막대한 재화가 국가 재정을 파탄시키는 역효과의 원인이었다는 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런 노력 없이 획득한 재화 때문에 에스파냐 사람들을 힘든 일, 다시 말해 노동을 경멸하는 풍조마저 생기게 되었다. 여튼 홋타 요시에 작가는 우리의 주인공 프란시스코 고야가 에스파냐 북부 아라곤 지방의 사라고사 부근의 푸엔데토도스에서 1746330일 태어나기 전까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서 18세기 에스파냐가 처한 현실을 개진한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275년 전에 태어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풍문과 전설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도 요시에 작가의 저작을 흥미롭게 만드는 점 중의 하나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속설과 달리 그는 도금 기술자인 아버지와 하급 귀족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른 저명한 천재 예술가와 달리 그는 어려서 그렇게 빛나는 실력을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다. 사실 그의 재능은 삼십대가 지나서야 비로소 만개했다고 하니, 대기만성형 예술가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17세기만 하더라도 디에고 벨라스케스라는 걸출한 화가의 존재로 에스파냐 회화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사실 당시만 하더라도, 화가들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에 나오는 난쟁이나 광대 같은 존재로 그림쟁이나 화공에 불과했노라고 저자는 묘사한다. 화가들은 귀족이나 사제들의 주문에 따라 인물화를 그리는데 주력했다. 벨라스케스만 하더라도 맞선용 그림을 그리는 그림쟁이였다고 할 정도니 말 다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작품과 작가의 주관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회화가 제작되었다. 오로지, 발주자의 주문에 의한 그림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영혼이 없다는 지적도 일견 타당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그리스 출신 엘 그레코의 시대까지는 에스파냐 회화가 명맥을 유지했으나, 18세기 접어들면서 기존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대신한 부르봉 왕가가 에스파냐 왕위를 차지하면서 에스파냐는 그야말로 이웃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예술적 식민지 같은 위치가 되었다나. 종교재판소의 엄숙주의는 당시 각국에서 유행하던 나체화 따위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자체 검열이 진행되던 그런 시기였던 것이다.

 

철저하게 현실순응주의자였던 젊은 날의 소년 고야는 사라고사에서 엄격한 도제식 예술교육의 진수를 전수받는다. 고전 예술의 창조 뒤에 이런 고된 과정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그리고 싶은 주제들을 골라 그렸을 거라는 생각은 나의 철저한 오산이었다.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숱한 고난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는 걸작들이 탄생했다는 걸 미처 몰랐다. 십대 소년이 된 고야는 마드리드를 거쳐, 이십대에는 예술세계의 중심이라는 로마도 경험했다.

 

그러는 동안 고야는 지금으로 치면, 그림쟁이들을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도전했다. 아직 자신의 재능이 꽃을 피우기 전이라 두 번 모두 떨어졌다. 오버그라운드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경연대회와는 운이 닿지 않았는지 고야는 족족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했다. 세 번의 경연도전 실패였다.

 

1766년에 발생한 민중폭동은 한 세대 뒤, 나폴레옹 군대에 유린된 에스파냐 민중봉기와 조응하는 전초전이었다. 예수회 탄압과 챙모자와 망토 금지령에서 촉발된 민중봉기는 그 어느 곳보다도 아라곤의 사라고사에서 격렬했다. 그 결과 250명에 달하는 이들이 즉결 처분되었다고 하던가. 젊은 청년 고야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것보다도 쇠사슬을 찬 채 끌려가는 사제들의 모습이었다. 결국 그동안 에스파냐 사회를 지배해온 종교권력에 대한 세속권력에 대한 승리라고 분석해야 할까.

 

거의 전설이 되어 버린 고야가 가는 곳마다 발생하는 폭력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전설과 풍문이야말로 자신 같은 글쟁이들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냐는 홋타 요시에의 유머감각에 그야말로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이백 수십 년 전에 생존했던 실존 인물의 빈 공간을 마구 파고 들어가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우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렇지 이 맛에 바로 역사소설을 읽는 게 아닐까 싶다.

 

25세의 고야는 다시 고향 사라고사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래의 매형 바예우의 조언으로 사라고사 엘 필라르 대성당의 천장화 수주를 맡는다. 사전에 경쟁자 곤살레스 벨라스케스의 낙찰가를 알고,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으로 발주를 따내는데 성공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고야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꼬집는다.

 


홋타 요시에 선생은 고야가 처음으로 그린 초상화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시도도 등장한다. 그의 귀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중년에 귀머거리가 된 실제 상황에 대한 예언처럼 들린다. 사실 청각 상실의 진짜 이유는 천둥 번개 때문이 아니라 젊은 시절 로마와 마드리드의 유곽에서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출세를 위해 바예우의 동생과 정략결혼해서 자그마치 스무 명에 달하는 자식들을 생산한 고야의 가부장적 태도에 대해서도 저자는 신랄한 비판을 감추지 않는다. 고야는 훗날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숱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데, 그것은 당시 대외적으로 엄숙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타락할 대로 타락한 귀족사회의 그것과 견주어 비판한다.


일단은 여기까지... to be continued...


어쨌든 신분세탁을 위해 하급 귀족 출신이었던 어머니 집안의 데(de)라는 귀족 칭호까지 날조하고 가문의 인장까지 만드는데 열중했던 고야는 이십대 후반에 드디어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대세순응주의자였던 고야는 스승님인 루산이나 처남 파코까지 제치고 사라고사에서 명실상부하게 제일 잘 나가는 그림쟁이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전체를 중시하고 세부는 전체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고야의 이데올로기가 등장한 것도 엘 필라드 대성당의 프레스코 천장화에 이어 아울라 데이 수도원의 벽화를 정복하면서 자신감을 얻은데 힘입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에스파냐 세게의 중심 마드리드 정복이었다.

 

한편 세계제국 에스파냐의 현실은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왕실에서는 모직물이나 태피스트리 공장 같은 생산시설에 투자했지만, 그것은 민중을 위한 기초제품 생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왕실의 사치를 위한 것이었다. 세기의 라이벌 영국이 훗날 모직을 대체할 면직물 생산에 전력투구하면서 에스파냐가 영국을 따라잡을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 기사 계급 이상에선는 육체노동을 경멸하는 사회풍조가 대세였다. 홋타 요시에 선생은 이런 17세기 에스파냐의 사회경제적 요소들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작업을 시전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단순하게 어느 한 예술가의 삶만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술가가 살던 시대에 대한 조망까지 한다는 게 얼마나 지난한 작업이었을까. 이방인 예술가의 삶을 추적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요시에 선생의 노고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렇다 할 산업시설이 부재한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품 구매를 위한 자금은 어디에서 왔을까? 구매 대금은 아메리카와 필리핀의 식민지에서 왔다고 한다. 특히 멕시코에서 유입된 대량의 은은 에스파냐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이었다. 식민지에서 유입된 자금이 아니었자면, 에스파냐 경제는 단박에 붕괴되었으리라. 저자는 정확하게 에스파냐가 해외 식민지를 잃는 순간, 국가는 바로 알거지가 될 판이었다고 증언한다.

 


(결국 절판된 책 1-2권을 구하는데 성공했다. 책도 구했으니 진도를 쑥쑥 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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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1-15 1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야에 대한 책 몇 권은 읽어봤지만, 훗타 요시에가 쓴 책은 안 읽어봤어요. 안 읽은 이유는 단순해요. 네 권짜리 책이니까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1-01-16 09:58   좋아요 0 | URL
저는 홋타 요시에로 처음 고야를
만나게 되었는데 너무 재밌습니다.

작년에 카라마조프 만나면서 시리즈
에도 면역에 생긴 모양입니다 :>

요시에 선생의 책을 마치고 나면
리온 포이히트방거의 <고야>가
기다리고 있답니다.

stella.K 2021-01-15 2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따, 좋으시겠어요. 그런 책 있죠.
더구나 절판되면 어찌나 뿌듯한지...ㅎㅎ

레삭매냐 2021-01-16 09:59   좋아요 1 | URL
아니... 제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절판의 운명인지라.

일단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어제
수소문해서 1-2권 득템한 다음에 바로
갈아 탔습니다.

23년 전에 나온 책은 정말...

공감하는 바입니다.

scott 2021-01-15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드커버판은 도판이 칼라인데 그래도 대출 받자마자 후딱 읽으신 매냐님 진정한 독서人!

레삭매냐 2021-01-16 10:00   좋아요 1 | URL
급하게 읽긴 했지만 1권도 아직
다 읽지는 못하고, 이자 묵을까봐
선 리뷰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읽으면서 쓰는 리뷰 되겄습니다.
하드커버 신판이 역시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