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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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읽겠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 책들이 있다. 그 중에서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은 결국 몇 차례 시도 끝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한 번 집어 들었다가 나가 떨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너튜브에서 유시민 선생의 <알릴레오북> 짤을 만나게 되었고, 선생이 다룬 책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펼쳐 들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이윤기 역자의 번역부터 시작해서 숱한 버전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유 중이다. 이번에도 선택은 역시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윤기 역자의 중역을 골랐다. 예전에 빨간책방의 영향 탓이라고나 할까. 이번에 알릴레오에서 정본으로 삼은 책은 이윤기 역자의 책이 아니더라.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이 중요하기 때문에 알릴레오북을 참조만 하고 건성으로 넘겼다. 주인공 알렉시스 조르바가 모름지기 절대 자유인이라고 하는데, 타인의 생각에 속박되고 싶지 않은 독서인의 기개라고나 할까. 그래도 조금의 정보 정도는 얻어도 되지 않나 자신을 합리화시켜 본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은 1946년이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은 출판으로부터 30년 정도 전인 1916년 정도라고 한다.

 

카프카즈의 그리스인 동포들을 구하러 가자는 절친의 호소를 뒤로 하고 크레타 섬의 갈탄광 경영을 위해 아테네의 외항인 피레우스에서 배에 오르는 35세의 화자. 그는 그곳에서 65세의 알렉시스 조르바와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된다. 화자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투영한 그리스 지식인/먹물의 표상이라면, 뱃사람으로 세상 안해본 일이 없는 남자 조르바는 그야말로 동물 아니 짐승에 가까운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지닌 남자다. 전자가 실천력이 떨어지는 이상주의자라면, 후자는 오직 현재만 사는 그런 철저한 현실주의 화신 같은 남자다. 시작부터 저자가 준비한 주인공 콤비는 공간을 크레타 섬으로 옮겨 숱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준비를 마친다.

 

단테의 <신곡>을 여행 중에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 먹물 화자에 비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조르바는 좌충우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천력을 보여준다. 뻔뻔하게 카바레 출신 가수 마담 오르탕스에게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모습을 보라. 그가 뜯어 먹는 닭고기와 위장에 때려 붓는 포도주는 바로 그런 행동을 위한 연료다. 그가 부불리나라고 부르는 마담 오르탕스를 사랑하는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왠지 그런 조르바에게서 카사노바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유럽을 주유하며 추억을 쌓은 젊은 지식인이 오지 않은 과거에 집착하는 동안, 우리의 주인공 조르바 씨는 쉴 새 없이 자신의 과거 무용담을 자랑하고 보스를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갈탄광의 모든 업무를 해치운다. 자신의 아들 뻘인 보스를 위해 요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들의 나라인 그리스인이면서도 독신(瀆神)도 두려워하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보스의 서술이 진행될수록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조르바가 모습이 현현된다.

 

알릴레오북의 진행자들에 따르면, 진정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근심과 걱정이 바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들이다. 아마 그 중에서도 최고는 물질적 결핍이 아닐까? 그놈의 먹고사니즘과 일용한 양식을 위해서 우리는 물질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런 속박된 존재들이다. 게다가 소비만능주의 시대에, 굳이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들이 우리네 삶을 풍족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모든 미디어를 동원해서 사방에서 압박을 가하지 않는가.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다면 그런 기대와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데 미스터 조르바 같은 배포가 없다면 그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리라.

 


(문지 원서 버전에서는 "용 아저씨"로 번역이 되어 있다. 난 오그레가 사람 이름인 줄 알았네 그래.)


몇 번이나 초반부를 읽은 덕분에 기시감 때문인지 진도가 쑥쑥 나간다. 화자 오그레에게 조르바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동시에 연애지상주의자이기도 하다. 동네 청년들을 들썩이게 하는 젊은 과부를 맺어 주려는 그의 시도는 젊은 스토아주의자에게 걸맞지 않는 옷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로 말해,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게 낡은 에피쿠로스주의자의 신념이었다. 젊은 시절, 터키인들이나 불가리아인들과 격렬한 투쟁을 벌인 자신의 경험을 셰에라자드처럼 오그레에게 들려주며, 모두가 헛된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젊은 시절 발칸 반도는 물론이고 러시아까지 종횡무진 누비며 사랑의 전도사였던 늙은 전사의 회고는 마치, 오스만 터키에 대항하는 그리스 민족주의의 거센 물결을 목격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 다음부터는 실패의 연속이다. 고가 케이블을 설치해서 수도원 부근의 목재까지 팔아먹겠다는 계획을 세운 조르바는 고가 케이블 제작에 필요한 물품 구매를 위해 칸디아로 간다. 그곳에서 만난 롤라라는 젊은 카바레 가수에게 화자의 피 같은 돈을 탕진한다. 이 얼마나 뻔뻔한 행동이던가. 자하리아라는 반미치광이 수도사를 만나 수도원에 불을 지르라고 사주를 하지 않나... 이성보다 그때 그때 자기 감성에 충실한 인간 조르바의 모습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르게 된다. 동네 젊은 과부를 사모하던 청년의 죽음에 이어(비극의 전주곡이다) 조르바의 끝없는 부추김에 힘입어 결국 용단을 내린 화자는 과부를 찾는다. 이 장면에서는 그놈의 오렌지물이 기억에 남는다.

 

과부의 죽음으로 시작된 재난은 결국 화자와 조르바의 갈탄광 사업까지 모조리 말아 먹게 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무존재와 거덜의 순간, 화자는 지고의 행복감을 느낀다. 한 마디로 말해 나의 모든 것을 비워야 비로소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걸까. 오로지 그전부터 준비해오던 붓다에 대한 원고 하나를 마무리한 뒤, 결국 화자는 조르바와 영원히 이별한다. 그리고 세상을 주유하던 화자는 희대의 영걸 알렉시스 조르바에 대한 연대기를 남기기로 결심한다. 아무리 오디세우스의 활약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호메로스 같은 시인이 없다면 그의 영웅적 활약은 후대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런 점에서 화자는 호메로스와 오디세우스가 세운 그리스적 전통을 그대로 따른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 읽으면서 나는 지난 수년 동안 옥죄어 오던 조르바 읽기로부터 해방되었다. 아거야말로 조르바가 그렇게 목청 높여 주창하던 자유가 아니던가. 물론 그런 작은 성취 뒤에 찾아오는 허무는 또 어쩔 것인가.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부분은 마담 오르탕스가 죽고 나서 곡쟁이들과 마을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는 그녀의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경쟁에 대한 서술 장면이었다. 사람이 죽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뒤지면 안된다는 급한 마음에 곡을 하지 않나, 고열로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닭과 토끼들을 삶아 잔치를 벌이는 그들의 모습 앞에 그야말로 웃픈 심정이 들었다.

 

녹로 돌리는데 귀찮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절단하는 조르바가 들려주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는 천일야화처럼 매력적이다. 젊은 시절에는 애국자로 터키인과 불가리아인들을 마구 죽이는 게릴라 전사였다고 고백하지 않던가. 누가 이런 영웅담을 마다할 것인가. 카프카즈의 50만 그리스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친구 스타브리다키와 달리 화자는 언제나 말과 지식만 앞세우는 그런 펜대 운전사였을 뿐이다.

 

조르바는 자신의 보스에게 지난 35년 동안, 한 번이라도 치열하게 산 적이 있었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린다. 화자는 그렇기 못했기에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야생의 짐승 같은 조르바의 매력에 흠뻑 취해 버린 것이다. 언제나 주저하다가 모든 기회를 날려 버린 자신의 과거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조르바는 크레타 섬에서의 이별 이후에도 화자가 계속해서 바보짓을 멈출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지식인들이 무언가 터무니없는 짓을 하기에는 너무 영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무학의 조르바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바로 자유를 속박하는 억압의 본질이다.

 

내가 만약 젊은 날에 조르바를 읽었다면 아마 장대한 경험을 한 꼰대의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지 않았을까. 화자보다는 언제나 에너지 넘치는 조르바에 가까운 나이가 되자,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늙다리 조르바의 배짱에 감탄하게 된다. 누구는 이 책을 3, 4독했다고 하던데 나는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이나 조르바를 다시 만나게 될지 궁금하다. 다른 버전의 책들이 많으니, 그 때마다 새로운 책들을 만나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나저나 나도 마냥 자유롭고 싶구나, 조르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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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08 1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조르바는 영화도 좋았음요 ㅋㅋ홋타 요시에 책 읽으면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읽게 됩니다 ^0^

레삭매냐 2021-02-08 10:52   좋아요 3 | URL
네이!~ 그렇지 않아도 영화는 수해배
두었답니다 :> 아직 자막을 구하지
못해서리 못보고 있네요.

홉스봄 선생의 <혁명의 시대>는 작년
말에 시작했는데... 반짝 읽고는 잠시
휴지 중이네요.

일단 레비-스트로스 책은 어디에 있는
지부터 ㅋㅋㅋ 감사합니다, 스캇트님.

막시무스 2021-02-08 13: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조르바를 첨부터 다시 읽은듯한 감동적인 리뷰 감사드립니다! 조르바는 어떤 형태의 글을 읽어도 사랑인것 같아요! 조르바 에너지로 뜨끈뜨끈한 하루되십시요!ㅎ

레삭매냐 2021-02-08 13:34   좋아요 2 | URL
제가 이 책에 네다섯번이나 도전했다가
실패해서, 내 이번엔 반다시 완독하리라
작정하고 덤벼서 3일 만에 다 읽었네요.

점심으로 때려 넣은 뼈해장국처럼 뜨끈
뜨끈 졸바의 에너지, 만빵입니다 !!!

bookholic 2021-02-08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렵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렵게 읽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인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뚯?^^

레삭매냐 2021-02-08 17:56   좋아요 2 | URL
종교나 이데올로기 그리고 무엇보다
먹고사니즘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조르바처럼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요.

적어주신 바에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이미 머리는 자유를 희구하려는 시도에
차단막을 치는 거죠.

얄븐독자 2021-02-08 2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조르바라는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제 입장에선 만약 세상 모든 인간이 조르바와 같은 자유인이라면... 하고 가정해볼때 과연 그 세상은 유토피아 같을까? 저는 아닌것 같습니다. 천하의 난봉꾼 같은 조르바라는 마초적 남자를 너무 자유인 프레임으로 포장한게 아닐까 싶어 저는 조르바라는 작품을 불편케만 읽은 기억입니다 ㅋ

막시무스 2021-02-08 21:31   좋아요 2 | URL
저도 얄븐독자님이 지적하신 마초 이미지에 공감합니다. 문학적 캐릭터나 레토릭임을 감안하더라도 조르바(작가)의 여성관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작가가 제시하는 자유라는것이 보편성을 가장한 국가, 사회, 계층, 종교 등이 강요하는 왜곡된 가치관, 부당한 도덕관, 폭력적인 편견 등에서 얼마나 당당할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보면 조르바의 자유가 방종이 아니라 쉽게 실행에 옮길수 있는 그런 자유인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2021년에 맞게 재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럴수록 자유인의 의미는 더욱 더 진정한 자유인으로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레삭매냐 2021-02-09 10:41   좋아요 1 | URL
상마초 난봉꾼 조르바 같은 닝겡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팍팍할까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916년,
그리고 알렉시스 조르바가 나이가
65세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전근대적 사고의 소유자일 것 같습
니다.

지지부진했던 독서가 독자와는 맞지
않는 너무 강렬한 캐릭터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붕붕툐툐 2021-02-08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 조르바는 자유죵~ 완독 축하드려요~👏👏👏

레삭매냐 2021-02-09 17:0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수년간 저의 애물 덩어리였던
책을 마침내 읽게 되었네요.
 
사랑한다면 거리를 두는 게 좋아 (특별판 리커버 에디션, 양장) - 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고양이의 행복 수업
제이미 셸먼 지음, 박진희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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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요즘 만나는 책들은 왜 죄다 고양이가 들어가는 거지? 이틀 전, 제이미 셸먼이라는 리즈드(RISD:잘 나가는 디자인스쿨이다)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리고 쓴 <사랑한다면 거리를 두는 게 좋아>를 만났다. 이거 그림체가 딱 내 스타일인데! 아니 나도 그럼 연필을 들어 이 작가의 괭이 브룩시를 모사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요런 생각이 딱 10초 들었다. 물론 귀찮아서 톰보우 4B 연필로 그림 그리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다. 아 나의 귀차니즘이여~

 

책장을 풀쩍풀쩍 넘기다가 그냥 든 생각 중에 하나가, 이렇게 좋아하는 괭이 그림을 그리면서도 먹고 살 수가 있구나 싶었다. 수십억 명 지구별에 사는 이들이 먹고 사는 일들이 다 틀린 것처럼, 자신이 전공하고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생활하는 이도 있구나 싶은 생각에 그랬다고.

 

제이미 셸먼의 널뛰기 감정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네 인간의 감정이란 언제나 그렇듯 한 방향만 보고 있는 건 아니니까. 홀로 있고 싶다가도, 무리를 동경하기도 하고. 누구의 간섭도 원하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언이나 충고는 대환영 아닌가. 내 개인의 문제에 집중하다가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에 주위에 약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또 우리의 본성이 아닐까. 작가는 바로 그런 세세한 점들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막가파식 삶의 스타일에도 대찬성이다. 그리고 보니 어려서부터 잔소리를 아주 싫어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이제는 잔소리 회피 기술이 늘어 잘 대처하게 되었다. 누가 말했던 것처럼 나이와 술이 젊은 날의 나의 강퍅함과 성난 기질을 깎아 내리고 이제 조금은 둥글둥글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한다면 거리를 두는 게 좋아>는 바로 그런 식으로 처음으로 작가의 고양이 브룩시 일당을 만나 감정이 무장해제되는 순간들을 덤덤하게 포착해낸다. 일단 푸근해 보이는 고양이 녀석들에게 인간의 감정을 빙의당한다. 뭐야, 이 녀석들 생각보다 귀여운데. 그런 다음 초단위로 감정이 휙휙 변해 가는 우리네 사유의 등장과 소멸이 함께 한다. 저자가 운전하는 그런 감정 변이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타서 공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거야말로 기대 이상의 즐거움이 아니던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그 너머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위로의 메시지가 아닐까. 원래도 그랬지만, 대충 살자의 내 삶의 모토가 아니었던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강박에 시달리게 되는 우리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고양이 브룩시 일당들의 여유롭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결국 모사도 따라 해보게 됐다. 연필로 쓱쓱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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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05 10:3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따라 저도 그려봄 ㅋㅋ

앞발 들고 차룟!
  ∧_∧
  ( ・ω・)=つ≡つ
  (っ ≡つ=つ
./   )
( / ̄∪

레삭매냐 2021-02-05 11:36   좋아요 2 | URL
제가 그린 어설픈 그림보다
헐배~ 나아 보입니다 :>

헛 헛 마치 박싱하는 괭이?

잘잘라 2021-02-05 11: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연필로 쓱쓱‘
‘연필로 쓱쓱‘

오늘 계속 흥얼거릴것 같아요. ^^

레삭매냐 2021-02-05 11:47   좋아요 2 | URL
제이미 셸먼 공방 홈피에 들어가
보니 마음에 드는 갠춘한 그림들
이 제법 있더라구요 :>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모사해
보고 싶네요. 날림으로요.

페넬로페 2021-02-05 11: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요즘 진짜 고양이가 대세인가봐요^^
딸아이도 유튜브로 고양이 기르는 프로를 많이 보더라구요^^고양이만 여러 마리 길러도 조회수가 많아 거뜬히 먹고 살 수 있는것 같아요**
레삭매냐님, 일러스트 넘 좋은데요**☆☆☆☆☆

레삭매냐 2021-02-05 13:13   좋아요 4 | URL
요즘 너튜브는 정말 다양한 방식
으로 진화하는 모양입니다.

고양이랑 노는 영상으로도 벌이
가 되는군요 ㅋㅋ

날림으로 보고 그린 거랍니다.

얄라알라 2021-02-05 12: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냥이 넘 개성있게 그리셨는데요^^

레삭매냐 2021-02-05 13:14   좋아요 3 | URL
책에 나오는 그림 중에서 가장
쉬워 보이는 녀석으로 베꼈습니다.

컬러링은 색깔펜이 없어서 패스
했습니다.

단발머리 2021-02-05 12: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쓱쓱 그리신 거란 말인가요? @@
넘 근사한대요!!!

레삭매냐 2021-02-05 13:33   좋아요 3 | URL
덧글에 힘입어 두번 째 넘도
한 마리 더 그려 보았습니다.

coolcat329 2021-02-05 13: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는 첫번 째 고양이 넘 좋은데요 ~~♡

레삭매냐 2021-02-05 13:33   좋아요 4 | URL
항상 이게 문제네요 -

내친 김에 한 마리 더 그려 보았는데
망했네요. 역시 첫번째 시도가 더 좋
더라는.

미미 2021-02-05 16: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는 두번째가 더 좋아요.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듯함ㅋㅋㅋ👍

레삭매냐 2021-02-05 19:05   좋아요 2 | URL
연필 위에 볼펜으로 덧칠해서
윤곽선을 좀 더 붙여 보았습니다.

붕붕툐툐 2021-02-13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야~ 따라 그린 고양이 넘나 귀여워요~~ 레삭매냐님도 고양이 책 내시려는 겁니까?
저도 반려 고양이로 태어나서 어슬렁 거리고, 자고, 먹고, 집사일 방해하고, 창으로 바깥 구경하고 그러고 싶어용~

레삭매냐 2021-02-13 12:13   좋아요 1 | URL
댕댕이들보다 아무래도 고앵이들의
팔자가 더 좋아 보입니다.

전 제 앞가림도 잘 못하는 닝겡인지라
반려 동물은 생각도 못하고 있답니다.

이홍영 2021-02-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또다시 만난지 백일째!
성민아 영원히 사랑해^^~
 
댄싱 대디
제임스 굴드-본 지음, 정지현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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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책, <댄싱 대디>를 만났다. 새로운 작가 만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제임스 굴드-본은 지금은 리투아니아에 산다고. 보어드판다라는 웹사이트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서 무슨 일을 했나 그래. 사실 작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그러니 작품이 집중하는 수밖에.

 

우리의 주인공은 대니 머룰리다. 나이가 28세였던가. 십대 시절 아내 리즈와 불장난으로 아들 윌리를 얻게 됐다. 꼬마 윌리는 어느새 11세가 되었고, 14개월 전인가 1년 전에 엄마 리즈는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갔다. 아들 윌리는 리즈가 하늘나라로 간 다음, 선택적 함구증에 돌입했다. 세상과 대화를 거부한 것이다. 이제 대니에게 남은 사람은 아들 윌리 밖에 없는데...

 

설상가상이라고 대니는 4년간 일하던 공사장에서 잦은 지각 때문에 짤렸다. 당장 먹고 살 길이 없다. 악랄한 집주인 레그는 대니 부자 쫓아내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숱한 기회가 있었지만, 대니는 변변한 기술조차 배우지 않았다. 그냥 건설 현장에서 허드렛일만 해오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제법 잘하는 일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러니 대니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널렸다는 냉혹한 노동현장의 현실 앞에 우리의 싱글 대디는 좌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거리공연하는 이들이 제법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니. , 바로 이거였다! 별다른 기술도 없는 이들이 저렇게 많은 돈을 땡기는데 나라고 못할소냐. 코스튬 가게에 가서 그야말로 피같은 돈을 들여 판다 코스튬을 골랐다. 역한 냄새가 나는 탈바가지를 쓰고 쭈뼛쭈뼛 공연에 나서는 대니. 참고로 타고난 댄서였던 죽은 아내 리즈와 달리 대니는 몸치에 가까운 캐릭터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내가 죽기 전에 먹고 살기 위해 춤이라도 배웠어야 했는데. 말하지 않는 아들과 좀 더 살가운 관계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렇다 소설 <댄싱 대니>는 지나간 시절에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후회의 이야기다. 우리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그렇게 묻혀진 시간 속에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공원에서 마크 일당에게 시달리던 윌을 판다곰 탈을 뒤집어 쓴 대니가 도우면서 아빠와 아들간의 정상적 관계가 아닌, 말하지 않는 판다곰과 세상풍파에 시달리는 소년의 기묘한 우정이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윌리가 판다곰이 자기 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또 하나의 파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쨌든 대니는 공원에서 얼치기 춤을 추는 판다곰으로 위장해서 아들과의 관계회복에 나선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난 폴 댄서 크리스털의 도움을 얻어 거리공연에 필요한 댄스 기술들을 수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니와 윌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짜잔하고 제시되는데, 그것은 바로 1만 파운드의 상금이 걸린 거리공연 배틀이다. 그러니까 대니가 안무가 크리스털의 도움으로 배틀에서 우승하기만 한다면, 한 숨 돌릴 수 있게 될 것이고 뒤이어 새로운 삶의 무대가 열릴 것이다. 과연 대니의 플랜대로 소설이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끝까지 읽어 보시라.

 

사실 소설 <댄싱 대디>의 내러티브는 기본적으로 간단하다. 소설을 보다 다채롭고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건 바로 캐릭터들과 제임스 굴드-본 작가가 곳곳에 녹여낸 사회 경제적 이슈들이다. 어떤 일도 독고다이 주인공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안다. 더더군다나 대니 같이 아무런 무능력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아무런 기술과 자본 없이 냉정한 자본주의 3.0 시대에 내동댕이쳐진 싱글 대니 아니 싱글 대디에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일자리 구하기도 그랬지만, 거리공연 자체가 그랬다.

 

우선 합법적으로 거리공연에 나서기 위해서는 허가증이 필요했다. 그런데 문득 우리나라 버스킹에도 허가증이 필요한 지 궁금해졌다. 대니는 당장 돈이 필요한데, 허가증을 정식으로 발급받으려면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 구하는 것. 여기서 저자가 준비해둔 공사 현장의 동료 우크라이나 사람 이반이 등장한다. 이반은 소설의 엔딩에서 크게 한몫하는 캐릭터다. 그러니 기대하시라. 게다가 큰 사고가 날 뻔한 현장에서 자신을 구해준 대니에게 참으로 서윗하게 자신의 아내를 팔아 대니 부자에게 맛난 호두파이를 구워 주기도 한다. 이반은 참으로 멋진 의리남이 아닐 수 없다.

 

다음 도우미는 크리스털이다. 내가 붙인 부제목이 <아빠는 춤추는 판다곰>이다. 그렇다면 몸치인 대니가 아내가 좋아하던 <더리 댄싱>을 비롯한 뮤지컬에 가까운 음악 영화들을 섭렵하면서 몸에 리듬감을 익혀야했다. 이건 그냥 취미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대니에게 최선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레벨인 거리공연 배틀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문가에 가까운 선수가 필요했고, 이번에도 역시 예비해둔 폴 댄서 크리스털이 출격한다.

 

우리는 대니 부자가 거리공연 배틀에서 환상적 공연으로 우승을 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대니 부자의 삶이 극단적으로 바뀌어야 했다. 그래서 제임스 굴드-본 작가는 대니 부자에게 거리공연 배틀의 우승 대신, 특히 대니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 이걸 까면 스포일러의 완성이니 역시 엔딩을 기대하시라.

 

<댄싱 대디>의 스토리라인과 전개는 노련한 독자의 예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비교적 안정적인 방식을 추구한다. 하긴 평범함 속에 언제나 진리가 있는 법이지.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이 소설에서 굉장한 모티프를 제시해 주는 영화 <더리 댄싱>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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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 모든 것을 파멸시킨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오키 다케시 지음, 박삼헌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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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덕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세계의 다양한 전쟁사에 관심이 많다. 그건 아마도 오래전, 한국일보사에 나온 타임라이프 시리즈 WWII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되돌아보면, 권당 5,000원씩 하던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사를 꾸준하게 수집하던 시절도 있었다. 어려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단가의 책이라 더 로망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지금도 가끔 헌책방에서 그 시리즈를 만나면 염통이 쫄깃해진다.

 

그중에서도 내가 보유하지 못한 독소전과 두 번째 세계대전의 분수령이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시리즈는 아예 구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서 빌려서 본 기억이 난다. 아마 그 시절부터 전쟁사에 대한 관심이 생기지 않았나 추론해 본다.

 

얼마 전 만난 오에 겐자부로 선생의 <읽는 인간>을 통해 일본의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에 알게 되었는데 이번에 AK커뮤니케이션 출판사에서 <독소전쟁>이 나왔다는 소식에 환호작약했다. 냉전 시대에 권위 있는 전사 전문가 행세를 하며 역사를 왜곡해온 파울 카렐의 실체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게 된 것도 오키 다케시 선생의 <독소전쟁>을 읽으면서 알게 된 큰 수확이었다.

 

사실 그동안 거의 홀로 유럽 대륙에서 히틀러의 무적의 나치군과 싸운 공산주의 소련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대세였다. 한때 유럽 대륙을 제패할 것 같았던 독일 전쟁기계에 제동을 걸었던 주인공은 미영연합군 주도의 제2전선이 아니라,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군이었다. 오키 다케시 저자는 구소련의 붕괴 후, 서방 세계에 알려진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독소전쟁의 실체규명에 나선다.

 

히틀러의 독일군과 스탈린의 소련군이 맞붙었던 독소전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통상전쟁과 전혀 달랐다. 서로 공존할 수 없었던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상극의 이데올로기가 맞붙은 세계관 전쟁이었다. 동시에 총통 히틀러는 동방의 소련을 제압하고, 독일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위한 생존의 공간확보(레벤스라움)라는 차원의 수탈 전쟁이기도 했다. 독일군의 공세가 최고조에 달했던 1941년과 1942년을 지나면서 통상전쟁과 세계과 전쟁 그리고 수탈 전쟁이라는 삼각축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상대에 대한 철저한 전멸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한편,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기대이상의 블리츠크리크로 엄청난 전과를 올린 독일국방군은 동방의 소련전선에서도 전쟁의 초반에는 비슷한 기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재자 스탈린은 1937년 군부를 상대로 엄청난 숙청을 진행하면서 훗날 독소전쟁에서 병사들을 지휘할 장교들을 대거 상실했다. 독소전에 앞서 스탈린은 독일이 침공할 거라는 많은 양질의 정보들을 얻었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정보들을 애써 무시했다. 그 결과, 독일 전쟁기계를 상대로 엄청난 패배를 강제당했다.

 

총통 히틀러는 뚜렷한 전쟁 목표 없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패망으로 몰고 갈 독소전에 나섰다. 프랑스 공략에 이어 서방의 마지막 저항세력이었던 영국 제압에 나섰지만, 수세기 동안 대양의 패자였던 영국 해군에 독일 해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항공기를 동원한 영국 본토 공방전에서도 결국 실패했다. 영국의 고집쟁이 총리 처칠은 히틀러를 상대로 항복도, 강화도 하지 않은 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사항전에 나선다. 바로 그 시점에서 히틀러는 동방에 웅거한 불구대천의 대적 공산주의 소련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독소전 개전 초기부터 독일군의 전략 목표는 존재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정복을 위한 북부집단군, 적도 모스크바를 제압하기 위한 중부집단군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의 자원을 얻기 위한 남부집단군으로 나뉘어 독일국방군은 폭풍 같이 러시아의 대평원을 질주했다. 문제는 독일 총사령부에서 소련군의 저항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다양한 이유들이 제시되지만, 침략자 독일군은 우선 스탈린 체제 아래 불만을 품고 있던 소련 시스템에 반대하는 이들의 포섭하는데 실패했다.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기존의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이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군 포로에 대한 가혹한 처우나 공산당 정치위원들을 포로로 잡지 말고 즉시 처형하라는 총통의 명령에, 독일군에게 항복하면 결국 죽게 된다면 사실을 알게 된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이라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파시스트 독일군의 가공한 침략을 맞이한 소련은 기존 체제가 가지고 있던 내부의 모순들을 내셔널리즘과 결합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극복해냈다. 129년 전 나폴레옹이 이끄는 40만 그랑 아미를 상대로 벌였던 조국전쟁을 모델로 삼아, 이번에는 대조국전쟁이라는 신화 창조와 프로파간다에 나섰다. 한정적 자원과 병력으로 동방원정에 나선 독일군과 달리, 소련군은 개전 초기 스몰렌스크와 키예프 전투에서 몇 개의 집단군이 포위 섬멸되어도 곧바로 새로운 사단들을 창조해냈다. 전통적 전략인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번다는 방식이 이번에도 유효했다. 결국 독일군의 진격은 정치 사회 경제의 중심지인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돈좌되었다. 사상 유례 없는 혹한이 변변한 방한 장비를 갖추지 못한 독일군을 덮쳤고, 주코프 장군이 주도하는 소련군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독일국방군이 구가하던 궁극의 승리는 좌절되었다.

 

그동안 주류를 이루던 독일국방군이 아인자츠그루펜 학살부대의 활동과는 무관하다는 통설 역시 오키 다케시 선생은 철저하게 격파한다. 모든 과오를 죽은 히틀러에게 독박 씌우려던 독일 장성들의 회고록이나 파울 카렐로 대변되는 역사 왜곡과 달리 전장에서 독일국방군이 총통이 계획한 전멸전에 적극 가담했다는 비밀문서들이 대거 공개되면서 만들어진 신화가 붕괴됐다. 아울러 화력 운용과 훈련을 통해 질적으로 우수한 독일국방군이 야만적 인해전술로 무장한 소련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정 역시 나치가 고안한 프로파간다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현지 절대사수로 소련군의 반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는 착각을 하게 된 총통은 나머지 전쟁의 국면에서 불필요한 사수 명령을 남발하면서 결국 자신의 파국을 초래하는 하나의 원인을 스스로 제공하기도 했다. 독소전쟁의 두 번째 해에 분수령이었던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과정에서도 적도 모스크바 대신 보다 손쉬운 먹잇감으로 생각한 남부의 그로즈니와 마이코프의 석유에 눈을 돌린 히틀러는 간단하게 제압하는 것으로도 끝낼 수 있었던 스탈린그라드 공략에 집착하면서 결국 결정적 패착을 초래했다. 소련군은 남부집단군의 허약한 고리였던 이탈리아-헝가리-루마니아 추축군이 맡고 있던 전선을 붕괴시키고 독일 최정예 6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히틀러가 집착한 현지 사수 명령과 포위된 6군에게 항공 병참 공급이 가능하다는 판단 착오로 결국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대장의 6군은 괴멸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소련군의 역공에 독일군은 궤멸에 가까운 붕괴를 목전에 둔 상태였다. 이 때 등장한 총통의 소방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잔존부대들을 규합해서 승기를 타고 파도처럼 밀어붙이는 소련군에게 하르코프에서 제대로 매운맛을 보여주었다. 이때 돌출된 쿠르스크 지역을 두고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에 나선다. 쿠르스크 전역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꺾이면서, 독일의 패배는 베를린까지 이어지게 된다.

 

오키 다케시 작가의 <독소전쟁>은 짧기 때문에 전술적 차원에서의 재미와 국지전에 대한 디테일은 확실히 떨어지지만, 대국적 차원과 새로운 시점에서 독소전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아주 유용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 학살과 각종 전쟁범죄로부터 독일국방군은 무관했다는 종래의 가짜 선전을 뒤엎는 전복적인 시도부터 시작해서, 뚜렷하지 못한 독일의 전쟁 목적의 부재 혹은 혼선이 빚은 문제점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도 독일인들이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결국 총통과 함께 운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탁월한 분석이 인상적이었다.

 

적당한 분량에, 핵심을 찌르는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에 그만 반해 버렸다. 다음번에는 <메이지 유신>을 읽을 예정이다. 다만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누군가 신청한 희망도서의 순서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우리 동네에 나와 독서 취향이 비슷한 누군가가 있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작년 말에, 일본에서 <태평천국>을 다룬 이와나미 신서가 나왔다고 하던데, 그 책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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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02 1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 가격+내용+표지=만족

시리즈 번역물 계속나와주길 바라는데 판매량이 영 신통치 않은가봐요

메이지 유신
도널드 킨/조용한 혁명-성희엽
추천 사알짝 ㅋㅋㅋ

레삭매냐 2021-02-02 11:23   좋아요 2 | URL
역시나 고수다우신 추천이었습니다.

키누 도나루도 상의 <메이지라는 시대>
맛보기로 보고 있는데.... 대단하네요.

굽시니스트 작가의 저작은 그야말로 맛
보기였다는.
두 책 모두 분량이 ㅎㄷㄷ하다는 게 단
점이랄까요 :> 단가도...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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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미셸 드 몽테뉴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의 이름만 알고 있었다. <에세>라는 이름의 자유로운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 주었다는 점 정도만. 그러다 이달에 홋타 요시에 선생의 저작들을 만나게 됐고 그의 저술을 통해 몽테뉴를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다만 홋타 요시에 선생의 3권 짜리 몽테뉴 평전은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몽테뉴 평전을 사서 읽었다.

 

홋타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에는 가톨릭과 위그노가 격렬하게 종교전쟁을 치른 당대 프랑스의 이모저모에 대한 디테일이 담겨 있다고 하는데, 츠바이크의 몽테뉴 전기는 오롯하게 몽테뉴라는 문제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스코뉴 보르도 출신의 몽테뉴는 1533228일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청어를 파는 생선 장수였다. 아버지는 프랑스 군주를 따라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귀족 행세를 하게 됐다. 어머니 가계는 에스파냐의 개종한 유대인 출신의 위그노였다고 한다. 법관과 보르도 시장을 역임한 피에르 에켐은 아들 미셸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켰다. 그것은 당대 상류 계층으로 나갈 수 있는 마법의 도구였던 라틴어 교육이었다. 아직 모국어인 프랑스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 아들을 위해 독일에서 프랑스어는 한 마디로 하지 못하는 라틴어 교사들을 초빙해 왔다고 했던가. 샤토 몽테뉴가 왠지 스카이 캐슬처럼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아버지 피에르 에켐이 제공한 금수저 덕분에 몽테뉴는 미래의 뛰어난 지성인이자 문필가로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는 법학 공부를 마치고 법관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샤를 9세의 시종으로 루앙 포위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평생 가톨릭 신자의 삶을 살았던 몽테뉴가 살았던 16세기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종교전쟁과 내란의 시기였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종교적 갈등과 폭력은 프랑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관용의 정신을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었으며,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아예 시도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저자 츠바이크가 가장 싫어한 집단 광증과 선동이 난무하던 그런 시기였다. 츠바이크는 1940년대 자기 삶의 말년에도 몽테뉴의 시절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로부터 또 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터무니없는 음모론과 가짜 뉴스, 전염병(몽테뉴 시절에는 페스트였다) 그리고 집단 광증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희극이 아닌 비극으로만 재현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위대한 지성인이자 철학자는 집단 광기의 시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 해도 그들은 거부했다. 몽테뉴는 강호가 어지러워질수록,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했다. 광신도들과 극단적 종교 이데올로기 투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자구책이 아니었을까. 몽테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영어로 된 짧은 너튜브 철학 동영상(그렇다 이제 너튜브는 진리까지 독점해 버렸다)을 찾아보니, 르네상스의 후예인 그가 당시 유행하던 고대 철학자들의 책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아 탐구에 천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십대 후반에 공직에서 은퇴하고 샤토 몽테뉴로 돌아온 철인은 세상과 담을 쌓고 은거에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 속인들처럼 철인 몽테뉴 역시 먹고사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 우리로 치면 선비 같은 인물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직접 노동은 하지 않더라도, 가족과 자그마치 6명이나 되는 딸들(그중에서 성인으로 성장한 자식은 한 명 뿐이었다)을 먹이고, 자신의 영지를 관리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을 사기 위해서라도 금전은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책이 상당히 고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소장한 천권의 책들이 얼마나 대단한 재산이었을까.

 

대법관으로 승진을 포기하고 자신의 거성에서 <수상록>을 집필하던 시절이야말로 몽테뉴 인생의 최절정기가 아니었을까. 그는 전문적인 문인이나 역사가가 아니었기에, 일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극단과 전란의 시기에 어느 편에 서지 않고 중도 노선을 걸으면서 자신의 지키며 시간을 보내기에 책읽기와 집필만한 것이 또 있었을까.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무런 구속이나 속박 없이 쓰고, 자신을 묘사했다. 츠바이크는 젊어서 만난 몽테뉴의 생각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유의 향연이었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쉽게도 아직 나는 그의 <수상록>이나 여행기를 만나 보지 못했기에 그저 대가의 가르침을 얼치기처럼 따를 수밖에 없다.

 

책읽기의 대선배 몽테뉴는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었다. 허무주의에까지 도달하진 않았겠지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공부해 가면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What do I know? 진정한 의미에서 순도 백퍼센트의 자유주의자였던 무슈 몽테뉴는 타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말은 자신도 타인들로부터 어떠한 자유의 제한도 원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닐까.

 

아울러 그는 에피쿠로스의 영향 아래, 자신이 좋은 것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게 사냥이 공부든 부동산 투자든 뭐든 간에 말이다. 책이 좋은 사람을 책을 읽으란다. 우리 독서인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격려가 존재할 수 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다만, 즐거움의 경계까지는 가되, 그 경계는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뒤에 기다리는 것은 고통이니까. 이 위대한 예언자는 미래의 책읽기 동지들이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나. 이 지점이야말로 내가 이 책에서 최고로 꼽는 부분이다. 무슈 몽테뉴가 내게 하는 위로의 정수를 얻었다고나 할까. 아니 츠바이크 선생과의 합작품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샤토 몽테뉴에서 십년간의 은둔 생활을 마친 무슈 몽테뉴는 여행길에 나선다. 2년 동안, 프랑스-스위스-독일-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를 위대한 정신은 여행했다. 아무런 목적도 없는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이었다. 아니 어쩌면 젊었던 시절의 나와 똑같은 여행 스타일인지 깜짝 놀랄 정도다.

 

하지만 세상은 이 위대한 철인이 자유를 만끽하는 걸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아버지 피에르 에켐처럼 시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국왕까지 나서서 명령을 하는 바람에 영원한 자유인이고자 했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6세기 후반, 종교전쟁의 피바람 속에서 프랑스 왕국은 다시 한 번 큰 위기에 휩싸인다.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앙리 3세의 후계자로 부르봉 가문의 나바르 공 앙리가 추대되었던 것이다. 살리카 법에 따라 부르봉 가의 앙리가 프랑스 왕국의 대권을 얻게 된 것이다. 유혈사태 없이 왕위계승이라는 권력의 트랜지션을 위해 나바르 공 앙리의 개종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이상적 중재자로 무슈 몽테뉴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홋타 요시에의 다른 저작 <라 로슈푸코>의 주인공 프랑수아 라 로슈푸코 6세가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삼을 정도로 무슈 몽테뉴는 정치와 행정 그리고 문학까지 아우르는 다방면에서 빼어난 능력을 보여준 마지막 르네상스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르도를 덮친 페스트를 피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쫄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라 로슈푸코가 인간에 대한 본질이라고 주장한) 자기애 덩어리로서 무슈 몽테뉴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변명해 본다. Nobody's perfect. 훗날 나바르 공 앙리가 왕이 되었을 때, 명실상부한 왕의 고문관으로 엄청난 권력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안분지족을 아는 미덕의 소유자였던 무슈 몽테뉴는 깨끗하게 공직 생활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홋타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을 대신해서 만난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은 기대이상의 수확이었다. 위대한 정신과의 만남의 감동과 과정을 부족한 리뷰에 다 담을 수가 없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구하지 못해 읽지 못하는 책에 대한 갈급함은 어찌 달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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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1-30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을 구하시면 꼭! 리뷰 부탁드립니다^^ 책세상에서 나온 ‘식인종에 대하여‘도 읽고 아주 좋았어요. 역자가 주석도 세심하게 달아주시고요.

레삭매냐 2021-01-30 21:25   좋아요 0 | URL
20년도 전에 나온 책이라,
구할 수가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한길사에서 다시 내주면 좋겠으나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coolcat329 2021-01-30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1월 츠바이크를 몰아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 책도 구해야겠네요.독서인생이 너무 짧아 딱히 열광하는 작가가 없는데 츠바이크는 앙뜨와네뜨 전기소설 읽고 단번에 팬이 됐습니다. 레삭님의 리뷰가 제 가슴을 설레이게 하네요☺

레삭매냐 2021-02-01 11:52   좋아요 1 | URL
저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열렬 팬입니다.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 아닐 수 없습
니다. 더 오래 사셔도 인류에게 더 많은
책들을 남겨 주셨어야 했는데 그저 아쉬
울 뿐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메리 스튜어트 책
마저 읽어야 하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