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 - 피란델로 단편 선집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정경희 옮김 / 본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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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중고서점에서 산 책이다. 허구한 날 적립금 쿠폰을 뿌려 대니 도저히 책을 안사고 배길 재간이 없구나 그래. 게다가 예전부터 언젠가 한 번 읽어 보겠다고 작심하고 있던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책이니 더더욱 안살 수가 없었노라고 나는 변명해 본다.

 

희곡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루이지 피란델로는 단편 소설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생전에 자그마치 250편에 달하는 단편들을 썼다고 한다. 이 정도면 스탕달에 버금가는 소설 쓰는 기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루에 소설을 한 편이라도 쓰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았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소설집 <어느 하루>에 담긴 9편의 단편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영화화된 작품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루이지 피란델로의 단편 소설들은 그야말로 이탈리아 영화감독들의 보물창고였지 싶다.

 

9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만난 작품은 <유모>(죽은) <어머니와의 대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소설들은 시칠리아 이야기로마 이야기로 나뉜다고 하는 <유모>는 그 중간 정도가 되지 않나 싶다. 로마에 사는 부유한 변호사의 아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돌볼 유모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내의 친정에서 시칠리아 출신 건장한 산모, 그러니까 다른 아이를 돌볼 안니키아를 로마로 보낸다. 물론 안니키아에게도 갓난쟁이가 있다. 유배당한 남편 대신 돈벌이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안니키아는 어린 자식과 생이별을 하고 물설고 낯선 로마로 증기선과 기차를 타고 떠난다. 고향을 떠나는 안니키아에게 시어머니는 저주를 퍼붓는다. 그녀의 저주가 먹힌 걸까, 결국 고향이 남은 안니키아의 아들은 죽고 만다. 자신의 젖을 먹여 키운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하는 에르실리아 아씨의 아이에게 집착하는 안니키아 그리고 그녀를 내쫓는 고용인들. 이것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와의 대화>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작가의 추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른 단편인 <또 다른 아들>에 등장하는 어떤 어머니는 첫 두 아들만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불가피하게 낳은 막내아들은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과의 희망의 나라 아메리카로 떠나 소식 없는 아들들을 기다리는 시칠리아 출신의 사모곡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이국 땅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는 걸 알았다면 그 어머니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다시 <어머니의 대화>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대단한 기백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시칠리아 봉건왕국의 군인들이 쳐들어오면 딸들에게 투신하라는 말까지 하겠는가 말이다. 얼마 전에 만난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소설/영화 <표범>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리발디의 시민군과 보르보네 왕군이 격렬하게 시가전을 치르지 않았던가.

 

또 다른 어느 어머니는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십대 소년 아들 체사리노 브레이를 기숙학교에 들여보내고, 몰래 다른 동생을 낳고 그만 죽는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도대체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어쨌든 갓난쟁이에 대해 엄청난 책임감을 느낀 소년은 교장의 도움으로 문부성 서기 일을 하면서 그야말로 고학으로 공부도 하고 아기도 돌본다. 그야말로 20세기판 막장 드라마급의 이야기가 아닌가. 도대체 아기의 아버지는 누구란 말이지? 어머니가 남긴 쪽지에서 알베르토라는 이름을 체사리노는 알아낸다. 그 다음에, 아기의 아버지가 아기를 찾아온다.

 

구시대의 상징으로 봉건사회였던 시칠리아가 근대화 시기로 돌입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죽어서도 묻힐 땅 한 뙈기가 없어 마르가리 영주를 상대로 한 투쟁에 돌입한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다. 죽어가는 노인이 산 채로 자신이 묻힐 곳에 가서 묻힐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나, 그런 그에게 줄 땅은 없다며 공권력을 동원하는 마르가리 영주의 비정함이 오늘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깨진 항아리의 보수를 놓고, 기술자 지 디마 리카시와 항아리의 주인장 돈 롤로 지라파가 벌이는 해프닝도 흥미진진하다. 아니 어떻게 기술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항아리 안에 들어가서 항아리를 보수하는 작업을 해서 결국 스스로 갇히게 된 거지? 이런 땜장이에게 왜 돈을 주어야 한단 말인가? 결국 애써 고친 항아리를 깨부수지 않고, 땜장이를 꺼낼 방법이 없지 않은가. 루이지 피란델로 작가는 결국 이런 타협이 어려운 이슈에 대한 상충하는 의견을 들어 당대 이탈리아가 겪고 있던 사회적 갈등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도출한 게 아니었을까. 누가 점심값을 낼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난 루이지 피란델로의 소설들에 합격점을 주고 싶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특히 늑대인간 스토리!), 정선되어 출간된 단편들이니만큼 그 콘텐츠의 완성도는 보장되지 않았나 싶다. 읽어야할 책들이 줄 지어 대기 중인 3월이 지나가고 나면 피란델로 선생의 책들을 좀 더 읽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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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1-03-06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말씀처럼 정말 많은 단편을 썼네요. 소개해 주신 덕분에 저도 이 단편들을 읽고 싶어졌어요. 보관함에 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레삭매냐 2021-03-06 13:42   좋아요 0 | URL
세상은 넓고, 참으로 모르는
작가들이 넘쳐 나는 것 같습니다.

피란델로 선생의 책들을 좀 더
찾아 보고 싶네요.
 
마지막 순교자
엔도 슈사쿠 지음, 이은형 옮김 / 지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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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 책은 언제고 읽는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나의 책장에만 있다면 언젠가는 읽는다. 책쟁이인 나의 신조다. 지난 가을에 중고서점에서 산 엔도 슈사쿠의 <마지막 순교자>를 읽었다. 이 책을 왜 샀는지, 어떤 책인지도 모르고 산 모양이다. 제목만 보고는 저자의 특기인 일본 가톨릭 박해사를 다룬 소설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린 추측이었다.

 

<마지막 순교자>에는 모두 10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타이틀인 <마지막 순교자>는 도쿠가와 막부에서 메이지 신정부로 넘어가던 1867년 대박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천주교 박해는 아마 에도 막부의 국시였던 모양이다.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이래, 종교의 자유에도 봄이 오나 싶었지만 카쿠레키리스탄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몰락해 가던 막부는 국시를 어긴 천주교 신도들을 잡아다가 혹독한 방식의 도도이라는 고문을 가하고 배교를 종용한다. 형제와 자매를 동원한, 심지어 어린 아이까지 데려다가 고문을 하니 배길 재간이 없었다. 신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신앙을 지키며 순교하는 이들도 있던 한편, 키스케 같이 타인이 고문 받는 것을 보고 그만 곧바로 배교하는 이들도 있었다.

 

키스케의 동료들은 하나 같이 그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를 연상했다.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배교한 키스케가 평안과 구원을 얻었을까? 아니다. 그는 다시 동료들이 갇힌 감옥에 찾아와 스스로 투옥을 자처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문과 그에 이어지는 고통이 두렵다. 그 가운데 바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키스케에게 자신을 다시 배신하고 좋고, 도망쳐도 좋다고 말한다. 다만, 그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그리고 돌아온 탕자를 환영하는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역시나 보기 드문 일본의 종교를 주제로 다룬 작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집의 상당 부분에 1950년대 프랑스에서 희귀한 일본 출신 유학생이었던 자신의 체험을 글로 형상화했다.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리옹을 찾은 패전국 출신 청년은 당시만 해도 두터운 인종주의의 벽을 뛰어 넘을 수가 없었다. 네그로 친구가 새로운 학생으로 왔을 때, 연대하지 못하고 어설픈 차별와 혐오에 동참했다는 사실에 지성인은 부끄러워한다.

 

동료 시코쿠 쿠니오 씨는 비록 세례는 받았지만, 신앙을 버렸으면서도 학장과의 면담에서 그리스도교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자신의 실체는 숨기고, 오히려 화자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거론하니 화자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역만리에서 같은 나라 사람이자 동료에게 이런 배신을 당한 저자의 낭패감이 어떠했을지 이해가 되었다. 시코쿠는 귀국해서 기독교 윤리를 가르치는 조교수가 되었다던가. 그러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타이틀 소설 외에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바로 <군종신부>였다. 프랑스 유학 시절 알게 된 지인의 편지로 1950년대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알제리 전쟁에 대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그전의 이야기에서 자신과 시코쿠를 초대해준 프랑스 가정에 대한 반발로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의 민중항쟁에 대한 이야기로 르블롱 씨의 심기를 거슬렸다지. 편지의 화자는 그저 아무런 삶의 목표 없이, 살고자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나이였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그가 원대로 가만 두지 않았다. 기관총 사수로 알제리 전선에 파견되었다고 했던가.

 

알제리로 가는 길에 만난 장교 대우를 받는 군종신부에게 신이 전쟁을 원하고, 신의 피조물인 다른 인간들을 죽이길 원하냐는 엄청난 질문을 던진다. 원래 알제리가 프랑스의 땅이었던가? 아니다. 알제리는 알제리 사람들의 땅이고, 프랑스 사람들은 그곳을 자원과 인력을 약탈할 식민지로 삼았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고 들어온 식민지 근대화론이 등장할 차례다. 프랑스인들이 알제리를 지배할 이유가 있다면, 알제리 사람들은 그들대로 민족해방과 독립을 주장할 이유가 있다.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두 개의 상이한 정의가 충돌하면서 무력투쟁은 피할 수가 없는 현실이 되었다. 군종신부가 궁색하게 내놓은 신은 정의로운 전쟁을 원한다는 따위의 설교는 천 년 전 십자군 전쟁에나 걸맞은 구호가 아닌가 말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만주 식민지에 살던 일본인들의 거주지 우물이 오염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방단을 조직해서 아무런 혐의 없이 만주인들을 의심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나, 일본을 떠나 프랑스에서 연극배우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여동생에 대한 우려 그리고 이혼을 결심한 어느 아버지(아마도 자신의 경우가 아니었나 추정해 본다) 등등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자신이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방인들이 원주민들을 배척하고 핍박한 일에 대해서도 저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증언한다. 난징과 인도차이나에서 전쟁 중에 일본군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를 양심적인 지식인 부류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도움이 안돼>에서는 폐병으로 요양차 병원에 입원한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상에 다양한 직종의 직업을 가진 이들이 병원에서 제각각 나름의 소용이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약사는 동료 환자들에게 공짜 약을, 요리사는 병원의 맛없는 밥으로 야식을, 전파사 수리공은 라디오를 고친다. 그렇다면, 연필과 종이로 벌어먹고 산다는 편견의 제물이 된 소설가는? 타인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냐는 핀잔을 먹기 일쑤다. 삶과 죽음이라는 형이상학 문제에 대해서도 소설가는 똑 떨어지는 답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결론은 하여간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반세기 전, 소설가라는 직군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보통의 생각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가들의 위한 변명도 또한 많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글 쓰는 이들이나 독자의 범위에 포함된 이들에게나 먹힐 법한 이야기다. 먹고 사는데 바빠서, 혹은 너튜브에 혼이 팔려 소설이나 문학을 읽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이 지금도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닌가 말이다.

 

연휴의 끝물에 무언가 흥미로운 책을 읽고 싶었는데, 예전에 사서 쟁여둔 엔도 슈사쿠의 <마지막 순교자>가 큰 도움이 되었다. , 나에게는 이런 방식으로 도움이 되었구나. 중고서점에 루이지 피란델로의 소설집이 떴다고 하던데 당장 나가서 사와야겠다. 이달에는 읽을 책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적어도 읽을 책이 없을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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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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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전에 빌린 책들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가 빌린 책이다. 내가 도서관을 사랑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물론 어떤 책을 빌리러 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만나게 되는 책들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나름 목적 있는 독서를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그것이 책 읽는 이들의 즐거움이 아닐까.

 

아마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저자가 에코이기 때문이리라. 숱한 저자들일 책을 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뜻 집어 들지는 않는다.

 

이 세계적인 석학은 정보 과잉과 극단적 소비의 시대를 유동 사회(Liquid Society)라고 명명한다. 우리 현대인은 소비하기 위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우리는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끊임없이 사들이고, 방치하고 결국 폐기한다. 저자의 주장 대로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핸드폰은 이미 우리의 눈을, 귀를 그리고 심지어 성기까지 대신할 판이다.

 

에코는 또한 SNS와 너튜브 시대에도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자신은 트위터를 하지도 않는데, 자신을 사칭한 이들이 암약하는 공간이 바로 인터넷 공간이라는 점을 꼬집는다. 그렇다면 그를 사칭한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유명세가 아닐까? 며칠 전 들은 팟캐에서는 인별그램을 보면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이 필라테스를 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필라테스와 빡센 다이어트로 만들어진 환상적 몸매는 버추얼 공간에서 자산이 된 지 오래다. 누군가의 고통이 나에게 행복이라는 생각으로 동영상을 찍어 너튜브에 올릴 생각을 하지 말고, 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대가는 말한다. 진짜 넘쳐 나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적합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에코 선생은 자신의 책에서 미친 세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표현은 역자와 출판사의 작품일까? 그것이 좀 궁금했다. 에코 선생은 어느 인터뷰에서 당시 이탈리아 총리였던 베를루스코니가 히틀러 같다는 비유를 적당하게 만들어서실은 언론을 준엄하게 꾸짖기도 한다. 기자가 지식인의 속마음까지 넘겨짚어서 기사화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긴. 세 개나 되는 신문사들이 경쟁적으로 사실을 마음대로 왜곡하고 주작질도 마다하지 않는 언론 현실에 빗대어 본다면 그 정도는 애교지 싶지만 말이다.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광풍처럼 몰아닥치는 코로나 시대에도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들이 많다. 에코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세계는 거의 우연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그런데 어떤 우연들이 겹친다고 해서, 누군가가 어떤 사적 이익을 편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근거 없는 가짜 뉴스와 음모론을 맹신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음모와 비밀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가령, 미국의 달나라 착륙에 대해 여전히 불신하는 이들이 있는데 만약 그랬다면 당시 가장 유력한 라이벌이자 검증할 실력까지 있었던 소련이 가만 있었겠냐는 것이다. 지금은 퇴임한 어느 나라 대통령 역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검증되지 않은 낭설들을 퍼뜨리는데 앞장섰다가 결국 선거에서 지고 초라하게 물러나지 않았던가. 자신의 본거지를 남부의 어디로 옮겨 권토중래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더 이상 정치판에 나서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시 대가는 대가라는 생각이 에코의 글들을 접하면서 불쑥불쑥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이 작가의 빛나는 문장들과 사유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베를루스코니 같은 B급 정치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끝으라는 말로 점잖게 그는 조언한다. 내추럴 본 관종을 자처하는 그런 인물들에게 언론이나 대중이 주는 관심 자체가 과분하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도 그와 유사한 인물들이 준동하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에코 선생의 처방전을 주문하고 싶다. 보수언론의 지면이고 자신이 그렇게 애착하는 SNS고 간에 뭐라고 떠들어 대건 간에, “똥싸개타령을 하던 에코의 어머니가 하셨던 대로 그냥 무시하라는 거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다. 내가 던진 일말의 관심과 비판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

 

모바일폰에 대항하는 책의 시대가 끝났다는 타령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책은 꿋꿋하게 이 위기의 시절을 버티어 가고 있다. 수백년 전의 책들은 여전히 우리의 곁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80년대 초반에 등장한 플로피 디스크를 읽어낼 수 있는 컴퓨터는 이제 더 이상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정전이라도 된다면, 그 현란한 정보 검색과 숱한 기능을 자랑하는 이북을 필두로 한 전자기기들은 모두 쓸모 없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라는 게 현자의 고언이다. 우리가 신주 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CD나 엄청냔 대용량을 자랑하는 USB도 마찬가지란 말씀. 나만 하더라도 오래 전 100메가 짜리 ZIP 디스켓이나 1기가 짜리 재즈 드라이브가 출현했을 때 얼마나 경이롭게 느꼈던가. 지금은 손톱만한 사이즈의 USB들이 그 이상의 저장 용량을 자랑한다. 앞으로 저장 매체 기술의 진보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다만 저장된 정보의 유용성과 유효기한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는 점도 에코 선생은 예리하게 지적한다.

 

정보 과잉의 시대, 에코 선생은 인터넷을 타고 퍼지는 가짜 뉴스들에 대해서도 경계하라는 말씀을 잊지 않는다. 예전에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전파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범지구적 차원의 가짜 뉴스가 횡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팩트 체크에 좀 더 신중하라는 주문도 잊지 않는다. 아니 그런데 그런 팩트 체크를 담당해야할 언론이 나사서 투박한 스타일로, 자신이 예전에 썼던 기사에도 반하는 가짜 뉴스들을 앞장서서 전파한다면? 그야말로 쉬르리얼스틱한 현재가 아닌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그런 미친 세상일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에코 선생은 우리가 숱하게 읽어대는 책들에 대해 우리가 책장을 덮자마자 잊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었다. 나같은 책쟁이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렇다, 우리는 무당파의 대사부 장삼봉 앞에서 신묘한 태극권을 연마하는 장무기 같은 선수들일 뿐이다. 읽고 상상하고 잊어라. 그러다 보면 구원에 도달할 지도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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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 - 2018년 행복한아침독서 선정 푸른지식 그래픽 평전 10
파비앵 그롤로 & 제레미 루아예 지음, 이희정 옮김, 박병권 감수 / 푸른지식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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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제목에 미친을 넣었다면 아마도 부정적인 의미가 아닐까. 19세기 미국 전역을 돌며, 북미 대륙에 사는 400여종에 달하는 거의 모든 새들을 그린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존 제임스 오듀본(1785~1851). 아이티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란 그는 나폴레옹 군대의 징집을 피해 신대륙으로 망명했던 것 같다. 원래 이름은 장 자크였다고 하지. 존 제임스는 그러니까, 미국식 이름인 셈이다. 그래픽 노블에서 아내 루시는 그를 라포레라고 부른다.

 

장 자크가 신생국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곳은 새들의 천국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리라. 아직 개발에 의한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새들이 살아온 터전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곧 대대적인 서부 개척 시대를 맞이하면서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이 훼손되고 생태계가 교란되면서 그곳에 살던 동물들 역시 멸종되거나 서식지를 잃게 되었다.

 

증기 제재소에 투자했다는 장 자크는 처음부터 사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새들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사랑하는 아내 루시와 자식들마저 내팽개치고 장 자크는 자연 상태에서 살아 숨쉬는 새들을 포획하고, 그리기 위해 켄터키를 떠나 미시시피와 미주리 일대를 여행한다.

 

어디선가 지금의 잣대로 과거를 판단하지 말라는 글을 본 것 같은데, 19세기만 하더라도 자연보호와 동식물 보존은 그야말로 꿈곁 같은 소리였나 보다. 장 자크는 자신이 목표물인 새들을 그리고 관찰하기 위해 살상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사냥은 요즘으로 치자면 자전거 타기나 탁구 혹은 인라인 스케이트 같은 여가활동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수습생인 조지프와 현지인 가이드 쇼건을 앞세운 장 자크는 미지의 세계 탐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폭풍우를 만나 귀중한 그림을 잃을 뻔 하기도 하고, 향토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면서도 평생의 꿈인 새 관찰과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자신이 그린 새 그림을 더 귀중하게 여겼는 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구사하겠다는 일념 아래, 푸른 어치를 해부하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리려는 노력에 쇼건은 죽음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경고한다.

 

한 때 자신의 동지였던 알렉산더 윌슨(1766~1813)과의 경쟁 구도도 흥미롭다. 윌슨의 <미국의 조류> 때문에 박물관 관료들은 더 이상 오듀본의 책에 투자할 마음이 없었다. 그의 그림들이 예술적이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자연주의적이 아니라고 이유로 출간을 거절한다.

 

결국 자신의 두 번째 조국이었던 미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오듀본은 시선을 구대륙으로 옮긴다. 영국에서는 자신이 그린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을 제대로 출판할 수 있게 된 오듀본은 비로소 인정받기 시작한다. 자고로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한 성경의 구절이 연상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미국의 새들>(국내에서는 <북미의 새>(The Birds of America:1827~1839)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은 희귀본으로 지금은 권당 100억에 육박하는 그런 진귀한 책 대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격세지감이라고나 할까. 굳이 반 고흐의 케이스를 예로 들 것도 없으리라. , 영국에서 오듀본은 어느 젊은이를 만나 자연으로 가 직접 새들을 관찰하라는 충고를 해주는데 그의 이름이 다윈이었다고 한다. 진짜 있었던 일인지 궁금하다(영문판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니, 오듀본의 영국 강연 중에 학생이었던 찰스 다윈도 참석했었다고 한다).

 

새의 관찰과 그리기에 40년 그리고 출판에 12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장 자크는 결국 아내 루시에게 돌아와 말년을 보내고, 영면에 든다.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장 자크처럼 꼭 그렇게 새를 총으로 쏴서 잡아야 했을까? 덫이나 올무로 잡은 다음 충분히 관찰하고 나서 자연으로 돌려보내면 안 되었을까? 한 때, 북미 대륙의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많았다는 나그네 비둘기도 그런 식으로 결국 1914년에 멸종되었다. 지금은 그의 이름을 딴 자연보호협회들이 지구별의 남은 동식물들을 지키기 위해 맹렬하게 정진하고 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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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2-27 1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곤충채집이라고 잠자리, 매미 등을 잡아서 제출하는 방학숙제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생각해보면 이러한 교육이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닌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 것은 아닌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레삭매냐 2021-02-28 07:17   좋아요 1 | URL
저도 어려서 곤충채집한답시고
메뚜기며 잠자리며 잡으러 다니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잠시 자연에 머물다 가는 인간이
너무 자연을 훼손하며 사는 게
아닌가 싶어 반성하게 됩니다.

유부만두 2021-02-28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리의 발견> 660쪽에 ‘오더번 협회’ 이사로 레이첼 카슨이 선출되는 이야기가 나와요. ^^

레삭매냐 2021-03-01 16:43   좋아요 0 | URL
대단하십니다 - 그 두꺼운 책을 ㅋ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켈플러
였네요. 수학 쪽에서는 거의 신급
이던데 :>

레이첼 카슨의 책들도 읽어야 하는데
당장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있네요.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
자크 아탈리 지음, 이재룡 옮김 / 사월의책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만약 살만 루슈디의 <28개월 28일 밤>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영영 모르고 살았으리라. 그 책에서 만난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의 실존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자크 아탈리의 이 탁월한 소설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로 인도했다. 책을 읽다가 만나게 되는 이런 우연이야말로 책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참고로 프랑스 외무부와 주한프랑스대사관의 지원으로 11년 전에 만들어진 이 책은 지금 절판 상태다. 이렇게 좋은 책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책 중의 하나인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이 책도 절판됐다)가 이슬람이 지배하던 안 안달루스의 종언을 증언하고 있다면, 자크 아탈리의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는 이슬람 안 안달루스 지배의 절정기를 그린다.

 

아름답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소설의 두 주인공은 유대인 사상가 모세 벤 마이문과 이슬람 의사이차 철학자인 이븐 루시드, 서구에는 아베로에스로 알려진 인물들이다. 두 사람 모두 위대한 철학자 선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봉자라는 점을 사전에 알려주고 싶다.

 

이들이 생존해 있던 12세기, 안 안달루스는 알모아데족을 중심으로 보라산의 종교지상주의자 알 가잘리의 사상을 추종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지배하고 있었다. 어느 시절이고 종교적 광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알모아데 제국의 수도 코르도바는 그동안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를 믿는 이들이 조상 대대로 조화를 이루고 살아온 문화와 학문 그리고 사상의 중심지였다.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종교적 관용은 제국을 번영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알모아데 정권의 광신자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코르도바의 이교도들과 이단들을 심판하기 시작했다. 수백 년 동안의 평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특히, 고향인 팔레스타인을 떠나 안 안달루스에 무슬림들 보다 먼저 건너와 살던 유대인들이 첫 번째 타겟이 되었다. 의학과 상업에 특화된 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이 제국 경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은 레온-카스티야-아라곤 같은 기독교 왕국보다 그동안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온 이슬람 정권에 더 호의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모아데 정권이 종교적 광신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개종, 이주 혹은 사형이라는 세 가지 선택지를 앞두게 되었다.

 

모세의 외삼촌 엘리파르가 광신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그리고 외삼촌이 사형당하기 전에 십대의 영민한 조카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정수를 전해 주면서, 모험과 12세기 매혹적인 알 안달루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이성과 과학적 사고로 인간과 신의 영역 그리고 우주 생성의 비밀까지 아우르려고 했던 위대한 철학자가 인류에게 남긴 책을 찾는 미션에 관한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 같은 책쟁이들을 유혹하는 말이던가.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있는 책이라고 하는데 만나고 싶지 않은 책쟁이가 있단 말인가. 결국 코르도바의 유대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나야할 운명이었다.

 

엘리파르는 조카에게 몇 가지 단서들과 알렉산더와 제우스의 얼굴이 새겨진 희귀한 테트라드라크마 한 닢을 남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미션은 너무나 위험한 임무였다. 책을 찾아 나선 구도의 길에 숱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위험한 만큼 그에 따른 보상이 크기에 모세는 톨레도와 툴루즈 그리고 나르본을 거치는 긴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이븐 루시드에게 알모아데 제국의 실력자 이븐 투파일이 같은 테트라드라크마를 건네주면서 같은 책을 찾으라고 명령한다. 진리를 추구하던 철학자였던 이븐 루시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의사이자 대범한 철학자였던 이븐 루시드는 이성과 계시의 경계에서 전자에 무게중심을 둔 발언으로 언제라도 이단으로 몰려 사형대에 오를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다. 종교지상주의자들에게 이븐 루시드는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권력자들의 비호가 없었더라면 그 역시 엘리파르처럼 화형대에 올랐을 지도 모르겠다. 기독교 종교재판 이전에, 이미 무슬림 세계에서도 화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절대적 영원에 대한 논고>를 찾아 헤매던 두 젊은이는 십여 년에 걸친 긴 여정 끝에 결국 알모아데 제국의 수도 페스에서 만나게 된다. 서로 다른 종교를 믿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하던 보편적 진리의 신봉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던 이들은 경쟁자로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무하마드 이븐 루시드는 이슬람 국가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광신이 아닌 이성과 과학의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광풍이 몰아닥치던 12세기에 그런 합리적 사고가 설 자리는 없었다. 아마 이븐 루시드를 후원하던 제국의 총리 이븐 투파일이 없었다면 이븐 루시드는 진즉에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했을 것이다.

 

무슬림 제국의 무슬림으로 살았던 이븐 루시드에 비해 어디에서고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모세 벤 마이문은 12세기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상징하는 그런 인물이다. 삼촌에게 일찍이 비밀결사 후보자로 인정받을 만큼 뛰어난 지식과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던 모세는 위험천만한 인간이 쓴 것에 가장 중요한 책을 찾는 여정에 나선 것은 우주와 인간 그리고 종교에 대한 진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슬림들의 핍박에 맞서 자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무력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열혈청년 모세의 동생 다비드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로마제국에 대항해서 무력투쟁에 나섰던 마사다 요새를 언급하며 단검 던지기를 수련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훗날 홀로코스트에 무력했던 유대인 공동체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비밀 결사단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밀의 책을 찾는 두 주인공의 모험만큼이나 흥미진진한 것이 종교적 광신에 대항하는 이성의 대표선수들인 모세와 이븐 루시드의 현란한 대화다. 소설에서 최고의 압권은 모든 비밀의 끈을 쥐고 있는 페스의 저명한 랍비 이븐 슈샨의 두 주인공에 대한 시험이 아닐까 싶다.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해 의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물론 그에 뒤따를 존재론적 허무주의에 대해서는 각자의 유의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주요한 모티프로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처럼, <절대적 영원에 대한 논고> 역시 자크 아탈리가 만들어낸 허구의 책이다. 자그마치 소르본 대학 출신의 인문학자 자크 아탈리는 12세기 알 안달루스와 마그레브를 배경으로 위대한 예언자가 남긴 불멸의 책을 찾는다는 가설에 입각해서, 다양한 소재들을 절묘하게 배합한 불후의 드라마를 창조했다. 아니 넷플릭스는 이런 이야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서 영상으로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식인들의 갖가지 욕망이 충돌하는 가운데, 종교적 광신에 저항하는 이성과 과학의 결합이 궁극의 선에 도달한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권력자 이븐 투파일과 철학자 이븐 루시드의 대화 중에 나오는 좋은 소설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쓰인다는 문장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당연히 내가 만난 올해의 책 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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