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 '레벤스보른 프로젝트'가 지운 나의 뿌리를 찾아서
잉그리드 폰 울하펜.팀 테이트 지음, 강경이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치 독일에는 두 가지 핵심정책이 있었다. 하나는 대학살의 원인이 되었던 반유대주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레벤스라움이라고 불리는 생존권 정책이었다. 후자는 독일 제3제국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켜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밀어 넣은 원인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레벤스보른(Lebensvborn), 독일어로 생명의 샘이라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제국의 실질적인 2인자 하인리히 힘러의 지휘 아래 실시된 비밀 프로젝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얼토당토 않은 유사 과학인 우생학에 근거해서 순수한 아리안족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나치 광신도들의 맹신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먼저 우리는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의 증언자 잉그리트 폰 욀하펜을 만난다. 그녀의 본명은 에리카 마트코, 구 유고슬라비아 지금은 슬로베니아의 첼예라는 곳에서 납치되어 독일 가정에 위탁아동으로 양육되었다. 어릴 적의 기억들은 모두 제거되고, 독일인으로 자라게 되었다. 함부르크 출신 그녀의 어머니인 기젤라는 물론이고 안스바흐 출신의 독일 행정장교 출신의 아버지 역시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잉그리트는 왠지 가족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같이 살던 동생 디트마어가 떠났다. 어머니 기젤라는 전후에 소련군 점령지역에서 서방 연합군 점령지역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물리치료사가 된 기젤라는 점점 더 독일 어린이로 성장해 가던 잉그리트에게 그녀가 슬로베니아 저항투사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렴풋이나마 자신이 욀하펜 집안의 혈육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던 잉그리트는 거의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뿌리를 찾게 된다. 근원은 1930년대 나치가 집권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생학에 경도되어 있던 나치 지도부는 금발의 푸른 눈, 건장한 체격의 미래 아리안 전사들을 그들이 정복할 세계의 지배자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이른다. 20세기 초반 독일의 인구증가율은 꾸준하게 하향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치는 정책적으로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을 강조하면서, 전쟁을 위한 전사이자 지배자로서 많은 젊은이들이 필요하리라는 점을 인식했다.

 

특히 나치 조직의 핵심을 이루는 친위대 같은 경우, 자그마치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의 순수성을 입증해야 했다. 독일 특유의 관료주의와 서류작업이 그야말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다산을 장려하기 위해, 나치는 갖가지 출산장려정책들을 구사했다. 세금면제를 시작으로 해서, 가정을 꾸리면서 진 빚을 아이 넷을 낳으면 모두 탕감해 주는 파격적인 정책도 실시됐다. 다산한 독일의 어머니에게는 훈장도 수여됐다. 상점에서 VIP 대접을 해주라는 명령도 있었다. 그래도 독일의 출산율은 획기적으로 늘어나지 않았다.

 


힘러가 이끄는 친위대를 중심으로 해서 혼외정사로 태어난 아이들을 양육하는 레벤스보른 프로젝트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 사회는 굉장히 보수적이어서, 미혼모들이 아이들을 기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는 나치 친위대의 종축장이라고도 불렸다고도 한다. 당대에도 해당 프로젝트는 그다지 인기를 끈 정책이 아니었던 것 같다.

 

미치광이 총통에게 600개 연대를 선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해마다 30만 명의 아이들이 태어나야했다. 전쟁 전에도 그것은 불가능했지만, 젊은이들이 한 주에도 수천 명씩 죽어나가는 전쟁 중에는 더더욱 불가능했다. 해괴한 짓거리를 하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치는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의 가속화를 위해 점령지에서 자신들의 인종 기준에 적합한 아이들을 납치하기에 이른다. 아마 이 때부터 비극이 시작된 게 아닐까.

 

에리카 마트코, 그러니까 잉그리트 역시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납치되어 독일 가정에 입양된 것이다. 그녀는 성장해 가면서 불완전한 자신의 신분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는다. 일단 출생증명서가 없기 때문에 온전한 독일인으로서 시민권을 인정 받지 못했다. 유일한 공적 서류인 예방접종증명서에는 잉그리트 폰 욀하펜이 아닌 에리카 마트코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자신의 출생에 무언가 문제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냉전으로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기에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도 나중에 고백하지만, 진짜 자신을 찾는 과정에 잉그리트는 수도 없이 실마리를 찾은 기쁨과 곧 이어 찾아오는 좌절 때문에 번민해야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자신의 이름이 에리카 마트코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새로 유고에서 독립한 슬로베니아 정부에 문의해 보니, 로가슈카슬라티나에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에리카 마트코가 살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도대체 자신은 누구란 말인가? 어머니 기젤라와 아버지 모두 비밀을 밝히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의붓동생은 AIDS로 사망했다. 그런 잉그리트는 결혼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가 없었다.

 

장애 아동을 도우면서 물리 치료사로 살던 그녀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찾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과 같은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의 아이들과 만나는 장면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며 우는 장면은 정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책을 다 보고 나서 잉그리트가 출연하는 짧은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는 독일 국가가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그런 수치였다. 말도 안되는 인종주의에 입각해서 이런 프로젝트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끄럽지 않은가. 훗날 잉그리트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할 적에, 독일 관료들이 얼마나 비협조적이었던가. 연합군에 의해 히틀러 독재로부터 해방이 된 뒤에도, 욀하펜 집안에 편입되길 희망하던 잉그리트에게 그 집안의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 이름 앞에 마트코를 붙이라는 행정 편의주의적 아이디어를 낸 장면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것을 여전한 인종주의의 잔재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책의 도중에 보헤미아 총독으로 금발의 짐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힘러에 버금가는 빌런 라인하르트 프리드리히 암살로 처벌받게 된 체코 리디체 마을의 비극이 등장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비극은 그렇게 연결되는구나 싶었다.

 

일찍이 괴테의 말처럼 당신이 소망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격언은 잉그리트의 자기 뿌리찾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자신을 대체한 에리카 마트코와 만나고 싶었으나, 에리카는 그녀와의 만남을 거부했다. 처음에는 에리카의 태도에 잉그리트는 분노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에리카 역시 해괴하기 짝이 없는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의 또 다른 희생자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과연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질문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맴돈다. 잉그리트, 그러니까 진짜 에리카 마트코가 슬로베니아의 부모에게로 돌아갔다면 독일에서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다큐멘터리 말미에서 인터뷰어가 그녀에게 묻는다. 자신을 슬로베니아 사람 아니면 독일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그녀는 대답한다. “I feel German.”


[뱀다리] 이 책은 공동저자 팀 테이트 덕분인지 구성이나 전개 그리고 역사 서술에 있어 대단히 잘 쓰인 책이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1-04-13 12: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레벤스보른은 <소피의 선택>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했더란 말입죠.

레삭매냐 2021-04-13 21:56   좋아요 0 | URL
으아, 소피의 선택도 도전해 봐야 하나요...

역시나 세상은 무지 넓고, 읽을 책들은
넘쳐 나네요.
 
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주말에 도서관에 들렀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을 빌렸다. 소설의 초반을 읽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청춘들의 모습이 비슷하던지 깜짝 놀랐다. 독일 청년의 모습에서 오래전 나의 그것을 엿본 느낌이었다.

 

어려서는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그렇게 학교에 다녔다. 사실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무제한의 자유는 곧바로 방종으로 이어졌다. 그전까지는 입에도 대지도 않던 술을 마시고, 외박을 하고... 아마 그 시절 나는 요즘 말하는 또라이총량법칙에 따라 똘짓을 수도 없이 했던 것 같다. 그런 생활을 오래가지 않았지만 정상궤도에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렸던 것 같다.

 

소설 <감정의 혼란>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의 대학으로 진학한 화자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못지않은 방탕함을 선보인다. 수업을 제끼는 것은 기본이고, 대도시 베를린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휩싸여 학생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잊고 산다. 그러다 무심코 방문한 아버지의 말없는 준엄한 꾸짖음에 환골탈태하여 베를린을 떠나 작은 도시의 대학에서 새출발에 나선다.

 

이야기의 순서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 소설의 서두는 이제 은퇴를 앞둔 노교수의 회고로 시작한다. 천편일률적인 상찬 대신, 자신의 진짜 모습에 대한 고백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어떻게 해서 학문에 대해 그런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되었나에 대한 잔잔한 소개가 이어진다.

 

원래 선원을 꿈꾸던 화자는 대학 교육은 일단 마치라는 아버지와 타협해서 일단 영문학을 전공한다. 그것도 훗날 선원으로 배에 올랐을 때, 동료 선원들과 소통하기 위한 대전략의 일원이었다. 새로운 대학에서 화자는 진짜 스승님을 만나,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된다. 그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교수님은 학생들과의 열린 토론 같은 세미나에서 그야말로 찬란한 스승의 광휘를 발산한다. 그 세미나의 주제는 셰익스피어였다. 속된 말로 당시 영국이 소유한 식민지 중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던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던 바로 그 셰익스피어 말이다.

 

선생님의 주장에 따르면 어느 한 사회가 문학적 에너지를 분출할 특별한 시점이 있다고 한다. 하긴 셰익스피어나 돈키호테 같은 대문호들이 매년 양산되는 건 아니니 말이다. 화자는 그동안 자신의 무지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끝을 알 수 없는 학문의 세계로 도약한다.

 

바탕한 생활을 경험했던 이들은 그 시절의 무용함을 깨닫고, 자각의 순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자신이 매료된 분야에 정진하기 마련이다. 소설의 화자가 바로 그런 별의 순간을 경험했던 모양이다. 물론, 자신의 선생님이 일방적 강의와 젊은 학생들과 의견을 나누는 세미나식 수업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에 일견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선생님의 열정 앞에 백기투항한다. 아예 선생님네 집 위층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으로 공부욕심에 매진하기 시작한 화자는 자는 시간까지 줄여 가며 자신이 사랑하게 된 학문에 그야말로 몰빵한다.

 

젊은이답게 너무 공부에만 매진하지 말고,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라는 선생님의 제안으로 수영하러 나섰다가 사모님(그 때는 미처 몰랐다!)에게 집적대는 불경을 저지르기도 한다. 왜 그렇게 훌륭한 생각을 가진 선생님이 글을 쓰지 않느냐고 채근해서, 결국은 자신이 받아쓰기를 하겠다며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 화자가 경험하는 방탕의 시간들과 공부욕심에 젖어 충만감과 끝없는 희열에 빠지는 모습에서 무언가에 중독되었다는 본질의 차이는 다를 게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자가 후자에 비해 일견 소모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나중을 위한 소비적 투자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냉온탕을 오가는 선생님의 반응에 나(롤란트)는 혼란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침내 스승과 제자가 대단한 성취를 이룬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의 관계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증오하고 적의 그리고 모욕으로 이어지는 감정에 소년 롤란트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언제는 자신의 그런 부추김이 기쁨의 원천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롤란트의 일탈과 선생님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밝혀지면서 독자는 스승의 감정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모든 삶이 그렇지만, 언제나 만만한 게 아니었다.

 

왠지 불안했던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고 격정적인 감정의 파고가 그렇게 지나고 나니, 그 뒤에는 잔잔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더라. 확실히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은 그의 장끼인 역사평전하고는 결을 달리한다. 자신이 살던 시기의 광기에 맹렬하게 도전장을 냈던 저술가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떤 이의 기구한 숙명이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나에 대해 생각해본다. 소년 롤란트가 어른이 되어가던 과정에 체험하게 된 뜨거운 열정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걸까.

 

돌아온 탕자는 불과 한 학기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방황을 마치고 정상궤도에 진입하지 않았던가. 그 다음 시기에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학구열에 불타는 심정으로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닫겠다는 그런 도전을 했다. 나이든 꼰대는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그리고 모든 일에는 시간과 순리가 필요하다는 걸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경험이 일천했기에 알 방법이 없었다. 롤란트처럼 한 시절을 헌신할 만한 그런 놀라운 학문적 체험과 지식의 전수자를 만나지 못한 것도 못내 아쉽다. 뭐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냐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니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정신세계사 / 1996년 9월
평점 :
품절



만나게 될 책은 언제고 만나게 된다. 내가 아민 말루프의 <마니>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수년전 우리 달궁 독서 모임에서 아민 말루프의 <동방의 항구들> 독서토론을 하면서였다. 그 때도 이미 책은 절판이었다. 하지만 굳이 구해서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마니>에 대해 잊고 살았다. 그러다 며칠 전에 우연히 뜬 <사마르칸드>를 읽고 나서 아민 말루프 작가의 책을 좀 더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작가 마지막 소설이 나온 게 2000년이다. 그러니 지난 21년 동안 소설을 단 한 편도 쓰지 않은 거다. 이래도 되나? 말루프 선생님 책 좀 내 주세요.

 

그렇다 페르시아 출신의 마니는 마니교의 창시자다. 그런데 너무 오래 전의 인물이라 그에 대한 이야기들은 거의 전승이나 신화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과거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 세계를 재구성하는 아민 말루프 작가에게는 딱 들어 맞는 그런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래될수록, 역사의 빈 공간이 많으니 우려먹기가 좋다는 걸까. 이거 알고 보니 맛집일세 이런 것.

 

고대를 주름잡았던 페르시아의 맹주 파르티아 왕국 시절의 크테시폰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소설의 진짜 주인공 마니에 앞서 등장한 인물을 파르티아계 왕족의 후손인 파티그. 진리를 추구하는 그는 팔미라 출신의 시따이에게 매료되어 임신 중인 아내 마리암을 버리고 백의집단의 일원이 된다. 흰옷의 도포를 입은 백의집단은 유대계 기독교도들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엄격하게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고행과 수도에 정진한다. 파티그가 소속된 백의집단은 정통 크리스천 집단과 결을 달리하는 그노시스 계열로,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을 모두 끊고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생활을 할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파티그의 아내 마리암이 낳은 아들 마니마저도 그들의 일원으로 끌어들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백의집단 소속이 된 마니는 오른쪽 다리는 저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유년시절이야 그렇다 치지만, 자의식이 깨어나게 되면서 마니는 언젠가 자신이 백의집단을 떠나게 될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세상에 자신의 쌍둥이 분신과 함께 메시지를 전하러 나가기 전에 준비과정 정도로 생각하면 될 지도 모르겠다. 아민 말루프는 마니가 성장 과정에서 기독교 외경인 <도마복음서>의 저자인 토마의 길을 걸을 지도 모른다는 그런 암시를 제공하기도 한다. 백의집단에서 만난 말쇼스는 마니의 충실한 추종자로 훗날 인도의 뎁까지 이르는 모험적 선교활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고대인으로 마니는 처음에는 화가로서의 재능을 드러낸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닌데, 그리스계 주민의 벽화를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서 보수한다. 유년시절의 친구 말쇼스가 백의집단 공동체를 떠나고, 마니도 24세가 되어 말쇼스의 뒤를 이어 세상으로 향한다. 이때까지 존재감을 보여주지 않던 생물학적 아버지 파티그가 나서서 아들 마니를 만류하는 장면이 낯설다. 마니는 아버지 파티그로부터 자신의 출생의 비밀(페르시아판 막장 드라마였던가!)과 어머니 마리암의 죽음을 알게 된다.

 

세상에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분연하게 그동안 지내온 백의집단 공동체를 떠난 마니는 파르티아 왕국의 겨울도읍지 크테시폰으로 향한다. 새로운 종교의 포교자인 마니는 어디에서나 요주의 인물로 간주된다. 사업가로 변신한 말쇼스는 유년시절 난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준 마니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면서도, 마니가 가는 곳마다 관헌의 주목을 끄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현대처럼 종교와 거주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고대 시대에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주저하던 말쇼스는 아내 클로에의 조언에 따라 동방으로 향하는 마니의 모험에 가까운 선교여행에 동참한다. 바빌로니아의 아들 일행은 티그리스 강의 카추가르, 카락스를 거쳐 인도의 뎁에 이르는 여정을 함께 한다. 상인답게 말쇼스는 일행의 선교여행에 따르는 필요한 물자들을 구하는데 여념이 없다. 하지만 선지자 마니는 잠자리와 먹을거리에 대한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의 메시지를 들은 지역 유지들을 앞을 다투어 마니 일행에게 그들이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었으니 말이다. 인도로 가는 항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말쇼스가 속세의 삶을 상징한다면, 선지자 마니는 그것을 훨씬 뛰어 넘은 존재였다.

 

새로운 종교를 널리 포교하는데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정치권력을 가진 권력자들의 후원을 받는 것이다. 마침내 마니에게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인도의 뎁을 정벌하는데 성공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실력자 오르미즈드(Hormizd)와 마니는 대면한다.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교는 불을 섬긴다는 조로아스터교였다. 오르미즈드와의 만남의 자리에 동석했던 키르디르 승려는 나자렛인(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보이는 마니를 열렬하게 공격한다. 하지만 마니는 기독교도는 물론이고 붓다와 조로아스터까지도 포용하는 유연한 포교전략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의사로 마니는 오르미즈드의 딸을 치료하면서, 그 결과 제국의 1인자 샤푸르 대왕과 알현하는 기회를 만든다. 다음 단계로 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샤푸르의 궁정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과 군주 앞에서 아슬아슬한 대결을 벌인 마니는 결국 샤푸르에게서 그의 제국 안에서 포교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게 된다. 예상한 대로 그 다음부터 마니는 거칠 게 없어져 버렸다. 기존의 사제 계급의 견제를 위해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마니가 필요했다. 다만, 그가 주장하는 인종이나 카스트 제도 같은 계급에 따른 차별을 부인하는 평등주의와 평화주의는 훗날 그의 발목을 잡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절대군주 샤푸르의 비호 아래, 마니를 따르는 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기 시작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두 번째 군주였던 샤푸르 1세는 확실히 영명한 군주였다. 서방에서 자신의 제국을 위협하는 숙적 로마 제국과 대결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전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로마가 원하는 평화협정에 조건을 달아, 아르메니아를 속국으로 만들었고 매년 로마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받기도 했다. 마니는 로마가 그런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계속해서 유지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예언했다. 그의 예언대로, 권력쟁탈전이 끝나고 발레리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대군을 동원해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거점 도시였던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키고 크테시폰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샤푸르는 한사코 자신을 따라 종군을 거부하는 마니를 교묘한 술책을 이용해서 군의관에 임명했다. 친정에 나선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상대할 에데사 전투를 앞두고 마니에게 신의 뜻을 묻는 샤푸르. 마니는 좀 더 현명하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난 30년 간 자신과 함께 한 분신 쌍둥이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제 승려장이 된 키르디르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앞두고 군주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마니를 비난한다. 오르미즈드의 기병대를 앞세운 페르시아군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생포하는 대승을 거둔다. 일설에는 샤푸르가 전투가 아닌 교묘한 책략으로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았다고 하는데, 어찌 되었건 간에 일국의 군주가 전쟁 중에 적군에게 포로가 되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한 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마니의 빛나는 시간들은 샤푸르가 죽고, 둘째 아들이었던 아르메니아 총독 오르미즈드가 장자 바흐람 대신 후계자가 되면서 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승려장 키르디르와 결탁한 바흐람이 동생을 독살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빛의 시간 대신 어둠의 시간이 왔다. 엄혹한 박해의 시간이 올 것을 예지한 마니는 지인들과 제자들에게 피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마니는 담담하게 자신에게 다가온 어둠을 받아들인다. 마니는 서기 27432일 월요일,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민 말루프는 지금까지 총 7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1993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소설 <타니오스의 바위>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소설 <마니>는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말루프 작가의 책이다. 나는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으로 말루프를 처음 만났다. 아쉽게도 그의 초기 소설들은 국내에서 거의 절판되었다. 이번에 만난 <사마르칸드><마니> 모두 중고책으로 구해서 읽었다. <타니오스의 바위>는 중고로 만날 수가 없어서 오늘 아침에 책바다 서비스로 서수원 도서관에 요청했다. 진짜 관심이 가는 책은 말루프의 소설 데뷔작인 <아프리카인 레옹>인데 번역조차 되지 않았다. <사람 잡는 정체성>은 일단 수배해 두기는 했는데 소설이 아니라 좀 망설여진다. 이번 주말에 본가에 가면 <아랍인>을 찾아봐야겠다. 어디에 있나 그래.

 

아마 말루프 작가에게 3세기에 살던 마니는 신화나 전승에나 등장할 법한 그런 인물이 아니었을까. 빈 공간이 많은 만큼,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는 충분했다. 그런데 문득 마니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없는 만큼, 훗날 이런 문학 작품이 어쩌면 역사가 될 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 신화화된 마니의 행적을 그를 추종하던 제자들이 기록으로 남겼다. 천년도 넘어서 우연하게 그 기록들이 발견되었다면 사실로 탈바꿈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이 아니라는 반증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페르시아의 제왕들이 샤한사[king of kings]라는 존칭으로 불리던 절대군주 시절에 등장한 마니는 확실히 기존의 종교에서 본다면 이교도 혹은 이단아로 불릴 만한 그런 캐릭터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군주가 정복전쟁에 나서는 마당에, 계급과 성별, 인종의 차별을 없애고 평화주의를 고수하는 예언자가 환영받을 수 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마니의 운명과 그가 설파하는 메시지를 담은 종교의 운명은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군주와 어떤 관계를 형성할 것인가에 달려 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마니교의 한계였을 지도 모르겠다.

 

마니라는 개인에 대해서는 화가, 의사 그리고 예언자라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졌다는 점에서 작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그런 인물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만 들을 수 있다는 분신의 천상의 목소리는 또 어떤가. 마니의 숙적이었던 승려장 키르디르 입장에서 본다면 망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마니를 후원했던 샤푸르 역시, 마니와 그의 종교를 자신이 제국을 통치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을 뿐이다. 종려나무숲의 종교에서 출발해서, 제국의 권력투쟁 그리고 기사와 이적을 거쳐 순교에 이르는 소설의 전 과정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말루프 선생의 저술에 따르면 마니를 특히 수박을 좋아했다고 한다. 수박은 우리의 눈과 코와 손을 즐겁게 해준다고, 그리고 빛의 정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그랬다고 한다.


[뱀다리]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한샤들이 다스리던 시절, 군주의 이름을 딴 신도시(준데샤푸르)를 건설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지금과 다를 게 없이, 이 시절에도 사전 정보를 입수한 귀족과 부유한 이들이 부동산 투기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거뒀었다고 한다. 투기의 역사는 그렇게나 오래되었구나.

 

[뱀다리2] 화가로서 마니의 경력은 믿거나 말거나겠지만, 샤푸르 대왕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점이다. 당대 모든 이들의 추천을 받아 어진을 그릴 정도였다면 대단한 실력가였을 것이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4-08 18: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니교를 마니가 창시했다니!! 첨 알었어요~ 완전 흥미롭네요~ 그리고 ‘우리 달궁 독서모임‘에서 모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서 미소짓게 되네용~~

레삭매냐 2021-04-08 23:15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

참고로 영어 단어인 mania 그리고
maniac 도 교주 Mani 에서 유래했다
고 하네요.

아, 글구 달궁은 라부입네다.

coolcat329 2021-04-08 19: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마니가 계급 인종 차별을 없애자고 ...이런 사람이었군요. 저에겐 거의 전설 속 인물인데 평등과 평화를 외쳤다니 신기하네요. 그림도 잘 그리고 의사에 예언까지. 저는 수박을 싫어하는데 마니는 좋아했군요 ㅋ

레삭매냐 2021-04-08 23:16   좋아요 2 | URL
아민 말루프 선생이 너무 마니라는 인간
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니의 가르침이나 사상
고런 부분이 궁금했거든요.

악! 수박은 정말 맛있는데요.

라로 2021-04-08 21: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작가도 마니라는 인물도 첨 들어봤어요. ^^;; 덕분에 이제 어디가서 아는 체 할 수 있;;;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는 수박을 싫어했었는데 막내 임신하고 수박이 막 땡겼는데 그때부터 이제 수박 없음 인생이 허전하달까요,, 그런데 ˝수박이 우리의 눈과 코와 손을 즐겁게 해준다고, 그리고 빛의 정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니,, 혼자 고개를 주억거립니다요.^^ㅣ

레삭매냐 2021-04-08 23:19   좋아요 1 | URL
아 그러시고나 -
저의 최애 과일이 바로 수박입니다.

여름에 수박 없음 어케 사나요.

전 이달에 아민 말루프를 읽습니다.
딱 40명만 선정되는 아카데미 후랑수아
멤버라고 하네요.

얄라알라 2021-04-08 23: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996년 출간에, 품절. 레샥매냐님 리뷰 읽고 뭔가 촘촘한 댓글을 남기려고 눈에 불을(?) 켰는데도, 페르시아고 마니교도 굉장히 생소해서 상상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네요^^ 본가에서 책을 찾아보신다니, 깊고 깊은 책의 우물이 여기저기 있으신가봐요^^

레삭매냐 2021-04-08 23:44   좋아요 1 | URL
이 책 <마니>는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
된 아민 말루프 선생의 작품이라는 점
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죄다 절판이 되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저도 다 중고로 구해서 읽고 있답니다.

책에 거풍도 시켜 주고 책등의 먼지 제거
도 해주고 그래야 하는데 당장 안고 있는
책들도 감당이 안되네요.

얄라알라 2021-04-08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3월에 읽었던 종교 다룬 만화책 본문에서 (아, 기록을 안 해놔서 제목이 기억이 안나네요) 이슬람교 무하메드를 직접 묘사하면 불경죄라 해서 불덩어리로 그림에서 처리해놓았던 부분이 생각났어요.(가물가물^^;;) ˝마니˝는 묘사해도, 불경죄 대상이 아니었는가 보다...궁금해집니다^^

레삭매냐 2021-04-09 09:32   좋아요 1 | URL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 종교에서는 신을
형상화시키는 것이 금기시되는 것 같습
니다.

그래서 모스크 같은 곳에서도 그림 대신
기하학적 무늬들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니가 창시한 마니교는 이슬람 이전
의 종교라, 그런 부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얄라알라 2021-04-09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빈약한 질문을 풍성히 채워주시는 레샥매냐님 덕분에이번엔 가물가물하지 않고 확실히 기억해갑니다~~♥

nama 2021-04-10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샥매냐님 따라서 저도 이 책 구입했어요. 레베카,올리브, 도어 등을 읽고 재밌다고 노래불렀는데 사마르칸드는 춤까지 추게 되네요. 감사해요.^^

레삭매냐 2021-04-11 08:03   좋아요 0 | URL
저는 어제 구할 수가 없었던 아민
말루프의 <타니오스의 바위>를
책바다 서비스를 이용해서 만났습
니다.

과연 아민 말루프 최고의 작품이라
할 만했습니다.

그의 데뷔작 <레옹 아프리카누스>
를 너무 읽어 보고 싶어지네요.
 
사마르칸드
아민 말루프 지음 / 정신세계사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기준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선택은 내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책이다. 상당히 주관적인 기준이다. 나는 재밌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음은 무언가 새로운 정보와 지평을 넓혀주는 그런 책이다. 내가 그동안 모르고 살던 분야에 대해 알려주는 책들을 나는 사랑한다. 참고로 나는 주로 문학을 즐겨 읽는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새로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책이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만난 아민 말루프의 <사마르칸드>는 좋은 책이 분명하다. 심지어 재밌기까지 했다.

 

이 책은 오래 전에 절판됐다. 그래서 새 책으로 만나는 건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도서관에도 오래 돼서 그런지 어쩐지 대여목록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유이한 선택은 책바다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중고로 구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시간이 좀 걸리고 반납의 압박이 있었고, 후자는 좀처럼 구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가격도 비정상적으로 비쌌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서울책보고 온라인 서비스에서 이 책을 찾아냈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주문장을 날렸다. 책값이 배송료보다 싸다는 점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책이 주말에 도착했고, 책에 인쇄된 문자에 허벌한 사람처럼 그렇게 달려들었다.

 

기이하게도 1912년 타이태닉호의 침몰 타령을 하며 시작된 소설은 독자들을 양탄자의 나라 11세기 페르시아로 인도한다. 그러니까 대략 천 년 전의 일이다. 실존했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아민 말루프 작가의 장기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4부의 구성된 첫 두 이야기의 주인공은 페르시아 출신 시인이자 과학자, 점성가, 의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오마르 하이얌(1048.5.18. ~ 1131.12.4.)이다.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잘 알 수가 없는 당대 인물들과 달리 천문학에 능통했던 하이얌은 자신의 생몰 연대를 별자리의 운행을 통해 정확하게 기록에 남겼다. 소설의 시작은 4행시 루바이의 대가였던 시인의 이십대 시절을 그린다.

 

이란 북부 호라산 지방의 니샤푸르에서 태어난 하이얌은 이미 젊은 나이에 대학자로서의 위용을 자랑했다.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마르칸드의 거리에서 위대한 스승이자 이성의 사도였던 아비켄나의 제자 자베르 영감이 거리의 부랑배들에게 봉변당하는 모습을 보고 분연하게 도전했다가 자신 역시 몰매를 맞는다. 카디(재판관) 아부타헤르 앞에 끌려 나간 하이얌은 카디의 현명한 판결과 중재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하이얌의 후원자로 변신한 아부타헤르는 하이얌을 사마르칸드의 절대군주 나스르 칸에게 소개한다. 그에 앞서 부하라 출신의 젊은 과부 자한느는 궁정 시인으로 멋진 시를 낭송하고 나스르 칸에게 상으로 무려 46개의 금화를 입에 무는 기염을 토한다. 물욕의 상징인 금화를 혐오하던 지식인 하이얌은 거의 도발에 가까운 대범한 시로 절대군주에게 도전한다. 젊은 시인의 위태로운 줄타기는 성공했고, 나스르 칸의 친구가 되었다. 소설 초반의 결정적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아부타헤르는 오마르 하이얌에게 빈 공책을 주고, 그만의 루바이를 비밀리에 쓰라고 제안한다. 어떤 점에서 시나 문학이 권력자들에게 불편한 그런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지적하고 싶었던 것일까.

 

셀주크 투르크 술탄과 당대의 재상 니잠 엘물크 그리고 알라무트 요새에 자객단 아사신파를 창조한 하산 사바흐가 빚는 권력투쟁의 연대기는 거의 신세계처럼 다가왔다. 지식인 하이얌은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은 엄정 중립을 지키면서, 거의 곡예에 가까운 모습을 선보인다. 술탄을 정점으로 한 권력투쟁의 결말은 모두에게 비극이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동시에 신화나 전설에 가까운 천 년 전의 이야기들이 이렇게 매력적일 수가.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 <사마르칸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1부와 2부가 11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이 살던 사마르칸드를 그리고 있다면 3부와 4부는 19세기말 그리고 20세기 초의 아이란(아이라니아 바에자:아리아인들의 땅)의 급변하는 정세를 다룬다. 천 년 전의 페르시아와 위대한 시인 오마르 하이얌은 당연히 몰랐다고 하더라도, 근대 이란에 대해 이렇게 무지했나 싶을 정도다.

 

두 개의 서로 상이한 이야기를 연결하는 건 바로 하이얌이 남긴 <사마르칸드의 원고>, <루바이야트>. 역사 속에서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 루바이야트를 찾아나선 미국 아나폴리스 출신의 벤자민 O. 르사즈는 다시 한 번 독자를 신비한 동방의 세계로 인도한다. 외할아버지가 사는 파리에서 앙리 로슈포르 후작을 만나고, 다시 그를 통해 페르시아의 지식인 세이예드 자말레딘을 알게 된다. 르사즈의 미들 네임인 O가 올리버 같은 서양 이름이 아니라 바로 오마르하이얌에서 왔다는 건 이제 비밀이 아니다.

 

세기말 서구열강의 각축장이 된 페르시아에 입국해서 하이얌의 <루바이야트>를 추적하던 미스터 르사즈는 새로운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테헤란에 대한 정경을 기록으로 남긴다. 페르시아의 오랜 도시들인 이스파한이나 키르만, 시라즈 같은 고대 도시들과 달리 신도시 테헤란에는 역사가 부재하다는 사실을 그는 파악한다. 격심한 빈부의 격차 그리고 낙후된 도시 시설들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증언한다. 서구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혁명의 파도 앞에 페르시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도로와 철도 부설권 그리고 우편업무까지 모조리 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 침탈당한 페르시아의 모습은 구한말 우리네 그것과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페르시아 민중들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나는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회교혁명은 알고 있지만, 그전에 이미 이런 혁명의 기운이 있었다는 건 미처 알지 못했다. 르사즈가 테헤란에 체류하던 189651, 카자르 왕조의 나세드린 샤가 광신도 미르자 레자에게 의해 암살당했다. 마치 수백 년 전 음지에서 암약하던 아사신파가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샤의 암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르사즈는 열혈 청년 동지 파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체포의 위기를 모면하고, 샤에게 억울하게 처형된 반대파 바비교도 집안 여자들의 안다룬(안채)’으로 도피한다. 그동안 르사즈는 단기속성으로 페르시아어를 익혔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미국인이 페르시아어를 할 수 있다는 설정을 위한 탁월한 세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르사즈는 샤의 손녀 시린느 공주의 도움으로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온다.

 

고향인 아나폴리스에서 르사즈는 동방의 대모험가 취급을 받게 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파리에서 테헤란으로 가는 데 한 달이 걸렸다고 했던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시린느 공주의 현지 보고를 담은 편지로 르사즈는 페르시아 내부의 현지사정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 수가 있었다. 새로운 샤의 요양 자금을 얻기 위해 페르시아는 러시아에게 무역독점권을 부여했고,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를 벌이고 있던 러시아는 상대방의 견제를 의식해서 벨기에의 레오폴드 2(콩고 식민지를 악랄하게 수탈한 바로 위인이다)에게 세무 업무를 대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다고 해서 외세에 의한 수탈이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수모를 견딜 수 없었던 페르시아의 상인들은 비폭력 바스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샤는 절대왕정 대신 입헌제 도입을 선언하게 되었다. 물론, 이 와중에서 다수의 무슬림 종교지도자들은 서구식 입헌제와 민주주의가 이교도의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때가 1906년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미스터 르사즈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페르시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불꽃은 타브리즈에서 화려하고 장엄하게 타오른다. 물론 그 자리에 우리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르사즈가 있었던 것은 불문가지다. 모사데그와 호메이니의 회교 혁명 이전인 20세기 초반 페르시아, 오늘날의 이란에 이런 혁명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1859년 영국 시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에 의해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가 서방 세계에 소개되었다. 그럼에도, 진본 <사마르칸드의 원고>를 찾겠다는 집념으로 똘똘 뭉친 미국인 르사즈의 인내와 패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가 어렵게 손에 넣은 <루바이야트>는 타이태닉호와 함께 대서양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천 년 전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장엄한 엔딩으로 이보다 더 강렬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나의 <사마르칸드> 읽기는 마치 한 편의 소설을 통해 두 편의 작품과 만난 그런 경험이었다. 800여년의 세월을 건너뛰면서도 무리 없는 전개와 위대한 시인이 남긴 <루바이야트>를 통한 세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의 전승이라는 주제를 고른 아민 말루프의 탁월한 선택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이런 훌륭한 책이 절판되었다는 점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저자의 다른 책을 너무 만나보고 싶어서 <마니>를 오늘 주문했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4-05 20: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 타사 책방잉크에서 이 책이 제 취향이라고 떠서 놀랐어요.ㅋㅋㅋㅋ말씀대로 주변 도서관에 전무해서 중고알람 걸어놓고 꿩대신 닭? 심정으로 이 작가님 다른 책 찜했어요. 좋은 평가 하나라도 있음 절판일 경우 e북이라도 내줬음 싶네요.

레삭매냐 2021-04-06 01:40   좋아요 1 | URL
아이란[이란]이 아리아인의 땅을
의미한다는 걸 그리고 파라다이스
의 어원도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했
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전 올드스쿨 스탈이라 그런지 전통
적 책만 보게 되네요. 옛날 사람...

개인적으로는 타리크 알리의 지중
해 5부작 가운데 나머지 3권도
절실하게 번역해 주시길 바랍니다.

바람돌이 2021-04-05 21: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뭔가 굉장하 얽히고 설켰을 느낌늬 책인데요. 힘들게 구했는데 책이 좋아서 참 다행입니다.

레삭매냐 2021-04-06 01:41   좋아요 1 | URL
내용이 하도 광범위해서 저의 보잘
것 없는 리뷰에 다 못담았습니다.

4월에는 아민 말루프를 읽겠습니다.

nama 2021-04-05 22: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990년대에 갈 뻔했던 사마르칸드. 호기심에 구입해두고 읽지는 않았는데 이런 훌륭한 책이었네요. 헌책으로 버릴 뻔 했어요.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1-04-06 01:42   좋아요 1 | URL
우리 책쟁이들은 집에 있는 책들을
읽습니다. 일단 가지고 있다면 언젠
가는 읽을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미미 2021-05-07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민 말루프로 당선이라 더 의미있고 멋집니다. 축하드려요~이 당선을 부스터로 재출간이 되길!!^^*

레삭매냐 2021-05-07 20:14   좋아요 2 | URL
예전에 나온 책은 물론이고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책들도
속히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5-07 17: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레삭매냐 2021-05-07 20:13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초딩 2021-05-08 1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지척!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레삭매냐 2021-05-08 21: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모쪼록 아민 말루프
의 새로운 책들이 나오길.
 
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48514일 이천년간 자기 조상의 땅을 떠나 유랑하던 유대 민족이 팔레스타인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들에게는 축복이었겠지만, 오랜 시간 그 땅에 살던 아랍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대재앙(al-Nakba)이었다. 히브리인들의 디아스포라가 끝나는 극적인 순간이 다른 민족에게는 재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73년이 지나는 오늘까지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르는 평화의 땅이 아니라 분노와 증오 그리고 유혈의 땅으로 변했다.

 

원래 팔레스타인은 유엔 결의에 따라 유대인과 아랍인 두 개의 국가가 건설될 예정이었다. 이런 타협은 두 민족 모두에게 공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전쟁이라는 가장 폭력적 방식으로 해결점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밀리면 그야말로 바다에 빠져 모두 죽는다는 사생결단의 의지로 똘똘 뭉친 신생국가 이스라엘의 놀라운 승리였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핍박받던 민족에서 이제는 아랍인들이 우려한 대로 거대한 파괴자가 등장했다.

 

거장 아모스 오즈의 <유다>(원제는 <유다복음서>라고 한다)는 바로 그런 중동의 비극이 잉태된 시기로부터 대략 10년 정도 지난 예루살렘을 시공간적 무대로 시작한다. 1959년에서 1960년이 되는 시기라고 저자는 밝혔던가. 우리의 주인공은 25세 개혁적 사회주의자 슈무엘 아쉬다. 청년 집안이 소송으로 파산하게 되면서 비교적 유복하게 지내던 청년은 졸지에 살 곳도 그리고 학업도 중단해야 하는 그런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애인도 자신과 결별하고 수문학자와 결혼을 발표한다. 보통 안 좋은 일들은 그렇게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법이지.

 

역사학도이자 비교종교학을 전공하던 청년 슈무엘은 대학에서 <유대인의 눈에 비친 예수>라는 주제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인류 구원이라는 지상과제를 지니고 인자로 세상에 온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배신의 역할을 떠맡은 자가 바로 가룟 유다였다. 신을 죽이는데 일등 공신이었던 유다는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 그런 가공할 범죄를 저지른 유대인들은 핍박의 대상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아직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랍비로 인정할 따름이다. 히브리인들은 그를 그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금기시한다고 알려졌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배신자 유다의 죄를 왜 죄 없는 다른 히브리인들이 짊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연좌제 적용이 아닌가.

 

다시 현재 슈무엘 아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오갈데가 없어진 슈무엘은 학업을 중단하고 어느 광고지를 보고 기숙하면서 말동무를 원하다는 구인에 응모한다. 칠십대 장애인 노인 게르숌 발드의 오후를 책임지면 숙식과 약간의 보수를 지급한다는 제안은 네게브 사막에 건설 중인 새로운 정착촌 경비라도 나설 용의가 있던 슈무엘에게 축복이었다. 그리고 게르숌 발드와 같은 집에서 살던 미스터리한 여성 아탈리야에게 매력을 느끼는 슈무엘. 게르숌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검은 과부에게 이끌리지 말라는 경고장을 날린다. 경고는 경고일 뿐, 계속해서 아탈리야에게 끌리는 마음을 청년은 다스리지 못한다. 너무 클리셰이였던가. 도대체 이들의 관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대가 아모스 오즈는 이런 긴장감 속에 파묻혀 있던 진실들을 하나둘씩 꺼내든다. 마치 상실된 강호의 비급을 알려 주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이다. 그는 이미 1950년에 죽은 사람이다. 이스라엘 건국에 큰 공헌을 한 다비드 벤구리온이 주창한 시오니즘 광기에 맞서, 유대인과 아랍인이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 이전처럼 팔레스타인 땅에서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는 이상주의를 설파했다. 아브라바넬은 유대민족에게는 그야말로 유다에 버금가는 그런 배신자 같은 존재다. 아탈리야는 그런 아브라바넬의 딸이고, 게르숌 발드의 아들 수학자 미카의 미망인이다. 미카 발드는 194842, 아랍민병대와의 교전에서 사로 잡혀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당시는 그렇게 상호간에 분노와 증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비이성적인 폭력이 판을 치던 그런 시절이었다.

 

독립 전쟁 당시, 당시 고작 13살 정도였던 슈무엘은 비극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니 자신의 조부로 라트비아 출신 유대인으로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안테크도 같은 히브리인들에게 영국의 이중첩자로 몰려 살해당하지 않았던가. 사실 안테는 위조문서 전문가로 나치 독일에 저항하는 영국군에 협력했을 뿐인데, 종전 후 점증하는 반영주의 분위기에 그만 희생당하고 말았다. 가룟 유다로부터 시작된 배신의 DNA는 그렇게 사방에서 발견된다.

 

슈무엘의 연구와 사유에 따르면 부유한 이스카리옷 출신의 유다가 고작 은 30세겔에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군에 넘겼다는 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성전에서 환전상들에게 채찍질한 사건으로 신원이 알려진 나사렛 예수를 유다가 지명한 것도 어불성설이란다. 허구일 지도 모르겠지만, 바리사이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기 위해 가룟 유다를 고용했다고 한다. 문제는 예수를 따르던 유다가 그만 진짜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슈무엘은 한 발 더 나아가, 유다가 첫 번째 기독교인이자 마지막 그리고 최후의 기독도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유다복음서>의 이단적 주장에 편승한다.

 

아모스 오즈 작가 역시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처럼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주장한 꿈꾸는 사람이었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히브리인과 아랍인이 서로 이해하지 못해서 팔레스타인에서 그런 갈등을 빚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상호 파멸적인 투쟁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한다. 나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오랜 디아스포라와 차별 그리고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히브리 사람들의 피해자 코스프레는 73년 전에는 통했을지 몰라도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다. 거대한 파괴자가 된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들을 추방하기 위해 비무장 시민들에게 압도적 무력 사용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아모스 오즈 작가는 벤구리온 이래 유대사회를 지배해온 광기 어린 유대민족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온 광기에 대해 아모스 오즈 같은 소수의 꿈꾸는 이들이 펜으로 저항에 나섰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지 않을까.

 

그동안 아모스 오즈 작가의 책을 한 번 읽어야지 했는데, 2021년 사순절 기간에 그의 마지막 작품인 <유다>를 만났다. 방대한 양에 달하는 주석으로 책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마지막 장을 다 넘긴 뒤에 느낀 성취감은 기대이상이었다. 이스라엘 독립 과정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책읽기를 멈추고 막연하게 알고만 있던 현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공부도 했다. 모쪼록 조국에서 타민족과의 평화 공존을 주장하다가 이단아로 몰린 노대가의 이상이 현실화되기를 기원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4-02 16:4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최창모님 번역이네요
예전에 아모스 오즈 민음사에서 출간한 작품 오타가 많아서 읽다가 덮었었는데
현대 문학은 표지도 깔끔하고 편집도 잘된것 같네요
매냐님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서 한권뚝 딱!

레삭매냐 2021-04-02 17:55   좋아요 2 | URL
램프의 요정을 휘리릭 돌려 보니
예상 외로 아모스 오즈 작가의
책들이 많이 없네요. 나온 책들도
많이 절판되었구요.

무언가 알고자 하는 부분을 자극
한다는 점에서 알찬 독서의 시간들
이었습니다.

원더북 2021-04-02 1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저 지금 이 책 읽고 있는 중인데^^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이후로 레삭매냐임이랑 뭔가 통하는 듯 ㅎㅎ 저도 아모스 오즈 책은 이 책이 처음이에요. 집에 몇 권 있지만 읽을 계기가 없어서 소장만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작품부터 거슬러 올라가게 생겼어요. 인상 깊게 읽으셨다는 말씀듣고 저도 완독에 박차를 가해 봅니다~

레삭매냐 2021-04-02 19:05   좋아요 1 | URL
도중에 이 책 저 책 집적거리다가
12일이나 걸려서 읽었네요...

이중 나선(double helix) 구조라는
게 장점이자 약점이 될 수 있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 조금 들었습니다.

기운내셔서 완독하시길 응원합니다!!!

붕붕툐툐 2021-04-02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학구적으로 공부하며 읽으시는 레삭메냐님 대박! 사순절에 어울리는 책을 읽으셨네용~👍

레삭매냐 2021-04-03 10:58   좋아요 0 | URL
제가 찾아 보니 블로그 글이 너튜브 보다
훨씬 낫더군요.

역시 저는 문제적, 아니 문자적 인간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