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대산세계문학총서 159
엔도 슈사쿠 지음, 김승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나에게 8월은 가히 엔도 슈사쿠의 달이라고 불러도 될 듯 싶다. 이 달에만 신간 <사무라이>를 비롯해서 <깊은 강><바보>를 잇달아 읽었으니 말이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린 <전쟁과 사랑>도 대기 중이다. 이번에 재개정판으로 나온 <예수의 생애>도 궁금하다.

 

이번 주에 만난 <바보>는 젊은 날의 엔도 슈사쿠 선생의 작품이라 그런지 조금은 구성이나 주제를 보듬는 부분에서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무라이><깊은 강>이 너무 강력해서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그런 느낌이랄까.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프랑스 사부아 출신의 가스통 보나파르트(, 맞다 자그마치 나폴레옹의 후손이라고 한다)가 일본으로 건너와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소설의 끝까지 도대체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어설픈 일본어를 구사하며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가스통이 왜 일본에 왔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아니 이렇게 불친절할 수가 있나 그래. 독자에게는 적어도 넌지시 알려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소설의 다른 주인공들로는 다카모리와 도모에 히가키 남매가 등장한다. 우리의 주인공 가스통은 예전에 다카모리와 펜팔한 인연으로 일본을 찾는다. 그리고 히가키 집안에서는 외국인 손님을 맞기 위해 난리법석이 벌어진다. 의사이자 의대 교수였던 아버지였던 히가키 씨는 작고하셨고 어머니와 가정부 마짱이 미지의 외국인을 맞이하기 위해 열성적인 준비에 나선다. 이런 모습을 보고 은행에 다니는 게으름뱅이 다카모리는 외국인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일본이라는 공식화된 모습을 은근 비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국인은 일본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자신들보다 못사는 동남아 사람들이나 흑인들에게는 1도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다.

 

오빠 다카모리에게 절대지지 않고, 남들은 배우지 않는 이탈리아어 전공으로 뷰타포코 사에 취업해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신세대 엘리트 여성 도모에도 만만한 캐릭터가 아니다. 오빠 말로는 혼기에 꽉찼다고 하는데, 그녀는 남자와의 연애나 결혼 이딴 거에 관심을 두는 대신 주식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 최근 주식의 세계에 입문한 주린이로서는 눈이 번뜩 뜨이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주식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건 아니고 다만 도모에 씨가 당대 다른 여성들과는 다른 매력의 소유자라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프랑스를 출발해서 베트남 호의 사등칸에서 등장한 가스통은 남매에게 실망 그 자체였다. 일단 서구인답게 체격은 건장했으나 인물은 배우를 기대했던 도모에의 그것과 달리 말상이었다. 뭐 이건 외모비하인가. 어설픈 일본어 구사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 히가키 남매에게는 기대 이하였던 모양이다.

 

그 다음에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일단 우리의 친구 가스는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다. 소설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에 대한 소개가 등장하는데, 보면 볼수록 도모에가 바보 혹은 얼간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는 합리적 추론을 하게 만들어 준다. 어때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나 말이다.

 

소설 <바보>1959년에 신문에 연재되었던 모양인데,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전후 12년 후인 1957년 경인 듯 싶다. <침묵>이나 <사무라이> 등의 작품을 통해 역사라는 공간에서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이유를 구도자의 모습으로 구하던 엔도 슈사쿠 선생은 시간을 현대에 맞춰 그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평생 추구해온 주제 의식을 다시 한 번 독자에게 선사한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적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선하고 도대체 화를 내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희생을 자처하는 인물이 바로 가스통 보나파르트다. 일본 사람들은 발음이 어렵다며, 그의 이름도 가스라고 저들 편한 대로 부른다. 히가키 남매와 신주쿠 사건을 겪은 가스는 히가키 저택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달랑 3,000엔과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표 한 장 그리고 일본에 와서 만난 떠돌이개 나폴레옹과 길을 나선다.

 

그리고 산야의 쪽방 같이 허술한 곳에서 당시 일본의 밑바닥 인생들과 조우한다. 오히려 어려운 이들이 자발적으로 우리의 가스를 돕기 시작한다. 먹을 것을 나누고, 오갈 데 없는 가스를 점쟁이 조테이 어르신에게 소개시켜 함께 기거하게 된다. 볼품 없고 일본어도 잘 하지 못하는 가스를 누가 환대한단 말인가? 하긴 가스는 고향 프랑스의 사부아에서도 포플러 나무라며 어린 시절 갖은 학대와 수모를 겪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그의 성향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리고 일본으로 무대를 옮겨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인간이란 바뀌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가스는 거리에서 산야의 소문난 살인 청부업자 엔도와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이 조금 마음에 걸렸는데,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냉혹한 킬러로 알려진 엔도가 알고 보니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야쿠자였다는 설정이다. 그래서 프랑스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면서(1950년대 일본에서 영어도 아닌 프랑스어를!!!) 가스와 의사소통에 나선다. 그리고 엔도의 난폭한 비정함 뒤에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억울하게 원주민들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전범으로 사형 당한 형님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이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던가. 콜트 권총까지 마련한 엔도는 형님의 억울한 죽음에 관련된 세 명의 인사들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우리의 가스는 킬러의 사냥에서 경찰의 추격이나 검문을 피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다. 첫 타겟이었던 가나이는 선량한 남자 가스의 방해질로 실패하고, 다음 목표였던 고바야시 사냥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엔도라는 불쌍한 영혼의 본질을 알게 된 가스는 엔도에게 이용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끝내 그를 버리지 않는다. 심지어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지고지순한 희생과 헌신의 모범 보여주었던 전임자 예수 그리스도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야마가타의 어느 숲 속에서 한 바탕 느와르 액션활극을 방불케 하는 소동이 벌어진 뒤, 가스는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그가 도대체 왜 일본에 왔는지에 대해서는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그리고 보니 바로 전에 읽은 <깊은 강>에서 외국인 가스통이 등장하는 것 같던데, 그 가스통이 <바보>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던 바보 가스통 보나파르트가 아니었을까. 한 작가가 쓴 각기 다른 두 소설의 이런 연결점을 만들어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좀 별루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 읽고 나서 리뷰를 하다 보니 역시 우리의 가스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그의 진가를 알아 가게 되는 도모에에 나 자신을 투영시켜 보기도 했다. 소설은 신문 연재소설답게 짧게 끊어가며 치고 나가는 흥미로운 포인트들이 분명 있었다.

 

피곤한 참에 아크 페일 에일을 한 깡통 마셨더니만 너무 졸립다. 이제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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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8-20 01: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맥주 마시고 이 늦은 시간에 리뷰 쓰는 대단한 사람

레삭매냐 2021-08-20 08:10   좋아요 4 | URL
굳이 변명을 하자면...

리뷰 쓰던 도중에 비루 생각
이 났고, 그걸 마시고 나니
급피곤해졌더라는.

예전에 술 먹고 시험공부한
답시고 밥상 끌어 안고 잔
생각이 나네요. 당연 시험은
망했습니다.

새파랑 2021-08-20 06: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음주 리뷰군요 ㅋ 어떤 훌륭한 작가라도 모든 작품이 좋을수는 없더라구요. 이 책 대산세계문학 시리즈군요. ㅋ 표지만 봐도 가지고 싶어지는 😆

레삭매냐 2021-08-20 08:12   좋아요 4 | URL
제가 사랑하는 작가 중의
하나인 제임스 설터가
지적해 주신 부분에 정확
하게 들어 맞는 것 같습니다.

한 작가의 모든 책들이
그렇게 다 좋을 수는 없죠.
공감합니다.

대산세문 표지는 짱입니다 역시나.

coolcat329 2021-08-20 11: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깊은 강의 가스통. 그 가스통이 맞는거 같아요.
참 체력이 좋으시네요. 저는 11시 넘으면 앉아있지 못하는데요.

레삭매냐 2021-08-20 14:10   좋아요 2 | URL
<깊은 강>을 다시 살펴 보고
싶은데 책을 반납해서리...

저의 저질 체력을 뭘로 보시고 ㅋㅋ

어제는 참 졸립더라구요. 그래도
왠지 리뷰는 마무리하고 싶어서리.
금방 나가 떨어졌답니다.
 
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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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엔도 슈사쿠의 신간 <사무라이>를 읽었다. 그리고 <침묵>으로 시작된 나의 엔도 선생에 대한 사랑은 <깊은 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지난주에 산 <바보>도 대기 중이다. 이제는 절판된 <숙적>도 구해서 읽어 보고 싶은데, 책이 없다. 또 헌책사냥에 나서야 하나.

 

엔도 슈사쿠가 1993년에 발표한 <깊은 강>의 시간적 배경은 1984년 가을, 인디라 간디가 암살되기 직전의 시기다. 그리고 제각각 사연을 지닌 네 명의 인물들이 인도 바라나시에 모인다.

 

첫 번째 주자인 오사무 이소베는 최근 35년간의 무난해 보이는 결혼생활의 동반자였던 아내를 잃었다. 일본 남자답게 아내에게 애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고 그는 고백한다. 아내는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다시 태어날 테니(환생), 꼭 자신을 찾아오라고 부탁한다. 그의 절대 고독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소베는 병상에서 죽어가는 아내를 돌본 자원 봉사자 나루세 미츠코를 알게 된다.

 

다음 주자는 바로 나루세 미츠코다. 기독교 대학 불문과 출신의 시골 처녀 나루세 미츠코는 자유연애의 신봉자로 집안의 도움으로 도쿄에서 화려한 대학생활을 펼친다. 그런 그녀에게 오츠라는 이름의 순진한 피에로가 등장한다. 친구들은 모이라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미츠코를 부추겨서 신실한 남자 오쓰를 유혹하자는 기묘한 게임을 제의한다. 사실 미츠코에게 오츠에게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신이 거대한 사랑의 덩어리라는 둥의 스콜라 철학에서나 나올 법한 타령을 하는 오쓰를 망가뜨려보겠다는 일그러진 욕망을 가지고 그를 유혹한다. 나루세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한 오쓰를 단박에 걷어차 버린 미츠코는 화려했던 대학 시절을 마무리 짓고, 유복한 집안 출신의 일과 자동차 그리고 골프 밖에 모르는 남자와 결혼에 골인한다.

 

동화작가 누마다는 엔도 슈사쿠의 선생의 문학적 페르소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육군 최악의 작전으로 알려진 임팔 작전에서 살아남은 기구치가 차례로 등장한다. 각자 사연을 품은 이들이 모두 인도 바라나시에 모이면서 엔도 슈사쿠 서사의 수레바퀴는 힘차게 굴러가기 시작한다.

 

엔도 슈사쿠 선생이 <깊은 강>에서 다루는 여러 층위의 이야기 중에서는 나는 바로 미츠코와 오쓰가 벌이는 핑퐁게임과 양파에 대한 설전 그리고 처참하게 실패로 끝난 임팔 작전의 생존자 기구치의 고뇌가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다. 일본, 프랑스 그리고 인도로 이어지는 미츠코와 오쓰의 끈질긴 인연의 설정이 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오쓰가 촉발시킨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보겠다는 신념에 찬 미츠코의 긴 여정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삶과 죽음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기구치를 간호하고, 오쓰와 마지막으로 만나면서 과연 그녀는 그토록 갈구하던 공허로부터 안식을 얻을 수 있었을까? 양파라고 그들이 명명한 신의 존재와 구원에 대한 대화는 결국 엔도 슈사쿠 문학의 핵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마다로부터 출발한 저자의 삶은 자신이 버린 양파에게 다시 귀의하여 프랑스 신학교에 간 오쓰에게 전이되기에 이른다.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공허함을 달랠 수 없었던 미츠코는 자신의 피에로였던 오쓰를 계속해서 찾아 희롱한다. 물론 그럴수록 자신이 공허 속으로 침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사실 난 이 소설을 문제적 인물은 기구치 때문에 읽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얼마 전에 너튜브를 통해 NHK에서 제작한 임팔작전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5년에 걸친 태평양전쟁 당시 300만 정도의 일본군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 20% 정도가 아사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본군은 전쟁에서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병참 문제에 대한 인식 없이 전쟁에 돌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배고픈 병사가 어떻게 최전선에서 보급을 잘 받아 잘 먹고 튼튼한 병사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최악의 사령관 중의 하나였던 무다구치 버마군 사령관의 무모한 작전에 임팔작전에서 숱한 일본군 병사들이 그렇게 죽어 나갔다. 그들을 추격하던 영국군과 구르카 병사들보다, 기아와 말라리아 그리고 이질이 일본군에게는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퇴각하던 중에 빈사의 상태에 빠진 기구치를 구한 동료가 바로 쓰카다였다. 그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데에는 아주 끔찍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생환하는데 성공한 쓰카다는 결국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병상에서 죽어가는 그를 도운 청년이 가스통이라는 이름의 외국 청년이었다.

 

제각각 다른 목표를 가지고 이렇게 모인 일단의 관광객들을 통솔하는 가이드 에나미 또한 흥미로운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4년 동안 인도 철학을 전공했지만, 고국 일본에 그를 위한 일자리를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가이드를 하면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인도의 이모저모를 보여 주는 것이 그의 본업이 되었다. 수박겉핥기식 인도 여행을 하는 자신의 손님들을 경멸하면서, 차문다 여신을 일행에게 소개하는 장면의 역설이란. 결국에 가서 숱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갠지스강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장면을 찍어 사단을 내고야 포토그래퍼 산조 부부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엔도 슈사쿠의 다른 작품들처럼, <깊은 강> 역시 독자에게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60억 인류의 사고방식과 얼굴 그리고 살아온 내력이 다른 만큼, 엔도 슈사쿠 문학의 수용 또한 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대지의 어머니 같은 갠지스강은 도도하게 흐르며, 구도와 영혼의 안식을 구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아낌없이 내준다. 아니 스스로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고 해야 하나.

 

소설에서는 인도의 어머니라 불리는 인디라 간디가 시크 교도 경호원에게 암살당하면서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종교 갈등이 다시 폭발한다. 산조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결국 아무런 죄 없는 오쓰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되고, 범신론적 신념 때문에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하던 오쓰가 양파의 희생을 재현한다.

 

엔도 슈사쿠의 작품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구사하는 마성 같은 서사와 양심을 타격하며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질문들이 매혹적이면서도 두렵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들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 모양이다. <깊은 강>을 읽다가 사유의 심연에 빠져 버린 그런 느낌이 들 정도였다. 미리 수배해둔 <바보>를 바로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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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8-17 01:5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2차 세계대전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모두가 식량부족에 시달렸어요. 후방이 전쟁물자를 다 감당할 수가 없었고, 그 후방도 주요 공습대상이 되면서 생산성은 계속 떨어졌으니까요. 실제 2차 세계대전 사진들 보면 유럽에서도 군인들이 들쥐를 잡아서 말리고 있는 사진도 많아요. ㅎㅎ
웃기는 얘기하나요.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이 새파란 미국의 신병들이 연합군의 참호를 보고 기겁한거예요. 곳곳이 질퍽질퍽하고 빗물이 제대로 안 빠지면서 완전 시궁창이었던거죠. 연합군은 그 시궁창에 들어앉아 굶주리면서 싸우고 있었고 - 물론 동맹국쪽도 마찬가지고요.
이 미국 신병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하면 자기들이 가지고 온 전투식량 깡통들을 참호안에 집어던져서 참호를 메꾸는거였대요. 시궁창 물에 발 넣기 싫어서요..... 그 귀한 식량을 참호에 던져넣는거 보고 유럽 애들은 기겁을 했고요. 역시 부자 나라 미국이에요. ^^

레삭매냐 2021-08-17 08:10   좋아요 4 | URL
일설에 의하면 독일의 군수장관이었
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독일의 전쟁
물자 생산력이 정점에 달하는 1945년
에 전쟁을 시작하자고 주장했지만,
그 때가 되면 히틀러 자신의 나이가
너무 든다고 생각하고 조기에 전쟁을
시작했다고 하더라구요.

실제로 연합군의 어마무시한 공중폭격
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전쟁물자 생산력
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게 독일이 동서 양쪽에서 연합
군의 엄청난 공격에도 불구하고 바로
무너지지 않은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르겠
네요.

참호를 전투식량 깡통으로 메꿨다는
이야기는 정말 신박합니다. 정말 부자나
라 맞는 것 같습니다 ^^

han22598 2021-08-17 02:0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엔도 슈사쿠 책 다 모으고 싶은데, 전 바보도 없고 숙적도 없어요 ㅋㅋㅋ ㅠㅠ 레샥매냐님이 숙적을 먼저 겟 하시면, 저도 뒤따르겠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1-08-17 08:15   좋아요 4 | URL
전 어제부터 바로 쟁여둔 <바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답니다.

일본어로는 ‘오바카상‘이라고 되어
있네요.

<숙적>은 사냥 난이도가 제법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단 시도는...

겨울호랑이 2021-08-17 10:5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사큐의 작품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엔도 슈사큐 작품 전반에 담긴 종교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레삭매냐 2021-08-17 08:16   좋아요 6 | URL
국내에 나온 책들이 제법 되어서
계속 구해서 읽을 만한 것 같습
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게
쉽지 않은데, 엔도 슈사쿠 선생은
종교와 개인의 성찰 그리고 구도
라는 점에서 탁월했던 것 같습니
다.

mini74 2021-08-17 08: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리도 있었죠. 1.4후퇴때. 군비리로 긂주림과 추위로 군인들이 죽어나간 ㅠㅠ 군민방위군 사건. 전쟁 중 지휘관의 무능이나 부패는 최악인거 같아요. 양파. 뭐라고 불러도 되고 어디에도 있는 종교. 그런 부분들이 기억에 남아요 *^^*

레삭매냐 2021-08-17 09:25   좋아요 3 | URL
군이 정신력으로 싸운다는
말은 구 일본군의 적폐 중의
적폐였는데... 아직도 그 타령
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Deus 토마토 양파... 저자가
프랑스 유학을 하면서 겪은
체험들이 <침묵의 강>에 등장
하는 오쓰 속에 들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파랑 2021-08-17 08: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이분 책은 안읽어봤는데 레삭매냐님이 사냥하신다니 빨리 읽어봐야겠군요. 이 책 표지가 맘에 들던데 ㅎㅎ

레삭매냐 2021-08-17 09:26   좋아요 4 | URL
아직 읽어 보시지 않으셨다면 먼저
<침묵>부터 시작하심을 추천해 드
립니다.

그 다음에 <깊은 강>으로 고고씽
하시구요 :> 아 <바다와 독약>
도 있군요.

coolcat329 2021-08-17 1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책이죠~~

레삭매냐 2021-08-18 07:44   좋아요 0 | URL
존재조차 미처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엔도 슈사쿠 작가의
책들을 섭렵하면서 만나게
되었네요. 참 좋은 책이었습니다.

책읽기.com글쓰기 2022-06-04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읽어보려구요~~!!
 
포옹가족 대산세계문학총서 158
고지마 노부오 지음, 김상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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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에 갔다. 엔도 슈사쿠의 <바보>가 타겟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다르 헤몬의 <나의 삶이라는 책>. 그리고 덤으로 대산총서 시리즈 중의 하나인 고지마 노부오의 <포옹가족>을 데려왔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 먼저 읽은 책은 <포옹가족>이었다. 분량이 적어서 읽기에 부담이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내 예상은 적중했고 심지어 재밌기까지 했다.

 

막장 드라마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에도 그리고 일본에도 있는 모양이다. 미와 가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포옹가족>은 바로 그런 막장에 방점을 찍는다. 45세의 지식인으로 번역 일을 하는 미와 슌스케 씨의 마누라가 바람이 나 버렸다. 그것도 젊은 미군 청년과 함께.

 

그 사실을 미와 집안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부 미치요 씨가 넌지시 가장에게 불어 버린 것이다. 대판 싸우고 바로 갈라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도키코와 슌스케는 어찌어찌해서 외부인의 도래로 시작된 내분(?)을 봉합하고 다시 일상을 이어간다. 그것은 마치 일본 역사에서 흑선 내항으로 갈기갈기 찢긴 국내 상황을 대충 봉합하고 곧 대대적인 국가 개조에 나선 모양이라고나 할까. 그 때도 지금도, 충격 요인은 외부에서 왔다.

 

아무리 좋게 봐도 슌스케는 공처가인 모양이다. 그저 바람난 아내가 하자는 대로 집도 짓고, 분위기 쇄신을 위해 그야말로 캘리포니아 별장 스타일의 집을 지어 외곽으로 나간다. 순서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도키코가 바람이 나고 새로운 집을 지어 이사를 나갔는지 어쨌는지. 슌스케는 두 아이들은 료이치와 노리코를 위해 단란한 가정을 다시 세울 결심을 했다고 하는데, 자신 역시 외간 여자와 바람을 피운가. 비록 길게 가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집안 꼴 잘 굴러 가는구나 그래.

 

이번에는 분위기 쇄신을 위해 내보낸 미치요 후임으로 들어온 마사코와 아들 료이치가 정분이 나고 만다. 그리고 슌스케의 아내 도키코는 유방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게 된다. 아니 미와 집안에는 뭔 놈의 일들이 이렇게 많이 벌어지는 거지? 우리네 일상사가 그렇긴 하지만, 미와네 집에는 행()보다는 불행이 더 많이 발생하지 않나 싶다. 그나마 막내딸 노리코가 그나마 가장 정상적으로 보인다.

 

문제의 발단이었던 도키코는 결국 암이 폐에까지 전이되고, 병원에서 세상을 뜨고 만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말에 슌스케는 아이들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결국 사랑하는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일상이 시작된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을 살아야 한다는 엄중한 일상의 명령 말이다.

 

홀아비가 된 슌스케는 아내의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이,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아내의 간호를 맡았던 니시무라 간호사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백화점 속옷 매장의 직원에게도 만나자는 의중을 드러낸다. 그것 참... 그리고 아내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달래기 위해 야마기시라는 동료를 집안에 들이고 예전의 내정 총사령관이었던 미치요 씨에게 다시 가정부 취업을 의뢰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방식을 써도 아내와 어머니의 부재는 채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재혼 선언을 하고 여러 채널을 동원해서 맞선자리에 나간다. 거의 재혼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그만 진저리가 날 뿐이다.

 

1960년대 일본의 모습을 그렸다는 <포옹가족>에서 패전 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선 일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제대로 된 과거청산은 처음부터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민들의 생존과 안위에 앞서 국체보전이라는 이유로 국왕제를 계속해서 유지해 달라는 일본 군부의 요청을 미군이 받아들이면서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한 게 아닐까.

 

태평양전쟁 중에는 미영귀축이라는 표현으로 미국과 영국을 적으로 규정하던 나라가 패전 뒤에는 점령군으로 받들어 모시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멀쩡한 집안의 내를 취한 미군 청년 조지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다시 한 번, 일본식 동도서기론의 공허함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도대체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가치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처음 만나는 고지마 노부오 작가는 노골적인 시대에 대한 비판 대신, 블랙 유머를 적당하게 섞은 감칠맛 나는 칵테일 같은 서사로 패전을 딛고 고도성장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고지마 노부오는 태평양 전쟁 당시, 베이징 연경대학의 정보부대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당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메리칸 스쿨> 같은 작품들도 번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래도 한 권으로는 아쉬우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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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8-15 11: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이 막장가족의 모습은 패전 후 일본의 복잡했던 상황을 은유로 표현한 것일까요? 🤔

레삭매냐 2021-08-15 12:33   좋아요 4 | URL
문학에 대한 해석이 너무나
다양한지라...

저의 해석은 아마도 그런 전후
의 혼란상과 대미종속적인 태
도를 그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붕붕툐툐 2021-08-15 15: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중고 서점에서 사냥 성공하셨네용~👍
막장 드라마의 재미가 쏠쏠할 거 같네용~ 근데 재미있는 걸 기대 안하고 책을 사셨나용? 심지어 재밌었다고 해서 웃겼어요~ㅎㅎ

그레이스 2021-08-15 15:38   좋아요 4 | URL
전 지금 팔고 왔는데...ㅋㅋ

레삭매냐 2021-08-15 17:15   좋아요 1 | URL
기대를 안하고 샀다면
고진말이겠죠 ㅋㅋㅋ

근데 생각보다 더 재밌더라구요.

레삭매냐 2021-08-15 17:15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전 당분간은 소장각으로 -

그레이스 2021-08-15 19:51   좋아요 1 | URL
아! 레샥메냐님 이 책을 팔았다는게 아니라 그동안 2권 소장하고 있던 책들 모아서 팔았어요. 어디 가는길에 들러서...
붕붕툐툐님 오늘도 중고 서점에서 사냥 성공... 에 대한 댓글;;

서니데이 2021-08-15 2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코지마 노부오는 처음 듣는 작가예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니, 그 시기 일본 경제가 발전하던 시대의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1-08-16 19:40   좋아요 0 | URL
어느새 주말의 끝자락이네요.

지나고 나면 시간이 어찌 그리
빨리 가 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무라이
엔도 슈사쿠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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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죽어라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러 군웅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가히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버금갈 만한 인물들이 줄지어 등장했고, 군웅할거의 시대는 흥미진진했다. 그중에서도 오슈(현재 센다이현)의 패자로 30년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도쿠가와 대신 일본의 패자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도쿠간류 다테 마사무네를 알게 됐다. 이 야심가는 게이초 연간에 대형 선박을 건조해서 동아시아를 장악한 스페인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대양 건너 멕시코와 직접 거래를 트겠다는 원대한 꿈의 소유자였다.

 

내가 만난 역사의 한 끄트머리를 소재로 삼아, 엔도 슈사쿠 작가는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엮어 <사무라이>라는 팩션을 창조해냈다. 1613년 가을, 센다이 번의 하급 사무라이였던 하세쿠라 로쿠에몬은 영주의 명을 받아 다른 세 명의 메시다시슈들과 함께 태평양 너머 멕시코와 해외무역을 요청하는 서한을 들고 대원정에 나선다.

 

대전란의 시기에 줄을 잘못 섰던 하세쿠라 집안은 기존의 영지였던 구로카와를 빼앗기고, 척박한 야곡지를 봉토로 받아 거의 농민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전장을 누빈 역장의 노장이었던 그의 숙부는 다시 공을 세워 구로카와를 되찾을 생각에 여념이 없다. 숙부 같은 속세에 대한 미련이 없었던 하세쿠라 로쿠에몬은 그저 아내 리쿠와 두 명의 아이들과 기근이 상례적으로 발생하는 골짜기에서 조용하게 살다가 죽기를 소망한다. 그들을 두렵게 만드는 건 전쟁이 아니라 혹심한 기근이었다. 순종과 인고 그리고 체념의 상징인 하세쿠라에게 왜 이시다 영주는 그런 중요한 임무를 내린 걸까?

 

하세쿠라가 더블 캐스팅의 한 축이라면, 역시 실존 인물이었던 루이스 소텔로를 모델로 삼은 스페인 출신의 벨라스코 신부가 다른 축을 맡고 있다. 간파쿠 히데요시의 기리스탄 탄압이 시작되면서 비교적 용이했던 남만 출신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게다가 신교도 국가들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포교보다 무역에 방점을 두면서 가톨릭 선교사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도 이런 부분들이 소개된 바 있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벨라스코 신부는 우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야고보를 떠올리게 한다. 격정에 넘치는 자기 확신에 찬 이 신부는 장차 일본의 주교가 되어 교활한 일본인들을 반드시 개종시키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종교 전사였다. 그의 스승과 동료들 그리고 가족들은 그런 그를 우려했지만, 벨라스코 신부의 불타는 신념 앞에 그런 걱정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직접 만나기도 했던 벨라스코 신부는 센다이 번의 번주 다테 마사무네와 능숙한 일본어 실력을 이용해서 멕시코와의 거래를 성사시킨다면 자신의 영내에서 포교 활동을 눈감아 주겠다는 언질을 받는다.

 

일본 포교에서 숱한 실책을 범한 베드로회에 경쟁 관계에 있던 바울회 소속의 벨라스코 신부의 광신이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대원정에 나선 사무라이 사절단을 속이는 건 기본이고, 온갖 회유와 술책을 구사한다. 그 모든 것이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라는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그런 광신은 위험한데, 21세기에도 그런 광신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걸 보면 예나지금이나 다를 게 무얼까 싶기도 하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왜 다테 마사무네는 자신의 중신이 아닌 하급 사무라이들인 메시다시슈를 기용한 걸까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영지를 잃고 척박한 땅에서 궁핍한 삶을 사는 이들이었다. 대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어 평정소나 영주에게 달리 하소연할 수가 없었다. 그런 참에 대양을 건너 멕시코까지 가는 소임을 완수하고 난다면 어쩌면영지 교환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영주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사무라이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를 그런 위험한 여정에 몸을 내맡긴다.

 

어쨌든 하세쿠라는 어려서 자신의 곁을 지킨 하인 요조와 다른 세 명의 시종들과 함께 정든 골짜기를 떠나 대원정에 나선다. 멕시코로 가는 배 위에서 네 명의 사절단원 중의 하나로 영악했던 마쓰키 주사쿠는 그들이 영주의 버리는 돌이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처지를 냉정하게 분석한다. 영주로서는 그들이 이 위험한 임무를 성공해도 그만, 실패해도 그만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하세쿠라는 보통 소설에서 사무라이라는 특별한 호칭으로 언급되는데, 다른 동료인 다나카나 니시와 구분되는 느낌이다. 다나카는 보수적인 사무라이를 대표하고, 보다 젊은 니시는 스페인 말부터 시작해서 모든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들이는데 있어 적극적이다.

 

두 번의 폭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멕시코의 아카풀코에 상륙한 사무라이 사절단은 멕시코시티로 가서 아쿠냐 총독을 만나 영주의 서한을 전달하지만 총독은 자신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며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3세에게 떠넘긴다. 한편, 그들과 함께 대원정에 나섰던 38명의 상인들은 현세의 이로움을 위해 기리스탄으로 세례를 받는다. 아카풀코, 멕시코시티, 푸에블라, 코르도바를 거쳐 베라크루스에 도달하는 그들이의 여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다. 멕시코시티에서 사절단의 소임이 이미 실패했다는 걸 파악한 마쓰키 주사쿠는 다른 상인들과 함께 본국행을 결정한다. 그 중에서 가장 현명했던 판단이 아닐까 싶다.

 

벨라스코 신부는 그야말로 땅끝까지 가서 스페인의 국왕과 교황을 만나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결기를 보인 진짜 사무라이 다나카의 버프를 받아 결국 스페인의 세비야, 톨레도, 마드리드를 거쳐 프랑스와 로마에 도달하는 어마어마한 여정에 나선다.

 

소설의 한 축에는 격변하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면, 또 다른 한 편에는 엔도 슈사쿠의 장끼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인 측면이 자리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엔도 슈사쿠는 현세의 왕과 내세의 왕을 만나는 힘겨운 여정에 방점을 찍는다. 역설적으로 현세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펠리페 3세나 로마의 바오로 5세는 사무라이 사절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무라이들이 그토록 원하는 자신이 봉토 반환이라는 숙원에 1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주교회의의 논쟁은 일본에서의 포교 활동에 대한 최종심이 아닐 까 싶다. 벨라스코 신부보다 앞서 일본에 파견되어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베드로회 소속의 발렌테 신부는 격정에 휩싸여 천지분간하지 못하고 자신을 주교로 세워 주기만 한다면 일본에서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겠다고 나선 벨라스코 신부를 어린아이에게 훈계하듯 달랜다. 그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은 3명의 사절단 사무라이들까지 표면적으로나마 개종시킨 업적을 바탕으로 주교회의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려던 순간, 동방에서 날아온 긴급 서한 한 통은 모든 것을 무위로 돌려 버렸다. 도쿠가와 막부가 그동안의 유화적인 제스처를 포기하고 본격적인 기리스탄 박해에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게 만사휴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무라이 사절단의 로마행과 교황 알현은 영광이 아니라 슬픈 귀환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자 간절한 호소일 뿐이었다. 그리고 슬픈 귀국에 이은 조국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배신의 드라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목숨을 무릅쓰고 나섰던 위험한 임무에 대한 포상이나 격려 따위는 출발 때와는 180도 바뀐 정치적 상황으로 기대할 여지조차 없었다. 마쓰키 주사쿠의 예언대로, 사무라이들은 버리는 돌일 뿐이었다. 본대보다 일찍 귀국한 마쓰키 주사쿠는 시류에 잘 편승해서 평정소의 감찰로 활동하고 있었다. 우직하게 소임을 다한 사무라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비참한 결말이었고, 그때그때 급변하는 시류를 잘 이용한 이들은 호의호식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엔도 슈사카는 소설 <사무라이>에서 다시 한 번 잘 보여준다.

 

소설의 한 축을 차지하는 종교 이야기를 하자면 또 한참 걸릴 것 같다. 하세쿠라 로쿠에몬은 벨라스코 신부가 태평양을 건너는 배 안에서부터 내내 들려준 예수 그리스도의 생에와 그의 가르침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또한 지극히 현세중심적인 일본인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에 건너가서는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 비록 기리스탄에 귀의하긴 했지만, 그의 본심을 그게 아니었다. 벨라스코 신부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신의 아들과 관계하게 된다면 신에게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는 신념 아래 자신이 믿는 바를 그대로 밀어 붙인다. 유럽의 모든 도시와 수도원 성당에서 만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왕과의 대면은 그를 회의하게 만든다.

 

귀국 후, 쇄국정책으로 돌아선 막부의 관리들에게 심문을 받던 중 경솔한 니시의 발언으로 그들의 운명은 비극으로 결정됐다. 마닐라나 멕시코의 수도원에 거주하면서 설교할 수 있었던 안락한 삶 대신 막부의 박해에 시달리던 일본의 기리스탄들을 위해 밀항했던 벨라스코 신부는 결국 막부의 관헌에 체포되어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

 

저자는 인간사의 덧없음을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를 위해 맹렬하게 돌진했지만, 나의 마음을 풀어줄 보상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버리는 돌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런 순간에 인간은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어떤 종류의 보상을 바라고 우리가 한 행동들이 결국 헛되고 헛되다는 말일 지도 모르겠다.

 

신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제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오류와 실책들을 동료 사제에게 고백한다. <침묵>의 로드리고가 바로 떠올랐다. 우리가 신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는 게 아닌가.

 

엔도 슈사쿠 작가는 실제 역사와 상이하게 소설의 결말을 냈다. 나는 책을 받자마다 단 이틀 만에 다 읽어 버렸다. 졸음이 와서 눈꺼풀이 무시로 내려앉는 가운데서도 도저히 끝까지 읽지 않고서는 잠이 들 것 같지 않아서. 2021년에 만난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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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8-14 10:2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와 최근에 나온 책을 벌써 읽으셨군요. 정치와 종교가 버무려진 이야기군요. 저는 제목만 봤을 때 종교이야기는 아닌줄 알았어요.

레삭매냐 2021-08-14 10:39   좋아요 8 | URL
예약도서로 주문했는데
받는데 3일인가 걸렸습니다.

기다리다가 사리 나오는 줄.

너무 재밌었습니다, 영주에게
농락당한 하세쿠라는 정말...

엔도 슈사쿠 작가의 작품에는
거의 종교가 녹아 있는 것 같
습니다.

새파랑 2021-08-14 10:51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직접 별 다섯개를 그리실 정도라니~!!

레삭매냐 2021-08-14 12:08   좋아요 5 | URL
기대한 작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너무 재밌게 읽었답니다.

잠자냥 2021-08-14 11:1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걸 벌써! 전 장바구니에 담아두기만 했는데요!

레삭매냐 2021-08-14 12:09   좋아요 5 | URL
지난주에 신간으로 보고
주초에 주문장을 날렸는데
빨랑 배송이 되지 않아 아
주 기냥.

페넬로페 2021-08-14 14: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엔도 슈사쿠인데 신간이 나왔네요^^
벌써 읽고 리뷰 올리시는 레삭매냐님은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매번 책사진도 무척 아름다워요.
전 사진이 항상 크게 들어가는데 레삭매냐님의 사진은 크기가 적당하네요^^

레삭매냐 2021-08-14 18:20   좋아요 2 | URL
좋아하는 작가에 주제 그리고
시대상 같이 두루 갖춘 팩션
이니 어찌 아니 읽을 수가...

별 건 아니지만 후닥닥 찍고
약간의 뽀샵 처리를 했습니다.

그레이스 2021-08-14 14: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침묵>만 2번 읽었는데
이 책, <침묵>의 후속편이라고 봐도 좋을듯 하네요.
이 작가는 뮤진트리, 포이에마, 홍성사, 카톨릭출판사....
책마다 출판사가 다 다르네요.
그 이유가 흥미로울듯^^

레삭매냐 2021-08-14 18:21   좋아요 2 | URL
좋아하는 작가에 주제 그리고
시대상 같이 두루 갖춘 팩션
이니 어찌 아니 읽을 수가...

별 건 아니지만 후닥닥 찍고
약간의 뽀샵 처리를 했습니다.

stella.K 2021-08-14 14: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졸음을 참아가면서 읽으셨다니.
문득 학창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전 그때 외엔 졸음을 참아가며
뭘 했던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요
저는 책을 좋아하지만 잠 보다 더 좋아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매냐님이 부럽기도하고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ㅋ
그럴실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침묵>이 생각나기도 하고.
올해 읽은 최고의 책 반열이 놓으셨으니 저도 기억했다 읽어보도록 하겠슴다.^^

레삭매냐 2021-08-14 18:26   좋아요 4 | URL
저는 학창 시절엔 그냥
졸리면 잤던 것 같습니다.
잠을 이길 수가 없었거든요...

<사무라이>는 <침묵>의
연장선에 서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바보>도 구해 두었고, 오늘
도서관에 가서 <깊은 강>도
빌렸습니다. 읽을 수록 진국
이라는 생각이 드는 슈사쿠
선생입니다.

붕붕툐툐 2021-08-14 2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샤큐는 제가 읽은 몇 안되는 일본 작가인데, 이 책도 넘나 흥미롭네용! 소개 감사드려용^^

레삭매냐 2021-08-15 00:38   좋아요 2 | URL
<침묵>으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한 이래, 꾸준하게 읽고
있습니다.

mini74 2021-08-14 23: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깊은 강 무지 감명깊게 읽었어요. 이 책 읽고싶은데 침묵의 연장선에 있는 책이라고 하시니, 그럼 침묵 먼저 읽고 사무라이를 읽는게 더 나은가요. *^^*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에삭매냐님 ~~

레삭매냐 2021-08-15 00:40   좋아요 2 | URL
어제 도서관에서 <깊은 강> 빌려
왔는데 분량이 제법 되더라구요.

지금 읽고 있는 고지마 노부오의
<포옹가족>을 다 읽고 나면 도전
해 볼 생각입니다.

<침묵> 그리고 <사무라이>를
추천해 드립니다.

위드업 2022-01-06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나오기를 두 손 모아 기도 했고, 출간되어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소설입니다.
 
아옌데의 시간
카를로스 레예스.로드리고 엘게타 지음, 정승희 옮김 / 아모르문디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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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때마다 먹먹해지는 이름이 하나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적인 방식의 선거로 집권에 성공한 칠레의 대통령. 197094, 보수 우파 후보 알레산드리 호르헤를 꺾고 칠레 최고지도자에 당선되는 순간부터 반대파들로부터 살인협박과 테러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칠레 민중들을 위한 정치역정에 나선 아옌데는 결국 집권 천일 만에 미국 CIA의 사주를 받은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고 역사가 되었다. 그의 존재를 알게 된 다음부터 꾸준하게 그를 다룬 책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 가을 이 그래픽 노블이 나오고 나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하지만 바로 거부당했다. 이유는 이 책이 만화라는 점에서였다. 여전히 책이 담고 있는 컨텐츠가 아닌 외형만으로 그 책의 가치를 판단하는 방식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후, 중고로 나오길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길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검색해 보니 비치가 되어 있다는 게 아닌가! 그것도 내가 신청했던 도서관에 말이다. 살짝 울분이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 정도야 이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한켠으로 묻어 버렸다.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린 다음에 네고왕 딜로 산 배라 쿼터 아이스크림을 전리품처럼 사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귀환했다. 아니 그런데 책의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웬 놈의 글밥이 이렇게 많은 건가 그래. 눈이 다 침침할 정도다. 원래 바로 다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옌데의 대통령 당선은 많은 이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1970, 세계 경찰국가를 자임하던 미국은 사방에서 도전을 마주했다. 1959년 이미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고, 베트남에서는 끝도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아메리카 남녘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고? 닉슨 행정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트랙 1 작전을 구사했다.

 

그동안 숱하게 선거에서 우파 연합에게 패배했던 칠레 좌파들은 인민연합(UP, 우페) 깃발 아래 6개 정파가 연합해서 대선을 준비했다. 1952, 1958년 그리고 1964년 세 번의 대선에서 패배한 살바도르 아옌데가 네 번째 도선에 나섰다. 그리고 아주 근사한 차이(39,000)로 아옌데 박사가 당선됐다. 의회 인준이라는 복잡한 절차까지 거친 끝에 칠레의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아옌데는 그동안 부르주아 계급과 다국적기업으로 대표되는 세력에 의해 착취와 침탈에 시달려 온 칠레 민중들을 위한 정치혁명에 나선다.

 

대농장을 몰수해서 토지개혁에 나서고, 많은 사기업들을 국유화하는 조치에 나섰다. 그리고 칠레의 기간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구리광산의 국유화를 선포했다. 당연히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보수 우파가 지배하고 있던 언론들은 일치단결해서 사회주의자 아옌데에게 공산주의 혁명의 전도사라는 가짜 뉴스와 선동을 동원한 프레임을 씌운다. , <아옌데의 시간>의 화자는 미국 출신 저널리스트 존 니치 특파원으로 1970년 대선부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1973년까지의 시간들을 다루고 있다.

 

그동안 자신들을 위한 정부를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칠레 민중들은 아옌데 정권의 이러한 조치들을 대환영했다. 하지만, 야당 세력과 기득권층들을 똘똘 뭉쳐 사사건건 아옌데 정권의 개혁 조치에 저항했다. 그들은 준군사조직을 동원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부유층 마나님들은 냄비시위를 조직해서 정부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시작했다. 아옌데 정권이 시도하는 개혁 조치들의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기도 전에 우파의 사주를 받은 트럭운전사들의 파업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금수조치로 칠레 경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좌파는 좌파대로 좀 더 개혁적인 조치를 실시하지 못하는 인민연합 정부에 반감을 품었다. 개인적으로 아옌데는 좀 더 장기적인 차원에서 긴 시각으로 개혁을 준비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속도조절이 필요했지만, 그러기에는 아옌데와 그의 동지들에게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게다가 미국과 CIA 그리고 ITT는 트랙 2 프로젝트, 그러니까 아옌데 정권을 뒤집어 엎기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비롯한 전국에서 좌우간의 폭력투쟁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 군부에서도 끊임없이 쿠데타를 시도했다. 고육책으로 카를로스 프라츠 최고사령관을 비롯한 일단의 군 지휘관들을 내각에 영입하는 방식으로 아옌데는 위기를 돌파해 나갔다. 하지만 그래픽 노블에 등장하는 음모가들의 예언대로, 그 중에 하나는 성공할 거라는 말처럼 1973911일 사임한 프라츠 사령관에 이어 육군 최고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피노체트가 주도한 쿠데타로 아옌데와 동지들이 투쟁한 영욕의 시간들은 과거가 되었다.

 




아옌데의 죽음을 놓고 그동안 자살이나 타살이냐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아옌데의 시간>에서는 자결로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 무엇도 사회의 진보를 막을 수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가 역사 그 자체가 된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스. 그의 영광에서 종언에 이르는 연대기에 다시 한 번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생전에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마리아 칼라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옌데 박사의 묘소를 찾아 헌화하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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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8-12 20: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수서, 넘 기계적으로 하지말고 책 내용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네요.

그레이스 2021-08-12 20:22   좋아요 4 | URL
저 방금 저희 동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했습니다

레삭매냐 2021-08-12 21:42   좋아요 4 | URL
그나마 수급이 된 것으로
위안을 삼고 싶습니다.

어쨌든 책은 만났으니까요 ^^

coolcat329 2021-08-12 20:1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그래픽 노블을 단순 만화라고 거절하고 알아서 비치해놓다니 웃기네요 ㅋ
그래픽 노블이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하더라구요.
도서관에서 저도 빌려봐야 겠습니다. 생소한 나라의 역사는 이런 그래픽을 곁들여 보면 좋을거같아요.

Falstaff 2021-08-12 20:22   좋아요 6 | URL
ㅋㅋㅋㅋ 이사벨 아옌데의 책 <영혼의 집>으로 읽으세요. 무지 재미나요.

coolcat329 2021-08-12 20:23   좋아요 6 | URL
오 영혼의 집! 그러고 보니 이사벨 아옌데가 조카죠? 알겠습니다 ~책은 있습니다!

레삭매냐 2021-08-12 21:43   좋아요 4 | URL
[폴스태프님] 저도 책은 저업때애~ 수급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읽다가... 헷

레삭매냐 2021-08-12 21:44   좋아요 3 | URL
그러게요 이건 뭐 어지간한 경장
편 수준의 글밥이더라구요...

그런데 만화라고 안된다고 하다닛!

NamGiKim 2021-08-12 20: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입니다.^^

레삭매냐 2021-08-12 21:44   좋아요 3 | URL
공감하는 바입니다.

미미 2021-08-12 20: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리보기 해보니 꽤 사실적으로 그려냈네요~♡ 마치 다큐같은 느낌도 들고요! 역사 만화들 보면 도서관에서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저희 도서관에도 있길 부디~!!
(희망도서 매번 퇴짜 맞은 미미ㅠ)

레삭매냐 2021-08-12 21:45   좋아요 3 | URL
설렁설렁 그린 게 아니라
아마 당시 사진이나 영상 자료들
을 참조한 게 역력해 보입니다.

도서관에서 왠지 뻰찌를 먹으면
좀 그렇더라구요...

NamGiKim 2021-08-12 20:5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눈물흘리며 읽은 책입니다. 특히 아옌데의 마지막 순간은 ㅠㅡㅠ

레삭매냐 2021-08-12 21:47   좋아요 4 | URL
아옌데의 최후는 정말 장렬
했습니다.

무조건 항복해서 망명을
떠나라는 군부의 요구조건
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맞
서는 장면에서는 울컥!했
습니다 참말로.

내 조국과 동지들을 두고
어디를 가란 말인가.

NamGiKim 2021-08-12 21:48   좋아요 3 | URL
저도 울컥했었습니다. 특히나 아옌데가 국민들을 향해했던 그 마지막 연설은 정말 심금을 울리죠. 당시 아옌데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는군요.

2021-08-12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12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8-13 0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혼의 집」 읽고 어설프게 알던 아옌데를 더 알고 싶어졌는데,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용~ 꼭 읽어야징~~

레삭매냐 2021-08-13 06:26   좋아요 0 | URL
저는 역으로 이제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시간>을 만나야겠습니다.

독서괭 2021-08-13 0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닛 거절해놓고 들여놓은 건 뭐죠?=_=
읽고싶은 책이네요! 사진 보니 그림체도 멋진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1-08-13 06:26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유럽 스타일의 그림체
더라구요.

줬다 뺏기인가요? 아니 반대인가 -
애증의 도서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