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왕자 - 오르페우스호의 비밀 안개 3부작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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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를 읽기 시작했다. 세상에 허명은 없더라. 역시 재밌었다. 결국 이 작가의 모든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책부터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와 사폰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거지. 그런데, 2년 전에 작가는 대장암으로 이미 작고하셨다네. 55, 한창 작가로서 책을 써주셔야 할 나이에, 안타깝다.

 

지난 토요일 영하의 날씨도 무릅쓰고 그의 책 사냥에 나섰다. 그리고 네 권의 책들을 업어왔다. 그 중에는 사폰의 소설 데뷔작인 <안개의 왕자>가 있었다. <바람의 그림자>도 다 읽지 않았는데... 그런데 데뷔작이라고 하니 자꾸만 손길이 간다. 결국 <바람의 그림자> 첫 번째 권을 절반 정도 읽다 말고 새책으로 점프했다. 그리고 어제 오늘해서 다 읽었다. 마지막 부분은 오늘 출근길 버스에서 허겁지겁 읽었다.

 

서두에서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안개의 왕자>는 청소년용 판타지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책이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나는 생각한다. 그런 기준에서 <안개의 왕자>는 새내기 작가치고는 정말 완성도가 높은 책이다. 작가는 나중에 대가의 반열에 오른 다음, 첫 책의 이곳저곳을 다시 쓰거나 고치고 싶었지만, 그대로 두었다는 말을 남긴다. 있는 것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라고나 할까. 뭐 그렇다고.

 

소설 <안개의 왕자>의 주인공은 13세 소년 막스 카버다. 시계공이었던 아버지가 어느 날 바닷가 마을로 이사선언을 하면서 막스의 모험이 시작된다. 사폰은 카버 가족이 살게 된 집의 이전 내력부터 시작해서 촘촘한 구성으로 222쪽을 가득 메운다. 일단 <안개의 왕자>는 가독성이 뛰어나다. 십대 소년의 눈을 통해 새로 이사 간 집 근처의 조각공원에 대한 미스터리부터 시작해서 등대지기 할아버지(72)인 빅터 크레이가 양손자 롤랑에 대해 알려주지 않은 비밀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다양한 내러티브가 끝없이 등장해서 독자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막스는 동네 형인 롤랑을 만나 우정을 쌓게 되고, 자신의 누이인 알리시아는 심지어 그렇게 만난지 얼마 되지 않는 롤랑과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삼총사가 된 십대 청년들은 25년 전 인근 바다에 침몰한 오르페우스호 그리고 미지의 주술사 미스터 케인과 맞서게 된다. 그리고 보니 침몰한 배의 이름이 오르페우스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수금의 명수로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구해내온 이가 바로 오르페우스가 아니었던가.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은 그렇게 제각각 작가가 부여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카버네 가족이 바닷가 집으로 이사한 이래 기괴한 일들이 잇달아 발생한다. 우선 막내동생 이리나가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막스 삼총사는 침몰한 오르페우스호 부근에서 잠수놀이를 하다가 바다괴물처럼 등장한 미스터 케인의 마수에 빠져 익사의 위기를 겪기도 한다. 물론 이런 사건들은 엔딩에 준비된 그야말로 화려한 대주술사와의 대결에 비하면 워밍업 정도라고나 할까.

 

모든 사건의 비밀은 롤랑의 할아버지 빅터 크레이가 알고 있었다. 미스터 크레이는 한 때 잘 나가던 영국 출신 엔지니어였지만, 운명이 인도한 미스터 케인과의 만남으로 인생이 지독하게 꼬여 버렸다. 첫 번째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미스터 케인의 음모를 막기 위해 승선했던 오르페우스호가 침몰한 뒤, 유일한 생존자로 마을의 등대를 세우고 현재 조용하게 살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늙은 영웅처럼 주술사 케인과의 대결에서 무언가 보여줄 거라는 기대는 아쉽게 무산되었다.

 

현대판 파우스트라고 할 수 있는 미스터 케인은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소원을 비는 이들에게 터무니없는 그런 요구를 한다. 현재의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소원 성취는 결국 소원을 말한 사람을 파멸로 인도한다. 그걸 눈으로 직접 목격한 빅터 크레이는 미스터 케인과의 거래를 한사코 피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운명 아니 숙명은 그를 옥죄어온다.

 

엔딩에 등장하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대주술사와의 대결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곧바로 최근 전세계의 모든 이야기들을 사들이고 있다는 넷플릭스 생각이 났다. 넷플릭스의 자본이라면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판타지 안개 3부작도 능히 영상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능력은 부족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라는 삼박자로 무장하고 거대한 악에 맞서는 막스-롤랑-알리시아 삼총사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 넷플릭스, 빨리 영화를 만들어 줘요.

 

나는 그렇게 <안개의 왕자>를 다 읽고, 다시 <바람의 그림자> 읽기로 복귀했다. 세간의 평들을 보니 사폰의 대표작인 <바람의 그림자>의 아우라가 그의 다른 작품들을 모조리 잡아먹는 그런 형세다. <바람의 그림자>가 그렇게 대단한 작품인지 결국 다 읽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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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2-07 1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루이스 사폰 책이 꽤 있군요. 청소년 소설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주말에 책을 읽다 갑자기 나가서 책사냥을 하시다니 대단하세요 ㅎㅎ

레삭매냐 2022-02-07 10:45   좋아요 3 | URL
제가 생각해도 그러합니다 -
옆지기가 이렇게 추운 데
나가냐고 하더라구요 헷
재밌는 책이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추위에 대한 보상이네요.

안개 3부작은 아마 청소년들을
위해 쓴 책이 아닐까나 싶네요.

페넬로페 2022-02-07 14: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아니지만 춥고 바람 부는 날에도 배드민턴 치러 나갔던 남편이 생각납니다~~
루이스 사폰 책을 사고 싶은 생각이 가득 하지만 올해는 집에 있는 책을 읽기로 결심했기에 도서관을 이용해서 차곡차곡 읽어 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2-07 14:51   좋아요 2 | URL
저도 집에 읽지 않은 책이
한가득이지만, 사폰 작가
의 책은 도저히 유혹을
이길 수가 없더라구요 ^^

옛날 책 파먹기 프로젝트
구동해야할 것 같습니다.
읽고 정리하기 !!!

mini74 2022-02-07 14: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너무 강렬해요. 내일은 추위를 뚫고 ㅎㅎ 루이스 사폰을 찾으러 도서관에 가야겠어요 ~~

레삭매냐 2022-02-07 14:52   좋아요 2 | URL
표지의 인물이 누구인가 했더니
바로 대주술사 미스터 케인이더
라구요.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만들면
정말 무섭지 않을까 싶네요.

라로 2022-02-07 18: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바람의 그림자>는 알라딘 초기 시절 알라디너 분들이 막 재밌다고 해서 저도 읽고 너무 좋았던 기억 말고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저같은 사람 책은 읽어서 뭐하니? 라는 자괴감이 살짝.ㅠㅠ
암튼 데뷔작이 <안개의 왕자>ㅎㅎㅎㅎㅎㅎㅎㅎㅎ 번역가들이 일부러 사폰의 책 제목 번역을 그렇게 하는 걸까요?? <안개의 왕자>, <바람의 그림자>ㅎㅎㅎㅎㅎㅎㅎㅎ 아 넘 웃겨요. 암튼 매냐님의 별 5개는 의미심장합니다요!!

레삭매냐 2022-02-07 19: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아~! 사폰 작가의 책들
너무너무 재밌습니다 -
역시나 저의 책사냥 수고
가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
이 팍팍 드네요 ^^

아 이미 오래 전에 읽으신
책이로군요. 전 새로운 세
상을 이제사 만나서리 -
아주 신납니다.

2월은 사폰 책읽기의 달
이 될 것 같습니다.
 


정말 오래 전에 사서 마르고 닳도록 읽은 그런 책이다.

이젠 구할 수도 없는 그런 책이다. 나에게는 보물 같은 책이다.



당시에 16,000원이었는데 아마 지금으로서는 십만원은 거뜬하지 않을까.



지난 20세기는 정말 전쟁의 시기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그 숱한 혁명과 전쟁 후에 찾아온 평화의 시기가 지금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여전히 전쟁은 지구별의 어딘가에서 치러지고 있지만...



여기서 약사로 접한 전쟁에 대한 디테일은 나중에 다른 책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타임라이프 월드 워 II는 정말. 오래 전에 사둔 게 정말 다행이지 싶다.



193991, 독일의 기갑부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으면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기록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폴란드의 우방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제대로 된 대처를 하기도 전에, 독일군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비롯한 폴란드 전역을 석권해 버렸다. 훗날, 이를 블리츠크리크(전격전)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 전쟁을 상징하는 독일 블리츠크리크을 기록한 사진이라고 한다.


1941년 독일군은 전해 시작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숙적 스탈린의 소비에트를 정복하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은 총통의 독일군은 이번에는 목표를 적도 모스크바가 아닌 남부의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로 정하고 여름공세인 오퍼레이션 블라우를 개시한다.

 

그리고 스탈린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도시 스탈린그라드에서 최정예 6군이 전멸당하는 치욕적인 패배를 기록한다. 볼가강에서 독일 전쟁기계를 격파한 사실을 그린 만화다.



1970년 칠레의 실패한 혁명과 1972년 환경 이슈로 한 세기를 다룬 책은 대미를 마무리한다. 냉전의 시발점이었던 한국전쟁이 빠진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시절을 생각해 본다면...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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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2-02 19: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도 그렇고, 여전히 간직하시는 것도 그렇고, 찬조 출연한 공룡 컵이랑 자빠져있는 레고도 그렇고 넘 맘에 드는 글이에요!!! 하트 뿅뿅

레삭매냐 2022-02-03 08:58   좋아요 2 | URL
라로님은 너얼스가 아니라
직업으로 디텍티브를 하셨어야...

어데 공룡컵과 레고가 있는지
찾아 봤네요 ㅋㅋ

미미 2022-02-02 20: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들 다큐랑 영화로 본 기억이 있는데 아무리 독일 군이라도 너무 비참하고 안타깝더라구요.

저도 이런 책이라면 쭉~ 간직할듯 합니다. ^^*

레삭매냐 2022-02-03 08:59   좋아요 2 | URL
갱지로 책을 만들던 시절에
올컬러 책이었답니다 ^^

이제는 진짜 구할 수도 없는
책이니 계속 소장각이지요.

stella.K 2022-02-02 20: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말 때가 꼬질꼬질한데요?ㅎㅎ
이게 지금은 안 나오는가 봅니다.
마르고 닳도록 읽으셨다니 매냐님껜 어지간히 좋은 책이었나 봅니다.
거듭해서 읽게 되는 책이 있다는 건 좋은 일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2-02-03 09:00   좋아요 4 | URL
아마 출판사가 문을 닫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려서 참 리더스다이제스트
를 꾸준하게 읽었는데 말이죠.

물티슈 닦고 해봐도 때가 지
워지지 않더라구요 헷

새파랑 2022-02-02 21:5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뭔가 책에서 고전의 느낌이 풍기네요 ㅋ 저 스탈린의 카리스마~!! 20세기 역사는 대부분이 전쟁같아요 ㅜㅜ

레삭매냐 2022-02-03 09:02   좋아요 4 | URL
거의 한 챕터 건너 전쟁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돌랍니다.

1972년에서 끝나서 좀
아쉽다고나 할까요...

coolcat329 2022-02-03 10: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이런 손 때묻은 책 정말 좋아요. 당시에 굉장히 비싼 책이었네요. 어릴 때 책 다 버린게 또 후회스럽습니다ㅠ

레삭매냐 2022-02-03 21:33   좋아요 1 | URL
이제는 못 구하는 책들이
있어 저도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ㅠ.ㅠ

mini74 2022-02-03 18: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배가 아파요. 이런 책 넘 좋아하는 ㅠㅠ 아 부러워라 ㅠㅠ 울 엄마는 제가 신혼여행 간 사이 책들을 강냉이로 바꾸신 ㅠㅠㅠㅠ

그레이스 2022-02-03 18:47   좋아요 1 | URL
ㅋㅋ

레삭매냐 2022-02-03 21:35   좋아요 2 | URL
강냉이는 맛있습니다 -

저는 어머니에게 절대 책
막 내다 버리지 말라고 당부
해 두었답니다... 십수년이
지났는데도 못 읽은 책들이
부지기수거든요.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이강훈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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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네거트의 블랙유머는 언제나 진리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서면서 어젯밤에 열심히 읽던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을 가방에 넣으면서, 바로 곁에 있던 커트 보네거트의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도 덤으로 넣었다. 출근길 버스에서 카렐 차페크의 복간된 책을 읽는 대신 나의 선택은 <닥터 키보키언>이었다. 그리고 보니 로맹 가리의 <그로 칼랭>도 후보였다. 두꺼워서 패스.

 

책은 오전 중에 다 읽었다. 책의 쪽수는 모두 105. 2007년에 작고하신 커트 보네거트는 내가 십수년 전 이 업계(?)에 발을 디딜 적에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을 때, 역시 작년엔가 코로나로 작고하신 루이스 세풀베다와 함께 당당하게 말하곤 했었지.

 

사실 이 책은 지난달에도 읽었지 아마.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리뷰를 쓰지 못했다. 역시나 닥터 잭 키보키언을 내세워 임사체험을 빙자해서, 푸른 터널 운운하며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다는 작가의 발상은 참으로 발칙하면서도 동시에 깜직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부류의 이야기들은 아마 커트 보네거트만이 구사할 수 있는 그런 유머가 아닐까 싶다.

 

어떤 이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슈나우저 강아지를 지키기 위해 핏불테리어에게 맞서다가 사나운 녀석에게 물려 심정지로 돌아가셨다지. 자신의 반려견을 위해 장렬하게 죽은 그를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베트남에서 개죽음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라는 말에 다시 한 번 커트 보네거트 유머의 본질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셰익스피어도 보네거트 선생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할 판이다. 한 때 셰익스피어의 그 유명한 희곡인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영감을 얻어 맏는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미국에서 대히트를 친 적이 있다. 아마 그 시절의 인터뷰인 모양으로, 셰익스피어의 성적 취향에 대해 짖궂은 질문을 던지는 커트 보네거트. 셰익스피어는 대가답게 자신의 글을 인용하며 요리조리 피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다 그런 거지, 왜 그렇게 예민한 질문을 던지는 거야 그래. 다 알면서!

 

우리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만큼 유명한 마틴 루터 킹에 대해서는 아마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 암살범 제임스 얼 레이에 대해서는 모를 것이다. 그는 무려 1998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사후세계에서 제임스 얼 레이는 N 워드를 들먹거리며 킹 목사가 그렇게 유명하게 될 줄 알았다면 자신의 낡은 총알을 사용하지 않았을 거라며 후회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킹 목사의 그 유명한 연설이 대리석에 금박 글씨로 후대에 영원히 전해지게 될 줄 알았다면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나.

 

벤저민 프랭클린만큼 유명한 건국의 아버지토머스 제퍼슨의 위선에 대해서도 보네거트 선생은 혹평을 마다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다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하면서도 흑인 노예를 부린 게 토머스 제퍼슨이 아니냐고 묻는 방식이다. 올바른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지식인의 말들이 어떤 가치과 효용성도 가지지 못하는 최근의 모습들을 반영한다고나 할까. , 노예제도가 미국에서 합법적이었던 것처럼 홀로코스트 역시 나치 집권 아래 있던 독일에서 합법적이었다는 냉혹한 사실을 보네거트는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기도 한다. 아이구 친절하시기도 하여라.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은 정말 작정하고 읽으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그런 분량의 책이지만 다 읽고 나서도 생각할 거리들을 그리고 여운을 깊게 남겨 주는 그런 책이다. 하긴 너무 긴 책들은 분량이 너무 많아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스토리들을 모두 파악해 낸다는 게 어쩌면 곤욕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독서가 즐거움이 되어야지, 하나의 숙제나 강박이 되어서는 안될 테니까 말이다. 푸른 터널 저 너머가 먼저 가 계신 커트 보네거트 선생도 우리 독자들이 그러길 바라시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한다. , 커트 보네거트 선생이 생각하는 인도주의의 본질은 훌륭한 시민의식과 보편적 품위라고 한다.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그가 말한 훌륭한 시민의식과 보편적 품위를 지닌 깨시민인가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러기 위해 나 자신을 조금은 갈고 닦아야하지 않나 싶다.


[뱀다리] 그 유명한 메리 W.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마 원전이나 영화를 보지 않은 이라면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이십대 초반의 메리 셸리가 쓴 호러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의 이름은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다. 우리는 괴물의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런데 보네거트는 그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진짜 괴물은 괴물을 창조해내고 자기 가족들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셀프파멸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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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26 12: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5도살장 재미있게 읽었어요. 개죽음 이야기 웃긴데 슬프네요 ㅠㅠ 훌륭한 시민의식과 보편적 품위 ㅠㅠ 저도 갈길이 머네요 ~

레삭매냐 2022-01-26 13:06   좋아요 3 | URL
커트 보네거트의 오래 전 책들도
어서 다시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개죽음 이야기, 참 그렇죠...

미미 2022-01-26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기대하던 책인데 (그런데 잊고 있었던ㅠ) 역시 재밌겠군요!
어제마침 도서관에 갔을때 커트 보네거트의‘고양이 요람‘ 원서가 있길래 눈여겨 보고왔는데 반갑네요^^*

레삭매냐 2022-01-26 15:22   좋아요 2 | URL
이번에 세 번째로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재밌습니다.

<고양이 요람>은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그렇게혜윰 2022-01-26 15: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첫 줄의 진리다를 지린다로 읽은 1인^^;;;;

레삭매냐 2022-01-26 17:25   좋아요 2 | URL
그것도 사실입니다 ㅋㅋㅋ

바람돌이 2022-01-27 02: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은 보관함에 넣어놓고 깜박하고 지나간 책이군요. 커트 보네거트는 언제나 진리입니다. 암요. ^^

레삭매냐 2022-01-27 10:04   좋아요 2 | URL
작년 12월에 이어 이 책을 세 번
이나 읽었네요.

그 때 리뷰를 쓰지 못해서 부랴부랴
썼네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페크pek0501 2022-01-28 14: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네요. 저는 다른 책을 읽었어요. 제목은 독서 노트를 봐야 알겠군요. ㅋ
유머가 있고 능청스럽게 글을 잘 쓰는 작가죠. ^^

mini74 2022-02-10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축하드려요 ~~

레삭매냐 2022-02-10 18:00   좋아요 1 | URL
아니 이렇게 책값을 벌어 주다니...
잘 사서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니님 ~

그레이스 2022-02-10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2-02-10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2-02-10 1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축하드립니다~!! 주식 적립금 생기셨네요 ^^

서니데이 2022-02-10 2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독서괭 2022-02-10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커트 보네거트가 그렇게 재밌나요? 아휴 왜 이리 읽을 책이 많은가요 ㅜㅜ 레삭매냐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러블리땡 2022-02-11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강나루 2022-02-11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 축하해요^^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에리카 산체스 지음, 허진 옮김 / 오렌지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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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이들이 청춘들을 아니 십대들을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에리카 산체스의 자전적 소설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를 읽으면서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삶의 더께가 그네들만의 고민을 모르게 하는 게 아닐까나.

 

언니 올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스물두 살, 죽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시작이 사랑하는 언니이자, 집과 학교 그리고 일터 밖에 모르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딸의 전형이었던 올가의 죽음이라니. 그녀와 달리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훌리아 레예즈는 말썽꾼이다. 아니 죽은 언니의 그림자가 너무 컸던 탓일까.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작가가 되고 싶은 15세 소녀 훌리아는 궁핍한 가정 출신이다. 아마와 아파(엄마와 아빠)는 멕시코 몬네테그로 로스 오호스 출신의 불법체류자들이다. 아마는 청소일을 하고, 아파는 캔디 공장에서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그야말로 몸이 부서지도록 일한다. 미국 시카고의 남쪽(south)의 바퀴벌레가 득시글거리는 아파트 출신의 소녀는 가능하면 집에서 멀리 떠나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꾼다. 훌리아에게는 영어 선생님인 잉맨과 절친 로레나 그리고 게이 후앙가라는 친구들이 있다.

 

육친을 창졸간에 잃은 슬픔을 이겨내는 훌리아. ‘제대로 된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언니 올가같은 모범적인 멕시코 딸이 되길 바라는 독실한 아마와 사사건건 충돌한다. 그러던 중, 훌리아는 올가의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다. 죽은 언니의 노트북에 남겨진 단서를 통해 언니에게 모종의 비밀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다음에는 시카고 북쪽 외곽에 사는 코너라는 멋쟁이 남친을 헌책방에서 만나는 행운도 겹친다. 언니의 속옷과 콘돔을 보고 경악한 훌리아의 아마는 휴대폰을 압수하고, 외출금지를 시킨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자살 소동은 사실 좀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아마는 소동 이후, 정신과 상담을 받던 훌리아를 고향 로스 오호스에 보내 대가족들의 사랑 세례를 듬뿍 받게 해준다. 그리고 그곳에서 훌리아는 아마에 대한 놀라운 비밀도 알게 된다. 언니 올가가 숨긴 비밀보다 더 충격적인 가족의 비밀이라고나 할까.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는 전형적인 이민 가정의 자녀가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티피컬하긴 하지만, 이런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가정형편은 어렵지만 일단 공부는 잘해야 한다. 구질구질한 아파트와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그리고 같은 동네가 아닌, 부모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그런 곳으로 탈출해야 한다. 훌리아는 자신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뉴욕 같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설정해 버린다. 그런데 그게 모든 이민 가정의 자녀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훌리아를 통해 작가 자신의 모습이 비춰진다고나 할까.

 

부모들은 모두 자신들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그것보다 나은 삶을 살길 바란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대입시킨다. 물론 그들의 사유와 판단이 옳을 때도 있겠지만, 자녀들에게는 자녀들만의 온전한 세상이 있는 법이다. 가끔은 그런 삶이 그들에게 과하게 다가올 때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그들이 넘어야할 파도가 아닐까.

 

결국 우리의 주인공 훌리아 레예즈도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행복하게 생각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글쓰기의 길을 걷게 된다. 나중에 후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시절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걸 하는 게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한 기본 전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되돌아 보면,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다만 그 시절에는 기다림의 미학에 대해서는 아는 게 1도 없었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모든 십대들처럼 훌리아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 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세상만사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코너와의 짧은 연애를 통해 배우기도 한다. 그 시절에는 둘도 없을 것 같이 소중했던 로레나와 후앙가 같은 친구들도 삶의 공간이 떨어지면서 예전같이 않다는 걸 아마 깨닫게 되었으리라. 코너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의 감정들이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걸, 훌리아는 깨닫지 않았던가. 바로 그렇게 우리는 거북이 걸음으로 더디게 성장해 가는 거다.

 

소설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는 영화화되었다고 하는데, 영화로도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영화는 얼마나 원작에 가까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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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1-24 20: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언니와 엄마의 비밀이 뭔지 너무 궁금해요^^*
영화는 제가 찾아봤는데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나봅니다.


라로 2022-01-24 21:03   좋아요 5 | URL
미미님이 영화 이미 나왔어요. 작년 2월에.
넷플릭스에서 했다고 하는데 저도 매냐님 리뷰 읽고 찾아보니까 없네요.
HBO에서 한다고 하는데 계정이 없어서 모르겠고요.
암튼 찾아 보셨다고 하셔서 댓글 달았습니다.^^

미미 2022-01-24 21:09   좋아요 3 | URL
오~나왔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라로님^^*

레삭매냐 2022-01-25 08:02   좋아요 3 | URL
책에 영화화되어 있다고 하는데,
저도 도통 찾을 수가 없네요.

너튜브에 짤도 없고... 라로님 능력
자이십니다.

라로 2022-01-24 21: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또 한 권을 뚝딱 읽으셨군요!! 전지적리뷰어시점이 느껴지는 리뷰!!^^
아무래도 청소년 대상 책을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책도 영화도 아직인 저는 매냐님 리뷰로 충분히 만족.
멕시코 사람들의 문화를 옆에서 보면 한국적인 면이 좀 있어요.
완벽한 딸이 되어야 하는 올가가 이해되어요.
비슷한 한국 소설 있지 않았나요?? 기억력이 없어서..ㅠㅠ
매냐님~~~~~~~~~~.
그냥 불러보고 싶었어요.^^

레삭매냐 2022-01-25 08:03   좋아요 3 | URL
자전적 소설이라 그런지 더 절절
하게 다가온 그런 느낌입니다.

메히코 사람들이 우리네랑 쩜
많이 비스무레한 것 같다는 의견
에 1표 던집니다.

사람사는 세상은 어디나 비슷하
지 않나 싶네요 헷

얄라알라 2022-01-24 21: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가정형편은 어렵지만 일단 공부는 잘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뿐이 아니군요!

레삭매냐 2022-01-25 08:04   좋아요 3 | URL
현재의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
나고 싶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 이미
승부는 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자가 계속해서 제대로 된
대학을 가야 한다는 말이 저
는 좀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레이스 2022-01-24 23: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어떤 분이 미국이민사회에서 아들 딸들 착한거로는 부모가 기가 살지 않는다고...
하바드나 스탠퍼드.. 등 좋은대학에 들어가야 남들 앞에서 어깨가 펴진다는 말 들었었어요.
여기보다 더하네 라는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요?

레삭매냐 2022-01-25 08:07   좋아요 3 | URL
이민 가정들의 최우선 목표
중의 하나가 어쩌면 자녀들의
일류대학 진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쿡에서도 예전에 스카이캐슬
버금가는 스캔달이 있지 않았
나요. 돈을 물려줄 수 있지만,
학벌은 그게 안되니 돈으로 학벌
을 사자고 해서 한 때 야단이
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이 소설에서는 아마와 아파가
그러진 않지만요...

mini74 2022-01-25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앞부분 읽다가 뒷부분은 실눈 뜨고 봤어요. 이런 주제 이야기 넘 좋아하는 ㅠㅠ 담아갑니다 매냐님 *^^*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레삭매냐 2022-01-26 10:22   좋아요 2 | URL
단순한 십대 소녀의 성장이
아닌 언니의 죽음이라는 비극
을 매개로 해서 진행하는
미스터리 서사가 인상적이었
습니다.

메히코 몬테네그로 로스
오호스로 보내진 훌리아
의 스토리는 신의 한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샤바케 4 - 더부살이 아이 샤바케 4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김규은 옮김 / 손안의책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하타케나타 메구미의 작가의 요괴물에 흠뻑 빠져 버렸다. 그리고 보니 내가 한 때 미미여사의 에도시리즈들을 모으던 시절이 있었지. 문제는 모으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다는 게 문제다. 집 한 구석의 상자에 고이 모셔 두었던 것 같은데, 이 참에 다시 도전해 봐?

 

에도 도리초의 잘 나가는 상가 나가사키야의 부잣집 도련님 이치타로는 18세 당시로는 어엿한 성인의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골골하다. 그리고 보니 하타케나카 작가는 일부러 이치타로를 강건한 남성이 아닌 여린 캐릭터로 만든 게 아닐까. 그래야 주변에서 보좌하는 사스케와 니키치 그리고 야나리들 같은 요괴들이 돋보일 테니 말이다. 이제 이 시리즈를 즐겨 보는 이들이라면 다 알겠지만, 이치타로는 3천살 정도 먹은 대요괴 오긴의 손자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요괴의 피가 흐른다고 해야할까? 그런데 튼튼한 사스케와는 정말 대비가 된다. 약해야 세상사는 맛이 난다고 했던 닌자 단조가 연상된다.

 


2권과 3권은 아직 수배가 되지 다른 스토리는 잘 모르겠지만, 서사의 출발점이었던 1권과 4권은 사뭇 다르다. 4권은 모두 다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의 <더부살이 아이>는 오래된 집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는 요괴 야나리라는 녀석이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른 이들과 달리 요괴들과 거리낌 없이 대화를 즐기는 이치타로는 야나리들에게 자신에게 끝없이 주어지는 만주 같은 간식들을 제공하면서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그 결과, 고객에게 의뢰받은 달구슬 같은 귀한 진주 11알이 사라졌지만 야나리 녀석의 대활약과 충성도(?)로 되찾는데 성공한다. 물론 도련님 이치타로의 추리가 한몫한 건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

 


<샤바케> 시리즈는 소년 탐정을 방불케하는 예리한 도련님의 추리와 잇달아 공급되는 기이한 미스터리 그리고 요괴라는 3박자가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 작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씨 여린 도련님은 방화를 비롯해서 갖은 사단을 일으키는 고와이라는 요괴에 대해서도, 동정심을 내보인다. 주변의 형님들 격인 사스케와 니키치는 절대 고와이랑 어울려서는 안된다고 해도 오갈 데 없는 외로운 요괴인 고와이를 거두려는 마음씨가 참... 순간, 심지어 요괴조차도 영혼의 구원을 바라고 있구나 싶기도 했다.

 

가게온나를 추적하는 5살 시절, 이치타로가 나오는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우리나라에서 귀신은 왠지 오싹한 느낌이지만 이웃 일본에서 귀신에 해당하는 요괴는 자못 다르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자신의 실수나 불길한 일이 벌어지면 그게 다 요괴의 허튼 짓으로 치부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요괴를 추적하겠다고 철부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장면과 운외경이라는 요괴를 비추는 거울 이야기도 다 재밌다.

 

이번 4권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에피소드는 4번째에 배치된 <아린스코쿠>. 얼마 전, 너튜브로 요시와라와 오이란에 대한 콘텐츠를 읽어서인지 저자가 구사하는 일본 유곽에 대한 이야기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여전히 니혼바시니 하는 에도(지금의 도쿄)에 대한 지명은 낯설긴 하지만 말이다.

 

어느 날 도련님이 가무로(게이샤 견습생) 가에데를 요시와라에서 빼내서 같이 도망치기로 했다는 말에 두 형님들은 그야말로 까무러칠 듯이 놀란다. , 그리고 보니 도련님은 따로 공부는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독학으로 글도 깨치고 그러신 건가? 하긴 부잣집 도련님이니 독선생을 두고 공부했을 지도 모르겠다.

 

샌님 같이 약골의 도련님이 잘 나가는 오이란을 보유한 기루에 출입을 하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 도베에 씨와 함께 말이지. 역시 에도시대 풍습은 우리네 그것과는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도련님이 가무로와 바람이 나서 그런 건 아니고 아버지의 친구이자 기루의 주인장이 심장병에 시달리는 가에데를 구하기 위해 그런 프로젝트를 가동한 것이라고 한다. 기루의 주인장들은 하나같이 오이란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인가 싶었는데 또 다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도련님이 출연하는 모든 에피소드가 그렇듯 이번에도 기발한 아이디어와 요괴 네코마타까지 동원해서 받은 통행증으로 일이 쉽게 풀리나 싶었지만 한바탕 소동 끝에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샤바케> 1권이 도련님 이치타로의 출생의 비밀까지 까발리는 매운맛의 시리즈 신호탄이었다면, 4권은 1권에 비해 순한맛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걸핏하면 몸져눕는 약골 도련님을 상대로 해서 막강한 요괴가 등장해서 마구 몰아붙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몸 쓰는 두 형님들인 사스케와 니키치에게 맡기고, 사건의 핵심을 콕 찌르는 브레인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치타로 캐릭터는 성공적이라는 걸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책의 표지를 보니, 한 장에 그림에 5개의 단편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모두 담겨 있구나 싶었다. 야나리가 건넨 만주를 먹는 수로의 주인 잉어(세이군)부터 시작해서, 주발을 타고 달구슬을 지닌 채 모험에 나선 야나리, 가게온나 이야기의 운외경 그리고 벽토요괴 혹은 회반죽을 연상시킬 정도로 두꺼운 화장의 오히나 등등...

 

아 빨리 2권과 3권도 만나보고 싶다. 도서관에도 없으니 천상 사냥으로 구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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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1-14 11:2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 이런 요괴 별로 관심없는데 레삭매냐님이 너무 재밌게 읽으셔서 주말에 도서관 가서 구경이라도 좀 해볼까 합니다 . ㅋ

레삭매냐 2022-01-14 13:08   좋아요 6 | URL
그짝 동네 도서관에는 책이
있나 봅니다 :> 저희 동네에는
없다고 하더라구요 ㅠ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냥을...

대신 같은 작가의 다른 요괴
작품을 빌려 볼까 생각 중이랍
니다. 책은 아주 재미집니다.

북깨비 2022-01-14 16: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레샥메냐님 리뷰 바로바로 올려주시니 요즘 북플 들어오는 제 발걸음에 콧노래가 절로~ ㅎㅎ 저는 샤바케 시리즈를 먼저 만나고 더이상 출간이 안될꺼라는 출판사의 답변에 눈물을 머금고 😭 그저 같은 에도시대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미여사님 시리즈를 파기 시작했거든요. 글은 솔직히 미미여사님이 훨씬 더 잘 쓰시는데 아무래도 저는 요괴 이야기에 흥미가 있다보니 귀여운 도련님 요괴들이 잔뜩 나오는 (미미여사님 글에는 요괴가 안 나오잖아요 ㅠㅠ) 샤바케 시리즈에 더 애정이 가요. 백귀야행 만화책도 요즘은 일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ㅠㅠ 저는 겁이 많아서 딱 요정도로 귀여운 요괴물이 딱 좋은데 국내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나 봐요.

레삭매냐 2022-01-14 16:39   좋아요 4 | URL
우리네 같이 마이너한 취향의
독자들에게는 인기지만, 왠지
대중적이진 않은 것 같습니다 ㅠㅠ
그 결과가 절판으로... 참말로
아숩네요. 20권은 무리겠지요.

저도 미미여사의 책보다는 요런
라이트한 분위기가 좋더라구요.

<샤바케>의 캐릭터들이 등장하
는 20주년 3분 짜리 애니도 있
다고 해서 찾아 보았는데 아직
이미지를 못 뜨고 있네요. 집에
가서 떠서 올릴라구요.

저도 못지 않게 겁시 많아서
이 정도가 딱인 듯 합니다.

mini74 2022-01-14 16: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글 보면 너무 재미있겠어요 ㅠㅠ 저는 나츠메우인장 좋아해요. 거기도 요괴가 ㅎㅎ

레삭매냐 2022-01-14 16:41   좋아요 2 | URL
나츠메 우인장은 첨 들어
보는 지라 찾아 보니 왠지
소녀소녀한 느낌의 망가
가 아닌지요 ^^

애니로 만들면 히트할
것 같은데 말이죠.

mini74 2022-01-14 16:54   좋아요 4 | URL
만화에서 애니로 ㅎㅎ 요괴잡는 이야기예요. 매냐님 글 볼때마다 읽고싶어집니다 ㅎㅎ 샤바케 ~

라로 2022-01-17 21: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어요~! 그런데 절판이라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구요.^^;;(아시죠 이유는??ㅎㅎㅎ)

레삭매냐 2022-01-17 21:26   좋아요 1 | URL
듣자 하니 1편만 장편이고
나머지는 모두 짧은 에피
들로 이루어졌다고 하네요.

2권과 3권은 못 구했지만
언젠간 만나겠지 하는 마음
으로 기둘려 볼랍니다.

하모요, 그라믄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