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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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허겁지겁 그렇게 책을 읽어댄다. 결말이 너무나 궁금하기 때문에 한 번 궤도에 오르면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일부러 책읽기의 속도를 조절할 때가 있다. 너무 빨리 엔딩에 도달해 버리기가 싫을 정도로 내용이 좋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이번에 내가 만난 <하버드 스퀘어>가 그랬다.

 

사실 안드레 애시먼 작가의 팬을 자처하는 나는 <하버드 스퀘어>의 번역을 기다리지 못하고 2년 전, 원서를 주문했다. 하지만 모국어도 아닌 영어 읽기의 스트레스 때문에 조금 읽다가 내팽개쳐버렸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 되어 출간되었지 무언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 하버드 스퀘어의 밤거리를 누비는 택시의 불빛이 아른 거리는

원서의 표지는 정말 일품이다. 국내 번역서도 차라리 그냥 원서

의 표지를 그대로 쓰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버드 스퀘어>는 안드레 애시먼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때는 1977년 여름, 하버드 스퀘어가 위치한 케임브리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집트 출신 유대인인 나는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에 도전하고 있다. 세 번의 종합시험 가운데 두 번을 떨어지고 1월에 있을 마지막 시험마저 떨어진다면 그 후의 기약은 없다. 아니 모든 것이 불확실한 그런 삶 속으로 내던져진 느낌이랄까. 그런데 제법 살다 보니,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어떤 것도 우리에게 확실하게 약속해 주는 법이 없더라. 그저 오늘 하루를 살 뿐.

 

그리고 화자인 나는 카페 알제에서 요즘 말로 하면 관종격인 택시 드라이버 칼라슈니코프, 아니 칼라지를 만나게 된다. 내가 이 자전적 소설을 통해 접하게 된 튀니스의 시디 부 사이드 출신 칼라지는 대단히 뻔뻔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일전에 창조한 그리스인 조르바와 너무 많이 닮았다는 기시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 칼라지라는 남자는 자신감의 화신이고,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그런 남자다. 세상에 두려울 게 하나 없는 칼라지는 미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권리인 영주권을 원한다. 반대로 나는 영주권을 가지고 있고, 박사 학위를 원한다. 엘리트 코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박사 학위, 그것도 다른 대학도 아닌 하버드의 박사 학위라니. 이런 두 이질적인 존재가 과연 치고 박고 싸우면서 과연 우정을 직조해낼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을 읽다 보면 나라는 캐릭터는 정말 비겁한 엘리트의 전형이라는 점이 등장한다. 지중해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아메리카에서 도리 없는 이방인이라는 점까지도 똑같다. 자기혐오라는 특질도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니 처음에 그 둘을 이어준 것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였다. 한 명은 자신감에 넘치는 아랍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소심한 엘리트 유대인이기도 했다. 서로 상극이 아니던가. 아니 그런데 초반에는 이런 형식적인 온갖 장애물들을 뛰어 넘는 우정의 탄생을 목격하는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점점 더 박사 학위에 가까워질수록 칼라지와는 거리를 두게 된다. 나는 칼라지가 누리는 자신감 넘치는 자유를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무분별한 행동에 질려 하고 결국에 가서는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마음먹기도 한다. , 그 둘을 이어주는 또하나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바로 가난도 있었다. 특별한 즐거움을 원하면서도, 나는 항상 호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야 했다. 월세는 물론이고, 먹을 것부터 시작해서 연애에 이르기까지 돈이 필요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여름방학이면 유럽으로 어디로 새로운 경험을 찾아 떠나는 이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이 떠나면 나는 에어컨도 하나 없는 무더운 케임브리지에 남아 종합시험 준비와 호구 걱정을 해야했다.

 

그런 순간에 등장한 칼라지라는 존재에 나는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걱정하기 시작한다. 특히 부잣집 딸인 앨리슨 집안과 관계를 맺고, 하버드의 동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 칼라지가 등장할 때는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결국 사단이 나고 만다. 그리고 칼라지는 조국을 떠나 17년간 이룬 것 하나 없는 타국생활에 대한 환멸을 나에게 털어 놓는다. 그렇게 강할 거라고 생각한 남자가 미래의 잘나가는 교수이자 작가가 될 하버드 대학원생에게 기대는 장면은 참...

 

그렇게 시작된 관계의 미세한 균열은 치유할 방법이 없다. 아니 내가 동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그를 의식적으로 외면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파국은 시작되었다. 아니 관계의 용도가 이미 폐기되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우리 모두는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된다면, 귀찮음도 마다하면서 기꺼이 상대방을 도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바로 등을 돌리기 마련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이런 이중성에 대해 칼라지가 신랄하게 비난했다면 의 속은 아마 후련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의 칼라지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이미 숱한 그런 관계의 순환을 경험한 칼라지는 물러설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칼라지가 쏘아 보내는 비난의 눈빛에 아마 나의 양심을 산산조각이 났을 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양심이란 게 있었다면 말이다.

 

다시 한 번 소설 <하버드 스퀘어>를 통해 인간관계가 가지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소설의 화자는 칼라지가 도움의 손길을 뻗을 때마다, 그의 요청에 어떤 방식으로든 응했다. 물론 얄팍한 계산과 변명도 첨가되긴 했지만 말이다. 과연 타인에게 그가 원하는 완벽한 도움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다. 관계에서 일방의 희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데, “의 노력에도 많은 점수를 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심지어 택시 운전을 못하게 된 칼라지에게 하버드 대학 객원 프랑스어 강사직도 마련해 주지 않았던가. 21세기에는 어림도 없었을 그런 일이 지난 세기에는 가능했던 모양이다. 하나의 에피소드로서는 정말 제격이 아니었나 싶다.

 

이방인들의 안식처로 등장하는 카페 알제도 인상적이다. 소설의 출발점이 바로 카페 알제가 아니었던가. 외로운 영혼들은 말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안식을 주는 공간으로 발걸음을 하기 마련인가 보다. 화자(저자)는 카페 알제에 우연히 들렀다가, 결국 칼라지를 만나게 되고 이렇게 수수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양한 각도의 생각들과 오래된 추억들을 되새기게 하는 그런 멋진 이야기의 출발을 선보여 주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타인의 삶 속에 침잠하기가 어려운 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부단하게 나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행복도 존중해 주는 그런 스탠스를 취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나 싶다.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들에 대한 오기가 못내 아쉽다. 아무래도 역자가 현지 사정을 모르다 보니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좀 더 세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전적 소설 <하버드 스퀘어>를 읽으면서 이제는 거의 휘발된 빈타운에 대한 기억들이 구석에서 슬며시 피어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하던데, 기억 혹은 추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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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01 07: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안드레 애치먼 작품을 한편밖에 안읽었지만 정말 섬세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이 책도 왠지 그런 느낌인가 보네요. 레삭매냐님 별다섯에 너무 좋았다고 하시니 더 기대가 됩니다 ㅋ

레삭매냐 2022-03-01 09:48   좋아요 4 | URL
앞으로 애시먼 작가의 책이
두 권 더 나온다고 하니
기대만빵입니다 :>

지명에 대한 오기 때문에
별을 하나 빼려 했으나...
그건 저자의 잘못이 아니
니.,. 암튼 그랬다고 합니다.

mini74 2022-03-01 09: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페이지 줄어드는게 아까웠어요.~

레삭매냐 2022-03-01 09:49   좋아요 4 | URL
뭐랄까 새로운 관계 속으로
뛰어 드는 사람에 대한 심
리 묘사가 탁월했습니다.

누구나 다 공감할 만한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 책장 넘기는데 살짝
괴로웠더라는.

미미 2022-03-01 12: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저 지역에서 지내셨었나봐요!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더듬어 가는 추억이
제 추억이 된 것마냥 즐거웠습니다.

저도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다면 훨씬 더 흥미롭게 읽었을것 같아요.
음미하시면서 아껴 읽으신거 넘 이해가 됩니다.^^*

레삭매냐 2022-03-01 13:44   좋아요 2 | URL
이십대의 초큼을 보낸 곳이라
그런진 몰라도 격이 새록새록 -

그 시절에는 참 사진도 많이
찍고 그랬었는데... 싸이가
망하는 바람에 사진이 다 사
라져 버렸네요 ^^

책은 참 재밌었습니다.

얄라알라 2022-03-01 12: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 거의 못 읽고 지낸 이번 주, 간만에 알라딘 들어와서 플친님들 리뷰 읽는데
독서를 넘 행복하게 하셨구나....샘이 날 지경으로 재미있게 읽으셨다는 걸 느끼겠어요

레삭매냐님, 2년 전 원서로 읽으시고 재독이시니
더 깊이 읽으셨을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2-03-01 13:48   좋아요 2 | URL
새책으로 안드레 애시먼의 책을
그리고 구간으로는 타리크 알리
의 책들을 다시 읽고 있는데 넘나
재미지지 뭡니까 그래.

원서로는 못 다 읽었어요 힝~~~
그래서 이번에 번역서로 다 읽었
답니다 ㅋㅋㅋ
 
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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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여름은 뜨거웠다. 시드 부 사이드 출신 택시 드라이버 칼라지와 알렉산드리아 출신 나의 만남으로 시작된는 서사는 결국 이방인일 수밖에 우리의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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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28 16: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일수밖에 없는 우리의 존재 ㅠㅠ 딱 맞는 비유에요 매냐님 *^^*

레삭매냐 2022-02-28 17:11   좋아요 3 | URL
책은 초큼초큼 보름 만에 다 읽고
리뷰 마무리 중이랍니다.

아, 너무 마음에 드는 그런 독서
였습니다.

라로 2022-02-28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존재라니.... 저는 3월을 노려보겟습니닷!! 오늘 올리버 색스 책 다 읽을 계획이라 괜히 혼자 마음이 분주해요.ㅎㅎㅎ

레삭매냐 2022-02-28 21:32   좋아요 0 | URL
다 읽는데 근 보름이 걸렸네요 -
좀 거북이 스탈로 읽어 보았습니다.

타리크 알리와 안드레 애시먼의
글들이 왠지 서로 맞닿는 느낌이랄
까요.

우리 3월에도 열심히 달려 BoA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2021년 개정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21년 개정판)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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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제는 주간행사처럼 되어 버린 도서관 방문을 했다. 지난주에 빌린 책들을 반납하고도 제법 시간 여유가 있어서 신간 도서와 내가 그동안 놓친 그래픽 노블이 있나 찾아 보기도 했다.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에서 오래 있을수록 좋은 책들을 만나기 쉽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이런 시간들을 즐기려고 한다. 다만 코로나 시국이기 때문에 예전처럼 하세월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 송나라 황제 열전과 신간 소설 하나 그리고 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중종실록 편을 빌렸다. 얼마 전에 황현필 선생의 컨텐츠를 너튜브로 시청해서인지 좀 더 중종에 대해 가까워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1506년 중종반정으로 형님이자 폐주 연산군을 몰아내고 조선의 11번째 임금이 되었다. 반정 3대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박원종, 성희안 그리고 유순정이 실제 반정을 주도했고 진성대군이었던 중종은 거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즉위 초기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개국공신들보다도 더 많은 반정공신들을 세우고, 그들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폐주 시절 워낙에 폐해가 많았기 때문에 중종 연간에는 그전의 정치들을 제 자리로 돌리는 데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특징 중의 하나는 언관들로 구성된 사간의 힘이 세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반정공신들에 비해 사림 출신의 사대부들은 개혁의 의지가 상대적으로 강했다. 그들에게 주자의 성리학적 질서는 거의 신성불가침의 그런 영역이었다. 하지만 신하된 존재로 기존의 주상을 폐주로 몰아 폐위시킨 반정 자체가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반정 사실을 명나라에게는 쉬쉬했다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비밀이었다고.

 

중종 초기 강력했던 공신들의 권력의 추는 박원종을 필두로 공신들이 하나둘씩 사망하면서 결국 중종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중종 시대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조광조가 아니었던가. 아니 어쩌면 허수아비 왕 같았던 중종으로서는 다른 공식들의 전횡을 누르기 위해서는 조선 모든 사림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바른 선비 조광조를 국정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결국 중종을 신출내기 과거 급제자인 조광조를 등용해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시키면서 일단의 개혁 조치들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사장에 치우친 과거제 대신 현량과를 통해 신진 인사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조선 개국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정몽주와 자신의 스승인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추진했다. 후자는 실패했지만 결국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자신의 의지대로 문묘에 종상시키는데 성공한다.

 

소격서 폐지를 두고 자신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던 주상 중종과 갈등을 빚기 시작한 조광조. 다음 단계는 불필요하게 너무 많이 책봉된 반정 공신들에 대한 정리작업이었다. 이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광필이 좀 더 적극적으로 균형을 잡아 주었다면 이후에 이어지는 기묘사화에서 조광조와 기묘명현으로 알려진 그의 일파들에 대한 중종의 숙청이 좀 누그러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총애하던 조광조를 기묘사화로 일망타진한 중종이 이번에 신임한 사람은 남곤이었다. 당시 공신들조차 많은 공신들의 존재가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심지어 자신의 원훈을 반납하겠다는 이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박시백 저자는 중종의 입장에서는 누가 권력을 잡던지 상관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아울러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그야말로 수신제가 평천하의 모범을 보여 주었던 바른 선비 조광조가 제거된 다음 조선이라는 국가의 학풍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무리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해도, 임금 그러니까 권력의 눈 밖에 나는 순간 급전직하할 수 있다는 것을 기묘사화를 통해 국가가 직접 만천하에 알리지 않았던가. 그저 예전처럼 사장에 집중해서 과거 시험을 치르고, 관직에 올라 보신이나 하는 게 최고라는 걸 아무도 반박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선 최고의 권력자인 임금이 보여 주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중앙정부의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기회주의를 부추기지 않았나 싶다.

 

남곤이 죽은 다음에, 세자의 누나를 시집보낸 집안의 김안로 같은 권간의 시대가 열렸다. 어디선가는 왕권이 약했던 중종에 대해 이중인격자라는 비판도 보인다. 특히 경연의 스승으로까지 여기며 총애했던 조광조를 하루아침에 내치고 사사하는 걸 보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 정도다. 게다가 반정의 성공으로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옥사와 변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성공하면 반정이고, 실패하면 역모가 아닌가. 조선 왕조 동안 숱한 역모가 있었지만 성공한 역모는 딱 두 번이지 않은가 말이다. 성공만 하면 왕후장상의 기회가 열리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장장 38년이나 되는 재위기간으로 조선 왕조 TOP5에 랭킹되었지만, 치적으로는 무엇 하나 꼽을 만한 게 없는 왕이 중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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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2-02-27 14: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종 하면 여인천하!^^;;;;

레삭매냐 2022-02-27 18:30   좋아요 2 | URL
중봉의 세번째 왕비인
문정왕후와 그 외척이 훗날
발호하게 되는 상황을 그야
말로 드라마틱하게 잡아낸
모양이네요 ^^

mini74 2022-02-27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중종하면 딸바보? 그에 비하면 재위기간 가장 긴 영조랑 참 비교되네요.

레삭매냐 2022-02-28 01:11   좋아요 1 | URL
그리고 보니 중종이 집권 후기
에 가서 김안로를 중용했던 게
세자 누나에 대한 사랑 때문이
었는지도 모르겠네요 ^^

영조는 조선 임금들이 평균
수명이 47세였다는데 정말
장수하지 않았나 싶네요.
 
나치 의사 멩겔레의 실종
올리비에 게즈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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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나쁜 의사들>을 통해 악명 높은 절멸 수용소에서 이른바 죽음의 천사로 불렸던 요제프 멩겔레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가 행한 악행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요제프 멩겔레였다.

 

프랑스 출신 저널리스트 올리비에 게즈는 1911년 독일 귄츠부르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인류학과 의학 두 개의 박사 학위를 지닌 34세의 청년 나치 친위대 장교 요제프 멩겔레의 실체를 <나치 의사 멩겔레의 실종>이란 걸작 소설을 통해 드러내는데 성공했다.

 

전쟁과 전후에 반제 회의에서 최종해결책이란 방식으로 유럽의 모든 유대인들을 전멸시키기로 계획했던 빌런 3총사(히틀러, 프리드리히 그리고 힘러)는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독일이 패전하고 어수선한 틈을 타서, 숱한 나치들이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조국 독일을 떠나 타지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의 새로운 엘도라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도 다 싫다며 새로운 스타일의 페론주의를 개척한 후안 페론이 통치하는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였다.

 

너튜브 컨텐츠를 통해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나치즘에 동조하는 가톨릭 사제들이 가세해서 나치 전범들을 남미로 보내는 프로젝트가 가동되기도 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생체 실험 자료들을 가지고 멩겔레는 도주를 시작했다. 이탈리아 제노바를 경유해서 194938세의 멩겔레는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매사에 조심했던 멩겔레는 다른 나치 전범들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귄츠부르크의 멩겔레 집안의 전폭적 지지였다. 농기구 사업을 벌이고 있던 멩겔레 패밀리는 귄츠부르크의 경찰들과의 끈끈한 유대 관계를 통해 요제프 멩겔레의 도주를 적극 지원했다. 유대인 출신 검사이자 나치 사냥꾼으로 알려진 프리츠 바우어가 맹활약하고 있었지만, 전후의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학살극의 주범 중의 하나인 요제프 멩겔레에 대한 본격적은 추적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수십년 간에 걸친 멩겔레의 도주극이 보여주는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그가 만약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만 무사히 넘겼더라면 아마 독일에서 징역형을 살고 제국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처럼 사형제도가 폐지된 독일에서 다른 나치 전범들처럼 살아갈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용의주도하고 자신만만했던 멩겔레는 그런 방식 대신 헬무트 그레고어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새로운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원했다.

 

페론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페론이 쿠르트 탕크 박사나 전직 공군에이스 한스-울리히 루델 같은 회개하지 않은 나치 전범들을 우대하던 시절에는 멩겔레도 남부럽지 않은 그런 삶을 영위할 수가 있었다. 심지어 그는 독일영사관에 나타나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신분증을 얻기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악이 잠시 번성할 수는 있어도 영원하지는 않는 다는 점을 그는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

 

또다른 나치 사냥꾼 시몬 로젠탈이 등장해서 그의 뒤를 추적하고, 또 악명 높은 이스라엘 모사드가 치밀하면서도 오랜 준비 끝에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잡아 이스라엘로 송환하게 되면서 요제프 멩겔레에 대한 사냥도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사실 모사드 부대는 아이히만과 함께 멩겔레도 잡아 이스라엘로 보내려는 계획을 가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멩겔레는 모사드의 체포를 면했고 파라과이를 거쳐 브라질로 도피해 버렸다.

 

모사드는 다음 목표로 죽음의 천사를 정조준했지만, 어떤 인질극과 아랍과의 분쟁으로 국가적 위기가 도래하면서 거물급 나치 사냥은 중단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이 폭증했다. 동시에 아이히만 체포 과정에서 모사드는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침해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모사드가 훗날 보다 적극적인 나치 사냥을 주저하게 만드는 한 가지 요소로 작동하게 되었다.

 

한편, 멩겔레는 계속해서 주거지를 이전하고 자신의 신분을 감추면서 자신에 대한 추적을 따돌리는데 골몰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불법적으로 낙태 시술을 하고, 자기 친동생의 부인이었던 마르타와 결혼하고 지내던 때는 돌이켜보면 이 용서받을 수 없었던 빌런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친생자인 롤프에게 주변 이들은 아버지 멩겔레가 비킹 사단 출신으로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른 무장 친위대 대원처럼 몸에 문신을 했다면, 그 역시 무사할 수가 없었겠지만 타인의 신체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실험을 해대던 악당이 자기 몸에 문신을 그려 넣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우연들이 멩겔레가 역사의 단죄를 받지 않고 성공적으로 도주하는데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서독의 사법당국 역시 그가 어디에 있든 간에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생각처럼 그렇게 열성적인 추적은 하지 않았다. 나치 전범에 대한 이런 느슨한 감시와 추적 그리고 루델 같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도움으로 멩겔레는 자신을 쫓는 사법 당국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어쨌든 아이히만의 체포 이래 파샤 같은 삶을 영위하던 아우슈비츠의 빌런은 이제 쫓기는 한 마리의 들짐승 같은 신세가 되었다. 저자 올리비에 게즈는 수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추격당하는 쥐가 된 멩겔레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다룬다. 멩겔레는 1979년 브라질의 바닷가에서 심장마비로 익사하는 순간까지 총통의 우생학 기술자로 자신이 저지른 온갖 악행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잘못된 신념에 경도된 엘리트가 우리 인간 사회에 커다란 병폐가 될 수 있는지 요제프 멩겔레의 삶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뮌헨에서 변호사가 된 롤프와의 재회에서, 자신은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 앞에서 정말 할 말이 잃었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44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 가운데 자그마치 33만 명이 소각장의 연기로 사라져 버렸다. 쌍둥이들에 대한 생체 실험과 갓 태어난 아기들에 대해서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런 만행을 저지른 악마 같은 작자가 정글보이로 변신해서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을 도모하면서 바그너의 오페라를 듣는 장면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소설 중에 리옹의 도살자라고 불린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등장한다. 비록 멩겔레는 역사의 심판대에 서지 못했지만, 비슷한 도주의 궤적을 그리며 남미로 잠적했던 리옹의 도살자는 1987년 프랑스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4년 뒤 수감 중에 죽었다. 인류에 대해 범죄를 저지른 빌런은 반드시 죗값을 물어야 한다. 올리비에 게즈의 말처럼, 악을 퍼뜨리는 인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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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22 18:1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멩겔러하면 전 쌍둥이 대상으로 헌 실험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재판정에서 제대로 처벌받았어야 했는데 ㅠㅠ 어릴 적 본 뮤직빅스란 영화도 떠오릅니다 이 책도 재미있겠어요 ~~

레삭매냐 2022-02-22 19:23   좋아요 2 | URL
앗! 저도 그 영화 봤습니다.

아마 제시카 랭이 나치 아
버지를 변호하는 변호사로
나오지 않았나요... 엔딩의
반전은 깜놀이었구요.

멩겔레는 진짜 순수한 악
그 자체였습니다.

coolcat329 2022-02-22 18: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읽으셨군요. 제가 예전에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놓고 안 읽은 책입니다😔 멩겔레의 심리 묘사가 훌륭하군요.끝까지 자기가 잘못한게 없다고 한 나쁜 놈! 지 몸뚱아리엔 문신 하나 없었다니 아휴 이 책은 분노 유발 엄청나겠어요.
저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2-22 19:24   좋아요 2 | URL
부끄럽지만 저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2020년 9월 23일
에 신청한 사람이 저였네요...

정말 책 읽다가 암 유발되
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놈
들이 응징 받아야 하는데...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으니
깐요.

그레이스 2022-02-22 18: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봐도봐도 심적으로 적응이 안되는 역사입니다.ㅠ

레삭매냐 2022-02-22 19:25   좋아요 1 | URL
격렬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

도대체 이런 놈들이 처벌받
지 않는다면 세상에 정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말이죠.

라로 2022-02-22 22: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런 비슷한 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나와요. 읽는 동안 열불나서 원!! 일독을 권합니다. 저는 이 책을 찜하고요.

레삭매냐 2022-02-23 09:03   좋아요 1 | URL
이 책이 인기인지 도서관에서
죄다 대출 중이네요 ^^

나중에 인기가 좀 잦아 들면
그 때 봐야겠습니다.

책 추천 감사합니다.

coolcat329 2022-02-23 10:17   좋아요 1 | URL
물고기...저도 급 관심이 가네요. 좋은 책 같아요. 많은 사람이 읽어야 할 그런...
 
하비비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알라딘 동지들을 통해 크레이그 톰슨이란 작가를 알게 됐다. 가차 없이 인근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의 책들을 빌려 왔다. 지난 주말에 <만화가의 여행>은 읽었고, 바로 그의 2011년 역작 <하비비>를 읽기 시작했다. 더불어 <나치 의사 멩겔레의 실종>도 읽고 있는 중이다. 도서관은 정말 우리 책쟁이들에게 보고가 아닐 수 없다.

 

그래픽 노블 <하비비><만화가의 여행>과는 그 결을 달리 하는 작품이다. 와나톨리아(터키의 아나톨리아의 패러디일까?)를 배경으로, 주인공 도돌라와 잠이 등장한다. 도돌라는 9살 나이에 필경사 남편에게 매매혼으로 팔려 가고, 그 남편에게 신혼 첫날부터 폭행당한다. 그나마 늙다리 남편에게 얻은 위로라면 그가 도돌라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점 정도. 그리고 12세 되던 해에 그녀의 집에 침입한 강도들에게 남편이 살해당하고 도돌라는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된다. 정말 기구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곳에서 자신보다 9살 어린 소년 잠을 만나게 되고 같이 탈출해서 사막으로 향한다. 사막에 버려진 배에서 지내게 되는 두 사람. 사막이란 곳은 예나 지금이나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그런 척박한 환경이다. 도돌라는 그런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나가는 캐러밴들에게 몸을 팔고, 먹을 것을 얻는다. 어린 아이에서 소년으로 성장해 가던 잠은 어느덧 여성이 된 도돌라의 매력에 빠져 들기 시작한다. 그 둘의 관계는 참으로 이상하다.

 

근본주의자 집안에서 자란 크레이그 톰슨은 성경의 상당 부분과 유사한 코란에 주목한 것 같다. 그가 그린 그래픽 노블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아라베스크 문양을 필두로 해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아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구약 성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의 장자지만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막에 버려진 아랍인들의 조상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가 짠하게 다가온다.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도 코란에서는 아마 다르게 다뤄진 모양이다. 색다른 변주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사막의 유령 매춘부로 널리 알려진 도돌라의 이야기는 하렘의 숱한 여성을 거느린 술탄의 흥미를 자극한 모양이다. 일단의 무리들이 도돌라를 잡아다가 술탄의 하렘에 바친다. 비록 가난했지만 사막의 배에서 잠과 자유롭게 살던 도돌라는 하렘에 갇힌 수많은 술탄의 후궁들 중의 하나가 되고 만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도돌라에게 술탄은 70일간 자신에게 극한의 환락을 제공한다면 풀어 줄지도 모른다는 약속을 한다. 여기서는 왠지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셰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가. 결국 서사란 오래된 전임자의 변주가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세상에 아주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나저나 그래픽 노블 <하비비>의 분량은 어마무시하다. 자그마치 672쪽이라니.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전에 만난 <만화가의 여행>은 그야말로 앉은 자리에서 후딱 읽었는데 말이다.

 

도돌라의 하렘에서의 생활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다음은 잠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볼 차례다. 도돌라가 그들의 거처였던 배에서 사라진 뒤, 잠은 도시의 이상한 집단에 흘러들었다가 그만 남성성을 잃게 되고 만다. 도돌라가 술탄의 하렘에 든 것처럼, 잠 역시 술탄의 궁정에 환관의 신분으로 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은 자신의 운명이었던 도돌라와 재회한다.

 

저자 크레이그 톰슨이 구사하는 강렬한 주제의식에 편승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다. 게다가 형상화된 아랍 문자는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해 보일 뿐이다. 특정 국가와 언어에 편향된 교육 탓이라고나 할까. 근본주의자로 자란 저자는 어쩌면 자신의 근원을 찾는 과정에서, 같은 뿌리에서 탄생한 종교의 근본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그래픽 노블 <하비비>의 최고의 컷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이다.)


도돌라와 잠은 술탄의 하렘을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와중에 병을 얻은 도돌라는 그야말로 사경을 헤맨다. 그리고 잠의 헌신적인 간호와 사랑으로 드디어 죽을 고비를 넘긴 도돌라는 생존에 성공한다. 그들은 예전의 보금자리였던 사막의 배를 찾아가지만 그곳은 이미 도시의 쓰레기 처리장이 된지 오래였다. 결국 그들은 도시 와나톨리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거대 도시의 익명성에 기대면서, 일자리도 찾을 수 있었고 또 황량한 사막보다 살기에 더 낫다는 판단이 아니었을까.

 

노아의 홍수 그리고 솔로몬의 재판에 대한 아랍식 해석도 흥미로웠다. 하나의 서사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는 크레이그 톰슨의 다르게 보기가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물론 이것도 원전을 알기에 비교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거세된 함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도돌라가 잠의 아기를 가지고 싶어 하자, 좌절한 함은 그녀를 떠나 거대한 댐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결국 다시 도돌라에게 돌아온 잠은 보트와 노예 소녀를 데리고 새출발에 나서는 장면으로 방대한 이 그래픽 노블은 끝난다.

 

<하비비>를 읽으면서 내내 나는 궁금했다. 과연 내가 저자인 크레이그 톰슨이 의도한 방향대로 따라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저자처럼 창작을 위해 아랍 문자나 문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거나 책을 읽어본 적도 없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피상적 정보들에 의거해서 해석할 따름이었다. 하긴 내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거겠지만. 미지의 분야에 대한 사유의 한계와 이해의 부족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독서였노라고 고백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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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2-22 11: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헉 두꺼운거 알고 있었지만 사진은 한800페이지쯤 되는것처럼 더 두꺼워 보여요.
이책 희망도서 신청했는데 어째 느낌이읽기 쉽지 않을거 같네요.
그림이 굉장히 강렬하네요.
저야말로 그림만 구경하다 덮는건 아닌지 살짝 걱정도... 😟

레삭매냐 2022-02-22 11:48   좋아요 4 | URL
도서관에서 보고 깜딱~ 놀랐답니다.

어마무시하게 두껍더라구요.
작가가 그림 그리다가 손이 나갈
지경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요...

쿨카트님네 도서관에서는 구간도
희망도서로 받아주는가 봅니다.
저희 동네에서는 신간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ㅠㅠ

coolcat329 2022-02-22 17:51   좋아요 4 | URL
제가 사는 동네는 구간도 받아주더라구요. 근데 또 모르죠.일단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2-22 18:00   좋아요 4 | URL
더 부럽 ~

저희도 그러면 얼매나 좋을까요.

mini74 2022-02-22 17: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진짜 책이 두껍네요. 저희도 희망도서는 신간만 받더라고요. 고민중입니다. 3월에 살까말까 ㅎㅎ

레삭매냐 2022-02-22 18:00   좋아요 3 | URL
책이 아주 두껍습니다...

원서가 672쪽이라고 하는데
아마 국내서도 비슷할 겁니다.

장난 아니더라구요 :>

얄라알라 2022-02-22 18: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관절염을 호소하던 때는 이 책 그리기도 전인데......7년동안 완료하고 관절염 더 심해지셨을 것 같아요...워낙 그림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성들어가서..

레삭매냐 2022-02-23 13:45   좋아요 1 | URL
그러니깐요 -
싸인회 보니 정성스럽게 일일히
그림을 다 그려 주는 것 같더라
구요. 역시 근본주의자다운 ^^

얄라알라 2022-02-22 1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관절염을 호소하던 때는 이 책 그리기도 전인데......7년동안 완료하고 관절염 더 심해지셨을 것 같아요...워낙 그림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성들어가서..

Jeremy 2022-02-23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raig Thompson 의 Graphic Novel 중
Black & White 은 좋아합니다. 전 총천연색 Graphic Novel 은 그닥.
더군다나 Thompson 은 지문을 죄다 Capitalize 하지 않아서
아무리 길어도 편하게 읽을 수 있거든요.

˝From the Divine Pen fell the first drop of ink˝
이 책은 이렇게 쓰면서 시작하는데
미국 다른 Graphic Novel 들은 지문을 죄다 대문자로 써서
정말 읽기 힘들거든요. 저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FROM THE DIVINE PEN FELL THE FIST DROP OF INK.˝
대문자로 다 쓰면 단어가 인식이 안 되는 자체결함이 있어서.

Craig Thompson 의 다른 책, ˝Blankets˝ 은
Habibi 보다 100장 정도 얇은데 이 책도 정말 좋답니다.
Habibi 좋아하시면 이 책도 강추.


레삭매냐 2022-02-23 13:54   좋아요 2 | URL
그러시군요 ^^

번역서에서는 로어 케이스와 캐피탈
의 차이를 느낄 수가 없어서 그런
부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저도 그래픽 노블은 올 칼라보다는
흑백이 더 마음에 들더라구요.

<담요>도 읽어 보고 싶은데, 고 책
은 먼 작은 도서관에 있어서 수급이
ㅋㅋ 아니면 저희 집 근처 배송을 요
청해볼까 합니다.

미리보기로 보니 더 보고 싶어지네요.

유부만두 2023-09-21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하비비 읽고 왔어요. 담요가 기독교 체험이었다면 하비비는 기독교 이슬람( 인도, 티벳) 문화 탐구 같았어요. 역동적 장면들이 인상 깊었고요, 리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