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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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을 거의 두 달에 걸쳐 읽었다. 만날 하는 말이지만, 책 사기는 줄이고 그전에 사둔 책들을 읽어야 하는데 둘 다 쉽지 않은 미션이다. 그래서 읽다만 책들부터 하나씩 완독해 가는 프로젝트에 올해 중점을 두기로 했다.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 출발점이었다.

 

내가 읽다만 지점은 정확하게 철도 공무원이자 역장을 역임한 주인공이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열거하고 반추하기 시작하기 직전까지였다.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이자 화자는 유년 시절에 늘 자신감이 없었다. 아버지처럼 풍채도 좋지 않았고, 요즘 말로 하면 아싸 정도였지 않나 싶다. 그에게 탈출구는 바로 공부였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 좀 하면 누구에게나 환영받기 마련이다. 이제 공부라는 학업으로 성취된 학벌은 개인의 성공을 위한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어려서부터 정해진 코스를 뛰는 경주마처럼 그렇게 경쟁에 내몰린 셈이다. 여튼 주인공은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 청춘 시절 약간의 일탈도 경험하게 되는데, 한동안 시인 행세도 한 모양이다. 이야, 소설가도 아니고 시인이라 대단한 걸 그래.

 

그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시절 체코에도 철길이 깔리자 미래는 철도에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그쪽에 투신한다. 철도 공무원으로 출발해서 어느 역장의 딸과 결혼해서 자신도 결국 역장이 되기도 했다. 전쟁 시절(아마도 1차 세계대전)에는 민족을 위해 황제에 반대해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기도 한다. 후술하는 부분에서는 그러다 잡히면 반역죄로 교수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는 말을 언뜻 던지기도 한다. 그러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뜨고, 은퇴해서 살다가 죽게 된다는 그런 아주 평범한 이야기다.

 

, 문제는 글을 쓰는 와중에 화자는 진짜 여러 가지 자아들과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소설 <평범한 인생>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화자는 분명 평범한 자아였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렇겠지만 나라는 개인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모습들이 서로 경쟁하거나 갈등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형성한다는 거다.

 

기본 베이스는 평범한 자아가 등장한다. 그 다음에는 억척이로서 철도 공무원과 역장이 되기 위에 사회에서 고군분투한 내가 있다. 하지만 내면의 갈등을 촉발하는 상이한 존재인 우울증 환자가 있다. 하긴 이 세상 삶이 언제나 그렇듯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다. 모든 일들이 그렇지 않은가 항상 좋을 수는 없다가 진리다. 그렇게 계속되는 삶의 순환이 내 삶에 질서를 만들고,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 세 존재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찾아온 청년은 시인 행세를 하던 시절에 화자가 쓴 시에 감명을 받았다며 그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간청한다. 야자나무에서 탬버린 소리가 들린다고 했던가. 화자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그렇게 질풍노도의 시기에 했던 말들을 우리가 과연 기억할 수 있을까? 아마 나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남긴 유산들의 백래시가 올 때도 있는 것이다. 좋은 방향으로든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든. 화자는 자신에게 애초에 시인으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걸 깨닫고 부리나케 후퇴했다.

 

열렬한 체코 민족주의자로 변신해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던 영웅으로서의 모습은 어떤가. 여기서 나는 카렐 차페크의 그들에 대한 일종을 비판의식을 읽을 수가 있었다. 어떤 투철한 목적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대의에 동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그냥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시대정신에 편승하게 됐던 게 아닐까. 물론 그런 것들이 훗날에 역시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였으리라. 만약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 독립하지 못했다면 그의 그런 행동이 영웅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소설 <평범한 인생>을 읽으면서 후반으로 갈수록 소설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내 삶의 질서와 상이하게 다투는 자아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바로 이런 게 문학의 힘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단순하게 책을 읽고 또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아주 조금이라도 나의 삶에 대해 반추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간과 비용을 동원해서 책을 읽는 게 아주 효용이 없지 않나 싶다. 한 스푼 더 얹자면, 개인적 발전 내지는 성장까지도 할 수 있다는 아마 더 바랄 게 없으리라.

 

결국 책에서 만난 상이한 자아들의 투쟁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아 그리고 보니 거지도 있었지. 영웅, 시인, 거지, 낭만주의자 그리고 아내의 헌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엉터리 남편에 이르는 모든 것들이 내 삶의 질서를 고착시키는 그런 요소들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들이 몰려오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절판된 카렐 차페크의 평범하지 않은 사람의 삶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다른 책들도 빨랑 번역이 되어 나오면 좋겠다. 어수선하고,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어 좋았다. 역시 힐링에는 책만한 것이 없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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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11 1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힐링에는 책만한게 없는거 같아요~!!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좀 어렵기는 했지만 😅

레삭매냐 2022-03-11 13:30   좋아요 2 | URL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

저도 쩜 어려웠습니다. 지금
내가 무얼 읽고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
니다. 그래도 다 읽어서 스스
로에게 대견하다고 ㅋㅋ

고저 힐링에는 책이닷!

mini74 2022-03-11 1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으려고 사놓기만 하고 ㅠㅠ 매냐님 보니 생각납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2-03-11 13:37   좋아요 3 | URL
저도 사서 바로 한 절반
정도 읽고 나서 내삐 두
었다가 어제 잡아서 쭈악
다 읽었답니다.

책은 고저 바로 다 닐거야
하는가 봅니다. 고고씽~~~

페넬로페 2022-03-11 15: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신차리고 다시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내가 산 책은 뒤에 읽어도 도서관 희망도서는 꼭 읽자고 결심하는데 이 책도 아직 읽지 않고 있네요.
조금 어려운 책인가봐요.
근데 그런 책이 생각할 거리는 많이 주는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2-03-11 17:05   좋아요 2 | URL
참으로 죽비 같은 말씀입니다 -
저도요...

어려운 책일수록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는가 봅니다. 그래도
어려운 책들은 쩜...

얄라알라 2022-03-13 2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 달 동안 천천히 나눠 읽으시면서, 지난 번 읽다만 지점을 정확하게 기억하시는 레삭매냐님!

저는 어제 밤에 읽다 만 소설, 오늘 다시 읽을 때 잠시 헤맸거든요.

차곡차곡 사두신 책 완독하시는 프로젝트
그 역시 미니멀리즘, 멋진 도전이십니다

레삭매냐 2022-03-14 09:23   좋아요 2 | URL
어제 책방에 쌓인 책들 정리
를 하기 시작했는데요...

정말 감당이 안되더라구요 ㅠㅠ

그래서 다시 안볼 책들이랑 기타
책들은 팔거나 내다 버리거나
그러고 있답니다.

욕심을 덜어내야지 싶습니다.

추신. 이러면서도 책은 계속해서
사대고 있답니다 냐하 ~ 노답
인생이네요.

그레이스 2022-03-15 08: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른쪽 주머니, 왼쪽 주머니 ... ㅋㅋ
어딘가 있는데 찾다가 포기상태입니다.

레삭매냐 2022-03-15 13:46   좋아요 2 | URL
차페크의 그 책도 있었지요 ^^

다시 한 번, 세상은 넓다랗고
읽을 책들은 차고 넘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뒷북소녀 2022-03-31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똑같은 부분에서 읽기를 멈췄다가 최근에 다시 읽었어요.ㅋㅋㅋ
 
아웃 오브 이집트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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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애시먼 작가의 근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 지중해를 품은 알렉산드리아 시절에 대한 서사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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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살라딘
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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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타리크 알리의 이슬람 5부작의 신호탄 <석류나무 그늘 아래>를 읽고 나서 바로 <술탄 살라딘>을 읽었다. 자꾸만 살라딘인지 알라딘인지 헷갈린다무려 4년 만에 다시 읽는 느낌이란... 좋은 책은 다시 읽어도 좋더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내가 이 책을 두 번 산 것은 안 비밀이다. 살라딘, 살라흐 앗 딘은 타임에서 선정한 지난 천 년의 인물이기도 하다.

 

타리크 알리는 팩션에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석류나무>에서 안알달루스의 추락을 그렸다면, 이번에는 프랑크족의 침입 이래 이슬람 수치의 상징이 된 알 쿠드스(예루살렘)를 탈환하는 신자들의 사령관 살라흐 앗 딘의 이모저모를 역사라는 큰 줄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첨가해서 멋진 드라마를 완성했다.

 

매혹적인 이야기는 살라흐 앗 딘의 지하드의 선구자 모술의 장기와 누르 앗 딘(누레딘)의 신하였던 카이로에서 출발한다. 유대인 역사가 이븐 야쿠브는 술탄의 서기로 발탁되어 술탄의 측근에서 그의 회고록을 쓰는 임무를 부여 받는다. 신자도 아니고, 알 파딜이나 이마드 앗 딘 같은 술탄의 총신도 아닌 자가 측근에 임명되니 자연 주변의 시기를 받기 마련이다. 노련하고 신중한 살라흐 앗 딘은 나름 자신의 방식으로 이븐 야쿠브를 배려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회의에서 그를 배제시키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 이븐 야쿠브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아쉬움을 달래지 못한다.

 

어쨌든 쿠르드 시골 출신의 부친 아이유브 밑에서 성장한 살라흐 앗 딘이 어떻게 해서 이집트의 와지르를 거쳐 명실상부한 아랍 세계 최고의 술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가공의 인물인 이븐 야쿠브의 시선으로(아마도 타리크 알리 자신이 아닐까) 서술은 흘러간다.

 

1차 십자군 원정으로 알 쿠드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한 프랑크에 대항해서 아랍 세계는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분열상을 계속해 왔다. 심지어 어떤 아미르들은 프랑크와 결탁해서 같은 신자들을 공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미 <석류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런 분열의 결과, 알안달루스를 카스티야 왕국에서 상실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단결하면 성공, 분열하면 망조라는 걸 역사는 누누이 우리에게 알려준다.

 

살라흐 앗 딘은 숙부인 시르쿠와 더불어 파티마 왕조 지배 아래 있던 이집트 원정에 나선다. 결국 수차례에 걸친 원정 끝에 이집트를 정복하는데 성공하지만, 시르쿠가 식탐 때문에 어이 없이 죽은 뒤 살라흐 앗 딘이 와지르의 자리를 차지한다. 자신의 수하였던 살라흐 앗 딘을 결국 경쟁자로 인식하게 된 누르 앗 딘은 그를 정벌하려고 하지만 자신이 먼저 죽고, 아랍 세계의 통일은 살라흐 앗 딘이 이루게 된다.

 

타리크 알리는 술탄의 하렘을 지배하는 영명한 술타나 자밀라와 할리마라는 매력적인 여성들을 등장시켜 소설 <술탄 살라딘>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아니 술탄의 서기인 이븐 야큐브는 그야말로 위대한 술탄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과 끊임없이 교류를 하면서 그의 삶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그런 중요한 인물로 성장해 간다. 살라흐 앗 딘에게는 그의 아버지 아이유브보다도 더 중요하고 고지식한 쿠르드 전사 샤디를 배치해서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에 반전을 가하기도 한다.

 

이집트에서 출발한 살라흐 앗 딘이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알레포 그리고 모술을 차례로 정복해 가면서 아랍 세계의 통일을 이루고 대망의 성도 알쿠드스 탈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과정을 타리크 알리는 정밀하게 그려냈다. 이 부분은 역사적 사건들이라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의 소설가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부분들을 채워 나간다.

 

90년 전, 고드프루아와 탄크레디가 이끄는 프랑크 기사들이 알쿠드스를 정복했을 때 보여준 만행을 무슬림은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관용의 군주인 살라흐 앗 딘은 그런 방식의 보복을 원하지 않았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주인공 이벨린의 발리앙으로부터 자신에게 대항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풀어 주었지만, 결국 알쿠드스 수비대의 대장으로 격렬하게 저항했음에도 그를 용서해 주었다. 대주교가 자신의 그런 서약을 무효화했다는 주장을 하면서도, 술탄에게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장면은 정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중에라도 <술탄 살라딘>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게 된다면 과연 이 장면이 어떻게 영상화될지 좀 궁금해졌다.

 

그전에 아랍 세계를 통일하고,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을 평정하면서 알쿠드스 공략에 나서는 장면도 주목할 만하다. 타리크 알리는 알쿠드스 탈환이 신자들에게 대의명분 뿐 아니라, 전쟁에 나선 아미르를 필두로 하는 전사들에게 재정적 이득이라는 점도 중요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사실 십자군원정 역시 비슷한 이유가 다수 존재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준비한 하틴 전투에서 결국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의 기 왕와 레지날드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긴다. 프랑크 병사 15,000명이 전사하고, 3,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기독교 왕국의 군대는 농성전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무리하게 살라흐 앗 딘과 정면대결에 나섰다가 치밀하게 준비된 포위망에 걸려 전군이 전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살라흐 앗 딘은 맹세한 대로 자신의 고모와 무고한 성지 순례단을 죽인 레지날드에 사망선고를 날렸다. 아무리 관용의 군주라고 하지만, 풀어 주게 되면 자신의 군대에게 다시 싸우게 될 기독교 기사들도 모두 처형했다.

 

하틴 전투로 주력부대를 잃은 예루살렘 왕국은 결국 살라흐 앗 딘의 무슬림 부대에게 탈환되고 만다. 하지만 이런 영광의 순간은 지나가 버리고 곧 사자심왕 리처드를 필두로 하는 프랑크 군단이 다시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와 혈전을 치르게 된다. 살라흐 앗 딘은 이를 예견하고 메카 순례를 마치고 프랑크들의 본진털기를 시전할 장대한 계획도 꿈꾸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호적수 리처드와 공존을 도모하기도 했지만, 참모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천년이 지나도 팔레스타인 땅의 평화는 요원해 보인다.

 

<석류나무 그늘 아래>에서 알후다인의 비극이 있었다면, 이븐 야쿠브의 카이로 집이 알쿠드스 함락에 화가 난 프랑크 기사들이 방화를 저지르면서 아내 라헬과 딸 마리암 그리고 손주가 모두 죽는 비극이 발생한다. 과연 인간의 삶에 영광의 순간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작가는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것일까. 알후다일의 비극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술탄 살라딘>의 그것은 상대적으로 덜한 느낌이다. 다른 무슬림 퀸텟에서도 비슷한 비극의 궤적이 등장하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술탄 살라흐 앗 딘의 삶을 관통하는 성장과 아이유브 제국의 건설 그리고 알쿠드스 탈환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당대 최고 권력자의 곁에서 지켜본 유대인 서기의 증언이라는 방식으로 소설화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동시에 비교적 중립적인 시선으로 술탄의 여성들, 최측근 쿠르드 전사, 제국의 재상 그리고 학자들을 아우르는 최고 권력자 주변의 인간 군상들이 펼치는 욕망의 파노라마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추적한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돌기둥 여인>을 필두로 한 나머지 타리크 알리의 이슬람 퀸텟 3편도 부디 출간되었으면 하는 그런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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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3-07 01: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오래 전에 읽었는데 세세한건 거의 생각이 안나네요. 아 저도 리뷰쓸 때 레삭매냐님처럼 살라딘의 일대기를 좀 더 세밀하게 썼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이 글을 보면서 듭니다. 제가 못쓴 내용을 레삭매냐님 글 통해서 보니 좋네요. ^^
소개해주신 <석류나무 그늘아래>는 알라딘 중고로 구입했는데 책이 왔어요. 언제나 알라딘 중고는 정말 혜자스럽습니다. 진짜 책이 너무 깨끗해서 득템이라는 말을 저절로 하게 되네요. 이번 달에 아껴가며 읽을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

레삭매냐 2022-03-07 09:39   좋아요 1 | URL
리뷰를 쓰면서 좀 더 디테일하게
쓰고 싶었으나 역량의 부족으로
줄거리 소개 정도로 밖에는...

<석류나무 그늘 아래>는 정말 ~
인생책이라 부를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태가 매우 좋다고 하시니 저도
왠지 기분이 덩달아 좋아지네요.
부디 아껴 읽으시길... 후반으로
갈수록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
이 다분하지만요 ^^

mini74 2022-03-07 09: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살라딘 알라딘 ㅎㅎ 형제 이름같아요 십자군관련 책에서 자주 봤던 분이네요 ~~

레삭매냐 2022-03-07 09:40   좋아요 2 | URL
십자군 원정하면 빠질 수가
없는 인물이 바로 살라흐
앗 딘이지요. 대단한 캐릭터
였습니다. 두고두고 울궈 먹
을 만한...

그레이스 2022-03-07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타리크 알리의 5부작 도전하고 싶어요
읽기시작하면 또 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겠죠?!;;;;

레삭매냐 2022-03-07 09:45   좋아요 2 | URL
우와 좋은 생각이십니다.

단, <석류나무 그늘 아래>와
<술탄 알라딘>은 모두 절판되었
구요...

나머지 <돌기둥 여인>을 필두로
해서 <팔레르모의 술탄> 그리고
<황금 나비의 밤>은 아직 번역
이 되지 않은 미출간 책들이랍니다
ㅠㅠ

그레이스 2022-03-07 10:01   좋아요 3 | URL
저도 지금 검색해보기 그렇네요
기다려야겠어요
일단 저장!

서니데이 2022-03-07 21: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살라딘과 알라딘은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한글은 처음 보면 비슷하긴 해요.
잘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2-03-08 15:34   좋아요 1 | URL
저도 자꾸 헷갈리더라구요 - 알라딘 살라딘!
이제 봄이 온 모양입니다. 좋은 날 되세요.

가필드 2022-03-07 2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레삭메냐님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 저도 장바구니로 쓰윽

레삭매냐 2022-03-08 15:38   좋아요 0 | URL
좋은 책들이 절판되어 아쉬울
따름입니다.

감상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제프 다이어 선집
제프 다이어 지음, 황덕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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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라이브로 재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주변에 있는 이들이 모두 재즈 음악을 해서,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재즈 음악에 심취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록과 헤비메탈을 듣던 이에게 재즈는 사실 무리수였다. 기껏 따라간 재즈 공연에서 애꿎은 맥주만 들이켜다가 돌아왔다. 그 뒤로 재즈하고는 담을 쌓고 살았다.

 

사실 지금까지도 스윙이니 비밥이니 하는 걸 몰라서, 재즈 좋아한다는 옆지기에게 물었더니 잘 모른단다. 역시 음악도 좋아해야 보이는 모양이다. 지금도 오래 전에 즐겨 듣던 음악이 나오면 스토리며, 아는 걸 주절댈 수 있는 자신이 있는데 말이다. 다른 에피소드 하나,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영어 학원에 다니던 시절에 영어 학원 재즈 좋아하던 캐나다 출신 영어 선생님이 엘라 피츠제럴드의 <맥 더 나이프> CD를 선물해 준 적이 있다. 그 음악도 역시나 당시 내 음악 취향이 아니라 패스했었다. 내가 그 쏘울을 어찌 아나 그래. 그건 어디에 가 있을까. 사연 있는 음반들이 주변에 참으로 많다.

 

제프 다이어는 장인다운 손길로 이제는 만나고 싶어도 오로지 음악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재즈 역사의 한 시절을 주름 잡은 거장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쩌면 신화가 되어 버린 구전들 속에서 또 어떤 순간에는 재즈 뮤지션들을 찍은 사진을 문학적으로 해석해 낸다고나 할까? 상상이나 해봤는가. 흑백의 사진 속에서 서혜부의 바짓단들이 서로 부대끼는 사운드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바로 그런 놀라운 상상력이야말로 제프 다이어의 <그러나 아름다운>을 특별하게 만드는 마성의 조미료라고 생각한다.

 

재즈의 원류는 블루스라고 어디선가 들었다. 끈적끈적한 빌리 할리데이의 목소리에 한 스윙과 비밥의 전성기를 장식한 재즈 뮤지션들의 합주는 그야말로 끝내줬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쟁쟁한 연주자들의 음악을 찾아 들어 봤다. 나름 맛깔나는 리뷰를 쓰기 위해 별 짓을 다하지 싶었다.

 


전설의 듀오 듀크 엘링턴과 해리 카니가 연주 여행에 나선 에피소드들이 막간을 장식한다. 아티스트들에게 매 순간이 중요하다. 떠오른 악상을 바로 바로 메모해 두어야 잘 써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냅킨이건 뭐건 간에 바로 바로 떠오르는 악상들을 그 자리에서 메모한다. 어쩌면 영화 등을 통해 너무 이미지화되어 너무 식상해져 버린 장면들일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재즈가 흑인 연주자들의 영역이다 보니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장면들도 숱하게 등장한다. 색소폰 연주자 레스터 영이 병역기피자로 몰려 강제징집당하고, 백인 장교에게 모욕을 듣는 사건을 보자. 백인 여자가 웹스터의 아내라는 사실을 장교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맹렬한 구타와 깜둥이라는 모욕이 이어지는 건 순서일 지도 모르겠다. 매독과 암페타민 중독자를 군대에 입대시킬 정도로 미국 군대에 군인의 수가 절대적으로 모자랐다는 것일까?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리자 헤로인 봉투를 내던지고 친구 버드 파월 대신 감옥에 간 텔로니어스 멍크의 경우는 또 어떤가. 음악 외에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저 배회하며 자신의 섬세한 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던 위대한 재즈 아티스트인 멍크.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에서 끝없이 자아와 싸우는 전사여야 했던 그에게 세상은 잔혹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겠다. 호텔 직원에게 물을 요구하는 멍크에게 직원은 경찰을 불러 응수한다. 출동한 야만적인 경찰은 경광봉으로 재즈 피아니스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두 손을 마구 내려치지 않았던가. 이 부분을 읽는 순간, 그야말로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그 가치를 모르는 무자비한 존재에 의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탈레반이 파괴한 바미안 석불이 떠올랐다.

 


재즈는 단 시간 내에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 대가로 귀중한 연주자들의 영혼과 목숨을 담보로 요구했다. 멍크가 보호하려고 했던 자신 못지않은 섬세함 감성의 소유자 버드 파월은 정신병원행이었다. 야만스러운 경찰이 멍크에게 경광봉 세례를 퍼부었다면, 버드 파월을 알아본 경찰은 그를 보호하려고 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니. 야수 스타일의 색소폰 주자 벤 웹스터는 유럽 대륙을 누비면서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에게 술을 얻어 마시고, 대신 환상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술이라는 이름의 영혼의 진정제는 재즈 뮤지션들에게 어쩌면 삶의 원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했지만, 장기를 파괴시켜 천국으로 가게 만드는 불길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을 숱하게 집어 삼킨 술과 약물의 오남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외에도 자신에게 어떤 음악을 연주해 보라는 이에게 니가 해라고 외친 깡다구 넘치는 찰스 밍거스의 패기, 아트 블레이키와 디지 길레스피, 백인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와 아트 페퍼 등등의 이야기가 오선지에 수놓아지듯 사실과 신화 사이를 오가며 전개된다. 아무래도 재즈에 일천하다 보니 이런 저런 명곡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제프 다이어 만큼 재즈에 대한 조예도 없으니 그저 저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따라갈 수밖에. , 나도 제프 다이어처럼 왜 현대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가 고전 연주자들의 주법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지 그렇게 줄줄이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전에 먼저 재즈부터 좋아해야 하는데, 사실 그건 좀 난망하지 싶다. 여전히 재즈에 잘 모르니 말이다.

 

[뱀다리] 그래도 오래 전에 내 친구 브래들리의 초대로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그 푸른 잔디밭에 누워 데이브 브루벡의 <Take Five>를 들었던 기억은 정말 최고였다. 사진이 어디에 없나 그래. 땡볕에서 듣느라 햇볕에 얼굴이 홀라당 타서 며칠 고생한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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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3-05 16: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친구가 재즈피아노를 좀 칠줄 알아서 참 부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체르니도 낑낑..😆

로비 윌리암스가 부른<맥더 나이프>너무 좋아하는데 앨라 피츠제럴드 버젼도 흥겹네요ㅎㅎ

coolcat329 2022-03-05 22:01   좋아요 2 | URL
많은 가수들이 맥더나이프를 불렀지만 엘라의 맥더나이프를 능가하는건 없다고 생각해요.
ella in berlin/ mack the knife 앨범을 정말정말 많이 들었네요.
아 엘라 정말 최고에요.

미미 2022-03-05 22:05   좋아요 2 | URL
제가 재즈는 몇곡밖에 모르고 로비 노래를 워낙 좋아라해서ㅋㅋㅋ베를린서 공연한 영상인가봐요?! 들어볼께요~🥰

coolcat329 2022-03-05 22:07   좋아요 2 | URL
영상은 못봤구요. 저는 앨범을 갖고 있어요.

미미 2022-03-05 22:11   좋아요 2 | URL
쿨캣님 제대로 즐기시는군요👍너튜브에도 노래만 있어요!

레삭매냐 2022-03-05 23:42   좋아요 3 | URL
오오 체르니의 추억이란...

그런데 너튜브로 찾아서 들어
보니 아주 흥겹네요.

[쿨캇트님] 여윽시 오지지나루
가 쵝오인 것 같습니다 ^^

맥 더 나이프가 이런 곡이었나
싶네요. 역시 기억은 믿을 게
못되나 봅니다.

mini74 2022-03-05 21: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 재즈는 잘 모르지만 그나마 무라카미 하루키 덕에 검색하고 들어보고 했어요 ㅎㅎ 과거 흑인예술가들의 삶은 너무 비참하도라고요. 빌리 홀리데이도 그렇고요. 제프 다이어란 사람 저도 궁금하네요.

레삭매냐 2022-03-05 23:43   좋아요 3 | URL
제프 다이어가 설터쌤과 더불어
작가 중의 작가라는 평들이
자자~하더라구요.

다시 만나게 되어 아주 좋습니다.

저도 재알못이라 헷 ~

coolcat329 2022-03-05 21: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예전에 샀다가 번역이 너무 이상해서 바로 팔아버렸어요.
근데 이번에 황덕호님 번역으로 다시 나와 넘 기대됩니다. 매냐님 벌써 읽으셨군요.
저도 주문하려구요. 😊

레삭매냐 2022-03-05 23:45   좋아요 2 | URL
[ O ] 번역으로 결국 재개정판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재즈도 재즈지만 전 이번에
사진 평론? 에세이가 더 기대
됩니다.
 
석류나무 그늘 아래
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4년 만에 다시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를 읽었다. 좋은 책은 거듭 읽어도 잔좋음의 잔향이 가시지 않는다. 내게는 <석류나무 그늘 아래>가 그런 책이다. 여전히 슬프고, 아름다운 서사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523년 전인 14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스티야 왕국 주도로 이른바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가 성공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무슬림 근거지였던 가르나타(그라나다) 왕국이 결국 함락됐다. 가르나타의 마지막 술탄은 수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 살아온 무어인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한다는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말에 저항 없이 투항했다. 하지만 모리스코인들에게 예정된 비극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실존 인물인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데 시스로네스, 톨레도의 대주교는 코란을 비롯한 수십만권의 이베리아 반도 아랍 문화의 정수가 담긴 서적과 원고들로 벽을 세웠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질렀다. 모리스코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를 말살하고,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반도에서 내쫓으려는 그를 사탄의 사제라며 경멸했다. 어느 거리의 노숙자는 배울 책이 없는 사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들기도 했다. 그들이 약속한 관용과 공존은 공허한 메시지일 뿐이었다.

 

, 이제 이 방대한 서사를 이끌어갈 바누 후다일 가문의 일족들이 등장할 차례다. 그들의 선조인 이븐 파리드는 로맨틱한 중세 기사도가 살아 있던 시절의 인물로 자신들의 땅을 엄습해 오는 기독교 전사들에 맞서 싸운 영웅이었다. 하지만 신자들의 고질적인 내분으로 안알달루스의 무어인들은 전성기 때처럼 결집하지 못했고, 결국 마지막 거점인 가르나타까지 내주게 되었다.

 

알후다일의 영주인 우마르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했다. 첫 번째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조건은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삼촌인 미칼, 아니 이제 쿠르투바의 주교가 된 미겔은 다른 이유로 바누 후다일 집안을 떠나 적진에 투항해 버렸다. 그리고 대고모 자라는 마리스탄에 감금된 신세였다. 그녀는 나중에 밝혀지지만 반세기 전 금지된 로맨스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두 번째 선택은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기독교 카바예로들과 맞서 마지막 1인까지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는 것이었다. 우마르의 피 끓는 장남 주하이르 알팔 같은 세대들은 이런 선택을 선호한다. 하지만 남은 이들은 어떻게 될 거란 말인가. 마지막 선택지는 안알달루스 무어인들의 출발지인 마그레브의 사막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다는 점이 바로 그들이 직면한 문제였다.

 

소설에서 최고 빌런으로 등장하는 시스네로스는 이제 무어인들로부터 막 수복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모든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광신자였다. 무어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최고사령관 돈 이니고가 아무리 시스네로스에게 관용과 공존을 이야기해도, 광기에 물든 대주교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있는 이슬람 청년들을 선동해서 봉기를 유도하는 악역을 자처한다. 그러니까 단 한 번의 빌미만 제공한다면, 눈엣가시들은 이교도 무슬림들과 가짜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모두 청소하겠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다. 아니 실제로 카스티야 초대 종교재판장으로 악명을 떨친 토르케마다를 능가하는 그런 종교적 광신이 사로 잡힌 이가 바로 시스네로스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알후다일 사람들은 무사태평이다. 사실 그들이 무엇을 한다고 해도 거대하게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역진할 수는 없었다. 시간은 알후다일 사람들의 편이 아니었다. 선대로 올라가는 가문의 비밀은 중세 시절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던 알진디크와 자라의 사랑에 그만 방점을 찍고 만다.

 

타리크 알 리가 구사하는 팩션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분노와 혐오 그리고 배제의 시대에 관용과 공존이란 이상이 존재할 공간이 없다는 걸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게다가 종교까지 개입하게 되면서 문제는 더더욱 복잡해진다. 무슬림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시절에는 그나마 어느 정도의 관용이 허용되었지만,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기독교 왕국의 지배자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저자는 증언한다.

 

더 무서운 점 중의 하나는 그들이 개종자들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슈퍼 빌런 시스네로스는 정확하게 이베리아 반도의 이교도들이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종을 택한 것이지 온전하게 정신적 투항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교도들과의 공존이 아닌 제거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비극으로 이어진다.

 

혈기 넘치는 청년답게 주하이르 알팔은 회의주의자 알진디크의 가르침이나 아버지 우마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저항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저명한 기독교 전사와의 대결에서의 승리는 가족에게 재앙이 되었다. 시스네로스의 명을 받은 레콩키스타의 영웅 코르테스(당시 16)는 알후다일을 공략해서 바누 후다일 사람들을 몰살시킨다. 주하이르의 막내 동생 야지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 양심적이었던 카스티야 전사 한 명이 민간인들을 죽이라는 코르테스의 명령에 저항하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코르테스에게 언제부터 이 땅의 기독교 전사들이 저항하지 않는 죄 없는 아이들과 여자들을 죽이는 게 관습이 되었느냐고 따진다.

 

알카히라에서 온 교사 이븐 다우드와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한 다음, 마그레브의 페즈로 이주한 힌드만이 이 재앙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주하이르 알팔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가족의 복수를 맹세하고, 그들이 그렇게 목놓아 찾았던 알라가 자신들을 수호하지 않는다는 말로 소설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슬람 문화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공공연한 무신론자 작가다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타리크 알리의 분석과 서사는 너무 냉정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이들에게 환호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는 팩션의 전범을 보여준다. 역사적 인물과 가공된 인물의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다. 자신들이 나고 자란 땅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무어인들의 결의는 비장했지만,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는 그런 수준의 저항일 뿐이었다. 꽃이 필 때가 있으면, 또 질 때도 있는 법이다.

 

기독교 왕국들의 파도 같은 공격 앞에 무슬림 왕국들은 단결하지 못하고 분열을 거듭했다. 그리고 위대한 베르베르 전사들의 후예들은 수세기 동안 자신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 속에서만 살았다. 과거에 사는 이들이 현재와 미래를 얻겠다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이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스티야의 전사들은 레콩키스타의 경험을 토대로 결국 신대륙으로 진출해서 대제국을 건설하지 않았던가. 물론 시절이 지나 그들 역시 쇠락해 버리고 말았지만. 역사란 그런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500년 전에, 자신의 근거지를 버리고 물설고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건 더더욱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결국 이주나 개종 대신 알후다일에 남아 맹렬하게 돌진해 오는 기독교 병사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스러져간 우마르 가문의 최후는 더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4년 만에 다시 만난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는 여전히 슬프고 아름다웠다. 구성과 주제 그리고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캐릭터들의 향연은 이 책이 고전에 반열에 들기에 조금도 부족한 점이 없다고 증언한다. 책은 절판된지 오래다. 이렇게 좋은 책이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바로 타리크 알리 이슬람 퀸텟의 유이한 생존자 <술탄 살라딘>을 바로 읽기 시작했다. 원서로 <팔레르모의 술탄><황금 나비의 밤>도 구비해 두었다. 십 수 년 전에 근간 예정이었던 <돌기둥 여인>이 출간되지 않은 점이 너무 나 아쉽다. 원서로 구해서 읽는 시늉이라고 해봐야 하나 싶다.


[뱀다리] 소설의 엔딩에 에르난 코르테스(1485~1547)가 등장하는데, 고작 16살의 나이에 알후다일을 전멸시키는 임무를 맡는다. 그가 신대륙으로 넘어가 또다른 악행을 저지른 것을 지적하고 싶은 저자의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좀 무리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신대륙에 카스티야 세력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어인들의 식탁에 토마토 샐러드가 오르는 것 역시 역사적 오류라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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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2-03-02 09: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라나다에 4년 살았었는데 이런 책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꼭 방문하셔서 알함브라도 가보시고 도시 전체에 깔려 있는 석류 문양도 보시면 책이 또 다르게 읽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어인들이 번성할 때의 이야기는 많이 알고 있었는데 그 이후 이야기도 흥미롭군요.

레삭매냐 2022-03-02 10:42   좋아요 2 | URL
우와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가르나타에서 4년이나 사셨다고
하시니까요 ^^

잘 나가던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나는 이야기는 참
슬프고도 아름다웠습니다.

바람돌이 2022-03-02 09: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라콩퀴스타에 대한 무어인들의 관점이 궁금했는데 이 책이 바로 그 책이네요. 다 절판!!! 다행히 중고매장에는 나와 있어서 볼 수 있겠네요. 저에게는 이 글이 오늘자 득템같은 기분입니다. ^^

레삭매냐 2022-03-02 10:45   좋아요 2 | URL
아니 이런 책들이 왜 절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꾸준하게 발표해 주어야
하는데, 보아 하니 역자분
도 작업을 하신 것 같던데
말이죠.

부디 좋은 컨디션의 책으로
만나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mini74 2022-03-02 1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빌려왔어요 매냐님 ㅎㅎㅎ 그래서 살짝만 보고갑니다. ~~

레삭매냐 2022-03-03 11:35   좋아요 1 | URL
모쪼록 이런 좋은 책들이
널리 알려져서 많은 분들
이 읽으셨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절판된 게 흠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