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13 - 청불전쟁과 갑신정변 본격 한중일 세계사 13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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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한국 근대사를 공부할 적에,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를 보조 교재로 사용했다면 좀 더 역사적 사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이 시리즈를 보면서 하게 됐다. 서세동점의 시대, 왜 조선은 세계열강으로부터 국권을 지키지 못하고 몰락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부족이 근대사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게 했고, 결국 아주 오랫동안 알고 싶어하는 역사의 부분으로 그렇게 남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그 시절을 알게 된 점에 대해 굽니시스트 작가에게 이 자리를 빌어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시리즈 13권에서는 김옥균의 개화당이 주도한 갑신정변과 비슷한 시기에 멀리 안남에서 벌어진 청불전쟁에 초점을 맞춘다. 선조에 버금가는 머저리 임금 고종 시절, 중전 민씨 일파로 구성된 척족이 그야말로 권력의 중심에 서서 국정농단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성리학에서 그렇게 외쳐 대는 민생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열심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고나 할까.

 

민씨 일파를 중심으로 한 사대당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신진 개화당이라는 세력이 부상 중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무엇보다 사대당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신식군대 양성에 앞섰는데, 사대당은 교활하게도 그렇게 개화당을 자비를 들여 육성한 군대를 족족 자신들의 무력기반으로 활용하는 정치적 술수를 보여준다.

 

김옥균은 다음으로 호시탐탐 조선 진출을 노리는 승냥이 같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개혁을 위한 미래의 쿠데타를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한다. 당시 일본 역시 재정 긴축으로 김옥균이 요청하는 300만 엔의 거금을 갹출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일본 세비가 7,600만 엔 정도였다고 하니 풋내기 김옥균이 요청한 금액이 얼마나 막대한 금액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물론 그 중에서도 일본이 조선에서 세력을 확장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 금액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극우주의자들의 존재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개화당 일파들과 민씨 척족을 몰아내는 쿠데타 계획을 추진하면서, 김옥균은 일본 공사관 주둔 신식 군대 150명의 무력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본국과 연락을 주고받는데 3일이나 걸렸다고 하니 일각이 급박한 상황에서 본국의 훈령 없이 조선 주재 일본 공사관의 재량으로 쿠데타에 뛰어 들었다. 그랬다가 당시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원세개가 이끄는 청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그야말로 굽시니스트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발리고 말았다.

 

당시 쩌리였던 원세개가 거의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역사의 무대에 중심으로 단박에 뛰어 오르는 그런 형세였다. 당시 프랑스와 베트남에서 무력 대치 중이었던 청나라는 일본과 개전을 원하지 않았다. 어느 제국이나 양면전쟁은 부담스러울 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서구 열강과의 전쟁으로 청나라 재정은 거의 바닥을 드러낼 판이었다. 당시 청나라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이홍장은 일본과의 대결을 원하지 않았던 바, 갑신년의 난리부루스를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것으로 끝내기에 이른다.

 


아무런 대책 없이 일단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는데 급급했던 개화파 세력은 자신들의 쿠데타 명분으로 내세운 고종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는 통에 3일천하로 끝나고 만다. 임오군란과 테러로 수없이 갈려 나간 민씨 일족의 수장 민영익은 서구 의학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모지리 임금 고종은 가까스로 아버지 대원군의 입김에서 벗어나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민자영 일당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어쩌면 그들이 마뜩치 않았던 고종은 김옥균 개화파 일당의 쿠데타로 손 대지 않고 코풀 생각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쨌든 원세개의 지원을 받은 사대당이 다시 득세하게 되면서, 그나마 뿌리를 내린 개화파가 일소되고 말았다. 막부를 압도하는 무력과 실력을 보유한 지방 번벌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것과는 달리, 아무런 실력도 없이 그저 추상적인 계획과 불확실한 외세의 도움으로 시도한 개화파의 쿠데타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이 내렸다. 한성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에 빌붙어 개화파들은 모두 일본으로 망명하고, 국내에 남은 그들의 가족들은 역적의 가족으로 분류되어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 이제 다음 이야기는 갑신정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그리고 잘 몰랐던 베트남에서 벌어진 청불전쟁이다. 12권에서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이홍장이 잘 길러낸 청나라 해군을 박살낸 유럽 2진 프랑스는 이번에는 2개 여단을 투입해서 베트남의 정글에서 작전을 전개한다. 얼마 전에 너튜브 짤로 청룽 아저씨가 제작을 맡았는데 청불전쟁을 다룬 <용의 전쟁>을 봤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청불전쟁은 누가 봐도 중국의 전신 청나라가 말도 안되게 박살이 난 전쟁이었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국운의 영웅으로 등장해서 그들은 진남관 대첩이라 부르는 방어전을 치른 풍자재(67)를 등장시켜 외세를 격퇴하는 그야말로 국뽕이 차오르는 설정에 입맛이 썼다. 선을 넘는 중화민족주의를 실체를 언뜻 본 것 같다고나 할까.

 

한때 중화질서에 복속된 조공국이었던 류쿠와 안남(그리고 다음 주자는 조선이었다)이 차례로 번방에서 외세에 떨어져 나가는 상황을 청나라는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리라. 당장 조선의 임금 고종은 청나라가 무력하게 이 나라 저 나라에게 털리는 장면을 보면서 러시아에게 보호국이 되어 달라는 어이없는 요청을 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청나라는 그들이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 화이관에 입각한 동아시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병력과 재정을 불필요한 전쟁에 갈아 넣어야 했다.

 

역시 유럽의 2진 국가답게 프랑스는 연합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일본에게 불평등조약 개선과 기술 이전 그리고 군함 제공을 미끼로 청나라를 협공하자는 달콤한 제안을 날린다. 거의 넘어왔던 일본에서 제동을 건 인물이 바로 이등박문, 이토 히로부미였다. 정치적으로는 한창 로스께들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과 제휴해야 하고, 보불전쟁에서 군사적으로 프랑스를 발라 버린 프로이센과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는 일본과의 양동작전 크리를 타지 못하고 홀로 2개 여단을 파견해서 청나라의 대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초반의 약진과는 달리 중국 본토로 진공해서 풍자재가 지키는 진남관을 뚫지 못한 프랑스군은 결국 후퇴한다. 이 당시, 많은 프랑스 병사들이 말라리아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나 어쩌나.

 

굽시니스트 작가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당시 벌어지는 어떤 역사적 사건들도 단독적으로 발생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청불전쟁만 하더라도, 일본과 중국의 대결이 10년 먼저 발생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 놀랍지 않은가. 동아시아 경영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제정 러시아의 로스께들이 조선을 좀 보호해 달라는 고종의 제안을 덥석 물어 청나라를 대신해서 조선의 보호자를 자처했다면, 조선 진출의 꿈을 꾸고 있던 일본과 20년 먼저 붙을 수 있었을까? 영국이 아직 일본을 그레이트 게임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던 시절, 러일전쟁이 벌어졌다면 일본은 유럽의 강국 러시아에게 완패당하지 않았을까? 이러저러한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이면에는 이렇게 상호간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에 더해 우연이라는 극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음 편의 타이틀은 거문도 위기라고 되어 있는데, 더 흥미진진해지는 풍운의 동아시아 삼국지의 출간을 기대해 본다.


[뱀다리] 굽시니스트 작가는 <용의 전쟁>에 나오는 허접한 CG를 지적하며 분명, 누군가가 슈킹했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을 도출해냈다. 청룽 선생은 굽작가의 조언을 따를 것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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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6-07 11: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공부의 흥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이런 책을 함께 읽으면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ㅎㅎㅎ 레삭매냐님께서 이 책 시리즈로 계속 올려주고 계셔서 관심이 가네요. 말씀하신대로 어느 것도 하나의 사건이 단독으로 벌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2-06-07 11:30   좋아요 2 | URL
굽작가가 구도하는 대로,
왜 이런 역사적 사건이 발생
하게 되었나의 연원을 추적
하면 보다 쉽게 역사에 접근
할 수 있었을 텐데...

마냥 연도 외우고 그러니
호기심이 생길 여유가 없었
던 것 같습니다. 사실 역사
적 사건의 순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데 말이죠 ㅠ

바람돌이 2022-06-07 21: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항상 갑신정변의 주역들의 내면이 궁금하더라구요. 이들은 북촌 5인방이라고 불리면서 천재로 불리던 누가 봐도 다음 세대의 권력의 핵심이 될 인물들이었잖아요. 사실 저 갑신정변에서 그들이 죽인 인물들은 전부 아빠 친구, 친구 아빠, 용돈 주던 옆집 아저씨 이런 사람들이거든요.

레삭매냐 2022-06-08 11:29   좋아요 1 | URL
저도 이번 시리즈 보면서 북촌
5인방에 대해 읽기는 했는데
대충 읽어서 이번에 다시 찾아
봤네요.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서재필이 그들이었네요.

말씀 대로 급진 개화파들이 타
격한 이들이 모두 ~

구한말 시기에 대해 좀 더 공부
해야할 것 같다는 이 책을 읽으
면서 들었습니다.

mini74 2022-06-08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촌 5인방, 최고의 금수저들, 저도 궁금하더라고요. ~ 좋아하는 시리즈, 아이도 그런말 했어요. 중 3때 근대사 배울때 이 책을 봤으면 훨씬 재미있었을거라고.

레삭매냐 2022-06-08 13:23   좋아요 1 | URL
무언가 더 알고 싶게 추동
하는 글이야말로 쵝오의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굽작가의 한중
일 세계사는 일품이지요.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금수저 5인방의 말로는 좀
그렇더군요.

홍영식 - 갑신정변 당시 사망
김옥균 - 고종이 보낸 자객에
게 암살, 능지처사
박영효 - 친일파로 변신
서광범, 서재필 - 미쿡인

독서괭 2022-06-13 1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전 항상 역사를 잘 모른다는 것에 죄책감이랄까, 좀 공부를 해야할텐데 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데, 근대사 공부하기에 좋은 책 같습니다. 일단 만화고 ㅎㅎ 그림에 동물 얼굴이 귀여워서 맘에 드네요 ㅎㅎㅎ <토지>에도 역사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이 시대 역사를 더 잘 알면 더 재밌겠다 싶었어요.

레삭매냐 2022-06-13 13:09   좋아요 2 | URL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

저도 이웃 일본의 메이지 유신
시대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책
들을 만나다 보니, 정작 울나라
근대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더라구요.

굽작가 덕분에 당대 역사를 알
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만화라는 점이 ㅋㅋㅋ
 
켈트의 꿈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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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늘 도착한다. ‘요사‘스러운 로저 케이스먼트의 이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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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데나의 세계
뫼비우스 지음, 장한라 옮김 / 교양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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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그래픽노블은 도서관을 이용한다. 사실 아주 어지간한 작품이 아니라면 소장가치를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그래픽노블의 출간을 찬양하면서도 막상 내 돈주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항감을 느끼지 않나 싶다. 이율배반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어제 주말 행사가 된 도서관 방문에서 그래픽노블을 몇 권 빌려 왔다. 그 자리에서 바로 읽기 시작한 책이 바로 뫼비우스 작가의 <에데나의 세계>였다. 우선 25,000원이라는 가격에 놀랐고 그 다음에는 작가의 불친절함에 놀랐다. 처음부터 대놓고,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경고문이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다. 그러니 읽을 사람은 읽고, 또 무한한 해석의 자유도 동시에 배부된 거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4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에데나 세계관을 읽고 나서도 과연 내가 무엇을 읽었나 그리고 도대체 뫼비우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알지 못하겠다고 고백해야겠다. 자신이 어려서 잃어버린 잠수함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주로 향한다.

 

우주여행을 하는 두 명의 우주비행사 스텔과 아탄. 이들은 우주선 고장으로 불시착하게 되고 중성적이었던 그 둘은 그 항성에서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진화(?)하게 된다. 그리고 아타나가 된 아탄에게 들이대던 스텔을 버리고 아타나는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만다. 이 부분에서는 성경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의 스토리가 생각나지 않는가. 그 항성이 공기 호흡을 할 수 있고, 사과나 체리 같이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있다는 점 그리고 사자가 나타나 그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점 등이 눈길을 끈다. 다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로 돌아가, 그렇다면 그들을 창조한 창조주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피라미드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선택받은 인간 스텔이 탁월한 실력을 지닌 우주비행사로 선택받아 사람들을 끌어 모아 어디론가 출발한다. 떠남과 귀향의 서사는 왠지 호메로스의 오딧세이가 연상되기도 한다. 피라미드의 어딘가에 적혀 있는 바에 따르면,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던가. 이미 수천년 전에 선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사의 세계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말이다.

 

피라미드가 안착한 항성에는 둥지라는 곳에 코쟁이들이 살고 있었다. 오염된 외부 환경에 대해 거의 편집증적 증세를 가지고 있던 그들은 코끼리 코 같이 생긴 가면을 쓰고 있는데 이들은 아버지라 부르는 창조주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에게 사로 잡힌 아타나는 죽음을 맞던가. 그들에게는 언젠가 스텔과 아탄이라는 신들이 강림할 거라는 전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는 대로 서사를 이끌어 나가면서도 순서가 맞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내가 느낀 대부분의 서사는 그렇게 아버지에게 조종당하던 코쟁이들이 반란에 성공해서 마침내 자유를 되찾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에 따른 반동으로 다른 곳에서 새로운 둥지를 만든 도마뱀붙이의 조종을 받는 이들이 다시 한 번 스텔과 아타나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말미에 가서는 대사도 없는 복원의 서사로 마무리된다. 마지막에 이 일견 황당해 보이는 세계관을 펼친 뫼비우스 작가의 작업실이 등장하던가.

 

애초에 <에데나> 시리즈는 시트로엥사의 의뢰로 출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뫼비우스는 작가는 계속해서 그 세계관을 발전시켜 방대한 서사의 기초로 삼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구동하는 시트로엥 자동차의 우수성을 선전하고 싶었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한편, 혁명의 관점에서 본다는 각종 페이크 뉴스로 시민들의 자유를 억누르고, 시민에게서 위임받은 권력을 마치 자신의 사유물인처럼 행사하려는 아버지 일당에 대한 일격 그리고 그에 대한 반동 서사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적당량의 진실과 가짜를 섞어서 시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전술의 위력은 대단했다. 코쟁이들은 콧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다는 위협에 살기 위해 그 갑갑한 복장을 고집하지 않는가 말이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다양한 방식의 거짓 선동에 시달리다 보니 뫼비우스 작가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뫼비우스 작가는 그래픽노블의 상당 부분을 주인공들의 꿈에 등장한 것을 차용하는데, 작가가 구사하는 서사를 따라가기사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사실 그래픽노블의 중심 서사가 모호하다 보니,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있다. 자유로운 해석에 의존하다 보니 너무 자의적인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정답 없는 문제를 푸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자세하게 분석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건 나의 무지 탓이리라. 그냥 나는 단순하고 명징한 서사를 좋아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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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6-06 11: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단순, 명징한게 아직까지는 더 좋아요. 뫼비우스 작가는 자기 이름값을 하기위해 모호해진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드네요^^

레삭매냐 2022-06-06 22:56   좋아요 2 | URL
저도 핑계같지만 그렇지 않아도
복잡다단하고 케이오스로 가득
한 세상에서 더 이상의 어지러
움은 이제 그만!이라고 생각하
고 싶습니다.

뫼비우스에 그런 심오한 뜻이
쿵야!

그레이스 2022-06-06 11: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뫼비우스 작가 들어는 봤으나 읽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모호한 부분이 많다고 하셨는데 리뷰는 너무 잘 전달해주고 계시네요~^^
이 책을 만나게 되면 레삭매냐님 글이 기억날듯요!

레삭매냐 2022-06-06 22:57   좋아요 3 | URL
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는 후진 리뷰의
작성자가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립니다.

너에겐 작가의 원대함이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페넬로페 2022-06-06 13: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픽노블은 구매보다는 도서관을 이용합니다.
뫼비우스의 띠의 그 뫼비우스는 아닌것 같아 검색하고 왔어요.
sf작가이네요.
과학이 한없이 어려워지기 시작하면 제 머리는 아마 터질것 같아 저는 일단 통과해야겠어요 ㅎㅎ

레삭매냐 2022-06-06 22:58   좋아요 3 | URL
작년에 출간 소식을 듣고
기대하고 있다가 망각해
버렸지요.

그리고 지난 주중에 문득
생각이 나서 어제 빌려다
읽었는데 호곡! 저 같은
SF 문외한에게는 증맬루.

그랬다고 합니다.

mini74 2022-06-06 13: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요번에 개봉하는 모비우스 떠올린 ㅎㅎㅎ 전 읽다가 길을 잃을듯 합니다 ㅠㅠ 검색해보니 하야오가 극찬했다던데, 하야오가 영화로 만들면 인물들이 동글동글해지려나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2-06-06 23:02   좋아요 3 | URL
우와 무려 하야오 선생이
극찬한 작품이라구요 :>
대박이네요.

애니로 만들면 어떨까 싶
긴 하네요.

영화 모비우스는 살발~하
네요.
 
바닷가에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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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부터 열심으로 압둘라자크 구르나 작가들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낙원>에 이어 <바닷가에서>도 주파하는데 성공했다. <낙원>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는 독서여서 즐겁게 읽을 수가 있었다. 다음에는 <그후의 삶>에 도전할 생각이다. 그전에 지난달에 읽기 시작했지만 마무리 짓지 못한 <글록>부터 만나야지 싶다.

 

[스포일러가 한가득이오니,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원하지 않는다면 퍼더 리딩(further reading)을 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국 공항에 내린 라자브 샤아반 마흐무드가 난민, 망명을 요청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가 정확하게 어디라고 말은 하지 않지만 독자들은 라자브가 구르나 작가의 문학적 페르소나로 그가 잔지바르/탕가니카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무심, 그러니까 계절풍에 실리듯 라자브는 고국에서 위협받을 수도 있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며 난민을 자처한다.

 

오래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하는 이들이 많다. 시리아와 리비아 내전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 유럽으로 향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목숨을 걸고 지중해 바다를 건너다 마주하게 되는 비극적 뉴스도 자주 들린다. 그들에 비하면 라자브 샤아반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티켓 판매자의 조언에 따라 그는 영어를 할 수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숨긴다.

 

이국에서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었던가. 프리모 레비 역시 죽음의 절멸수용소에서 생존을 위해 독일어를 배우기에 전력했었지 아마. 초반부에 전개되는 라자브 샤아반의 내적 갈등에 대한 구르나 선생의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흑인 무슬림 노인의 자국 망명을 반길 영국인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영국인들 역시 자국의 경제 혹은 사회에 도움이 될만한 이들의 망명은 환영할 것이다. 동시에 자신들의 세금 부담 혹은 일자리 경쟁자는 또 원하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정치적 망명의 개인적 수용은 나의 이익을 반하지 않는 정도가 심리적 마지노선이리라.

 

고향에서는 나름 잘 나가는 가구상이었는데, 이역만리 영국에서 그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참 영어 단어 망명(asylum)에는 망명이라는 뜻 외에도, 정신병원(madhouse)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상당히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난민으로 망명하는 건, 결국 미친 짓이라는 걸까.

 

영국 입국 과정에서 라자브 샤아반은 입국심사관 케빈 에덜만에게 새로운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온 자신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유일한 귀중품 우드알카마리를 강탈당하기도 한다. 과거 식민지 시절, 탕가니카의 모든 자원을 수탈해 갔던 식민 지배자들의 후예들은 망명자의 알량한 소지품도 그냥 놔두질 않는다. 임시수용소를 거쳐 영국 바닷가의 작은 마을로 보내진 라자브는 난민담당관 레이철의 도움으로 자신이 살던 곳의 전문가로 알려진 라티프 마흐무드를 소개받는다. 라자브 샤아반은 라티프의 아버지 이름이었고, 그렇다면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 행세를 하는 현재의 라자브 샤아반은 누구란 말인가? 이런 미스터리한 요소들은 소설 <바닷가에서>에 한층 가독성에 대한 텐션을 끌어 올리는데 성공한다.

 

라자브 샤아반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망명 신청자들이 임시로 머무는 영국 가정으로 거처를 옮긴다. 임시수용소 동지였던 알폰소는 그에게 타월을 주었던가. 곳곳에서 라자브 샤아반이 마주하게 되는 망명 신청 동지들과의 인연들 그리고 그와 라티프의 30년도 더 된 오래전 악연들을 추적하는데 구르나 작가는 소설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바닷가에서>의 상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탕가니카의 건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책을 읽어 가면서 등장하는 1960년대 아프리카 제국(諸國)들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부족하마나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탄자니아의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는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54년부터 시작된 독립운동은 1964년 술탄국 잔지바르를 합병한 탄자니아의 건국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초대 대통령 니에레레의 강력한 영도력에 힘입어, 탄자니아는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종족 혹은 종교분쟁에 의한 내전을 겪지 않은 나라였다. 다만, 니에레레가 아프리카식 사회주의를 추종하며 산업화를 이루지 못하고 경제 발전이 뒤처지는 바람에 빈곤국으로 추락해버렸다.

 

이런 신생국 탄자니아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 구르나 작가는 살레 오마르(그렇다, 첫 번째 화자의 이름은 라자브 샤아반 마흐무드가 아니었다)과 마흐무드 집안의 오랜 악연들을 풀어 놓으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소설의 한 축을 살레 오마르가 차지하고 있다면, 그의 대척점에는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졸지에 잘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던 청년 라티프가 있다. 순식간에 생존을 위한 거처를 잃고 나락으로 추락한 라티프는 어머니의 추천으로 GDR(구 동독)로 가게 된다. 라티프가 탄자니아에서 살레 오마르에게 당한 수모들은 30년 뒤, 영국 바닷가의 소도시에서 자신이 들을 수밖에 없게 된 서사의 기반이 된다.

 

라티프가 독일에서 펜팔 친구를 만나게 되는 설정이 좀 작위적이긴 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디아스포라에 나선 아프리카 무슬림 청년의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본다면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지 않나 싶기도 하다.

 

탄자니아에서 승승장구하던 살레 오마르는 새엄마 비 마리암이 남겨준 집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결국 모든 건 시간에 따른 새옹지마라는 것이었을까. 서로 좋게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 때문에, 살레 오마르는 독립 후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 당국에 체포되어 11년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계속해서 끝나지 않는 비극 때문에 결국 그는 조국을 떠나 영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한다.

 

그렇게 오래 묵은 악연을 품고 각각의 디아스포라를 거쳐, 영국의 바닷가 소도시에서 만나게 된 라티프와 살레 오마르. 공통의 문제가 발생한 조국 탄자니아에서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식민 모국인 영국이라는 무대로 가져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 시절 아프리카 대륙의 독립운동가들은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순간, 그들에게는 지상낙원이 도래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식민지에서 독립국가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연착륙 스타일의 트랜지션이 필요했지만, 시간에 쫓긴 신생국의 위정자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황급하게 떠난 뒤, 남은 혼란과 무질서는 오롯하게 신생국 주민들의 몫이였다. 마흐무드 가족들에게 가해자로 비치는 살레 오마르가 어떻게 보면 억울하게 보일 수도 있는 옥살이를 십일 년이나 했다는 점에서 그 시절의 혼란이 명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마치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건너는 듯한 초중반의 신중한 전개와 달리 엔딩은 상대적으로 급작스럽게 처리된 점이 아쉬웠다. 오랜 시간을 두고 결국 마주하게 된 살레 오마르와 라티프 마흐무드. 라티프는 과연 살레 오마르에게 복수를 원했을까? 시간이 흐르고, 관련된 사람들도 거의 죽은 마당에 그런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라티프와의 대면에서 연장자답게 살레 오마르는 디아스포라 선배의 다음 수를 모두 읽고 대응하는데, 과연 고수의 짬바이브가 느껴지기도 했다.

 

<바닷가에서>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는데, 막상 리뷰에 담으려고 하니 상당수가 휘발해 버렸다. 아무리 메모를 하고 포스트잇을 붙이면서 책을 읽어도 실제 독서와 리뷰하는 시점의 간극은 멀기만 하다. <낙원>의 왕은철 역자가 점잖은 선비 같은 번역의 정석을 구사했다면, <바닷가에서>의 황유원 역자는 시인답게 뭐랄까 말맛을 살리는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바로 읽기 시작한 <그후의 삶>은 또 다른 역자가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한 명의 역자가 같은 작가의 작품들을 맡아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헤르타 뮐러의 경우는 정말 같은 작가가 썼나 싶을 정도여서 말이지. 보통 한 작가의 작품은 3권정도 읽어야 감이 잡힌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세 번째 권인 <그후의 삶>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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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6-04 10: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을.위해.하루 24시간을.따로.떼어 놓으신 거 같은 레삭매냐님..정주행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요!!

레삭매냐 2022-06-04 15:07   좋아요 3 | URL
어제는 졸려운 데도 꾸벅꾸벅
졸면서 읽었네요 ㅋㅋㅋ
누가 보면 고시 공부하는 줄 -
꾸벅,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2-06-04 17:17   좋아요 3 | URL
졸면서 책 보고
졸면서 유투브 보고

그게 제맛입니다

저도 어제 새벽 앰버허드 조니댑 유튜브 보는 줄 알았는데 졸고 있더라고요

정주행!! 계속 같이 응원하며 책 읽어요 레삭매냐님^^

미미 2022-06-04 10: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별은 3개주셨는데
리뷰는 별 4개~4개반 주신 느낌입니다😆

요즘 저는 읽는 도중에도 앞쪽
내용이 휘발되더라구요ㅠㅠ
어떤 짬바이브일지 결말이 너무 궁금합니다

레삭매냐 2022-06-04 15:08   좋아요 2 | URL
그랬나요? 그렇지 않아도
세 개는 좀 박하고 세개반
정도 생각했는데 말이죠.

역시나 대단하십니다 !!!

전 적어도 안되더라구요 ㅠ

바람돌이 2022-06-04 13: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벌써 3번째 권을 읽으신다니 정말 레삭매냐님 독서력에 박수 박수 👏👏
이 작가에게 별 3개는 의외네요. 그래도 저도 읽으려고 주문해서 어제 받았으니까 곧 읽어보겟습니다. ^^

레삭매냐 2022-06-04 16:24   좋아요 2 | URL
노벨상 프리미엄으로 별을
막 퍼주기는 왠지 그래서요 :>
한 개 정도는 ㅋㅋㅋ

요즘 갠춘한 책들이 마구 나
와서, 읽을 책들이 밀리고
있네요.

페넬로페 2022-06-04 14: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한 작가에 대해 정주행하기 쉽지 않잖아요.
낙원에 비해 별 세개를 주셨네요.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리뷰 쓰기는 언제나 어려워요^^

레삭매냐 2022-06-04 16:34   좋아요 3 | URL
저는 아무래도 <바닷가에서>
보다는 <낙원>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리뷰 쓰기는 참 쉽지 않아
미션이네요. 쓰고 나서도
고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불쑥 나고 그러네요.

mini74 2022-06-04 2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댓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노벨상 프리미엄 ㅎㅎ 왠지 큰상 받은 작품은 별을 더 줄거 같은데 !!! 매냐님의 소신 👍 낙원 더 좋으셨다니 전 낙원으로 한 번 시작해볼랍니다 ㅎㅎ 고맙습니다 매냐님 *^^*

레삭매냐 2022-06-05 19:38   좋아요 1 | URL
그래두 왠지 -
대가의 작품이라고 꿇리면 안돼!
하는 마음이 들어서 좀 더 냉정
하게 고고씽...

그나저나
주말에 독서를 더 못하게 되네요.
 
공무원 생리학 인간 생리학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류재화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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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대선 때, 추운 날씨에 투표소 앞에서 벌벌 떨면서 기다린 교훈으로 이번에는 가뿐한 마음으로 사전투표를 했다. 항상 사전투표를 해왔는데 말이지. 오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관심은 없겠지만 오늘 점심은 간짜장을 먹었다)에 선거운동을 하던 시의원 후보의 명함을 받았는데 상머슴이라고 적혀 있어서 좀 놀랐다. 더 놀란 건, 진짜 지게까지 진 상머슴 복장이었기 때문이다. 손에는 당선지팡이를 쥐고 계셨다.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는데 그네들이 상머슴 행세를 하는 건 이렇게 선거 전날 며칠 뿐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가 그렇게 끝나고 나면 그들의 모습은 전혀 볼 수가 없다. 무얼 하는 지도 잘 모르겠고.

 

근 한 달을 끌던 소설기계 오노레 드 발자크 선생의 <공무원 생리학>을 완독하는데 드디어 성공했다. 월초에 갔던 속초여행에도 데려가서 읽던 책이었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다. 발자크 선생이 활약하던 시절에도 공무원 그러니까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하면 관료들의 모습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보니 프랑스에 국왕이 있던 시절, 국왕도 급여를 받는 공무원이라고 했던가. 중앙집권국가에서 공무원과 관료제는 반드시 필요한 그런 인원과 시스템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과거제로 관료들을 천년 이상 그렇게 선발했다. 요즘으로 치면 고시에 해당하는 과거를 패스하면 그야말로 성공길이 보장되었다. 물질과 명예가 둘 다 따라온다고나 할까.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공무원들을 어떻게 선발했더라. 서두를 읽은 지가 오래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팔색조 같은 모습을 보여준 우리의 팔색조 같은 발자크 선생은 그야말로 요즘으로 치면 모두까기의 달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보니 또 누가 생각이 나는구나. 정치적 변신은 자유라지만, 공화정 지지자에서부터 제정과 입헌군주제까지 두루두루 변신한 발자크 선생을 어느 카테고리에 가둬 두기란 참 난망하지 싶다.

 

그렇다고 해서 발자크 선생의 신랄한 공무원 비판이 색을 잃는 건 절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들의 보신주의는 대단하다. 그러니까 무사히 자신들의 임기를 마치고 퇴직해서 연금을 받으면서 사는 게 그들의 작은 소망이라고나 할까. 또 한 가지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공무원 중에는 글을 쓰는 작가도 있더라는 것이었다. 글 쓰는 공무원이라, 그것 참 신박하지 않은가. 그런데 동방의 어느 나라처럼 블랙리스트가 횡행하는 나라에서 글 쓰는 공무원이 있다면 자연스레 어용으로 흐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공무원에도 레벨이 있기 마련이다. 루이 14세 시절부터 있다는 장관의 유구한 역사를 미처 몰라봐서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재정을 다루는 재무부가 역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지 않았나 싶다.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재정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회사에서도 돈을 다루는 재정팀이 막강하듯이 여러 국가 부처 중에서도 재무부가 필연적으로 힘이 셀 수밖에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아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겠지만, 발자크 선생은 국장, 실장 그리고 맨 밑의 공무원 계급으로 사환을 들고 있다.

 

그 시절에도 공무원 급여는 박봉이었던 모양이다.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도 한 동안, 연금과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공무원 시험에 수많은 천하의 인재들이 몰려 고시에 육박하는 그런 열과 성을 다했지만 이제 그런 시절도 다 지나간 모양이다. 나는 그동안 공무원들에게는 퇴직금이 없다는 사실도 몰랐다. 최근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는 좀 놀랐다. 한편, 발자크 선생도 보통 기업의 직원들이 그 능력 면에서는 프랑스 국가의 수많은 공무원들이 하는 일을 능가한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아니 이러다 작은 정부와 민영화 좋아하는 이들이 공무원들마저 외주해서 민영화한다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도 해괴한 일들이 일상처럼 벌어지다 보니, 예전에는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들도 먼 훗날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후기를 보니 발자크 선생이 생리학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던 시절은 18307월 혁명부터 18482월 혁명까지의 시간들이라고 한다. 왕정, 공화정, 제정 그리고 입헌군주정으로 격변하는 시기의 모습들을 발자크 선생은 예리하게 짚어냈다. 이 소설기계 양반은 이미 프랑스혁명 이전부터 프랑스 사회에 자리 잡은 공무원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들의 본질을 파악했다면,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거라는 유추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발자크 선생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양태와 궤적을 보이는 그네들의 모습을 짚어내는데 성공했다. 아울러 사진 대신 <공무원 생리학>에 삽입된 다채로운 삽화들은 발자크 선생의 놀라운 성찰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거가 내일이다. 시민의 상머슴을 자처하는 이들이 모쪼록 당선되어, 우리에게 한 약속들을 이행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공약은 공약일 뿐, 지키지 않는다면 또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다만 스스로의 양심에 어긋나는 상머슴이 되지 않았으면 싶다. 손에 쥔 당선지팡이가 부끄럽지 않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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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5-31 16: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선거용 보여주기식 행위가 너무 눈에 보입니다. 신문을 보니 선심성 공약이 도가 지나쳐 말도 안되는 발언들을 내뱉고 있더군요. 무얼 주장하든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태도는 바뀌어지 않아야 할텐데 늘 그렇듯 회의적이지요. 내일이 선거네요! 모쪼록 그 와중에 더 나은 인물들이 뽑히길 바라봅니다.

레삭매냐 2022-05-31 17:21   좋아요 3 | URL
이상한 후보들이 하도 많아서
발라내기가 쉽지 않아 보이네요.

선거 전과 후가 너무 다르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바람돌이 2022-05-31 16: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발자크 시절의 공무원, 완전 격변의 혁명기네요. 그걸 오늘날의 공무원과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있겠어요. ㅎㅎ 저기 저 무사히 퇴직해서 연금받고 사는게 꿈이라는 구절에서는 흠칫했어요. 앗 내 얘긴데... 이러면서요. ㅠ.ㅠ
아 진짜 내일은 선거하러 가기 엄청 싫은데 그래도 가야죠.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게 선거다라는 말을 또 되풀이하면서 말이죠. ㅠ.ㅠ

레삭매냐 2022-05-31 17:25   좋아요 2 | URL
200년 전의 공무원들이나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
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기계 선생의
성찰에 경의를 !

그러니까요. 도긴개긴이다 보
니 후보들 간의 변별성이 거
의 없어 보입니다. 씁쓸하네요.

mini74 2022-05-31 17: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첫직장이 공무원. 월급이 삼십만원이 안됐나 ㅎㅎ조카가 8명인데 첫월급타면 용돈준다고 큰소리는 쳤고 ㅎㅎ결국 엄마한테 가불받은 기억이 납니다ㅠㅠ상머슴이 동네양아치로 변신만 좀 안하면 좋겠다는 맘입니다 ㅎㅎ 매냐님 마지막 문단 넘 멋집니다 !!!

레삭매냐 2022-05-31 17:28   좋아요 3 | URL
조카분들이 오매불망 기다린
용돈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
이 나오네요.

그래도 가불까지 하셔서 약속
을 지키셨다니 짱이십니다 정녕.

그런데 전 왜 자꾸만 상머슴이
아닌 동네O야치로의 변신이 연상
될까요. 감사합니닷 !

새파랑 2022-05-31 17: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무원의 생리는 진리군요 ^^ 전 발자크는 <미지의 걸작> 만 읽어봤는데 아주 좋았거든요. 근데 다른 발자크 책들은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 책 읽는데 한달이 걸리셨군요 😅

레삭매냐 2022-05-31 17:52   좋아요 3 | URL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이책저책 찝적거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발자크 샘의 책들 읽어야
하는데 도통 연이 닿질 않
았네요. 자매작인 <기자
생리학>도 만나 보고 싶
습니다.

coolcat329 2022-05-31 18: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기 어렵진 않나요?😅
제목이 좀 난위도가 높아보여서요.ㅋ

레삭매냐 2022-05-31 18:54   좋아요 3 | URL
소설기계 양반이 워낙 유머가
넘치시는 분이라, 당대 공무원
들의 삶을 적절하게 풀어주셔
서 어렵지 않게 만났답니다.

왕정-공화정-제정-입헌군주정
등의 격별하던 시기에까지 들
어가게 된다면 좀 더 연구해
볼만하지 않나 싶기도 하구요.

페넬로페 2022-06-01 01: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기자 생리학을 읽었는데 공무원 생리학도 있군요. 예나 지금이나 그들의 생리가 비슷해 쓴웃음이 나네요.
어찌 벌써부터 선거의 패배가 예상되어 힘이 빠지지만 그래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겠지요^^

레삭매냐 2022-06-01 09:35   좋아요 2 | URL
넵, 저도 <기자 생리학> 도전
해볼 생각입니다.

선거는 참... 그렇네요.
선거 소음이 싹 사라진 평화
로운 아침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