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그레이프
피터 헤지스 지음, 강수정 옮김 / 막내집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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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보다 먼저 영화를 접하게 됐다. 사실 영화를 볼 때만 하더라도 책을 원작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는 피터 헤지스가 1991년에 발표한 책으로, 영화는 2년 뒤에 스웨덴 출신의 감독 라세 할스트롬이 메가폰을 잡고 만들어졌다. 영화도 괜찮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책을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역시 영화의 요소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말하는 현실세계의 가시성이, 책이 주는 문학적 감성을 도저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아이오와 디모인 출신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보통 처음 만나게 되는 인사인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을 때 선뜻 어디 출신이라고 말하길 꺼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시골 촌동네인 디모인보다도 훨씬 더 시골인 엔도라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주인공은 올해 24살로 램슨 식품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가족들을 부양하는 길버트 그레이프다. 한창 세상에 대한 꿈을 꿀 좋은 시절에 길버트는 가족이라는 굴레에 철저하게 매여져 있다.

피터 헤지스는 길버트와 더불어 그의 17살 난 지적 장애우 동생 어니를 동시에 등장시킨다. 길버트는 진심으로 자신의 동생을 사랑하고 있지만, 대개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그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른다. 하긴 큰누나 에이미 역시 가족에 대해 최고의 사랑과 헌신을 베풀지만 그 감정들은 어느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17년 전에 자살한 아버지와 그 이후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집에서 폭식과 운동부족으로 하루가 갈수록 살이 쪄만 가는 엄마 보니가 있다.

이미 그레이프 집안의 큰 아들 래리는 집을 떠났고,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어니의 생일에만 얼굴을 비춘다. 길버트의 또 다른 누나 제니스는 그레이프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항공사의 스튜어디스로 근무하고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막내 엘렌은 길버트에게 또 다른 골칫거리다. 이 7명의 그레이프들이 빚어내는 슬프면서도 매혹적인 이야기들은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해 진지한 질문들을 슬며시 내어 놓는다.

그리고 길버트에게 남을 사랑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미스터리한 소녀 베키가 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굴레 속에서,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그런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길버트에게 베키의 존재는 ‘천사’ 그 자체이다. 그녀의 키스 한 번에 길버트는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감에 젖어든다. 세상이 길버트를 속일지라도, 그는 그녀의 존재로 인해 행복해 한다.

영화에서는 줄리엣 루이스가 베키 역을 맡았는데, 책과 상당히 다른 이미지여서 조금 실망스러웠다고나 할까. 영화에서는 좀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면서도, 미스터리한 점을 가진 역할로 그려지는 베키가 영화에서는 그 세부묘사에 있어서 실패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그런 캐릭터상의 문제라면 아예 길버트의 또 다른 누나인 제니스는 삭제되어 버렸다. 그리고 길버트의 존재감 없는 삶을 더 한층 초라하게 만드는 엔도라의 유명인사 랜스 닷지 역시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에서나, 성인이면서도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진 길버트의 묘사는 탁월했던 것 같다. 물론 영화에서 주연 배우 역할을 맡은 자니 뎁의 캐스팅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지적 장애우 어니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 연기를 위해 실제 지적 장애우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고 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길버트의 관점에서 진행하는 이야기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자신도 형 래리나 누나 제니스처럼 엔도라를 떠나고 싶은 충동 사이에서 갈등을 어니의 18번째 생일 파티의 시간적 배열과 동일선상에 배치하면서 멋지게 그려내고 있다.

그레이프 가족이 보여 주는 문제들은 그야말로 실마리를 풀 수 없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서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비롯된 불행의 그림자는 엄마 보니의 비만 그리고 통제 불능의 지적 장애우 어니의 존재로 나머지 그레이프들에게 그늘을 드리운다. 가족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려고 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에 염증을 내고 있다.

확실히 영화에서는 제한된 상영 시간 때문인지 책보다 진행의 템포가 빠르다.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등장인물들의 풍부한 감정묘사들은, 비주얼이 보여주는 극적 요소들로 대체된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는 마을에 있는 워터타워에 어니가 두 번이나 올라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보안관이 어니를 단 방에 구치소로 끌고 간다. 그리고 피터 헤지스가 지적했듯이 가장 중요한 장면 중의 하나로 꼽은 어니 일병 구출작전은 지난 3년간 외출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고래엄마 보니가 지휘한다. 사실 이 장면은 소설보다는 영화의 연출이 뛰어났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푸드랜드와 버거반으로 대표되는 물질만능주의 역시 대량소비 시대에 편리와 작은 마을 엔도라 고유의 정신이 충돌한다. 길버트의 고용주인 램슨 식료품점의 사장 램슨 씨는 양심과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지역 공동체와 애환을 같이 한다. 하지만 라이벌 푸드랜드는 오로지 판매와 능률만을 추구한다. 어쩌면 그런 푸드랜드에 길버트가 출입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니가 에이미 누나가 정성껏 만든 자신의 18번째 생일케이크를 망쳐 놓자 어쩔 수 없이 생일 케이크를 사러 갔다가 램슨 씨와 마주치는 장면 역시 삶의 아이러니를 정확하게 포착해 내는 순간이었다.

겉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작은 마을 엔도라지만, 그 안에서도 역시 요지경 같은 인간사가 펼쳐지는 것도 빼놓을 수가 없겠다. 마을에 유일한 보험회사 사장인 켄 카버는 자신의 직원 멜라니와 외도를 하고, 그의 부인 베티 카버는 7년째 길버트와 불륜 관계에 있다. 엔도라 주민들이 다녔던 고등학교는 학생 수가 적다는 이유로, 폐쇄되고 결국 소방연습으로 불타 버리게 된다. 잊혀 가고 사라져 가는 장소에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 꿈도 희망도 요원할 따름이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길버트 그레이프>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가정이길 소망한다. 그레이프 가족은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피폐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상적으로 보이는 가정들도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적 장애우 어니가 더러운 몰골로 트램펄린에서 펄쩍펄쩍 뛰며 행복해 하는 순간이야말로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길버트의 천사 베키는 길버트에게, 자신을 사랑해야 다른 이들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아주 쉬운 비밀을 알려준다. 쉬운 길을 멀리 돌아온 나그네처럼 길버트는 자신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삶의 행복들을 찾아 가기 시작한다.

지금도 자신들이 처해 있는 수많은 고민들과 씨름하고 있을 길버트들에게 격려 한 마디.
세상이 너를 속일지라도 힘내라구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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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General Manager) 2차전 GM(General Manager) 2
최훈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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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웹툰으로 유명한 최훈 작가의 본격 야구계 그 중에서도 트레이드와 구단 경영을 다룬 만화 GM (General Manager) 2차전이 나왔다. 이미 전편을 통해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설명들이 자세하게 소개됐다. 그리고 우리나라 현 야구 판을 보는 것과 같은 현장감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GM 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이미 최훈 작가가 그전의 신문지상과 웹툰 연재를 통해 갈고 닦은 인물들이라 그런 진 몰라도 나름 색깔들을 가지고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전작에서 만년 하위 팀인 수원 램즈의 신임사장으로 부임한 이윤지는 공격적인 전략으로 당장에 램즈에게 우승컵을 가져 오고자 한다. 미스터리한 배경을 가진 그녀는 구단 사장의 딸이면서도, 선수 트레이드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 만화의 진짜 주인공은 램즈 팀의 전략분석가 하민우 대리다. 예전에는 끗발 날리는 현역 선수였지만 프로에 진출한 후 어깨고장으로 젊은 나이에 은퇴한 후, 램즈 구단에서 일하고 있다. 그 외에 최고의 FA로 꼽히며 시장에 나온 강타자 장건호가 버티고 있다. 모든 구단들이 탐을 내는 장건호 영입에 램즈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장건호 쟁탈전에 뛰어든다. 이윤지 사장은 하민우 대리에게 장건호 영입 프로젝트를 맡긴다. 이 정도가 전작의 간략한 줄거리가 되겠다.

1차전에 이어 2차전에서는 본격적인 단장/사장들의 두뇌게임에 들어간다. 어떻게 하면 최소한 비용을 들여, 자신들의 전력을 약화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전력을 강화하느냐가 관건이다. 보통 팬들은 시즌 중에만 관심을 가지지만 열혈 팬들은 이미 오프시즌부터 내년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 들어간다. 그래서 오프시즌을 다른 말로는 스토브 시즌(Stove Season)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만큼 뜨겁다는 말일게다.

우선 램즈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카드라고 할 수 있는 극강의 마무리 손대범을 이용해서, 게이터스의 유망주들을 싹쓸이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돌핀스의 천재 단장 은종오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말이다. 누가 봐도, 은종오의 모델은 미국 메이저리그 오클랜드를 수년간 적은 예산으로도 스몰마켓팀의 한계 가운데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던 빌리 빈 단장의 그것이었다.





한편 주전 마무리 투수를 트레이드한 램즈의 팬들은 분노하고, 그 중에서 야구용품 쇼핑몰을 운영하는 열혈 팬은 구단 버스에 방화까지 하려고 한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해서 하민우 대리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최고타자 장건호. 독자들을 궁금하게 하는 스토리라인은 계속 진행된다. 이윤지 사장은 하민우와 애리를 광주로 파견해서 역시 FA로 풀린 박종연의 스카우트를 명령한다. 복잡한 관계가 얽힌, 박종연의 사연을 풀어 왔지만 오히려 사장으로부터 나무람만을 듣는 하민우. 게다가 이런 스토리에서 빠질 수 없는 애리와의 러브 스토리 라인까지 더해져서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진다.





이 만화의 기본 핵심은 바로 미스터리에 있다. 미국의 유명 컨설턴트 출신으로 램즈를 최고의 구단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고, 움직이고 있는 이윤지 사장의 정체는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FA 장건호 역시 그녀와 같은 지향점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자신의 그것은 다르다고 항변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하민우 대리는 좌충우돌하면서 자신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다. 마치, 장기판의 놓인 말들처럼 철저하게 전략의 한 부분으로써 움직이는 걸까?




하지만 이야기들을 한 꺼풀 벗겨 보면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 야구도 엄연한 비즈니스이다. 하지만 매우 인간적인 요소들이 가미되어 있어서, 쉽게 계산적으로만 움직일 수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팬들과의 관계는 더더욱 그렇다. 수년간, 팬과 선수 그리고 팀으로 짜여진 무형의 관계가, 우승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뛰는 구단 경영진과 불화를 빚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또 한 가지, 기록의 경기라 불리는 야구의 통계를 통해 개인의 성향과 사생활의 문제점까지도 밝혀낼 수 있다는 작가의 아이디어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물론 가정과 사실의 경계점에 닿아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아주 매력적인 설정이었다.

앞으로 최훈 작가가 진행시킬 이야기의 향방이 점점 더 궁금해지게 만드는 ‘2차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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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신윤복
백금남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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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을 가지고 쓰는 팩션이란 장르는 매우 유혹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양날의 칼 같은 느낌이다. 얼마 전, 읽었던 로버트 해리스의 <임페리움>의 경우에 마르쿠스 키케로의 생애를 그리면서 작가의 내공이 느껴질 정도의 치밀한 고증이 상상에 날개를 달아주었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할 <소설 신윤복>의 경우는 어떨까?

2008년 문화계를 휩쓸고 있는 키워드는 바로 신윤복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바람의 화원>이, 영화에서는 <미인도>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시류에 편승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서로의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나름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조선 후기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였다는 영정조 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 그리고 혜원 신윤복의 일대기가 백금남 씨의 구성에 의해 재탄생되었다.

궁금한 것은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강세황-김홍도 그리고 신윤복의 관계가 정말로 큰스승-스승 그리고 제자의 관계였냐는 것인데, 아마 책의 제목에 붙어 있는 대로 “소설”이라는 단어가 이런 논쟁을 슬쩍 비켜나게 해주지 않았나 하는 추론을 해본다. 영조 대에 사도세자와 더불어 풍류를 즐겼던 강세황은 장차 보위를 이을 세자의 총기를 흐리게 하는 환쟁이라는 누명을 쓰고 영조 앞에서 진검승부를 펼쳐 보이게 된다. 그의 출중한 실력에 감탄하는 영조는 그에게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나, 강세황은 짐짓 사양한다.

중국 남종화의 영향을 받은 강세황은 사실보다는 마음을 그려야 한다는 전통적인 문인화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시서화(詩書畵)의 조화를 이루고 먼저 예인(藝人)은 인격을 수양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며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단원은 그 스승의 도를 깨우치고, 풍속화를 그리면서도 속기(俗氣)를 배제한 자신만의 일가를 이루어간다. 반면, 역시 강세황과 스승 단원으로부터 그 뛰어난 재기를 인정받지만, 춘화를 그렸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와 몰락한 집안의 한을 그대로 이어받은 혜원은 직접적인 사물을 묘사하고, 당시 지배층이던 사대부 양반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그림들을 그려낸다.

시대정신의 발로인지 절대군주 정조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춘화들은 민간에서 계속해서 범람하고, 걷잡을 수 없을 수준에 다다른다. 한편, 단원은 자신의 제자 윤복에게 한(恨)을 가르치기 위해 최북 선생에게 애제자를 의탁한다. 스승 단원은 서치홍포, 쥐와 무가 그려진 그림을 불가에서 화두(話頭)를 던져 주듯이 내주며, 쥐와 무외에 다른 그림이 있다는 언질을 주며 윤복에게 깨달음을 얻으라고 주문한다.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일가의 도를 깨우치기 위해 정진하는 표암이나 단원과는 달리 끓어오르는 젊음과 가족의 한에서 비롯된 정념을 안고 사는 윤복에게 그림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게다가 집안이 몰락하면서 어쩔 수 없이 기녀가 된 누이와, 어려서부터 정분을 나누던 애인 송이와의 만남으로 빚어지는 상황 앞에서 윤복은 화원에서 그림만 그릴 수가 없었다. 결국 임금조차 말릴 수 없었던 윤복의 일탈이 시작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는 더 이상 읽지 않게 된 ‘이문열’의 <금시조>가 떠올랐다. 그 글에 보면, 그림에 일가견이 있는 고죽을 그의 스승 석담 선생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비인부전(非人不傳: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겠다)의 왕희지의 일화가 <소설 신윤복>에서도 반복됨을 느꼈다. 옛 선인들은 그림을 그리는 재주보다도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으로 대변되는 서화의 정신으로 쳤다. 그런 점에서 신윤복은 기예는 뛰어나지만, 서화의 정수에 득도하지 못하고, 지나친 속기가 그의 기예마저 망친다는 표암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

팩션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는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을 가지고, 그 사실 중에 빠진 부분들에 작가의 상상력을 채워 넣는다는 점이다. 신윤복의 생애도 그가 그린 그림들 말고는 상당 부분에 물음표가 찍혀져 있다. 작가의 입장에서 이렇게 좋은 소재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러니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는 심지어 그가 여자라는 주장까지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소설 신윤복>에서는 불가한 이야기다. 조선조 여성성을 그리기 위해서라도 그의 존재는 반드시 “열혈대장부”여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바람의 화원>과 <미인도>의 대척점에 서 있다.

등장인물들의 세부묘사와 곳곳에 포진해 있는 지금도 볼 수 있는 그림들에 대한 설명들의 조화는 팩션 장르가 가진 장점을 만개해 주었다. 하지만 팩션에서 더 나아가 김홍도가 일본에 건너가 우키요에의 대가를 이룬 도슈샤이 샤라쿠라는 주장은 너무 많이 나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고증에 근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윤복의 사형으로 등장하는 김득신의 경우에는 17세기에 살았던 이로 화적 떼에게 살해된 김득신과 화가 김득신 동명이인을 한 사람으로 만드는 오류를 범했다. 이것은 명백한 실수인데, 작가가 어떻게 대답할지 못내 궁금하다.

그리고 김응환과 단원이 일본 지도를 그려 오라는 정조 임금의 명을 받고 대마도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하는데, 네이버의 백과사전에서는 부산에서 죽었다고 나온다. 그 외의 연풍현감 발령 등의 시간적 구성에서도 역사적 사실과는 많은 차이점들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전가보도의 무기처럼 이 책은 “소설”이다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말이다.

인간사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처럼 애증으로 점철된 관계도 또 없을 것이다. 스승에게 배우지만 스승의 그림자를 뛰어 넘어야 하는 것처럼 어려우면서도 반드시 이루어야하만 하는 일도 드물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들이, 청출어람의 고사처럼 문화와 예술의 지속적인 발전을 담보하는 정수일 것이다. 회화가 품고 있는 정신세계의 구현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현현시키겠다는 아티스트로서의 자긍심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 고통의 순간, 혜원은 궁극의 깨달음을 얻으면서 자신의 필생의 역작을 탄생시킨다. 지은이가 표현한 대로, “조선의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책을 읽으면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확실히 재밌는 책이긴 하지만, 팩션 장르에서 주는 즐거움만큼이나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보다 철저한 고증의 부족과 연대기적 시간 구성의 결여에서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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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세계사 - 지금의 세계지도와 역사를 결정한 59가지 전쟁 이야기
김성남 지음, 진선규 그림 / 뜨인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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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무엇일까? 독일의 유명한 군사전문가인 클라우제비츠에 의하면 전쟁은 고도의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한다. 정치적으로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았을 때, 최후의 방법으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그 유명한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자도,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야말로 상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인류사에서 전쟁은 필요악처럼 그렇게 존재해 온 것도 사실이다. 김성남 씨가 글을 쓰고, 진선규 씨의 멋들어진 일러스트가 수를 놓고 있는 <전쟁세계사>에는 표지에 나오는 타이틀대로 “지금의 세계지도와 역사를 결정한 59가지 전쟁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제1장에서는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부제로, 전쟁터에서 뛰어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전사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에피소드는 테베의 150쌍의 동성연애자들로 구성된 신성군단 이야기와 바이킹의 광전사(狂戰士) 베르세르크가 광대버섯에 들어있는 암페타민 다시 말해 각성제를 먹고 전장에서 그렇게 미친 듯이 흥분해서 날뛰었다는 가설이었다. 테베의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신성군단은 그런 끈끈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당시 최강의 육군으로 불리던 스파르타군을 대파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단다. 아무래도 전사 개개인의 개별 능력이 중시되는 고대의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전쟁 도구와 기술의 발달사를 그리고 있는데,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고대 최강의 무기는 로마군의 제식 병기로 에스파냐에서 생산된 철로 만들어진 단검 글라디우스와 7세기 중반 칼리니코스가 발명했다는 동로마제국의 비밀병기 “그리스의 불”이었다. 단순한 운동에너지를 전달하는 타격 무기로서의 검의 기능성에 찌르기를 겸한 글라디우스는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고 팍스 로마나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핵심 무기였다. “그리스의 불”은 당시 욱일승천하던 이슬람 아랍군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717-8) 동로마 제국을 위기에서 모면하게 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이런 기술들은 훗날 개발된 기관총 같은 대량살상무기에 비교할 순 없겠지만, 당시의 기술력으로 보았을 때 전세를 뒤집을 만한 첨단기술이었다.

이 책이 다른 전쟁을 다룬 책들과 변별이 되는 특징 중의 하나는 작가가 역사 속의 전쟁에서 어떻게 보면 비중 없이 다루어졌을 일반 병사들의 시점에서 종군기를 작성했다는 점이다. 특히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의 동방 원정을 따라 출정한 밀로스의 가상 일기는 인상적이었다. 변변한 장비도 갖추지 않은 채, 끝없는 알렉산드로스 왕의 원정에 신물을 내면서도 전투에서 이기고 약탈로 한몫 챙기겠다는 병사의 상상에서 당시 전쟁의 양상을 그려볼 수가 있었다. 아주 참신한 아이디어였던 것 같다.

역시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웅들의 일대기 중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명장으로 유스티아누스를 보좌한 벨리사리우스와 나폴레옹에 대해 폄하하기 위해 숙적 영국의 매스 미디어에서 나폴레옹이 단신이었다는 프로파간다가 눈길을 잡았다. 동로마 제국의 기초를 닦은 유스티아누스였지만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계속해서 기용하면서도, 혹시나 그가 역심을 품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카르타고와 이탈리아 원정에서 대성공을 거둔 벨리사리우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 주지 못하는 모습에서 황제와 뛰어난 장군간의 조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역시 프랑스 대혁명 이래, 전 유럽을 휩쓸었던 나폴레옹을 의도적으로 깎아 내리기 위해 그의 키가 작았다는 주장을 내놓은 영국의 매스 미디어들의 선전전 덕분에 아직까지도 나폴레옹에 대한 이미지 훼손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마지막으로 인류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전쟁들을 다루고 있는데 아마 무엇보다도 서방과 동방의 첫 대결이자 이후에 역사를 가른 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테르모필레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을 저자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그리스 문명 세계가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 승리 운운하는 것은 좀 지나친 도약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지상전을 맡았던 스파르타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전제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민주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아테네 역시 극도로 억제된 신분에 의한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찌됐던, 페르시아의 침공 실패로 그리스 문명은 기사회생하게 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건 사실이다.

13세기 코레즘제국을 초토화시키고, 계속해서 이슬람 세계를 향해 파죽지세의 진군을 하던 몽골군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부근의 아인잘루트에서 이집트와 시리아 맘루크들의 연합군을 상대하게 된다. 그동안 시리아와 이집트의 맘루크들은 중동의 패권을 두고 다퉈 왔지만, 몽골의 위협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연합하게 된다. 한편,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의 주력은 대칸[大汗]을 위한 쿠릴타이를 위해 몽골로 돌아가고, 키트보가가 이끄는 잔여 병력은 맘루크 연합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하고 만다. 이슬람 세계를 무적의 몽골군으로부터 지켜낸 이 전투에 대해 모르고 있어서 그런지 짧지만, 인상적인 에피소드였다.

전반적으로 책의 구성을 보았을 때, 참신한 시도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책 읽기에 부담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개설서적인 의도로 편집이 되어서 그런진 몰라도 깊이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도 무엇보다 좋았던 일러스트레이터 진선규 씨가 그린 일러스트들로 유머가 배어 있으면서도 적재적소에 배치한 일러스트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제 막 세계에 유서 깊은 전쟁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위한 입문서로서 제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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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 - 20세기 한국을 읽는 25가지 풍속 키워드
손성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서울신문사 기자 출신의 손성진 씨가 지난 우리네 삶의 흔적들을 담은 책 <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의 키워드는 바로 정(情)이었다. 이제는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쫀드기, 뽑기 같은 불량식품 먹거리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박가분-구리모 그리고 흑백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지난 20세기 대한민국 풍속사의 변천을 자세하게 그려냈다.

지난 세기 후반, 당시 지상과제였던 경제발전은 전근대적이었던 우리네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동시에 어쩌면 그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정서들도 그 삶의 모습들과 함께 사라져 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무래도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의 불량식품 이야기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책을 보다 말고, 교직에 계셨던 어머니에게 물어 보면서 기억이 나지 않거나 하는 부분들에 대해 보강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가령 쫀드기나 뽑기 같은 불량식품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직접 체험해 보았으니 안다고 하더라도, 송충이 잡기나 쥐를 잡아서 쥐꼬리 잘라오기 같은 숙제는 알 수가 없었는데 어머니가 상세한 설명을 달아 주셔서 이해가 쉽게 갔다. 풀빵, 붕어빵 그리고 국화빵이 모두 한 형제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인 트렌드세터 에피소드들 가운데서는 장발, 미니스커트 그리고 통금이라는 주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판을 치던 가운데, 독재의 영속화를 위협한 것은 바로 젊은이들의 자유정신이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억압받아온 젊은 영혼들은 남자들은 장발, 그리고 여자들은 복장으로 자신들의 시대정신을 표현해냈다. 하지만 독재정권 답게, 억압적으로 이런 시대정신을 억누르려는 사고는 공권력을 동원해서 단속해서 결국에는 즉심, 입건 심지어는 구속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국민들의 기본권마저 침해하는 전근대적인 사고발상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통금 역시 미군정과 한국전쟁으로 장장 37년간이나 시민들의 자유를 옥죄어왔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되돌아보면, 통금 단속에 걸리지 않기 위해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황급하게 귀가하던 어른들이 담벼락에 찰싹 달라붙어서 마치 스파이더맨마냥 슬금슬금 집으로 향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통기타와 포크송이 주류를 이루던 70년대 음악계 이야기 역시 매력적이었다. 그 시절 오디오는 정말 귀한 아이템이었다. 실용을 추구하던 우리 부모님에게 오디오 컴포넌트는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었다. 아마 그 시절에 지금과 같은 홈시어터 시스템을 구축할 수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하긴 그 시절에는 조그만 카세트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금지곡에 얽힌 이야기들은 역시 정치와 관련되어져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해서 해외의 수많은 명곡들을 접할 수가 없었다. 유신독재 정권 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행복해야만 했는지, 레드컴플렉스 때문에 ‘붉은’이란 단어에 극도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었다. 표지에 공산당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비틀즈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음반도 통째로 금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은이가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은 그게 아니었다. 비록 가난하고 못 먹고, 못 입고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었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는 사람냄새가 나는 삶이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고도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진행된 핵가족화, 개인주의는 기존의 그런 공동체적인 우리 전통의 삶의 형태마저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없는 것 없이 모두 갖춰진 현대적 삶은 그 시절의 정(情)을 담보하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이렇게 풍요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정신은 날로 피폐해져 가는 것만 같다. 우리보다 반세기 전에 이미 이런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서구인들의 깨달음에, 우리는 이제서야 조금씩 접근해 가고 있는게 아닐까. 한 세기에 걸친 옛 시절에 대한 풍속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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