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크
퍼시 캉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끌레마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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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전에 필름 카메라와 더불어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있었는데,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아예 폴라로이드 필름을 더 이상은 생산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사용하고 싶어도 더 이상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는 거다. 이렇게 일상에서 사용하다가 더 이상 그 제품이 생산이 되지 않는다면 어쩌지? 바로 이 시점에서 퍼시 캉프의 <머스크>는 시작된다.

올해 69세의 아르망 엠므 씨는 25년간 철도공사 직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프랑스의 비밀정보부에서 암약해온 인물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삶의 규율을 적용시키고, 옷매무새가 흐트러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가 없을 정도의 멋쟁이다. 하지만 그건 이미 40년 전의 이야기이고, 이제 그는 평범하게 늙어가는 노인네다.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엠므 씨에게는 자신만의 비장의 무기처럼 느껴지는 존재가 있으니 그건 바로 <머스크> 향수다. 발정기의 사향노루 수컷에서 추출한 천연재료로 만든 향수는 ‘호색한’ 엠므 씨의 평생의 동반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엠므 씨는 자신의 정부 이브로부터 자신의 냄새가 바뀌었다는 지적을 듣는다. 거의 평생을 함께 해온 향수의 변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늙어 버렸단 말인가? 크로노스의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우선 엠므 씨는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해낸다. 머스크의 제조회사에 정중하게 편지를 써서 답장을 받는 엠므 씨. 회사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천연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머스콘이라는 인공재료를 사용해서 <머스크>를 계속 생산할거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하지만, 엠므 씨에게 필요한 것은 ‘인공’ 머스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전 프랑스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망라해서 <머스크> 향수를 획득하기 위한 가열찬 투쟁에 나선다.

하지만 그의 남은 생애 동안 필요한 절대량의 머스크 향수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작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는 향수의 양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존재감을 상실하면서 급속한 노화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의 자신의 추락을 볼 수 없었던 정보요원의 출신의 영리한 엠므 씨는 극적이면서도 결정적인 다른 방법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사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은 <머스크> 책의 표지에 다 나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주인공 아르망 엠므 씨가 붉은 색의 머스크 향수를 뿌리는 장면. 그 향기는 이미지화 되어서 왼편으로는 제목인 <MUSK>를 그리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머스크의 원료를 추출하는 사향노루의 그림이 보인다. 남성인 엠므 씨와 그의 여성에 대한 선호, 그리고 그를 남자답게 만들어주는 그의 심리적 안정제라고 할 수 있는 수컷 사향노루는 모두 본질적으로 동일선상에 놓여져 있다.

물질자본주의 세계에서 직업에서의 소외, 다시 말해서 은퇴는 어떤 의미에서 남성성의 상실과 동가로 비추어진다. 한 때, 여성들에게 작업을 걸어 많은 성공의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 아르망 엠므 씨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노화) 대신 마스크 향수로 만들어진 인공적 이미지 속에서 여전히 과거의 영광들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머스크 향수 생산중단은 그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엠므 씨에게 그것은 단지 물질적 공급의 중단이 아닌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진다.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엠므 씨는 부단한 노력을 계속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노화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결국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으로 몰린다.

2000년에 나온 탓인지, 현재 프랑스를 비롯한 EU 국가들에서 사용되는 화폐 단위인 유로가 아닌 프랑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도 등장하는 향수의 도시 그라스에까지 머스크 향수를 찾아 나서는 아르망 엠므 씨의 집요한 여정도 또한 유쾌한 경험이었다. 예전에 <엠므 씨의 마지막 향수>라는 제목으로 2001년에 출간되었다가 작년에 다시 빛을 보게 된 책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그늘에 가려져 있던 재밌고 유쾌한 책을 다시 세상에 등장시켜준 끌레망 출판사에게 갈채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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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조선인물실록 - 역사적 인물들, 인간적으로 거들떠보기
이성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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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출판계의 키워드 중의 하나는 “조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작년에 개인적으로 읽은 “조선”이란 말이 들어가는 책만으로도 4권이나 됐다. 이처럼 “조선”이란 키워드를 사용한 책들과 동일선상에 놓여져 있는 <발칙한 조선인물실록>의 저자 이성주 씨는 이미 2006년과 2007년에 소위 “엽기”라는 타이틀을 단 일련의 역사서적을 내면서 자유로우면서도 창조적인 역사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준 바 있다.

<발칙한 조선인물실록>에서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조금은 비틀리거나 왜곡된 인물들에 대한 교정과 더불어 미처 모르고 있던 사실들에 대한 전달에 이르기까지 아주 친절하게 다뤄주고 있다. 일단 각 에피소드들의 소제목부터 눈에 확확 들어온다. <왕보다 소주가 좋아!?>, <노비, 왕에게 딜을 걸다>, <부마 자리 거절했다가 막장 인생이 된 남자> 이 얼마나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들이던가.

이 책을 폈을 때, 가장 호기심이 가는 이야기는 바로 부마의 자리를 사양했다가 그야말로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서 노비의 지위에까지 떨어진 전 춘천군 지사 이속(李續)의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선 초기의 절대군주 태종의 옹주를 며느리로 들이라는 왕명(?)을 거절했다가 그만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만 인물. 호기롭게 부마 자리를 거절하기는 했지만, 왕조국가 조선에서 절대 권력자인 왕의 의사에 반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처절한 교훈이었다.

이 이야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역시 태종의 즉위에 앞서 2차 왕자의 난의 주인공이었던 태종의 종형이자 태조 이성계의 4남이었던 회안대군 방간(芳幹)의 후예들의 왕족복귀를 위한 꾸준한 노력 또한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왕족에서 순식간에 역적으로 몰려, 평민의 지위에 떨어지게 된 회안대군의 자손들은 왕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수백 년간 탄원을 해서 결국 300여 년만인 숙종 대 조선조 왕족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왕실족보)에 오르게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다음으로 우리에게는 한석봉으로 더 잘 알려진 조선의 중기의 명필로 유명한 한호(韓濩)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도 흥미 있는 소재였다. 작가는 어머니와의 ‘떡 배틀’이라는 표현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희화화하면서, 그야말로 붓글씨 하나로 임금 선조의 총애를 받았던 한석봉의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역시 철저한 유교적 가부장 시스템 하의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신분상승을 위한 엘리트 코스인 과거를 거치지 않은 상태로 발탁된 한석봉에 대해,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기존 관리들의 질시는 상상을 초월했다. 결국 중앙 요처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지방행정관 자리를 연연해야 했던 그의 한계에서 뛰어난 재능을 살릴 수 없었던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읽을 수가 있었다.

목화씨를 고려로 밀반입해서 일약 스타로 알려진 문익점에 대한 사실도 우리가 알고 있던 거의 전설에 가까운 전승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야기였다. 고려시대 공민왕의 신하로 중국 원나라의 사신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문익점은 그야말로 줄을 잘못 서게 되서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대역죄인이었으나, 운 좋게도 원나라에서 ‘수출금지품목’도 아니었던(이 점이 중요하다) 목화씨를 고려에 소개하면서 의생활에 일대 혁신을 가져 오게 되었다. 저자의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교정에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우리네 역사 교육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서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인물은 바로 조선의 14번째 왕이었던 선조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전대미문의 국난이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임금으로,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자 유교국가 조선에서 모든 이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던 그가 한양으로 진격해 오는 왜군에 맞서 도성을 수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만 살겠다고 평안도 의주로 몽진한 상황은 마치 한국전쟁 당시 서울 사수를 외치고서는 도망가 버린 이승만 정부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7년 대전란이 끝난 다음, 공신을 정하는 와중에서 정작 전쟁에서 왜군을 맞아 싸운 이순신과 권율을 비롯한 장군들과 의병장들에 대해서는 인색하면서도 자신을 따라 몽진했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더없이 한없는 아량을 베풀어 주었던 쪼다같은 군주라고 이성주 씨는 규정하고 있다. 분조를 해가면서, 각처의 의병들을 규합해 왜군에 항거했던 세자 광해군에게는 전위하겠다는 정치적 쇼를 하는 등 그야말로 한 편의 코믹 드라마 같았다. 임진왜란 당시 출병했던 명나라에 대해 재조지은(再造之恩:거의 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이라고 하면서 결국 전란극복은 자신의 힘이었다라는 식의 자기합리화와 끝없는 사대주의는 훗날 인조 시대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같은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이성주 씨의 이런 창조적이면서도 딱딱하지 않은 대화체의 서술이 마음에 들었다. 역사란 모름지기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통해 현재에 배우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딱딱하고 정사(正史)적인 입장만을 취할게 아니라 재밌으면서도 독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대중적인 글쓰기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임의 대로 글을 쓰지 않는다는건 책의 권말에 수록된 참고 문헌들의 목록들을 보면 바로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역사 서적들이 계속적으로 출간이 돼서 어렵고 딱딱하다는 기존의 이미지들을 벗고 좀 더 적극적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들었다.

*** 내가 찾은 오탈자

1. 폐루 -> 페루 (11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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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마리아주 Tokyo Mariage Style Mook 2
김호진.김미선 지음 / 브이북(바이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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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책의 표지를 보고서 여유롭게 와인 잔을 테이블에 놓고 있는 이가 누군가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바로 이 책의 저자인 탤런트 김호진이 아니던가. 그리고 더 놀란 건, 탤런트로만 알았던 그가 복어요리를 비롯해서 무려 5개의 요리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아닌가. 어느 캐릭터에 대한 평면적인 사고가 입체적으로 전환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는 와인 마니아라고 불릴 정도로 와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아니 형이상학적으로 안다는 표현보다는 즐긴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김호진은 그렇게 와인을 찾아 도쿄 행에 오른다. 그리고 그의 여행의 목적성은 뚜렷하다. 현지에서 몇 대를 두고 물려 가며 가업을 잇는 장인 정신을 찾아서, 그리고 타인의 것을 모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음식을 찾는 기행이었다.

개인적으로 지난 10월말에 일본 도쿄에 다녀왔는데, 가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아마 나도 현지답사를 나섰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에 젖었었다. 게다가 물가가 비싸기로 아시아에서 선두를 다투는 서울과 일본의 와인 값을 비교해 본다면, 일본이 더 싸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한 요리하는 작가가 말하는 대로 와인과 음식에도 궁합이 있는 법, 그래서 책의 제목도 그대로 <도쿄 마리아주>라고 짓지 않았던가. 좋은 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맛있는 음식까지 더해진다면 그거야말로 도원경(桃源境)이 따로 있겠는가 싶었다.

<도쿄 마리아주>에서는 모두 해서 36개의 와인 바와 레스토랑들이 소개가 된다. 특히 지난 가을 숙소가 있었던 아사쿠사의 <오사카야>는 언뜻 지나쳐 가며 본 듯도 싶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당연히 들러서 음식 맛을 보았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대를 이어 95년째 영업 중이라는 <오사카야>의 분위기는 정갈했다. 하지만 여전히 지면 만으로는 그 분위기와 미각과 그리고 음식과 와인이 주는 식감을 느낄 수가 없으니 안타깝기만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와인 바 두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15번째로 소개되었던 오모테산도 노상에 있다는 오크통이 잘 어울리는 <카민>과 19번째 <우피>를 꼽겠다. 캐주얼한 분위기를 더 좋아해서 그런 진 몰라도 왠지 정장을 차려 입고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고품격의 레스토랑이나 와인 바보다 이렇게 선술집 분위기가 나는 곳이 더 마음에 들었다. 어느 가을날에, 오모테산도를 걷다 지친 발걸음을 쉬기 위해 큼지막한 오크통 앞에서 마시는 와인 한 잔의 여유란 상상만 해도 즐겁다. 도쿄에 갔을 적에 에비스 스테이션에 가긴 했었는데 <우피>의 존재를 몰랐던 나는 같이 갔던 동행과 함께 에비스 맥주만 마시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다음번에 도쿄에 가게 되면 ‘머스트’ 방문할 곳 중의 하나가 추가되었다.

일본에 갔을 때, 생맥주(나마비루), 카레, 돈까스 그리고 스시를 꼭 먹어 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마지막 스시를 못 먹어 본게 무척 아쉬웠는데, <도쿄 마리아주>의 지은이는 그 유명한 만화 <미스터 초밥왕>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야마다 히로시 할아버지가 운영하게 <칸파치>에 들러 주인장이 그 자리에서 바로 만들어내는 스시를 마치 어미 새가 아기 새에게 먹이를 주듯 그렇게 받아먹으면서 직접 초밥을 만들어 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단다. 한마디로 말해서 완전 부러웠다. 나도 우에노에 가게 되면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상상을 해봤다.

이 책을 통해 한 가지 배운 점이 있다면 바로, 와인을 마시던 아니면 음식을 만들던 간에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와인이 비싸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중저가에서도 자신만의 와인을 고를 수가 있다는 것이 김호진의 주장이었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개인적으로 독일 라인 지방에서 나는 리슬링 품종의 와인을 좋아하는데, 그 가격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몸소 깨달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오래되고 비싼 와인이 더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몇 번 테이스트를 해보면서 가격이 싸고 영(young)하더라도 내 입맛에 딱 들어맞는 와인을 찾을 수가 있어서 아주 즐거웠던 적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오래간만에 리슬링 와인 한 잔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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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미셀러니 - 와인에 관한 비범하고 기발한 이야기
그레이엄 하딩 지음, 차재호 옮김 / 보누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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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와인하면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보통 사람들은 범접하기 힘들다는 느낌부터 받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와인의 종류가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2005년에 처음 출간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 저자 그레이엄 하딩의 책 <와인 미셀러니>는 이런 와인의 신비한 세계를 독자들에게 인도한다.

샤르도네, 쇼비뇽 블랑, 돔 페리뇽, 메를로, 카버르네, 리슬링, 토카이 등등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이름들은 그나마 어디서고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지만, 무통 로쉘드 같은 정말 고급 와인들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사실 와인 병에 붙어 있는 라벨도 제대로 읽지 못한 적도 많다.

와인의 기본 정의는 “발효된 포도 주스”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정의에 대해 책의 부제로 딸려 있는 대로 ‘와인에 관한 비범하고 기발한 이야기’들을 사회 전반에 걸친 모든 방면에서 풀어 나간다. 역시 역사를 전공한 이답게, 와인의 유래로부터 시작을 해서 와인에 쓰이는 용어, 와인 병의 제조, 와인을 숙성시키는 오크통, 라벨 그리고 문학과 영화에 이르는 그야말로 와인에 대한 백과사전적 정보들을 짤막하면서도 아주 유용한 스타일로 그리고 매우 유기적인 관계로 빚어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와인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던 많은 것들을 이 책을 배울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펀트’는 와인 병 밑에 움푹 들어간 부분을 지칭하며, 얼리지(Ullage)는 코르크 하단 부분과 실제 와인 사이의 빈 공간을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해 하던 빈티지(Vintage)에 대해서는 실제로 포도를 수확한 해를 의미한다는 것도 덤으로 배웠다. 이건 개인적으로 아주 궁금해 하던 사실이었다. 또한 포트 와인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 보고, 인터넷 리서치를 통해 알게 됐다. 포트 와인이란 주로 북서 포르투갈 지방의 도우로 밸리(Douro Valley)에서 만들어진 증류 포도주를 말하는데 대개의 경우, 스윗한 레드 와인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얻은 최대의 수확은 바로 와인 비평가 로버트 파커를 알게 된 것이었다. 미국 볼티모어 출신의 로버트 파커는 원래 변호사 출신으로, 1975년부터 와인 비평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가 개발한 100점 만점 기준의 와인 평가 시스템은 국제 와인 시장에서 공인을 받고,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독일 라인 지방에서 나는 리슬링 품종의 와인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달다는 ‘아우슬리스’ 등급을 좋아한다. 타닌이 많이 들어가 있는 드라이한 레드 와인보다는 아무래도 조금 단맛이 나는 화이트 와인을 선호하는 편이다. <와인 미셀러니>를 통해 알게 된 헝가리 토카이 지방에서 난다는 토카이 와인을 한 번 사보려고, 인터넷 서치를 해봤는데 역시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건 아닌 듯 싶었다.

<와인 미셀러니>를 읽으면서 와인에 대해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와인의 묘미를 깨닫는 정도가 아닐까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기회가 된다면 나도 무통 로쉘드 같은 고급 와인을 한 번쯤은 마셔 보고 싶다는 충동도 느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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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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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려서 알게 된 루스 베네딕트 여사의 <국화와 칼>. 일본인들의 내면세계를 파헤친 수작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정작 그 책과 대면하기에는 20년이란 세월도 더 걸린 것 같다. 그만큼 고전과의 대면의 기회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을 말하기에 앞서 이 책이 씌여지게 된 배경부터 말하는 게 순서인 것 같다. <국화와 칼>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중이던 1944년 미국 전쟁성의 의뢰를 받아, 일본인들의 문화와 사고를 이해하고, 종전 후 일본 점령기를 준비하기 위한다는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씌여졌다. 종전 후인 1946년에 발간되었다. 특히 이 책의 저자인 베네딕트 여사는 일본인 특유의 수치(하지)와 죄의식에 대한 관점에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과 미군이 육전에서 대규모로 처음 맞붙었던 과달카날 전투에서 ‘덴노헤이까 반자이’를 외치며, 기관총탄이 빗발치는 미군 진지로 목숨을 초개 같이 던지면서 무모한 육탄공격을 벌이는 일본군에 대해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들을 목도했다. 그러한 상황들은 타라와, 펠렐류 그리고 남방의 각처에서 벌어졌다. 도대체 무엇이 일본군들로 하여금 그런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게 하였는가.

유럽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던 나치 독일의 그것과는 또 다른 문화적 충격에 미국의 전쟁지도부에서는 일본과 일본인들 그리고 그들의 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루스 베네딕트 여사는 <국화와 칼>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미국 페리 제독의 내항 이래 강제적으로 개방하게 된 일본의 도쿠가와 바쿠후는 근대화라는 세계적 흐름에 굴복하게 된다. 아울러 천황 중심의 왕정복고를 원하는 조슈와 사쓰마 번을 중심으로 결국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단기간의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이루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천황과 신토를 중심으로 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국가중심주의적 도덕체계를 수립한다.

우선 가장 우선적으로 일본인들에게는 모두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계층구조의 관습을 지키도록 태어나면서부터 교육받아온 사실을 주지시킨다. 천황을 중심으로 해서, 최고 정치지도자인 쇼군, 영주인 다이묘, 사무라이, 농민, 상인 그리고 천민들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에 걸맞은 행동을 하도록 사회적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이는 천황에 대한 주[忠]로 이어지게 된다. 주와 더불어 중국에서 도입된 고[孝]는 자신과 부모간의 도리를 규정짓는다.

이런 계층구조의 관습은 태평양전쟁 당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각지 정복에 나선 일본과 그 점령지 하에서의 갈등의 시초가 된다. 일본은 각 나라에 대해 일본국가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계층구조에 따른 형과 아우, 선진국과 후진국의 구조를 받아들일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했지만, 그들의 문화와 관습이 다른 나라에서도 적용될 리는 만무했다. 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저항에 일본 제국주의는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으로 대응을 했다.

다음으로 온[恩]이라는 채무적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개인과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그 중에서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천황에 대한 온이 바로 전쟁 당시 일본군들이 천황을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온과 유사한 개념으로 기무[義務]가 있는데, 기무는 천황에 대한 주와 부모에 대한 고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기무에 있어서도 부모에 대한 고보다도 천황에 대한 주가 우선시된다.

자, 여기서 기무와는 또 다른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리[義理]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기리는 자신이 예전에 받았던 친절로부터 시작을 해서, 모욕에 대한 복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주를 아우른다. 하지만 기무와는 달리 “본의 아니게” 다시 말해서 본인이 원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행해야 하는 점이 구별된다. 기리의 경우, 적합한 시기에 되갚지 않으면 그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제 이상에서 나열된 사항들을 실제 상황에 적용시켜 보도록 하자.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미영연합국이 중경으로 이동한 장개석 정부에 대한 물자공급 루트인 레도 공로를 차단하고 궁극적으로 지속적인 저항을 하는 중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버마-인도 침공 작전인 임팔작전을 개시한다. 당시 버마방면군을 이끌던 15군 사령관 무다구찌 렌야 중장은 개전 초기 말레이 전선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전형적인 사무라이 스타일의 장군이었다. 15군 휘하 31사단을 이끌던 사또 중장은 임팔작전 초기 인도의 코히마를 점령하는 수훈을 세우는 활약을 보였지만, 계속되는 연합군의 물량작전에 전 부대가 고사의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사또 중장은 천황에 대한 주를 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부대원들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항명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직면한다. 20세기 전쟁에서, 13세기방식의 보급을 가지고 우세한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 속에서 20세기 신식 군대교육을 받은 지휘관의 고뇌였다. 하지만 사또 중장은 자신의 직속상관인 무다구찌 사령관이 보급 약속을 어겼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뜻대로 후퇴를 감행한다. 이것은 바로 봉건시대 다이묘와 사무라이간의 관계의 재현이다. 다이묘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사무라이들에 대해 모욕을 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에는(봉록의 유지) 그들에게 무한한 기무와 기리를 요구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사무라이들은 다이묘에게 대한 저항을 한다.

이러한 관계의 복잡성은 현대전이었던 태평양전쟁에서도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포로들은 죽을 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우려고 했으며, 포로가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치였다. 그렇게 악착같이 저항을 하던 일본인들이 천황의 패전 사실을 알리는 방송 한 마디에 바로 자세를 바꾼 사실을 미점령군들은 처음에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전쟁지도부에서는 1억 총옥쇄 운운하면서 본토결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미군도 일본 상륙전이 감행이 되면, 최소한 100만 명의 사상자가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자들의 수는 미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수치였다. 하지만 종전 후 일본인들이 보여 준 미점령군에 대한 우호선린적인 모습들을 그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모욕과 수치의 대척점에 서 있는 다른 명제인 명예에 대해서도 일본이 본격적인 세계열강으로 나가는 계기가 되었던 러일전쟁의 예를 저자는 들고 있다. 러일전쟁 당시 육전에서 뤼순 요새 포위공격을 벌였던 노기 마레스케 대장은 당시 러시아군 사령관이었던 스토예셀 장군의 명예로운 항복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항복한 러시아군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래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세계열강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수모를 받았다고 일본인들을 생각했다. 대양 국가로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일본에게 열강과의 군축회담을 통한 함대 수의 제한 등의 조치는 국가적 수치였다. 마지막으로 진주만 공격이 있기 전, 일본에게 전달된 소위 ‘헐 노트’는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패권주의에 대한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헐 노트’를 받아본 일본 지도부에서는 무조건적인 항복이냐 아니면 개전이냐의 양자택일을 요구받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과정이 개전 초기, 필리핀 바탄반도에서 대규모로 항복한 미군에 대한 소위 말하는 “죽음의 행진”과 같은 잔혹행위의 바탕이 되었다. 기리는 이렇듯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간에 반드시 되갚아야 하는 채무관계였음을 명백하게 증명해준다.

개인적으로 루스 베네딕트 여사가 단 한 번도 일본을 방문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저술했다는 사실에 대해 놀랐다. 문화인류학에서 필드 리서치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데, 그 과정을 빼놓고 기존의 자료들과 재미 일본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그런 반면, 그렇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인 입장을 고수할 수도 있었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천황에 대해 기술된 대로, 일본인들의 국민감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천황의 신성부인 성명을 내는 정도로 해서 미국의 프랭클린 대통령은 전후 천황제 존속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점령 당시, 미국의 대일본 정책수립에 <국화와 칼>은 큰 영향을 주었다.

루스 베네딕트의 여사가 60여 년 전에 집필한 일본국가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최근 일본 문화의 개방으로 책과 영화들을 쉽게 접하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가까운 나라이면서도 국가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국화와 칼>을 통해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가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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