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 - 별난 화가에게 바치는 별난 그림에세이
카트린 뫼리스 글.그림, 김용채 옮김 / 세미콜론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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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짧은 그림 에세이인 <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를 읽다 보니, 옛 중국의 고사인 ‘지음(知音)’이 떠올랐다. 거금고의 명수였던 백아(伯牙)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종자기(鍾子期)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지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진실로 이해할 수 있었던 종자기가 세상을 뜨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었다고 했던가.

색채예술의 대가로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봉장이었던 외젠 들라크루아가 죽은 해였던 1864년 12월 우리에게는 삼총사로 널리 알려진 대문호 알렉상드로 뒤마가 들라크루아를 추모하며 발표한 <들라크루아에 대한 한담>을 바탕으로 해서 21세기에 카트린 뫼리스라는 역시 프랑스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재구성해서 한 편의 책으로 내놓았다. 내용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몇 개의 선으로 그려내는 카트린 뫼리스의 일러스트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1798년에 태어난 들라크루아는 게랭의 지도 아래 제리코와 함께 동문수학하면서 그림을 배워 나갔다고 한다. 그의 화풍은 책에도 나오지만, 당시 고전주의 양식이 판을 치던 프랑스 미술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던 것처럼 대담한 색채의 사용과 도발적인 주제들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중요하게 생각했던 색채의 다양성에 대한 연구는 훗날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822년 <단테의 조각배>라는 작품으로 살롱전에 출품을 하면서 일대를 풍미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이 작품에서, 죽음의 강 스틱스를 배를 타고 건너가는 단테 자신과 베르길리우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 뒤를 이어 1824년에 발표된 <키오스 섬의 학살>은 2년 전인 1822년 그리스 독립전쟁의 와중에 그리스 키오스 섬에서 오스만 제국의 의한 학살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 등장하는 ‘손’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했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난 영국의 대시인 바이런 경에 대한 들라크루아식의 오마쥬였다.

그 외에도 이 책에서는 들라크루아와 관계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등장을 한다. 살롱전에 출품을 해야 하는데, 프레임을 만들 돈이 없어서 고생했던 이야기, 오를레앙 공작이 빅토르 위고에서 선물하기 위해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구입을 하도록 뒤마가 손을 쓰지만 선물대상을 모르고서는 그림을 팔지 않겠다고 뻐팅기는 들라크루아, 평생의 적수였던 앵그르를 체제전복적인 그림들을 그려대는 들라크루아의 대항마로 출전시키는 미술평론계의 편협한 모습들에 이르기까지 화가로서의 들라크루와 뿐만 아니라 인간 들라크루아의 참모습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뒤마의 글과 카트린 뫼리스의 절묘한 공동 작업이 너무나도 멋들어졌다.

역시 들라크루아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830년에 발표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일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자유의 여신 옆에 나팔총을 가지고 뒤따르는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바로 이 사람이 바로 들라크루아 자신이라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뒤마는 들라크루아가 공화주의자였다기 보다는 귀족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 가설을 부인하고 있다. 자신과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들라크루아와 그의 예술세계를 편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대하고, 평생의 지기로 지냈던 이 둘의 우정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1833년 뒤마가 살던 생나자르 가에서 열린 가장무도회에서, 뒤마와 그의 화가 친구들이 공동 작업으로 무도회장을 꾸민 이야기는 뒤마가 경험한 들라크루아 예술인생의 백조의 노래처럼 다가온다. 루이와 클레망 블랑제, 알프레드와 토니 조아노, 드캉, 자댕, 바리, 그랑빌 그리고 낭퇴이 등이 그 작업에 참여했는데, 유독 들라크루아만이 무도회가 다가올수록 코빼기도 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할당된 벽면을 다른 이들에게 돌리자는 의견을 들라크루아의 지음 뒤마는 온 몸으로 막아냈다고 증언하고 있다. 뒤마의 기대대로 들라크루아는 밑그림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그림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물 흐르듯 유연하게 모든 것을 처리해냈다. 뒤마의 표현대로 ‘정말 좋은 시절’의 이야기였다.

근대 미술사에 있어서 길이 남을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지만, 죽을 당시에는 끝까지 시중을 들었던 시종과 가정부만이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는 것을 개탄하는 글로 책은 끝이 난다. 정말 들라크루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뒤마의 ‘지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이 책을 통해 들라크루아의 예술세계에 대해 다시 알게 되기 전까지, 나는 들라크루아와 로트렉을 헷갈리고 있었다. 하지만 뒤마가 남긴 글에, 21세기식 새로운 해석이 덧붙여진 이 책을 통해, 19세기 가열찬 혁명과 반동의 뜨거운 기운이 넘실거리던 시대를 살았던 어느 예술혼에 불타는 작가와의 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가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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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목사님의 즐거운 유머
오카와 쓰구미치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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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든지 반드시 그 목적성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오카와 쓰구미치 목사님이 쓴 <유쾌한 목사님의 즐거운 유머>는 도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 아주 간단하다. 그건 기존에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딱딱하고 고루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유머를 통해 한 방에 날려 버리고,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으라는 거다. 너무 뻔한다구?

뭐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책에 등장하는 오카와 목사님이 비장의 무기처럼 준비한 유머들이 어디선가 한 번 정도는 들어본 듯한 기시감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유머라는 본질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면 그만 아닌가 말이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 중에서 일본의 전통문화와 관계된 부분이 무척 흥미로웠다. 기독교가 일본에 전래되었을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대개의 경우 무사계급의 사무라이들이었다고 하는데 전통적으로 사무라이들은 얼굴에 희로애락을 들어내면 안되었다고 한다. 한 번의 미소가 백 마디의 말보다도 더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유추해 보았을 때, 무표정한 사무라이가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이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으랴. 그 자체가 유머였다. 하지만 실제에서는, 그 반대였다고 하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엄마를 따라 슈퍼마켓에 간 꼬마가, 엄마에게 초콜릿칩 쿠키를 사달라고 조르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계산할 무렵, 카트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초콜릿칩 쿠키를 사달라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선포하자 무려 23상자의 초콜릿칩 쿠키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참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역시 세상 가운데 살면서, 세속적인 욕망들 가운데 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아는 대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한 바람이 아닌 자신들의 희망사항들이 우선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바람들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전에 먼저 그 바람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부합되었는가를 먼저 물어 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지만 실제의 적용에서는 아무리 좋은 유머라고 할지라도 듣는 상대방이 어떤가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 바로 뼈저리게 느낄 수가 있었다. <도베르만>(37페이지)의 블랙유머를 말했다가 낭패를 당했다. 관계의 상처가 주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제시하지 않고 유머만 말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이 작은 책을 통해서, 사랑과 치유의 종교인 기독교가 고난에 찬 세상살이에 시달린 이들에게 즐거운 웃음과 행복을 되찾아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조금 더 바란다면 책을 읽고 나서, 가까운 교회에 설교를 들으러 나간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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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17
제프 린제이 지음, 김효설 옮김 / 비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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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덱스터>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듣고 나서, 미국 마이애미 출신의 작가 제프 린제이가 쓴 덱스터 시리즈가 미국의 케이블TV인 쇼타임을 통해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책을 읽기에 앞서 이미 3번째 시즌까지 제작된 드라마 <덱스터>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마디로 말해서, 제프 린제이가 창조해낸 덱스터 모건이라는 캐릭터에 완전 반해 버렸다.

덱스터 모건은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시 소속 경찰국의 과학수사반에서 일하는 혈흔전문가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일주일에 주 5일을 일하고, 아이가 둘 있는 이혼녀 리타와 연애를 하고, 역시 경찰인 입이 걸한 여동생 데보라와 팀을 이뤄서 사건을 다룬다. 그게 전부인가? 물론 아니다. 보통 사람으로 ‘위장’한 덱스터에게는 유리 슬라이드의 비밀이 있다. 낮의 덱스터는 온순한 혈흔전문가이지만, 밤의 덱스터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서도 사회적 법망을 피해 다니는 최고 악당들을 응징하는 연쇄살인범이다. 덱스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들을 처치하고, 일종의 기념품으로 그들의 혈액이 담긴 유리 슬라이드를 남긴다.

전작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와 <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를 통해 냉혈한 킬러에서, 아이들을 사랑하고 모범적인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모습을 정착시킨 ‘몬스터’(드라마에서 덱스터는 자신을 그렇게 부른다)인 덱스터는 세 번째 시리즈에 해당하는 <어둠 속의 덱스터>에서는 드디어 리타와의 결혼이라는 자신의 사회적 위장의 완성에 다가간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은밀한 프로젝트를 그만 둘 리는 없다. 결혼 후에도 남들이 모르는 자신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덱스터.

이번에는 마이애미의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모종의 범죄를 벌이는 것으로 사료되는 알렉산더 “잰더” 맥컬리를 잡아 응징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관찰자’가 있으니. 이 부분에선 드라마 시즌 1에서 쿠바 난민들을 수장시킨 악당 호르헤 카스티요를 처리하는 덱스터를 누군가 자동차 트렁크에서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어쨌든 덱스터는 ‘그’(IT)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덱스터의 모교인 마이애미 대학의 교정에서 불에 타고 머리가 잘린 두 구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14살부터 덱스터와 생사고록을 같이 해온 그림자 “검은 승객”(Dark Passenger)은 어느 순간 덱스터의 곁을 떠나 버린다. 덱스터의 어두운 자아였던 검은 승객은 덱스터의 은밀한 프로젝트 수행에 항상 영감을 주고, 공모를 하고 위험을 경고하는 파트너였다. 그런 검은 승객이 아무런 말도 없이 결별을 선언하자 덱스터는 그야말로 천둥벌거숭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한다.

덱스터의 관찰자는 덱스터가 자신을 추적해 오도록 패턴화된 연쇄살인을 계속하고, 살인현장에 오직 덱스터만이 알아볼 수 있는 단서들을 남긴다. 어느 고대의 종교적 의례와 같은 패턴의 집요한 연구를 통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암호 MLK의 해석에 성공한 덱스터. 하지만 파트너 검은 승객마저 자신을 떠나고, 홀로된 덱스터는 분명 자신보다 한수 위가 분명한 ‘그’로부터 시시각각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와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최근 7명의 여성들을 살해한 희대의 연쇄살인범이 검거되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사이코패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 같다. 아직 자세한 조사결과가 발표되지 않아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대개의 경우에서처럼 유년기의 정서불안이 사회적 일탈행위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둠 속의 덱스터>의 주인공 덱스터도 유년시절 부모를 잃고, 경찰인 양아버지 해리 모건에게 입양되어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덱스터가 어려서부터 살인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해리는, 덱스터를 위한 규칙을 세워주고 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기술을 전수해주기 시작한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덱스터 본인에게는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된다.

자신의 본질을 철저하게 감추고, 해리의 가르침을 통해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바로 이 장면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최근에 체포된 연쇄살인범도 주변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하지 않은가 말이다. 전작들을 통해, 매력적인 캐릭터의 창조에 성공한 제프 린제이는 이번에는 좀 더 어려운 시도에 도전한다. 그것은 바로 “결혼”이다. 소설의 전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그”와 쫓고 쫓기는 치열한 심리전을 치르는 동시에, 덱스터는 리타와의 결혼 그리고 아이들을 둔 가정을 이루는 아슬아슬 외줄타기 모험을 벌인다.

이 부분이 말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드라마에서 나오지만, 전 남편은 가정폭력을 시도 때도 없이 저지르는 약물중독자이고, 앞으로의 남편은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리타의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밤의 완벽한 시리얼 킬러로서의 면모를 자부하는 덱스터가, 낮에는 이런 보통 사람들의 문제들로 번민하는 것은 역설적인 유머로 다가온다.

이미 드라마와 전작들을 통해 엽기적인 살인행각들이 선보여 왔지만, <어둠 속의 덱스터>에서 다뤄지는 살인 에피소드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대의 인신공양적인 희생제례의 정수로 보인다. 게다가 프롤로그에서 그리고 소설의 전개과정에서 잠깐잠깐 소개되는 ‘그’의 이야기는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하고 있다. 역시 뛰어난 스릴러 작가답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을 이용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유도하는 절묘한 방식의 접근이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었다.

추후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역시 자신과 같이 유년의 고통을 경험한 리타의 아이들인 애스터와 코디가 덱스터의 파트너인 “검은 승객”의 존재를 알아보고 있다는 설정도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과연, 덱스터는 해리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그들에게 가르침을 전수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연쇄살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블랙 유머가 넘치는 캐릭터들을 조종해서 환락과 조용한 삶이 병존하는 마이애미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제프 린제이의 글 솜씨에 반해 버렸다. 세 편의 소설을 통해 계속해서 진화하는 캐릭터의 전형을 선보여준 그가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들고 나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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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찬 여행기
류어 지음, 김시준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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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나라 말기는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침탈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을 위시해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서구 열강들이 중국에서 경제적 이권을 챙기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제국주의의 선봉 영국은 아편무역을 위해, 가장 부당한 전쟁 중의 하나였던 아편전쟁을 통해 결국 중국을 강제로 개방하고 연안무역권을 따내고, 지금의 홍콩을 할양받았다. 중국은 이러한 외환에 겹쳐, 태평천국의 난과 내부적으로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로 설상가상으로 전대미문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류어의 <라오찬 여행기>는 바로 이런 시기의 중국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당시의 사회를 비판한 소위 견책소설(譴責小說)의 백미라고 할 수가 있겠다.

주인공 톄잉(鐵英)은 지은이 류어(劉鶚)의 페르소나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과거의 길에 들어서려고 했지만, 입신하지 못하고 대신 우연한 기회에 중앙의 관리들을 도와 황하의 치수를 도우며 비로소 이름을 날리게 된다. 류어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로, 의화단 운동 같은 보수운동에도 반대를 하고, 혁명가 쑨원이 이끌던 혁명운동과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라오찬 여행기>는 류어의 유일한 소설로 알려져 있는데, 소설에서 요령을 흔들면서 인민을 구제하고 불의를 보면 못 참고 항상 약자의 편에서 그들을 도우려는 모습에 자신을 투영시키고 있었다.

소설의 가장 첫 이야기인 <풍랑에 휩쓸리는 거선> 편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류어는 자신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서구의 제국주의의 침탈이 횡행하는 망망대해에서, 시류의 휩쓸려 있는 거선은 바로 청제국이다. 뜻있는 청나라의 대신들이 양무운동과 무술개혁 등을 통해 쓰러져 가는 제국을 일으켜 보려는 노력을 했으나 그들만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기존의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틀 안에서 무언가 시도해보려는 지은이의 모습이 비춰진다. 거선에 탄 승객들은 바로 중국의 보통 사람들이다. 밖으로는 외세의 침탈에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부패한 관리들의 압정(壓政)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모습이 류어식 비유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혹리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가차 없이 수탈하는 파렴치한 관리는 아니지만, 비록 개인적으로는 청렴하지만 어떤 사건의 전후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로지 실적만을 위해 무고한 백성들을 못살게 군다. 위센이라는 혹리는 멀쩡한 백성들을 도적으로 몰아, 형틀에 매어 달아 가혹한 고문으로 하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게 하는 방법으로 주위에 악명을 떨친다. 라오찬은 이런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9장에 등장하는 <산골처녀와의 고담준론>에서는 위구라는 묘령의 처녀를 등장시켜, 송나라 때에 등장해서 중국 유학의 판세를 뒤바꾸어 놓은 성리학에 대한 작가의 비판을 은근하게 전개해 나간다. 가령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이라면 좋아하는 색(色)을 가까이 하는 것을 사문난적시하는 성리학적 접근은 옳지 않다고 이 산골처녀의 입을 빌려 강력하게 주장한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당시 왕조적 봉건제 하의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참설 같은 미신에 근거한 미래에 대한 어설픈 예측은 과학적 사고에 입각한 저자의 자각이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반증처럼 보였다.

다시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황하 주변에서 벌어지는 치수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작가 류어는 유사 이래 중국에서 치수사업이 얼마나 중요했는가에 대해 자세한 기술을 하고 있다. 민중들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관리들의 임의적인 제방 쌓기로 인해, 수해시기를 맞아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고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수해로 죽고, 재산의 손실을 당했는지 류어는 라오찬과 다른 이들의 진술을 빌어 말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한 사업이라고 하더라도, 민중들에게 엄청난 재난이 된다면 고려를 해봐야할 것이라는 사실은 현재의 위정자들도 깊이 새겨 들어야할 것 같다.

류어의 <라오찬 여행기>가 오로지 사회비판에만 치중을 했다면, 중국 현대문학의 사조로 손꼽히는 후스(胡適)이 이 소설을 두고 그렇게까지 극찬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여행기”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 소설에서 라오찬이 주로 유람을 다닌 산동지방의 절경들에 대한 묘사는 가히 탁월했다. 특히, <속 라오찬 여행기>에 등장하게 되는 태산 참배기에서는 마치 묘사가 마치 두 눈으로 직접 보는 듯하다는 느낌이 정도로 자세하면서도 생생한 기술로 독자들을 매혹시키고 있었다.

통쾌한 사회비판과 절묘한 묘사 그리고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을 보는 듯한 명징한 전개로 <라오찬 여행기>를 통해 지은이 류어는 그야말로 ‘백조의 노래’ 같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다만 아쉬운 것은, 시대를 앞서 내다보는 혜안의 부족 탓인지 보수적이다 못해 수구적인 경향들이 조금씩 엿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이런 뛰어난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역시 높이 평가할만했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과거에서 배운다’라는 명제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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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의 고백 - 법의학자가 들려주는 살인 조서 이야기
마크 베네케 지음, 송소민 옮김 / 알마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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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부터 자극적이다, <연쇄살인범의 고백>이라. 이 책의 저자는 채 마흔이 되지 않은 독일 출신의 법의학자 마크 베네케이다. 이십대에 쾰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법의학 검사관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지난 십 수 년 동안 매우 다양한 범죄들을 현장에서 경험한 바탕으로 해서 많은 저서들을 발표해오고 있다. 그의 연구 과제는 콜롬비아 출신인 희대의 연쇄살인범 루이스 알프레도 가라비토를 비롯해서, 동유럽에 뱀파이어리즘(흡혈귀를 믿는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마르크 베네케는 증인들의 진술을 믿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범죄의 현장에서 발견된 물적 증거들 다시 말해서 흔적을 믿는다. 이는 앵글로-색슨 계통인 미국이나 영국의 그것과는 다른 독일 민족 특유의 증거제일주의에 근거한 것일까. 그가 말하는 “경계의 경계”에서 각양각색의 범죄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들을 독자들에게 보여 주면서 판단 역시 독자들에게 맡긴다. 다시 한 번 뛰어난 법의학자의 냉정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책의 시작은 카니발리즘과 뱀파이어리즘으로 시작한다. 미신이 횡행하던 중세에 뱀파이어에 대한 두려움으로 프로이센과 동부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죽은 사체에 대한 시신훼손 행위가 자행되어 왔다고 한다. 망자가 산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몸이 아프고 질병에 시달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법정에서조차 그런 행위를 한 이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지 않으면서, 시신훼손 행위는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뱀파이어리즘에 대한 믿음으로 루마니아에서 2004년에 중세에서 시행되던 스트리고이(strigoi:루마니아에서 뱀파이어를 지칭하는 말)에 대한 “의례”를 거행했다고 한다. 물론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을 해서, 의례에 참가한 이들을 법원에서 금고형에 처하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의례를 정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카니발리즘은 듣기만 해도 오싹해지는 주제였다. 하위문화인 사도마조히즘 과정에서 살해된 마이베스 케이스와 콜로라도의 식인종으로 알려진 알페르드 파커 케이스가 소개된다. 1972년 실제로 발생했던 우루과이 럭비 팀이 안데스 산맥에서 불시착하게 되면서 비행기 탑승객 45명 중에 16명이 살아남게 된 사건 역시 그 중심에는 카니발리즘이 자리 잡고 있다. 1993년에 영화 <얼라이브>로도 소개가 된 적이 있는데, 역시 극한 상황에서 생존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는 어느 생존자의 진술로 매조지 된다. 그에 비하면 1980년대 초반 파리에서 자신의 여자 친구를 살해한 이세기 사가와의 진술은 정말 들어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난 뒤, 무려 29년 동안이나 인정받는 지역의 유지이자 학교 교장 선생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경력의 영국의 고든 파크의 경우는 연쇄살인의 범주에는 들어가진 않지만 해당 장에 나오는 대로 “진실을 위한 오랜 추적”이라는 말에 이보다 더 적합한 경우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의 제목으로 선정된 “연쇄살인범”의 정의에 가장 잘 들어맞는 인물들은 3부에 등장하는 독일 출신의 위르겐 바르취와 콜롬비아의 루이스 알프레도 가라지토이다. 지은이가 말한 대로, 이 둘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놀랄 만큼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유아성도착자이자, 아이들을 유괴해서 잔인하게 살해한 방법도 그렇지만 전혀 자신이 한 행위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바르취의 경우에는 자신의 범행대상을 ‘사랑’했다고까지 자신이 갇혀 있던 벽에 적어 놓았었다.

300여명의 어린이들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가라지토는 콜롬비아 언론에서 “야수”(La Bestia)라고 불렀다. 가라지토의 경우에는 당시 콜롬비아에서 진행 중이던 합산 형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에 편승해서,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했다. 그리고 종교에 귀의해서 개과천선한 삶을 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를 담당했던 전문가들은 그는 전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만약에 풀려난다면 언제라도 다시 연쇄살인을 할 인물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그 외에도 미국의 플로리다 주에 허공에서 갑자기 떨어진 시체에 대한 놀라운 사실, 프로이센 제국 시절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헨리테 빌케라는 이름의 황금공주, 그리고 천문학적 금액이 걸린 미스터리로 여전히 미결 사건으로 보이는 독일 베를린 출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라스 올리버 페트롤의 자살사건 들이 차례로 소개가 된다.

책의 후반부에서 진짜 연쇄살인범이라기 보다는 완전범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건으로 페루의 잉카 오솔길에서 자신의 아내 우슬라 글뤽 테슬러를 살해하고, 완전범죄를 가장한 이스라엘 출신의 이란 테슬러의 케이스가 있다. 지은이를 필두로 한 독일에서 파견된 실사 팀들은 직접 잉카 길에 오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치밀한 증거수집과 현장재현의 과정을 거쳐 아내를 살해하고 거액의 생명보험금을 수령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이란 테슬러의 범죄를 밝혀내는데 성공한다. 말미에서 이 사건에 참여했던 수사관들의 말을 통해, 어떠한 비용이 들더라도 의도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말살시킨 사건에 대한 범행을 밝혀내는 것이 법치국가의 기본 임무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 베네케는 이 책을 통해, 이런 다양한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범죄사건들을 소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범행과 범행자의 특징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가에 역점을 두었다”(207페이지)라고 말하고 있다. 가장 비근한 예로 뱀파이어리즘에 대한 중부유럽에서 민간의 광범위한 믿음이 그렇다. 카니발리즘은 일상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지만, “안데스의 기적”과 같은 극한 생존의 경우에 있어서는 예외적으로 분류가 되는 것 같다.

저자는 이런 사건들의 소개를 통해 어떤 해결책이나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지는 않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성도착자들의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지극히 충동적인 범죄를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정황에 따른 모든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다만 마르크 베네케가 헤르만 헤세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밝음을 이해하려는 자는 어둠”(10페이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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