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의 프랑스 일기 - 봉주르! 무지갯빛 세상에 건네는 인사 소담 여행 2
미미 글.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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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나라에 대해 현지에 살았던 이들이나 혹은 현재 살고 있는 이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재밌는 이야기도 없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미미의 프랑스 일기>의 지은이인 미미(송경아 씨)의 귀여운 일러스트와 갖가지 다양한 경험들이 들어 있는 이 책은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지은이와 비슷한 시기를 보낸 탓인지 어려서 사브레(글을 다 쓰고 나서 오탈자 검색을 돌려 보니 저절로 사블레라고 정정해주려고 한다!) 과자를 즐겨 먹으면서 프랑스를 꿈꾸었다는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미미는 장 자끄 상뻬의 만화를 무진장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때문인지 그녀의 일러스트에서 상뻬의 그림자가 엿보이는 것 같았다. 자세한 디테일의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잡아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펜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채색을 하는 기법에서도 상뻬의 분위기가 났다.

역시 프랑스에 관한 이야기답게 바게트와 에스프레소 커피에 대한 이야기가 뒤따른다. 프랑스를 이해하기 싶다면 바게트와 친해져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지은이에 의하면 그만큼 바게트 빵과 커피는 우리에게 있어서 김치와 밥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먹거리 이야기가 빠지지 않듯이 미미 역시 민생고 해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 <아멜리에>에 나오는 정원 난쟁이의 세계일주가 그냥 영화감독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실제로 로렌 지방에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했다는 이야기에 놀랐다. 역시, 이렇게 무언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다만 그 글을 읽는 이들이 <아멜리에>를 봤다는 가정 아래서 말이다. 그리고 아마 이런 자세한 이야기들은 프랑스나 혹은 파리, 프로방스를 여행하는 뜨내기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가 없는 이야기들일 테지.

두 번째 장인 <미미, 무지갯빛 프랑스>에서는 본격적인 미미의 유학생활을 곁들인 신변의 이야기들이 소개가 된다. 여행하는 이들이라면 여행지에서 만난 현지인들과 대화도 무언가 색다른 경험을 기대하지만, 아쉽게도 언어상의 문제나 혹은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끈끈한 교류에 대한 뒷이야기들이야말로 이 책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챔피언 가족으로 소개가 되는 파트릭네 테권도 패밀리 이야기와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22살 난 무슈 가토, 케이크쟁이 줄리앙의 이야기는 마냥 부럽기만 하다. 나도 절로 나도 그런 케이크 한 번 얻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더군다나 지은이가 직접 그려서 적절하게 배치한 일러스트 그림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재미 또한 여간 쏠쏠치가 않다.

그 배우기 어렵다는 불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고군분투하는 유학생의 면면이 엿보이는 이야기들 또한 흥미진진했다. 근검과 절약이라는 단어로 축약이 되는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지은이의 불어 배우기 작전은 차라리 눈물겹기까지 하다. 유학이라는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미미의 모습을, 휴식과 색다름을 경험하기 위해 프랑스나 혹은 파리를 찾은 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말미에 등장하는 간단한 프랑스식 먹거리 소개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떡뽂이 식으로 흔히 거리에서 접할 수 있는 크레이프 만들기, 양파 수프 그리고 토마토 팍시(Tomate farcie) 등은 지금다시 생각해 봐도 군침이 입에서 자르르 돈다. 마지막으로 보너스인 파리 일주를 위한 미미식 지침서는 파리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에펠탑, 센 강 위의 바토무슈, 퐁피두 센터, 푸앵 제로(Point zero) 그리고 파리의 지하를 가로 지르는 메트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네들의 모습을 멋지게 담아내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프랑스 유학생활에서의 소소한 일상들을 담아낸 글에 만족한다. 하지만 작년에 신이현 작가의 <에펠탑 없는 파리> 그리고 <파리의 스노우캣> 등의 프랑스와 파리에 대한 개성 있으면서도 깊이 있는 책들을 기존에 접해서 그런진 몰라도 독특한 미미 자신만의 칼라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혹평을 한다면, 자신의 유학생활이 담긴 어느 블로그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자신이 지내고 있는 곳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곳도 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핏 봐서는 로렌 지방 정도가 되는 것 같은데, 지방자치가 유달리 발달되어 있는 프랑스에서 그 지방 특색들이 제각각이 아니던가.

어쨌든 여전히 현재 진행 중에 있는 그녀의 여정(Voyage)이 순항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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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끼는 낙타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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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출간되자마자 바로 샀는데, 이제야 다 읽게 됐다. 지난여름 막내집게 출판사에서 재출간된 싼마오의 <사하라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싼마오 아줌마의 열혈 팬이 되어 버렸다. 사막의 모래 한 알까지 사랑해서 모국인 대만을 떠나 사하라 사막에까지 흘러든 싼마오 아줌마의 이야기가 어느 샌가, 가슴 속에 자리 잡은 모양이다.

<흐느끼는 낙타>에서는 <사하라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싼마오와 그의 평생의 파트너 시멘트 머리 털보 호세가 사막생활을 하는 동안 보고 느끼고 경험한 8가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네 보통의 삶과는 전혀 동질성 없는 그런 환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관심이 갔을까? 그건 아마도 싼마오와 호세의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과 박애 그리고 휴머니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핍박받는 사하라위 여성들과 벙어리 노예, 그리고 나중에 사하라 독립운동으로 인해 카나리아 제도로 이주를 해서 알게 된 스웨덴 이웃 카를을 보살피려는 싼마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녀의 지고한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혹자의 눈에는 오지랖 넓은 여인네의 지나친 간섭으로도 보일 수가 있겠지만, 휴머니즘이라는 인류 본성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백만 가지로 이유로 실천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보다 용기 있는 그녀의 실천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아주 어려서 중앙아시아 일대를 탐험한 헤딘의 전기를 읽고서 언젠가 꼭 한 번 광활한 사막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다. 그런데 왜 다른 곳도 아니고 사막을 꿈꾸었을까? 마치 절대고독을 담보하고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그 도도함 때문에? 도대체 사막의 무엇이 싼마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끌어당기는 마력 같이 작용하는지 궁금해졌다. <흐느끼는 낙타>를 읽으면서 싼마오가 기술한 글에서 어느 정도 그에 대한 해답을 본 것 같다. 사하라는 단지 그를 사랑하는 이에게만 자신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을 드러낸다고 했던가(125쪽). 이 얼마나 매력적인 선언이던가.

싼마오의 카메라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는 <영혼을 담는 기계>는 사진을 찍는 이로써 충분히 공감이 가는 글이었다. 개인적인 욕심만 앞세웠더라면, 어렵게 찍은 사하라위 여인네들의 사진을 버리지 않았을 텐데, 자신들의 영혼을 싼마오에게 빼앗기고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한 그들을 위해 조금의 주저 없이 필름을 뽑아내 버린다. 이 이야기는 초반에 등장하는 <벙어리 노예>에서는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주의자로서 싼마오의 면모와 은은한 공명을 이루고 있었다.

튼튼한 시멘트 머리를 한 호세와의 결혼 생활에 대한 싼마오의 기술 역시 솔직 담백하면서도 근 40년 전의 진보적인 그녀의 결혼관을 엿볼 수가 있었다. 상대방을 구속하려다 보면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는 그녀의 말은 명언이었다(216쪽). 카나리아 군도 고메라 섬의 휘파람 말에 얽힌 이야기도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흐느끼는 낙타>에서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는 바로 타이틀로 정한 <흐느끼는 낙타>였다. 1970년대 중반, 사하라의 독립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비화되는 동안 싼마오는 현지에서 예의 사건들을 직접 목격한다. 폴리사리오 민족해방전선(책에서는 유격대로 표현한다), 인근의 모로코와 모리타니 그리고 알제리까지 개입이 되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국제분쟁이 시작된다. 7만 명 남짓 하는 사하라위 인들은 민족자결을 주장하면서 독자적인 국가 건설을 꿈꾼다.

이 와중에 스페인 본국에서 유학한 파시리와 그의 아내 샤이다 그리고 오피뤼아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리고 사막을 사랑한 이방인에게도 정치적 분쟁과 그에 수반된 전쟁은 피해갈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아주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됐다. 이 이야기는 어디선가 읽어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읽어본 듯한 기시감이 전율적으로 다가왔다.

결국 어느 순간 깨닫게 됐는데, 어려서 죽어라 모으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발췌돼서 실린 글에서 이미 <흐느끼는 낙타>를 읽었던 것이다. 정말 놀라웠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이달의 명작다이제스트’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책들에서 알짜배기만을 뽑아서 실어 주곤 했던 것이다. 아마 근 이십년 전의 일이라 제목도 그 저자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막을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이 비극적 로맨스는 어린 나이에도 잊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의 감동과 재회하는 그 순간의 감동이란…….

삶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흐느끼는 낙타>가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싼마오는 언제나 사막인으로 살고 싶어 했었지만, 그녀도 결국 진짜 사막사람들인 사하라위 사람들에겐 이방인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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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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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아지즈 네신과 나의 첫 만남은 지난여름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무실 동료에게 책선물을 해주겠다고 했을 때, 그가 원한 책이 바로 아지즈 네신의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이란 책이었다. 물론 난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에 아지즈 네신의 다른 작품인 <행방불명 야샤르>를 구입했다. 하지만 정작 첫 대면은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로 낙찰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60년 전,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의 우산 안으로 들어가려던 작가의 조국 터키의 상황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아지즈 네신은 10개월간의 실형과 4개월 10일간의 유배형을 선고받는다. 물론 요 부분은 책의 본문에서는 소개가 되지 않고 맨 끝의 작가 후기를 통해 소개가 된다. 궁금했던 점을 풀어줘서 아주 고마웠다.

이 책은 바로 아지즈 네신이 유배지 부르사에서 겨울을 나던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전 오스만 터키 시절만 하더라도, 유배형을 사는 이들에게 허드렛일이라도 하게 해줘서 적어도 먹을거리와 잠자리 걱정은 하지 않았다는데 현대 터키에서 유배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그야말로 불가촉천민 같은 존재였다. 아지즈 네신의 친구들도, 동창들도 모두 그를 외면한다. 정치범인 그와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불이익 때문인 것이다. 아지즈 네신은 이미 자신을 유배형에 처한 이들을 용서했지만, 자신을 외면했던 이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날리고 있었다.

작가로서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인 화자이자 주인공인 아지즈 네신은 무엇보다 굶주림에 시달린다.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가 없어,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무장해제된 지식인의 무능력함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문학을 하는 것도 좋지만, 실질적인 기술을 익히는 것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작가의 지론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한 잔의 짜이와 빵조각을 위해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담요를 팔아 끼니를 잇기 위해 부르사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그의 뒷모습이 너무나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지식인으로써 지인이 보내준 책들을 팔아 역시 양식을 마련해 보려는 그의 망설임 역시 충분히 이해가 갔다.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작가의 우국충정만큼이나 실질적인 생존을 위한 자신과의 싸움을 나름대로의 해학으로 버무려내는 아지즈 네신의 내공이 놀라웠다. 어떻게 보면 타인에게 들어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비참했던 과거를 유머로 승화시켜 결국엔 작품으로까지 발표한 그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 역시 남 못지않다. 결국 적발되면 추가형량을 선고 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유배지 부르사를 남몰래 이탈해서 가족이 있는 이스탄불을 몰래 찾는다. 한편 부르사에서 알게 된 문학청년의 몹쓸 습관인 관음증에 대한 작가의 기술이 흥미롭다. 예의 관음증으로 대변되는 훔쳐보기는 그 개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시 계엄 하의 서슬 퍼런 군부독재 하에서 많은 이들이 즐기던 국민스포츠였다. 지휘고하 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훔쳐보기에 몰입해 있었다. 작가가 슬쩍 언급했듯이 이 훔쳐보기가 다른 사람들의 일이 끼어들기 좋아하고, 충고하기 좋아하는 터키 사람들의 국민성에 대한 은근한 풍자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확실히 유쾌하고 재밌는 책이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 놓고 보면, 희망마저 거세된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작가의 비참했던 과거를 직시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계기로 해서, 작가의 다른 책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싶어졌다.

사족으로 터키어를 전공한 이난아 씨의 번역으로 아지즈 네신의 작품과 만나게 된 행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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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고진하 글.사진 / 비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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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시즌이 시즌이니만큼 범람하는 여행 서적들과 에세이들을 많이 접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니, 기억에 떠오르는 책들은 단 한 권도 없었다. 내가 접한 여행 책들의 깊이가 없어서였을까? 그러던 올해 초에, 일본 출신의 작가 세노 갓파의 <인도 스케치 여행>을 읽게 됐다. 그 책에 읽고 나서, 인도에 대한 관심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러던 차에 고진하 목사의 <신들의 땅, 인간의 나라>는 다른 차원의 나라 인도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보다 심오한 영적인 차원의.

사실 우파니샤드란 말은 그동안 많이 들어와 봤지만 단 한 번도 그 뜻을 찾아보거나 그러진 않았다. 우파니샤드란 ‘스승이 아끼는 제자를 무릎이 닿도록 가까이 앉히고 은밀히 전해주는 지혜’를 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인도 기행에 있어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고진하 목사가 독자들에게 은밀하게 전해주는 지혜가 이 책 속에 담겨져 있단 말인가?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은이의 인도 기행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렇게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지인에게 책의 내용에 대해 설명을 했었는데 그는 내가 말하는 내용들이 지은이가 말하고 싶어 한 게 아닌 것 같다는 아주 예리한 지적을 해주었다. 사실 기독교인으로서, 힌두사상에 심취한 지은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 편견을 걷어내고 정말 이 책에서 지은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가를 들여다보았다. 인도의 신기하고 풍경과 기이한 그네들의 생활의 모습들? 아니다 그런건 모두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물질세계의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았다.

이 책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것들은 바로 궁극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 다시 말해 아트만(참자아)의 세계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는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마야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궁극의 행복에 다다르기 위해 자신의 참모습과 자아를 찾기 위한 지난한 도상에 우리는 서 있는게 아닐까. 동시에 개인적인 질문이 하나 생각났는데, 아니 설사 살면서 아트만의 경지에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아트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 아닌가 말이다. 혼란스러웠다.

힌두 철학에서 말하는 대로 브라흐만(창조자), 비슈누(유지자) 그리고 시바(파괴자)가 서로 합일과 해체를 통한 영혼의 속성을 나타낸다고 했던가. 인간은 누구나 죽음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아니 보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본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육신의 소멸과 억겁의 회귀 등의 이야기들은 인도 힌두 철학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인도 (우파니샤드) 기행이라는 제목만 보고서 이 책을 집어든 이들에게 이 책은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면의 근원적인 결핍을 다스리기 위해 세속의 행복보다는 근원적인 그 무엇인가를 기대한 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반가운 손님으로 다가온다. 신과의 진정한 합일을 위해 오늘도 노래와 악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바울(음유시인)들의 모습에서 시간이 빚어내는 환영을 초월한 구도자의 모습이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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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
전호태.장연희 지음 / 소와당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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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에 앞서 이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인가에 대해 많은 관심이 갔다. 전호태와 장연희 두 저자는 책의 말머리에 기독교인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뚜렷이 밝히고, 성경의 구약사를 커버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겠다고 선언했다. 연초에 유대인들의 삶을 다룬 책을 읽으면서 안 그래도 유대인들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아주 반가운 책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읽은 책에서 편향된 시각 때문에 즐거워야할 독서경험이 그렇지 못해서 참 아쉬워서 더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저자들이 각 장에서 밝히다시피,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의 기본 텍스트는 성경, 그 중에서도 구약성경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국가의 역사는 야웨의 약속으로 시작된다. 갈대아 우르 사람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지상명령이 떨어지고, 아브람은 야웨의 말대로 가나안 땅을 향해 나간다.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인 순종이 전면에 부상한다.

이방인들의 땅인 가나안 땅에서 타민족의 핍박 가운데, 히브리인들은 아브람(이후 아브라함으로 불리게 된다), 이삭 그리고 야곱의 대를 거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아들 요셉 대에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강타한 7년간의 가뭄으로 인해 야곱 휘하의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로 이주를 하게 된다. 저자들은 바알 신앙으로 대표되는 가나안의 토착신앙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 야웨가 이집트 고센 땅으로 그들을 인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이후 이집트의 지배계층은 이방인들인 히브리인들을 국가노예화하고, 각종 국가사업에 그들을 동원하게 된다. 결국 야웨는 모세를 그들의 지도자로 삼아, 야곱의 후손인 12지파를 이끌고 장장 40년에 걸친 광야생활을 거쳐 약속의 땅에 그들을 인도한다. 실제 거리로는 7일이면 주파가 가능한 거리를, 40년 동안이나 걸린 이유에는 이집트 땅에서 노예근성이 밴 엑소더스 1세대의 세대교체와 야웨 신앙의 정화라는 궁극적인 목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연단의 시간을 거쳐,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야웨 언약의 본질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가나안 정복전쟁을 수행할 준비에 들어간다. 하지만 계속되는 히브리민족의 우상숭배와 야웨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약속된 가나안의 정복은 판관시대와 왕정기를 거친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문자적 의미에서의 정복을 완수하게 된다. 이 투쟁의 과정은 히브리인들은 기존의 떠돌이 이방인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으로의 탄생을 의미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2000년 역사>의 전반부를 다루는 이 시기에 대한 저자들의 일관된 시선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바로 야웨와의 언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일신 야웨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신앙은 그들의 정체성을 담보한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적대적인 부족들에게 둘러싸인 히브리인들은 민족의 생존을 위해, 주변 이방민족들과 세속적인 타협을 진행하면서 자신들의 야웨 신앙과 동떨어진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 결과 다윗과 솔로몬 왕 시기에 건설된 제국은 북의 이스라엘과 남의 유다로 분열하게 되고, 멸망과 유배의 과정을 거쳐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겪게 된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주로 다뤄지게 될 내용들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가 그리고 남왕국 유다에서는 이사야가 등장을 해서 야웨를 믿지 않는 히브리인들에 대한 경고가 이어진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그리고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을 당하면서, 히브리인들의 본격적인 디아스포라가 시작된다.

하지만 70년간의 바빌론의 유수를 겪으면서 오히려 유대민족은 자신들의 신앙공동체를 정화하고 거듭남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중근동의 여느 민족처럼 통혼과 이주정책으로 타민족에 동화가 되지 않고, 야웨 신앙을 근거로 한 유대민족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신바빌로니아의 멸망 후,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이 허용된 유대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다.

이후 계속된 헬레니즘 문화에 대항해서, 유대인들은 헤브라이즘 전통을 이어 나가게 된다. 아울러 자신들의 이 모든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 다시 말해서 구원자를 기다리게 된다.

로마시대 이후, 단 한 명의 유대인도 유대 땅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게 되면서 본격적인 디아스포라를 경험하게 된 그들이 어떻게 해서 2000년간이나 돌아갈 고향조차 없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켰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해설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야웨 신앙을 근간으로 하는 부족공동체에서 출발을 해서, 판관시대 그리고 왕정을 거쳐 로마의 속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자세히 그려진다.

야웨의 약속으로 시작된 이주와 더불어 유대인들 특유의 선민의식은 오늘날까지도 중동지역의 불안요소가 되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와 세례를 통해,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깨닫게 될 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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