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의 불행학 특강 - 세 번의 죽음과 서른 여섯 권의 책
마리샤 페슬 지음, 이미선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아마 이 책을 말하는데 있어서 두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독자는 아무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출신의 여성작가 마리샤 페슬가 쓴 어느 미국 여고생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블루의 불행학 특강>은 자그마치 832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의 마리샤 페슬의 데뷔작이라는 점이다.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블루 반 미어는 어려서 나비를 채집하러 다니던 중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나이 5살 때부터, 유목민의 삶을 살게 된 블루와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의 곳곳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유랑한다. 부유한 유대인 가정 출신의 어머니와의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외국인 아버지의 짧은 결혼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 책은 블루의 삶 중에서 15살 가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 다음 해 봄까지 그녀가 다닌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스톡턴의 세인트 골웨이 사립학교를 바탕으로 해서 집중된다. 이야기는 블루와 아버지가 이 학교에서 영화 수업을 하는 한나 슈나이더라는 미스터리에 쌓인 미모의 여자 선생님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녀의 도움으로 “블루블러드”라는 미국의 여느 고등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난 '클릭(click)'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블루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블루블러드들.

<블루의 불행학 특강>은 책의 상당 부분을 어느 그룹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주변을 빙빙 맴도는 지적으로 너무나 뛰어난 여고생 블루의 자의식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뛰어난 지성을 자랑하는 아버지의 지도 아래, 어려서부터 다양한 독서를 한 블루는 곳곳에서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게다가 언제나 그녀의 아버지 가레스 교수 주변에는 준 버그(풍뎅이)라고 그녀가 명명한 여성들이 끊이질 않는다. 아버지의 짧은 연애 행각을 쥐의 임신기간에 비유하는 블루의 블랙유머가 눈에 잡혔다.

사실 <블루의 불행학 특강>의 전반부는 다소 지루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의 모티브를 떠올리게 하는 블루와 아버지 가레스의 관계, 참신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인용과 주석들 그리고 미국 고등학생들의 생활에 대한 천착이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게다가 후반에 아주 중요한 나이트워치맨들에 대한 엉터리 홈피 주소를 직접 찾아보는 열의를 가진 독자들이라면 더욱 허탈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블루의 불행학 특강>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하는 지점은 비극으로 끝난 블루와 블루블러드 그리고 한나 슈나이더의 봄방학을 이용한 인근 테네시 주와 경계한 스모키산 국립공원 등반이 끝나면서부터이다. 책의 시작에서 한나 슈나이더의 죽음으로 비롯된 이야기를 밝히고 있듯이, 평범하지만 뛰어난 여고생으로부터 블루는 한나의 죽음의 비밀을 캐는 사립탐정으로 극적 전환에 성공한다. 이때부터는 “내가 왜 이 책을 읽고 있지”하던 생각은 바람결에 날아가 버리고 본격적인 미스터리에 흠뻑 빠지게 된다. 그동안 마리샤 페슬이 책의 곳곳에 무심코 던져두었던, 실마리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쑥쑥 딸려 나온다. 긴 책을 포기하지 않고, 읽어낸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우선 마리샤 페슬은 각 장마다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고전들을 제목으로 배치하고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로부터 시작을 해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이르는 36개의(한 개는 가상의 소설) 고전들을 통해 자신이 <블루의 불행학 특강>의 소주제들을 녹여 내고 있다. 그 외에도 칠백여개에 달하는 주석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블루와 그의 아버지의 삶에 대한 현학적 태도와 현란하기 그지없는 수사의 바다가 넘실거린다.

책을 읽으면서, 중간 부분에서 지루하게 느꼈던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것은 아마 미국 청소년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블루는 또래의 청소년들답지 않게, 문학, 고전영화 그리고 심지어 모차르트의 오페라에까지 깊은 조예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조숙하게만 느껴진다, 고작 15살 난 소녀가 이제는 거의 활동을 접은 엽기가수 위어드 알 얀코빅(636쪽)을 알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수많을 책들을 읽고,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하기에는 여전히 어린 나이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런 점에서 블루의 캐릭터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왜 블루는 그렇게 ‘블루블러드’와 어울리고 싶어 했을까. 그녀의 학업성취도와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굳이 블루블러드가 아니라 다른 클릭들과 어울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게 작가가 고안해낸 장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블루의 불행학 특강>은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혹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아름다움’(642쪽)을 장착하고 있다. 특히 평범한 성장소설에서 한나 슈나이더의 죽음에서 비롯된 살인 미스터리로의 극적인 전환은 마리샤 페슬을 읽는 독자들에겐 수확의 계절이다.

아, 그리고 <블루의 불행학 특강>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의 공식웹사이트를 한 번 방문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http://calamityphysics.com/main.htm). 책에는 나오지 않는 비주얼 자료들과 블루의 졸업 앨범에 실린 사진들도 볼 수가 있다. 다만, 영어로 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할 것이다. 블루의 ‘불행학 특강’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행운이 깃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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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 Kiss of the Spider Wom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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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마누엘 푸익의 1976년 소설을 1985년에 영화화한 동명의 작품을 봤다. 감방에 갇힌 두 남자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다양한 주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를 무척 쉽게 만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화의 메가폰은 브라질 출신의 감독 헥터 바벤코가 맡았다.

배경은 남미의 어느 감옥(영화가 실제로 촬영된 곳은 브라질의 사웅 파울루다). 미성년자 추행혐의로 8년형을 선고 받은 루이스 몰리나(윌리엄 허트 분)와 정치범 발렌틴 아레기(라울 줄리아 분)이 한 감방에 갇혀 있다. 이 둘은 그들 개인의 성적 취향만큼이나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 사회 혁명을 꿈꾸는 마르크스주의자인 발렌틴과 진정한 남자와의 로맨스를 바라는 몰리나.

영화는 몰리나의 시시껄렁한 나치 영화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정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감방에서 두 남자가 무얼 하겠는가. 발렌틴은 그다지 영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굳이 몰리나의 이야기를 말리진 않는다.

몰리나가 이야기하는 영화를 나치 프로파간다로 비난하는 발렌틴. 그런 공격적인 발렌틴과 한 방을 쓰면서, 몰리나와 발렌틴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한편, 교도소장인 워든과 발렌틴이 가담한 조직을 검거하려는 페드로는 고문을 해서라도 발렌틴으로부터 정보를 캐내고자 한다. 하지만 여느 혁명가처럼 조직에 대한 신의를 지키려는 발렌틴은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직을 보호하려고 한다.

상점의 윈도우 디스플레이어였던 몰리나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발렌틴에게 털어 놓는다.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나치 영화의 줄거리보다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그는 꾸준히 진정한 남자(a real man)를 찾고 싶어 하지만, 동성애자인 그에게 사회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격렬한 비난과 8년간의 구형뿐이다. 역설적이게도, 혁명가와 동성애자 모두 자유를 꿈꾼다. 서로 다른 궤도에서 원하는 것이 일치한다.

발렌틴의 나치 영화의 줄거리는 <거미 여인의 키스>의 전개에 복선과 암시를 전달한다. 사랑과 배신, 조국애 그리고 휴머니즘 등등 통속적이긴 하지만 전통적인 주제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본 영화에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배탈이 난 발렌틴을 돌봐 주면서, 그 둘의 관계는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몰리나에 비해, 자신의 본심을 들어내려 하지 않는 발렌틴도 몰리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한편 몰리나는 교도소장은 워든과 비밀리에 거래를 해서 발렌틴으로부터 당국이 필요한 정보를 빼내는 조건으로 가석방을 약속받는다. 몰리나는 교도소장을 교묘하게 속여서 일반 교도소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맛있는 음식들을 갈취한다. 하지만 몰리나와 발렌틴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아직 소설을 읽지 않아서, 소설과 영화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가 없지만 다른 이들이 쓴 북글을 보니 원작 소설에서는 한 6편 정도의 영화가 소개된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버전에서는 달랑 두 개의 영화만이 소개된다. 예의 나치 영화 그리고 “거미 여인”이 등장하는 영화 하나 이렇게 두 개다. 거미 여인이란 이름만 들어도 팜므 파탈이 연상되는데, 이 거미 여인은 난파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남자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마치 감방에서 몰리나가 발렌틴을 돌보듯이 말이다.

지금 막 글을 쓰다가 든 생각인데, 원작가인 마누엘 푸익은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위해 교도소라는 특수한 공간에, 혁명가와 동성애자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우리 삶에 있어서 대개의 갈등은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출발이 되지 않는가 말이다.

또한 무산계급의 혁명을 꿈꾸는 발렌틴의 고백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의 무상성에 대해서도 작가는 슬쩍 언급을 하고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건널 수 없는 괴리가 느껴졌다.

마초 스타일의 발렌틴을 연기한 이제는 작고한 라울 줄리아의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역시 이 영화의 프리마돈나는 동성애자로 분해서 발군의 연기를 보여준 윌리엄 허트였다. 진짜 동성애자들을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로 보이는 섬세한 연기 선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마누엘 푸익도 동성애자였던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도 그의 작품을 원전으로 삼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소설에서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대사 부분에 대한 적확한 표시가 없어서 책을 읽으면서 조금 헷갈렸다는 글들이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그런 모호함이 없어서 아주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니,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영화의 결말에서 다시 교도소로 돌아온 카메라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의료실에 누워 있는 발렌틴을 비춘다. 그의 여자 친구인 마타가 나타나서 그들은 어느 해변으로 달려간다.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에서 항상 나오던 세피아 톤의 영상은 어느 순간, 칼라로 바뀌고 파도 소리가 철썩이는 가운데 매혹적인 주제가 선율과 더불어 노를 저어 어디론가 떠나 버린다.

<거미 여인의 키스> 소설과 영화 모두 그동안 동성애라는 낙인이 찍혀 왔지만, 실제 주제는 자유와 구속 그리고 보통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다. 인간 심리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과 놀라움으로 가득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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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 Waltz with Bashi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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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공교롭다. 어제 레바논 내전의 참상을 그린 라지 하위의 <드니로의 게임>을 읽었는데 오늘은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룬 아리 폴만 감독의 <바시르와 춤을>이란 이스라엘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을 봤다. 장장 4년에 걸친 긴 시간과 이스라엘,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 4개국 공동 작업으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는 질주하는 수많은 개들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의 감독이자 화자인 아리 폴만은 20년 전 기억을 되찾기 위해 당시 동료들을 찾아 기억의 퍼즐 조각들을 맞추기 시작한다. 때는 1982년, 19살의 아리 폴만은 이스라엘 보병 소속으로 소위 레바논 전쟁에 투입된다. 그에게 당시의 기억들을 악몽이었고, 아무 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다. 아마도 의도된 선택적 기억상실이라고 해야 할까. 그 중심에는 같은 해 9월에 벌어진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이 자리하고 있다.

배를 타고 시돈 해안에 내리자마자 폴만과 동료들을 사방에서 총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보이지도 않는 적들을 응사를 해댄다. 그들의 갈겨대는 소총의 사격 소리는 마치 사방에 적들에게 둘러싸인 그들의 조국 이스라엘이, 그 나라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단발마적 비명처럼 들린다.

애니메이션은 그렇게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옛 동료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하는 아리 폴만과 함께 전개된다. 탱크 병으로 레바논 전쟁에 투입되었던 로니로부터 당시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들은 마치 소풍가는 행렬처럼 탱크에 올라타고 레바논에 들어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뜨거운 소총세례와 연달아 폭발하는 RPG 공격이었다. 그 와중에서 동료들과 함께 도망치던 로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고, 내내 비겁하게 동료들을 내버리고 자신만 살아남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항상 파출리라는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는 프렌켈. 그들은 레바논 테러분자들을 색출해서 공격한다는 미명 아래, 민간인들이 살고 있는 거주지를 오폭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들을 오인사격으로 빼앗는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투입된 폴만과 그의 동료들은 도시의 도처에서 레바논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암살당한 바시르 게마엘의 사진들을 보게 된다. 저격병들에게 노출된 폴만 그룹이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 있을 때, 프렌켈은 동료의 기관총을 빼앗아 들고 뛰쳐나가 왈츠를 추듯 그렇게 난사를 해댄다. 광기에 사로잡힌 전쟁 가운데, 온 정신을 유지하는 게 미친 일이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지도자의 암살에 격분한 기독교계 민병대인 팔랑헤당원들은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난입을 해서 9월 16일에서부터 18일까지 3일 동안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난민촌을 파괴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양민들을(최대 3,500명) 학살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이들의 행동을 묵인한 이스라엘이 자리 잡고 있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언론인인 론 벤-이샤이가 이스라엘 사령관에게 항의를 해보지만 별무소용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간의 애니메이션 대신 당시의 실제 필름들을 보여 주면서 조용히 막을 내린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해서 나치가 2차 세계대전 중에 저지른 홀로코스트와 팔랑헤당원들과 이스라엘의 합작으로 자행된 사브라-샤틸라 학살이 중첩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래, 자신들은 언제나 희생자였다고 주장해 왔지만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잃고 타국으로 쫓겨난 신세의 팔레스타인들에겐 그들이야말로 폭압적인 침략자가 아니었던가. 그런 이스라엘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중부유럽의 죽음의 캠프에서 대대적인 홀로코스트가 진행되고 있을 때, 서방국가들이 외면했다는 비난을 자신 있게 할 수가 있을까.

마치 베트남전에서 무엇 때문에 타국에서 싸우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무수히 죽어갔던 미군 병사들처럼 1980년대 이스라엘 병사들은 레바논에서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적이 누구인지, 왜 그들이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 <바시르와 왈츠를>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폴만들에게 유일한 삶의 목적은 아수라장 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것 뿐이다. 물론 그것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다.

건국 이래 계속해서 전시 상황 아래 있어온 이스라엘은 마치 병영국가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총탄이 빗발치는 레바논 전쟁에서 휴가를 받아 돌아온 폴만은, 자신을 빼고서는 너무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자신을 걷어찬 애인은 여전히 잘 지내고 있으며, 나이트클럽에서 그 또래의 젊은이들은 무아지경에서 몸을 흔들고 있다. 그를 빼놓고서는 너무나도 정상적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레바논의 어느 농장을 순찰 중이던 폴만그룹에게 RPG 공격을 한 소년들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 중 그 유명한 <라르고> 선율이 조용하게 흐르는 가운데, 매복한 두 명의 소년들은 이스라엘 장갑차에 대한 RPG 공격을 감행한다. 모든 것이 슬로 모션으로 처리되면서, 본능적으로 응사를 해대는 이스라엘 병사들. 이처럼 평화스러운 광경 속에서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과의 대비는 너무나 비극적이었다.

유대인들은 지난 2천년 동안, 자신들의 잃어버린 팔레스타인 땅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마 그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민족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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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니걸스
최은미 지음 / 디오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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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나중에 북글을 쓸 적에, 제목에 들어간 “horny"가 주는 노골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의미를 미국출신의 랩밴드 2 Live Crew의 유명한 곡에 대한 소개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결말을 다 알게 된 지금의 감정은 전혀 그럴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책의 표지에 나온 대로 “호니걸스”를 발정난 처자들 정도에 비유하는 출판사의 문구가 현대판 어느 자유처자의 엽색행각을 유머러스하게 다룬 책이 거려니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나 예상을 벗어나는 충격적인 결말 때문에 북글의 전개가 도무지 자연스럽지가 않다.

9번째이자 마지막 에피소드를 읽기 전까지 참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모두 공중으로 휘발되어 날아가 버린 느낌이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치밀한 구성과 캐릭터들의 배치가 아주 마음에 들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친 한 마디가 나중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반전을 불러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쨌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북글을 써 보자.

<호니걸스> 클럽 멤버이자 주인공/화자인 지정인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커플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올해 33살의 독신녀이다. 그녀의 친구이자 호니걸스 클럽 멤버로 라니와 재순이 등장한다. 각자 커리어 우먼과 페미니스트의 삶을 사는 그녀들의 소소한 일상이 자그마치 다섯 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그야말로 요일팬티 돌려 입듯 둘러메치는 정인의 일상과 오버랩 된다.

그리고 남녀 간의 밀고 당기는 관계를 라니가 다니는 성당의 마인마 신부가 걸쭉한 입담으로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어디 그것뿐인가, 특이한 캐릭터들은 차고 넘친다. 뉴욕의 할렘에서 원조 춤을 배운 세계적인 댄스 테라피스트 닥터 크림빵도 등장을 한다. 출중한 미모와 뛰어난 머리를 자랑하는 정인의 고모 지라경도 한 수 거든다.

정인의 남성편력을 읽으면서 입버릇처럼 등장하는 5명의 남자들이 모두 소개될 줄 알았다. 작가의 친절함을 너무 기대했던 걸까? 미스터 그레이와 미스터 블랙으로 정인의 낚시소개는 끝이 난다. 여성작가답게 역시 세심한 여성들의 심리묘사를 하는데 있어서, 뛰어난 발군의 실력을 보여 준다. 집요하게 우리 사회의 NO 1 규범으로 결혼제도를 지목하면서, 집요한 공격을 감행한다. 그에 비하면 모노가미에 대한 그녀의 냉소는 차라리 귀엽기까지 하다. 물론 이것조차 결말의 반전을 위한 예비겠지만 말이다.

작가가 책의 곳곳에 심어 놓은 암시와 복선들을 잘못 해석한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책을 보면서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오는 요란 법석한 4총사가 벌이는 파티와 멋진 남자들이 끊이지 않는 판타지 세계가 떠오른다고도 생각했지만, 그것조차 결말 앞에선 부질없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다.

어느 노래 한 곡으로 정인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도발시킨 공기사는 그녀의 내담자가 되는 순간, 급작스럽게 소설의 궤도에서 이탈한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말이다.

가벼운 칙릿 소설 같은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로 트라우마에 빠져 버린 느낌이 들었다. 더 할 말이 없다. 작가가 책의 어디에선가 표현한 대로, 사랑은 영원한 불협화음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고통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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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잔의 차
그레그 모텐슨.데이비드 올리비에 렐린 지음, 권영주 옮김 / 이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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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중앙아시아협회(CAI: Central Asia Institute)의 공동설립자인 그레그  모텐슨의 꿈을 이뤄 나가는 과정이 마치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시작은 힘든 법이다, 더더욱 우리네 삶과는 동떨어진 이역만리 외딴 산골에 학교를 짓겠다는 이 책의 공동저자 그레그 모텐슨의 비전은 우리 현대인들이 보기에 허황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교사 출신의 부모로부터 불굴의 투지와 비전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레그 모텐슨에게 자신의 신념과 약속에 충실한 삶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였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 책의 화자인 전 산악인 그레그 모텐슨이 세계에서 가장 등반하기 힘들다는 K2 등정에 실패하면서 시작된다. 어려서 탄자니아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부모님과 함께 성장한 그레그의 손아래 여동생이 뇌막염과 간질로 죽게 되면서 그녀를 추모하고자 그레그는 K2 등정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들로 등정에 실패하고, 발토로 빙하 밑의 브랄두 계곡에 위치한 작은 마을 코르페에서 머물게 되면서 그레그의 10년간에 걸친 고난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K2 등정 실패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그레그를 정성껏 돌봐준 코르페 마을 사람들과 촌장 하지 알리에게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그레그. 독실한 시아파 이슬람교도인 하지 알리는 평생 이슬람의 경전 코란의 가르침과 기도로 살아 왔지만 정작 자신은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의 장인 학교의 건립을 원한다.

기력을 회복하고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이리어 돌아간 그레그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돈을 모으고 여가시간에 미국 각처의 유력인사들에게 자신의 취지를 알리는 내용을 담은 580여 통의 편지들을 쓴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 비해 그가 받은 기부금은 미취학 아동들의 교육이라는 대사업을 시작하기엔 미비한 금액이었다. 그러던 중, 스위스 출신의 공학자 장 회르니로부터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레그의 비전을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파키스탄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발티스탄 그 중에서도 스카르두를 거쳐 코르페까지 학교를 지을 자재들을 구입해서 운반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레그는 학교 건립이라는 큰 꿈 때문에 코르페 마을의 장애물인 브랄두 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가 더 필요하다는 계산을 넣지 못한다. 학교를 짓기 위해선, 먼저 다리부터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레그의 이런 초기의 오류들은 훗날 그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순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울러 자신의 사업을 진행시키기 위해선 거의 독립적인 단위로 활동을 하는 부족의 유력자들의 도움과 이슬람 신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도 체험을 통해 배우게 된다. 물질적인 어려움에 더해서, 무슬림 아이들을 서구식 학습방법으로 ‘타락’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전통주의자들이 반발 또한 무시할 수가 없는 요인이었다. 결국 어느 물라의 “파트와” 선언으로 인해, 이란 시아파 최고 회의에까지 자신이 추진하는 사업의 정당성을 추인 받아야 했다. 이 또한 그레그의 학습의 과정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종교지도자들의 승인도 다른 요소들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한 번은 파키스탄 서부의 와지리스탄에까지 지평을 넓혀서 학교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러 갔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장단체에 억류되는 경험도 하게 된다. 게다가 파키스탄의 이웃한 아프가니스탄의 정세가 친소 나지불라 정권과 탈레반의 내전으로 격화되면서 수많은 아프간 난민들이 파키스탄 국경으로 몰려들면서 닥터 그레그를 찾는 손길은 늘어가기만 한다.

그런 와중에 그레그는 평생의 반려자이자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해 주는 타라 비숍을 만나, 단 6일 만에 결혼하는 로맨틱한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는다. 하지만 책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일 년에 수개월씩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파키스탄과 아프간의 변경에서 일하는 남편을 내조하는 타라가 진정한 영웅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이 갔다.

그레그의 비전이 조금씩 이루어져 가고 있는 가운데, 9-11 사건이 터지고 난 뒤 급격하게 반 이슬람 정서가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확산되고,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파키스탄과 아프간에서 반미주의가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진다. 미국의 부시정부는 군사적 방법을 (이슬람) 테러를 근절시키려고 하지만, 이것은 이슬람 정신의 핵심인 정의, 관용 그리고 사랑에 대한 몰이해로 시작된 잘못된 전쟁이었다.

미국의 헤게모니를 좌지우지하는 군산복합체에게 천문학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이런 군사행동보다 차라리 그레그가 인도하는 중앙아시아협회 같은 민간단체의 방법이 훨씬 낫다는 주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학교에서 교육을 통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계몽이 오늘날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키스탄과 아프간 산간마을에 대한 교육의 부재를 틈 타, 사우디아라비아의 출신의 부유한 셰이크들이 오일달러를 퍼부으면서 만들어낸 모스크와 마드라사가 이슬람 청년들을 그릇된 지하드로 내몰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으로 민간인들에 대해 저지른 범죄행위 또한 비판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인도주의에 근거해서 파키스탄과 아프간의 오지 마을들에 학교를 세우려는 그레그와 그의 동료들의 노력이 폄하 되서는 안 될 것이다. 책을 읽다 보니, 그레그 개인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음을 볼 수가 있었다. 서구인들에게는 익숙한 개념인 시간약속과 같은 사업상의 절차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발티족 코르페 마을의 촌장인 하지 알리에 의하면 소위 문명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그들의 입장으로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의 최소 단위인 찰나에 불과했다. 학교세우기에 조급해 하는 그레그를 보고, 작고한 하지 알리가 남긴 “바람의 소리를 듣게”라는 말이 떠올랐다.

처음에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그레그 모텐슨에게 자신의 비전의 첫 발자욱을 내딛게 해준 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 제런이 학교장으로 있는 학교에서 파키스탄의 어린 학생들을 위해 미국 초등학생들이 모은 1센트의 힘이었다.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그 아무도 줍지 않는 하찮은 1센트 짜리 동전이 바로 산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레그 모텐슨이 K2를 정복했다면, 위대한 산악인으로 기억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실패가 전화위복이 되면서 산에 오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일을 해낸 사람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 그레그 모텐스의 <세 잔의 차>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의 사이트를 찾아보세요. 영문 사이트입니다. http://www.threecupsoftea.com/

*** 내가 찾은 오탈자
1. 마드라스 -> 마드라사 (352페이지)
2. 이슬라마바다 -> 이슬라마바드 (353페이지)
3. 우르자 -> 우즈라 (407페이지)
4. 스카루드 -> 스카르두 (475페이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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