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적인가 동지인가 인물로 읽는 한국사 (김영사) 9
이이화 지음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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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책은 작가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을 한다. 특히 역사를 다룬 책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대는 적인가 동지인가>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운 이이화 선생과 김영사의 역작 “인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 중에서 9번째 책이다. 작년 1월에 1권을 시작으로 해서 올해 2월까지 모두 10권의 책이 나왔다. 이이화 선생의 책과는 첫 만남이었는데 우선 읽기 쉬운 역사책의 출간이라는 대의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되었다.

이이화 선생은 머리말에서 역사의 주역은 누구인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구태적인 영웅사관에는 반대하지만, 또 지나온 유구한 역사가 특정 인물들에 의해서 진행되어져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민초들의 삶 역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기록은 사서에 실려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가장 가까운 조선의 역사만 하더라도 몇 백 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1차 사료들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이이화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경쟁관계에 놓여져 있었거나, 혹은 목숨은 건 사투를 벌였던 또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격려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던 다양한 인물군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인물들의 선정한 이유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보통의 경우 처음부터 책을 읽는데 <그대는 동지인가 적인가>를 펼쳤을 때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송병준과 이용구>였다. 구한말 대한제국을 일제에게 팔아넘기는데 있어서 가장 앞장섰던 이 두 인물에게 이이화 선생은 가차 없이 “매국노와 민족반역자”라는 레테르를 붙여 주었다. 작가의 서릿발 같은 재단이 그들에게 가해졌는데, 과연 이 친일주구들이 살아 있다면 어떤 변명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조선 초에 극렬하게 대립했던 수양대군(훗날 세조)과 김종서의 충돌은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숙부가 어린 조카의 제위를 찬탈한 쿠데타로 그 어떤 명분도 설 수가 없는 명백한 반역이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군권과 신권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보게 된다면, 일방적으로 수양대군의 전횡만을 탓할 수도 없는 문제인 것 같다. 이런 이이화 선생의 문제 제기는 계유정난 이후, 단종 복위를 꿈꾸는 성삼문과 신숙주와의 관계에서도 재현된다.

조선 최고의 명군이었던 세종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성삼문과 신숙주의 관계는 계유정난을 계기로 갈라지게 된다. 국가/국왕에 대한 충성이라는 유가의 도의 차원에서는 성삼문의 충절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문화와 학문에 대한 기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신숙주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현실과 이상에서의 괴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얼마 전에 읽은 <칼의 노래>에서 작가 김훈 선생은 일방적으로 원균에 비해, 이순신의 손을 들어 주었다. 아무리 선조가 전후에 편파적인 논공행상을 했다고 하더라도 원균도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일등공신에 올랐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만약에 선조가 터무니없이 은상을 베풀었다면 조선조의 그 깐깐한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이화 선생이 밝힌 역사적 사실에 의하면, 이순신과 원균 간의 갈등의 소지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순신이 자초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세의 평가는 한 사람은 성웅(聖雄)으로 추앙을 받고,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간웅(奸雄)으로 지탄을 받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가 있겠다.

작가가 대중적인 역사 읽기를 염두에 두고 저술을 해서 그런지 책 읽기에는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역사를 전공해서 그런진 몰라도, 등장인물들을 좀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깊이 있는 역사의 라이벌들을 조명해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리고 라이벌 구조가 조선이라는 특정시대에 편중되어 있는 것도 옥의 티라고 할 수가 있겠다.

여러 유형의 라이벌들이 <그대는 적인가 동지인가>를 통해 소개되고 있는데, 특히 국난의 위기 중에 서로 대척점에 서 있던 인물들이 국가를 위해 간담상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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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네이크 스톤 -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보물
제이슨 굿윈 지음, 박종윤 옮김 / 비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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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슨 굿윈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찾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스케치)

이스탄불, 지금은 터키 땅이지만 고래로 동양과 서양을 잇는 관문으로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삼은 이래 콘스탄티노플로 불려왔다. 그 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가 정복하면서 터키의 땅이 되었다. 이렇게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 맞은편에 자리 잡은 이스탄불은 고대와 현대가 함께 존재하는 공간이다. 영국 출신의 작가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비잔틴 역사를 전공한 제이슨 굿윈은 바로 이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하는 일단의 연작들을 발표했고, <스네이크 스톤>은 두 번째 이야기에 해당한다. 이미 그 첫 번째 이야기인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이 우리나라에 지난 2007년에 이미 소개됐다.

제이슨 굿윈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터키 궁정의 환관(eunuch) 출신인 야심(Yashim)이다. 야심은 오스만 제국의 30번째 술탄인 마흐무트 2세(재위기간 1808-1839)의 봉신으로, 비록 신분은 환관이지만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지닌 터키 지식인의 전형이다. 개혁군주 마흐무트 2세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터번을 두르고 다니지만 그에게서 일체의 무슬림이 가진 종교색은 보이진 않는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작가의 중립적인 태도라고 할까.

이야기는 이스탄불의 모처에서 일어나는 린치와 살인사건으로 시작된다. 역시 팩션 소설들의 장기인 살인과 미스터리가 빠질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엉뚱하게도 오늘날로 치면 흥신소업을 하며 조용하게 살려고 하는 야심의 목을 죄어온다. 야채장수 조지가 린치를 당하고, 책방주인과 자신에게 도움을 청해왔던 프랑스인으로 자칭 고고학자라는 르페브르가 살해당하면서 야심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뿐이다.

미스터리의 중심에는 1453년을 끝으로 역사상에서 사라져 버린 천년제국 비잔티움의 전설이 서려 있다. 터키군이 콘스탄티노플로 막 난입을 하기 전, 아야 소피아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 집전을 했던 총대주교가 의전 때 사용한 성찬 도구들의 향방이 관건이다. 혹자는 성배라고도 하고, 의견이 분분하다. 작년에 읽었던 존 J.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 삼부작이 이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도.

굿윈은 미스터리에 으레 등장하는 숨 막히는 추격전이나 냉철한 추리를 해내는 멋진 캐릭터 대신에, 그랜드 바자르로 대표되는 미로와 같은 이스탄불의 거리들을 삽입하고 온전하지 못한 존재인 환관 야심을 기용한다. 오스만 제국의 환관 출신인 야심은 그리스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로 된 소설을 자유롭게 즐긴다. 게다가 또 한 요리하면서, 미각적인 즐거움까지 선사해주고 있다. 터키 음식이라고는 고작해야 케밥 정도 밖에 모르는 나에게, 아주 다양한 터키 음식의 소개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기행>에서 언뜻 본 음식들이 떠올랐다.

작가는 현재의 이스탄불을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이스탄불의 세 가지 정체성을 각각 고대, 중세 그리고 근대의 개념으로 치환시키면서 천수백년을 이어온 오늘날의 이스탄불을 너무나 매력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다. 물론 그 중심에서는 ‘물의 도시’(어쩌면 이 표현이 이 소설의 키워드인지도 모르겠다)와 유스티아누스 대제가 건립한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아야 소피아가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제이슨 굿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중적인 신화적 요소들을 <스네이크 스톤>에서 많이 채용하고 있다. 클라이맥스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보물을 찾아 지하 수도를 헤매는 아멜리에와 야심의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테세우스와 아드리아네의 근대 버전이었다. 미궁을 벗어나기 위해, 실타래를 푸는 아멜리에의 모습에서 예의 장면이 바로 연상이 되어졌다. 그리고 아마 작가의 프랑스 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평생 동안 프랑스 파리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야심이 당시 프랑스의 유명작가들인 발자크와 스탕달을 읽는 장면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아주 구체적인 작품의 이름까지 등장을 하는데 <고리오 영감>과 <적과 흑>이 그것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 중의 하나는 도대체 이 팩션의 시대적 배경이 언제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 나의 궁금증은 책을 읽으면서 찾아낸 하나의 단서로 바로 풀렸다. 154쪽에서 키오스 섬의 학살 사건(1822)을 언급하면서,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의 일이었다는 기술이 나오는데 그것으로 이 책의 시간적 배경이 1838년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었다. 또 하나의 미스터리가 아주 쉽게 풀렸다.

자신의 성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야심의 캐릭터는 아주 매혹적이다. 이스탄불의 터줏대감, 미로 같은 도시의 곳곳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술탄의 모후라는 든든한 빽도 가지고 있다. 프랑크 여인 아멜리에 르페브르와의 스쳐가는 로맨스 처리도 일품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랄라(실권을 지닌 부유한 가문에 봉사하는 신뢰할 만한 환관:45쪽) 야심의 다음 모험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야심의 세 번째 이야기인 <벨리니 카드(Bellini Card)>가 미국에서는 이번 달에 출간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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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꿈 - 당신은 어떤 시간에 살고 있나요?
앨런 라이트맨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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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문에서 어느 신예 작가의 내 삶의 책인가 하는 코너로 이 책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 그 글에서 이 책이 너무 좋아서 지인들에게 자주 선물하곤 했다는 말이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책이길래 하는 생각으로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을 해보니, 절판되었단다. 온라인 헌책방을 샅샅이 뒤졌어도 <아인슈타인의 꿈>은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다산북스에서 재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 자리에서 공중부양이라도 할 듯이 기뻤다.

이 책은 20세기 초반에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실존 인물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특정 시기, 1905년을 그린 소설이다(이 해는 그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기념비적인 해이다). 글쓴이는 물리학자 출신의 앨런 라이트맨이다. 화려한 그의 경력을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리학자이면서도 인문학의 소양을 두루 갖춘 지식인이라고 해두자.

소설의 배경은 스위스 베른이다. 도시를 굽어 흐르는 아레 강, 그리고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명인 마르크트 거리와 베른 동쪽의 니데크 다리를 구글 맵의 도움으로 찾으면서 미지의 도시에 대한 윤곽을 잡아냈다. 참 세상 좋아졌다. 전지적 시점의 작가는 “시간은 원이다”라는 명제 하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바로 원형(圓形)의 순환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문득 기시감, 데자뷰(deja vu)가 떠올랐다. 더불어 불가에서 말하는 억겁의 윤회도.

작가는 미래에서 온 나그네를 임시주인공으로 해서 ‘만약에’라는 매혹적인 가정으로 독자들에게 시간의 일회성에 대해 각인시켜 준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시간의 진리,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를 조각한다는. 그리고 갑자기 가로, 세로 그리고 높이라는 세 가지 가능성으로 어떤 일들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이론적 설명이 불쑥 튀어 나온다. 놀랍다, 마치 오래 전에 본 영화 <런 롤라 런>의 감독 탐 튀크베어처럼 시간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매 순간마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하면서 살지만 그 중요성에 대해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중요성에 대해 정말 심각하게 깨닫게 된다면, 바로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가 문득 시간의 본질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명명한 “시간의 아티스트”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던 중에 시간을 이해하고 싶게 되었다고 하던데. 그 이유가 뭐래더라, 신에게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라고? 내가 보기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절대적이면서도 너무나 상대적이다. 게다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엉켜 있는 느낌이다. 앨런 라이트맨 같은 물리학자처럼 구체적으로 뭐가 어때서 그렇다고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뜬금없이 등장하는 세계 종말에 대한 가정은 인간들의 내면을 아주 조금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해 준다. 모두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면서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말이다. 아마 누구나 세상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에게 허락되지 않았거나,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어느 순간 앨런 라이트맨의 전지적 시점에서 진행되던 책은 드디어 아인슈타인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곧 다시 그 이야기는 작가의 시점으로 돌아간다. 곧 이어 등장하는 계절에 따른 사람들의 심리묘사는 탁월하면서도 유쾌한 경험을 제시해준다. 질서 가운데 살기를 원하면서도, 무질서를 원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라고나 할까. 봄기운이 뻗치면 모두들 무질서를 받아들이고, 다시 여름이 오면 질서정연하게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앨런 라이트맨의 서정적인 스위스 베른의 곳곳에 대한 풍경 묘사는 가히 예술적이다. 공학도 출신의 작가가 논리적인 글뿐만 아니라 이런 멋진 묘사의 기술을 보여준다니 놀랍기만 하다. 게다가 일상의 삶을 통해, 그 복잡하고 어렵다는 상대성 이론에 독자들을 이끌고 가는 솜씨는 역시 대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인간이 자신의 인식 영역 밖에 존재하는 시간의 존재에 토론 이야기는 일품이었다(103쪽). 더 나아가 그는 이 진지한 토의를 시간미학으로까지 승화시킨다.

이 책에는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유이하게 실존이 확인되는 유일한 인물로 그의 취리히 시절부터 친구였던 미켈레 베소(Michele Angelo Besso, 1873-1955)가 등장을 한다. 공교롭게도 아인슈타인과 같은 유대인이었고, 실제로 베른의 특허 사무실에서 함께 일했었다. 과도하게 연구에 매달리는 아인슈타인을 진정으로 걱정해주는 카메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꿈>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도대체 시간이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 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을 해봤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한 시간에 대한 논의는 자못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과학 계통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어서 그런진 몰라도, 개인적으로 인문학적 접근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이 우주에는 절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진리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로 인해 그 절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 새삼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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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의 개 -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의 띠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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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처음으로 일본을 대표한다는 사진가 후지와라 신야의 전설 같은 여행에세이 <동양기행>을 읽었다. 예의 책을 읽고, 같이 수록된 사진들을 보면서 보통의 사진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낯선 이국의 풍경만이 아닌, 인간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번에 <황천의 개>란 묘한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또 어떤 책일까 하는 호기심이 샘솟았다.

<황천의 개>의 구성은 낯설다. 우선 이야기는 일본의 패전 50주년인 1995년 3월 20일에 발생한 도쿄 지하철의 사린 가스 테러로 시작한다. 사건의 주범은 신흥 사이비 종교집단인 옴진리교를 믿는 신도들과 그들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 일본에서는 같은 해 초에 발생한 한신대지진(고베대지진)과 함께 한 시대의 종언처럼 받아들여진 큰 사건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았었다고 한다.

포토 저널리스트인 후지와라 신야는 공업화와 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성장과 경쟁 일변도의 삶을 달려온 일본인들의 병리적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옴진리교의 교주의 고향인 구마모토 현의 야쓰시로를 방문해서, 미나마타병으로 알려진 수은공해와 아사하라 쇼코의 원념에 찬 사회에 대한 복수의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글은 작가가 20대에 부모와 연인 그리고 대학마저 죄다 포기하고 찾았던 인도로 공간이동을 한다. 마치 작가의 이전 작품인 <인도방랑>의 후속편인 것처럼. 후지와라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서 소멸하는 인간의 육신을 날마다 지켜보면서 개인의 번뇌의 화살을 소진하고, 진아(프르샤)를 찾는 수행에 들어간다.

후지와라는 그 과정을 굳이 여행이라고(혹은 방랑) 부르는데, 이 여정 가운데 많은 가짜 구루지(도사)들을 만나게 된다. 계급적인 종교에 대해 계속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작가는 명상과 수행이라는 미명 하에 서구의 소위 깨인 지식인들로부터 금전과 성을 갈취하는 얼치기 구루지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특히 4번째 장인 <히말라야의 할리우드>에서 눈속임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이들이 벌이는 할리우드 쇼같은 공중부양의 허상, 다시 말해서 환영(마야)을 폭로하고 있다.

그 다음 장에 등장하는 같은 일본인 여행자 출신의 Y와의 만남에서는 1960년대 말 일본에서 학생운동의 실패에 좌절하고, 티베트, 중동 그리고 인도를 찾은 수많은 여행자들의 부질없는 환영을 다루고 있다. 이는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인도를 찾았던 아사하라 쇼코와 그의 추종자들의 그릇된 종교관과 진리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옴진리교의 모래성 같은 이데올로기들을 분석해낸다.

이 책을 읽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후지와라가 갠지스 강에서 우연히 만난 “황천의 개”와의 조우는 가히 충격적이다. 책에 실린 같은 제목의 사진을 한참을 보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사진이가 하고 한참을 지켜봤다. 천부인권사상에서 비롯된 현대사회 인간의 존엄은 죽음이 일상생활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삶의 리얼리티와 병존하고 있는 인도에선 생로병사의 근원적 진리 앞에서 너무나 보잘 것 없게만 느껴졌다.

구루지들의 사기 행각에 대한 설명은 예전에 봤던 할리우드 영화 <구루>(2002)의 그것과 내 기억 속에서 오버랩되고 있었다. 인도의 신비주의에 현혹된 미국의 부유층과 구루 행세를 하면서, 그들의 돈을 뜯어내는 사이비 구루의 작태가 <황천의 개>에 등장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환각제를 먹이고 공중부양 쇼를 벌이는 프랑스 청년의 패러디처럼 느껴졌다.

얼치기 구루들이 사람들을 속이는데 써먹은 문구가 계속해서 화두처럼 머리에서 맴돌고 있다. 우리는 모두 환영이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역시 환영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린 모두 미아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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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트레커 -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커피 순례자
딘 사이컨 지음, 최성애 옮김 / 황소걸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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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카페인 탓일까? 가끔 커피를 마시긴 하지만, 아직도 커피 맛을 모르는 것 같다. 세계에서 석유 다음으로, 교역량이 많다는 커피를 다룬 책이라는 점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공정무역(혹은 대안무역:fair trade)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읽게 됐다.

미국 변호사 출신으로 <자바트레커>를 쓴 딘 사이컨은 어느 날 판에 박힌 듯한 변호사 업무에서 벗어나 커피를 볶고, 커피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 더 궁극적으로 커피를 직접 재배하는 이들에게까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게 해서 <자바트레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딘 사이컨은 커피 재배 농부들을 만나기 위해, 장거리 여행과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커피의 진실에는 아프리카에서, 남아메리카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 자신이 소중하게 재배한 커피를 제 값을 받지 못하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 거의 갈취 수준으로 약탈당하고 있는 커피 농부들의 눈물 어린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커피를 통해 얻는 대부분의 수익들은 커피 경작자들이 아닌 중간상인들(이 책에서는 코요테라 부른다)과 부패한 관료들 그리고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흩뿌려진다.

게다가 이런 영세한 커피 농부들의 마을에는 학교도, 건강을 지켜줄 제대로 된 보건소도 없다. 아니 무엇보다 커피 재배를 위한 깨끗한 용수마저도 부족한 실정이다. 저자는 공정무역 뿐만 아니라 박애주의에 입각해서 어려운 이들에게 자선사업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당하게 커피를 재배해서 세계 경제에 편입할 수 있는 방법들을 함께 고민한다.

스타벅스 같은 대기업들은 오로지 생산단가를 낮춰서 소비자들로부터 최대한의 수익을 내려고 하지만, 그에 따른 고통들은 커피 농부들에게 가중될 뿐이다. 열심히 커피나무를 재배하면서도 그들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채무만 쌓여간다. 이제 커피가 우리 생활에서 거의 필수기호품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바로 이 시점에서 딘 사이컨이 제시하는 것이 바로 공정무역인 것이다. 지구상에서는 수많은 커피 로스팅 회사들이 있지만, 그들은 다만 제품 다시 말해서 커피를 사들일 뿐이다. 딘 사이컨의 딘스 빈즈(Dean's Beans)와 코퍼레이티브 커피스(Cooperative Coffees)에 참여하는 파트너들은 질 좋은 커피뿐만 아니라 그 커피를 생산해내는 이들의 생활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은 세계각처에서 커피 농부들의 위생환경개선, 섭생의 문제, 빈곤퇴치, 보건의료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자바트레커>는 오늘날 우리가 즐기고 있는 커피문화에 대해 시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접근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중앙아메리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1993년 저자가 과테말라 군부독재가 종식된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선거에 국제감시단원으로 활동한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다. 멕시코를 가로 지르는 “죽음의 열차”에 얽힌 비극적인 이야기들도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딘 사이컨이 페루의 팡고아 마을 사람들을 도운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 이후 그들의 삶에 대한 스케치 또한 인상적이었다. 대학도시 레온에서 콘트라 반군과의 내전으로 장애를 입은 이들을 위해 만든 카페 벤 린더(Cafe Ben Linder)의 설립 과정 또한 일시적인 지원이 아닌 지속적인 자활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즉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이 책이 그렇게 심각한 주제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딘 사이컨은 사회적인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체험한 일들을 유머스럽게 다루고 있다. 특히 마지막 장인 파푸아 뉴기니를 방문했을 때, 기껏 배운 현지어로 치명적인 실수(?) 에피소드는 너무나 재밌었다.

<자바트레커>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는 공정무역의 상황이 어떤가 알아보게 되었다.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경제의 폐해가 들어나게 되면서 많은 이들이 공정무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류산업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전국에 산재한 생협들을 중심으로 유기농 제품과 공정무역 라벨을 단 제품들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얼마 전, 찾았던 <아름다운 가게>에서 공정무역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유기농 인증을 받은 공정무역 제품의 커피를 파는 것이 생각났다. 주체적인 소비자의 입장에서 ‘착한 소비’로 세계 경제에 이바지하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일깨워준 <자바트레커> 독서였다.

*** 책을 읽으면서 참조하면 좋은 사이트 

1. 딘스 빈스 (http://www.deansbeans.com

2. 코퍼레이티브 커피스 (http://www.coopcoffe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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