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드라마 한 장으로 보는 지식 계보도 1
최복현 지음 / 풀로엮은집(숨비소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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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화의 세계에 푹 빠져 있다. 특히 그리스 신화를 다룬 책들인 시장에 차고 넘친다. 하지만 대개 퓨전 스타일의 책들이라 단편적인 접근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오리지널에 대한 해갈이 필요한 시점에, 최복현 작가의 <신화드라마>는 그리스 신화 읽기의 정공법을 제시해 준다.

신화는 처음 만들어진 이래로 계속해서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 게다가 신화 간의 유사성까지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 이야기는 고구려 유리왕설화와 너무나 유사하다. 동서양의 문화적 교류가 거의 불가능했던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유사성을 가질 수가 있었을까. 아마 그 단서는 모든 서양 문화의 원류를 이루는 그리스 신화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 같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들의 개념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인 신들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들은 서로 반목하고, 다투고, 사랑에 눈이 멀고 그야말로 인간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모든 분야의 이야기들을 커버하고 있는 신화야말로 스토리텔링의 시원(始原)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신화를 읽어 왔지만, 올림포스 12신 이전의 시기에 대해서는 기억이 희미하다. 이에 대해 최복현 작가는 꾸준한 신화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신화드라마>를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속이 다 후련했다. 태초에 카오스(chaos) 상태에서(작가는 굳이 카오스를 신으로 규정한다), 모든 신들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우라노스와 가이아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태어난 6명의 티탄신족과 우라노스간의 투쟁을 그린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바로 신화의 시기에서부터 이 테제는 발현된다. 자신의 아버지를 거세했던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식들이 반란을 염려해서 자신의 아내인 레아가 낳은 자식들을 차례로 삼켜 버린다. 하지만 막내아들 제우스가 레아의 기지로 자신의 숙명에서 벗어나, 소위 티타노마키아(제우스와 크로노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뼈대를 갖추게 된다. 카오스(혼란)에서 벗어나, 코스모스(질서)의 시기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왜 신들이 머무는 장소가 그리스의 올림포스 산이 되었는지에 대한 작은 비밀도 아주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신화드라마>를 읽는 보람이 있었다.

3부 <신의 후예가 세운 인간의 나라>라는 장을 다루면서 최복현 작가는 제우스의 바람기를 언급한다. 제우스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인 헤라의 시기와 질투 가운데, 제우스는 수많은 여신과 인간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다. 티탄신족과 연이은 기간테스들과의 전쟁을 위해 특별난 영웅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제우스는 강력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알크메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불세출의 영웅 헤라클레스는 그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난 역사시대에, 인간들이 세운 왕국에서 왕의 권위를 위해 자신들이 신의 후손임을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통치 질서를 위해서라도 지배자와 신과의 관계설정은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런 측면에서, 제우스는 희대의 바람둥이가 되었던 것이다.

신화시대를 마무리 짓는 트로이 전쟁에서 두 패로 나뉘어져, 인간 세계에 공공연하게 개입하는 신들의 모습이 흥미진진하다. 신들의 결혼식장에서 불화의 여신이 던져 주고 간 ‘황금사과’를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주라는 발언이 10년 대전쟁의 발단이었다. 결국 이 판정을 맡게 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고, 아프로디테가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안겨 준다. 하지만 문제는 헬레네가 이미 유부녀였단 사실.

결국 이 갈등은 트로이의 멸망으로 끝나고, 트로이의 후손 아에네아스가 오늘날의 이태리 로마에 정착을 하게 되면서 고전 신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계도를 보는 것 같은 난해함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읽어갈수록 기본기에 충실하라는 작가의 의도를 알 수가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가 서로에 대해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록으로 딸린 “한 장으로 보는 그리스 신화 계보도”가 아주 유용했다.

이런 멋진 계보도를 만든 작가와 출판사에 박수를 보낸다. 이 한 장의 계보도만 있으면, 그 어떤 낯선 이름이 등장하더라도 길을 잃지 않고 그리스 신화를 여행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복잡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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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신화 - 그림에 깃든 신화의 꿈
황경신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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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신화에 관심이 많았다. 역시 신화의 기본 스텝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로마신화를 죽어라고 읽던 시절이 있었다. 어려서는 그 신화의 소스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작가가 누구인진 중요하지 않았다. 꽃말로부터 시작된 나의 신화 여정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 막 읽은 <그림 같은 신화>는 작가의 감성을 섞어 놓은 16개의 편지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니 굳이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작가가 느끼는 대로 고전 그리스 신화에서 임의로 고른 16가지 이야기들에 자신의 감정과 해석들을 풀어 놓는다. 여느 책과 다른 점이라면, 예의 신화들을 소재로 한 명화들의 현시(顯示)라고나 할까.

책의 표지는 워터하우스가 그린 판도라가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인간을 사랑해서 불씨를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 형제를 벌하기 위해, 신들이 만든 피조물인 판도라. 그녀의 아름다운 유혹을 마다하지 않을 거라는 신들의 계산은 적중했다. 물론 교활한 신들은 형이 아닌 보다 쉬운 상대인 에피메테우스를 골랐지만 말이다. 판도라의 결혼지참 선물로 보낸 예의 “판도라의 상자”에서 인간의 모든 욕망들이 훨훨 날아가 버리고 희망만이 남았다고 했던가.

황경신 작가는 판도라의 이야기에서 보여지는 동지애적 연민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특히 메두사와 메데이아의 이야기에서는 그들을 위해 적극적인 변호에까지 나선다. 메두사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자신을 유혹한 신이 아닌 자신에게 내린 형벌을 받는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신들의 판단으로 피해자에게 고통이 추가된다. 사랑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자신이 가진 마법과 거래하는 것만 배워온 메데이아는 사랑도 같은 방법으로 얻으려고 하다가 낭패를 당한다.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이야기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흑인 오르페>가 떠올랐다. 물론 배경은 브라질의 유명한 리우 카니발이지만, 신화의 본질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전혀 변질되지 않았다. 리라와 노래 명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짧은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나고, 하데스의 지하세계로 내려간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오르페우스는 죽음마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장기인 음악으로 하데스를 설득시켜,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데려오는 순간 하데스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실패한다. 신화에 나오는 모든 터부(taboo)들은 깨지게 되어 있다. 판도라가 그랬고, 프시케가 그러지 않았던가.

오르페우스 이야기에 소개된 그림 중에서 재밌는 건 17세기 롤란트 사버리가 그린 <오르페우스>에선 오르페우스가 연주하는 악기가 U자형 현악기인 리라나 키타라가 아닌 바이올린이라는 점이다. 신화의 시대적 반영이라고 해야 할까? 재밌는 표현이었다. 21세기 오르페우스라면 전자 기타를 뜯고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피그말리온의 이야기에 대해서 작가는 이기적 사랑의 전형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아니 한술 더 떠서 비겁하다고까지도 한다. 피그말리온은 조각가라라는 말도 있고, 왕이라는 말도 있다. 여성에 대해 환멸을 느낀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조각인 갈라테이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남녀의 사랑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랑으로 치환이 되면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통제권을 주장하는 피그말리온(남자)에 대한 비난일까. 하지만 장 레옹 제롬이 그린 키스의 순간에서는 전혀 그런 점이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다. 다만, 지고지순한 사랑의 순간만으로 기억이 될 뿐인데, 역시 한 가지 텍스트라고 하더라도 보는 시선에 따라 백만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 하나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많이 봐온 워터하우스의 그림 뿐만 아니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라는 매력적인 화가를 알게 된게 큰 수확이었다. 그가 얻지 못해 안타까워한 사랑이었던 제인 모리스를 모델로 한게 분명한 몇몇 그림들과의 만남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작가는 조지프 캠벨의 글을 인용하면서, 신화의 원형적인 모습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윤리적이면서 초월적인 존재이기 보다는 지극히 인간들의 모습에 가깝다. 우리 인간들처럼 분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사랑하는 모든 감정들의 원형을 보여준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지난 수천년 동안 신화의 세계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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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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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게 어마어마한 거금을 손에 쥐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경찰에 신고하겠는가, 아니면 자신이 아무도 몰래 그 돈을 챙길 것인가. 이런 아주 간단한 가정으로 스콧 스미스의 놀라운 데뷔작 <심플 플랜>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내는 고도의 심리극을 전개한다.

장소의 배경은 미국의 중서부에 위치한 오하이오 주의 작은 마을 아셴빌. 사료상에서 부매니저이자 회계사로 일하고 있는 행크 미첼은 임신 8개월의 멋진 아내, 번듯한 직장을 지극힌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형인 제이콥과 그의 절친 루는 그렇지 않다. 보통 사람의 눈에 그들은 하릴없는 건달로 보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 봐도 보통과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들이 어느 날 놀라운 횡재를 하게 된다.

매년 말일인 12월 31일에 7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행크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묘지로 찾아 가던 중, 제이콥이 키우는 개가 인근 농장에서 키우는 닭을 물고 도망가는 여우를 쫓아간다. 제이콥의 개 메리베스를 찾기 위해 눈밭을 헤매던 중 그들은 고장 나서 추락한 비행기 속에 들어있는 440만 달러의 현찰을 발견하게 된다.

행크는 건전한 시민답게 경찰에게 알리자고 제의하지만, 제이콥과 루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면서 돈을 삼등분해서 나눠 갖자고 제의한다. 행크 역시 돈에 대한 욕심(초기에 아마 이런 욕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 몰랐다고 작가는 지속적으로 독자들을 일깨워준다)으로 이 모의에 가담을 한다. 돈을 발견한 셋만 이 사실을 알자고, 행크를 다짐을 받지만 자신부터 아내 사라에게 바로 말을 해버린다.

그 다음부터 마치 화학의 연쇄반응처럼 돈 때문에 불상사가 연달아 발생을 한다. 행크와 제이콥은 사라의 조언대로 얼마간의 돈을 다시 추락한 비행기에 가져다 놓으러 가는 길에 만난 인근에 사는 피더슨을 살해한다. 게다가 계속해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는 루를 행크는 이성적으로 달래 보려 하지만, 도박 빚에 쫓기는 루는 막무가내다. 결국 행크는 ‘자신의 돈’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작가가 도대체 이 이야기의 끝을 어떻게 맺을지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다.

1년 전에 읽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치 장교로 유대인 전멸 계획은 수행한 실무책임자 중의 하나인 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다루면서, 작가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vanality of evil)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죽음의 가스 수용소로 유대인을 실어 나른 평범한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들이 그런 인류사에서 최악의 악행으로 기록될지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지극히 보통의 삶을 살던 이들이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데 자기도 모르게 가담을 했다는 사실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었다고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심플 플랜>에서도 주인공이자 화자인 행크는 전형적인 보통 사람으로 기본적인 윤리와 시민의식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그의 삶에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엄청난 금액의 돈이 뛰어 들어오는 순간, 그의 아내 사라와 마찬가지로 잠재해 있던 욕망과 탐욕이 이 거저 얻은 부(富)를 지키기 위해 인간의 기본 덕성들을 거세해 버리는 과정을 스콧 스미스는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의 심리묘사는 정말 대단하다. 책을 읽는 동안,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순간마다 작가는 개입을 해서 나의 가정들을 행크의 행동으로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의 조언으로 대변해 주고 있었다. 결정의 순간들은 언제나 급박했고, 그 결과는 파국적이었다. 아주 간단한 설정에서 시작을 해서, 깊숙한 인간 내면 심연의 세계에까지 도달하게 만들어주는 작가의 뛰어난 통찰력과 전개 그리고 치밀한 구성이 도저히 신예 작가의 작품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책을 읽고 나서, 1998년에 샘 레이미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도 보게 됐다. 원작에서 스콧 스미스가 주변의 상황 전개와 캐릭터들의 심리 묘사와 같은 디테일에 보다 중점을 두었다면 (역시 작가가 각색을 맡은) 영화에서는 사건 자체에 비중을 두었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행크의 형 역할을 푸짐한 체구의 존 굿맨이 맡길 바랬는데, 비쩍 마른 빌리 밥 손튼으로 캐스팅이 된 게 아쉬웠다.

스콧 스미스는 1993년에 <심플 플랜>을 발표한지 13년 만인 2006년에 자신의 두 번째 소설 <폐허>(비채에서 작년 4월에 출간되었다)를 세상에 내놓았다. 다작을 하지 않는 작가답게, 자신의 글에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 신선했다. 독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게으름에 대한 미필적 고의성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호러/스릴러의 제왕이라는 불리는 스티븐 킹이 극찬한 서스펜스의 새로운 대가 스콧 스미스의 신작을 읽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13년을 기다려야만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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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염천 -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리스.터키 여행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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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제 24회 1988년 9월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저명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웃나라 한국 대신 인류문명의 시원지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 흐르는 땅 터키를 찾았다. 하루키 선생의 서정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글 솜씨야 다 아는 사실이고, 그가 과연 비오는 그리스와 불타는 터키에서 무얼 보고, 느꼈을까가 참 궁금했다.

아마 출판사에서 책을 쓰라는 계획 하에 여정에 나섰는지 사진작가와 편집자까지 동반한 여행이었다. <우천염천>은 그리스와 터키 기행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먼저 그리스 정교의 성질로 알려진 아토스 반도 기행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우라노폴리스에서 뱃길로 아토스 반도와 외부를 연결하는 다프니라는 곳으로 향한다.

다프니 항구의 여권보관소에 여권을 맡기고, 아토스 반도에서 통행할 수 있는 체류허가증을 받는다고 한다. 역시 일반 관광지가 아닌 ‘신들의 정원’이라는 별칭답게 조건이 까다로운 모양이다. 아, 그리고 수도사들이 기도와 수도에 정진하는 곳이어서 그런 진 몰라도 여자들의 출입은 금지다.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은 많이 봤어도 그 반대의 장소는 또 처음이다.

아토스 반도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카리에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인 도보 여행길이다. 마라톤광, 달리기광으로 알려진 하루키답게 그 정도 걷기는 문제가 아닌 듯. 하지만 동료들에게는 곤욕의 시간들이었나 보다. 스타브로니키타, 이비론 같이 정말 이국적인 이름인 수도원들을 하루키 일행은 순례한다. 아토스 반도에서 숙식을 모두 수도원의 호의에 의지해야하는 이방인들의 처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서도 하루키는 먹을거리가 풍족해 보이지 않는 수도원에 둥지를 튼 고양이 가족들을 걱정해 주는 센티멘털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진 찍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수도사들 때문에 그들의 풍채를 볼 수 없지만, 빈약한 먹거리에도 불구하고 뚱뚱하다는 그들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수도사들이 하루키네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만 맛난 것을 먹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에 젖기도 한다. 그런 깜찍한 발상이 재밌다. 순간, 아~ 역시 하루키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 외에도 필로세우, 카라칼르 그리고 그란데 라브라 등의 수도원을 일주한 하루키네는 안나 아기아라는 곳에서 체류기간을 넘어 지내다가 결국 배를 세내어 다프니 항구로 그리고 다시 ‘문명세계’로 점프를 한다. 다시 속세로 돌아온 그들은 식당에서 푸짐하게 한상 차려서, 실컷 맥주를 마신다. 역시 ‘신들의 정원’을 일부러 찾은 이들조차 속세의 즐거움은 잊을 수가 없었나 보다.

짧은 그리스 여행은 이 정도로 마치고 다음은 하루키와 같은 나라의 후지와라 신야가 자신의 책 <동양기행>에서 ‘광물의 세계’로 표현한 터키로 하루키들은 이동을 한다. 2부 타이틀에 적어 놓았듯이 터키에 대한 하루키의 직접적인 인상은 차이, 군인 그리고 양이다. 차이는 터키식 홍차로 어딜 가든 차이하네(차이를 파는 터키식 카페)에서 차이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터키 남정네들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유럽 땅에는 이스탄불과 주변의 조각 땅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유럽인체 하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되어 있는 터키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입증이라도 하듯, 사방에서 경찰과 군인들이 눈에 띈다고 한다. 이란과의 국경 근처에서 만난 군인들과의 사진촬영에 얽힌 에피소드 역시 즐거웠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휴가 중인 군인의 사진을 찍는 것도 제재를 가하는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터키 사람들의 주식이라고 할 수 있는 양과는 도대체 친해질 수 없는 하루키의 말에서는 문화상대주의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쨌거나 모든 여행자들은 이방인이기에.

하루키는 일본인 특유의 상대방의 지나친 ‘친절함’에 당혹스럽기만 하다. 루스 베네딕트가 여사가 <국화와 칼>에서 언급한 온[恩]이 문득 떠올랐다. 상대방에게 그런 온을 받으면, 되갚아야 한다는 그네들의 생각 때문일까. 이방인들에게 친절한 무슬림들의 속내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다 보니, 무에진이 외치는 모스크의 기도시간 알림 정도 외에 하루키는 철저하게 종교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비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것은 슬쩍 피하고 싶다는 본인의 스타일이려나.

하루키들의 일정은 어느 순간 끝난다. 그는 철저하게 이방인으로서의 자세를 고수한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려고 하지 않고, 항상 차이하네에서 외롭게 글을 쓰며 맥주타령을 한다. 이 책 이전에 <먼 북소리>라는 유럽기행 에세이가 있다고 하는데 그 책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을 들어왔지만, 그의 대표작들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쨌거나 이렇게 그리스와 터키를 누빌 수 있었던 하루키가 마냥 부러워지는 순간들이었다.

*** 뱀다리 : 예전에 출간된 책에는 실려 있지 않은 하루키의 동행 마쓰무라 씨가 찍은 144컷의 사진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 이 사진들이 없었더라면 좀 딱딱한 에세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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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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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교수의 헌법 에세이라는 타이틀을 붙은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었다. 자신은 굳이 “프리랜서 지식소매상”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지만, 현재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니 유 교수님이고 호칭해도 무관할 것 같다. 작년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서 “민주주의 절차”를 강조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왜 그가 그렇게 민주주의의 절차를 강조하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우선 간략하게 책 이야기를 해보면, <후불제 민주주의>는 1부 <헌법의 당위> 그리고 2부 <권력의 실재>로 나뉘어져 있다. 흔히 책 소개로 사용하는 헌법 에세이는 전자에 해당하고, 자신이 정치무대에서 실전을 치르면서 경험한 이야기들과 우리나라 정치현실들이 2부에서 거론되고 있다.

1부에 첫 대목에 등장하는 행복, 자유 그리고 주권이야말로 아마 유 교수님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보편적 진리들에 대한 핵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이 본질적인 질문은 책을 관통해서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한다. 다시 말해 주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위정자들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는 선언이다.

문제는 이런 보편적 진리들이 당위가 아니라 존재론적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선배 민주주의 국가들인 프랑스, 영국 같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치열한 삶의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얻은 것이 아니다. 1948년 일제로부터 해방 후, 제헌의회에서 이런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들을 거저 얻게 되었다.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이 귀중한 가치들을 얻었기 때문에, 반세기도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 가치들에 대해 유예된 지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 표현 중에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다.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 사회적 진화를 통해 가장 효율적이면서 인간 삶의 보편적 가치에 가까운 민주공화국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행복, 자유 그리고 주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유 교수님은 이런 주장에 기초해서, 새로운 정부 아래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문명 역주행’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지난 10년 간, 다분히 권력자의 선의에 의해 그 기초를 다지기 시작한 가치들이 신자유주의 경쟁주의 무장한 보수와 수구 언론 그리고 MB정부 하에서 그야말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가 지금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치러야 하는 민주주의의 대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금의 현실을 냉정하고 판단하고,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 각자가 가진 힘을 모아 연대해서 사법파시즘이 횡행하는 정상에서 이탈한 민주주의를 제 궤도에 올릴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한 번 잘못된 것을 다시 되돌리는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정확하게 우리가 자각하고 실천하는만큼 우리가 사랑하는 민주공화국은 진보하고, 그만큼 우리에게 보답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개인적으로 2부 <권력의 실재>는 1부만큼의 감동을 받지 못했다. <권력의 실재>는 유 교수님이 6년간 정치활동을 하면서 몸소 느끼고, 보고 들은 실전체험담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십년간 국외자였던 나에게 그가 말하는 사실들은 모두가 새롭고 놀라운 일들이었다. 심지어 그가 주장하는 정당민주화과 선거제도 개혁 등의 주장들은 그가 너무 시대를 앞서 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치현실을 비추어 볼 때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가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의 실재>에서 유 교수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큰 공감을 한 부분은 “도서관”이었다. 불필요한 사교육에 의해 마치 정글의 약육강식을 방불케 하는 경쟁이 아닌, 어린이들부터 성인들에게 이르기까지 미래의 민주시민으로서 소양과 지식을 키울 수 있는 공공도서관을 곳곳에 마련하자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

도서관 건립 프로젝트는 외형적인 도서관이 아닌 콘텐츠의 문제이다. 이미 대한민국의 모든 도서관들이 본래의 목적인 독서와 정보의 수집이 아니라 각종 시험공부를 하기 위한 ‘독서실’로 전용이 되어 버린 현실을 볼 때마다 입맛이 씁쓸하기만 하다. 도서 구입 예산은 삭감하면서,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 하나 없다고 개탄하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생각일진 모르겠지만, 옥의 티처럼 <권력의 실재> 부분에서는 유 교수님의 정치참여와 지난 참여정부 시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왠지 변명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서일까 1부 <헌법의 당위>에서 제기한 이슈들이 2부에서 유기적인 추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별개의 문제처럼 다뤄지면서 어느 순간 소멸해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후불제 민주주의>는 여전히 매력적인 책이다. 그동안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가치들을 담고 있는 헌법에 대해 재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올해 들어 지금까지 60여권의 책을 읽었는데, 읽으면서 가장 큰 독서의 보람을 느낄 수가 있는 책이었다. 주변의 지인들에게 진심으로 권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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