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자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리 차일드의 그 유명한 잭 리처 시리즈에 드디어 입문을 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이게 바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전범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타부타 군더더기는 빼고 바로, 알짜배기들만 골라내서 서술하는 사실주의 기법의 진수, 게다가 잭 리처라는 그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절대 당황하지 않고 어깨를 움찔하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전혀 문제없어’라고 말해주는 캐릭터는 금상첨화였다.

잭 리처가 1997년에 리 차일드와 함께 첫 방랑길에 들어선 이래 모두 12편의 작품들이 소개가 되었다. 그 말인 즉은 해마다 리 차일드는 잭 리처 시리즈를 발표해 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올해 역시 13번째 작품인 <내일로 떠난>(Gone Tomorrow)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잭 리처의 두 번째 모험의 시작은 시카고의 세탁소에서 시작된다. 정말 기묘한 우연에 얽히게 되면서, 유능하며 미모의 연방수사관 홀리 잭슨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3인조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어떠한 단서도 없이 잭과 홀리는 어디론가 끌려간다.

이후에 전개되는 과정은 홀리의 FBI 동료들과 그녀의 아버지인 합참의장 존슨 장군의 구출작전이다. 하지만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전 미국이 휴일 모드로 돌입한 가운데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홀리를 구하는 대규모작전의 승인불가가 떨어진다. 자, 이제 그녀의 몇 명 안 되는 그녀의 동료들과 존슨 장군 휘하 몇 명의 해병들만으로 그녀를 구출해야 한다.

이야기의 구성은 이처럼 단순하다. 연방수사관이 실종/납치되었고 그녀를 찾아라. 하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고, 납치범들은 왜 그들이 홀리를 납치했는지 전혀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축구를 하다가 십자인대가 파열되어져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리 차일드는 처음부터 주요 캐릭터에 이런 제한을 두고 게임을 시작한다. 진짜 주인공 잭 리처는 자신뿐만 그녀를 지켜야 한다. 잭,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홀리 수사관을 구출해 내라구.

잭 리처의 프로파일은 화려하다. 한 마디로 말해 내추럴 본 솔저(natural born soldier)로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흠잡을 데 없는 군 경력을 가지고 있다. 다른 군인들은 한 개도 받긴 힘든 다양한 훈장들을 받았다. 앞으로 시리즈에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특등사수로서의 출중한 능력은 해병 사격대회인 윔블던에서 비(非)해병으로 유일한 우승전력이 증명해준다. 게다가 시계가 없어도 경험치에 의해 시간을 계산해내고, 자다가도 알아서 척척 일어나는 모습은 거의 완벽 그 자체였다. 뭐 이런 주인공이라면 어느 추리소설작가라도 한 번 탐내볼만 하지 않은가.

책의 표지에 등장하는 총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민간인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고, 자신들의 인구보다도 많은 몇 억정의 총기들이 거래되고 있는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원인이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그건 미국 수정헌법 제2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무기휴대의 권리”에서 민간인들의 총기 소지 권리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내용은 <탈주자>에서 중요한 갈등 요소로 등장하게 되는 몬태나 민병대와 같은 무장단체의 존립기반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과대망상에 빠진 시대착오적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책에서도 언급이 되다시피 다섯 명의 한 명 꼴로 미국인들은 정부에 반대해서 분연히 저항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리 차일드는 말하고 있다. 그가 선량한 미국인들을 선동하려는 게 아니라면 근거가 있는 발언이길.

이제는 좀 진부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여전히 유효한 내부의 배신이라는 전통적인 소재 역시 스토리 전개에 활력을 더해 준다. 도대체 정체와 그 목적을 알 수 없는 단체에 억류되어 있는 잭 리처는 자신과 홀리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리고 연방수사관들의 움직임이 적들에게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직 군수사관 다운 직감으로 파악해낸다. 이 미스터리는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독자들의 긴장을 유지시켜 주는데 지대한 공헌을 해준다.

마지막으로 잭 리처의 적들이 난공불락의 아지트로 삼은 몬태나 주 요크 마을에 대한 설정이었다. 구글 맵으로 해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요크 마을과 그 주변을 위성사진으로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시카고에서부터 요크 마을에 이르는 대략적인 이동 경로가 한 눈에 들어왔다. 마치 현장 스케치를 하듯 절묘하면서도 디테일한 작가의 묘사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그런 곳이라면 충분한 자금과 무장을 갖춘 어느 조직이 연방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벌이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을까.

역시 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떠도는 방랑자답게 사건을 모두 해결하고 복수까지 마무리한 뒤에, 홀리와의 짧은 로맨스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어깨를 한 번 움찔해 보이고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미련 없이 다시 방랑길에 나서는 잭 리처.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뱀다리] 책 표자에 “사립탐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탈주자>를 보면서 잭 리처가 사립탐정이라고 추리할만한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해내지 못해서 책을 읽는 내내 눈에 거슬렸다. 그 누가 잭에게 사건의뢰를 했던가? 굳이 그를 특정직업군에 분류하고 싶다면 자신이 말한 대로 문지기(bouncer)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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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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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40년 전에 발표된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을 읽었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마더 나이트>(1961)를 읽으면서 커트 보네거트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이십대 초반에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그 유명한 벌지전투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드레스덴 대폭격을 경험하면서 반전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 작가의 본능과도 같은 경험치로 자신의 드레스덴 경험이 창작의 소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후 거의 20년간 준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류역사상 히로시마의 원폭투하보다도 더 많은 인명피해를 낸 드레스덴 공습을 글로 표현해 낸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스스로도 정신분열증적인 소설이라는 말을 책의 서두에 적어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제5도살장>의 구성은 참으로 독특하다. 자전적인 이야기의 재구성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면서도, 빌리 필그림이라는 얼치기 사병을 내세워서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투영시킨다. 전혀 전쟁과는 맞지 않는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에나 들어맞을 인물이 삶과 죽음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전장으로 내몰린다. 그리고 그 아수라장 같은 전쟁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빌리 필그림은 집안 좋은 와이프 발렌시아를 맞아 검안사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 구조라면 얼마나 좋겠으련만, 보네거트는 SF 작품을 다룬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실과 트랄팔마도어라는 외계행성에 납치된 빌리 필그림의 시간여행으로 뒤죽박죽으로 버무리기 시작한다. 하긴 전쟁이라는 미치광이 놀음을 단순하게 기술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빌리 필그림에 대해 세상에서는 미치광이로 판정을 내린다. 아내는 비행기 사고가 난 자신을 보러 오는 도중에 일산화탄소로 사망하고, 시집간 딸조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트랄팔마도어 타령을 하지 않았더라도 빌리 필그림을 이해할만한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리라.

블랙유머의 대가답게, 빌리 필그림을 따라가는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시선은 건조하고 냉랭하기만 하다. 물론 전혀 전쟁에 나선 병사 같지 않고, 전쟁을 희화화하는 것 같은 빌리 필그림의 옷차림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포로수용소의 연극무대에서 신데렐라가 신었던 은색 장화를 신고, 여자들이 하는 외토시에 커튼을 로마시대 토가처럼 두른 어릿광대 빌리 필그림의 모습은 “웃기지도 않는 전쟁”에 대한 보네거트의 조롱으로 다가온다.

<제5도살장> 읽기는  책의 어느 부분에서 나온 것처럼, 경이로운 순간들을 한 순간에 보는 경험이었다. “반전”(反戰)이라는 빤한 주제를 과연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독자들의 예상을 단박에 부숴버리는 작가의 엉뚱한 파괴력이 느껴졌다. 유사 이래 인류와 함께 해온 전쟁이라는 현실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역설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해내고 있었다.

전작 <마더 나이트>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의 카메오 등장 또한 주목할만한 설정이었다. 전쟁포로로 도급노동을 위해 드레스덴의 시럽공장에 끌려와 있던 빌리 필그림은 나치의 선전요원으로 포로들의 생활에 대한 논문도 쓴 적이 있다는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와 만나게 된다. 자신이 개발해낸 캐릭터를 이렇게 유용하게 사용을 하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미국의 소설가, SF작가, 에세이스트, 풍자가, 불가지론자, 유니테리언, 포스트모더니스트 등 다양한 타이틀을 가진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 세계에 너무 늦게 발을 들여 놓게 돼서 아쉬울 따름이다. 개인적 취향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비꼬는 그의 작법 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든다. 계속해서 그의 작품들을 섭렵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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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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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네거트(1922~2007)의 책과 첫 만남을 가졌다. 책을 읽기 전에 책날개와 온라인 서점의 저자 정보에 실린 그의 간단한 약력을 살펴보니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로 벌지 전투에서 생포되어 독일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때의 경험들이 나중에 그의 저술로 발표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에서 보네거트 특유의 풍자와 블랙유머가 스며 있다고 하는데 이 <마더 나이트>에서도 자신의 장끼들을 유감없이 펼쳐 보이고 있었다.

“하워드 W. 캠벨 2세의 고백록”이라는 제목으로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간첩으로 암약한 하워드 W. 캠벨 2세라는 가공의 인물의 파란만장한 회고가 전개된다. 그가 자신의 회고록을 작성하는 시기는 공교롭게도 실재했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예루살렘에 갇혀 있던 시기와도 겹친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엔지니어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갔다가 그곳에서 성장하면서 나치당 이념에 충실한 극작가 된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전쟁 전 프랭크 위르타넨이라는 미국 정보 장교에게 포섭되어 미국을 위해 활동을 한다. 하지만 너무나 유능했던 하워드 W. 캠벨은 나치의 고위 관료들인 히믈러와 괴벨스까지 감동해 마지않을 정도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치의 선전전을 수행한다. 유일하게 그를 간첩이라고 의심한 사람은 그의 독일인 장인인 베르너 노트 정도였다.

전쟁 중에 사랑하는 아내 헬가 노트를 잃은 하워드 W. 캠벨은 전쟁이 끝나고, 포로로 잡히지만 프랭크 위르타넨의 도움으로 미국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로 이주해서 신분을 감추고 조용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기구한 그의 삶은 하워드 W. 캠벨이 순탄한 삶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소련 간첩이자 화가를 자처하는 조지 크래프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되면서, 캠벨의 삶은 냉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보네거트의 <마더 나이트>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서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나치의 전쟁범죄인 유태인 홀로코스트에 의한 분노에서부터, 전쟁 중에 소모품처럼 사용되고 전후에 잉여 전쟁 물자처럼 내팽개쳐진 캠벨의 억울함 그리고 그의 전쟁 중에 행동에 감명을 받고 그를 숭배해 마지않는 미국 내 극우파 파시스트들의 어설픈 망상에 이르기까지 보네거트의 냉철하면서도, 진실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연초에 읽은 칠레 출신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처럼 보네거트의 <마더 나이트> 역시 순전한 소설적 허구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순간에도 여전히 어디에선가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하고 자신들만이 절대적인 선이라는 망상에 빠져 신들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치졸한 인종차별과 폭력을 옹호하고 있는 국수적 파시즘과 전체주의에 대한 보네거트식의 신랄한 비판이 <마더 나이트>에 담겨져 있다.

물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풍자와 블랙유머는 어쩌면 딱딱할 수도 있는 책의 주제들에 부드러운 윤활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후 뉴욕에서 잉여 전쟁물자들을 구입해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하워드 W. 캠벨 자신이 잉여물자일지도 모르겠다는 냉소적인 생각에 도달하게 해준다. 그가 나치를 위해 발표한 작품들을 베를린 공략 당시 처음으로 베를린에 진입한 소련 병사가 입수해서, 자신의 (공산주의식) 창작으로 발표를 해서 대성공을 거두는 에피소드 역시 멋진 설정이었다.

물론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과거를 잊으려는 마음과 한편으로 나치 전범들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 인류의 이름으로 법정에 세우겠다는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의 대조적인 모습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책의 초반에 등장한 아우슈비츠의 “연탄”이라는 표현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마치 한 편의 스릴러 소설을 읽어가는 듯한 구성으로, 과거 현재 그리고 다양한 정치적 상황들을 배경으로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가공해낸 커트 보네거트의 내공이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생각하게 만들어준 그런 멋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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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일라잇 - Twiligh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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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여류작가 스테프니 메이어의 인간과 뱀파이어의 로맨스를 그린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대해 꽤 오래 전부터 들어 왔지만 청소년들이나 읽는  하이틴 로맨스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5년에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본 <트와일라잇>은 이 후 <뉴문>과 <이클립스> 그리고 <브레이킹 돈>에 이르기까지 그칠 줄 모르는 행진을 계속했다. 결국 이번에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고 해서, 책읽기는 보류하고 영화부터 먼저 보게 됐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그 어떤 영화도 책의 감동과 디테일을 넘어서지 못했기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도 원작이 갖는 아우라를 영화에서 제대로 보여 주었을까? 개인적으로 영화 <향수>도 좋아하지만, 그건 원작의 아우라에 대해 한 수 접고 들어가니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애초에 두 시간 남짓한 영화와 원작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처럼 느껴졌다.

<트와일라잇> 역시 그렇게 한 수 접고 들어가니 아주 재밌게 볼 수가 있었다. 물론 원작을 미리 읽지 않았다는 메리트(?)가 작용한걸까. 영화를 보기 전에 슬쩍 리뷰들을 보니 거의 영화에 대한 비난일색의 리뷰들이 차고 넘치고 있었다. 책을 먼저 읽은 지인들의 평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처음부터 뱀파이어 영화라는 건 알고 있으니 과연 누가 뱀파이어인지 알아보는 게 중요하겠지? 일단 영화의 배경은 미국에서 가장 많이 비가 내린다는 워싱턴 주 포크스라는 작은 마을이다. 여주인공 (이사)벨라 스완은 태양이 빛나는 도시 애리조나의 피닉스에서 엄마와 이혼한 아버지가 경찰서장으로 일하고 있는 포크스에 전학 온다. 책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별다른 설명 없이 애리조나에서 온 이 낯선 이방인에게 포크스 고등학교 학생들은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새로 등장한 인물에게 왕따 같은건 보이지 않고, 바로 그들의 클릭(click)에 넣고자 하는 이들이 차고 넘친다. 그만큼 벨라의 매력이 출중하다는 걸까? 뭐 여느 여주인공 같은 대접은 받아야 하니 넘어가도록 하자. 자, 우리의 뱀파이어는 누굴까 퀘스트는 계속된다. 한눈에 척봐도 희여 멀건 밀가루를 뒤집어 쓴 것 같은 컬린들이 눈에 확 띄는구나. 게다가 5명이나 입양된 아이들이라고 하니 놀랍다. 물에 뜬 기름처럼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않고 지들끼리 몰려다니니 당연한 일이겠지.

자, 그럼 벨라의 미래의 뱀파이어 남친은 누굴까? 당첨, 한눈에 척봐도 남주인공의 포스를 가지고 있는 에드워드 컬린이로구나! 하지만 이 친구는 생물 시간에 벨라와 짝꿍이 되었으면서도 그녀를 기피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아마 벨라는 첫 눈에 바로 사라에 빠져 버린 듯. 그에게 항의를 하려고 하지만 에드워드는 아예 며칠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가 다시 나타나서는 아주 살갑게 구는 모습이란. 벨라는 혼란에 빠져 버린다.

그러던 중, 벨라는 교통사고로 위기를 맞이하지만 그 순간 바람처럼 나타난 에드워드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다. 그것도 놀라운 스피드와 자동차를 찌그러뜨려 버릴만한 괴력으로 말이다. 벨라의 꿈에 에드워드는 무시로 나타나고, 미스터리와 수수께끼로 가득한 그들의 관계가 설정된다. 한편, 포크스 마을의 곳곳에서는 짐승들의 공격으로 인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과연 누구의 짓일까? 일단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라는 심증은 있으니 과연 그들의 짓일까 하는 생각이 관객들의 마음속을 파고든다.

아버지 친구의 아들인 네이티브 아메리칸인 제이콥 블랙의 도움으로 퀼루트 인디언 전설을 알게 된 벨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에드워드의 정체를 알게 된다. 포트 앤젤리스에거 구한 책과 구글을 통해 불사, 스피드, 놀라운 괴력, 얼음장처럼 차가운 피부 그리고 불멸의 존재 뱀파이어의 비밀을 알게 된 벨라. 그녀에게 의외로 쉽게 자신의 정체를 내보이는 에드워드, 책에서는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를 했을지 궁금하다.

에드워드는 컬린 패밀리가 좋은 뱀파이어라고 소개를 한다. 물론 잠을 자지 않는다든가, 음식물 섭취를 하지 않는다는가 하는 뱀파이어들의 속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한편 포크스 마을에서 살인을 한 나쁜 뱀파이어들과 비오는 날 야구시합을 하러 간 우연히 만나게 된 벨라와 컬린 패밀리! 부드럽게 진행되던 고혹적인 러브 스토리는 위기와 절정의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시작한다.

1897년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처음으로 출간되었을 당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관계는 그런 계급적 차이와 남성과 여성간의 차별(혹은 흡혈)로도 해석이 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에로틱한 매력까지도 갖춘 뱀파이어 이야기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꾸준하게 확대 재생산되어져 왔다. 과연 21세기 뱀파이어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 궁금해 하던 찰나에 스테프니 메이어가 놀랄만큼 진화한 새로운 뱀파이어의 유형을 제시해 주었다.

빛에 노출이 되어도 재로 변하지 않고, 오히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멋진 이상적인 모습과 생존을 위해 굳이 흡혈을 하지 않아도 되는(혹은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아도 되는) 신식 베지테리언 뱀파이어들이 등장한다. 아, 물론 소설의 극적 전개를 위해서 나쁜 뱀파이어들의 존재 역시 배제하지 않는 치밀함을 선보여 주기도 한다. 뱀파이어 에드워드가 가진 괴력은 여주인공 벨라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여주인공이 위기에 빠졌을 때, 번개처럼 등장해서 그녀를 구해주는 모습은 <슈퍼맨>의 그것과 진배없다. 게다가 자신의 집에(하우스 오브 뱀파이어?) 초대를 해서, 낭만적인 드뷔시의 달빛(Claire de Lune)까지 들려주니 이에 반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극중에서의 주인공들의 외모야 주관적이니 넘어가자. 게다가 트래커 뱀파이어인 제임스의 추격을 받으며, 애리조나로 떠나는 벨라에게 “Bella, You're my life, NOW!"라는 대사는 정말 최고였다.

후속편인 <뉴문>에서 이야기가 더 진화가 된다고 하는데 유한한 존재인 인간과 불사의 존재인 뱀파이어 사이에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영원불멸(immortal)의 이야기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1918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카일 컬린에 의해 뱀파이어가 된 에드워드는 근 100년간을 17살의 모습으로 지내지만, 벨라는 그렇지 않다. 에드워드와 벨라의 사랑이 유한해 보이는 것처럼 어쩌면 벨라 역시 불멸을 꿈꾸는 게 아닐까? 발에 깁스를 하고 졸업 무도회장에 등장한 벨라가 에드워드에게 자신의 흰 목을 내미는 장면은 순간미학의 정점이었다.

영화의 첫 대사에서 벨라가 말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 있는 곳에서 죽는 것”이라는 유한한 삶에 대한 말은 아마 이 시리즈에서 계속해서 반복될 것 같다. <트와일라잇>은 판타지이면서도 한편으로 현실 세계 속에서의 일들이 그려진다. 마치 한 편의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멋진 사랑을 꿈꾸면서도 현실에서 분리될 수 없는. 벨라는 에드워드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뱀파이어가 되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벨라를 사랑하지만, 뱀파이어인 에드워드는 그녀의 피를 원한다. 이렇게 영화의 곳곳에서 보이는 이성과 감성의 충돌은 독자들을 욕망과 절제의 위태로운 경계선으로 몰아넣는다.

게다가 영화는 후속편의 예고를 위한 교묘한 장치들의 배열에도 신경을 쓴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제임스만큼이나 나중에 벨라의 생명을 위협하게 될 빅토리아가 졸업 댄스파티(prom)에 슬며시 모습을 비춘다. 미래를 예견하는 알리스는 벨라도 에드워드와 같이 될거라는 모호한 예언을 남긴다.

현재 2탄인 <뉴문>이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촬영 중에 있다고 한다. <뉴문>에서는 에드워드와 벨라의 로맨스보다 뱀파이어들의 숙적인 늑대인간(라이칸)과의 갈등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올 후반기에 개봉예정이라는 후속편이 너무나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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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
제이슨 굿윈 지음, 한은경 옮김 / 비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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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시리즈의 경우에는 차례대로 읽어 나가는 게 순서인데 제이슨 굿윈의 <스네이크 스톤>을 읽고 나서, 전작인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을 읽게 됐다. 여전히 공간적 배경은 천년고도이자 동서양의 접점인 이스탄불, 그리고 시대적 배경은 1836년이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비잔틴 사를 전공한 제이슨 굿윈은 환관 출신으로 그리스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환관 탐정 야심 토갈루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부제로 나온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가 말해 주듯이,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화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예니체리 부대의 관한 역사를 바탕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술탄 무라드가 정복한 유럽 각지의 기독교도 가정에서 차출한 소년들을 징집해서 무슬림화 시킨 후, 술탄의 정예병으로 육성하기 시작한 예니체리 부대는 유럽정복과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함락에 큰 공헌을 한다. 하지만 소설에서 언급되듯이 하나의 권력으로 민중을 착취하는 군대 마피아가 된 그들은 심지어 술탄마저도 교살하며, 오스만 제국의 정정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결국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의 당대 술탄으로 등장하는 마흐무트 2세가 1826년 6월 16일 신식군대인 신위병들을 동원해서 예니체리 부대를 물리적으로 해체하면서 예니체리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당시 주동자들만 처벌되고, 끈끈한 유대감을 자랑하는 예니체리 부대원들은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네 명의 신위병들이 차례로 끔찍하게 살해되고 새로운 신위병 사령관인 세라스케르가 야심에게 10일 안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주문을 한다(<스네이크 스톤>에서도 기간이 아마 10일이었지 싶다!). 동시에 술탄의 후궁인 하렘에서도 괴즈데(술탄의 시중을 들 소녀)가 교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환관으로 남성을 잃은 야심은 40년 전에 조국을 잃은 폴란드 대사 스타니슬라브 팔레브스키와 더불어 문제를 풀어 나가기 시작한다. 매주 목요일마다 야심의 집을 방문해서 요리를 함께 즐기는 스타니슬라브는 야심에게 보드카 배달부이다. 이스탄불에서 야심을 돕는 이로는 스타니슬라브외에도 쾨첵 무용수 출신의 프린과 무라드 에슬렉이 있다. 야심이 예니체리들의 비밀에 다가갈수록 그는 점점 더 위험에 다가간다.

그의 움직임을 파악한 적들은 무두질 공장에서, 그가 즐기는 터키탕 하맘에서 그리고 결국에는 벙어리 자객을 파견해서 그를 없애려고 한다. 책의 어디에선가 작가가 표현했듯이, 쫓고 쫓기는 자의 추격이 미로와 같은 이스탄불의 골목골목에서 상세하게 펼쳐진다. 게다가 잘난 투르크인 야심은 러시아 대사의 미모의 부인 예브게니아와 ‘뻔뻔한’ 스캔들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 추리 소설이 담고 있을 법한 요소들은 모두 가지고 있다. 마치 19세기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제임스 본드의 종횡무진한 활약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예니체리 부대의 해체와 오스만 술탄의 개혁 정책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보너스로 다가온다.

야심이 사건들을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슬쩍 등장하게 되는 카라고지로 대변되는 이슬람 신비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통에서 분리된 신비주의와 예니체리 부대와의 상관관계 역시 매력적인 이야기거리였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 네 번째 실종 신위병 장교를 찾는 과정에서 알게된 케르코포르타(작은 문)로 인한 비잔틴 제국의 보석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설 역시 소설의 흥미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연쇄살인 사건의 해결을 전제로 한 미스터리 물을 표방하는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의 주인공인 야심의 캐릭터는 환관으로 설정이 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호기심을 가질 술탄의 후궁인 하렘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남자 캐릭터는 오직 환관만이 가능할 것이다. 술탄의 모후인 발리데와도 교류를 하며, 그녀에게 프랑스 파리에서 막 출간된 <위험한 관계>나 <고리오 영감> 같은 신간 서적을 빌려 보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참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야심 시리즈를 오래 전부터 기획해 왔는지 2탄 <스네이크 스톤>의 중요한 소재가 되는 “스네이크 스톤”에 대한 언급을 이미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에서 언급하고 있었다. 아마 <스네이크 스톤>을 먼저 읽지 않았더라면 그냥 쉽게 스쳐갈 부분이었는데 후속편을 먼저 읽고 나서 전편을 읽게 돼서 그런지 더 반가웠다. 매혹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펼쳐질 야심 토갈루의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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