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왕비의 유산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8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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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려서 읽었던 책들의 저자들을 다시 만나고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바로 읽었던 마크 트웨인이 그렇고, <인도 왕비의 유산>을 쓴 쥘 베른이 그렇다. 전자의 경우에는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15소년 표류기>와 <해저 2만리> 같은 소설을 통해 아주 오래 전에 만났었다. 성인이 되어서 만나게 되는 옛 추억의 작가들의 이름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우선 <인도 왕비의 유산>에는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의 운명을 가른 전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시 프랑스 출신으로 애국심에 넘치는 쥘 베른은 소설에 등장하는 사라쟁 박사와 독일 예나 출신의 화학자 슐츠 교수라는 캐릭터를 통해 선악의 명확한 구분을 시도한다. 제목으로 나오는 인도 왕비의 어마어마한 유산(5억 프랑)이 예의 두 사람에게 유산으로 분배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프랑스인답게 사라쟁 박사는 유산으로 받은 돈을 인류의 복지와 발전을 위해 쓸 것을 선언한다. 한편, 자신의 유산의 절반을 사라쟁 박사에게 강탈당했다는 원한을 품은 슐츠 박사는 미국 오리건 주의 모처에 슈탈슈타트(강철도시)를 세워 예의 유토피아 프랑스빌을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에 사라쟁 박사의 아들 옥타브의 친구이자 조국 프랑스를 사랑하는 열혈청년 마르셀 브뤼크망은 슈탈슈타트에 비밀리에 침투를 해서 슐츠 박사의 가공할 만한 음모를 알아내는데 매진을 한다. 엄청난 자금과 뛰어난 소재 그리고 최첨단 기술로 40km 이웃한 프랑스빌의 10만 명의 사람들과 도시를 단방에 날려버린다는 끔찍한 계획을 알아낸 마르셀 하지만 그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된다.

<인도 왕비의 유산>은 표면적으로는 각기 다른 두 개의 이상을 가진 과학자들의 대결을 그리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이 책의 저술 8년 전에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 당한 처절한 패배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전쟁의 결과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렌 지역의 상당 부분을 프로이센에게 강제로 빼앗기게 된다.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마르셀의 고향이 알자스라는 설정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19세기에 이르러 전기의 도입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과학 발전의 힘으로 인류의 유토피아 건설에 한 발자국 다가가게 된 이면에는 전쟁기술 역시 발전하게 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대량살상의 위험이 극대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슐츠 박사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거대 자본과 전쟁을 위한 기술력의 결합이 평범한 삶을 사는 현대의 인류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쥘 베른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 보지 못해서 그가 계몽주의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프랑스빌을 건설하면서 중국인 노동자들인 쿨리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이용하면서도, 신세계의 유토피아인 프랑스빌에 황인종의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겠다는 인종차별주의적 제도적 장치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19세기 프랑스 지식인의 한계였을까?

작가의 눈에 비친 독일의 세계 정복 야욕에 대한 예언은 정확하게 반세기 후에 아돌프 히틀러의 제3제국을 통해 현실화된다. 아울러 게르만 민족이 가장 우수하다는 자의적 우생학에 근거한 슐츠 박사의 망상은 나치즘의 그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과연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쥘 베른의 공상과학 소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가 있는 걸까.

비록 엉성한 이론이긴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미 지구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의 개념을 도입하고, 거대 포탄에 이산화탄소를 탑재한 생화학 무기에 대한 발상을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쥘 베른의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의 상상력은 많은 면에서 현실화되기도 했잖은가 말이다.

한 가지 <인도 왕비의 유산>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중의 하나는 미국의 영토 내에서 이뤄지는 불법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슐츠 박사의 행동이 어째서 미국 연방정부의 개입을 초래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배경은 미국이지만, 프랑스와 독일간의 민족국가의 대립의 연장선이라는 측면이 훨씬 더 크게 부각이 된 모양이다.

그동안 단순하게 아이들이 읽는 SF 공상과학소설 작가라고만 생각해온 쥘 베른의 다양한 작품 세계의 지평을 연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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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
마크 트웨인 지음, 린 살라모 외 엮음, 유슬기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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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왕자와 거지> 등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의 일화, 격언과 훈계 등과 같이 다양한 일상의 모습을 담은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을 만나게 됐다. 어려서 마크 트웨인을 읽을 적에는 단순하게 동화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접하게 된 그는 나에게 또 다른 인물로 다가왔다.

책을 읽던 중에 문득 얼마 전 텔레비전 모항공사의 광고에서 미시시피 강 유역의 마크 트웨인이 유년시절을 보내고 훗날 자신의 작품의 무대가 되었던 해니벌이 떠올랐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인쇄공, 수로안내인, 광부, 저널리스트 그리고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군을 섭렵한 그의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마크 트웨인의 본명)의 글들과 일러스트 그리고 사진들을 접할 수가 있었다.

19세기 지극히 평범한 미국의 일상을 멋지게 풍자화해서 스케치해내는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과 역시 대가의 필력이 느껴지는 순간들이었다. 특히 일상의 소재들에 마트 트웨인 특유의 익살과 해학 그리고 냉소를 양념으로 곁들인 글들이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역시 세계를 돌며 수많은 강연회를 열었던 마크 트웨인은 세계인들이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리고 있다. 어쩔 때는 자신 특유의 냉소를 통해 또 어쩔 때는 어린 딸의 시선을 통해 자신들(미국인)이 보는 세계인들의 모습이 아닌 세계인들이 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자신들이 사용하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오늘날 미국인들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세기가 지나도 그네들의 여행 패턴은 바뀌지 않는가 보다.

45쪽에 나오는 마크 트웨인의 친필 사인이 들어가 있는 자신의 집을 불시에 방문하게 될 도둑님에게 알리는 친절한 공지문을 보면서, 그 특유의 블랙유머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게다가 용무를 마치고 나갈 적에는 이렇게 친절하게도 도둑님에게 살포시 문을 닫아 달라는 뻔뻔스러운 주문도 마다 하지 않는다. 하긴 자신의 창작을 괴롭히는 피뢰침 장사에게 막무가내로 피뢰침을 주문했다가 자신의 집이 우스개가 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니. 정말 그렇게 많은 수의 피뢰침을 집에 장착했을까? 에이 설마…….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마크 트웨인은 전화라는 이 최첨단 문명의 이기를 받아 들였던 모양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자동식 전화기가 아닌 항상 교환수를 통해 전화를 해야 했던가 보다. 어쨌든 전화 서비스 이용에 대한 불편은 호사가들의 변하지 않는 주제처럼 보인다.

6장 교육과 도덕적인 어린이 편은 특히나 오늘날의 부모들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듬뿍 담겨져 있다. 미국의 국부로 추앙 받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미 마크 트웨인 세대에도 모든 이의 귀감이 될 만한 행동과 격언으로 어린이들의 롤모델이었던 모양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엄친아 정도 된다고 할까. 하지만 그렇게 위대한 조상을 둔 어린이들에게는 아마도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이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에, 언제나 근면과 노력을 다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위인의 삶 그 자체를 부모들이 말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짜증을 내지 않았을까? 마크 트웨인은 정확하게 그런 점들을 짚어낸다.

해당 장의 마지막에 실린 <젊은이들에게>에서도 그의 블랙유머는 유감없이 그 진자를 발휘한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이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테니까라는 아주 간단하지만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격언을 쏟아낸다. 역시 마크 트웨인이었다.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에는 일상의 예의범절, 식이요법과 같은 다이어트, 패션, 일상의 불평불만과 제안들을 비롯한 우리네 생활의 모든 것들에 대한 노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차고 넘친다. 동시에 남북전쟁을 통해 내부의 갈등을 내전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한 후 한창 산업발전기에 있던 미국 사회의 위선과 허영 그리고 거짓선전의 허구를 날카롭게 파헤친 “모럴리스트” 마크 트웨인 만년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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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서울 - 미래를 잃어버린 젊은 세대에게 건네는 스무살의 사회학
아마미야 카린, 우석훈 지음, 송태욱 옮김 / 꾸리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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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의 전직 극우파 펑크록가수로, 현재는 프레카리아트 운동의 기수이자 시사 잡지 <주간 금요일>의 편집위원, 작가인 아마미야 카린을 위한, 그녀에 의한 책이다. 물론 최근 <88만원 세대>와 <괴물의 탄생> 등의 저서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우석훈 교수도 공저로 되어 있지만, 기본 줄기는 아마미야 카린의 서울 탐험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마미야 카린의 전력은 특이 그 자체이다. 일본에서 버블경기가 빠지고 나서 취업의 빙하기가 도래했던 1990년대 그녀는 “유신적성숙”이라는 극우적 향기가 풀풀 풍겨나는 펑크록 보컬리스트로 사회경력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좌파감독과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난 후, 아마미야 카린은 극적인 전향을 이룬다. 그리고 오늘날의 새로운 아마미야 카린이 탄생했다.

OECD 국가 중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중이 가장 큰 우리나라만큼이나 고용불안과 그로 비롯된 빈곤과 차별이 만연화된 일본에서 그녀는 ‘프리터’라고 불리는 일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허상을 발가벗긴다. 책의 말미에 달린 우석훈 교수의 글에서도 보이듯이, 해방 이후 일본과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렇게 동일하면서도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주제는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렇게 점점 사회적 괴물이 되어 가는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한일양국 비정규직 그리고 가난과 차별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모든 이들의 연대를 위해 한국을 찾은 아마미야 카린의 눈에 비친 오늘날 서울의 모습이 <성난 서울>이라는 모습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자본주의 대국 미국에서도 아무리 일을 해도 현재와 미래의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워킹 푸어(working poor) 계층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작년에 또 다른 일본작가 츠츠미 미카의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를 통해 알게 됐다. 그런데 그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충실하게 수행해온 일본과 한국에서의 상황은 어떨까? 일본에서는 파견근로자법이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미명 하에 진행된 정리해고법과 (비정규직을 전혀 보호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보호법의 시행으로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소위 말하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이말삼초의 젊은이들이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측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노동자들의 분열을 꾀하고 있다. 언젠가 뉴스에서 통근버스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좌석제를 실시하겠다는 어느 회사의 공고문을 보고서 지난 세대 미국에서 보았던 인종차별의 광기가 떠올랐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는 21세기판 인종차별 아니 노동차별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방인인 아마미야 카린의 시선으로 우리네 현실들을 되짚어 읽는 과정이 그렇게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방인인 만큼 그만큼의 객관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짧은 일정 간에 여러 곳을 둘러 보다 보니 그만큼 다루고 있는 이슈들에 대한 깊이가 부족한 것도 불가피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우리도 미처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있는 이방인인의 존재에서 경쟁과 성공제일주의가 판을 치는 정글과도 같은 현실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과 연대의 씨앗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아마미야 카린의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우리나라 경제 현실에서의 모순들을 짚어내는 저술들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는 우석훈 교수의 분석은 그녀의 이야기에서 빠진 점들을 상당 부분을 상쇄시켜 주고 있었다. 읽는 동안 절로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운영의 묘를 보여준 편집인에게도 찬사를 보낸다.

우석훈 교수는 기존에 발표한 저서에서도 밝혔듯이, 안정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고용의 창출을 위해서 기존의 기업들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그 대안으로 사회적 기업들을 육성할 것을 주문한다. 고용시장에서 실제적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톺아낸다. 특히 적게 벌더라도, 적게 쓰면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사회에 되갚는 순환적 경제론에 큰 공감이 되었다.

언제나 시작은 미약하다. 하지만 우리는 작은 희망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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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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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기에 있어 출판계의 또 다른 마케팅 전략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소위 ‘스크린셀러’로 최근 화제를 몰고 있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의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중단편선 <다른 남자>를 읽었다. 물론 이 책의 타이틀인 <다른 남자> 역시 작년에 영화화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식으로 영화화가 되었을지 궁금하다.

모두 6편으로 구성된 <다른 남자>는 독일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가 된다. 법률가 출신인 작가는 사물을 보는데 있어, 특히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인간관계 역시 예외 없이 냉정한 법률가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와 도마뱀>에서는 독일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서재에 걸린 “소녀와 도마뱀”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자란 나는 그 그림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전쟁 중에 판사로 근무하던 아버지가 어느 유대인 화가로부터(르네 달만) 예의 그림을 입수하게 된 경위와 떳떳치 못한 아버지의 행위에 대해 알게 된다. 이것은 마치 전전세대와 전후세대를 가르는 기준점처럼 작용을 하면서, 아버지 세대의 잘못까지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고 외치는 독일 신세대의 그것처럼 들린다.

<외도>와 타이틀 <다른 남자>에서는 각각 통일 독일 그리고 외도 혹은 불륜이라는 주제로 독자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법학자 출신답게 문장이 다소 무미건조할 수도 있지만, 본질을 꿰뚫는 시각은 더없이 예리하기만 하다. 우정을 가장해서 타인의 삶에 뛰어는 사람도 그리고 아내가 죽고 난 뒤 알게 된 아내의 불륜에 대해 분노하는 이에게도 모두 시간은 공정하다. 그런 감정들이 휘발되고 남은 자리에는 공허함만이 자리할 뿐이다.

<다른 남자>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글은 바로 하이네의 글에서 따왔다는 <청완두>였다. 두집살림도 아니고 무려 세집살림을 마다하지 않는 토마스의 삼중생활이 놀라웠다. 68세대로 성공한 중년의 삶을 보내고 있는 토마스는 건축자이자, 아마추어 화가 그리고 프로젝트 파트너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제각각 다른 개성을 가진 세 명의 여성들과 스릴 넘치는 사랑의 곡예를 펼친다. 슐링크는 이 글에서도 역시 <다른 남자>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결혼의 위기 그리고 상호신뢰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걸까?

이렇게 <청완두>에서 클라이맥스를 보여준 슐링크는 <아들>과 <주유소의 여인>을 통해 하강곡선을 타기 시작한다. 어느 남아메리카 국가의 감시단으로 파견된 아버지의 여정을 그리고 다시 중년의 권태기에 빠진 부부가 떠난 로드트립에서 갑작스러운 일탈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독일적”이라는 표현은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다른 남자>에 나오는 부부간의 혹은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와 소통의 부재는 그런 독일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전 세계적 현상의 편린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아무래도 작가가 남성이어서 그런진 몰라도 모든 이야기들은 철저하게 남성의 시선에서 진행이 된다. 개인적으로 6개의 중단편 중에서 하나 정도는 여성의 입장에서 서술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올해는 2차 세계대전 발발 70년이 그리고 통일 독일이 출현한지로는 20년이 되는 해이다. 여전히 독일에서 현재 진행 중에 있는 화해와 통합 그리고 소통이라는 주제를 개인의 차원에서 다룬 문학 작품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것도 유로 시대가 아닌 마르크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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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갤러리 한 장으로 보는 지식 계보도 2
김영범 지음 / 풀로엮은집(숨비소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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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에 ‘철학과 고전을 읽자’를 목표로 세웠었는데 아쉽게도 고전이라고 부를만한 책도 그리고 철학책도 지금껏 한 권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철학갤러리>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목표를 이룬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김영범 작가는 고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로부터 시작을 해서 현대 철학자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모두 51명의 철학자와 4개의 학파를 통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서양 철학사를 관통하는 흐름을 조명한다.

역시 사유를 근간으로 하는 철학은 모든 사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근원과 본질에 대한 질문인 아르케(arche)로 시작이 된다. 물론 예의 질문은 인류가 지속되는 한 계속해서 반복될 질문일 것이다. “도대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간단한 질문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하나의 화두로 다가왔다.

그 후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고대 철학은 완성기로 접어든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신비주의적 경향에서 영혼과 정신을 분리해내면서 자연철학의 기초를 닦기 시작한다. 그는 문답법을 통해, 사람들이 덕(arete)을 얻기를 원했다. 게다가 기원전 399년에 위험한 사상가로 지목이 되어 끝내 독배를 마시기도 한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다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 이원론과 일원론이라는 걸출한 논리도 자신만의 철학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이상주의자였던 플라톤은 형상철학을 통해 모든 것은 이데아를 베낀 것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철인이 국가를 지배해야 한다는 이상 국가를 <국가>를 통해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원론을 대신 일원론을 주창하면서, 질료와 형상의 관계를 통해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려 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학문들을 집대성한 고대 최고의 철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서양철학은 곧 중세라는 암흑기를 맞이하면서, 철학이 신학의 시녀로 격하되는 비운의 운명을 맞게 된다.  중세 천년을 지배한 스콜라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완성이 되고, 모든 이들의 사고를 신 중심의 사고에 얽어매게 되었다. 하지만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운동을 타고, 고전의 부활 그리고 인문주의의 발달은 신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다시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의 회귀를 가져 오게 된다.

역시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이 시대의 극적인 변화를 대변해 주는 말도 없을 것 같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치히로 이어지는 대륙의 합리론자들에 맞서 영국에서는 로크, 버클리 그리고 흄과 같은 경험론자들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독일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류 사유의 한 장을 마련하기도 한다. 우리는 여전히 칸트의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작가의 말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 자체가 어려운 탓인지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 역시 다시 한 번 철학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 전개되는 현대철학자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일천한 지식 때문인지 급속하게 이해도가 떨어지기도 했다. 작년에 읽었던 강영계 선생의 책인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철학의 끌림>에서도 느꼈던 건데 마르크스를 철학자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마르크스를 철학자라기보다는 사회과학자라고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서양철학의 전반적 흐름을 되새겨 보는데 확실히 <철학갤러리>는 뛰어난 구성과 상반되는 관계에 있는 철학자들을 배치하고, 또 중요한 주장이나 사상들을 탁월하게 톺아내고 있다. 하지만 “서양철학갤러리”가 아닌 이상에야, 동양의 철학들도 서양철학 못지않게 다루어 주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울러 폭넓은 주제의 철학 사상가들을 다루는 것도 좋지만, 그들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분석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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