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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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사뭇 도발적이다. 내 심장을 쏘라니? 마치 갑갑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을 저격하라는 선언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책 표지에서부터 무슨 내용이 펼쳐질지 아주 적나라한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환자복을 입은 두 명의 남정네들의 비현실적인 움직임이 글의 대략적인 얼개를 말해 주고 있는걸까.

2000년 <열한살 정은이>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정유정 작가의 다섯 번째 작품인 <내 심장을 쏴라>는 전직 간호사 출신인 작가가 대학시절 정신병원 실습 후, 폐쇄병동을 직접 체험하고 나서 마치 세상에 무언가 진 빚을 청산하려는 마음을 글을 썼다고 했던가.

나에게는 어린 시절,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통하던 정신병원이 이 소설의 무대다. 주인공인 나 이수명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환청과 공황 장애 진단으로 로뎀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퇴원 한 후, 불의의 사고로 다시 수리 희망병원에 수감되게 된 수명은 25살 동갑내기 류승민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아마 영화 장르로 구분을 하자면, 버디 무비 정도가 되겠다.

수명과 승민은 병원에 들어온 첫 날부터 폭력이 수반된 탈출을 시도하게 되고, 병원의 진압조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끔찍한 약물치료까지 덤으로 받게 된다. 덤 앤 더머라는 부제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약물치료를 받고 난 후, ‘나무늘보’가 된다는 화자의 말이 실감이 가지 않았다. 폐쇄병동은 치료기관이 아니라, 교육기관이라는 설명은 더더욱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노레 발자크의 소설처럼 첫 60페이지가 힘들다고 누가 말했었나. 하지만 작가 정유정이 그리는 폐쇄병동의 직시하고 싶지 않은 현실들은 수리 희망병원에 ‘수감’된 환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은 가열차게 굴러 가고 있었다. 역시 작가의 직접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 진 몰라도, 리얼리티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작가의 상상만으로 창조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수명은 방짝인 승민의 사연에 주목한다. 어쩌면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핵심은 모두 그들의 사연을 풀어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나 수명은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폐쇄병동으로 도피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승민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나는 활강이 삶의 유일한 낙이자, 목표였을지도. 하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없다. 그에게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는 나는 그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 물론 나의 이성은 골치 아프고 물리적 제재가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전인적인 인격체이다.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영어의 몸이 된 그들은 자유를 꿈꾸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들에게 동정적인 시선도 물론 존재하지만, 그들을 찍어 누르는 억압의 굴레에 언제나 압도당한다. 바로 그 시점에서 우리를 옥죄고 있는 사회라는 시스템을 ‘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모터보트를 타고 수리 호를 질주하고, 글라이더를 타고 창공을 훨훨 나는 수명과 승민의 눈에는 오히려 우리가 사회라는 틀에 갇힌 수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탈출과 일탈을 꿈꾸는 모든 이에게 갈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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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위원회 모중석 스릴러 클럽 20
그렉 허위츠 지음, 김진석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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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미국 사법 시스템에 대해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는 미국 시민권자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온 친구였는데, 미국의 사법체계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법 자체와 사회의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이 우리 보통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니! 하지만 이민자 사회인 미국의 현실을 떠올리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제각기 다른 사고와 문화 관습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통일된 하나의 사회적 규율로 통제를 하기 위해선 강력한 사법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하바드와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살인위원회>의 저자 그렉 허위츠는 바로 그 미국 사법체계의 틈새를 파고드는 법범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가상의 “위원회”를 창조해낸다. 우리의 주인공 팀(티모시) 맥클리는 연방경찰 소속의 부집행관으로 전직 특수부대 출신으로 강인한 체력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한 판단력을 보유한 전인적인 인격체로 그려진다. 당연한 귀결로 군복무 당시 받은 무공훈장은 보너스다. 그의 아내 드레이(안드레아) 역시 보안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런 맥클리의 평화로운 가정에 끔찍한 사고가 터지고 만다. 그들의 사랑하는 딸인 지니(버니지아)의 7번째 생일날, 주인공 지니가 성폭행을 처참하게 살해된 채로 발견이 된다. 자, 이제 스릴러와 미스터리로 짬뽕이 된 <살인위원회>는 폭주하기 시작한다. 팀의 동료들은 지니의 살해범으로 지목되어 잡힌 킨델을 사로잡아 팀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지만, 팀은 사적인 복수를 거부하고 법원에서 정당한 판결을 받게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지만 법원에서는 킨델이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미란다 조항과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고지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서 사건 자체를 기각시켜 버린다. 누가 봐도 명백한 사건에 대한 처벌이 법집행 절차상의 문제로 해서 무산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딸의 죽음으로 맥클리 가정에는 그늘이 지기 시작하고, 팀의 결혼생활 역시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그를 정말 괴롭히는 것은 딸의 죽음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팀은 업무 중에 마약상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과잉진압을 이유로 해서 견책을 받게 된다. 모든 이들이 그의 결백을 알고 있지만,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자 팀은 분연히 자신의 배지를 반납하게 된다. 사랑하는 딸을 잃고, 직장마저 잃어버린 그에게 프랭클린 듀몬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방문을 한다.

그는 위원회 소속으로 팀과 비슷하게 가족들을 범죄자들에게 희생을 당한 이들이 사법체계가 갖은 이유로 처벌할 수 없어 방면된 이들을 응징하려는 초법적인 비밀결사조직이다. 자금력과 실천력을 모두 갖춘 이들은 팀이 무엇보다 알고 싶어 하는 지니 사건의 비밀 파일을 미끼로 팀을 위원회에 가입시킨다. 천사들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횡행하는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윌리엄 라이너 교수가 준비한 파일들을 검토하고 표결에 의해 징벌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과연 그들은 자신들이 목표한 일들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을까? 역시 미스터리 스릴러답게 후반부에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일단 소설의 시작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간다. 어떻게 해서 평범해 보이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이런 엄청난 사건에 휘말려 들게 되고, 법 체계 전반에 대해 그동안 수없이 논의되어져 온 핵심적인 문제-과연 우리 사회의 법 시스템이 공정하게 집행되고 있는가-에 대해 팀 맥클리의 냉철한 시각을 통해 한 발자국씩 다가선다.

아울러 희생자 부모의 쓰라린 경험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해 내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9권의 책을 쓴 작가 그렉 허위츠는 글쓰기에 앞서 철저한 리서치와 준비작업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마 이 책 <살인위원회>를 쓰기 위해서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에서 노력을 했을 것이다. 팀과 드레이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대립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에 대한 논쟁에 이르기까지 소설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주인공의 감정 표출에 대해 탁월한 묘사를 보여준다.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애끓는 감정을 슬며시 독자들에게 전이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위원회의 초법적인 행동에 ‘할 수만 있다면 나라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거야’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주인공의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이 작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런 감정과 이성의 대결구도는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대립에서도 지켜볼 수가 있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지니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다는 암시와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진 위원회 활동과 자신을 옥죄어 오는 경찰의 움직임(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전직 경찰을 쫓는 자신의 동료들)에 책을 읽는 독자들의 아드레날린 수치는 높아져만 간다. 물론 700쪽이 넘는 분량이 적잖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극적인 후반부의 반전과 스릴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전혀 아깝지 않을 시간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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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 In the Blue 1
백승선.변혜정 지음 / 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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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년 전 두 번째로 유럽을 찾았을 때, 비엔나에서 만난 어느 아가씨가 혼자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로 가겠다는 말을 듣고서는 ‘아니 미쳤나? 그 먼델 왜 가?’라고 혼자 생각을 했었다. 지금 되돌아 생각해 보면, 아마 살면서 크로아티아에 그렇게 가까웠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것만 같다. 지금은 후회막심일 뿐이다.

백승선 씨와 변혜정 씨가 찍고 쓴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를 읽기 전에 KBS 세계여행 다큐멘터리인 <걸어서 세계속으로> 크로아티아 편을 봤다. 책이 도착할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드리아 해의 보석상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크로아티아의 풍경들이 화면 가득히 흐르고 있었다.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에서도 다큐멘터리에서 다룬 그대로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 달마티아 지방의 수도이자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 스플리트, 크로아티아 자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대 성곽도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두브로브니크를 찾는 여정이었다. 신기하다, 마치 두 개의 다른 작품을 한 명의 연출자가 연출한 것처럼 같은 곳들을 둘러보다니.

이미 영상으로 크로아티아를 흐뭇하게 감상해서였는진 몰라도 책에 담겨진 그림 같은 풍광들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오래 전에 한 번 들렀던 곳을 다시 찾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흐릿한 기억 속의 추억들을 끄집어내는 그런 아스라한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마 날것 그대로의 감동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텍스트들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진들을 가득 담았다고 한다. 감동이었다.

1991년 6월 25일 구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선언을 했을 당시, 크로아티아는 곧바로 세르비아계가 이끄는 신유고 연방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했다. 당시 신유고 해군의 격렬한 포화가 퍼부어지던 두브로브니크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의 학술원장이었던 장 도르메송이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유럽 문명의 상징이 불타고 있는데 팔짱만 끼고 있을 것인가라는 사자후를 토하며, 신유고 해군 앞에서 보트 시위를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국가와 민족의 차원을 떠나 전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어느 지식인의 너무나 감동적인 일화였다.

그 후 유네스코 등의 지원으로 아드리아 해의 보석답게 예전의 아름다움을 되찾은 두브로브니크. 높이 25m, 길이 2km에 달하는 두브로브니크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성벽과 그 성벽에 둘러싸인 오렌지색 지붕들 그리고 터키 옥색빛 바다의 조화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의 도시 두브로브니크에서 여행에 지친 다리를 쉬며, 한 조각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는 이들이 너무나 부럽기만 했다.

크로아티아 자연유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플리트비체 역시 빼놓을 수가 없는 크로아티아의 절경이다. 희귀 야생동물과 다양한 조류들의 서식지로 지난 1979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무엇보다 여느 관광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먹거리들을 파는 요란스러운 매점들이 없다는 점과 친환경적이라는 국립공원 시스템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4계절에 따라 물빛이 바뀐다는 16개에 달하는 호수들 그리고 그 안에 서식하는 야생동물들의 조화가 너무나 이상적이었다. 나도 그 호수들을 가로지르는 유람선을 타고, 도원경에서 노닐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히 들었다.

달마티아 지방의 중심도시인 스플리트는 기독교도를 박해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황궁으로 유명하다. 당시 로마시대를 지배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에게 양위하고 10여년간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고래로 무역항구로 유명했었는데 지금은 달마티아 지방에 산재한 많은 섬들을 잇는 거점항구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단다. 현대를 사는 이들과 고대 로마 유적들이 공존(coexistence)하고 있는 그네들의 삶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책의 작가들은 그런 점에 주목을 해서, 빨래를 널어놓은 장면이나 덧창들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나 보다.

책의 마지막 코스는 크로아티아의 수도이자 천년도시 자그레브였다. 동서양의 기착지답게 20년 전의 전쟁의 참화를 딛고 현대화된 자그레브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치려던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폴란드인 여행자의 조언으로 자그레브의 참모습을 체험하기도 한다. 미처 몰랐었는데 우리가 입는 양복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 넥타이의 원조가 바로 크로아티아라고 한다.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이나 연인을 위해 무사히 돌아오라는 마음을 담아 크로아티아 여인들이 목에 감아 주던 스카프가 그 유래라고 한다.

자그레브의 칼라라고 할 수 있는 파란색 푸니쿨라를 타고 로트르슈차크 타워에서 매일 정오에 쏘는 대포 소리도 듣고, 도이치 시장에 들러 현지에서 재배한 사과도 먹어 보는 일상의 즐거움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자그레브의 청소년들이 벽에 그린 그래피티조차도 카메라의 시선으로 보게 되면 색다르게 보이게 되는걸까? 작가들의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카메라 앵글과 짧으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글들이 독자들의 역마살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돈이 없다고, 시간이 없다고 도무지 여행할 기회가 없다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모두가 핑계라고 했던가. 나를 크로아티아에 가지 못하게 만드는 핑계는 과연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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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맛있다! - 셰프 김문정이 요리하는 스페인 식도락 여행
김문정 지음 / 예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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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세계 최고의 요리는 프랑스 요리라는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다. 와인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솔직하게 고백을 하자면, 프랑스 요리에 대해서도 프랑스 요리와 마리아주를 맞추는 프랑스 와인에 대해서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러던 차에, 태양의 나라 스페인에서 태양이 빚어낸 식재료들을 가지고 직접 요리를 하는 김문정 씨가 쓴 <스페인은 맛있다!>라는 책과 만나게 됐다.

작년 가을에 가수 이상은 씨가 쓴 <올라! 투명한 평화의 땅, 스페인>을 보면서 감상적으로 ‘아, 나도 스페인에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스페인은 맛있다!>을 읽고 나서는 스페인에 가야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됐다.

유럽 배낭시절 마지막 코스였던 바르셀로나에 들렀던 작가가 어느 바르(bar)에서 타파스를 먹던 순간, 그녀의 운명은 스페인 행으로 귀결 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확실히 삶에는 미래의 그것을 좌우하게 되는 운명적 순간이 존재하는가 보다. 가장 먼저 김문정 씨가 식재료를 조달하는 노획 포인트인 보케리아 시장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보케리아에 없다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처럼, 온갖 식재료들의 보고(寶庫)인 보케리아 시장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질 것 같다.

비싼 레스토랑 소개보다는 서두에서부터 우리 같은 보통의 서민들이 즐겨 먹을 수 있는 토마토 빵과 칼솟요리로 시작하는 작가의 따뜻한 마음결이 느껴진다. 아마 나중에 등장하게 될 세계 최고급 레스토랑들인 <엘 불리>나 <산 파우> 같은 식당들이 처음에 소개가 되었다면 거부감부터 들었을지 모르겠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음식으로 시작을 해서, 고급 요리에까지 독자들을 인도하는 작가와 편집진의 점층의 묘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스페인은 확실히 그 넓은 땅덩이만큼이나 다양한 식재료들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지중해와 대서양을 끼고 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해산물들은 물론이고, 처음 들어 보는 시갈라를 비롯해서, 스페인의 국민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돼지 뒷허벅다리 염장햄’ 하몬(Jamon), 지중해 태양이 만들어낸 진주의 추출물인 올리브유, 냉(冷)수프인 가스파초, 가벼운 요깃거리인 형형색색의 타파스와 핀초의 연이은 향연은 책을 보는 내내 당장이라도 스페인으로 달려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야생토끼요리, 새끼양요리 그리고 생후 21일된 새끼돼지를 잡아 만든 코치닐요(Cochinillo) 등의 식재료의 다양성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아울러 작가가 직접 스페인에서 체험한 수많은 요리들과의 사연 있는 이야기들은 글의 현장성을 극대화시켜주고 있었다. 고급 레스토랑인 <드롤마>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식재료들을 밑준비하는 도제의 모습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스페인 친구의 초대를 받아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스페인식 전골요리 파에야를 맛봤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편의 생생한 현지 리포트를 읽는 느낌이 들었다.

각 장마다 두 개씩 달린 레시피는 간단하게 준비해볼 수 있는 스페인 요리에 초대장이었다. 아울러 현지와 같이 똑같은 재료들을 준비할 수 없는 우리네 사정을 고려해서 대체 식재료들을 알려주는 친절함까지! 게다가 마치 바로 오븐에서 만들어낸 요리들을 접하는 듯한 멋진 사진 역시 일품이었다. 요리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맛집탐방” 코너 역시 나중에 정말 스페인을 찾을 독자들을 위한 최고의 서비스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가의 경험은 역시 코스 요리 매 순간마다 감동을 받았다는 카탈루냐에 자리한 <산 파우(Sant Pau>였다. 오죽했으면, 카르멘 아줌마가 직접 경영한다는 <산 파우> 레스토랑의 홈피까지 직접 찾아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을까.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은 <산 파우> 레스토랑은 1988년 여름에 처음으로 개업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산 파우>의 요리 메뉴들은 지금보다 훨씬 간략했었다고 한다. 카탈루냐 지방의 전통 음식들의 재창조를 해낸다는 문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말이 필요없다, 나도 가보고 싶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먹어 싶은 요리는 바로 세고비아 지방의 <호세 마리아> 레스토랑에서 제공한다는 코치닐요 즉 다시 말해 아기돼지구이 다른 말로는 애저구이였다. 얼마나 연한지 나이프 대용으로 접시를 사용해서 서브한다는 코치닐요는 “스페인 사람들의 영혼이 담긴 요리”라고도 한다고 했던가. 와인보다는 맥주 한 잔을 곁들인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다는 환상에 빠져 본다.

한 나라의 문화를 가장 빨리 이해하는 방법은 그 나라 음식을 맛보는 거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은 맛있다!>를 읽으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마늘과 쌀을 주된 식재료로 사용하는 스페인의 음식문화를 체험하게 되면서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시간 내서 근래에 많이 생긴 스페인 레스토랑을 찾아 타파스 맛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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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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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응준 작가의 <국가의 사생활>이 책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다. 도대체 얼마나 재밌기에 그렇게 입소문이 자자한 걸까? 아쉽게도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이응준 작가의 전작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의 전작들과는 문체나 전개 방식 등에서 상이하게 다르다고 하는데 알 도리가 없다.

책을 다 읽고 난 소감은 확실히 재밌다는거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책이야말로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을 한다. 우선 언제인가 우리의 관심사에서 사라져 버린 통일이라는 주제를 필두로 해서, 2011년 어느 날 갑자기 흡수통일이 되어 버린 5년 후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이응준 작가는 담담하게 스케치해내고 있다.

자그마치 120만 명이나 되는 북한 군인들이 사회에 쏟아져 들어오고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들이 시장에 깔리면서, 통일 한국에는 폭력이 난무한다. 사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폭력보다도 어느 순간 2등 국민으로 전락해 버린 공화국 신민들의 처우 문제다. 물론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현재에도 비정규직과 이주민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엄청난 통일비용이 들 미래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분석들이 주도면밀하게 이어진다.

게다가 주인공은 북한 최정예 전사 출신의 리강이다. 그가 하는 일은 (일본 긴자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최고급 술집 은좌가 자리 잡은 건물 안에 둥지를 튼 대동강이라는 폭력 조직의 행동대장 정도라고 해야 할까. 냉혈한 킬러로 과거 공화국의 혁명수출 전략의 일환으로 아프리카에까지 가서 그 실력을 보여 주었었다. 그가 속해 있는 대동강 조직의 보스 오남철은 단고기를 먹으며, 부르고뉴산 와인을 마시는 별난 취미의 소유자다.

리강이 아끼는 조직의 후배 림병모가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이야기에 박차가 가해진다. 통일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기본 줄거리로 해서, 암흑가의 이면을 다루는 느와르 스타일의 전개는 확실히 독자들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 궁금해서, 책장이 절로 넘어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려서 맹목적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 그에 대한 당위성에 대해 알 도리가 없는 나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분단은 해가 갈수록 공고해졌고 자본이 판을 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통일은 어느 순간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타인의 문제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응준 작가가 글 속에서 언급했지만, 20년 전 극적인 통일을 이뤘던 독일 역시 사회주의권에서 가장 부유했다는 동독을 껴안으면서도 엄청난 통일비용으로 휘청거렸다고 한다.

얼마 전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갈팡질팡했던 우리나라가 과연 독일 통일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비용이 요구될 통일을 감당할 수가 있을까.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국가의 사생활>에서는 63년간 상이한 체제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갈등에 주목한다. 체제가 붕괴된 이들의 공허한 가슴을 종교나 무속(장군 도령)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별무소용이다.

<국가의 사생활>에는 다양한 군상들이 등장하지만, 역시 이야기는 리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공화국 최정예전사가 통일 후에는 일개 조폭 행동대장으로 전락해 버린 비애는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던 장용수의 거울 이미지로 대체가 된다. 변질된 소영웅주의의 화신은 그렇게 레드아이의 힘으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고 있다. 어쩌면 그의 일상의 모습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네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게 무엇일까. 궁극의 구원? 어쩌면 그런건 애시당초에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평화통일이 가져다 줄 물질적 번영에 대한 신기루 대신 아파트 공원에 모여 앉아 주인 없는 고양이를 잡아 불에 구워 먹는 이들의 모습에서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술집에서 술에 취한 천사표 아가씨가 손님들을 상대로 해서 전도를 하고, 유물론만을 신봉하는 공화국에서 신내림을 받은 장군도령이 활개를 치는 지독한 욕망의 카니발은 현상을 파괴하는 본질로 다가온다.

속도감 넘치는 전개, 뚜렷한 캐릭터의 설정 그리고 무엇보다 호감을 가질 만한 주제의 선택 삼박자가 빚어내는 <국가의 사생활>은 확실히 재밌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체제전복적인 작가의 상상력이 흡수통일을 택했다는 점이다. 문학에서도 자본주의는 보고 싶어하는 현실만을 다루게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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