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 디자인, 디자이닝, 디자이너의 보이지 않는 세계
홍동원 지음 / 동녘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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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여기저기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그런데 그전에 내가 읽던 책에 대해 지인들이 보이는 반응과 사뭇 다른 반응을 보여 주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제목 때문이었다. 뭐 비둘기 똥구멍? 아니 비둘기 똥구멍을 본 적은 있나? 하고 웃어댔다. 글쓰는 아트 디렉터 홍동원 씨의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책 제목을 얼마나 잘 지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홍동원 씨는 책의 말미에서 광고를 ‘악의 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쓴 이 책이 팔리기 위해선 광고를 해야 할진대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의 제목 설정은 다시 한 번 탁월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독일 유학을 비롯해 아주 출중한 이력을 지닌 저자가 지난 30년간 몸을 담아온 디자인 판의 이모저모를, 디자인 업에 종사하는 틈틈이 익힌 글 솜씨로 아주 맛깔나게 잘 담아냈다. 멋지다!

책의 뒷면에도 나와 있는 질문인데 과연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그 디자인을 한 마디로 하면 뭐가 될까? 이에 대한 대답을 홍동원 씨는 간략하게 하는 대신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장황하게, 그리고 어떻게 보면 매우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짚어내고 있다. 라틴어 데지그나레(deginare)에서 유래했다는 디자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관념 속에 들어 있는 아이디어들을 (조형적으로) 실체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디자인의 본격적인 역사는 한 백년 정도로 볼 수가 있겠지만, 인간은 유사 이래로 디자인과 함께 해왔으면 특히나 현대문명은 디자인을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다.

우리가 소비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디자인의 영향력 아래서 작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자는 디자인 세계를 구축하는 인적 요소로 다음의 세 가지를 지적한다. 우선 실체화를 담당하는 디자이너, 그 디자이너에게 일감과 일용한 양식을 공급해주는 클라이언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생산된 디자인을 소비하는 소비자, 일반대중이 있다. 이 삼위요소들의 역학관계를 저자는 아주 흥미로운 시각에서 풀어나간다.

피티(프리젠테이션)하지 않기로 유명한 아트 디렉터이자 디자이너답게 작가는 디자이너로써 클라이언트에게 꿀릴게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방침이 들지 않으면 다른 곳에 물어 보란다. 세상은 넓고, 클라이언트는 많으니까 말이다. 아티스트의 자존심이 빛난다고 해야할까?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기십 만원씩 하는 한정식상을 쏘는 클라이언트일수록 꼭 가격을 깎으려고 한다는 분석 또한 일품이었다. 아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런 쓸데없는 비용 말고,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있게 투자를 하란 말이다.

그 외에도 이 책에는 디자인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사랑 바이러스 I♥NY의 주인공 밀튼 글레이저, 전 세계 공통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하철 노선도의 초안을 고안해낸 전기 배선 엔지니어 해리 벡, 근대 파리를 통째로 뜯어 고친 르 코르뷔지에의 요상하기 짝이 없는 의자 이야기, 프랭크 뮬러의 크레이지 아워 워치, 마르쿠스와 다니엘이 만든 그 유명한 프라이탁 가방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화수분처럼 마구 샘솟는다. 특히 이 책을 나고 나서 하도 궁금해져서 화물 덮개 천으로 만든다는 프라이탁 사이트에도 방문해 봤다.

하지만 이 책 중에서 가장 나의 관심을 끈 저자의 주장은 바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아이디어였다. 그가 독일 유학에서 교수에게 배웠다시피, 우리가 아무리 독일어를 잘하고 영어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네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자신 있는 한국어를 가지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디자인으로 실체화시키는 작업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무조건적인 베끼기가 아닌, 창조적인 아이디어의 생산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수년 전 뉴욕의 구겐하임 뮤지엄을 찾았을 때의 그 감동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가는 길을 몰라, 물어물어 찾아가는데 저 멀리서 희여멀건 건물의 둥근 곡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의 감동이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 같이 디자인에는 일천한 사람까지도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그 무언의 힘!!! 그것이 바로 21세기 우리가 추구해야할 디자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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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김선주 지음 / 삼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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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분당 샘물교회에서 아프간에 갔던 선교단 일행이 탈레반에게 납치되면서 한동안 사회에 파장을 몰고 온 적이 있다. 다시 한 번 기독교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감을 읽을 수 있는 계기였다. 그해 초에 개인적으로 알고 계시는 분이 아프간으로 선교를 간다 해서, 회교 율법에서 기독교 전도 행위를 금하고 있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 법을 어겨 가면서 전도를 해야 하냐고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왜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하면 안되는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전도를 비롯해서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7가지 사항에 대해 냉철한 분석을 통해 저자 김선주 씨는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목사, 교회, 설교, 복음, 전도, 영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헌금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현재 예수님의 자리에 맘몬과 물신을 받드는 자본주의 시장논리로 대체된 한국 교회가 놓칠 것이 하나 없어 보인다. 물론 주류 교회에서는 우리가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외면하겠지만 말이다.

가장 먼저 저자는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는 메신저라는 선언을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 사제와 신도 간의 구별은 없어졌다. 그것이 바로 중세 부패한 가톨릭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유대교 전승에 의거한 제사장 중심의 예배의식이 어느새 한국교회에 침투하면서 목사 중심의 목회가 대세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닌, 낮은 곳에서 우리들을 섬기러 온 예수님의 뜻을 본받아야 할 목회자들이 신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할 것이다.

두 번째로 저자는 교회를 이념의 성전(聖殿)으로 규정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로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했던 교계 지도자들의 통렬한 반성 없이 해방과 한국전을 맞이한 한국 교회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편승해서 예수님의 이웃사랑의 정신을 전파하기보다는 군사개발독재와 교회의 양적 성장에만 치우친 그릇된 모습만을 보여 왔다. 뿌리가 깊지 못한 근본 신학에 대한 연구 부족으로, 자성하지 못한 일부 뉴라이트 계열의 정치목사들이 발호하는 모습에 일반 대중들은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대형교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오늘날 교회 내의 젊은 청년들이 요구하는 가치와는 동떨어진 채 점점 율법주의와 천민자본주의에 입각한 시장논리로 흘러가고 있다. 오늘날 교회를 등지는 젊은이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세상이 악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그들에게 실천적 모습과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세 번째 오로지 그들만의 리그에서 말뿐인 설교의 공허성을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인터넷과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넘쳐나는 설교들로 인해 설교의 가치는 날로 하락하고 있다. 현장성이 결여된 미디어 설교를 실천적 삶에 참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주일예배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성과 현장에서 서로 교류하는 소통의 담론은 확보할 수가 없다. 저자가 표한하듯이 설교 시간이 “소통과 교감의 제의”(121쪽)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데 적극 찬성한다.

너무나 자본주의화된 교회 내의 모습에서 설교 또한 일련의 중산층 사교클럽의 일종의 소비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진단은 뼈아픈 지적이었다.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르침인 이웃사랑과 돌봄의 미학보다 교회 내에의 유니폼 크리스천들끼리의 교제에 보다 많은 시간을 들이고, 교회의 유지와 보수에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건 아닌지 반성해야 할 일이다.

네 번째 복음 편에서는 현재 대한민국 호를 이끌고 있는 대통령 이명박 장로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분석을 볼 수가 있다. 저자의 판단에 의하면 도저히 기독교 출신 장로로 볼 수 없는 행태와 정책이란다. 그가 대통령 인수위 시절 기용한 소망교회 인맥에서부터 시작해서, 소위 말하는 사회지도층에 해당하는 기독교 인사들의 행태는 기독교를 떠나서 기본적인 소양은 물론이고 양심에서도 한참 멀리 벗어나 있었다.

다시 한 번 저자는 대선 전에 그렇게 이명박을 지지했던 교계 지도자들에게 정말로 복음의 차원에서 그를 검증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물론 그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 기독교 정신과 복음적인 차원이 아닌 오로지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에서 그를 지지한 교계 지도자와 교권주의자의 모습에서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의 위선과 허위를 꾸짖던 예수님의 모습은 역시 보이지 않았다.

맨 처음에 언급했던 전도는 다섯 번째로 등장한다. 우선 저자가 모은 실례를 드는데, 아마 많은 이들이 공격적이면서도 일방적인 형태의 전도를 봐왔기 때문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전도의 취지에 대해서는 찬성을 하지만, 상황과 때를 가려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그들은 사랑한다면 나와 타자와의 분리 없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충분히 말씀과 복음으로 준비되지 않은 채, 뜨거운 열정만으로 전도 행위에 나서는 것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2년 전 역시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의 뼈아픈 자기고백과 회개에 대해 경험한 적이 있다. 이 책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는데, 여느 집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회개가 단발성 이벤트에 그친다는 것이다. 여섯 번 째에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그에 대한 일례로 여의도 모 교회의 목사의 예를 들고 있는데, 전혀 구체적이지 않고 두루뭉술한 회개는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나중에 그가 가상으로 작성한 회개문이 오히려 더 가슴에 와 닿았다. 물론 그가 그런 회개를 할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현실적인 면에서 세상과 충돌하고 있는 헌금문제가 있다. 성전과 제사장 이데올로기 무장한 한국 교회들은 헌금과 십일조가 정말 쓰여야 하는 용도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건물을 짓고, 목회자들이 대한 사례비나 임대비가 아닌 세상을 구휼하는데 성도들의 헌금이 온전하게 쓰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이랜드 사태가 보여 주는 교훈 또한 명확하다. 기업은 무조건 이윤을 내야한다는 자본주의적 명제와 더불어 사는 삶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은 양존할 수 없다는 것이 예의 사태를 통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130억의 십일조 납부보다 1000여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승계가 창출한 이익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측면에서 대중들의 환영을 받지 않았을까? 이들의 농성에 대해 이랜드의 회장이 장로로 시무했던 강남의 모 대형교회가 굳이 외면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선주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매체의 기사와 저서를 인용하기도 한다. 특히 102쪽에 나오는 경향신문에 실린 구미정 교수의 ‘강남형 대형 교회 여신도들의 신앙양태에 대한 신학윤리적 성찰’ 기사는 직접 찾아 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0-80년대 개발독재 패러다임이 설교를 통해 현재 대형교회 성장 메커니즘에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구교수는 이 기사를 통해 한국 교회의 미래 지향적 가치는 “성장과 성공이 아니라, 작음과 낮아짐, 나눔과 섬김, 보살핌과 살림”이 되어야 한다고 방점을 찍는다.

아울러 예전에 을유출판사에서 나온 <가톨릭교회>라는 책을 통해 처음 만난 한스 큉의 저작에 대해서도 언급이 되었는데, 특히 그의 명저 <그리스도교>를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과연 이렇게 문제가 많은 한국 교회에 희망은 없는걸까? 저자는 그래도 여전히 교회 안에 희망이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다만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씀처럼 현재 한국 교회에 깃든 맘몬과 물신주의의 탈을 벗어 버리고, 그동안의 과오에 대한 통렬한 회개를 통해 거듭나야할 것이다.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원론적인 말보다, 한 번의 실천이 담긴 진정한 사랑으로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한국 교회의 부활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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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를 리뷰해주세요.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권진.이화정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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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어쩔 수 없이 존 그레이의 그 유명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의 책과는 달리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는 남녀관계의 대한 책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21세기 오늘날의 서울에 대한 스케치였다.

책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누구나 다 서울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아닌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 보는 서울은 과연 어떨까라는 문제 제기에서 이 책은 출발을 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미녀들의 수다>처럼 천편일률적인 한국 예찬론이 아닌 한국에서 생활을 하는 7인의 이방인들을 두 명의 인터뷰어들이 만났다.

현재 영어 광풍이 불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이방인들은 바로 영어선생님일 것이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닌 듯,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로버트 프리먼이란 미국 영어선생님과 시작을 한다. 질문은 대개 어떻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됐느냐로 시작해서 한국에서 좋고 나쁜 인상들 그리고 점차적으로 내면을 때리는 질문들이 수놓아진다.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스타벅스 커피를 즐기는 이방인의 모습은 향수일까 아니면 자신의 문화에 집착일까 하는 생각이 불쑥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온라인 싸이월드의 공간을 현실 세계에서 그대로 재현해 낸 에밀 고는 말레이시아 출신의 아티스트다. 이 에뜨랑제들이 편안하게 생각하는 공간은 과연 어딜까? 이태원? 아니면 클럽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홍대입구? 비슷하게 패턴화된 질문들 가운데 인터뷰이들의 대답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흘러나온다. 우리의 얼굴 모습이 제각각인 것처럼 개성 넘치고 다양한 대답들의 행진이다.

아예 한국인 남편을 만나 한국에서 살림을 차린 세밀화 아티스트 곤도 유카코는 일본 출신이다. 아이까지 낳아, 육아로 바쁘다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얼핏 얼핏 드러난다. 획일화된 아파트 대신 단독주택을 좋아하는 그녀의 말에서 정작 우리 것보다는 문명의 편리라는 이유로 서구화된 것들을 추구하는 우리네 모습이 과연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로써 일본에서도 부르기 쉬운 아이 이름을 정하는 고민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일본보다 훨씬 더 끈끈한 가족애와 소통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를 비교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기도 한다. 생활인으로서 그녀가 보는 쓰레기 이야기는 참 재밌게 느껴졌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누군가 쓰레기 봉지를 하다 내다 버리면 바로 쓰레기 더미가 되어 버린다는.

동아시아 영화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얼 잭슨 주니어 역시 특이한 캐릭터의 소유자다. 서슴 없이 자신을 안티 아메리칸이라고 소개를 하는 그는 스페인에 머물고 있는 아내와 더불어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의 삶을 살고 있다. 여타 이방인들과는 달리 채식주의자로 한국 음식을 즐기는 그의 모습에서 절로 구수한 된장냄새가 나는 듯 했다. 옛것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현대적 도시의 삶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 삶의 현장 서울에 대한 생생한 단면들을 그의 입을 통해 되새겨 볼 수가 있었다.

이 책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만딩고 댄서 바또 브레이즈를 들 수가 있겠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해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바또 브레이즈는 특이하게 프랑스어를 구사하면서, 영어를 한국에 와서 배우게 됐다고 말한다. 어쩔 수 없이 영어가 다시 한 번 만국공통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 그는 커뮤니케이션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이태원을 꼽았는데, 그만큼 이방인들에게 친근한 공간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일단 타인의 시선으로 좀 더 진지하게 우리네 모습을 바라보는 기획이라는 점에서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인터뷰 대상자들이 모두 영어강사, 교수, 아티스트 혹은 댄서 등 전문직 종사자들만으로 꾸며져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설마 그들만이 서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어떻게 보면 이방인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이 책에서도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었다.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서라도, 2~3명 정도는 그들의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녀들의 수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인터뷰어들의 진행 때문이었는지 최대한 절제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좀 더 솔직한 이야기들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알게 모르게 당하고 있는 차별과 편견에 대한 이야기들이 좀 더 진정성을 가진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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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
게키단 히토리 지음, 서혜영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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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키단 히토리라, 전혀 처음 듣는 이름이다. 일본의 영화배우 겸 탤런트라고 하는데 2006년에 그가 쓴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라는 책이 2년 만에 백만 권이 팔리면서 일본에서 5년 만에 밀리언셀러가 탄생했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대단한 책이란 말인가? 사실 밀리언셀러라는 타이틀에 현혹이 되긴 했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인생> 그리고 드라마 <전차남>에도 출연했었다고 한다. 그전에 <전차남>을 아주 재밌게 본 적이 있어서 그의 모습을 떠올려 봤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기보다는 글 쓰는 재주가 더 뛰어난 걸까? 맨 끝의 역자 후기를 보니,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미국 알래스카와 일본을 오가면서 외톨이로 자라게 됐고 그 때의 경험이 축적되어 그만의 문학세계를 이루게 되었다고 했던가.

작년 여름에 아주 인상 깊게 읽었던 가네시로 카즈키의 <영화처럼>의 구성처럼 게키단 히토리의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 역시 연작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모두 5개의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보다 더 예리한 주의력이 요구되는걸 느낄 수가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부분들이 책 속의 다른 이야기 속에 불쑥불쑥 튀어 나오니 말이다. 그리고 또 어떤 이야기들은 그전에 나왔던가 하는 착각적 기시감을 창조해 내기도 했다.

평범한 샐러리맨의 생활을 하던 보통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홈리스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낮에는 샐러리맨으로 그리고 밤에는 홈리스로 살아가게 된다. 아예 나중에는 정상적인 삶 대신에 홈리스로 변신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철저하게 홈리스로 살아가면서도 성욕과 자존심은 통제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 홈리스 모세가 유명한 야구선수로 성공한 아들을 만나는 것을 보고, 또 쓰레기 처리장에서 폐기된 도시락을 두고 어느 젊은 홈리스와 드잡이 질을 하다가 자신의 가정과 일상으로 복귀할 결심을 하게 된다.

다음 이야기는 한물간 아이돌 스타를 흠모하는 어느 오타쿠 청년의 이야기다. 이젠 이십대 중반으로 아이돌 스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다케다 미야코를 극중의 화자 나는 너무너무 사랑한다. 물론 그건 일방적인 원웨이 사랑이다. 그녀에게 정성이 담긴 손 편지를 쓰고, 행사장에 가는걸 마다하지 않지만 달랑 네 명의 팬만이 모인 사진발매 기념 행사장은 초라하기만 하다. 그녀는 데뷔곡 “돌아보며 키스”를 부르며 관객들을 돌아보다가 깜짝 놀란다. 우여곡절 끝에 텔레비전 프라임 시간대에 출연을 하게 되지만, VTR 화면 속의 정말 하찮은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 일상의 고고한 꽃이기 보다는, 꽃밭 가운데 튀어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도통 운이 따르지 않는 아이돌 스타의 고달픈 삶을 ‘나’는 관조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 <핀트가 안 맞는 나>, 스무 살 여성 프리터로 생활하는 나는 아무런 꿈도 없다. 누가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뭣해서 그냥 카메라맨이라고 둘러댄다. 게다가 핑계 김에 디카도 사고, 메모리도 구입을 하게 된다. ‘나’는 타인과의 소통에 있어서 너무 서투르다. 그러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자신이 사모하는 남자에게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 나는 전철역에서 그만 ‘추락’하고 만다. 하지만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랑.

네 번째 인물인 역무원 ‘나’는 25살 때부터 시작한 도박과 다중채무자라는 굴레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파친코와 슬롯머신 그리고 경마에 모든 돈을 쏟아 붓는다. 나에게 확률의 여신은 외면을 하고, 결국 벼랑 끝에 몰린 나머지 삶의 터전인 역에서 세상을 하직하려다 ‘핀트가 안 맞는 나’와의 조우로 모진 삶을 이어나간다. 이번에 내가 생각한 방법은 전화사기, 하지만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다. 어느 할머니와의 전화는 거의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만, 엔딩에 가서는 진부하면서도 먹먹한 멍울을 가슴에 남긴다.

마지막엔 타이틀인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다. 왠지 철학적일 것 같은 제목이지만 사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리나는 모래 위해서 사랑을 해서 주인공 나루코가 태어나게 되었노라는 깜찍한 이야기다. 나루코는 어려서 친부와 새아버지를 잃고, 아사쿠사에서의 옛 인연을 찾아 도쿄로 떠난다. 그녀는 어쭙잖은 개그를 선보이는 푸들 라이타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를 찾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인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나 엇갈리는 사랑의 이야기. 그리고 이별.

지난 가을에 처음으로 일본 도쿄에 다녀왔는데 그 때 갔었던 장소들 덕분인지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에 등장하는 장소들이 하나 같이 낯설지가 않고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아이돌 팬들이 사인 한 장 받겠다고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아키하바라, 도쿄의 골목길 어디에서고 볼 수 있었던 파친코와 슬롯머신들 그리고 숙소가 있었던 아사쿠사의 센소지가 특히 그랬다.

게키단 히토리는 거창한 이야기들이 아닌 우리네 일상의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소박한 면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마치 독자들의 감정을 저글링하듯이, 웃음과 울음 사이로 인도한다. 거기에 유기적인 순환적 옴니버스 구성은 극적 긴장감을 바짝 조여 온다. 너무 몰입해서 책을 읽다가 그만 퇴근길 전철 안에서 그만 내려야할 정거장을 지나칠 뻔 했다. 그 정도로 대단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는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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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를 리뷰해주세요.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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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등점이라고 들어 보았는가? 아니 이렇게 말하면 더 쉬울 것 같다. 끓는점이라고. 물의 끓는점은 모두가 다 알다시피 100℃이다. 이 상태가 되면 액체 상태의 물은 기체 상태로 본질적 전이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어느 특정한 상태에서 전혀 다른 상태로 변화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만화 <100℃>에서 최규석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런 획기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모두 해서 10개의 장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이루어진 <100℃>는 이미 작년부터 온라인상에서 만날 수가 있었던 작품이다. 아주 시기적절하게 6월 민주항쟁 22주년 맞이해서 2009년 6월 10일에 다시 만나볼 수가 있었다. 작년에 온라인으로 배포된 작품을 만났을 때의 감동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 자신의 집권 마지막 해였던 1987년 봄에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절친 노태우에게 다시 한 번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정권유지를 하겠다는 호헌선언를 한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의 거대한 흐름이 민주주의의 역행을 바로 잡고, 개헌을 통해 직선제를 쟁취하는 과정에 작가는 초점을 맞춘다.

가난한 가정의 막내아들로 서울에 소재한 대학에 진학한 영호는 어려서부터 반공소년으로 자라난다. 하지만 영호는 대학과 가정에서 맞닥뜨리게 된 사회적 현실들을 통해 그동안 자신이 주류사회로부터 기만당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행동하지 않는 이성은 죽음이라고 했던가, 아버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호는 학생운동에 뛰어 들게 된다.

보다 극적인 각성은 영호의 어머니에게 읽혀진다. 어려서 빨치산 동조자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에 대한 남모를 비밀을 가지고 있는 영호의 어머니. 그녀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헌법에 명시된 시위를 하던 중에 경찰에게 붙잡혀 징역살이를 하게 되면서 비로소 전두환 독재정권의 위선과 기만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기존의 언론 방송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는 이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광경이 너무나도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새로운 천년에도 이들의 프로파간다는 여전히 유효하다.

한편 대학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던 전두환 정권의 바닥에 떨어진 도덕성에 국민들의 비등점은 점점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1987년 6월 9일 시위 도중, 연세대 출신의 이한열이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지면서 호헌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등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뜨거운 열망은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의 6-29선언을 이끌어 내기에 이른다.

최규석 작가는 사회의 가장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서, 한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역사적 사건에 이르는 단초들을 말없이 독자들에게 나열해 준다. 지난 역사를 개인의 평가에 맡기려는 듯 말이다. 영호 어머니의 각성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의 어머니를 연상케 한다. 이것은 ‘한 사람이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이 한 걸음’이라는 역사 진보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2009년 6월, 현재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은 여전히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으로 보인다. 6월 민주항쟁 기념에 즈음해서, 서울광장은 여전히 개방되지 않고 있으며 지난 20년간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으로 성취해낸 소중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역주행을 하고 있다. 유시민 선생의 그의 저서 <후불제 민주주의>를 통해 선언했듯이, 정당한 대가 없이 얻은 민주주의에 대해 우리는 후불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맴도는 6월 10일의 스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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