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 빈센트 람 소설
빈센트 람 지음, 이은선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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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기 전에, 의사출신의 작가가 쓴 글이라고 해서 왠지 지루하겠구나하는 선입견을 가졌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런 지루함 대신 마치 짧은 메디컬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엄청난 흡입력을 가진 소설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매 장마다 특별한 주제를 가진 이야기들에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들이 적절하게 개입되면서 전개되는 양상이 도저히 신예작가의 작품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의례 의학소설이라고 하면 떠오르게 되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전문 의학용어들을 의식해서인지 작가 빈센트 람은 주인공들의 관계에 먼저 초점을 맞춘다. 의과대학에 진학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 밍과 피츠제럴드라는 캐릭터들로 독자들을 유혹한다. 의대진학이라는 지상과제에, 남녀간의 밀고 당기는 달콤하면서도 때로는 치명적인 로맨스로 <기적>을 시작한다.

사랑의 장애가 되는 인종간의 격차,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였더라도 어느 순간 타인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관계의 휘발성 등이 빈센트 람의 글을 통해 하나하나 재현이 된다. 성공의 뒤안길에는 그렇게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짙은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상처 입은 사람만이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다는 카피가 와닿는 순간이었다.

주인공들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과연 그들이(미래의 의사 지망생들) 아픈 이들을 돕는 휴머니스트로 적어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고결한 도덕주의로 무장한 이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렵다는 의대 시험을 위한 시간을 30분단위로 쪼개 공부를 해대고, 족보를 외우고, 이어질 면접에 대비하는 그네들의 모습을 보니 취업대란 속에서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 위해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청춘들의 그것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사실 <기적>은 보통 의학소설들이 독자들에게 제공해주는 싸구려 감동보다는 좀 더 의사들의 내면 묘사에 중점을 둔 것 같다. 그들 역시 보통 사람들처럼 사랑에 상처받고, 외로움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아가는 인생들이라고 빈센트 람은 선언을 하고 있다. 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해 달라는 말일까?

메디컬 드라마가 그렇듯이 의학소설 역시 그 꽃은 응급실에서의 상황일 것이다. 담당의들의 처방이 생과 사의 경계를 구분하는 그 순간의 미학이야말로 소설 <기적>에서 작가의 진가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는 환자의 정신상담을 맡기도, 혹은 경찰관에 의해 끌려온 환자에게 깨물리기도 하는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아무리 의사가 직업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에게 충실한 장면은 감동 그 자체였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SARS에 감염되어 격리병동에 갇힌 천이 동료의사 피츠제럴드를 구하기 위해 보호막을 부수고 응급처치를 하는 장면이었다.

각 에피소드들에 시간과 공간적 갭을 배치한 작가의 탁월한 선견지명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의대입학을 위해 치열하게 살던 주인공들이 어느새 의대생이 되어, 해부를 하고 팀워크를 배우는 장면으로 또는 필드에 나가 각자 고유의 영역에서 치열한 삶을 사는 장면들로의 점프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런 빈 공간들을 독자들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으라는 작가의 조금은 까탈스러운 주문조차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책을 보면서, 이 책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역자 후기에 보니 캐나다에서 이미 드라마화되었다고 했던가. 과연 드라마 버전은 어떨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고리타분해 보이는 의학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빈센트 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곧 이어 출간될 전망이라는 그의 다른 작품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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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벳 - 어느 천재의 기묘한 여행
레이프 라슨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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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에 <블루의 불행학 특강>을 읽으면서 그 두께에 놀란 적이 있었다. 오늘 이야기할 <스피벳 - 어느 천재의 기묘한 여행> 역시 전공서적에 버금갈만한 사이즈에 500쪽에 가까운 분량이 선뜻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예고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내용일까 해서 책장을 펴본 순간, 읽고 있던 책마저 내려놓고 이 책부터 먼저 읽게 만드는 마력에 빠져 버렸다.

책의 내용은 무척 간단하다. 미국 몬태나 주 코퍼톱이라는 시골 목장에 사는 12살짜리 꼬마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위치한 스미스소니언 협회가 수상하는 베어드상의 시상자로 결정되고, 주인공 티에스(T.S.) 스피벳이 미국 대륙을 횡단해서 자신의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내용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 티에스(이니셜의 T는 쇼쇼니족의 전설적인 전사 테쿰세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미국 역사에 오점으로 기록된 인디언 학살에 대한 오마쥬처럼 보인다)는 냉담한 과학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세상을 설명해주는 도구로써 ‘도해’를 선택하고 훌륭한 제도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해 나가고 있다. 물론 그의 멘터인 테렌스 욘 박사가 이 모든 소동을 주도하기는 했지만.

물론 작가 레이프 라슨의 상상력의 구현이겠지만, 확실히 12살짜리 꼬마가 자신의 특별한 관찰력을 이용해서 책에 실린 것과 같은 도해들을 그려낸다면 그야말로 해외토픽에 나올 만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티에스의 완고한 카우보이 아버지는 자신의 맏아들의 능력과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마 총기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막내아들 레이턴의 그림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스피벳 가족에게 레이턴의 이름은 터부처럼 다가온다. 특히 주인공 티에스에게 레이턴은 트라우마의 원천이다.

어쨌든 그 스미스소니언 협회로부터 온 한 통의 전화로 티에스의 장구한 여정이 시작된다. 사실 책을 보면서 계속해서 든 의문인데, 12살짜리 꼬마가 무임승차와 히치하이킹만으로 그 광활한 미국대륙을 횡단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여행하는 동안에 필요한 식량은 어떻게 조달한단 말인가? 바로 그 시점에 작가 레이프 라슨은 적절한 판타지들을 심어 둔다. 나같이 태클을 걸 독자들을 위한 작가의 배려일까? 티에스는 주변의 사물과 대화를 하고, 그것들에게 인격을 부여한다. 얼핏얼핏 남미 출신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주술적 리얼리즘의 향기가 느껴졌다.

게다가 액자식 구성으로 소설 속에 스피벳 가문의 역사적 유래를 다룬 이야기가 티에스가 자신의 어머니 방에서 얼결에 훔쳐온 할머니 엠마 오스터빌 이야기가 중첩이 된다. 사실 이 부분이 티에스의 모험담을 원하는 독자에게 조금은 지루한 요소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상 전래의 과학적 탐구 정신 그리고 어쩌면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이성적 접근에 대한 우회적인 표현처럼 보인다.

스피벳의 이 기묘한 여정은 미국 중서부를 횡단하면서, 꼬마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도해와 기록들이 넘실거린다. 분면 티에스는 사진도 찍었지만, 카메라의 렌즈는 티에스의 눈과 손을 대체할 수가 없었나 보다. 맥도널드 해피밀에서 받은 해적인형으로부터, 자신의 가계도, 자신의 이동로 그리고 시카고의 쓰레기 밀도 분포도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도해로 표현해내는 티에스. 여정의 말미에 가서 티에스는 오늘날의 미국에서 이상적인 학생 상으로 떠받들어진다. 물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선,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지경에 빠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No pain, no gain 이라는 경구가 정말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역시 이 소설의 백미는 스미스소니언에서 연설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의 과학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른 티에스 스피벳!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얼마 전에 불의의 사고로 죽은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어린 아이일 뿐이다. 물론 그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어른도 있지만, 정말 선의로 그를 도와주려는 이들도 있다. 티에스에게 뿐만 아니라 그만큼 이 세상은 우리 어른들에게 혼란 그 자체다.

이 멋진 소설의 작가인 레이프 라슨은 이 책의 사이드바(측면주석)에 실린 모든 일러스트들을 직접 그렸다고 한다. 이 작품을 준비하는데 무려 4년이나 걸렸다고 하는데, 그만큼의 효과는 충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 단 한 편의 책으로 문학계의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랐으니 말이다. 북디자이너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의 일러스트들은 확실히 멋지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소설은 모름지기 재밌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나의 소설관과 아주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서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신예작가여서 그런진 몰라도, 초반의 멋진 스타트와 중반의 전개에 비해 결말이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가족중심주의적인 미국의 한계가 드러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관계의 회복으로 매조지되는 엔딩이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티에스 스피벳과 함께 하는 3000km의 여행은 충분히 그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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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hug! 아프리카
김영희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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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유명한 PD인 김영희 작가의 <헉hug! 아프리카>와 만났다. 개인적으로 텔레비전을 잘 안보기 때문에 김영희 PD가 얼마나 대단한 연출가라는 건 사실 모른다. 하지만 책날개에 실린 그의 약력을 보니 그가 그동안 연출한 프로그램들이 얼마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 왔는지 알만 했다. 아무리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센스는 있으니 말이다.

책을 집는 순간, 야 제목 한 번 기똥차게 뽑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제목에 들어가 있는 “헉”은 두 가지의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친절하게 달린 영어 설명처럼 껴안기를 뜻한다. 수년간의 직장생활을 하던 작가가 어느 날, 배낭과 스케치북을 껴안고 아프리카로 “헉”을 혹은 껴안으러 떠난다. 그리고 두 번째 “헉”은 놀라움이다. 아프리카의 대자연이 빚어내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그리고 그 안에서 부대껴 사는 이들의 다양한 삶의 군상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역시 아프리카하면 떠오르는 동물의 낙원 혹은 사파리의 천국으로 알려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김영희 PD는 장장 70여일에 걸친 아프리카 여행길을 시작한다. 여행하는 모든 이들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는 적도 밑의 산 킬리만자로를 찾아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빅 폴 빅토리아 호수로 작가는 독자들을 인도한다. 게다가 김영희 PD는 이제는 누구나 흔히 찍을 수 있게 된 디카가 빚어내는 빛의 애니메이션이 아닌 직접 손으로 그린 일러스트들을 당당하게 보여준다. 전문적인 작가의 그림은 아니지만, 그네들의 삶의 면모가 드러나는 그림 이야기가 마음 푸근하게 다가온다.

그가 들렸던 나라 중의 하나인 짐바브웨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얽힌 이야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우선 가게에는 살만한 상품다운 물건이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물건을 사기 위해도 물건 값이 오른다는 이야기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변변찮은 물건을 사기 위해 돈뭉치를 들고 다녀야 한다는 그네들의 현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한편, 냉장시설이 시원치 않은 현지에서 찬 맥주를 마시기 위해 스와힐리어를 배우고, 어느 맥주병에 붙은 라벨을(그 문구가 정말 멋지다) 떼기 위해 몇 병을 마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작가의 노고를 치하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어려서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통해 알게 된 오카방고 델타 여행담을 최고로 꼽고 싶다. 역시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해 더 호감을 가지게 되는 모양이다. 오카방고 델타의 미로 같은 수로를 가이드들과 함께 하는 원시세계로 호기 좋게 탐험을 떠나는 작가의 모습에서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홀로 하는 여행길에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미비아에서는 미처 비자를 받지 못해 입국을 하지 못해 입국거부를 당하기도 하고, 말리의 사하라 투어에서는 얼치기 가이드에게 협박을 당하기고 했으며, 심지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번에서는 노상강도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위기를 작가는 하쿠나 마타타(no problem) 정신으로 헤쳐 나간다. 어쩌면 김영희 PD의 그런 잊고 싶은 추억조차 아프리카의 한 단면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아프리카에 대해 모르고 있던 재밌는 사실들을 알게 됐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 모든 강의 어머니로 불리는 나일 강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고 한다. 물론 그건 어디에서 보느냐의 기준이겠지만 말이다. 두 번째로, 아프리카에서도 겨울 파카가 필요하다. 열사의 땅으로 각인되어 있는 아프리카에서 겨울 파카가 웬 말이겠냐고 하겠지만 작가는 오카방고 델타 부근의 타운에서 겨울 파카를 구입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에도 펭귄이 살고 있다. 펭귄 녀석들은 모두 남극에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프리카 최남단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의 볼더스 비치라는 곳에 살이 투실투실하게 오른 펭귄들이 군락지가 엄연히 있다는 사실.

책을 읽으면서 김영희 PD의 막무가내 정신이 마냥 부러웠다. 우선 일상을 접고 아프리카로 떠났던 그의 패기 넘치는 도전정신과 많은 난관을 모든 게 잘될 거야라는 긍정의 힘으로 돌파해 나가는 과정이 또 한 명의 나그네의 역마살을 한껏 자극하고 있었다. 물론 며칠 동안 고락을 같이 간 사파리 가이드들에게 얼마나 팁을 주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는 초식남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지만, 그래서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비록 버스 출발시간이 잘 안 지켜지고, 공항에서 연착은 다반사인데다가 공무원들의 불친절, 밍밍한 맥주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어떻게든 바가지를 씌우려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에 의하면 만능치료약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조차도 추억이 되기 마련이란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살아 있기만 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원초적 생명력과 가능성이야말로 아프리카의 참맛이 아닐까. This is Afri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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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리뷰해주세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와 나눈 3일간 심층 대화
오연호 지음 / 오마이뉴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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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9년 5월의 어느 주말, 외출을 하려는데 텔레비전에서 긴급속보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오보겠지 하는 마음으로 외출을 했다. 그런데 시내에 나가 들리는 말들을 들어 보니 정말 노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게 맞다고 했다. 그리고 아주 우연하게 마주친 어르신이 다짜고짜 노 전 대통령이 죽은 게 맞냐며(당신은 이미 알면서 나에게 물었었다), 한바탕 고인의 욕을 해댔다. 이성적으로 대화가 되지 않겠다 싶어서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그게 나의 지난 5월 23일의 모습이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는 인터넷 언론인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기자가 임기 말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을 2007년 가을 세 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정리해서 내놓은 책이다. 이 책에서 인터뷰어 오연호 기자는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 정치가, 사상가 그리고 마치 그의 별명처럼 되어 버린 바보 노무현을 조명한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노무현 대통령은 상고출신으로 사법고시를 치르고 법조인 생활을 시작한다. 부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그는 인권변호사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고, 자신의 정치적 대부인 YS의 공천을 받아 부산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에 발을 내딛는다. 전두환에 대한 청문회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노무현 대통령은, 1990년 YS의 민자당 야합을 분연히 거부하고, 마이너리거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는 부산에서 잇달아 국회의원 선거와 부산시장선거에서 낙선하면서 지역차별의 벽에 좌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반칙을 허용하지 않는 원칙주의자라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2002년 당시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이인제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도 대선후보 레이스에 뛰어 들면서 초반 열세를 딛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맞붙어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것은 마치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가능케 하고, 건전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의 도래를 알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이 맞부딪힌 정치현실은 우리가 기대했던 이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오연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과의 치열한 전투는 임기 내내 노무현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 노 대통령 자신도 국정운영을 하는데 가장 큰 장애였다고 이 책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언론은 근대초기 자신의 순기능인 정부비판을 바탕으로 시민사회에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언론은 그 어느 것의 통제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자의적인 권력을 행사하면서, 시민들의 편이 아닌 시장권력과 결탁하거나 혹은 아예 그 권력 자체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끊이지 않는 언론과의 불화에 더해,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타결과 같은 자신의 지지자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현안들이 잇달아 현실화되면서 노 대통령의 지지자들마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대통령은 야당인 한나라당을 설득해서 대연정 구상도 해보지만, 단발선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결국 지난 2007년 대선에서 747공약을 내세운 한나라당의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우리는 작금에 민주주의 역주행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이 책에 기술된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가슴을 때리는 구절은 바로 “권력을 위임은 하되, 지배는 거부한다”는 말이었다.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국민의 위임을 받은 국가 혹은 권력의 대리인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주권자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신을 구속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이런 역설적인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작금의 이런 현실을 예상이라도 했듯이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서 퇴임 후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기자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라고도 불리는 유시민 교수의 저서 <후불제 민주주의>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아무런 대가 없이 미리 땡겨쓴 민주주의의 가치를 우리는 지금에서야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통제 불능에 빠져 리바이어던처럼 변해 버린 권력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이 각성하고 새로운 시민조직을 결성해야 한다고 고인은 주장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보호나 공동체적 삶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거부하는 시장자본주의의 본질을 깨닫고, 새로운 희망의 연대야말로 우리의 나아갈 길일 것이다.

1992년 가을 떠났던 강원도 답사길에 우연히 당시 전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과 만났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정치에는 무관심해서, 실패한 정치인이었던 그에게 사인을 받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후,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서울시청 광장을 가득 메운 그 무수한 바보들의 행렬에서 다시 한 번 그가 우리에게 정말 소중했던 사람이었구나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말 소중한 것은 그 존재가 사라진 후에야 알게 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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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돌의 도시 - 생각이 금지된 구역
마누엘 F. 라모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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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금지된 도시? 굳이 데카르트의 사유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인간이 사유, 다시 말해서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한편으론 생존을 위해 부단 없이 생각을 해야 하는 고된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잠겨 보기도 한다.

스페인 출신의 작가 마누엘 F. 라모스는 그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앞으로 엄청난 세월이 흐른 기원후 49세기로 독자들을 조심스럽게 인도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카르멜로 프리사스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나이 서른 안팎의 복지부 공무원이다. 그는 내리막길을 보면 주체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 잡혀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 났나 보다.

어느 날, 그렇게 내리막길을 보고서 무지막지한 스피드로 뛰는 도중에 세계 대통령의 핸드백을 가지고 도주하던 범인과 충돌하면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병원에 입원한 카르멜로에게 반한 여간호사의 육탄공세와 심지어 여성인 세계 대통령조차 그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세계 대통령의 각료로 ‘나쁜 환경부 장관’인 조르드는 이를 이용해서 영웅 카르멜로에게 가공할만한 범죄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전임 세계 대통령인 아나를 하야시킬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어떤 점 때문에 스페인 독자들이 열광을 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마누엘 F. 라모스의 은유와 블랙유머가 가득한 스토리텔링들은 어쩌면 번역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두 휘발이 되었는지 좀처럼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게다가 분명 추리소설의 장르적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계속해서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로 인해 집중력이 분산이 된다. 얼마 전에 읽었던 일본 작가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에서처럼 소설 처음에 아예 등장할 인물들의 이름을 죽 늘어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관계와 개연성에 대한 설명이 사족처럼 따라 붙었다.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듯한 미스터리한 연쇄살인과 주인공이 검증받지 않은 시술을 통해 거의 불사신과 같이 재탄생된다는 설정은 마음에 들었다. 사실 200쪽 남짓한 짧은 분량에 그 많은 이야기를 담는다는 게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까. 현재로부터 근 30세기가 지난 다음에도 빌 게이츠의 가문이 거의 전설처럼 유지된다는 가설 또한 흥미로웠다.

그렇게 먼 훗날에도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연금제도의 존재와 모든 각료들이 정무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개인의 취향 때문인지 모처의 비밀클럽을 출입한다. 물론 사회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책읽기도 금지되고, 음악의 존재마저 없는 가운데 예의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은 무슨 낙으로 살지 궁금했다.

아쉽게도 스페인식 블랙유머와 나랑은 그 궁합이 잘 맞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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