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고스트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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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 <20세기 고스트>의 작가인 조 힐이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다. 하지만 한 세기 전에 살았던 미국 출신의 노동운동가 조 힐이, 내가 찾는 작가에 앞서서 등장을 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형을 당했다고 하는데, <20세기 고스트>의 작가는 바로 그 이의 이름을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작가 조 힐의 정체는, 놀라지 마시라, 바로 호러 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의 두 번째 아들이란다.

모던 호러 장르의 작가라는 조 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거장 아버지의 존재는 뛰어 넘어야 할 산인 동시에, 든든한 후원자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모두 15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20세기 고스트>는 먼저 영국에서 출간이 되고, 나중에 조 힐의 모국 미국에서 출간되어 많은 호평과 찬사를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맨 처음에 등장하는 <신간 공포 걸작선>은 책에 실린 작품 중에 최고로 아찔한 공포를 선사해 준다. 어느 공포 소설을 출간하는 잡지의 편집을 맡고 있는 주인공에게 오싹한 내용의 <단추소년>이라는 글이 날아온다. 예의 글을 접하는 순간, 주인공은 짜릿한 흥분을 느끼고 원작가를 찾아 나서는 여행길에 오른다.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진 <신간 공포 걸작선>은 소설 속의 소설, 이어지는 서스펜스와 공포는 다 읽고 나서도 계속해서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어느 퇴락해 가는 극장에 출몰하는 여자 유령을 소재로 한 <20세기 고스트>는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우리네 삶 속에서 녹아든 존재론적 입장에서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팝 아트>에서는 어려서 만난 절친 아서 로스, 다른 이름으로는 아트라는 공기주입식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이 이야기는 모던 호러보다는 ‘모던 판타지’에 더 적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여곡절 끝에 만나 즐거운 교류를 하던 아트를 잃고 난 주인공이 결말에 가서는 다시 공기주입식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환상소설의 전형이 전개된다.

그 외에도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오마주처럼 보이는 <메뚜기 노랫소리를 듣게 되리라>, 흡혈귀 혹은 내부의 적에 대한 공포를 다룬 <아브라함의 아들들>, 어려서 경험한 야구의 협살의 트라우마가 떠오르게 되는 <협살 위기>, 실패한 배우가 고향으로 돌아와 오래된 친구를 만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바비 콘로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 돌아오다>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소재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중단편집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빠른 전개와 결말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약점으로는 캐릭터에 대한 적응력을 들 수가 있겠다. 중단편들은 대개의 경우 그 길이가 짧기 때문에 캐릭터의 소개와 사건의 진행이 장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초반에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이야기의 종점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또 다시 반복되는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적응. 중단편의 장점과 약점은 양날의 칼처럼 그 예리함을 번득인다.

조 힐이 나고 자란 미국 뉴잉글랜드(메인 주)의 지방색이 소설의 곳곳에서 읽을 수가 있었다. 귀에 익숙한 월든 호수 같은 지명은 물론이고, 셀틱스 팀이라든가 양키즈 같은(물론 뉴욕 양키즈는 전국구팀이긴 하지만) 이름들이 등장할 때마다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아버지 스티븐 킹이 쓴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가 연상되지 않을까?

공포 소설의 정석처럼 보이는 유령 이야기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흡혈귀, 흉측한 벌레로의 변신 이야기, 하늘을 나는 망토 이야기 그리고 B급 좀비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게 되면서 만난 옛 연인과의 훈훈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공포, 판타지, 감동을 아우르는 조 힐의 단편세계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작가의 후속작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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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문학 - 어울림의 무늬, 혹은 어긋남의 흔적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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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날개를 펴니 <영화인문학>의 저자 김영민 씨가 철학자 그리고 숙명여대 교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철학자가 쓴 영화비평이라, 아니 분석이라고 해야 하나? 한 때 영화평론의 꿈을 꾸었던 사람으로 과연 철학자의 시선으로 보는 영화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인문학>의 영어제목은 책의 표지에 박힘 글씨로 “Film & Humanities"라는 말과 함께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모두 해서 27편의 영화들이 차례로 나열되어 있었다. 이 책을 펴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중에 내가 본 영화는 몇 편이나 되는지 조용하게 꼽아 봤다. 내가 본 영화는 모두 6편이었다.

각각의 영화 분석들은 우선 예의 영화들의 엑기스처럼 다가오는 스틸샷 한 장명과 저자가 신중하게 고른 부제로 시작된다. 해당 영화를 만든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페이지 분량의 썰을 푼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인 영화를 인문학적 깊이를 가지고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말미에는 지은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조금 달아 놓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대략 이런 구성으로 책이 진행된다.

이태리 영화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라 돌체 비타(아름다운 인생)>으로부터 그 제목을 따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김지운 감독의 <아름다운 인생>이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눈에 밟힌다. 불가의 선문답을 연상시키는 화두로 시작한 이야기는, 보스(김영철 분)와 선우(이병헌 분)의 갈등 구조를 타고 관객들을, 그리고 여기서는 독자들을 압박해 나가기 시작한다. 상명하복이 절대적인 조직 세계에서 이유와 원인의 관계를 따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마치 무한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의 재서술(再敍述)의 그림자가 얼비친다.

<가족의 탄생>과 <바람난 가족>편에서는 21세기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되고 있는 가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의 핵가족 시스템은 채 1세기가 되지 않은 새로운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모든 관계가 모름지기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가족의 구성과 본질 역시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건 아닐까? 특히 <바람난 가족>에서 남편을 아웃시키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욕망이 분출되며 마지막으로 새로운 생산성을 기대해 본다는 저자의 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가장 최소단위인 가족 내의 창의적 불화가 과연 생산성에 어떤 식으로 공헌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냥 우스운 코미디 영화로만 봐왔던 <넘버 쓰리>와 송능한 감독에 대한 날카로운 픽업이 눈에 띄었다. 별다른 내러티브 없이 삼류 캐릭터들의 좌충우돌을 사회적 풍토와 문화적 관습에 대한 냉소로 그려낸 감독의 역량을 저자는 말한다. 땀을 흘리지 않는 불한당(不汗黨)인 건달과 신부의 세 가지 공통점(183쪽)에 대한 언급은 시대상에 대한 풍자로 아주 제격이었다. 아울러 시대를 풍미한 저열한 자본주의와 조폭의 결합을 분노가 스며든 판타지로 재구성해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만난 영화와 분석들 중에 최고로 박종원 감독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꼽고 싶다. 한 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로 생각했던 이의 원작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이 영화에는 한 시대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엄석대와 한병태가 등장을 한다. 한 초등학교에서 마치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는 엄석대에, 서울에서 전학 온 한병태가 온갖 불합리와 권위주의에 대항해서 외로운 도전장을 던진다. 하지만, 온갖 수단과 모략으로 이미 공고해져 버린 엄석대의 체제는 한 개인의 힘으로 전복될 수 없을 정도로 공고하기만 하다. 그 결과, 한병태는 엄석대 일당에게 투항해서 변절의 달콤함을 누린다. 작가가 말하는 비판적 연대야말로 그들의 행악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라는 주장이 귓가에서 맴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에서 조금 가벼운 영화평 정도의 글들을 기대했다면 오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영민 교수가 책에서 사용하는 어휘들은 선뜻 캐치가 되지 않고, 어디에선가 분절되는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다. 예를 들어 “메타적 시선” 같은 경우에 도대체 무슨 뜻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좀 더 쉬운 말들을 사용해서 이야기들을 풀어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한 가득이다. 아울러, 말미에 실려 있는 개념어집과 한글용어집을 먼저 읽을 것을 권유한다. 이 부분을 먼저 습득하고 나서, 책을 읽으면 부러 사전을 찾는 수고를 덜 수가 있고, 곳곳에서 튀어 나오는 낯선 단어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

대개 영화는 사람들의 이야기[내러티브]에 근거한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부대끼며 빚어내는 어울림의 무늬[人紋,] 바로 그것을 향해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감독은 큐 사인을 외쳐댄다. <영화인문학>을 통해,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 혹은 이미 본 영화들에서 미처 잡아내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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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전쟁 - 세계 최강 해군국 조선과 세계 최강 육군국 일본의 격돌 우리역사 진실 찾기 2
백지원 지음 / 진명출판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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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 학과 출신의 재미사학자라는 특이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백지원 씨의 <조일전쟁>을 읽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대전란을 나름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전이라는 시각으로 재해석한 아주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일반적으로 대륙에 붙어 있는 반도국가인 우리나라가 육전에 강하고, 해양국가인 일본이 해전에 강할 것이라는 상식은 이 책을 읽는 동안 공중분해가 되고 만다. 조선 건국 이래, 이렇다 할 전쟁을 치른 적이 없는 조선의 육군은 그야말로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고 무로마치 막부가 붕괴된 이래 120년간의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 육군은 세계 최강이었다는 것이 이 책을 쓴 백지원 씨의 주장이다. 게다가 문(文)보다 무(武)를 숭상하는 일본 사무라이들은 어려서부터 검술과 창술 등의 무예를 익혀, 실전에서 조선군을 상대할 때 일당백의 기량을 지녔다는 냉철한 분석을 시도한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지러운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정복하겠다는 터무니없는 과대망상증을 가지고, 천하를 품에 안은 후 몇 년간 치밀한 전쟁 준비 끝에 1492년 4월 조선정벌에 나서게 된다. 조선 정벌의 이면에는, 전국시대를 끝냈지만 평화가 정착되지 않았고 전투와 싸움에 이골이 난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겠다는 무척이나 현실적인 계산이 뒤따랐다.

한편 저자의 표현대로 이웃나라 일본의 두목이 조선을 ‘식사’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주자성리학이 판을 치면서 저자가 꼽은 임진오적 중의 수괴에 해당하는 ‘등신’ 선조의 무능력함과 매일 같이 벌어지는 당쟁과 관료들의 부패로 인해 국가 기강은 바닥에 떨어지고, 국가 시스템이 마비될 지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게다가 동방의 왕국 조선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악랄한 신분제에 의한 차별로 인해 능력 있는 인재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펼칠 수가 없는 그야말로 ‘개 같은 나라’였다고 백지원 씨는 혹평을 하고 있다.

전쟁 발발 전에 일본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국가 방어시스템에 대한 재고는 물론이고 그에 대한 방비책이 전무했다는 사실을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나마 훗날 성웅으로 꼽히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로 임명이 되면서, 남해 바다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맞짱을 뜰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 정도를 꼽을 수가 있겠다.

자, 이제 본격적인 임진왜란에 대한 불편한 진실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군인 출신 박통 시절에 동병상련 식으로 우상화가 진행된 상승장군(常勝將軍) 이순신에 대한 역사에 근거한 실체적 접근으로, 만들어진 신화를 구축(驅逐)하기 시작한다. 조선 해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은 일본군이 보유한 함선에 비해 화포 등의 무기가 잘 정비되어 있어, 해상포격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임진삼대첩 중의 하나로 꼽히는 한산대첩 역시 이길 전투를 당연하게 이긴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오히려 13척의 함선으로 10배가 넘는 일본 해군을 상대했던 명량해전이야말로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승리의 핵심이란다.

아울러 간신 이미지가 덧씌워진 원균과의 갈등 역시 전공에 대한 장계를 조정에 올리는데 있어 이순신이 페어플레이 하지 않아서 둘 사이가 틀어진 것이라고 조목조목 읊조리고 있다. 좀 더 나아가서 일본 해군을 쳐부수는데 있어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진 거북선의 활약 역시 지나치게 과장이 된 부분이 많다고 지적한다. 사실 당시의 기술로 철갑을 두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으며, 그 느려터진 기동력 때문에라도 일본군 박멸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뛰어난 무기였다면 왜 3~4척이 만들어진 다음에 다시 만들지 않았겠느냐는 저자의 주장이 어느 정도 먹히는 느낌이 들었다.

임진왜란 극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핵심으로 저자는 다음의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 지적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로, 조선을 돕기 위해 명군의 파병을 꼽고 있다. 사실 전쟁 다음 해인 1593년 1월 명군의 진공에 이은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이야말로 임진왜란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일본군의 보급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 전국에서 기의한 의병들의 활동 마지막 세 번째로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서의 활약이 그것이다. 조선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의병들의 맹활약으로 원정군에게 필수적인 보급문제가 전선이 길어질수록 어려워졌다. 그래서 뱃길로 보급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남해바다에서 떡하고 버티고 앉아 일본 해군의 진로를 가로 막는 이순신 장군의 존재는 그야말로 일본 침략군에게는 눈엣가시 같았으리라.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오탈자를 유심히 보는 편인데, <조일전쟁>은 유난히도 오탈자가 많아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작가가 재미사학자여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았을 텐데 어쩌면 이렇게 오탈자가 많은지 정말 놀랐다. 게다가 주로 일본 지명과 인명에 대한 표기법도 통일되지 않아서 어디서는 도쿠가와가 도꾸가와로, 또 큐슈와 규슈가 병용되면서 헷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모리 데루모토의 영지에 관해서도 425쪽에서는 120만석이라고 했다가 또 439쪽에서는 170만석이라고 되어 있고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신중하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거슬렸다. 그러니 사소한 오탈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임진왜란 전체를 다루는 저자의 시각이 아주 참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쟁의 발발 원인으로부터 시작해서, 당시의 시대상, 경과, 전쟁에 관련된 인물들의 조명 그리고 전후의 영향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한 연구에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뒷부분에 실린 10장 이후의 이야기들은 조금은 사족(蛇足)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마지막에 등장하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야기가 임진왜란과 무슨 연관이 있나 싶었다.

아쉬운 점이 없진 않지만, 임진왜란을 다룬 <조일전쟁>을 통해 그동안 미처 모르고 있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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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1968년 사진 한 장 - 역사상 가장 거대한 속임수의 재구성
훌리오 무리요 예르다 지음, 정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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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30일,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은 적군(赤軍, 소련군)의 맹공격 앞에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한 때 천년제국을 꿈꾸었던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내내 미스터리였다.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유해는 공식적으로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던가.

바로 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해서, 에스파냐 출신의 훌리오 무리요 예르다는 <히틀러의 1968년 사진 한 장>이라는 놀라운 팩션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팩션이라는 장르가 조금은 지루하다는 나의 선입견을 이 책이 한 방에 날려 주었다.

영국 유수의 신문인 가디언 지의의 국제부 기자인 사이먼 다든에게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인츠 라이너란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사진이 날아든다. 그 사진에는 반세기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와 그의 일당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도저히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사이먼은 친구이자 사진 전문가인 존 스튜어트에게 감정을 의뢰한다. 존 스튜어트뿐만 아니라 다른 전문가들도 합성사진이 아닌 진짜 사진이라는데 동의한다.

자 이제 소설은 이 엄청난 정보를 제공한 하인츠 라이너의 자취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인츠 라이너는 노르웨이 출신의 생물학자로 본명은 아일러트 랑이다. 그는 다른 8명의 동료들과 함께 남극 대륙에 프로젝트를 위한 탐구와 관찰을 하러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동안 숨겨져온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그로부터 6년간의 목숨을 건 진실 폭로전이 개시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악의 축으로 등장하는 나치 비밀결사 조직 울티마 툴레는 하인츠 라이너를 처형하고, 베를린이 함락할 당시 총통 벙커의 비밀에 관련된 5명의 배우들을 차례로 제거하기 시작한다. 하인츠 라이너는 자신을 쫓는 툴레들로부터 도주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이 엄청난 사건에 끼어들게 된 미모의 바이올리니스트 엘케 슐츠와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데 목숨을 건 사이먼 다든과 함께 ‘샹그릴라 작전’의 사실을 밝히기 위한 시각을 다투는 레이스에 뛰어들게 된다. 물론 대단원에 가서 독자들을 모두 무장 해제시켜 버린 다음, 가히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작가 훌리오 무리요의 2차 세계대전 후를 다룬 연구는 가히 주목할 만하다. 솔직히 말해서, 전쟁이 끝난 다음 나치 잔당들이 아르헨티나와 라틴 아메리카 제국으로 망명을 해서 제국의 부활을 꿈꾸었다는 신비스러운 음모설은 그동안 많이 들어와서 조금은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아돌프 아이히만과 조제프 멩겔레 같은 나치 전범들이 라틴 아메리카에 정착한 정황으로 볼 때, 아주 황당무계한 주장만은 아니라는데 공감이 간다.

바로 이 역사의 분절점에 착안을 해서, 훌리오 무리요는 시간과 공간을 파고든다. 사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페이퍼클립 작전>(1945)과 <하이점프 작전>(1946~47)들은 실재했던 작전으로 전자는 주로 종전 당시 획기적인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제3제국 출신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프로그램이었고, 후자는 연인원 5,0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원이 동원한 남극탐사 프로젝트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 있어, 나치 잔당들이 남극에 기지를 세웠다는 음모설이 제기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아마 이런 역사적 배경들을 알고서, 이 책을 접한다면 새삼 작가의 상상력과 현실세계의 접점이 보다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 울티마 툴레의 절대적 상징인 총통 히틀러보다도 세계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시 한 번 네 번째 제국을 꿈꾸며 새로운 압제자의 등장을 기대하는 나치의 후예인 비밀결사조직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설정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큰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작가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미국 대통령이었던 부시 가문과 나치와의 연관성에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샹그릴라>다. 영국의 저명한 작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에 나오는 이상향을 뜻하는 “샹그릴라”는 나치 시절 레벤스보른(생명의 샘) 프로젝트로 육성된 아리안족의 후예들이 꿈꾸는 땅, 남극대륙의 노이슈바벤란트의 다른 이름이었다. 샹그릴라는 마치 이 책에서 알파와 오메가처럼 처음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과 픽션을 적절하게 배합하면서도, 극적인 재미를 더하기 위해 계속되는 음모와 쫓고 쫓기는 스파이소설의 전형적인 요소들도 잊지 않는다. 캐릭터 창조에 있어서도 공을 많이 들인 표가 났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일러트 랑은 냉철한 과학도의 면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나이로 목숨이 걸린 도주를 하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열혈남아다. 비록 이혼은 했지만 전처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언론인으로서 사이먼 다든 역시 진실과 가족의 안위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식인의 단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역시 이 소설에서 최고의 캐릭터는 바로 베를린 필하모니의 바이올리니스트 엘케 슐츠를 꼽을 수가 있겠다. 자신에게는 오로지 배우자와도 같은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밖에 없다고 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보여 주다가도, 동료들을 위해 분노의 일격을 날리기도 하는 그야말로 놀라운 입체적 면들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천재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와의 비교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팩션 장르에 대해 조금은 지루하지 않을까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훌리오 무리요 작가는 나의 그런 생각들을 한 방에 날려 버려주었다. 현실세계에서 제기된 음모론과 관계된 잔재미로부터 시작을 해서,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극적인 반전의 연속으로 그야말로 눈이 다 빡빡해질 때까지 손에서 책을 뗄 수가 없었다. <히틀러의 1968년 사진 한 장>을 읽은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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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을 리뷰해주세요.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 - 비밀스러운 종교의 역사
에두아르 쉬레 지음, 진형준 옮김 / 사문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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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의 뒤표지에 적혀 있는 “신비주의의 바이블”이라는 카피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 책의 저자 에두아르 쉬레는 18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이 책을 발간한 후, 대학과 교회에서 이단으로 몰렸었다고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21세기에 한국에서 출간된 책에는 “신비주의”와 “바이블”(교권주의)이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코드들을 상충하고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이자, 시인, 작가 그리고 음악비평가 등의 다양한 경력의 보유자인 에두아르 쉬레는 유사 이래 인류가 구가한 영혼의 본질적인 모습들과 초월을 경험한 선각자들의 자취를 추적한다. 물론 방법론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들에도 관찰과 탐구의 시선을 아끼지 않는다.

모두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에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각국의 종교와 신비한 제의들을 대표하는 경전, 신화 속의 주인공, 선지자, 철학자와 메시아를 내러티브 구조로 서술하고 있다.

전승되어지는 동양의 성서들에 나오는 라마는 고대 인도의 왕이자 정신적 지주로 등장하는 라마가 그 첫 번째 주자이다. 한편, 첫 번째 장은 고대 인도 아리안족의 경전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 중의 하나로 꼽히는 베다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어진다. 산스크리트어로 지혜 혹은 지식을 의미하는 베다에서는 고대 종교의 핵심을 말하면서, 이후 철학사를 양분하게 될 관념론(정신주의)과 유물론의 원형을 제시해 준다.

훗날 타종교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희생 제의를 통한 예배와 기도라는 형식성에 있어서도 베다는 경전의 선도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고 에두아르 쉬레는 지적하고 있다. 역시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비교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부활과 재생의 원리를 통해 철학의 근간에도 도전을 하고 있다.

다음 장의 크리슈나 편에서는 종교와 비교(秘敎)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두 가지 개념인 불멸의 영혼이 재생한다는 것과 신의 삼위일체가 인간에 내재한다는 주장이 돋보인다. 브라만교의 신으로 추앙받는 크리슈나의 일대기를 통해,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인 크리슈나야말로 인간 영혼의 신성성의 현현을 공명시키고 있다.

신비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신의 존재론, 초월적인 존재와 만남, 깨달음 그리고 돌연한 소멸이라는 순환구조를 바탕으로 헤르메스와 오르페우스의 속죄, 디오니소스의 추락 그리고 율법의 입법자로서의 모세에 대한 이야기들이 차례로 나열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었던 부분은 철학자로서 피타고라스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내세웠던 관찰과 추론 그리고 직관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도 전에 진리를 위한 합리적인 방법들을 생각했던 선각자들의 존재가 새삼 위대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 편에 대한 쉬레의 해석이 그가 19세기말 이 책을 펴냈을 당시, 이단으로 몰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신앙에 근간을 이루는 부활을 쉬레는 신비주의적 측면에서 접근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후 부활을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자연 가운데 알려지지 않은 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지극히 신비주의적인 태도다.

에두아르 쉬레의 시도는 100년 전의 시대정신으로 바라보았을 때, 참신하면서도 획기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종교적 혹은 신학적 접근보다는 지나친 접신론(theosophy) 방법론이 눈에 거슬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긴 신화나 고대 종교에 과학적 접근론이 어울리지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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