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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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직 발자크의 책을 한 권도 읽어 보지 못했다. 책을 읽다 보니 발자크의 이름을 곳곳에서 듣곤 하는데, 오랜 기다림 끝에 단숨에 다 읽어 버린 김탁환 선생의 <노서아 가비>에서 다시 “소설노동자” 오노레 발자크의 이름과 만날 수가 있었다. 발자크는 김탁환 선생의 삶의 롤모델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지난 10년간 무려 40권을 책을 냈다는 다작 작가 김탁환 선생의 신작 <노서아 가비>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영화의 상영시간과 책을 읽는 시간이 거의 엇비슷했다. 그만큼 흡입력이 있는 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재밌고 잘 읽히는 책을 좋아하는데,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이번 가을 내가 모토로 삼은 “재밌는 책을 읽자”와도 어쩌면 그리도 궁합이 척척 맞는지.

머리가 아닌 손으로 글을 쓴다는 김탁환 선생은, 책을 쓰기 전에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체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매천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에 실린 역관 김홍륙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삼아 이 멋들어진 이야기가 펼쳐진다. 조선이 열강의 침입으로 국운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던 시절, 역관 최홍의 딸이자 안나, 따냐 혹은 최월향으로 불리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역시 역관의 딸이기에, 어려서부터 러시아어를 배웠다. 이 상황설정은 그녀가 장차 러시아를 무대로 해서 활약하게 되는데 있어 중요한 무기가 된다.

하지만 중국 천자에게 조공하는 사신을 수행하러 갔던 아버지가 나랏물건을 가로채서 도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집안이 결딴나면서 천민의 지위로 하락하게 된 따냐는 조국을 버리고 월경하게 된다. 대륙에서 전각기술을 배워 위조된 그림에 낙인을 찍고, 또 베드로의 도시라 불리는 러시아의 뻬쩨르부르그에 가서는 유럽 각국의 귀족들에게 러시아의 숲을 속여 팔아먹는 ‘얼음여우’ 사기단의 일원으로 맹활약을 하게 된다. 그렇게 번 돈으로 북구의 핀란드에서 남쪽의 안남(베트남)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 편의 액션활극 같은 삶이 펼쳐진다. 책의 띠지에 보면 “출간 즉시 영화화 결정”이라는 광고 카피가 보이는데, 아마 이렇게 극적이면서도 파란만장한 삶이 앞으로 나올 영화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먼저 제목에 대해 말했던가? <노서아 가비>는 러시안 커피라는 뜻으로, 매 장마다 커피와 커피메이커, 그라인더와 찻잔 세트 등에 대한 일러스트들이 소개되고 있다. 커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주인공 따냐의 아버지가 즐겨 마시던 호사품으로, 따냐 역시 커피홀릭의 길을 걷게 되는데 위기의 고비에서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입신의 방편으로 커피는 그녀의 삶을 톺아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따냐가 러시아 땅에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그녀의 첫사랑인 이반. 이반 역시 조선 사람으로, 조국에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 이역만리 타지에서 사기단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위기일발의 순간에서 따냐를 구해낸 이반은, 따냐와 운우지락을 나누면서도 연인이자 동료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개인적으로 그 넓고 광활한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어를 마치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해대는 이 두 남녀의 만남에 대해 소설적 개연성이 지나치게 개입된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물론 재미라는 측면에서라면 그보다 더 극적일순 없겠지만.

이렇게 의기투합된 따냐와 이반은 갈범 무리라는 5인조 사기단으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게 된다.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 2세의 대관식에 조선 특명전권대사로 초청된 민영환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조선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복수와 배신의 칼바람 속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따냐는 자신이 떠났던 조국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의 러시아어 역관으로 변신한 이반과의 재회. 이반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주선으로 따냐는 역관의 딸에서, 전각 사기꾼 그리고 러시아 숲을 팔아먹던 사기단의 일원에서 이번에는 고종에게 노서아 가비(커피)를 만들어 올리는 바리스타로 인생유전을 이어간다.

한편 을미사변(1895년)으로 중전인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일본 자객들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따냐의 러시아에서의 활약상과 더불어 고종에게 커피를 지어 올리는 바리스타로서 그녀의 새로운 인생이 소설의 후반부를 장식한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와 자신이 사랑한 이반, 김종식 그도 아닌 정도령과의 놀라운 관계에 대한 결말이 독자들로 하여금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도저히 책에서 손을 떼게 하는 마력으로 다가온다.

<노서아 가비>는 확실히 재밌다. 사전에 미리 영화화를 구상하고 써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간결체의 짤막짤막한 대사 진행과 속도감 넘치는 전개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긴 호흡보다는 짧은 호흡 덕분에 책읽는 재미가 배가되었다. 게다가 러시아 대륙을 누비며 유럽의 귀족들을 상대하는 당시 여성상과는 파격적인 따냐의 입체적인 캐릭터 설정이 독서몰입에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내를 잃고, 외세의 침탈에 시달린 고독한 군주 고종의 모습을 커피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적으로 그려낸 김탁환 선생의 기발한 스토리텔링에 박수를 보낸다.

고종과 이완용과 같은 실존했던 인물들과 역관 김홍륙의 암살 시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빈 공간을 자신이 빚어낸 인물과 이야기들로 채워넣는 김탁환 선생의 탁월한 이야기 구성에 탄복해 마지않는다. 아마 이런 맛에 팩션(faction)을 읽는 거겠지? 이렇게 재밌는 소설과 만난 사실에 다시 한 번 마음이 넉넉해진다. 아, 그나저나 발자크의 책들은 과연 언제나 읽어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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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교양강의>를 리뷰해주세요.
사기 교양강의 - 사마천의 탁월한 통찰을 오늘의 시각으로 읽는다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1
한자오치 지음, 이인호 옮김 / 돌베개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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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적인 <사기>(史記)의 권위자인 중국의 한자오치 선생이 북경TV에서 강의한 <사기>가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어려서부터 중국사에 관심이 많아, 태사공 선생의 <사기>는 정말 다양하게 읽어왔다. 21세기에 새로 만나게 되는 <사기>에 대한 주석이 신선하다.

이 천 년 전에 쓰인 태사공 사마천 선생의 <사기>는 이후 중국 역사서술의 전범이 되었다. 기전체 역사 서술의 한 획을 그은 <사기>에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군들이 등장을 한다. 물론 저자인 태사공 선생의 호불호가 개입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조상 대대로 사관 출신의 집안 내력 때문인지 나름대로의 객관성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사기 교양강의>의 원제는 “사기신독”(史記新讀)으로 우리말로 하면 “새로 읽는 사기” 정도가 되겠다. 태사공 선생의 원저가 인물 중심의 서술인 것처럼, <사기 교양강의> 역시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 12명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그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을 하는 <사기> 중에서도 엄선된 인물들에 대해 전래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간과한 부분들에 대해 전문가 한자오치 선생의 날카로운 지적들을 대할 수가 있다.

가령 예를 들어, 진시황의 사후 유조 조작을 두고 승상 이사와 환관 두목 조고의 밀담이나 초한대전 중에 한신에게 제3세력으로 자립을 도모할 것을 권유한 모사 괴통의 이야기 그리고 초한대전 끝에 해하에서 자결을 하게 되는 역발산기개세의 영웅 항우가 불렀다는 노래 등의 진위에 대한 한자오치 선생의 비평은 너무나 참신하면서도 독창적이었다. 도대체 그런 이야기들은 누가 기록을 했단 말인가? 아니면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태사공 선생의 임의대로 수집해서 자신의 저서에 실은건 아니었을까?

이를 위해 태사공 선생은 호견법(互見法:서로 알아보는 법)을 <사기>에 도입했다. 같은 텍스트를 두고서도, 제각기 다른 견해차가 존재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둔 것이다. 인물 위주 역사서의 특성상, 텍스트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크로스 오버되는 것은 당연하다. 태사공 선생이 특히 많은 애정을 가지고 저술한 항우의 이야기가 <항우본기>는 물론이고,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고조본기>에 교차 수록되어 있지 아니한가. 게다가 정식 군주로 보기 힘든 항우와 여후(呂后)를 왕들의 연대기인 본기(本紀)에 실은 것만으로도 태사공 선생이 그들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한편, 자기가 녹을 먹었던 한나라의 황제였던 경제와 무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절대군주의 시대에, 절대군주에 대해 이렇게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특히 자신에게 치욕적인 궁형을 명한 무제의 치세에 대해, 한나라의 건국 이래 북방을 위협해온 흉노족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으로 인한 원정과 수년간에 걸친 대원정을 지원하기 위한 재정의 궁핍, 통치 계층의 무절제한 사치 등을 균형감 있게 추켜세우면서도, 한편으론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한나라 건국에 있어서 결정적 공헌을 한 대원수 한신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서도 군주국가에서 왕의 권위에 도전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예리하게 그려내고 있다. 비록 한 고조 유방에게 기용되서, 초한대전의 승리를 이끌었지만 결국에 가서는 건국 공신들이 숙청당하게 되는 과정은 정말 인생무상의 전형처럼 다가온다. 황로사상으로 일신을 보전하는데 성공한 군사 장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공신들은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가 삶아진다는 고사처럼 한신, 팽월 그리고 경포 등이 잇따라 목숨을 잃게 된다. 태사공 선생은 항우와 더불어 한신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담은 글을 남기고 있다.

한자오치 선생은 <사기 교양강의>를 통해, 태사공 선생이 후세에 남기려고 했던 이야기들을 21세기 버전으로 훌륭하게 전달하고 있다. 인물과 당시의 사건에 있어, 날카로우면서도 예리한 논평들을 조목조목 나열해 나가면서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특히 항우의 최고의 전투로 꼽는 거록성 전투의 경우에는 당시 항우의 진격로를 지도에 표시해 가면서, 마치 현장중계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역시 중국 출신의 학자라 그런 진 몰라도 중화중심사상의 전개가 조금은 눈에 거슬렸다. 어쨌든, 21세기에도 유효한 고전 텍스트로서의 <사기>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 내가 찾은 오탈자

1. 기원전 280년 -> 기원전 180년 (182쪽)
2. 소화 -> 소하 (196쪽)
3. 고등 -> 고릉 (235쪽)
4. 기원전 95년 -> 기원전 195년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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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에 속지 마라>를 리뷰해주세요.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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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중앙일보에서 우크라이나에 있는 아랄 해가 거의 다 말랐다는 뉴스를 봤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4번째로 큰 호수로 그 넓이가 우리나라 면적의 2/3나 된다는 호수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큰 이유 중의 하나로 지속적인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늘어난 증발량을 꼽았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지구온난화 문제가 심각해져 가는데, 우리의 상식에 반하는 주장을 이 책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를 통해 만날 수가 있었다. 미국출신의 프레드 싱거와 데니스 에이버리가 공동으로 쓴 이 책의 요점은 간단하다. 지구는 그 탄생으로부터 1,500년 주기로 기후 변동을 겪는다는 것이다.

21세기 온난화의 주범으로 손꼽히는 화석에너지 소비와 공해물질의 배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 발생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지구온난화는 태양 에너지에 의한 자연적인 현상이라는거다. 그러므로 모두가 우려하고 있는 전 지구적인 온난화가 막을 수 없는 대세라는 주장이 참 생뚱맞게만 들린다. 특히 예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우주계획 특별고문이었던 프레드 싱거의 설명에 의하면, 작금의 지구온난화는 위험한 상태가 아니며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고 한다.

어쨌든 이 책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남극 대륙 빙하의 코어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고, 갖가지 인용문들을 갖다 붙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 보면 예의 자료들이 자신들의 주장만을 위해 취사선택된 것이라는 점을 바로 알아차릴 수가 있다. 얼핏 들어도 과학적 사실들에 대한 근거가 빈약해 보이는 것도 치명적이다.

저자들은 지난 백년간 0.6도 밖에 온도가 상승하지 않았다는 사실들을 애써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 우리들은 여름만 되면 전년보다 더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만 해도 연근해에서 잡히는 어족들이 수년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아니 이래도, 온실효과와 공해배출, 과다한 화석에너지의 사용이 지구온난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마지막 장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들이 인간 활동에 의한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를 결의한 교토의정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미국을 변호하기까지 한다. 이 정도가 되면 이 책은 과학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한 과학 서적이 아니라, 어느 특정 국가 혹은 이익단체를 위한 파렴치한 프로파간다(propaganda)다. 국제적 협약마저 무시하고, 이미 결의된 사항들을 뒤흔들려는 명백한 저의가 느껴졌다. 심지어는 지구온난화가 기회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 호도하기에 이른다.

이 책의 대척점에는 미국의 앨 고어 전 부통령이 쓴 <불편한 진실>이 서 있다. 개발과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이뤄지는 무지막지한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한 온실효과 그리고 무절제한 화석에너지 사용에 대해 경종을 울렸던 <불편한 진실>이 참 불편하게 생각된 이들이 있었나 보다. 과학자가 썼다고 해서, 과학적 사실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절실하게 체험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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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날아온 맛있는 편지
정세영 글.그림.사진 / 이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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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점에서 이 책을 찾아보았는데 여행 에세이가 아닌 요리 코너 평대에 당당하게 전시가 되어 있었다. 책을 휘리릭 넘기는 전수검사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단단하게 여며 있는 포장에 포기해 버렸었다. 나중에 다시 만난 책은 바로 다른 이에게 포장을 해서 선물할 수 있게 친절하게도 받는 이와 보내는 이의 주소창까지 그려져 있었다. 참 신기하기도 해라.

하지만 책을 읽을 적에는 거추장스러워서 다른 포장들은 모두 커터 칼로 걷어내 버렸다. 선물하지 않고, 내가 소장할 목적이라면 책장을 넘기는데 불편해서라는 이유를 달고서 말이다.

작년과 올해 두 권의 스페인에 관한 에세이 책들을 만나고 나서, 태양의 나라 스페인/에스파냐에 가보고 싶어졌다. 특히 김문정 씨가 쓴 <스페인은 맛있다!>를 통해 본격적인 스페인 요리의 정수들과 만나볼 수가 있었다. 나중에 스페인에 가게 되면 반드시 새끼돼지 통구이 요리인 코치니요를 꼭 먹어 보고 싶다.

<스페인에서 날아온 맛있는 편지>의 작가 정세영 씨는 사진작가 출신으로, 이 책의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을 도맡아서 해냈다.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 그라나다 그 중에서도 알바이신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한 지은이는 개인적인 번뇌를 다스리며, 스페인과 그 스페인에 사는 이들과 사랑에 빠진 이의 13가지 스페인 요리법과 그에 뒤따르는 13편의 에세이들이 마치 숨겨진 보석처럼 빛을 발한다.

외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빠에야를 필두로 해서, 냉야채수프인 가스파쵸, 또띠야 그리고 맨 마지막에 “버터 소스와 생선살 찜”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구하기 쉬운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스페인 요리들을 소개한다. 사실 만드는 방법이 너무 쉬워서 “아니, 이게 다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요리법은 다음에 나오는 짧은 에세이에서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위한 애피타이저 정도라고나 할까. 기본적으로 요리와 음식에는 나눔의 미학에 배어 있다. 자기 자신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만드는 요리에 굳이 셋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만든 요리들을 서로 나누면서, 서로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고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교감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우리네 인간사의 큰 즐거움이리라.

정세영 작가의 에세이는 마지막 장을 다 덮고 나서도 깊은 공명을 울리는 인연들이 소개된다. 어느 좌파 부부가 입양한 한국 아이들에 대한 정말 인류애적인 사랑이, 10년 전 우연히 동양학을 전공한 스페인 처녀(?)와의 함께 한 열흘간의 만남 등이 그가 직접 그린 현란한 식재료들의 일러스트 사이를 휘젓는다.

이 책을 순식간에 다 읽어 버린 내가 과연 이 책에 나오는 레시피 대로 무엇 하나라도 만들어볼 수 있을까? 아마 그렇다면 내가 가장 쉽다고 생각한 과일 펀치인 <상그리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책 표지의 “키친 에세이”라는 말이 입 안에서 계속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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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담 빠담, 파리
양나연 지음 / 시아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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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난생 처음으로 유럽이라는 땅에 발을 디뎠다. 다른 이들은 유럽 몇 개국하는 아주 야심찬 계획으로 유럽에 간다고 하는데, 난 파리와 로마만이 나의 목표였다. 사실 파리는 값싼 비행기 값 때문에 선택한 거였고 내 주목적지는 장장 십년에 걸쳐 읽고 있던 로마였다. 그리고 그 로마에서 우연한 기회에 자전거 나라 바티칸 투어를 하게 되었는데, 아무런 사전 공부 없이 간 나에게 큰 도움이 됐었다. 사실 나중에 되돌아보니 로마보다 파리가 더 좋았었다. 전직(현직?) 개그작가 타이틀을 내세우는 양나연 작가의 <빠담 빠담, 파리>는 그렇게 두 가지 면에서 나와 접점을 이루고 있었다. 파리와 그녀의 두 번째 직장이었던 자전거 나라.

나중에 다시 한 번 파리에 가게 됐었는데, 다른 곳은 모르겠는데 유럽 여행을 하는 이들 중에는 그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에 리프레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빠담 빠담, 파리>의 지은이 역시 비슷한 케이스로 파리에 가이드 일을 하러 나서게 된다. 어느 생일날, 강도를 만나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경험한 그녀는 그전에 갔던 파리의 추억을 떠올리며 파이 가이드를 지원하고, 남미 여행길에 나서게 된다.

여차저차해서 그동안 자신의 커리어 전부를 바쳤던 어느 유명 코너의 개그 작가일을 그만 두고, 당차게 파리에서 생소한 가이드 일에 도전을 하게 된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인 32살에 시작한 파리에서 생활. 발로 뛰는 가이드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자전거 나라 파리 팀의 실장님의 지적으로 그야말로 눈 감고도 파리 구석구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는 체험을 시작한다.

그렇다 <빠담 빠담, 파리>는 양나연 작가가 파리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악전고투기이다. 파리를 찾는 이들이 모두 낭만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파리의 로망을 기대하지만, 정작 파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신산스럽게 다가온다. 사실 파리에 갔을 적에, 파리에 사는 파리지엥들은 모두 일상의 삶을 살지만 관광객 복장에 목에는 카메라를 메고 나선 내 자신을 보며, 그렇게 생뚱맞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출근하는 인파들로 북적대는 강남 한복판에 관광을 하겠다고 나선 관광객의 비애라고나 할까?

그녀의 주 타깃은 바로 가장 많은 한국 사람들이 찾는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이다. 첫 파리 행에서 만난 한국 분들이 2박 3일 안에 파리를 마쳐야 해~!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벙찜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유효한 것 같다. 아니 그게 과연 가능할까? 로마에서 바티칸 투어를 해주셨던 이름 모를 자전거 나라의 가이드 분은 그놈의 유레일패스가 유럽 여행의 묘미를 망친다고 말했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평생에 한 번 할까말까한 유럽에서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아마 그런 이들을 위해, 가이드야말로 효율적인 여행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양나연 씨의 가이드 도전기는 쉽지가 않다. 우선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영어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숙달된 가이드의 길은 멀고도 험하기만 하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세미나에서 만난 짱가이드(자전거 나라 사장님?)의 추상같은 호령과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는 격려 대신 호랑이 같은 닦달은 그녀로 하여금 과연 자신의 선택이 옳았던 가에 대한 깊은 회의감마저 심어주기도 한다. 연예인들이 팬들의 박수를 먹고 산다는 말처럼, 가이드들은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투어에 참석한 손님들의 칭찬글을 먹고 사는가 보다. 1년 여의 가이드 생활을 통해 박수와 수많은 칭찬글들을 받았겠지만 가이드 초창기의 그것들은 참으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나 보다. 마치 시청률 1~2%에 목숨 거는 작가 시절처럼, 칭찬 글 하나는 고래 아니 가이드들을 브레이크 댄스에 못하는 랩까지 하게 만든다고 한다.

확실히 작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술술 넘어 가는 글맛이 느껴진다. 사실 개인적으로 잘 읽히는 글들을 선호하는 편인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양나연 씨의 글은 참 맛깔나면서도 그 스피드 넘치는 흐름이 참 마음에 들었다. 어떤 이들이 쓴 파리 이야기들은 공감하기 어려운 (지극힌 주관적인) 부분들이 있는데, 양나연 씨의 글은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동료 배낭여행자의 글처럼 편안하고 부드럽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신의 사전 경력이 너무 전면에 나서는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잘 나가는 개그 프로그램의 작가라는 경력이 자랑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 보통의 시청자들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누가 쓴거라는데 관심이나 두기나 하나? 게다가 최근에 읽은 <런던 프로젝트>, <쏘 핫 캘리포니아> 같은 책들의 저자들이 펴낸 비슷한 코스를 밟아 낸 에세이들과 크게 다른 변별점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리고 한 꼭지 정도는 일반적이지 않은 파리의 숨겨진 보석 같은 장소들을 가이드 특유의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내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쉽게 도전할 수 없을 장기간의 파리 행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고 결국엔 사랑마저 쟁취한 그녀의 용감한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사랑과 여행을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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