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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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백>, 제목 한 번 단순하다. 문득 원작의 표지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텅 빈 교실에 덩그러니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책의 가격은 1,470엔 오늘 환율로 계산해 보니 2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미나토 가나에 작가의 <고백>은 정가가 11,000원이었다. 책값이 대한해협을 건너면서 반값이 된 걸까? 하긴 우리나라에서 소설 한 권에 2만 원 정가를 붙였다간 바로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원산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고백>과 만날 수가 있었다.

신인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데뷔작이라는 <고백>의 구성과 전개는 놀랍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 반에 있습니다."라는 충격적인 고백으로 시작되는 살인과 그에 대한 응징으로서의 복수 그리고 미스터리 스릴러 양식에 충실한 <고백>은 모두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직자, 순교자, 자애자, 구도자, 신봉자 그리고 전도자라는 다소 종교적인 색채의 장들을 읽다 보면 왜 미나토 가나에 작가가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바로 알 수가 있다. 중학교 종업식 날, 담임인 모리구치 유코는 학생들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수영장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딸 마나미는 사고사가 아니라 그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라고. 게다가 그 범인은 자신의 반에 있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미나토 가나에는 장마다 화자를 다른 이로 배치해서 실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 점은 일본 영화계의 대부인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대표작 <라쇼몽>을 연상시킨다. 어느 사무라이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사건의 목격자들의 의해 왜곡되고 변질하는 과정이 <고백>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열린 결말로 매조지 되었지만, 미나토 가나에 작가는 선과 악의 명백한 기준점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상식적인 윤리의 존재 여부다.

중범죄를 저지른 미성년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반 학생들의 의견을 묻는 담임 유코 선생님.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에 대해 복수하고 싶어 하는 동시에, 자신의 학생들을 보호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기술되지만, 그 누구도 타인을 처벌할 수 없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다. 이런 갈등은 다음 장인 순교자 편에서 열세 살 살인자에 대한 집단 폭력으로 폭발하게 된다.

한편, 작가는 한 때 일본에 추세처럼 유행하던 열혈 선생님 상에 대한 안티캐릭터를 창조해낸다. <고쿠센>의 양쿠미나 GTO(우리나라에는 ‘반항하지마’로 소개됨)의 오니즈카 같은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안위 따위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열혈 선생님이 아닌 싱글맘으로 자신의 딸을 기르는 모리구치 유코를 첫 번째 화자로 등장시킨다.

각 장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각자의 처지에서 자신이 말하는 ‘누군가’에게 지지를 얻기를 원한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책을 읽는 독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어느 정도는 화자들의 말에 수긍이 가기도 했다. 그만큼 미나토 가나에 작가의 기술은 설득력이 넘친다. 이런 원형 순환구조를 통해, 독자들은 모든 것을 설계한 범인은 누구이며, 도대체 무슨 동기를 가지고 이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를 추적해 나간다.

책장을 넘길수록, 사전에 작가가 그야말로 지뢰밭처럼 치밀하게 준비해둔 복선의 늪에서 소설의 앞부분을 다시 읽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된다. 작가는 화자들의 말을 통해, 언급된 것들에 대한 지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어느 것 하나 빼먹지 않고, 다시 한 번 등장시켜서 확인을 시켜 주거나 혹은 서사에 재활용하는 탁월한 기법으로 독자들을 결말로 이끌어낸다.

올해 일본 서점대상 수상작이라는 표현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흡입력을 자랑하는 소설 <고백>! 개인적으로 초반에는 대화체가 아닌 일방적 독백체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일단 익숙해지자 놀라운 속도로 다 읽어 버렸다. 살인과 복수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긴 했지만, 전율 넘치는 반전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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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이나미.이영준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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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쿠르코프, 이름만 들어도 단박에 러시아 작가라는 걸 알 수가 있겠다. 아니 최소한 슬라브 계열의 작가겠지. 구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안드레이 쿠르코프 작가는 우크라이나에서 살면서, 러시아 어로 소설을 발표한다고 한다. <펭귄의 우울>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소설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됐다.

어디선가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보고 나서 사두기는 진작 사뒀었는데, 이제야 읽게 됐다. 제목에 있는 그대로 펭귄이 등장하는 이 소설의 배경은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의 우크라이나 키예프다. 30대 후반의 주인공 빅토르 알렉세예비치 졸로따례프는 신문사에 주로 짧은 글과 산문을 기고하는 작가다. 빅토르는 여자친구와 이별하고 나서, 동물원에서 분양받은 황제 펭귄 미샤와 동거 중이다(이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아니 다른 동물도 아니고 펭귄이 애완동물이라니! 그 설정부터 참 특이하다.

검은 턱시도를 입은 것 같은 남극 출신의 펭귄 미샤는 슬픈 눈을 하고 조용하게 빅토르의 삶 속으로 들어선다. 자신이 쓴 글을 팔기 위해, 신문사를 전전긍긍하던 빅토르는 어느 날 <수도뉴스>의 편집장으로부터 기묘한 제안을 받는다.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의 추도기사를 쓰라는 거다. 월급 300달러의 괜찮은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작가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고를 회전시켜, 빅토르는 술술 글을 써내려 간다.

중간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평온한 빅토르의 삶에 큰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다. 편집장 이고르를 통해 알게 된 ‘펭귄이 아닌 미샤’의 딸 소냐가 그리고 그 소냐를 돌봐주기 위해 경찰 친구 세르게이의 조카딸 니나가 합류하면서 유사가정의 형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펭귄 미샤는 말없이, 빅토르의 작업을 지켜보고 혹은 친구와 함께 얼음소풍을 나가는 한가로운 일상이 계속된다.

우울증에 약한 심장을 가진 펭귄 미샤는 빅토르가 우연히 알게 된 이들에 의해 반강제로 장례식에 동원된다. 그리고 빅토르가 쓴 추도기사 <십자가>에 이름이 올라간 이들이 차례대로 죽는다. 그에게 일감을 물어다 주던 편집장 이고르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면서, 비로소 빅토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펭귄 미샤마저 중병을 앓게 되면서, 이야기는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펭귄의 우울>은 기본적으로 소통의 부재로 말미암은 개인의 고독에 그 방점을 찍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사는 빅토르는 출장을 가게 돼도, 펭귄 미샤를 맡길만한 친구 하나 없는 그런 외로운 존재다. 관계는 필요에 의해 증발되어 버리고, 내내 외톨이 생활을 해온 빅토르는 소냐나 니나 같은 유사가족보다도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펭귄 미샤에게 더 동질감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네 살짜리 꼬마, 그 꼬마를 돌보는 유모로 채용된 관계라는 연결고리는 취약하기 그지없다.

그런 취약한 관계의 공간을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스릴러는 파고든다. 추도기사 <십자가>를 부추기는 A그룹의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사회방역소탕’이라는 거창한 핑계로, 거대한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빅토르는 벼랑으로 내몰린다. 치밀하게 짜인 틀 안에서 전개되던 이야기는 열린 결말과 만나면서 후속편을 기대하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본편에 두 배 가까운 분량을 자랑하는 <펭귄의 실종>이 독자들을 맞이한다.

평등과 공존이라는 구 소비에트 시대의 사회적 가치들은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대신 자본과 결탁한 물신주의와 권총으로 상징되는 폭력이 찬란했던 소비에트 시대의 영화(榮華)를 대체한다. 게다가 러시아의 루블화도 아닌, 그렇다고 우크라이나의 통화인 흐리브냐도 아닌 달러가 통용되는 세상은 천국보다도 낯설기만 하다. 심지어 이 책이 영역 본의 번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거래는 달러로 통용된다. 21세기 달러 패권주의의 몰락이 현실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말이다.

한편, 작가 빅토르는 이 글을 쓴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거울이다. 그는 지속하지 않는 영감으로 말미암은, 창작의 고통을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토로한다.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싶어 하는 글쟁이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생활을 위해 돈을 받고 글을 쓰는 빅토르의 처지를 설명한다. 펭귄 미샤를 통해서는 작가가 느끼는 의무적 고독의 묘미를 보여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책읽기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영미권 작가들의 글보다 제3세계 작가들의 글에 더 깊은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우크라이나 작가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펭귄 미샤 이야기에 흠뻑 빠져 버렸다. 열린 결말(open end)이 조금은 불만스러웠지만, 후속편 <펭귄의 실종>이 전편에서 풀리지 않은 비밀과 의혹을 말끔하게 해결해 주리란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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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 라이프
윌리 블로틴 지음, 신선해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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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지도에서 책에 나오는 위치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구글 맵을 이용해 보니, 윌리 블로틴이 쓴 <모텔 라이프>의 주인공들인 플래니건 형제들의 여정을 짚어낼 수가 있었다. 그들의 본거지인 네바다 주 리노 시를 가로지르는 80번 고속도로가 한 눈에 척하니 들어왔다.

뮤지션이자 자신의 데뷔 소설로 <모텔 라이프>를 발표한 윌리 블로틴은 미국 네바다 주의 리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두 명의 주인공은 프랭크 플래니건과 제리 리 플래니건 형제다. 혹자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실제 저자들과 혼동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작가 윌리 블로틴이 프랭크고, 이야기의 시작마다 일러스트를 그린 네이트 비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설은 충격으로 시작한다. 실제로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인 프랭크의 형인 제리 리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운전하던 중에 갑자기 도로로 뛰어든 웨스 데니라는 소년을 치어 죽이면서 플래니건 형제들의 운명의 수레바퀴는 급회전하기 시작한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한 제리 리는 그 소년을 차에 실은 후, 도주해 버린다. 첫 실수로 잘못 꿰어진 단추는 제리 리의 동생인 프랭크마저 도망자로 만든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플래니건 형제들의 매우 곤란한 삶의 원형들이 속속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도박 중독에 빠져, 결국 가정을 떠나 버린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해서 그들이 모텔이라는 뜨내기들이 머무는 곳에 보금자리를 틀게 되었는지의 과정들이 플래시처럼 사이사이에 끼어든다.

그들의 로드트립은 제리 리의 갑작스러운 변심 탓에, 어디에선가 갑자기 끝나 버리고 프랭크는 다시 리노로 돌아오게 된다. 마음 둘 곳 없는 천국보다 낯선 리노지만, 그네들의 마음속에는 다시 돌아오게 되고야 마는 삶의 회전축처럼 작동하고 있다. 소년을 죽였다는 자책감에 제리 리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다시 병원에 갇히게 된다.

형제끼리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살라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프랭크는 온 힘을 다해 제리 리를 돕는다. 한편, 삶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프랭크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던 애니 제임스와의 가슴 아픈 과거로 괴로워한다. 과연, 플래니건 형제들은 과거의 트라우마들을 딛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모텔 라이프>는 자동차 문화가 그 어느 나라보다 발달한 미국의 모텔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치 디지털 시대의 유목민들처럼 한 주 혹은 한 달씩 머무는 유목민들의 공간인 모텔을 전전하는 프랭크와 제리 리의 이야기는,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별로 말미암아 마음의 안식처를 잃어버린 영혼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모텔에서 쉬고 먹고 자면서, 사랑을 하고 성장해 나간다. 독자들은 책을 읽을수록, 정상적으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탈적인 삶을 사는 플래니건 형제들의 삶의 모습에 점점 더 수긍하게 된다.

제리 리에게 프랭크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오마쥬로 다가온다. 정말 황당무계한 이야기들로 들리는 프랭크의 이야기는 모두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들의 줄거리에 자신과 제리 리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당하게 붙여서 만들어낸 이야기들이다. 가령 예를 들어, 마지막 이야기에서 얼음처럼 찬 아이슬란드에 불시착한 프랭크가 북극곰을 죽이고, 그 속에 들어가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는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 초반부에 루크 스카이워커의 생존전략을 그대도 베꼈다.

작가 윌리 블로틴은 <모텔 라이프>를 통해 독자들에게 미국 하위문화를 여과 없이 소개하고 있다. 그들이 끼니를 때우는 싸구려 레스토랑, 사교의 장으로 나오는 동네 술집, 여행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가 남긴 총을 파는 총포상, 그리고 도로를 달리기 위해 필요한 중고차를 매매하는 중고차 딜러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통 사람들 일상의 모습이다.

소설을 읽던 중에 용서와 화해라는 단어들이 불쑥 솟아난다. 자신이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애니 제임스와의 사건을 곱씹던, 프랭크는 결국 병원에서 형 제리 리를 데리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벌여 그렇게 딴 돈으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나선다. 결국, 프랭크가 돌아갈 마음의 안식처는 바로 자신의 첫사랑이었을까. 형제간의 어처구니없는 배신은 논외의 문제다. 프랭크는 그렇게 자신이 풀어야 하는 본질적 화해를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모텔 라이프>는 영화로 만들어도 좋다 싶을 정도로 개별적인 에피소드들과 플래시백들의 사용이 장마다 적절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영화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로드 버디 무비라는 장르가 있듯이, 영화화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윌리 블로틴이 어느 모텔에서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동영상을 보게 됐다. <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의 작가 론 커리는 자신의 소설을 쓰기 위해, 미국 중서부 지역의 싸구려 식당에서 직접 감자 튀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윌리 블로틴 역시 그랬던 걸까. 내년에 그의 신작이 나온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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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기사 세바스티안 카니발 문고 1
호세 루이스 올라이솔라 지음, 성초림 옮김, 이영옥 그림 / 스콜라(위즈덤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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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이라구? 옛 시인들의 영원한 소재인 기사문학의 후예일까? 이번에 위즈덤하우스의 임프린트인 스콜라에서 출간된 <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을 접하는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게다가 에스파냐의 전설적 영웅이라는 엘시드까지 나온다고 하니 더더욱 그랬다. 그래, 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이 엘시드를 도와 전쟁터를 누비는 이야기라는 거지? 이런 나의 생각은 책장을 넘기면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물론 실존했던 영웅 엘시드가 등장하는 건 맞지만, 그에 관련된 몇몇 이야기들을 빼고서는 모두가 전적으로 작가 호세 루이스 올라이솔라의 창작이었다. 우리의 실질적인 주인공 세바스티안은 정보를 파는 첩자들의 후예로 올해 14살 난 소년이다. 11세기 후반, 에스파냐는 기독교도들이 다스리는 지역과 무슬림들의 지배하에 이는 지역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도, 무슬림 그리고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고유의 영역을 지키면서 조화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역설적인 것은 그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에스파냐가 중세 가장 잔혹한 종교탄압과 마녀재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래의 첩자를 꿈꾸던 돼지치기 목동 세바스티안은 우연히 만난 크리스티나 공주의 행방을 밀고해서, 라카르 공작부인에게서 훌륭한 말을 얻게 된다. 이제 본격적인 첩자의 길을 들어서게 된, 세바스티안에게 라카르 공작부인은 팜므 파탈 그 자체였다. 자신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공작부인의 마력에 빠져 로렌소 할아버지나 마을의 현인 블란디나 아줌마의 충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세바스티안. 어떻게, 요즘 청소년들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세바스티안이 온 에스파냐를 정복하려는 라카르 공작 남매의 야망에 협력해서, 기사가 되었다면 아마 <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의 이야기는 그렇게 흥미롭지 않았으리라. 전쟁터에서 양쪽 진영에 발을 걸치고, 수입을 올리는 첩자의 운명처럼 자신에게 접근해온 크리스티나 공주의 제안을 받아들인 세바스티안은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라카르 공작부인 배신하고, 크리스티나 공주를 구해줄 용사 엘시드를 찾아 나선다.

엘시드를 찾아가는 길은, 세바스티안이 보다 다른 단계로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영웅기사문학에서 어느 순간, 성장소설로 변신한 <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은 크리스티나 공주의 운명을 걸고, 사악하고 잔혹한 라카르 공작과 정의감과 자신의 주군이었던 산초 왕에 대한 충성으로 불타는 용사 엘시드의 대결로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간다.

어떻게 보면 소년들을 위한 간단해 보이는 줄거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정의를 실천하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마초이즘에 입각한 기사문학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운명을 오로지 남성들에게 의존해야 했던 중세 여성관이 누구나 자신의 의지에 의해 행복을 추구할 수가 있다는 근대적 사고와 충돌하고 있다. 장원제도에 입각한 귀족과 농노 간의 철저한 신분제의 타파에 대한 열망 역시 읽을 수가 있었다. 누구나 다 경멸하는 첩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세바스티안은 자신도 언젠가는 멋진 말을 타고, 용사 엘시드와 같은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느 소년의 목숨을 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멋진 모험담을 읽는 재미만으로도 <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은 읽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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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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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사이에 쉴 새 없이 오쿠다 히데오가 만들어낸 안티-히어로 스타일의 주인공 닥터 이라부 이치로에 빠져 살았다. <공중그네>로 시작된 이라부 탐험기는 <면장 선거>를 거쳐 마침내, <인 더 풀>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다. 물론, 앞으로 오쿠다 히데오가 당분간 닥터 이라부 시리즈를 발표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인 더 풀>에서 작가 오쿠다 히데오는 어떻게 해서 이라부 이치로라는 희대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도대체 밉지 않은 엉뚱한 정신과 의사가 탄생하게 되었는가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캐릭터의 낙천성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푸근한 몸매와 누구라도 이 사람이 정말 의사야? 라고 생각할 정도로 보통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전형적인 의사 상에 반하는 닥터 이라부,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능력까지 깎아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어떤 의사도 해내지 못한 난제들을 척척 해결하는 당사자니까 말이다.

두 번째로는, 평범한 속의 진리라는 아주 간단한 원리다. 우리네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어렵게 보려는 고정관념 속에서 살아간다. 때로는 모든 것을 자신의 감정에 기초한 가장 기본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라부 이치로가 독자들에게 주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닥터 이라부 이치로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다. 너무 복잡해,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구, 이 바보들아!

마지막으로 그는 실제로 아무것도 처방하지 않고, 단순히 등장하는 모든 고민 남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물론 그의 태도에 혀를 내두르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어쩌면 그런 그의 태도야말로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고수하는 방어기제를 무장해제시키고 비로소 자신의 ‘진짜 문제들’을 술술 털어놓는 것이다. 당연히, 그에 앞서 이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의사와의 공감대가 우선으로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공감대 역시 의무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때가 되면 저절로 만들어진다. 그러니 성질 급한 분들은 책을 읽으면서 한 박자 느리게 조절하는 운영의 묘미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모든 남자가 자신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고 착각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모델 도우미, 음경강직증이라는 해괴한 병에 시달리는 직장의 샐러리맨, 수영 중독에 빠져 하루에 몇 시간씩 수영장을 찾지 않으면 안달복달하는 중년 남성, 휴대전화와 문자에 중독되어 쉴 새 없이 주변과 소통을 시도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마는 어린 고등학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습관성 강박증에 시달리는 프리랜서 작가에 이르기까지 정말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법한 이들의 평범하지 않은 문제들을 오쿠다 히데오는 도마 위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자, 모든 게 준비됐다. 이제 등장인물을 등장시켜서 이 맛깔스런 이야기들을 버무리고, 갖가지 소재들로 양념해서 한 그릇의 맛있는 이야기 비빔밥을 만들어내는 것은 온전하게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능력에 달렸다. 그저 독자들은 수저를 들고, 맛있게 먹으면 된다.

개인적으로 <인 더 풀>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에피소드는 바로 <프렌즈>였다. 그전에 언젠가 아는 동생으로부터, 요즘 아이들은 MP3 플레이어가 없으면,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프렌즈>의 주인공 유타의 강박증 시발점은 바로 휴대전화였다. 어려서부터 내성적이어서 많은 친구들과 다양한 교제를 경험하지 못해온 유타는 휴대전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끊이지 않고 소통을 시도한다.

그런 유타의 내면에는 홀로이고 싶지 않다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자신의 강박증 때문에, 닥터 이라부를 찾은 유타는 별다른 친구 없이 지내는 이라부-마유미 듀엣에게서 비로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유타. 그렇다, 오쿠다 히데오는 우리가 병원에서 받는 천편일률적인 처방을 거부한다. 물론, 느닷없이 팔뚝을 쑤시는 비타민 주사는 강제성을 띠고 있지만, 심신증 치료에는 이라부표 수다와 유머야말로 특효약이다. 하긴 그들 스스로 미쳤다는걸(물론 정도의 차이겠지만) 인정하는 순간, 그들의 치유는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이 시리즈가 어디까지 나갈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거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닥터 이라부 이치로의 마음만큼이나 알 도리가 없을 수밖에. 하지만, 닥터 이라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나설 용의가 있는 열혈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당장에라도 집필 활동에 나설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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