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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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네이버에서 정혜윤을 검색해 봤다. 가장 먼저 툭 튀어나오는 사람은 기상캐스터란다, 어 이 사람이 아닌데…, 내가 정혜윤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작년 여름에 읽은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였다. 표지가 아주 인상적인 책으로 라디오 PD 출신의 글쓴이가 11명의 명사의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다만, 명사들의 이야기보다 자신의 책읽기 이야기가 너무 많아 입맛이 씁쓰름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출간된 <런던을 속삭여 줄게>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글쓴이는 당당하게 “런던”을 제목에 집어넣었다. 기존에 나왔던 두 권의 책처럼 분명히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빠지지 않을 텐데 어떤 식으로 책 이야기를 하려나 하는 나의 궁금증 반, 우려 반이 시작됐다.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런던은 그저 구실이었다. 여느 여행 에세이처럼 런던의 숨겨진 은밀한 비밀들을 속삭여 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철저한 오산이다. <런던을 속삭여 줄게> 역시 정혜윤식 책읽기 이야기였다. 이미 작년에 학습효과가 있어서, 지난번 만큼 실망스럽진 않았다. 역시 인간은 체험의 동물인가 보다, 기대치를 낮추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역시 타인의 책읽기 가운데, 나도 읽은 책을 만나면 참 기쁘다. 레이몬드 카버의 <대성당> 소개 편이 그랬다. 다 읽고 나서 다른 이에게 선물해 버려서 지금은 나의 수중에 없는 책이지만, 앞을 못 보는 이가 대성당을 그리는 장면은 눈에 선했다. 글쓴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독자들을 자신이 읽은 책과 지은이들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썰’을 풀기 시작한다. 꼭 집어서 어디라고 말할 순 없지만, 작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아이작 뉴턴 그리고 불멸의 로맨티스트 바이런의 이야기들은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 둘 다, 예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면을 취하는 인물들이라고 했던가.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에서는 과연 내가 제대로 디킨스의 책이 얼마나 되나 부끄러워지는 순간도 있었다.

다음 편에 등장하는 세인트 폴 대성당은 나에게, 독일 나치 루프트바페의 런던 공습이 일상화되었던 1940년대의 어느 날 화염에 휩싸인 채 고고하게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놓은 흑백 사진 이미지 그대로였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로 국왕의 목마저 서슴지 않고 날려 버리는 영국인들의 책에서나 볼법한 합리주의적 사고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대영박물관은 영국이 세계 최강의 무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각처에서 약탈해온 진귀한 인류의 문화유산들로 뒤덮여 있는 전시장이었다. 특히, 그리스에서 집요하게 반환을 요구하는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통째로 뜯어왔다는 ‘엘진 마블’이 왜 아테네가 아닌 런던 복판에 있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해 자꾸만 생각해 보게 됐다. 영국인들이 드는 말도 되지 않는 핑계들은 그야말로 그리스 예술품을 반환하지 않으려는 그네들의 얄팍한 술수라는데 한 표 던지고 싶다! 어쨌거나 이웃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과는 달리 무료입장이라는 사실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물론 지은이는 동서고금을 가로질리는 대영박물관에서 신화 속 세계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빼놓지 않고 독자들에게 속삭여 준다.

그 외에도 트라팔가르 광장의 주인공 넬슨 제독, 세계 최강의 식민제국이었던 대영제국의 영광을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 비운의 역사가 스며 있는 런던탑 그리고 영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든 그리니치 천문대에 이르기까지 런던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자신이 읽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퀼트 조각 이불을 맞추듯 그렇게 ‘패치워크’ 내공을 선보인다.

올해만도 런던이라는 제목이 들어가는 책을 두 권이나 읽어서였을까? 기대했던 색다른 감흥들이 실종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책의 어디선가, ‘사랑에 이끌리면 미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표현을 보는 순간 그야말로 손발이 다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아, 지은이는 참으로 자의식 과잉이구나 싶었다. 게다가 밀턴의 이야기를 하는 중에는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말도 하고 있다, 아니 그럼 정말 예외적인 존재인 찰스 맨슨도 예외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책을 읽던 중에 순간 답답해져 오던 갑갑증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래도 글쓴이에게 정말 고마운 건 이 책을 통해 나에게 로이드 존스가 쓴 <미스터 핍>이란 책을 소개해 주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혹되지 말지어다, 이 책에 나오는 런던은 프로파간다다! 런던을 빌미로 한 책읽기 에세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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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연 을유세계문학전집 9
조셉 콘라드 지음, 이석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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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을 이야기하면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연출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을 이야기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사실 콘래드의 원작보다 코폴라 감독의 영화가 대중적인 게 사실이니까 말이다. 이번에 을유문화사에서 을유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된 이 책의 표지 역시 영화의 스틸컷이 장식하고 있었다.

폴란드 태생(정확하게는 우크라이나)의 조지프 콘래드는 폴란드 유수의 가문 출신으로 제정 러시아에 반대하는 반정부활동을 하던 양친을 차례로 여의고 1878년부터 영국 상선에서 일하게 됐다. 선원으로 인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콩고 등을 누비면서 훗날 작품 세계에 다양한 영감을 준 모티프들을 축적하게 된다. 세기말이었던 1899년에 발표된 <어둠의 심연>은 10년 전 벨기에령이던 콩고 자유주(벨기에 국왕이었던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를 직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쓰였다.

이야기는 착취와 억압의 식민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호령하던 19세기 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렸던 영국 템스강 위에서 넬리호라는 작은 배 위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말로(Marlow)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진다. 말로는 같은 배에 탄 다른 네 명의 동료에게 자신이 체험했던 기이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물론 화자는 다른 인물로,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액자식 구성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말로는 당시 영국의 식민주의를 고대 로마의 그것에 비유하며, 야만과 문명의 대결이라는 전통적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지도에 많은 관심이 있던 주인공은 콩고 강에서(소설에서 실제 지명에 대한 언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역업을 회사의 증기선 선장으로 채용되어, 미지의 탐험에 나서게 된다. 제국주의자들은 구슬이나 하찮은 면제품이나 황동선 같은 허섭스레기들을 가지고 원주민들로부터 귀한 상아를 착취하는 불공정 거래를 해오고 있다.

말로의 주된 임무는 강의 상류에 있는 내륙교역소에 가서 수집된 상아를 운반해 오고, 특히 커츠라는 이름의 신비에 쌓인 교역소장을 데려오는 것이다. 일단의 순례자들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들의 여정은 미스터리 그 자체이다. 작가의 뛰어난 미개발 원시세계에 대한 묘사와 함께,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어 가듯 커츠라는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이 조합을 이루면서 원주민과 커츠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우상화의 단계에 이를 정도의 외경심을 품게 되는 기이한 현실에 말로는 혼란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자신이 직접 커츠를 만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소설을 통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커츠의 우상화는 마치 폴리네시아와 뉴기니 일대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화물숭배(貨物崇拜)가 떠올랐다. 소설의 곳곳에서 보이는 야만과 문명의 충돌이라는 식민시대의 이분법적 구조는 아프리카/유럽 혹은 원주민/문명인이라는 대립각의 날을 세운다. 원주민들이 병든 커츠를 위해 벌이는 서구인들의 사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의식과 제의들 역시 그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보인다. 소설이 쓰인 그 시절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주제가 보편화한 오늘날에 과연 문명이 선이고, 원시/야만은 악이라는 대결구조가 유효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편, 서구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그렇게 원하던 상아를 얻기 위해 야만적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문명인 대표로 나선 말로는 커츠를 찾아 나선 길에 오두막 근처 말뚝 위의 머리통을 보고서 기겁하지만, 자신의 표현대로 같은 조상을 하는 원주민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너무나 값없이 깎아내리는 역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도 이성과 지성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부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아직 독서 훈련의 부족 때문인지 무척이나 다양한 텍스트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어둠의 심연>의 단면만을 캐낸 것 같아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19세기 말, 상업 자본주의로 무장한 서구인들 침탈의 시기에 원시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성 본질에 대한 질문과 자연에 대한 도전과 응전의 모험기를 그린 조지프 콘래드의 걸작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것에 대한 충분한 보답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한 번 <지옥의 묵시록>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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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블루
김랑 글.사진 / 나무수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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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크로아티아의 색깔은 지붕의 주황색이었는데, <크로아티아 블루>의 작가 김랑 씨는 단호하게 크로아티아는 ‘블루’라고 책의 제목을 통해 선언하고 있다. 이미 지난봄에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와 KBS1에서 방영된 여행 다큐멘터리 <걸어서 세계 속으로> “크로아티아”편을 봐서 이제 크로아티아는 나에게 천국보다 낯선 지명이 아니었다.

역시 다른 책들과 비교를 의식해서였을까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아드리아해의 보석 크로아티아의 도시들이 아닌 정말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도시들을 작가는 한 달이라는 넉넉한 시간을 소비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그전에도 이미 크로아티아에 가보았는지, 뭐랄까 기시적인 여유가 느껴졌다. 작가의 글 속에 묻어나는 그런 여유감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작가의 크로아티아 여정은 이탈리아와 맞닿은 국경의 이스트라 반도에서 시작한다. 로빈, 모토분 그리고 풀라의 사진들에서는 포토샵의 커브 기능이 불쑥 떠올랐다. 아마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는 실제의 풍경들이 그런 빛깔을 띠고 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고대 로마유적들이 이탈리아의 그것보다도 잘 보존되어 있다는 말에 이탈리아 고대 유적이라면 깜빡 죽는 나는 호기심 어린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였는진 몰라도 풀라의 고대 원형 경기장의 자태는 로마의 콜로세움 이상의 감동이었다. 아마 여행 에세이를 읽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맛이겠지, 전혀 모르고 있던 것들에 대한 깨달음?

이스트라 반도에서 워밍업을 한 작가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이동을 한다. 가장 가까운 서유럽의 도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닮았다는 자그레브는 비엔나처럼 강을 끼고 있다고 한다. 비엔나에 다뉴브강이 있다면, 자그레브에는 그 다뉴브강의 지류인 사바강이 있었다. 동유럽과 서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비엔나와는 한 때 같은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도시였던 만큼 그 동질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자그레브를 잇는 다음 여행지는 플리트비체로 유명한 디나라 알프스 지역이었다. 예전에 그림을 공부했다는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에는 왜 이 책의 제목에 “블루”가 들어가는지 그 이유가 말없이 설명되고 있다. 게다가 작가가 길에서 만난 짧은 인연들을 조그맣게 속삭이는 글들 역시 마음에 들었다. 세상살이와 관계에 싫증이 난 나그네들이 길 위의 인연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참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아마 그래서 관계는 애증이 뒤범벅되어 있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자, 이제 마지막 코스인 달마티아 해변으로 가보자. 작가는 책의 절반가량을 이 달마티아 해변에 할애하고 있다. 달마티아 코르출라 섬이 고향인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읽고서, 아메리카 대륙을 침탈하는데 선봉에 선 콜럼버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달마티아 편은 정말 나그네의 본성을 가진 이들의 역마살을 자극한다.

자다르, 비비녜, 프리모스텐, 스플리트를 거쳐 두브로브니크에 달하는 작가의 크로아티아 탐험에 질투심이 일기 시작했다. 여행 초반부에는 버스와 기차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작가가 어느 순간 렌터카로 달마이타의 곳곳을 누비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쩌면 탁월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행하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차편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기도 해야 하니 말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간택으로 황궁이 이어진 스플리트의 반질반질한 돌바닥길과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궁금한 골목길의 향연은 여전히 미지의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역시 크로아티아 여행의 백미는 바로 두브로브니크였다. 지금도 나의 컴퓨터 스크린의 월페이퍼는 두브로브니크의 고성을 그린 일러스트가 차지하고 있다. “드디어 다시 왔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고백이 참으로 사무치게 느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역시나 나의 습관대로 구글맵으로 작가의 이동 루트를 따라가 봤다. 두브로브니크는 모국 크로아티아에서 떨어진 육지의 섬처럼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예전에는 같은 나라였던 보스니아에 의해 육로로는 분리되어 있었다.

<크로아티아 블루>는 멋진 사진과 감성을 자극하는 김랑 작가의 에세이들이 줄지어 소개되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과의 사연에는 절대적으로 공감하게 되지만, 불쑥불쑥 등장하는 작가의 개인적인 연애담 편에는 솔직하게 말해서 짜증이 났다. 그 연애담의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강요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사실 타인의 연애담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알고 싶지도 않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출판사에서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을 왜 집어넣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달마티아 해변에서 바라보는 아드리아해의 옥빛 바다 색깔은 그 무엇에 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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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실종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양민종 옮김 / 솔출판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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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주말에 텔레비전에 하는 우크라이나 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볼 수가 있었다. 내가 보기 시작한 부분은 예전에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의 배경이 되었던 폴타바라는 곳으로, 엄청나게 광활한 평원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1970년에 제작된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80년대로, 그동안 공산권 국가였던 소련을 상징하는 “해바라기”라는 꽃 때문에 우리나라 상륙이 불허되고 있었다고 했던가. 그냥 화초로만 알았던 해바라기가 우크라이나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작물이라는 사실을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막 읽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펭귄의 실종>이 떠올랐다.

전편 <펭귄의 우울>을 읽자마자 후속편인 <펭귄의 실종>을 읽고 싶어서 한동안 몸살이 다 날 지경이었다.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집단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은 주인공 빅토르 졸로따례프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지, 그리고 후속편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심장수술을 받은 펭귄 미샤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빅토르는 미샤를 찾을 수 있을지 점증하는 의문점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온라인으로 주문을 한 책은 내 손안에 들어오는데 자그마치 4일이나 걸렸다. 참다못해 결국 온라인 미리 보기 서비스를 이용해서 몇 장이나마 컴퓨터로 읽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을 받자마자 600쪽이 넘는 분량을 단숨에 읽어 버렸다. 전작 <펭귄의 우울>에서 빅토르와 펭귄 미샤 그리고 소냐의 관계가 위태롭긴 했지만 잔잔하게 전개가 있었다면, 후속편 <펭귄의 실종>에서는 펭귄 미샤를 구하기 위한 빅토르의 눈물겨운, 때로는 목숨을 건 모험이 그야말로 소용돌이친다.

남극에서 우연히 만난 브로니코프스키의 도움과 부탁으로 다시 키예프로 돌아온 빅토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 때 유사가족이라고 생각했던 니나의 배신과 펭귄 미샤의 실종이었다. 사실, 전자보다 후자의 사건에 더 충격을 받은 빅토르는 곧바로 미샤의 수배에 나선다. 그가 접한 펭귄 미샤의 소식은 러시아 마피아의 손에 이끌려 모스크바로 끌려갔다고 하는 비보였다. 그 와중에 그는 달팽이 이론을 설파하는 세르게이 파블로비치라는 미래의 국회의원 지망생을 후원자로 두게 된다. 전작에서 수도뉴스의 편집장 이고르 르보비치의 역할이 새로운 캐릭터에게 전이되는 순간이었다.

모스크바에 간 빅토르는 브로니코프스키의 미망인(놀랍게도 한국계 여성이었다!)과 짧은 로맨스를 뒤로하고, 펭귄 미샤를 구하기 위해 전쟁통인 체첸으로 발길을 돌린다. <펭귄의 우울>이 우크라이나 그것도 키예프라는 도시에 한정적이었다면, <펭귄의 실종>에서는 우크라이나-모스크바 그리고 체첸을 아우르는 광대한 스케일을 그 무대로 한다. 펭귄 미샤를 구하기 위해, 자청해서 노예가 된 빅토르는 자의와는 관계없이 화장장에서 일하게 된다. 죽음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화장장에서 러시아 연방군과 체첸인들 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런 삶과 죽음이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 과연 빅토르는 펭귄 미샤를 찾게 될 것인가?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작가 안드레이 쿠르코프는 미스터리 스릴러 초대장을 독자들에게 발부한다.

책을 읽으면서, 러시아 내부에 은연중에 작동하는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 그림자를 느낄 수가 있었다. 나중에 빅토르가 다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게 되면서, 죽은 세르게이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을 때 보이는 보스의 반응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침공군의 뒤를 따라 우크라이나 지역에 침입했던 나치 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의 활약이 그 어느 곳보다 왕성했던 곳이 바로 우크라이나가 아니었던가.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에 쇠락해 버린 것처럼 보였던 범슬라브주의에 대한 향수도 주된 키워드로 다가왔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체첸공화국 그리고 아드리아 해의 크로아티아에 이르기까지 빅토르가 누비는 곳은 모두 옛 공산주의 소비에트 시절의 영광에 대한 아쉬움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그 누가 뭐래도, 우리가 남이가? 라는 슬라브 민족의 동질성이랄까. 한편, 과거로부터의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는 그네들의 이중적인 모습들도 동시에 찾아볼 수가 있었다. 바로 그 분절점에 우리의 주인공 빅토르와 펭귄 미샤가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소설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로는 “약속”을 꼽고 싶다. 펭귄 미샤를 풀어주겠다는 체첸 갱단 두목 하차예프의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 펭귄 미샤를 남극에 보내겠다는 빅토르의 신념에 찬 약속은 소설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다. 물론 펭귄 미샤를 구하는 일이 과연 자신의 목숨을 걸만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 빅토르 개인의 관계 결핍을 채우는 펭귄 미샤의 존재는, 유사가족 니나의 무존재 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 한 작가의 글을 읽고 나서, 그 나라의 현대문학을 이야기한다는 게 무리일 것이다. 그래도 러시아 현대문학 작가 중에서 나름대로 대중성을 확보한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펭귄 시리즈를 통해, 고뇌하는 개인의 단면과 산적한 여러 문제에 대한 사회적 접근을 어느 정도나마 체험하고 이해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 느껴졌다. 안드레이 쿠르코프 작가의 다른 작품들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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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스바루>를 읽고 리뷰해주세요.
굿바이, 스바루 - 뉴욕 촌놈의 좌충우돌 에코 농장 프로젝트
덕 파인 지음, 김선형 옮김 / 사계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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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덕 파인이라는 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뉴욕 토박이로 도미노 피자와 맥도널드의 세례를 받으면서 십수년간 신문기자로 세계를 누비며 활약하던 저자가 어느 날 갑자기 친환경, 탄소 중립 시민으로 유기농 농사를 짓겠다고 뉴멕시코의 깡촌 펑키 뷰트 목장에 등장했을 때 조금은 황당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기름 잡아먹는 하마인 자신의 애마 스바루 대신 탄소 시민에 제격인 폐식용유로 가는 자동차를 타겠다고 결심한 순간은 더더욱!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자동차인 스바루는 미국식 생활방식의 상징이다. 게다가 덕 파인은 대형할인점인 월마트에서 파는 전기구이 통닭에 환장한다. 다시 말해, 화석 연료를 태우며 도로를 질주하고, 패스트푸드 음식의 길들여진 온라인 세대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깡촌에 내려가서 국가가 친절하게도 제공하는 전기 송전을 거부하고, 유전자 조작으로 풍성한 식탁 대신 갖은 고생 끝에 자신이 직접 재배한 유기농 식품들을 먹을 궁리를 했단 말인가. 아 참, 홍수와 우박 같은 자연재해도 빼먹지 말아야겠다.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미국식 유머에 갖가지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스들을 동원해서(번역하면서 친절하게도 주해를 달아준 김선형 씨에게 감사드린다), 어떻게 보면 전혀 낭만적이지 않고 문명의 이기가 주는 편리함 대신, 불편함과 경제적 효용에 대한 제고 사이에서 고민하는 도시문명인의 고뇌를 적절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게다가 기초대사에 필수적인 단백질마저 자급자족하겠다고 어렵사리 수배해서 구한 판 시스터즈(염소 두 마리)는 호시탐탐한 덕 파인이 애지중지하는 장미 넝쿨에 눈독을 들인다. 공중에서는 이웃에 둥지를 튼 빨간꼬리매가 작가의 달걀 공급책인 닭과 병아리들을 채가고, 육상에서도 포식자 카이요리(코요테)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의 닭들을 노리는 위기상태가 계속된다.

이런 난관 가운데, 앞으로 2년간 자급자족 경제를 이루겠다는 작가의 노력은 가상하기만 하다. 이 책 초반부의 키워드는 ‘배움’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이가 어떻게 해서 농촌경제 공동체에 일부가 되는가,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시행착오와 비용을 써가면서, 그렇게 덕 파인은 한 가지씩 차례로 배워 나간다. 아무 생각 없이 입에서 아삭거리는 칠레산 사과들이 뉴멕시코까지 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과정과 화석 연료의 연소가 필요한 걸까. 게다가 유전자 조작으로 재배된 토마토는 수천 마일을 날아 혹은 달려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물러지지가 않는다. 우리는 왜 이런 본질적인 현상에 대해 무관심하고 그저 손쉽고 싼 먹거리들의 구매에만 관심을 두는 걸까.

태양열이나 풍력 혹은 지열 같은 대체 에너지원들이 있음에도, 우리의 화석연료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지고 있다. 어느 순간, 그 에너지 공급이 차단되거나 혹은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게 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보다 한발짝 앞서 이런 여러 문제에 심각성을 깨달은 덕 파인은 자신이 직접 친환경적이면서도 탄소 시민으로서의 의무에 눈을 뜨고, 뉴멕시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선구자적인 삶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좌충우돌 덕 파인의 펑키 뷰트 목장 체험기는 계속되고 있다. 책 뒷부분에 수록된 웹사이트 목록에서 가장 먼저 그의 개인 홈피에서 현재진행형인 그의 모험을 훑어 봤다. 에필로그를 통해 덕 파인은 여러 가지 친환경, 유기농 탄소 시민의 5가지 실천적 과제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의 6번째 교리로,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왜 자연을 보호하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바이오 연료를 사용하면서 탄소 배출을 억제하며 친환경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반드시 절대적으로 숙지하고 이해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우리는 아주 가끔 친환경주의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인식은 하고 있으면서도, 편리함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부터라도 승용차를 타고 출근하는 대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야겠다. 이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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