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함이 번지는 곳 벨기에 In the Blue 2
백승선 / 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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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맙소사, 책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벨기에는 다른 나라를 침략한 역사가 없는 나라다”라는 글을 보면서 이 책의 작가의 역사의식 부재에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벨기에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맙소사!!! 작가는 벨기에가 19세기에 아프리카 콩고에서 저지른 악랄한 식민제국의 역사를 정녕 모르고 한 말일까? 전 페이지에서 봤던 달콤해 보이는 초콜릿 맛이 한 순간에 다 달아나 버렸다.

책을 읽기 전에 작년에 접했던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편을 보고서 가지고 있던 작가들에 대한 호의가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어쩌랴, 먹먹한 마음을 가지고 푸르른 일러스트가 빛나는 책장을 넘긴다.

책의 벽두에서부터 흥분한 나는 벨기에의 매력인 노이하우스 초콜릿과 파란색 스머프를 보면서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파리나 로마 혹은 베를린 같은 유럽의 대도시들은 가보면서 왜 벨기에에는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이웃 네덜란드만 해도 고흐로 대변되는 이름난 화가들과 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이라는 매력적인 장소들이 있건만, 그 이웃나라 벨기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하나씩 벨기에에 대해 배워간다. 색소폰도 벨기에 사람 아돌프 삭스가 발명했다나.

여행의 재미 중의 하나는 바로 먹거리다. 여행에서 별난 먹거리가 빠진다면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벨기에에는 무슨 먹거리가 있을까? 바로 와플이 있다. 요즘에는 우리도 거리에서 흔하게 와플을 먹을 수가 있지만, 역시 와플의 본고장 브뤼셀에 왔으니 작가도 먹지 않고, 또 글로 쓰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었겠지. 작년 여름에 홍대 근처에 벨기에 사람이 직접 운영한다는 와플 집에 갔을 적에, 우리가 말하는 와플은 벨기에 와플이 아니라 리에주 와플이라고 했는데 다시 한 번 책에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렇군!

<달콤함이 번지는 곳, 벨기에>가 브뤼셀 다음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곳은 우리에게는 <플란더스의 개>로 유명한 안트베르펜이다. 난 그런데 왜 이 어색한 이름보다, ‘앙베르’라는 프랑스식 이름이 더 마음에 드는 걸까? 발음하기가 불편해서일까? 난 앙베르라고 부르련다. 네덜란드에 고흐가 있다면, 벨기에에는 루벤스가 있다(맙소사,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루벤스가 아니라 ‘후벵스’란다!). 루벤스의 걸작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가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안트베르펜이라는 도시 이름의 근원이 된 전설과 맞물려 있는 브라보 동상은 앙베르에 가게 되면 꼭 봐야할 명소라고 넌지시 알려준다. 어려서 그렇게 죽어라고 봤던 <플란더스의 개>의 배경이 되었던 바로 그 노트르담 대성당, 네로와 파트라슈의 고향이 바로 앙베르였단 말이지?

브뤼셀과 앙베르를 지나 독자를 인도하는 곳은 세 번째 기착지 브뤼헤다. 운하의 도시라는 명성이 부끄럽지 않게 어딜 가나 물을 볼 수가 있는 곳, 브뤼헤. 확실히 앙베르 같은 대도시하고는 사이즈가 다른 중소도시다. 사실, 대도시를 꺼리면서도 교통과 숙박의 편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도시를 찾게 되는 여행자들에게 이런 도시는 어떤 매력으로 다가올지 궁금해졌다.

프랑스의 아비뇽, 이탈리아에 아시시가 있다면 벨기에에는 중세 도시의 숨결을 여전히 지닌 브뤼헤가 있다! 역시 운하의 도시답게, 운하를 도는 보트 투어가 보인다. 수백 년 전의 건물과 거리를 보존하고 있는 브뤼헤를 보면서, 가장 우리다운 것이 세계적인 관광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비웃듯 날마다 새로움이 더해지는 도시 우리의 서울이 떠올랐다. 파리나 뉴욕, 도쿄 같은 대도시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거대한 구조물은 편리라는 문명의 이기 외에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마지막 일정은 벨기에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겐트다. 얼마나 작은 도시인데 두 시간이면 족히 다 둘러볼 수가 있단다. 왠지 자전거가 잘 어울리는 도시 겐트는 15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한다. 작가는 방문 도시의 인포메이션 센터를 꼭 들른다. 나도 그처럼 그 도시의 공짜 지도를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그 도시의 첫인상을 좌지우지하는 모양이다. 그전에 들른 브뤼헤에서는 0.5유로를 내고 지도를 샀다는 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까짓 지도 하나쯤 거저 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가난한 나그네의 헝그리 정신은 어딜 가도 바뀌질 않는 모양이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백승선, 변혜정 듀엣의 다음번 “번지는 곳”은 어디가 될지 참 궁금해졌다. 전작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에서 유럽 변방을 소개해 줬다면 이번 <달콤함이 번지는 곳, 벨기에>에서는 유럽의 복판에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벨기에의 이모저모를 선보여 주었다. 다음번에도 유럽일지,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소개해 줄지 기대가 부푼다. 아, 그리고 별점은 응당 5개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초반에 등장한 역사의식의 부재로 한 개를 과감하게 뺐다. 다른 건 그냥 넘어갈 수 있어도 역사 왜곡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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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피크닉 민음 경장편 2
이홍 지음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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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민음사에서 경장편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두 번째 책인 <성탄 피크닉>을 읽었다. 이홍 작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프로필로 실린 사진을 보면서 빼어난 외모만큼이나 글도 그런지 궁금했다.

소설의 얼개는 은영, 은비 그리고 은재 삼 남매를 통해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아울러 작가는 공간적 배경으로 대한민국 욕망의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강남을 내세운다. 그리고 주된 시간적 배경은 2009년 11월의 어느 날부터 해서 지난해의 성탄절까지. 강남과 성탄절이라 왠지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가.

최근 우리나라 소설 주인공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되는 취업난으로부터 은영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일류대 졸업반인 그녀는 좋은 학벌에도, 생존을 위한 직장을 구하는 데 있어 악전고투 중이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근검절약을 신조로 삼는 언니 은영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은비는 사실상 <성탄 피크닉>을 이끌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큰 사건을 잉태한 실제적인 주인공이다. 마지막 그녀들의 남동생인 은재는 학교 빼먹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외톨이 청소년의 초상으로 다가온다. 은재는 어이없게도 이웃집 607호에 사는 아기엄마 인주와 그렇고 그런 사이다.

이 세 명의 주인공들이 하나씩 큼지막한 짐을 들고 어디론가 헤쳐 모여를 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홍 작가는 플래시백이라는 아주 유용한 기법으로,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은영 가족이 어떻게 욕망과 소비 1번지 압구정동에 둥지를 틀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은영 가족이 로또에 당첨돼서 강남으로의 진입에 성공했고 엄마는 홍콩으로 그리고 아버지는 이혼해서 딴살림을 나게 되었다는 가족사를 관통한다.

자신들이 어렵사리 구한 서식처에 영주권을 얻기 위해 좋은 학벌로 무장한 은영은 번듯한 직장을 구걸하러 다닌다. 한편, 그녀와는 달리 은비는 진학도 그렇다고 생활전선에 뛰어들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부유한 지희와 어울려 다니면서 유흥과 쾌락을 즐긴다. 그럼 그 유흥비는 어떻게 조달하냐구? 클럽에서 만난 12명이나 되는 킹카오빠들을 삥 뜯는다! 참고로 그녀에게 성윤리 이런 건 묻지 말지어다. 막내 은재는 세상만사에 심드렁하다. 가족의 리더 은영은 그의 그럼 무심함이 은비의 무책임한 행동보다도 더 무섭게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삐걱대는 가족관계에 큰 우환이 닥치게 된다. 말썽꾸러기 은비의 킹카오빠 중의 한 명이 다짜고짜 그들의 보금자리로 쳐들어오게 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과부하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과연 이들은 이 잔혹한 성탄절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성남에 귀퉁이에 살던 은영 가족의 강남 입성 스토리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하긴 우리가 살고 있는 헌 세태가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욕망의 뻥튀기라고 할 수 있는 로또를 통해 당당하게 꿈에 그리던 공간으로 이동하는 은영 가족. 하지만, 강남이라는 낯선 공간이 그들의 삶을 빨아들이는 개미지옥화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강남이라는 욕망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에 큰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은영이나 은비 혹은 은재 같은 캐릭터들의 묘사는 소설적 클리셰(cliche)에 가깝다. 최근 출간되는 소설에 나오는 고만고만한 인물들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드코어 물을 발표해내는 편혜영 작가의 그것에 비하면, 엽기적인 살인이라는 소재에도 충격적 효과가 떨어진다고나 할까. 연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꽃보다 남자>의 F4를 연상시키는 집단인 “카프”의 존재는 그들만의 리그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포장되어 있다. 일신의 영달과 강남 영주권을 위해서라면 이런 급박한 위기 가운데 가족마저도 뒷순위로 밀리게 되는 냉혹한 현실을 날로 드러낸다.

북글을 통해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많았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 그런 것들이 모두 휘발해 버렸는지 마음이 헛헛하다. 아마 기대한 만큼 글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아서였을까? 아쉽다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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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을유세계문학전집 17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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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당혹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이젠 이런 종류의 책들도 나오는 건가? 하도 뉴라이트라는 사이비 단체들이 준동하다 보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책을 집어 들어, 살펴보니 나의 그런 걱정은 기우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가 있었다. 우려한 대로 나치 문학을 찬양하거나 기록으로 다룬 책이 아니라 전혀 그 반대의 성격이었다! 칠레 출신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실재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들에서 있었음직한 일들을 가공의 인물들에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어우러지는 블랙 유머를 가미해서 창작해낸 멋진 소설이었다.

칠레 출신으로 삶의 대부분을 멕시코와 스페인에서 보냈다는 로베르토 볼라뇨는, 20세였던 1973년 자신의 조국 칠레로 돌아간다. 한 때 트로츠키주의자이었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지지자였던 볼라뇨는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부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가 실각하면서 8일간의 감금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멕시코로 돌아갔다고 한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정부를 연상케 하는 칠레의 파시스트 군부가 적법한 선거에 의해 구성된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를 몰락시키는 장면을 현장에서 본 볼라뇨의 심정은 어땠을까?

특히 라틴 아메리카는 2차 세계대전 후, 나치 전범들의 천국이 아니었던가. 실제로 나치 전범이었던 아이히만과 멩겔레가 남미에서 도피생활은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후 거의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파시스트 군부 독재가 횡행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심지어는 파시스트 우익들의 우상인 히틀러가, 1945년 베를린 포위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남미에서 제4제국을 세우려 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현상의 비꼬기를 아주 좋아한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로베르토 볼라뇨의 책의 중심에는 역사인물사전 양식을 취하면서, 가공의 30명의 시인, 소설가 그리고 편집자를(모두 나치거나 혹은 극우주의자들)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비꼬기가 자리 잡고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력한 가문 출신의 여류작가는 어려서 히틀러와 같이 찍은 사진을 그야말로 신줏단지 모시듯이 한다. 콜롬비아 출신의 열혈 우익 청년작가들은 아예 히틀러의 SS 의용사단에 적을 두고, 아리안 전사로써 소련과 대결했던 동부전선에서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샤를마뉴 사단이나 혹은 아르덴 전투에서 명성을 날린 파이퍼 여단 등에 대한 언급은 작가의 뛰어난 역사적 통찰력을 선보여 주고 있었다.

멕시코 출신의 여성지식인은 자신의 신념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남자와 만나 평생을 지지고 볶는 삶을 산다. 숱한 이별과 재결합을 반복한 그들이, 파시스트 프랑코가 마드리드를 폭격하던 순간 손버릇이 고약한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폭행하는 것은 희비극의 극치였다. 아이티 출신으로 도저히 작가라고 부를 수 없었던 막스 미르발레의 상상을 초월하는 표절 행각의 행진 앞에서는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꼴통들의 행진에 미국 출신 인사들도 빠질 수가 없었으니, 강철 도시(피츠버그) 출신의 얼치기 시인 로리 롱은 종교적 투신을 통해 사이비 종교의 교주로 활약하면서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남발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로버트 해리스의 <당신들의 조국>의 플롯을 연상시키는 미국 버지니아 출신의 작가 해리 시벨리우스의 <욥의 친아들>은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전에서 승리하고 일본과 함께 미국을 협공해서 마침내 전 세계를 제패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소설을 지어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히틀러의 제3제국과 라틴 아메리카 독재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롤모델로 삼았던 스페인의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의 망령을 곳곳에서 볼 수가 있었다.

2003년 간질환으로 50세에 자신의 커리어 정점에서 삶의 방점을 찍어 버린 로베르토 볼라뇨는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통해, 자신의 뛰어난 글쓰기의 창조적 재능을 보여 주고 있다. 물경 30명에 달하는 다양한 파시스트 인물들을 창조해낸 것도 그렇지만, 책의 뒷부분에 달아 놓은 에필로그와 단행본 등의 저서에서 보이는 정교함은 정말 대단했다. 게다가 볼라뇨는 이 책의 소재로 나치 문학과 그 문학을 창조한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전후 프랑스의 숙청과정에서도 보이듯이 인간의 영혼에 관계하는 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다.

책의 곳곳에서 그의 블랙 유머와 비꼬기가 작렬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로베르토 볼라뇨는 다소 냉소적이긴 하지만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그의 블랙 유머가 빛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던 칠레의 작가는 우리의 곁을 떠나 영면의 방랑에 들어갔지만, 그가 창조해낸 멋진 작품을 뒤늦게나마 만날 수 있게 돼서 너무나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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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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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읽은 유시민 선생의 <청춘의 독서>를 통해 읽을 결심을 했다. 항상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하고,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이 헷갈리곤 했는데 이번에 읽으면서 확실하게 구분하게 됐다. 리뷰에 앞서, 러시아 소설을 읽으면서 항상 하는 고민이지만 주인공들의 이름을 외우기가 너무 어렵다. 게다가 긴 이름을 마샤, 쉬바브린, 뻬뜨루샤 혹은 로쟈라고 줄여 부르는데 더 헷갈리기만 한다. 나의 독서노트에 주인공 이름표를 정리할 생각도 잠깐 했었다.

<대위의 딸>은 우리에게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 출신의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물론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걸출한 소설도 있지만, 굳이 분류를 하자면 이 소설은 운문소설에 들어간다고나 할까.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프랑스어 가정교사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운 뿌쉬낀은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덕분에 귀족다운 환경 가운데 자라났다.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일단의 러시아 청년 장교들의 조직이었던 데카브리스트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농노제와 차르의 지배가 횡행하던 19세기 러시아에서 자유로운 영혼 뿌쉬낀의 활동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뿌쉬낀은 나이 38살 나던 해에 결투 끝에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30대에 요절한 뿌쉬낀이 죽기 2년 전에 발표한 <대위의 딸>은 뿌가쵸프의 반란(1773~1775)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뾰뜨르 안드레이치 그리뇨프(뻬뜨루샤)라는 퇴역 장교 출신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으로 16세가 되자,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오렌부르그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장교로 복무하러 떠나게 된다. 뾰뜨르 안드레이치의 사이드킥이라고 할 수 있는 마부 사벨리치와 길을 가던 중에 눈 폭풍을 만난 그들은 정체불명의 사나이의 도움을 받기에 이른다. 젊은 뾰뜨르 안드레이치는 길을 안내해준 허름한 차림의 농부에게 토끼 가죽 외투를 선물한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사건이 훗날 그의 목숨을 구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버지 안드레이가 청탁을 한 오렌부르그 주둔 사령관은 귀족 출신의 장교 후보 뾰뜨르 안드레이치를 외진 요새 벨로고르스끄로 전출된다. 여기서 주인공 뾰뜨르 안드레이치는 요새 사령관 미로노프 대위와 그의 아내 바실리사 예고브로나 그리고 그들의 딸 마리야 이바노브나(마샤)와 만나게 된다. 자, 이제 <대위의 딸>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모두 소개가 되었나? 아니다, 결투로 사람을 죽인 죄로 이 오지 요새로 쫓겨 온 쉬바브린을 빼먹었다. 쉬바브린은 뾰뜨르 안드레이치의 친구이자 연적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강력한 적으로 변신을 거듭하게 된다.

젊은 청년 뾰뜨르 안드레이치와 아리따운 매력의 아가씨 마샤가 만났으니 그다음 이야기는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 그 둘 사이의 로맨스가 피어나고 소설의 중반까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들의 사이를 시샘하는 쉬바브린과의 결투로 뾰뜨르 안드레이치는 오른쪽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을 위협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외부에서 터지게 되는데 바로 <뿌가쵸프의 반란>이 그것이다.

실제로 뿌쉬낀은 니콜라이 1세 황제 치하에서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인 예까쩨리나 시대에 일어났던 뿌가쵸프의 반란을 조사할 기회를 얻었었는데,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그의 시선이 <대위의 딸>에 잘 표현되어 있다. 로마노프 왕실의 러시아 출신 차르들은 서유럽에서 진행된 정치혁명과 산업혁명에 자극을 받은 일단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러시아 제국의 발목을 잡고 있던 농노제와 기득권층의 지배를 영속화하는 반동정치를 일삼고 있었다. 이런 사회구조적 모순에 불만을 품은 야이끄 까자끄들이 뿌가쵸프의 영도하에 결집을 해서 러시아 제국을 뒤흔든 일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뾰뜨르 안드레이치와 마샤의 알콩달콩한 사랑은 이 황제를 스스로 칭하는 산적두목 같은 뿌가쵸프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뿌가쵸프 일당은 뾰뜨르 안드레이치가 수비하고 있던 벨로고르스끄 요새를 단숨에 함락시키고, 미로노프 대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일단의 장교들을 처형한다. 자, 과연 이 전란의 위기 속에서 뾰뜨르 안드레이치와 마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결말이 궁금한 독자들은 책을 한 번 읽어 볼지라.

차르의 검열이라는 혹독한 시련에 맞서, 뿌쉬낀은 자신이 만들어낸 러브스토리와 뿌가쵸프의 반란이라는 얼개를 맞추는데 많은 공을 들인 흔적이 <대위의 딸>에 자주 보인다. 역사적 사건과 픽션의 결합이라는 매혹적인 구성에 소설의 재미는 배가 된다. 16세의 소년에서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조국과 명예를 생각하게 되는 청년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뾰뜨르 안드레이치의 모습에서 성장소설의 단면을 느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다른 여타의 러시아 소설보다 지극히 짧은 편인 뿌쉬낀의 이야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장황하게 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소설가의 역량이겠지만, 짧은 분량 속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는 것도 또한 걸출한 재주가 아닐까?

마치 자신이 쓴 소설을 타인의 이야기에 비춰 차르의 검열을 피하려는 뿌쉬낀의 눈물겨운 노력에 2세기 전을 살았던 작가의 비애가 느껴지기도 했다. 번역을 맡은 석영중 교수가 캐릭터 분석을 보면, 황제를 참칭하면서 반역을 도모한 뿌가쵸프나 남편을 제위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직접 러시아를 철권통치했던 예까쩨리나 여제는 이미지는 다를 게 없다는 말이 나오는데 전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영화 <300>에서 “나는 관대하다”라는 말을 했던 크세륵세스의 대사를 떠올릴 것도 없이 두 실존 인물 모두 주인공 뾰뜨르 안드레이치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권력가의 모습으로 소설에서 나오고 있다. 뾰뜨르 안드레이치는 살기 위해서라면 어느 쪽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그의 목숨을 건 도박은 언제나 이기는 패였다.

적진에 남겨 두고 온 마샤의 안위를 걱정하며, 특공대를 조직해서 뿌가쵸프 반란군이 득시글대는 벨로고르스끄 요새로 달려가겠다는 뾰뜨르 안드레이치의 모습에서 아내의 명예를 위해 결투를 벌이다 결국 죽음에 다다른 뿌쉬낀의 그림자를 엿보게 된다. 사랑에 눈먼 피 끓는 젊음은 그만큼 맹목적일 수밖에 없었나 보다.

2010 고전읽기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읽던 고전을 읽고 나면 수중에 더 읽을 고전이 있나 하는 고민을 했었는데 워낙에 쟁여둔 책들이 많아서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다음 도전 작품이 도끼의 <죄와 벌>이냐 아니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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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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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발자크와의 첫 만남은 2007년 5월 23일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였다. 난 당시 마리아 칼라스의 묘역을 찾고 있었고, 우연히 발자크의 묘역을 찾는 어느 미국 여인을 따라 발자크의 묘지로 발걸음을 옮겼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 묘지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는데,  그 사진을 2010년 벽두에 만난 발자크의 <나귀 가죽> 리뷰에 담게 됐다.

사실 최근 들어 책 좀 읽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발자크나 스탕달 같은 프랑스 고전 작가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끝없이 책을 읽다 보니 다시 고전, 클래식으로 회귀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나의 신년 프로젝트는 고전읽기로 지난주에 읽은 스탕달의 <적과 흑>에 이어, 이번에 국내에 초역되었다는 발자크의 <나귀 가죽>을 악전고투 끝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지금은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을 읽고 있다.

오늘 출근길 전철 안에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떤 식으로 리뷰를 풀어나갈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작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다.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와 발자크의 소설 <나귀 가죽>의 주인공 발랑탱 드 라파엘에게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주는 “나귀 가죽”은 마치 기호학에서 말하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처럼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아니 어쩌면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섬망(譫妄)으로.

고전읽기라는 미명에 현혹돼서 야심 차게 도전했던 나의 발자크 읽기는 절반 정도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솔직히 자수하자면, 책을 다 읽고 나서 역자인 이철희 선생이 책의 뒷부분에 달아준 해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소설의 원제에 등장하는 chagrin은 가죽이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근심’이라는 다른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책을 읽을수록 그 이유가 절절하게 이해가 됐다.

도박장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재산인 20프랑짜리 금화를 잃은 우리의 주인공 발랑탱은 때 이른 삶의 종결을 준비한다. 그러던 차에 볼테르 강변 가에서 우연히 들른 골동품상에서 만난 신비스러운 노인으로부터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나귀 가죽”을 받아 들고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난다. 발랑탱의 첫 번째 소원은 호화찬란한 야회(royal banquet)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친구 에밀에게 자신의 성장 스토리를 비롯해서, 어떻게 자신이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는가, 페도라 백작부인과의 쓰디쓴 실패한 연애담, 소설에서 중요한 사이드킥으로 등장하는 라스티냐크와의 만남과 이어지는 방탕한 생활에 그야말로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이야기들을 뿜어낸다.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아들 발랑탱을 정치가로 만들려던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스무 살의 발랑탱은 일탈과 탈주를 꿈꾼다. 한술 더 떠서, 아버지의 돈을 훔쳐 훗날 자신을 물질적 파산으로 몰고 가게 되는 도박의 세계에 빠져든다. 평민 출신이었던 발자크의 출세와 입신양명에 대한 조롱이라고나 할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진 라파엘은 자발적 가난과 학문적 성찰의 세계를 탐닉하기도 한다. 그 가난 중에 만난 14살난 폴린과의 관계는, 단테 알리기에리와 베아트리체의 그것처럼 운명적 사랑을 예고하기도 한다.

2부 <무정한 여인>에서 발랑탱이 온 정성을 다해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백작 부인 페도라에 대한 섬망(譫妄)은 스탕달의 <적과 흑>에 나오는 문제적 청년 쥘리앵 소렐의 페르바크 부인에 대한 연모나 혹은 피에르 쇼데르로스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발몽 후작의 마담 드 투르벨에 대한 끈질긴 욕망으로 다가온다. 페도라에 대한 눈물겨운 발랑탱의 구애는 결국 실패하지만, 라스티냐크의 도박판에서의 대성공으로 방탕한 생활에 접어들게 된 발랑탱!

사실 개인적으로 <나귀 가죽>이라는 제목에서 근대 버전의 재밌는 우화를 예상했지만, 발자크는 나의 그런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린다. 기대한 내러티브 대신 장황하기 짝이 없는 발랑탱의 썰로 나 같은 수준 이하 독자의 기를 대번에 꺾어 놓는다. 게다가 1830년대 시대상을 담보한 발자크의 신랄한 패러디와 정교한 묘사는 정말 역자의 주석 없이는 전진을 불가하게 만들고 있었다. 짧지만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던 그의 삶에 대한 파노라마가 독백 형식을 빌린 기나긴 하소연을 뚫고 나오니 드디어 “나귀 가죽”과 ‘소원을 말해봐’라는 기대한 신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의 나귀 가죽의 힘을 빌려 발랑탱은 콜카타에 있는 외삼촌으로부터 600만 프랑이라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아 거부가 된다. 한 때 겸손한 학자이자 문필가의 꿈을 꾸던 청년 발랑탱이 물질적 풍요로 말미암아 점점 방약무인하게 된다. 그를 찾아온 스승 포리케 선생에게 모욕을 주고 쫓아내고, 자신이 한때 그렇게 사랑한다고 믿었던 페도라에게 경멸을 시선을 보내며 성공한 부르주아지로 거듭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런 발랑탱에게서 가장 부러웠던 점은 그의 충직한 집사 조나타의 오만가지 업무 중에서 새로 나온 책을 지체 없이 대령해주는 것이었다. 책 좀 읽는 이들의 꿈이 아닐는지.

이 책과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 중의 하나는 도대체 19세기 프랑스의 연금제도가 어떻게 운용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었기에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이들이 연금 타령을 그렇게 해대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한편,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나귀 가죽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나귀 가죽의 주인 발랑탱의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크기만큼, 줄어드는 발랑탱의 수명, 다시 말해서 죽음이었다. 중세 이래 예술과 문학에서 주요한 소재로 사용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발자크의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시간의 낫질을 하며 주인공을 위협한다. 부유한 병자 특유의 괴팍함으로 무장한 발랑탱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철저한 이기주의자로 변한 추레한 그의 모습이 처량하기만 했다. 그는 이탈리아 극장에서 자신에게 불행과 행복의 숙명적 선물인 나귀 가죽을 안겨준 예의 골동품상에서 만난 노인, 페도라 그리고 미지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이 미지의 여인과의 만남에 대한 발자크의 묘사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특히 생캉탱 여관에서 이 여인의 오랜 짝사랑에 대한 번민과 슬픔 그리고 고통을 모두 씻어주는 발랑탱의 키스란...

소설 <나귀 가죽>의 보편적 이해를 위해서, 1830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1815~1830년의 왕정복고 시대는 혼란 그 자체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급진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왕당파 등 온갖 정치세력들이 준동하는 가운데, 토지경제에 근거했던 프랑스는 비로소 산업혁명의 세례를 받게 된다. 왕정복고를 기도하던 귀족세력과 물적 토대 위에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떠오르던 부르주아 계급과의 일대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발랑탱이 처음 소원했던 야회에서, 두서없이 끝없이 계속되는 논전에 대한 발자크의 묘사는 당시 극도의 혼란에 빠진 시대상의 발현이었다.

소설에서 극히 중요한 시간적 사건으로 등장하는 1830년 7월혁명의 이해를 위해 마르크시스트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를 들춰 보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글에 의하면 7월혁명은 귀족세력의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명백한 패배였고, 대부르주아지가 지배계급으로 나서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한다. 당시 과격한 정치혁신은 노동계급의 독자세력화와 민족주의 운동 출현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아울러 홉스봄은 예의 책에서 “발자크의 <인간희극>은 완벽하게 사회적 관심의 한 기념비”(혁명의 시대, 474쪽, 한길사, 1998)였다고 기술했다. 위대한 역사가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니 발자크의 소설이 갖는 시대정신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됐다.

<나귀 가죽>은 발자크 평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극> 총 89편 중의 하나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등이 있는데 시간이 되는 대로 발자크의 문학을 하나씩 접해볼 계획이다. 어렵긴 했지만, 시대정신을 담고 있으면서도 2세기가 흐르고 나서도 여전히 그 보편적인 광휘를 잃지 않는 발자크의 <나귀 가죽>과 만날 수가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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