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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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게 세운 2010년 고전읽기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러시아 문학계의 거장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하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그야말로 귀에 목이 박히게 들어왔지만, 정작 제대로 그들의 작품을 읽은 적은 없는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물론이고,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서도 단편선 정도를 읽었던 게 전부인 것 같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버전 중에서 지난해 말 문학동네에서 야심차게 발간한 세계문학전집의 그 첫 번째를 장식하는 <안나 카레니나>는 모두 3권 8부로 구성이 되어 있다. 번역도 러시아 문학이라면 국내에서 자타의 인정을 받는 박형규 교수가 맡아 주셨는데, 러시아국가연방훈장에 빛나는 그의 경력에 믿음이 가는 정전(正傳)을 기대해 보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는 동료 러시아 작가인 도스토옙스키는 역사상 “완전무결”한 작품이라고 칭찬을 했다는 책의 뒷날개 카피에 그만 구미가 동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작가로서 자존심도 접고 극찬을 했는지 말이다. 거장의 묵직한 3부작에 드디어 그 첫발을 내딛는다.

그 유명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문구로 <안나 카레니나>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 단위인 가정의 기저를 파고든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사는 스테판 아르카디이치 오블론스키(스티바)의 불장난으로 다복해 보이던 오블론스키 집안에 평지풍파가 일어난다. 쉬체르바쓰키 공작의 큰 딸인 돌리는 남편의 외도에 그간 참아왔던 분노를 폭발시킨다. 무려 아이가 5명이나 있지만, 스티바의 관심은 아내 돌리와 아이들이 아니라 독신자로서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편, 스티바의 친구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레빈은 대도시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 대신 시골인 포크로프스코예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조용하게 살고 있다. 한 때, 지방의회에도 참여했으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개혁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자유주의적인 사고에 따라서 보다 개인주의적인 처지에서 농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레빈은 돌리의 막냇동생인 키티를 짝사랑한다. 스티바와 레빈은 친구지만, 자신의 가정교사를 사랑한 불륜남과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처녀를 사랑하는 짝사랑남만큼이나 큰 괴리감을 토로한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18세의 키티는 레빈에 대해서도 호감을 느끼고 있지만, 그녀가 정말 사랑하는 남자는 바로 궁정 무관 출신의 브론스키 공작이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브론스키에 비하면, 레빈의 처지는 그저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정숙한 외모와 우아하고 자유로운 동작의 키티에 대해 자신만의 공상 속에서 시적 아름다움의 단계로까지 승화시켜, 자신의 마지막 힘까지 짜내 힘겹게 청혼했던 레빈은 자신의 연적 브론스키의 등장으로 키티에게 완곡한 거절을 당하고, 참담하게 물러난다.

러시아 호남자의 상징처럼 다가오는 브론스키는 사실 키티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 결혼의 의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화려한 사교계의 연애만을 즐기고 싶은 브론스키는 자신의 어머니를 마중하러 기차역으로 나갔다가 주인공 안나 아르카디예브나 카레니나(안나)와 파멸의 그림자를 드리운 운명적 첫 만남을 갖는다. 훗날 걷잡을 수 없는 열정으로 인해 타오르게 되는 사랑의 단초가 되는 이 만남은 소설의 결정적 동인으로 작용한다.

오블론스키 집안의 “사랑과 전쟁”을 진화하기 위해 투입된 구원투수 안나는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낸다. 역시 8살 난 아들을 데리고 있는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안나는 자신의 올케를 잘 설득해서 백척간두에 서 있던 가정의 위기를 어설프게나마 봉합한다. 오랜만에 모스크바 사교계에 나온 안나는 곧이어 초대받은 무도회에서 키티가 사랑하는 브론스키 공작을 독차지함으로써 이번에는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안나와 브론스키의 행복은 키티의 불행으로 귀결된다.

무서운 속도로 치닫던 소설의 전개는 순간 숨을 고르면서, 레빈의 형인 니콜라이의 얘기를 슬쩍 끼워 넣는다. 한 때 신앙심 깊은 수사의 삶을 살던 니콜라이는 타락과 방탕의 길에 들어서면서 수상쩍은 행동을 일삼는다. 자본주의를 타격하라는 주장을 하면서, 경제 조건을 개혁하라는 공산주의자의 주장에 동조하기도 한다. 니콜라이를 방문하고서, 실연의 상처를 안은 채 포크로프스코예로 돌아온 레빈은 여전히 아름답고, 신성하며 이상적인 부인상을 꿈꾸며 고향집의 부흥을 꿈꾼다.

한편, 모스크바에서 브론스키와의 운명적 만남 끝에 안나는 결국 자신의 남편인 알렉세이 안드로비치가 기다리는 페테르부르크로 도망치듯 달려온다. 하지만, 그 기차 안에서 다시 브론스키를 만난다. 브론스키의 안나에 대한 고백은 그녀의 가슴에 일대 파문을 던진다. 이어 안나는 알렉세이와의 결혼생활이 사랑 없이 불만,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마음속으로 선언한다. 페테르부르크에 몰아치는 눈보라는 안나의 험난한 앞날에 대한 복선으로 다가온다.

2부에서는 브론스키의 안나에 대한 감정을 읽어 버린 키티가 시름시름 병을 앓게 되며, 다시 기만적인 결혼생활로 돌아온 돌리의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결국, 브론스키와 안나의 관계는 험담에 열을 올리는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화젯거리가 되고, 아내의 부정을 인정할 수 없는 노련한 정치가 알렉세이 안드로비치의 불안은 가중되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내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알렉세이 안드로비치는 분노하기에 이른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결정적 불륜 탓에 알렉세이의 사랑 없는 결혼의 종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레빈은 실연의 아픔을 딛고 농사일에 매진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레빈의 스티바는 자신의 숲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 위해 레빈을 찾아온다. 페테르부르크의 관리직에서 나오는 봉급만으로는 가족의 생활비와 자신의 유흥비를 마련하기 어려웠던 탓인지, 지방 상인의 농간에 원래 가격보다 무려 3만 루블이나 싸게 숲을 팔게 되는 스티바.

안나와 브론스키가 불륜의 끈을 놓지 않고 지속하는 가운데, 영화 <벤허>의 전차경주를 연상시키는 경마대회로 안나와 알렉세이 안드로비치의 갈등으로 치닫고 결국 자신과 브론스키의 관계를 남편에게 밝히는 안나. 이제 결정의 공은 남편에게 넘어갔고, 과연 안나의 운명을 어찌 될 것인가.

항상 하는 고민이지만, 러시아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 긴 주인공들의 이름과 그들의 애칭은 정말 혼란 그 자체다. 1권을 다 읽으면서도 여전히 주인공들의 이름은 낯설기만 하다. 우리나라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보통 삼음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 같은 보통의 독자라면 오프라 윈프리의 북클럽이 제시한 것처럼 주인공 목록 표라도 만들어서 시시때때로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걸까 싶을 정도다.

책을 읽으면서 귀족 출신의 톨스토이가 묘사하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와 풍속에 대한 사실주의적 묘사에 그만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물론, 귀족이라는 자신의 계급적 기반으로 해서 수많은 야회와 사교계의 무도회를 섭렵한 탓도 있겠지만, 대가의 섬세한 기술방식은 가히 “완전무결”이라는 찬사를 들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남성이면서도, 안나와 키티 그리고 돌리 같은 주요 여성 주인공들의 변화무쌍하면서도 복잡다단한 심층의 얼개를 기가 막히게 짚어내는 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사랑에 눈을 뜨게 된 레빈과 키티의 사랑과 실연에 아픔을 다룬 부분에서는 또 어떠한가. 도저히 인간 삶을 모두 체험하고 달관한 대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서구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점점 기존의 러시아 전통에서 벗어나 자유연애에 바탕을 둔 결혼풍속에 대한 톨스토이의 분석 또한 예리했다. 허위와 기만에 가득 찬, 결혼생활에 타격을 가하는 ‘신여성’ 안나에게 가정이라는 종래의 구속적 제도보다는 자신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사랑이 없다면 행복도 불행도 없다는 선언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그렇다고 2세기 전 노땅 작가라고 해서 톨스토이가 유머가 떨어지는가? 쉬체르바쓰키 공작 내외의 부부싸움을 읽어 보라, 어지간한 유머작가는 댈 것도 아니다(116쪽 참조). 브론스키 경마 장면의 디테일한 묘사 역시 스펙터클 그 자체였다. 이렇게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주는 톨스토이가 금세기에 영화감독이었다면 아카데미 감독상은 내내 그의 몫이었으리라.

왜 톨스토이는 혁명이나 전쟁 같이 웅대한 주제보다, 사랑과 불륜이라는 조금은 통속적인 주제를 <안나 카레니나>의 전면에 내세웠을까? 그것은 아마도 인본주의자로서 톨스토이의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탐구의 여정이 이 대작의 바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던 키티에게 톨스토이는 마드무아젤 바레니카의 모습을 통해 “자기를 잊고 남을 사랑하는 것”(438쪽)이라고 너무나도 친절하게 그 답을 주고 있다.

2권에서는 콘스탄틴 레빈을 통해 18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기저를 파헤치는 톨스토이의 사회정치적 오디세이가 펼쳐질 예정이다.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의 행로를 쫓는 나의 여정도 뒤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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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
토마 귄지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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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책 표지를 유심히 보는 편이다. 그런데 벨기에 브뤼셀 출신의 작가 토마 귄지그의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의 표지는 왠지 ‘처칠’스러워 보이는 남자의 뱃속의 풍경만을 슬쩍 본 채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책을 펴들다가 이 책에 실린 7개 이야기 중에 두 개의 매치되는 일러스트를 분별해낼 수가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차를 도난당한 것으로 진술하는 어느 다중이의 이야기(연쇄살인마에 방화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암소 여자를 데리고 사는 앙리의 그것이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40대 초반의 토마 귄지그는 어려서 난독증으로 고생했다고 하는데, 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즈음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서점에서 10년간 큐레이터로 일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현재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글을 쓴다. 공수도와 태권도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기린> 편에는 카티와 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느 부부처럼 말다툼 끝에 카티가 가출을 감행하고, 은근한 화해를 도모하던 중에 정원에 난데없이 기린의 시체가 등장한다. 이렇게 황당할 데가! 도대체 기린이 어디에서 왔는지, 무슨 이유로 해서 봅네 정원에 기린이 죽어 있는지를 작가는 불친절하게도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죽은 기린을 처리하기 위해 폴란드 출신의 일꾼 다레크를 동원한다. 한창 기린을 처리하는 봅과 다레크 앞에 나타난 카티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떠나 버린다. 그렇게 떠나 버린 카티에 대해 봅은 여성 모두에 대한 전형적인 일반화의 오류를 적용시킨다.

<금붕어>에서는 다중이 프랭크가 나온다. 자신의 르노 자동차가 끔찍한 범행에 사용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된 프랭크. 어, 그런데 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희대의 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가 떠오르는 걸? 하지만, 렉터 박사는 적어도 다중이는 아니었지, 살인에 다중인격, 심지어 자신의 차에 불까지 지르는 복잡하게 짬뽕으로 버무려진 한판 스릴러가 전개된다.

<암소> 편은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이야기 중의 하나다. 사랑의 부재에 시달리며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는 무매력남 앙리는 우연히 무료 신문 전단지에 실린 “자연스럽고 순수한 교제” 광고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수술가운을 입은 남자로부터 슬픈 표정의 젊은 여자를 인도받는다. 그녀가 ‘암소’라는 다소 황당한 말과 함께 말이다. 암소 마갈리는 앙리에게 드림걸이었지만, 수술가운을 입은 남자의 말대로 암소의 속성을 그대로 지닌 마갈리에게 앙리는 그만 질려 버리고 만다. 자신의 욕정을 채우고, 싫증 내 버리는 앙리의 모습에서 극단적 이기주의 화신의 프로토타입을 보여 준다.

<곰, 뻐꾸기, 무늬말벌, 청개구리>는 그 제목만큼이나 혼란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 브루스 리의 안락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파괴하는 일단의 삼합회 두목들의 아이콘을 제목으로 삼은 이야기에서 악당들은 브루스 리의 소득에서 세금 공제하지 않은 33%를 자신들의 몫으로 주장하면서 브루스의 아이들과 사랑스러운 부인을 차례로 인질로 잡아 갖은 만행을 저지른다. 인질범들의 악랄한 협박에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브루스의 모습에서, 한 때 ‘테러범들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라는 지켜지지 않는 원칙을 천명했던 미국 정부의 완고함이 연상됐다. 이 고집불통의 인간은 결국 폐인이 되어, 요가 지도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 브루스는 어쩌면 자신의 기가 막힌 불행에 그만 실성하거나 감각이 마비된 게 아닐까?

<썰매 끄는 개>에 나오는 35살 소심 씨는 자신의 여러 결점 중에서 소심함이라는 결정적 요인 덕분에 마이너스 인생을 살고 있다. ‘컴퓨터가 용량 부족을 호소’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야동을 모으는 소심 씨는 부족함과 바보스러움까지 장착한 나머지 해소할 수 없는 리비도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다. 핍쇼클럽에 당당하게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침마다 들르는 피에로 크루아상 분점의 ‘얼굴 찡그리는 여자’를 이상야릇한 연금술로 말미암아 사랑하게 된 소심 씨! ‘얼굴 찡그리는 여자’에게 소심 씨는 그저 신경이 거슬리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이런 소심 씨가 어떤 계기를 통해 그만 일탈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걷잡을 수 없는 그의 리비도는 폭주하기 시작한다.

토마 귄지그는 모두 7개의 이야기를 통해 남성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블랙유머를 덧입히고 있다. 때로는 작가의 꼴마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성에 대한 옴므 파탈스러운 폭언을 구사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욕망의 근저를 파헤치는 작업에 매진한다. 갑자기 등장한 다중이 프랭크의 엽기적 행각과 브루스 리를 압박하는 삼합회 두목들의 과도한 폭력행사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작가는 인간 세계를 쁘띠 주(petit zoo), 작은 동물원으로 비유하면서 이에 대한 판단은 모두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이런 일들이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작가로부터 일관된 내러티브나 남성의 심리를 속속들이 알려주는 비법을 기대했다면 아마 낭패를 볼지도 모르겠다. 에피소드는 전혀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 옴니버스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솔직히 말해서 책을 읽다가 그만 어디선가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수동적인 책읽기에 길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작가가 똑 부러지게 A=B 라는 프로토타입을 제시해 주었더라면 더 속이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단편집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으로 워밍업을 했으니, 이제 그의 첫 장편 소설이라는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을 기대해 본다. 단,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한 마무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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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나는 당신 안에 머물다 - 그리며 사랑하며, 김병종의 그림묵상
김병종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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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면서 가장 먼저 “그림묵상”이라는 단어가 나의 시신경을 파고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그림묵상 이용하기 위해서, 어느 웹사이트에 허가를 구하던 시절의 생각이 났다. 단 한 컷의 그림으로 정말 오래 시간의 여운을 남기곤 하던 그 그림묵상이란 말인가? 산뜻한 표지의 그림과는 달리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져 오고 있었다.

국민일보에 이 그림묵상 칼럼을 연재했다는 책 뒷날개의 소개 글을 보고서 바로 국민일보 홈페이지에 들러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김병종 화백은 이미 지난 2005년 5월 <바보 예수>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었다고 한다. 이 책은 모교회의 안수집사님인 작가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사부곡(思父曲)이다.

모두 네 장으로 이루어진 김병종 화백의 <오늘밤, 나는 당신 안에 머물다>는 작년 가을 국민일보에 연재됐던 북아프리카 여행기와 카리브의 바다가 보이는 풍경으로 시작한다.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교수에 재직 중인 작가가 그려내는 지중해와 카리브의 푸른 물빛이 얼마나 생생하던지 느낄 수도 없을 유화의 질감에 손을 대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느 작가와는 달리 김병종 화백의 자연예찬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지칭하는 당신 혹은 ‘그이’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된다. 어쩌면 자신이 사모하는 절대자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화폭에 붓으로 그려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2차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나치에 대항하고, 행동하는 지성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알베르 카뮈의 고향인 마그레브 여행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직접 체험한 알제리 티파사(Tipasa) 바닷가에서의 꽃 대궐의 향연 그리고 몽환적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은 정말 평생 나그네의 역마살을 자극하기도 했다.

두 번째 장에서부터 본격적인 자신의 종교관에 대해 밝히기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시골마을인 나사렛의 목수였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김병종 화백은 바보로 그리고 있다. 세상 모든 권세보다도 더 위대한 메시아를 바보로 부르는 것은 역설 그 자체였다. 골고다에서 구속사를 마무리 지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다른 동물도 아닌 나귀를 타고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길을 좇는 글과 그림들이 이어진다.

낯선 이국의 아름다움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리고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한 김병종 화백은 마지막 장에서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 내면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조선의 물도리동네 하회마을 그림에서 아주 오래전 답사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봤던 하회마을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림에 달린 해설들을 보다가,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주목하게 됐다. 동양화가라고 한다면 보통 화선지를 떠올리기 십상인데 김병종 화백은 특이하게도 골판지 위에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재료와 ‘바보’ 예수라는 그림의 소재는 묘한 동조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구의 유명한 성당에 걸려 있는 위엄으로 가득한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우리네 삶의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있는 친근한 서민의 모습이야말로 이천 년 전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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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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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파주 헤이리에 있는 서점 북하우스에 들렀다가 안 그래도 한 번 읽어 보고 싶다고 작심을 했던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과 만났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무렵이라 바로 살까 했지만, 자제를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다음날 결국 사고 말았다. 아는 북메이트가 이 책을 진짜 읽을 거냐고 해서, 아니 그렇게 재미가 없었나 했지만, 그것은 정말 기우(杞憂)였다. 어젯밤에 이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에밀 아자르는 우리에게는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의 필명이다. 어느 퇴근길에 라디오 방송에서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에 관한 에피소드를 전해 듣고 정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평생에 딱 한 번만 주어진다는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받은 유일무이한 프랑스 작가! 문학평론가들은 모두 로맹 가리가 끝났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1975년 두 번째 공쿠르 상의 영예를 거머쥔다. 리투아니아 출신 유태인으로 태어나, 어릴 적에 프랑스로 이주해서 2차세계대전 참전용사로 그리고 전후에는 외교관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 인텔리의 전형이었다.

<자기 앞의 생>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열렬한 포옹> 다음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라는 혼선을 피하기 위해, 책의 저자로 표기된 대로 앞으로 에밀 아자르로 통일하겠다. 에밀 아자르는 <자기 앞의 생>에 10살 난 고아 소년으로 추정되는 회교도 모모(모하메드)와 예순 살은 족히 먹은 유태인 로자 아줌마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다. 파리 외곽에 있는 19구, 20구의 벨빌(Belleville)은 오랜 노동자들의 거주지로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 책 <자기 앞의 생>은 <마담 로자>라는 제목으로 1977년에 제작되기도 했는데, 제목에 나오는 대로 로자 아줌마는 주인공 모모와 투 탑 캐릭터다. 폴란드 출신 유태인인인 로자 아줌마는 히틀러의 그 악랄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한창이던 시절에는 ‘몸으로 벌어먹고’ 살았고, 지금은 자신의 후배들이 그렇게 낳은 아이들은 돌보며 생활을 하고 있다. 이웃의 독실한 회교도로 85세의 양탄자 장수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가 세상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알려준다. 그는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빅토르 위고와 코란을 헷갈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돌보는 여러 아이 중의 하나로, 로자 아줌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방에 똥을 싸갈긴다는 말에서 웃음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애처로움이 배어 나왔다. 모모가 이런 해괴망측한 일탈을 일삼을 때마다 그녀는 모모를 데리고 역시 유태인 의사 카츠 선생님을 찾아간다. 카츠 씨는 모모가 아니라, 로자 아줌마에게 신경안정제를 복용시킨다. 이들이 벨빌의 소란스러운 골목에서 빚어내는 불협화음에 묘한 정이 가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로자 아줌마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이별과 슬픔의 농도를 더해 가기 시작한다. 열 살배기 어린이지만, 너무 빨리 세상을 알아 버린 모모는 만약에 자신을 돌봐주는 로자 아줌마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자신은 빈민구제소로 끌려가게 되는 얄궂은 운명에 처하게 되리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흑인 꼬마 바나니아를 이용해서 좀도둑질하고, 자신의 표현대로 뚜쟁이 질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산다. 모모, 넌 정말...

그러던 어느 날, 녹음실에서 일하는 나딘 아줌마를 만나게 되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작은 희망과 조우하게 되는 모모. 경찰, 테러리스트 혹은 포주의 꿈을 꾸는 모모는 생(生)이 15살 난 로자 아줌마를 파괴해 버렸다는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게다가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에, 설상가상으로 모모에게 닥친 “민족적 대재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사건이 연달아 터진다. 과연 우리의 모모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어 보이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에밀 아자르는 <자기 앞의 생>에서 우리네 삶이 행복과 즐거움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환상에 모모라는 작은 돌멩이로 파문을 일으킨다. 자신의 나이조차 모른 채, 겉늙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벨빌의 어느 거리에서 일상을 보내는 모모의 모습을 통해 에밀 아자르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정신이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기치 아래 다민족 국가화되고 있는 프랑스의 현실은 디스토피아처럼 다가왔다. 미성년자 보호라는 핑계로, 아이들을 옥죄고 가두려는 사회보장제도에 에밀 아자르는 냉소적인 시선을 날린다.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와 관련된 안락사는 또 다른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감동적이었던 건,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하류 이웃들이었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포주 은다 아데메, 여장남자로 세네갈에서 권투 챔피언이었다는 롤라 아줌마 그리고 카츠 선생님의 왕진을 돕기 위해 7층이나 되는 계단을 업고 오르락거리는 이웃을 작가는 합법적인 신분의 증명서를 지닌 프랑스인들과 대척점에 세우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프랑스 사회의 근저를 훑는 느낌의 너무나 다양한 인간군상의 재현에 작가가 쏟은 내공의 흔적들이 푸근하게 다가왔다.

<자기 앞의 생>에 등장하는 미묘한 주제 중의 하나인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프랑스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로자 아줌마에게 홀로코스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얼마나 서구사회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악몽을 씻어 내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에 미친 엄청난 공포와 폭력의 영향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10살 아니 14살 소년의 시각으로 이런 멋진 소설을 발표한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의 필력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게 됐다. 기저를 알 수 없는 소외와 외로움 그리고 죽음이라는 삼중주를 연주하면서도 이렇게 멋진 글로 세포 분열하는 프랑스 사회의 단면을 섬세하게 짚어낸 노작가 백조의 노래 같은 작품에 그저 찬탄을 보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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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페기 구겐하임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뉴욕 5번가에 있는 구겐하임 뮤지엄에 갔었던 게 언제였더라. 하도 오래전 일이라 이젠 다 기억이 나질 않지만, 센트럴 파크 옆길을 따라 5번가로 길을 물어물어 향하면서 저 멀리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했다는 구겐하임 뮤지엄의 자태를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이란! 2010년 새해에 다시 구겐하임과 만날 수가 있었다. 물론, 내가 사랑하는 구겐하임 뮤지엄의 주인공 솔로몬 구겐하임이 아닌 그녀의 조카 페기 구겐하임의 자서전이었다.

19세기 말에 태어난 페기 구겐하임은 영어 표현에 나오는 그야말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그런 인물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구겐하임 친가와 셀리그먼 외가라는 신대륙을 대표적인 가문끼리의 결합이었다. 특히, 셀리그먼 가문은 남북전쟁 당시 군복장사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뉴욕 출신의 페기는 어려서부터 프랑스 출신 가정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1912년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가문의 유산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구겐하임 패밀리의 자산은 훗날 그녀가 미술품을 수집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원천이 된다.

첫 남편 로렌스 베일과의 7년간의 결혼생활을 통해, 그녀는 20세기 지식인 사회에 합류할 수가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은 거의 40대가 다 되어서, 허버트 리드 경과의 교류와 특히, 그녀의 멘터라고 할 수 있는 마르셀 뒤샹의 도움과 충고로 현대 미술을 배우게 되고 본격적으로 미술가들과의 교류에 나서게 된다.

이후 그녀의 삶은 마치 21세기 현대미술,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녀가 시작한 구겐하임 죈의 첫 전시회는 프랑스 출신의 장 콕토에게 그 기회가 주어졌다. 한편, 그녀는 유명 작가인 사뮈엘 베케트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제임스 조이스, 칸딘스키, 이브 탕기 그리고 조각가 브랑쿠시 같은 당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의 이름만으로도 정신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고, 본격적으로 예술품 수집을 하려던 찰나에 바로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히틀러의 나치군이 파리를 점령하기에 앞서,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기에 이른 그녀는 이번에는 자신보다 훨씬 연상의 막스 에른스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의 미국행을 도와 그녀는 미국을 떠나 유럽에 둥지를 튼 지 14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막스 에른스트와의 두 번째 결혼 역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파경을 맞게 된다. 그녀는 <금세기 미술 화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게 될 잭슨 폴록을 발굴하고 후원한다.

전후 이번에는 베네치아로 자신의 활동 무대를 옮겨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통해 현대미술의 전도사라는 별명에 걸맞은 활동을 보여준다. 이 책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은 그녀의 자서전답게 다른 전기 작가의 말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 어느 부유한 유한마담의 예술애호기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예술에 대한 진정한 그녀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 나의 삐뚤어진 시선이 조금 교정되는 것을 체험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잭슨 폴록과의 애증에 얽힌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내 놓는 그녀의 이야기가 참 재밌게 다가왔다. 특히 내가 아는 미국 작가 트루먼 캐포티의 중재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미술품 구매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비는 그녀의 뜨거운 열정은 미국이나 유럽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스리랑카와 인도까지 가서 예술품을 구입하는 그녀의 노고에 정말 박수에 보내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과연 페기 구겐하임을 예술품을 사들이면서 어떤 기준을 가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만남, 교제, 갈등 그리고 화해라는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이 순환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두 번째 남편 막스 에른스트와의 화해였다!

나는 여전히 그 깊이와 해석에 자신이 없는 현대미술보다는 미켈란젤로 같은 고전 미술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한 명의 미술애호가이긴 하지만, 예술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현대미술의 가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싶다. 물론, 페기처럼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멋진 활동을 보여 주었던 멋진 미술 중독자의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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