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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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에는 나는 그만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 꽂혀 버렸다. 불과 며칠 사이에 3권의 책을 읽었고, 가장 인기 있다는 <적의 화장법>이 대기 중에 있으며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온 <배고픔의 자서전>을 읽기 시작했다. 어제 <제비 일기>와 <오후 네 시>를 반납하러 갔다가 또 다른 수작 <살인자의 건강법>이라는 책을 빌려다 다 읽어 버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내 앞에 읽었는지 책이 그야말로 걸레처럼 헤져 있었다. 껍질이 헤졌다고 해서, 그 내용도 헤지진 않았더라. 하루를 마감하고, 침대에 누워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소설의 주인공 83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로 22권의 소설을 펴낸 프레텍스타 타슈가 죽을병에 걸렸다. 연골 조직이 파괴된다는 “엘젠바이베르플라츠 증후군”이라는 정말 희귀한 병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괴팍하기 짝이 없는 언행에, 음식에 대한 탐욕으로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타슈에게 유일한 낙은 먹는 것이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문호의 죽음을 앞두고, 그가 죽기 전에 인터뷰를 진행하겠다는 욕심에 수많은 신문 기자들이 타슈와 인터뷰를 갈망한다.

<살인자의 건강법>은 이렇게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서게 되는 타슈의 5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말 특이한 논리와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한 대문호의 현란한 언어유희에 기자들은 차례로 나가떨어진다. 기세 좋게 덤비는 기자들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노회한 작가의 방어 기제의 발현은 사실 통쾌하기까지 하다. 22권이나 되는 그의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죽어가는 대작가를 분석하겠다고 달려드는 얼치기 글쟁이들에게 타슈는 타이슨의 주먹 같은 KO 펀치를 날린다!

사실 59살에 절필을 선언하고, 그전에 미리 써둔 원고를 까먹던 그에게 삶이란 단조롭기 그지없는 시간에 불과했던 걸까?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불나방같이 기세 좋게 덤비는 기자들을 차례로 녹다운시킨다. 걸프전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진행되던 인터뷰는 기자와 노작가 사이의 공격과 방어를 연상시킨다.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감추지 않는 타슈의 타고난 뻔뻔스러움에 그만 질려 버렸다.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노회한 작가의 전형으로 다가온다.

그런 타슈에게도 드디어 호적수가 등장하는데, 바로 30살 난 니나라는 이름의 여성 기자였다. 그녀는 다른 기자들과는 달리 22권에 달하는 타슈의 모든 저작을 꿰고, 인터뷰에 임한다. 수년간의 저작생활에 닳고 닳은 타슈도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니나의 파상공세에 결국 끝까지 자신이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비밀을 간파당하고,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다른 작품에서도 그 구성과 소재의 선택이 참으로 참신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아멜리 노통브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작가로서의 노통브의 페르소나는 대문호 타슈와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혹은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신문 기자 니나의 그것과 혼재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글로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도 손이고, 자위적인 쾌락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도 손이라는 그의 궤변에는 정말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아울러 니나 전의 네 명의 인터뷰 기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타슈의 오만하면서도 감성에 호소하는 캐릭터를 조금씩 설명해 나간다.

조금씩 공고하게 굳어진 대작가라는 권위와 가식의 틀을 과감하게 깨부수고, 인간 타슈에게 접근해 가는 노통브의 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렇게 혐오하고 모욕감을 안겨준 ‘여성’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자신이 고이 간직해온 비밀마저 들통이 나 버리는 과정이 아주 통쾌했다. 어쩌면 그는 글쓰기를 포기한 지난 사반세기 동안 자신을 끝장내줄 니나 같은 인물을 기다리는 삶을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노벨상 수상작가인 자신을 치켜세워줬지만, 그는 자신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을 조롱하며 자신의 살인충동과 분노 그리고 황홀경을 이어갈 아바타를 기다려 왔다는 것이다. 마침내 적합한 자신의 화신을 만난 그가 더 바랄 게 있었을까?

이렇게 기발한 소재를 가지고, 정말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마법적 주술을 아멜리 노통브는 소환한다. 문학을 둘러싼 허위와 위선을 분쇄하고, 개인적 감정에 충실하라는 그녀의 주문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문득 그녀의 작품을 카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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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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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에서 지난 2003년에 작고한 로베르토 볼라뇨의 책들을 전집으로 출간한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무척이나 기대를 많이 했다. 게다가 버즈북이란 기발한 방법으로 우리에게는 생소한 로베르토 볼라뇨에 대한 마케팅을 하면서 그에 대한 호기심은 증폭됐다. 적어도 나한테는 출판사의 홍보 전략이 먹혀든 것 같다. 게다가 1월 말에 출간예정이라고 했던 전집의 제 1탄 <칠레의 밤>의 출간이 늦어지면서 기다림의 증세는 도를 더해 갔다.

결국, 지난 명절 전에 가까스로 <칠레의 밤>을 입수하게 됐다. 결론부터 미리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생전에 문학 테러리스트라는 악명을 떨치면 칠레 출신의 망명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짧은 장편 <칠레의 밤>을 읽고 난 소감은 ‘혼란’이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걸작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죽음을 앞둔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 신부의 고백으로 <칠레의 밤>은 시작된다. 문학 비평가를 꿈꾸던 십 대 소년 우루티아가 어떻게 해서 사제의 길을 걷게 되고, 문학 비평가를 꿈꾸던 신학생 시절 자신의 정신적 스승 페어웰과 많은 문인을 만났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 후, 우루티아는 가톨릭 대학에서 일하며 일단의 시를 발표하고 이바카체 신부라는 필명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바카체 신부는 오데임과 오이도라는 사업가들과의 교제를 통해 성당 보존 연구를 위해 유럽으로 떠나 좀 더 넓은 세상을 체험하게 된다. 성당 보전에 치명적인 비둘기의 소탕을 위해 매를 이용해 유혈이 낭자한 사냥을 하는 유럽 신부들의 모습은 후에 기술된 피노체트 독재의 그것을 위한 예고편이다.

한편, 인민연합의 대선후보로 대통령이 된 살바도르 아옌데 박사의 승리에 보수주의자인 이바카체 신부는 심기가 불편하기만 하다. 수년간의 혼란 끝에 결국, 미국의 사주를 받는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군부 쿠데타로 아옌데 대통령의 합법정부는 붕괴하고, 피노체트를 수장으로 한 군사 평의회가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한 폭압적인 군사독재를 시작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이바카체 신부는 군부로부터 ‘칠레의 적’들이 도대체 얼마나 나아갈지를 알기 원하는 장군들을 위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강연을 요청받는다. 이에 절대 비밀은 전제조건으로 이바카체 신부는 9번의 비밀 강연회를 갖는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 놀랍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설화한 이야기로, 작가를 꿈꾸는 마리아 카날레스라는 여성이 자신이 소유한 교외의 화려한 저택을 문인들에게 소통의 장으로 제공한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던 시절에 그런 공간은 예술가들의 해방구였다. 하지만, 그녀가 파티를 벌이던 빌라는 칠레의 반체제 지식인들을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고문하던 장소였다. 그 빌라를 드나들던 지식인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체 했노라는 충격적인 고백이 이어진다.

사실 조금은 장황한 전반부의 구성에 비해, 피노체트에게 마르크스주의를 강의했다는 어느 사제의 고백과 문인들이 파티를 벌이던 장소가 반체제 인사들의 고문장소였다는 후반부의 이야기는 그 밀도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유럽 성당의 신부들이 매를 이용해서 성당 보존에 치명적인 비둘기들을 사냥한다는 설정은, 피노체트 일당이 칠레의 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사형집행인’을 하수인으로 내세운다는 것과 너무나 유사했다. 과연 볼라뇨가 글을 쓰면서 그런 비교를 예상했는진 모르겠지만, 책을 읽다가 그 둘 사이의 연관성이 보였을 때의 충격이란!

그 무엇보다 진리와 정의를 구하는 지식인으로서 이바카체 신부의 작태는 유감 그 자체였다. 그는 절차를 중요시하는 민주주의를 무시한 채, 초법적인 권한을 휘두르던 군사독재 시절 권력에 영합해서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적들로부터(심지어 존재하기는 했었던가!) 조국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권력자들에게 봉사했다. 야만적인 독재에 신음하는 조국의 현실을 외면한 채, 이바카체 신부는 그리스 작가들이 쓴 고전을 읽는다. 그 가운데 자신은 조용한 평화를 간구한다. 바로 이런 지식인의 역설을 볼라뇨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도대체 그 시절의 지식인들은 양심이란 걸 가지고는 있었던가?

자신의 문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인으로 시작한 볼라뇨는 멕시코의 거장 옥타비오 파스와 조국 칠레의 대문호 파블로 네루다를 가차없이 비판한 <인프라레알리스모> 활동으로 문학 테러리스트로서의 악명을 날렸다. 주술적 리얼리즘을 특징으로 하는 라틴아메리카 <붐> 문학에 대해서도 지나친 상업성과 반복에 날카로운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공격적인 볼라뇨의 날 선 비판이 조금은 거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에서 자신의 블랙유머를 만개했다면, <칠레의 밤>에서는 피할 수 없는 과거사와의 대면을 로베르토 볼라뇨는 독자에게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 계속해서 출간될 11권의 대장정이 어떻게 귀결이 될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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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ㄷ 2010-02-28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책 질문 좀 드릴게요. 이거 양장본이 예전 하드커버인가요? 아니면 최근에 열린책들 세계문학 판 같은 책등이 네모난 양장본인가요?
 
안나 카레니나 3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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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 읽었다. <부활>, <전쟁과 평화>와 더불어 톨스토이 3대 걸작으로 불리는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소설 이상이라고 말했던 <전쟁과 평화>보다도 진정한 소설로 간주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톨스토이가 <러시아통보>에 1873년부터 1877년까지 장장 5년여에 걸쳐 연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출신의 유명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큰딸 마리아 가르퉁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소설의 후반에 해당하는 3권에서 이제 막 결혼해서 시골에 정착한 레빈과 키티네 집으로 돌리네 식구들이 여름을 보내러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레빈의 노총각형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아쉬운 로맨스와 쉬체르바쓰키 식솔들의 침입으로 레빈이 꿈꾸던 평화로운 전원생활은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어쩌랴 대부분의 결혼생활이 그러한 것을!

게다가 스티바와 함께 온 베슬로프스키의 등장으로 레빈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남녀관계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전형적인 질투로 고뇌하는 레빈의 모습에 미소가 번진다. 한편, 부근의 브론스키 영지에 머물던 안나를 찾아간 돌리는 여전히 호사스러운 귀족생활을 하며, 브론스키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소유욕에 시달리는 안나의 모습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온다. 지방귀족단장 선거를 위해 잠시 곁을 떠난 브론스키의 부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안나,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대 파란을 예고한다.

키티의 출산이 임박하면서, 장소는 모스크바로 옮겨 전원생활과는 사뭇 다른 환경에 처하게 된 레빈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우선 금전적으로 대도시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은 한적한 시골생활에 비해 그 비용이 많이 소용되고, 그전부터 가뜩이나 마땅치 않게 생각해오던 위선과 허위로 가득한 상류생활에 레빈은 염증을 느낀다. 스티바와 브론스키는 레빈에게 안나를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는데, 안나를 처음으로 본 레빈은 브론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바로 안나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물론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처럼 파국으로 치닫진 않지만, 그만큼 팜므 파탈로서의 안나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간절하게 이혼을 소망하는 안나의 요청을 알렉세이 안드로비치는 거절하고,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된 안나의 운명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안나의 절망적 질투는 브론스키를 옥죄고, 자신의 소멸을 통해 구원을 꿈꾸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안나는 브론스키가 자기가 아닌 다른 여자와 열애 중이라는 의심을 품게 되고, 오로지 자신의 사랑을 존속시켜주던 열정과 브론스키에 대한 신뢰가 급속하게 흔들리면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정에 자신을 내던진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그야말로 소설이라는 장르가 커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개인의 사랑과 결혼, 사회, 진보, 신앙, 열정, 질투, 시기 그리고 위선에 이르는 그야말로 인간사의 모든 이야기가 이 소설에 녹아 있다. 개인적으로 <안나 카레니나>의 두 주인공은 바로 안나와 레빈이라고 생각하는데, 전자가 철저하게 개인의 행복에 근거한 개인주의라고 한다면, 후자는 만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가 있다. 톨스토이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페르소나로서, 작가는 레빈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키티와의 결혼에 앞서 자신의 무신론과 순결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은 자신의 실제 부인이었던 소피야 베르스에게 했던 고백과 유사하다.

다음으로 <안나 카레니나>가 시대가 지나도 여전히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 꼽히는 세 가지 특징을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안나 카레니나>는 사실주의 문학에서 모더니즘 소설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중세를 풍미했던 종교적인 색채를 대신해서 등장했던 사실주의 문학과 동시에, 근대적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문명과 비인간화의 과정에 대한 비판으로 출발한 모더니즘 문학의 태동을 이 작품을 통해 엿볼 수가 있다. 변혁을 갈망하는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개인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레빈이라는 이성적 존재에 대한 화두를 독자에게 던져준다.

둘째,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윌리엄 포크너 같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 “의심의 흐름” 기법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안나의 사고를 통해 선보여 주었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각 부마다 주연으로 전면에 나서는 주인공의 시점으로 신속한 전환을 하면서 엄청난 분량에도 다양성을 담보한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커다란 줄기 속에서 서로 다른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연애소설, 사회소설 그리고 정치소설이라는 다채로운 변주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열정적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안나가 조금씩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에 대한 톨스토이의 탁월한 심리분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세 번째 특징으로 톨스토이는 소설 속에, 실재했던 러시아 농노해방, 제도개혁 그리고 세르비아 전쟁 같은 사건들을 차용하면서 리얼리즘에 극대화를 유도한다. 이런 개별적 사건들을 소설의 곳곳에 등장하는 러시아 사회변혁에 대한 토론 그리고 개인의 사랑과 열정에 대한 감정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에 접목시키는 그의 매끄러운 테크닉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소설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8부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은 브론스키가 의용대를 조직해서 과연 살아 돌아올지 모르는 세르비아 전쟁에 출병하는 장면은 이 ‘넓고 자유로운 대하소설’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 대하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내 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던 건, 나의 행복이 타인의 불행 위에 세워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렉세이 안드로비치와 세료쥐아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안겨준 안나가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없었던 건 미리 예견된 숙명이었을까?

2010년 나의 고전 읽기 목록에 이 ‘완전무결’한 작품을 올리게 돼서 뿌듯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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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이도 버티는 survival 일본유학
유석규 지음 / 부표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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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외국 여행이 모든 대학생들의 로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에는 해외여행이 너무 일반화돼서 학창 시절에 배낭여행과 해외연수를 경험하는 대학생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하지만, 해외유학은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물론 예전처럼 유학이 어려운건 아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도전임에는 틀림없다.

여전히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일본유학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돈 없이도 버티는 survival 일본유학>은 유학생활에 대한 환상 대신 주독야경하며 돈 없이 일본에서 공부를 하며 청년기를 보낸 작가의 고군분투 일본유학기다.

가장 먼저 이 책은 무턱대고 그 나라에 가서 일단 부딪히면서 배워 보자라는 막무가내식 도전보다는 준비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예전에 비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의 수집이 용이해진 만큼,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버스를 타면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한 시간씩 걸려 걸어간단 말인가? 개인적으로 배낭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인데, 단 하루를 나보다 먼저 그 도시에서 지낸 동료여행객에는 배울 게 많았다. 하물며 수년씩 먼저 유학생활을 한 선배, 친구 유학생에게서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루트를 통해 수집한 정보로 든든해졌다면 다음 관문은 뭐니 뭐니 해도 어학이다. 책의 곳곳에 아르바이트로 집세며 생활비를 벌며 생활한 저자의 체험담이 배어 있다. 현지어로 말을 할 수 있다면, 소위 아르바이트 시급 단가가 다르다고 한다. 단 시간 내에 어학실력을 늘리겠다고 과욕을 부리는 대신,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기초를 다지고 레벨 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장기간의 해외 체류가 언어능력의 향상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유학 초기 4시간만 자면서, 생활비를 벌고 공부한 작가의 스케줄은 가히 초인적인 것이었다.

물설고 낯선 해외생활의 기초에서부터 시작해서, 건강을 유지하면서 생존에 필요한 지침과 유용한 정보가 <돈 없이도 버티는 survival 일본유학>에는 그야말로 넘쳐흐른다. 다른 유학성공기에서 다룬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희들도 나를 따라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의 함정도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항상 하는 말이지만, 부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돈 없이도 버티는 survival 일본유학>은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사냥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 실린 <이란친구 지미> 편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다카노 히데유키의 <별난 친구들의 도쿄 표류기>를 연상시켰다. 10년간의 일본유학생활 중에 만난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가 못내 궁금하기도 했다. 좀 더 살을 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울러 비주얼쪽으로 강화를 해서, 한 때 사진전공을 했던 작가의 사진이나 이미지를 책에 실었다면 좀 더 콘텐츠가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여전히 파랑새를 쫓는 이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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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서브 로사 2 - 네메시스의 팔 로마 서브 로사 2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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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더듬이 고르디아누스가 8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스티븐 세일러 작가의 대작 프로젝트 <로마 서브 로사> 시리즈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우리에게는 한 달 만에 찾아온 신작이다. 전작에서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실존 인물이었던 술라와 키케로가 등장했다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네메시스의 팔>에서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장식했던 마르쿠스 크라수스가 등장한다.

1편의 공간적 배경이 세계의 수도 로마였다면, 2편에서는 로마를 뒤흔들었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함께 로마에서 한다 하는 세력가들이 별장들이 있었던 나폴리 만의 바이아이를 공간으로 해서 고르디아누스와 그의 양자 에코의 활약상이 펼쳐진다.

팩션의 형식을 취하면서, 고대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의 신기원을 만들어가는 스티븐 세일러 작가는 실존 인물과 실재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해서 흥미진진한 가공의 살인사건을 해결하는데 자신이 만든 멋진 캐릭터 고르디아누스를 투입한다. 로마의 갑부 크라수스를 대신해서, 바이아이의 사업을 총괄하던 리키니우스가 어느 날 살해당하고, 범인으로 그의 수하에 있던 두 명의 노예가 지목된다. 한편, 당시 이탈리아 전토를 충격 속에 몰아넣었던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진압하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 크라수스는 일벌백계의 고대 로마 정신을 부활시키겠다면서, 리키니우스의 노예들을 모두 학살할 계획을 세운다. 고르디아누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일! 그동안에 리키니우스의 진범을 잡고 무고하게 죽음을 당할 상황에 부닥친 99명의 노예를 구하는 시간과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우리의 주인공 고르디아누스는 역시나 사건의 단서들을 하나씩 모아, 자신의 머릿속에서 발효시키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건의 본질에 다가간다. 크라수스의 의뢰로 사건을 맡긴 했지만, 파헤칠수록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복잡다단한 음모의 전모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고르디아누스와 에코는 예상했던 대로 죽음의 위협을 접하게 된다. 1편을 읽고 나니, 어느 정도는 스티븐 세일러의 소설 스타일이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의뢰인에게 금전적 보상을 받고 하는 일이긴 하지만, 고르디아누스는 기본적으로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양심적 지식인이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 의뢰인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게 된다. 바이아이로 가는 갤리선에서, 노젓는 노예의 처참한 광경에 같은 인간으로서 분노한 고르디아누스는 살인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받은 꼬마 메토와 아폴로니우스에 대한 연민으로 그들을 구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른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답게, 독자는 스티븐 세일러가 그린 등장인물 중에 범인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고인이 된 리키니우스의 빌라에 있는 이들을 차례로 탐문해 가면서, 1인칭 화자 고르디아누스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진행한다. 여느 장르 소설답게, 끝까지 진범에 대한 확증을 미루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가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울러, 전작에서 대도시 로마의 화려함을 묘사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지방도시 바이아이의 빌라와 자연 그리고 쿠마이의 시빌레 같은 비의를 다루는 데 있어서 탁월한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해 주고 있다. ‘저자의 말’을 참고해 보니, 다양한 문헌을 통해 고대 로마의 일상을 꾸준하게 연구한 저자의 힘이 느껴졌다.

<로마 서브 로사> 시리즈는 계속해서 진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1편에서 고르디아누스가 독고다이 해결사로 나섰다면 이번 <네메시스의 팔>에서는 수양아들 에코를 사이드킥으로 삼아 종횡무진 활약상을 보여준다. 고르디아누스가 상대하는 보이지 않는 적의 음모가 사악하고 복잡할수록 그를 돕는 이들 역시 그만큼 필요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이번 편에 새로 고르디아누스 팀에 합류하게 된 영리한 꼬마 노예 메토의 활약이 앞으로 더 궁금해진다.

이번 편에서는 폼페이우스의 이름이 살짝 등장을 했는데, 뒤이어 등장하게 될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공화정 말기를 장식한 영웅들의 활약과 중년으로 접어드는 더듬이 고르디아누스의 탐정 오디세이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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