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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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먼저 훌루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와 원작 소설로 그리고 이번에 그래픽 노블로 모두 세 번 만났다. 텔레비전 시리즈와 원작 소설은 좀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 그래픽 노블은 두 장르를 적절하게 배합한 섞어찌개 느낌이라고나 할까.

 

주인공은 오브프레드(드라마에서는 오프레드로 들린다)는 프레드 사령관에게 봉사하는 시녀다. 그들이 사는 공간은 예전에 미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신정국가 길리어드라는 이름의 해괴한 나라다. 심각한 기후변화와 오염으로 불임이 일상화되었다. 계속되는 이웃나라들과의 전쟁 그리고 인구 감소로 국가 길리어드는 존속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여성의 권리가 최악인 길리어드는 아이들의 재생산을 위해 가임 여성들을 그야말로 국가의 자산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기존에 자유로웠던 세상을 경험했던 오프레드 같은 여성들이 고위직 사령관들에게 성적으로 착취되고, 오로지 아이의 생산을 위해 도구로 인식되는 미래 사회는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 같은 여성인 아주머니들이 붉은 옷의 흰 베일을 쓴 시녀들을 엄격하게 관리 감독한다. 아니 그전에 예전에 자유인이었던 여성들을 재교육하는 수용소인 "레드 센터"에서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교화하기도 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노예화되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리어드의 실질적 지배자들인 사령관들은 비밀첩보기관인 아이를 동원해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쿠테타 이후, 길리어드는 신정국가를 선포하고 여성들의 권리를 하나씩 차례로 폐지한다. 우선 직장에서 여성들을 모두 내쫓았고, 그 다음에는 은행 계좌를 동결시켰다. 이런 조직적인 차별과 혐오를 동원한 억압은 결국 여성들을 아이를 생산하기 위한 국가적 자산으로 간주하는 막장드라마를 연출하게 된다.

 

과거 오프레드의 어머니는 여권 신장을 위해 최일선에서 가열차게 싸웠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어떤 자유도 거저 얻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민주주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투표권도 마찬가지다. 여성참정권 투쟁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희생된 되면서 이룩된 것이 바로 지금의 보통선거권이다. 이러한 투쟁을 통한 권리들의 획득은 지난하고 어려웠지만, 길리어드의 케이스에서 보듯이 박탈은 너무나 쉬웠다.

 


최근 본 영화 <안테벨룸>에서 보듯이 자유인이었던 주인공이 어느 날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18세기로 돌아간 것 같은 미국의 목화농장에서 노예화되는 과정은 순식간이었다. 죽음을 앞세운 위협과 상상 그 이상의 폭력 앞에 버틸 재간은 없었다. 수용소 내에 오프레드와 다른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존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다른 선택지는 현재에 순응하는 것 외에는 처음부터 부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령관들이 그들이 꿈꾸는 신정국가 길리어드의 교조처럼 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특별한 장소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욕망을 해소했다. 프레드 사령관이 오프레드를 데리고 그런 공간에 가서 쾌락을 즐기는 장면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공정과 상식을 내세우며 시민들에 대해 법치주의를 표면에 내세우지만, 정작 엘리트 권력 계급들은 탈법과 합법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며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해 뭐가 문제냐는 식의 대응을 연일 텔레비전 중계로 보면서 과연 길리어드와 다른 게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되는 인구 감소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십 수 년 전부터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었지만 오히려 인구 절벽 위기가 조만간 현실화될 거라는 암울한 전망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길리어드의 사령관들처럼 우리네 위정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긴 우리가 직면한 사회적 문제들이 어떤 하나를 해결한다고 해서 일도양단의 기세로 해결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시급한 주택문제부터 시작해서 출산, 보육, 사교육 그리고 취업과 고용에 이르기까지 이미 구조화된 여러 문제들을 단계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이상 거대한 인구 감소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단순하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리는 사실을 그들은 과연 모를까. 어쩌면 지금의 이 시스템이야말로 자신들의 이익에 최적화되었기 때문에 굳이 수리하거나 개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러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래픽 노블 <시녀 이야기>에서 색감의 역할이 개인적으로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는 아무래도 시녀들이 입고 다니는 옷의 색인 붉은색이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훌루 드라마와 그래픽 노블에서는 강렬한 붉은색이 효과적이었다. 개인이 지닌 열정은 국가 아니 기득권층을 위한 추악한 희생이라는 방식으로 강제되었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지우는 복장의 규제 역시 전체주의 국가 길리어드의 한 가지 특징을 드러내지 않나 싶다.

 

국가 길리어드는 또한 여성들이 책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 우리는 현재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보고 들을 게 너무 많다. 예전에는 검열이라는 무식한 방식으로 정보의 유통을 원천 차단했다면, 현대에는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가짜와 진짜를 뒤섞은 진위를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들을 송출하는 방식으로 시민들의 미디어 소비를 부추긴다. 거기에 확증편향이라는 요소까지 개입되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정보는 차단하는 방식의 선택적 미디어 소비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미디어 자체가 플레이어가 돼서 선동에 나서는 판이니 할 말이 없다.

 

월초에 만난 그래픽 노블 <시녀 이야기>를 되짚어 보니 정말 다양하고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주의, 차별과 혐오, 인종차별, 인구 문제, 전체주의 국가의 형성, 불평등하게 설계된 사회 구조적 모순, 암울한 미래의 디스토피아 등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모든 요소를 갖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작품은 다양한 방식으로 재창조(re-creation)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오늘 미국의 어느 기자가 자국의 대통령이 방문한 나라 수장에게 왜 그 나라의 내각에는 여성이 없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나는 순간, 소설 속의 가상 국가 길리어드의 프레드 사령관에게 외국의 기자가 질문한 줄 알았다. 가장 최근에 만난 쉬르레알리스틱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가끔 보면 현실인지 픽션인지 헷갈릴 때가 있더라.



 

[뱀다리] 5년 전에 책벌레로 소문난 배우 엠마 왓슨이 파리에서 <시녀 이야기> 백 권을 감추는 이벤트를 한 적이 있다. 문득 우리도 그런 이벤트를 하는 배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깜찍한 상상을 해봤다. 아 참, 요즘 사람들은 책을 안 읽지! 깜박했다. 아니 찾아다가 중고서점에 팔아먹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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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5-22 12: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그래픽 노블 말고 소설책 ㅋ) 사놓고 아직 못읽고 있는데 완전 디스토피아의 끝판왕 느낌이 나네요 ㅋ 첨부된 사진들이 다 무섭네요 😅
엠마 왓슨 완전 멋지네오. 저 책에 싸인까지 했다면 더 대박인데 ㅋ

레삭매냐 2022-05-22 13:20   좋아요 4 | URL
저도 책은 미리 사서 쟁여두고
훌루 도라마부터 보고 나서
책을 읽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도라마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책요정으로 변신해서 책 배달
하는 이벵으로 알고 있습니다.

100권 정도면 싸인도 하지 않
았을까요 ㅋㅋ
아, 인별 피드에 보니 책 득템
한 분들이 올린 것도 있더라구
요. 부끄러버들의 일상 ~

그레이스 2022-05-27 09: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엠마왓슨 멋지네요
우리도 누군가 하면 멋질듯요

레삭매냐 2022-05-22 13:20   좋아요 3 | URL
그런 이벵을 하는 그네들의
저변 문화가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coolcat329 2022-05-23 18: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녀 이야기는 읽고 나서 유난히 영상으로 보고 싶더라구요. 그래픽 노블이 있는지 몰랐네요.
도서관 가서 봐야 겠습니다.
안텔베움이라는 영화 내용이 충격적이네요. 재미있나요? ㅎ

엠마 왓슨 저런 모습 참 매력적이네요.

레삭매냐 2022-05-25 10:21   좋아요 2 | URL
도라마-영화-책 그리고
그래픽 노블까지 다양하게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안테벨룸> 가히 충격적
이었습니다. 추천드립니다.

엠마는 북 페어리라고 하네요 ^^

mini74 2022-05-25 08: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림으로 보니까 더 끔찍하네요.ㅠㅠ 숨은 책 찾기~ 넘 부럽네요. 안테벨룸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 생각나게 하네요 ~

레삭매냐 2022-05-25 10:22   좋아요 3 | URL
그러니깐요, 저도 이 영화가
혹시 <킨>을 각색한 영화가
아닌가 싶더라구요 :>

<킨>도 책으로 만나 보고
싶네요.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을유세계문학전집 17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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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다. 오래 전 을유문화사에서 새로운 문학전집 시리즈가 나온다 하여 잔뜩 기대를 했다. 그 중에서 나의 원픽은 듣도 보도 못한 칠레 출신 스페인 망명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라는 책이었다. 그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그래. 그 때 아마 이 양반은 저 하늘의 별이 되었을 터인데, 고인이 구사하는 놀라울 정도로 뻔뻔한 블랙 코미디에 그만 뻑이 가 버렸다.


나중에 보니 이 작가가 미국에서도 대박이 났더라. 그러니까 요절한 작가라는 미국 독자들이 대환장하는 강력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다, 그네들이 맛볼 수 없었는 독재문학이라는 신선한 장르를 무기로 삼아 아메리카 대륙을 공략하는데 성공했지 싶다. 무엇보다 영화 <나우 앤 씨>에선가 우디 해럴슨이 볼라뇨의 대표작이자 벽돌책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그래 미국에서도 이 정도란 말이지.


볼라뇨를 읽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나치와 2차 세계대전은 조국 칠레의 암담했던 상황 만큼이나 작가가 사랑하는 주제다. 이번에는 나치즘의 본토인 독일이 아닌 대서양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한 자생적(?) 나치 추종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코미디 드라마에 초점을 맞춘다. 볼라뇨의 이 백과사전식 파시스트 열전을 넷플릭스에서 만들어 주면 어떨까라는 작은 바람이 있다. 최근 넷플릭스가 전 세계의 이야기들을 모두 웹드라마로 만들 기세를 보면 볼라뇨의 작품들도 곧 영화화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첫 번째 나치 추종자로 등장하는 에델미라 톰슨 데 멘딜루세는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나치의 대모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부르주아 집안 출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시인과 문인 행세를 하며 계속해서 허섭쓰레기 같은 작품을 발표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어느 작가의 작품이 생명력을 얻어 계속해서 문학 세계라는 험난한 바다를 자력으로 항해할 수 있다는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우리 책쟁이들이 알다시피 그러기에는 정말 쉽지 않은 게 바로 이 바닥의 생리다. 하지만, 또 에델미라 아줌마의 경우처럼 돈이 많다거나 지속적으로 파시스트 작가들의 문단활동을 후원할 수 있는 자금과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그건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이 유한마담의 자손들 역시 엄마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게 된다. 참 그녀의 딸이 히틀러와 같이 찍은 사진을 두고두고 울궈 먹는다는 설정은 정말!


에델미라 같이 문단에서 활동한 인사들이 있다면, 이름은 까먹어 버렸지만(너무 많은 이들이 등장하다 보니 이름조차 다 외울 수가 없다, 부디 양해해 주시길) 콜롬비아 출신 영맨 시인들인 이그나시오 수비에타와 고메스 등은 아예 무장친위대로 변신해서 전장에 나선다. 세상에 다른 부대도 아니고 바펜 SS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최정예 부대로 전투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전쟁범죄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런 극악의 부대가 아니었던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드디어 유럽에 상륙한 미군 부대들이 바펜 SS에 학을 뗀 나머지, 바펜 SS 출신 포로는 잡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콜롬비아 출신 의용군 전사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 유일무이하게 히틀러에게 철십자훈장을 받을 정도로 순수 아리안족을 능가하는 출중한 전투력을 전장에서 보여준 바 있다. 개인적으로 이 서사가 과연 볼라뇨의 독창적 상상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의 소설적 변용인지가 사실 궁금했다.


그 동네의 걸출한 멕시코 출신 여성 지식인 이르마 카라스코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카라스코의 작품 세계보다는 스탈린주의자로 알려진 건축가였던 남편 가비노 바레다와 있었던 ‘사랑과 전쟁’은 요즘 너튜브에서 대유행 중인 스케치 코미디 부부생활을 능가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내셔널리스트 편에 서서 맹활약을 한 카라스코와 정치적으로 너무 달랐던 남편 바레다와의 결혼 생활은 어쩌면 시작부터 파국을 예고했던 게 아닐까. 빈번하게 발생하는 구타라는 이름의 도메스틱 바이얼런스에도 불구하고 이별과 재결합이 교차하는 희비극이 블랙 유머가 가미된 볼라뇨 스타일로 너울거린다.


개인적으로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에 등장하는 빌런 중에서 가장 문제적 캐릭터는 바로 아이티 출신(포르토프랭스)의 막스 미르발레가 아닐까 싶다. 글로 밥 벌어 먹고 살겠다는 이들은 자신에게 문재(文才)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바로 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못하고, 다른 괴랄한 방식으로 얼치기 문학가라는 자신의 입지를 사수하려는 인물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문학계의 엄정한 현실을 볼라뇨는 예리하게 저격한다. 표절로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한 어느 작가가 문학이 주는 꿀을 포기할 수가 없어 다시 돌아온 장면을 보면서 이 동네가 거의 아수라판인지 절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볼라뇨가 살아 있어서 우리네 문단에서 횡행하는 이 꼴을 알았다면 얼마나 신랄하게 깠을까. 그러지 못하고 여전히 상부상조하는 주례사 비평의 거품은 꺼지지 않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파블로 네루다와 옥타비오 파스를 가차 없이 깠던 볼라뇨 정도의 패기를 지닌 비평가나 동업자들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막스 미르발레라는 문제적 사이비 작가는 출발부터 타인의 작품들을 표절했다. 그가 얼마나 교묘하게 표절을 했는지 심지어 원작자도 모를 정도였다고 했던가. 표절의 기술이 늘면서, 미르발레는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을 만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수집해서 자신이 개발한 극강의 표절 수법으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냈다. 오, 놀랍지 않는가 말이다. 미르발레가 얼마나 표절을 잘 했는지, 그의 눈부신 재능을 탐낸 이들이 표절 전문가의 표절작을 다시 한 번 표절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역시 무언가에 득도하게 되면, 윤리의식을 뛰어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생산해 내게 되는 모양인가 보다. 뭐 이 정도라면 표절문학이라는 장르가 하나 생겨나도 무방하지 싶다.


대미를 장식하는 카를로스 라미레스 호프만 중위의 서사는 확장된 <먼 별>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지난주에 <먼 별>을 읽기 전에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에 수록된 부분을 먼저 읽고 <먼 별>을 주파했다. 주인공들의 이름이나 몇 가지 소소하게 달라진 부분들이 있었지만, 역시나 중편으로 개작하기에 충분히 넉넉한 공간들을 볼라뇨는 잘 활용해서 청어람 같은 작품을 생산해냈다. 이 또한 강력한 서사의 힘에 덧댄 게 아닐까 추정해 본다.


파시스트 작가 열전의 양식을 띠고 있는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의 구조는 건조하고 딱딱하다. 잊지 마시라, 볼라뇨가 얼마나 친절하지 않은 작가인지에 대해. 아메리카 대륙에 분포한 파시스트 작가들의 생몰연대를 기본적으로 다루면서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지, 성장과정에서 파시즘에 서서히 물들어 가는 보통 사람들로서 그네들의 삶에 작가는 천착한다. 어느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괴물은 아니었다. 멘딜루세 패밀리만 보더라도, 멘딜루세 여사의 영향력 아래 자란 자녀들이 파시스트 작가로 걷게 될 미래가 빤히 보이지 않던가 말이다. 볼라뇨가 이 책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누구나 파시즘에 경도된 몬스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확증편향과 보고 싶어 하는 사실만 보게 되는 진영 논리의 틀에 갇혀 나와 다른 이들과의 공존을 맹렬하게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상대방이 옳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한 시간이다. 나와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기본 명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주말에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볼라뇨를 읽기 시작했다. 아욱실리오 라쿠투레가 등장하는 <부적>과 침술사 피에르 팽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팽 선생>을 동시에 읽고 있다. 이러다가 이야기가 헛갈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나의 5월 볼라뇨 읽기는 그렇게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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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5-16 1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볼리뇨 도장깨기입니까 매냐님 ㅎㅎ 작가들 전작읽기 넘 좋아보입니다. *^^*

레삭매냐 2022-05-16 17:51   좋아요 2 | URL
거의 재독이라 그런지,
아주 술술 넘어가고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나치 문학>은 무려
삼독이었네요.

페넬로페 2022-05-16 18: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오늘도 로베르토 볼라뇨 작가의 매력을 뿜어 주시네요~~
칠레 출신이라 더 쓸 것이 많겠어요.
저도 도장깨기 중입니다^^
다른 책으로요~~

레삭매냐 2022-05-16 20:03   좋아요 3 | URL
그니깐요. 제가 오래 전 이 바닥
에 투신할 무렵에 작고하신 루
이스 세풀베다 샘의 책들을 넘나
좋아했었는데... 그 분도 가시고
다른 칠레 작가로 점 찍은 선수
가 바로 볼라뇨 되겠습니다.

책들이 많으니 선택의 폭이 넓지
않나 싶습니다. 부디 볼라뇨의
매력에 흠뻑 빠지시길 기대해
보렵니다.

새파랑 2022-05-16 18: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레삭매냐님 저번에 글 보고 볼라뇨 책을 읽어볼까 하고 우주점에 갔더니 이 책이 딱 있더라구요. 그래서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좀 어려워 보여서 안샀는데 별 세개라니 좀 그런가 보군요. (삼독이셔서 별 세개?)

아직 안팔렸는지 검색해봐야 겠습니다 ㅋ

레삭매냐 2022-05-16 20:05   좋아요 3 | URL
제가 처음으로 볼라뇨를 이 책
으로 만났을 적에는 그야말로
뻑이 갔었습니다. 아마 그 당시
에는 별 다섯 개를 주지 않았나
싶네요.

그런데 두 번 그리고 세 번 읽
게 되니 그리고 볼라뇨의 다른
책들이 원체 좋다 보니 좀 짜
게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쓰리 앤 하프 정도가 되지 않
나 싶습니다.

사실 볼라뇨 작가에게 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기냥 다 좋
습니다.

건수하 2022-05-17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린책들에서 볼라뇨 나오기 시작했을 때 궁금해서 이 책부터 시작해봤었는데
라틴 아메리카를 잘 모르고 다 허구이다보니 생소해서 읽기가 어려웠었습니다.

레삭매냐님 글 보니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

레삭매냐 2022-05-17 16:03   좋아요 1 | URL
오래 전을 되짚어 보면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볼라뇨 작가의 방대한 라틴
아메리카 문단에 대한 지식
이 그대로 휘몰아 치다 보니
소화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시 읽어 보시면 또 색다른
재미를 느끼시지 않을까 추
정해 봅니다.
 
먼 별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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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1볼라뇨를 읽는 중이다. 역시 예전에 한 번 읽었던 글들이라 그런지 소화가 쑥쑥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볼라뇨 읽기 가운데 <먼 별>과 만났다. 그리고 내가 가장 처음으로 만난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맨 끝에 실린 단편을 확장해서 리라이팅한 것이 바로 <먼 별>이었다.

 

<먼 별>은 독재문학을 기초로 삼은 느와르 스타일의 추리소설이다. 볼라뇨의 얼터 이고라고 할 수 있는 아르투로 벨라노가 들려주는 연쇄 살인마 카를로스 라미레스 호프만 혹은 카를로스 비더, 그도 아니라면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의 삶을 추적한다. 전작에서 짧게 다뤄진 서사는 <먼 별>에서 보다 확장된 서사로 독자를 맞이한다. 나는 그래서 결국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찾아 호프만 중위의 전사(前事)를 찾아 읽어 봤다. 인물들의 이름이 조금 다르게 나오지만 크게 상관은 없다.

 

1970년대 초반, 시창작 교실에 나타난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와의 인연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사실 카를로스 라미레스 호프만이라는 이름의 칠레 공군 소속의 중위였다. 그러니까 그는 소위 시창작 교실이라는 간판을 걸고 불온한 모임을 갖는 좌파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은 프락치(fraktsiya)였다. 시창작 모임에는 당시 문단에서 주목을 받던 베로니카와 앙헬리카 가르멘디아 자매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다 아는 1973911, 쿠데타가 발생했고 가르멘디아 자매는 지방으로 몸을 피했다. 루이스 타글레는 어느 날 밤, 그는 문단에서 주목을 받던 가르멘디아 자매를 찾아가 살해한다. 어때, 시작부터 살벌하지 않은가.

 

시리얼 킬러 공군 중위의 기행은 이제 막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주력기였던 메서슈미트 Bf 109를 몰고 공중에 연기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Fiat Lux라는 요한복음 첫 장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문구를 스페인어도 아닌 무려 라틴어로 쓰는 이 빌런은 분명 지식인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가 지식인이라고 해서 그가 암흑 시절에 행한 악행이 지워지는 건 아닐 것이다.

 

볼라뇨의 다른 작품 <칠레의 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니카시오 이바카체 신부/평론가가 등장해서 카를로스 비더의 작품에 대한 평을 하는 시퀀스도 아주 흥미로웠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을 작품에 등장시켜 상호간에 작용시키는 기법이 마음에 들었다.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캐릭터의 재활용인데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산티아고 퍼포먼스를 대충 마친 이 빌런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소름 끼치는 사진 전시회를 기획해서 손님들을 초대한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한 소시오패스 같은 고백이라고 할까. 그는 분명 시인을 위장한 예술가가 아닌 범죄자였다.

 

우리의 아르투리토 벨라노는 그전에 볼셰비키 유대인이었던 후안 스테인과 디에고 소토라는 특별한 인물들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아르투리토 벨라노가 나치와 2차 세계대전 마니아라는 건, 그의 저작들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먼저 피노체트 쿠데타가 발생한 칠레를 탈출해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독재에 대한 무장투쟁이 벌어지는 거의 모든 곳에 등장해서 전설이 된 시인이자 전사였던 후안 스테인은 이반 체르냐호프스키라는 독일 파시스트를 상대로 한 소련의 대조국전쟁에서 명성을 날린 공산당 장군의 조카였다. 문학과 무장투쟁이라는 상극의 요소 역시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던 걸까. 시 창작 교실의 지도자였던 양반이 느닷 없이 게릴라 전사로 변신해서 마나구아 해방과 엘살바도르 내전에 참가해서 명성을 날렸다는 그야말로 판타지에 가까운 서사가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그리고 어려서 사고로 두 팔을 잃은 로렌소 아니 로렌사에 대한 에피소드도 기억할 만하다.

 

후안 스테인의 삶을 추적하는 장면과 슈퍼 빌런 카를로스 비더의 뒤를 쫓는 장면이 중첩되면서 몽매한 독자는 다시 한 번 문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책을 읽고 나서 부조리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동력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아니 그렇게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점진적인 의식의 전환을 이루는 것만으로도 귀중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대한 보상이 되지 않을까라고 감히 유추해본다.

 

, 이제 본격적인 시리얼 킬러의 추적에 나설 차례가 되었다. 우선 아옌데 정부 시절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던 전직 경찰 아벨 로메로가 등장한다. 아옌데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은 로메로는 피노체트 시절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고 유럽으로 망명했다. 나고 자란 땅이 아닌 타지에 뿌리를 내린 이들처럼 수년간의 고생은 나라 잃은 망명자들에게는 기본 옵션이었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을 망각시키고, 파괴해 버리는 시간이 흘러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던 로메로에게 동포 한 명이 카를로스 비더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한다. 돈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카를로스 비더 혹은 루이스 타글레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악행 때문에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종적을 감췄다. 자신을 드러낸 악당보다 이렇게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사라진 전설적 살인마를 추적하는 게 소설적 재미를 더 주지 않는가 말이다. 아벨 로메로는 우리의 아르투리토를 찾아와 시인 행세를 하는 범죄자를 찾아 달라는 주문을 한다. 자신만의 문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이비 시인이 이곳저곳에 남긴 자료들을 안겨 주면서. 50만 페세타의 사례비는 아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르투리토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로메로가 카를로스 비더를 찾아내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피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암흑시절에 사라져간 이들에게 그리고 피의 복수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공허한 외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2년 전에 볼라뇨의 책들이 나오는 족족 사서 읽던 시절이 문득 생각났다. 볼라뇨를 다시 만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갑자기 애정하게 된 작가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자 허겁지겁 제대로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켜 버렸다면, 지금은 좀 더 익은 시선으로 그의 저작들을 만나고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로베르토 볼라뇨가 <먼 별>에서 설계한 서사는 완벽하지 않았나 싶다. 독재문학이라는 베이스에 카를로스 비더-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라는 시대의 악당을 배치하고, 한 시대를 명멸해 간 인물들을 관조적인 시선에서 조용하게 수놓는다. 가해자들은 용서와 화해를 말하지만, 피해자들은 복수를 원한다. 이렇게 서로 상충하는 생각들을 두고, 열린 결말이라는 탁월한 선택으로 <먼 별>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스스로를 유럽의 공장들에서 길을 잃은 묘한 시인”으로 자신을 규정한 로베르토 볼라뇨.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뱀다리] 볼라뇨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서사들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들인지 궁금해졌다. 실제 피노체트 군사독재 시절에 있었던 사건 사고들에 대한 볼라뇨식 변형이 아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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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5-13 15: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글을 읽을 때 매번 느끼는 감탄은 인용문을 쓰지 않아도 글을 채우실 수 있는 능력이십니다.
언젠가는 저도 그런 경지에 오르기를 바래봅니다~~
그리고 로베르토 볼라뇨 작가 다시 찜합니다^^

레삭매냐 2022-05-13 20:28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제가 책 읽으면서 인용하겠
노라고 밑줄도 좍좍 긋고
메모도 하지만 막상 리뷰를
쓸 적에는 기냥 느낌으로
파파밧~하는 스탈이라 인용
을 못하곤 하네요 :>

사람들마다 다 스탈이 다르니
깐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
다.

mini74 2022-05-13 17: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볼리뇨 작가분이 매냐님 리뷰를 본다면 감동하지 않을까요 ㅎㅎ 볼라뇨 작가를 매냐님 통해서 전 알게됐어요. 이제 책만 읽으면 됩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2-05-13 20:29   좋아요 2 | URL
ㅋㅋㅋ 하늘에 계신 그 양
반이 미니님의 덧글을 봐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칠레 출신 돌 I, 문학의 이단
아 작가의 매운맛을 속히
보시길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살인 창녀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내가 사는 책들은 어떤 책들인가. 일단 내가 애정하는 작가들의 책은 덮어 놓고 사들인다. 제임스 설터가 그렇고 로맹 가리가 그렇다. 내 마음대로 이달의 작가로 선정한 로베르토 볼라뇨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 물론 사들인 책을 모두 읽는 건 아니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방치되어 있다가, 별의 순간이 오면 맹수처럼 달려들어 읽어제낀다. 8년 전에 산 <살인 창녀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내가 이 책을 안 읽었단 말인가? 명색이 볼라뇨 팬인데. 하여튼 8년만의 완독을 자축하는 바이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이달 들어 다시 볼라뇨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보니 계기가 있었구나. 볼라뇨의 유작 <SF의 유령>에서 촉발되지 않았나 싶다. <칠레의 밤>을 필두로 해서 <살인 창녀들>까지 세 권을 읽었다. 지금은 <먼 별><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동시다발적으로 읽고 있다. 이제사 왠지 슬럼프에 빠졌던 책읽기의 본궤도 오른 느낌이랄까.

 

제목도 거시키한 <살인 창녀들>에는 모두 13개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장편 소설보다 짧게 짧게 끊어치는 단편 리뷰가 더 어렵지 않나 싶다. 한 작품마다 리뷰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래도 강렬한 이미지의 잔상이 남아 있는 단편 위주의 리뷰로 흘러가지 않나 싶다. 보통 출퇴근길 버스에서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데, 학생들이 볼까 두려워 책 제목을 마스킹 테이프로 가렸다. 포장지로 제목을 가린 애덤 써웰의 <나의 포르노그래픽 어페어> 이래 처음이지 싶다.

 

나는 축구에 대하 문외한이지만 서로의 피를 공유하는 축구 선수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부바>가 참 매력적이었다.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화자 아베세도는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외국인 용병이기에 더 그랬을까? 룸메이트이자 동료로 아프리카 출신 부바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흥미를 돋우기 시작한다. 팀의 승리를 위해, 부과 영광을 위해 서로 피를 나누는 세리머니를 통해 아베세도와 부바 그리고 에레라는 기묘한 주술 의식을 경기 전날 치르기 시작한다. 사실 단편의 엔딩은 중요하지 않다. MLB의 광팬인 나는 야구 선수들이 돈과 명성을 얻기 위해 자신들에게 금지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축구나 야구 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가 약물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지 않나 싶다. 가장 강력한 약물 방지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올림픽에서도 줄줄이 도핑 선수가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표제작 <살인 창녀들>에서는 창녀에게 생포되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남자의 이야기다. 정확한 이유는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 시스템에서 착취당하는 계급의 일원이 포식자가 된다는 소설적 상상이 보여주는 가치의 전도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인과성의 부족해서 콘텐츠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우리의 볼라뇨가 그렇게 친절한 작가는 아니니까.

 

모두 69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무도회 수첩>에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거장 파블로 네루다와 보르헤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작가들이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모두까기의 달인 볼라뇨에게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볼라뇨는 선배 작가 네루다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음을 비판한 걸까?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문학의 사회적 기능 그리고 그 문학을 생산해내는 작가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문학의 이단아에게 성역이란 1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볼라뇨가 계속 살아남아 기성 문단 작가가 되었을 때, 그 역시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하늘의 별이 된 지금, 요절 작가에 대한 신랄한 비판보다는 숭배와 추앙이 대세가 된 마당에 그 누가 볼라뇨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개인적으로 <살인 창녀들>의 문제작은 바로 <랄로 쿠라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포르노그래피가 지금은 야동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달고 사회의 이곳저곳을 횡행하게 되었지만, 오래 전에는 손에 넣기가 쉽지 않은 그런 아이템이었다.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돈이 된다는 것이다. 포르노 배우와 사제의 아들로 태어난 랄로 쿠라가 들려주는 그 동네 연대기는 서글픈 현실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과연 예술이란 무언가에 대한 볼라뇨의 생각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멕시코시티에서 보낸 십대 시절, 아마 볼라뇨는 시 창작에 매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저술한 거의 모든 작품에 시 창작과 시 동호회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시 창작이 고상함과 숭고함의 극단이라고 한다면, 그 대척점에는 랄로 쿠라가 추적하는 포르노그래피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속함의 대표선수로 버티고 있지 않나 싶다. 결국 상호 극단을 오가는 예술의 가치나 정의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려나.

 


아버지와 같이 여행 가서 내내 책만 읽는 청년의 이야기도 마음에 들었다. 멀리 아카풀코까지 가서 쾌락을 추구하는 아버지를 혐오하면서, 초현실주의 작품을 읽는 아들의 모습에서 내가 추구하는 다른 의미의 쾌락이 언뜻 보이는가 싶었다. 일상에서의 일탈을 의미하는 여행에서 반드시 맛있는 것을 먹고, 무언가 새롭고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천편일률적인 사고에 대한 강력한 어퍼컷이 아닐 수 없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속세로부터 벗어난다는 점은 좋다. 여행하는 내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 이래서 내가 여행을 떠났지라는 각성의 순간이 온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지난주에 방문했던 고성 왕곡마을의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그리고 개울가에서 노니는 물고기들을 보면서 그런 느낌 말이다.

 

몹시 불친절한 볼라뇨 씨의 책들을 하나하나 독파하면서 그가 서술하는 모든 걸 수용하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의 능력으로서는 그럴 수도 없고, 그걸 의지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순수함과 사악함 사이에서 자유자재로 노니는 이 문학적 공상가를 어찌 애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씹을수록 무언가 오묘한 맛이 느껴지는 칡 같은 작가다.

 

[뱀다리] 일단 산 책들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언젠가는 읽는다. 이 책을 읽는데 무려 8년이 걸렸다. 그러니 책 사는데 아무런 걱정은 하지 마시라. 산 책을 읽지 않는다고 전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책을 사고, 읽어라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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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5-12 12: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참 충격적이네요~!! 첨 들어본 작가인데 저도 한번 빠져보고 싶습니다 ^^

레삭매냐 2022-05-12 13:09   좋아요 2 | URL
일단 제목부터 아주 기냥...

제가 오죽했으면 제목을 마
스킹 테이프로 가렸겠습니까.

볼라뇨는 고저 사랑입네다.

페넬로페 2022-05-12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로베르토 볼라뇨 작가의 소개가 너무 좋은 페이퍼입니다.
엄청 끌리네요.
가차없이 까는것과 친절하지 않다는 것도 맘에 듭니다**

레삭매냐 2022-05-12 13:10   좋아요 1 | URL
제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아, 이 작가로구나 싶었던
그런 작가 중의 하나랍니다.

십여년이 지나 다시 읽는
기분 매우 짜릿합니다.

자기만의 세상에 사시던 분
이라 그런지 -
여튼 대단히 매력적인 작가
입니다.

coolcat329 2022-05-12 12: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제목이!😬
저도 볼라뇨가 참 궁금합니다.
근데 참으로 ‘불친절한‘ 작가인가 보네요.
저도 단편이 장편보다 더 어려운데 이 책은 이해못해도 즐길 수 있는 그런 책인듯합니다. 찜합니다!

레삭매냐 2022-05-12 13:23   좋아요 2 | URL
아무래도 자신만의 문학
세계가 확고한 작가다
보니, 따라 오지 못하는
독자를 봐주지 않는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편 가운데 주인공이
책을 읽어도 무슨 뜻인
지 모르고 읽는다라는
말을 보면서 용기를 얻
게 되었답니다 ㅋㅋ

mini74 2022-05-12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마지막 문단을 가슴에 새길거 같습니다 매냐님 ㅎㅎ단편내용들이 정말 다 독특하네요.~~

레삭매냐 2022-05-12 17:11   좋아요 1 | URL
요즘 일일 일볼라뇨~하고
있습니다.

다시 읽어서 그런지 기시
감에 술술 넘어 갑니다.

상호연관성이 차고 넘치
는 작가라 일단 한 번 시
작하시면 끊으실 수가 없
을 거라고 단언합니다.

moonnight 2022-05-12 17: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군요. 안 읽은 책들이 쌓여 있지만 일단 주문을^^

레삭매냐 2022-05-12 17:12   좋아요 1 | URL
네 그러합니다.

저희 책쟁이들은 이리
서로 보듬고, 책 사재기
를 권장한다지요.

마구 질러어~~~

라로 2022-05-12 18: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아 웰케 웃기세요!!!ㅎㅎㅎ
저 리뷰 읽으면서 막 웃었잖아요.ㅋㅋ
정말 단편 리뷰가 더 어렵죠,, 어느 것 하나 딱 정해서 올리기도 뭣하고
다 올리자니 또 그렇고, 몇 개는 더 그렇고,,,
암튼 8년만에 사신 책을 이제야 읽으셨다니,,, 아오,,, 매냐님은 진정
저와는 급이 비교가 안 되시는 분이셨어요.^^;;
근데 블라뇨,,, 불친절하군요,, 제가 불친절한 작가에게 약한데 잘 따라갈 수 있을지?
일단 이 단편으로 할까 봐요.^^;;
참참 로맹가리 좋아하신다니 넘 반가와요!! 매냐님 취향이라니 솔찌기 약간 놀랍기도 했고요..
근데 저도 좋아하니까 저야말로 의외이긴 하죠??^^;;;

레삭매냐 2022-05-12 19:42   좋아요 0 | URL
아주 적확하신 분석이십네다.
그렇죠, 모든 단편들을 다 리뷰할
수도 없고... 전 기냥 느낌 가는 대
로 적어 보는 것으로 할랍니다.
설렁설렁 -

전 미처 몰랐었는데, 오래 전에
산 책이라 당근 닐근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볼라뇨 읽기 달을
맞아, 이참에 다 읽었습니다.

로맹 가리 아자씨도 딱히 친절하
신 분이 아닌지라 ㅋㅋㅋ
그런 점에서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본격 한중일 세계사 12 - 임오군란과 통킹 위기 본격 한중일 세계사 12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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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노블이나 만화는 대개 도서관을 이용해서 읽는다. 어제 저녁에는 저녁을 먹고 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전부터 굽시니스트 선생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12> 임오군란편을 읽고 싶었는데 도서관에 갈 때마다 연이 닿지 않아 빌리지 못했다. 어제도 분명 도서관에 있다는 말을 듣고 행차했는데 서가에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간 코너에 따로 분류가 되어 있더라.

 

사람 없는 호젓한 공간에서 굽시니스트 작가의 만화를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한다. 재밌다.

 

그냥 기억에 의존해서 리뷰를 하다 보니 연도가 정확하지 않아도 부디 이해해 주시길. 1870년대인가 우즈벡 삼국을 모조리 먹어 치운 노스께들과 청나라는 일리에서 쎄게 붙었다. 아편전쟁과 애로우호 사건으로 이미 서구 열강에게 호구 취급당하던 청나라는 이번에도 노스께들에게 물릴 뻔한 위기를 맞게 된다. 이미 만주에서 광활한 연해주를 노스께들에게 먹힌 바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지리한 협상을 하다가 판이 엎어질 위기도 처하지만, 대충 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다음 무대는 러투전쟁이다. 대략 19세기 역사를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영국과 프랑스가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지만 러시아의 남진 저지라는 점에서는 서로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던 모양이다. 이미 크림전쟁으로 러시아의 남진을 막은 전력이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발칸반도에서 불가리아-세르비아-보스니아 등 예전의 오스만 제국의 속국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노스께들이 슬라브주의와 정교회를 앞세워 적극 개입한다. 아르메니아 일원에서 중동의 빈자라 불리던 오스만 제국은 서구의 일진 노스께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역시 외교는 균형이었고, 어느 한 나라가 실컷 먹는 걸 원하지 않았다. 발칸과 중동에서 노스께들의 영향력 강화를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이 비록 기독교도들을 학살하고 박해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한 그레이트 게임의 속행을 원했다. 물론 국내 여론들은 무슬림 국가 오스만을 지원하는 데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물론이고.

 

그리고 보니 <본격 한중일 세계사> 12번째 권의 전반부 상당 부분이 이런 전세계적 움직임에 할해된 느낌이다. 하긴, 역사라는 게 한 부분으로만 볼 수가 없으니 불가피한 선택이지 싶다.

 

친중-결입-연미라는 미명 아래 시도된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과연 당시 기울어져 가던 조선 조정에 도움이 되었는가는 의문이다. 계유상소로 187311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실각한 다음, 뒷방 늙은이 신세로 가만있지 않고 계속해서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부분도 흥미롭다. 강화도조약으로 결국 강제 개항되고, 서구 열강과의 무역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깨달게 된 조선 조정의 대세가 개국으로 흐르자 이에 대한 격렬한 반동이 시작된다. 그 중심에는 유림 세력들이 있었는데, 서원 혁파로 자신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대원군이야말로 그들이 주창하는 위정척사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한 유림들이 대원군을 중심으로 해서 뭉치기 시작한다. 역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변할 수도 있다는 정치판의 영원한 진실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민씨 척족 세력을 중심으로 한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부패, 매관매직이 국가가 지향해야 하는 공정과 상식을 무너뜨리는 가운데, 외세의 개입이라는 외부 요소까지 더해지면서 조선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이웃 일본처럼 근대화를 이루어야겠다는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정작 나라를 움직이던 기존의 기득권층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조금도 나눌 생각이 없었고 수구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한편, 급진적 모험주의자들로 구성된 개화당의 대표 선수는 김옥균이었다. 김옥균과 오경석 그리고 이동인들은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라를 뒤집어엎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이상은 나름 괜찮았지만 실력은 갖추지 못한 그런 상황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조선과 만주 경영(사실은 침략과 식민화)이라는 막부 말기 이래 일본의 거대 전략을 미처 알지 못한 채 그들의 도움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강제 개항 이래, 방어적 민족주의 운동 성향의 양이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양이운동은 아시아주의와 흥아론이라는 기괴한 방식의 이론으로 흘러갔다. 훗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오직 일본에 의한 패권주의의 원형이 이 때 발아하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18827월에 발생한 임오군란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시발점이 아닐까 싶다. 아버지 대원군을 제끼고 친정을 시작한 고종은 일본군에게 신식 훈련을 받은 정예 400명의 별기군을 애정했던 모양이다. 역시 권력은 무력에서 나온다는 점을 고종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자신들보다 3배나 많은 임금을 받는 불공정한 처우에서부터 시작해서, 혹독한 인플레이션과 재정파탄으로 기존의 훈련도감 출신 병사들에게 13개월 동안이나 임금을 체불하고, 또 배급한 군량미 조작질이 발각되면서 이른바 도봉소 난동사건(1882719)으로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한다.

 

이런 난병들과 자신의 아들인 고종을 폐위하고 다른 임금을 세워 권력을 다시 탈환할 궁리를 하던 대원군이 합세하면서 판이 커진다. 결국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민씨 척족들이 대거 제거되고, 왕비 민씨마저 도주하며(시아버지 대원군은 며느리가 죽었다며 장사까지 치른다, 요즘 막장 드라마 못지 않은 활극이 아닐 수 없다) 전형적이 수구 쿠데타에 성공한다.

 

임오군란 와중에 한성에 거주하던 일본 공사관원들이 일부 살해되는데, 이는 훗날 일본군의 적극적인 개입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대만 출병, 세이난 전쟁 그리고 류큐 복속 등으로 정신이 없던 일본이 전열을 가다듬고 드디어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2권의 마지막 파트는 월남(베트남)의 종주권을 둔 프랑스와 청나라의 갈등에 할애되고 있다. 아시아의 거점으로 코친차이나를 염두에 두고 있던 프랑스는 사이공 델타를 중심으로 해서 하노이 왕국과 계속해서 무력 충돌을 하던 중에 결국 종주국 청나라와 맞짱을 뜨게 된다.

 

아무리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완패했다고 하지만, 세계열강 프랑스의 저력을 청나라는 간과했던 것일까. 육전에서는 비교적 청군이 선전했지만, 이홍장이 막대한 전비를 쏟아 육성한 4개 함대 가운데 복건 함대가 프랑스 해군에게 격멸당하면서 청나라의 전쟁 의지가 완전히 꺾여 버렸다. 결국 중국식 화이 세계관에서 남부를 차지하는 베트남을 프랑스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베트남-프랑스보다는 조선-일본을 상대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이홍장의 판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래 전 수업시간에 배운 중체서용, 동도서기론이 과연 내용적으로 병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 물신의 시대에 어느 누구도 공맹의 도를 논하지 않게 되었다. 공맹의 종주국인 이웃나라 역시 껍질만 공산주의지, 자본주의 뺨치는 그런 수준의 나라가 되지 않았던가.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는 물질만 서구의 것을 따라하게 만들지 않는다. 역사를 통해 중국이 시도했던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의 실패가 그것을 말하지 않는가. 물질을 창조해내는 정신과 의식 그리고 사회적 시스템 전반에 걸친 혁명적 개조가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선행조건이었다. 그걸 이루지 못한 조선은 결국 망국과 외세에 의한 식민지의 길을 걷게 된다. 지금의 상황도 140년 전과 비교해 볼 때,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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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5-11 13: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 대다수 분들 서재에서 느끼지만, 레삭매냐님 마찬가지로 참으로 스펙트럼이 넓으십니다.
이 책 상호대차 도서로 부지런히 옮겨다니는 것을 보았어요. 인기 시리즈더라고요. 도서관 갈 때마다 연이 닿지 않으셨던 이유도 인기도서여서 그럴까요?^^
만화라 하니 조금 부담 내려놓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2-05-11 17:50   좋아요 1 | URL
저는 기냥 잡다하게 책을 읽는
닝겡으로다가 ㅋㅋ

그니깐요. 분명 도서관에는 있
다고 하는데 찾을 수가 없더라
구요. 아마 누군가 끼고 읽고 있
었던 게 아닌가 싶더라구요.

형식은 만화지만, 격변의 시대를
다루고 있고 또 구성도 알차서
입문서로는 그만이지 싶습니다.

mini74 2022-05-11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고 냥이들이 잠시 밉상으로 보이고, 사자들이 째째하고 팬더가 능글능글해 보이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ㅎㅎ 독수리는 확 한 대 치고싶고 ㅎㅎㅎ 굽시니스트님 책 참 재미있어요. 저도 도서관에 찾으러 가봐야겠어요 매냐님 *^^*

레삭매냐 2022-05-11 17:53   좋아요 2 | URL
나라별로 동물들을 배치한
것을 보면서 왠지 아트 슈피겔
만의 <마우스>가 연상됐습니
다. 역시 하늘 아래 독보적 새
로움은 없는 걸까요 -

로스께는 곰돌이로 나오더라구
요. 냥이들은 진짜 밉상 그 자체
였다는 점에 격렬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굽시니스트 작가가 캐
릭을 아주 잘 잡았습니다.

보니까 13편도 나왔던데 저희
도서관에는 수급이 되지 않았더
라구요. 한참을 기다려야겠네요
아숩게도.

coolcat329 2022-05-11 19: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레삭매냐님 이 시리즈 진정한 매니아세요. 참 저도 본받고 싶습니다.😅
이게 만화지만 글도 많고 쉽지도 않더라구요.

레삭매냐 2022-05-11 19:32   좋아요 2 | URL
그니깐요, 만화라고 어제 빌려서
생각하고 날을 넘기지 않고 읽겠
다라고 결심했지만 결국 하루가
넘어 가더라구요.

후반부는 꾸벅꾸벅 졸면서 읽어
서 격이 잘...